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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말자.
http://www.hani.co.kr/section-021106000/2007/04/021106000200704120655084.html
이거 1년에 몇 번 할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나는 하지 않는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깃발에 대고, 느끼한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왼쪽 가슴팍에 손을 올려두는 일 자체가 짜증난다.
뭐야. 동상도 아니고.....
비가 오는 날은 늘 기분이 좋은데, 오늘은 되려 차분해 진다.
금요일인데, 기분이 더 처지는 이유는 뭘까? 그래서 after hour를 듣고 있다.
http://blog.naver.com/soul0229?Redirect=Log&logNo=19136022
요즘 내 자신을 객관하기가 어렵다. 특히 한 몇 일 감기몸살 이후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자신을 객관한다는 것은 적어도 자신이 균형점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한다. 그리고 그럴 때 즈음에는 경고음을 보내는 등의 약간은 긴장상태를 유지하게끔 한다.
또한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전략이나 전술보다는 본질에 가까운 것을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또한 논리와 직관을 병행하면서 사물의 내면을 나의 통찰로 꿰뚫어 보게끔 한다. 그러한 일들은 공부를 통해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부는 늘 덜 달궈지고 연마된 상태의 무기이며, 그렇다고 해서 최종적인 완성된 무기가 될 때까지 숨기고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냥 들고 나와 여기저기 칼질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선 미흡하나마 만든 무기를 바윗돌에라도 힘꼿 내리쳐 봐야 할 것이다. 현실이라는 바윗돌에 나의 미흡한 무기가 깨어지면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시작해야 한다.
누구든지 근본적인 질문을 할 때, "왜"라는 것부터 시작한다.
왜 늦었니, 왜 담배피니, 왜 가니...이러한 단발적인 근본을 묻는 질문에서
왜 사니, 왜 그런 생각을 하니, 왜 그렇게 하려고 하니, 왜 그런 결정을 했니...등등의 질문은 조금 무게가 실리는 질문들이다.
그런데 그런 질문은 많이 받아본 사람들이 숙련된 답을 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숙련된 대답이 안통하는 경우가 바로 아이들이 "왜"라는 질문을 쏟아낸 경우이다.
"아저씨는 왜 담배를 피세요?"라는 질문에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내놓은 대답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저씨, 끊을려고 노력 중이야"
이것도 사실 거짓말일 수 있다.
아이들의 질문은 본질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라는 본질 자체도 무섭다.
조심해야 할 것과 아이들이 납득할 만한 대답을 가진 정도라면,
어떤 누구에게 어떠한 대답도 설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아이들 자체가 무섭다.
"철도공사 측은 매일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맞이방을 폐쇄한다. "
간단하게 몇 줄만 메모,
오늘 아침에 들었던 뉴스의 꼭지다. 찬반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책마련이 필수적이다. 그 대책에는 몇 가지 고려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왜 부산역, 혹은 역사에 노숙자들이 몰리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 무엇보다 역사는 입지적으로 노숙자들에게 여러가지로 유인요소가 많다. 일단 그 동선에 있어 먹고 자고 씻는 기본적인 시스템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음주, 흡연 따위에 소요되는 비용도 해결할 수 있다. 일시적으로 역사에 머무르고 빈번하게 바뀌는 승객들에게 몇 푼을 요구하는 일이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노숙자간의 내부관계에 있어서도 일정한 규율이 있으나 무료한 시간을 동료들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활능력이 저조한 상황에서는 역사를 찾는 편이 쉼터를 찾는 것보다 더 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숙자 쉼터는 유인요소가 역사보다 낮은 이유가 뭘까.
노숙자 쉼터가 문제되는 것은 인권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노숙자 쉼터에서 지난 11월에 7명이 화재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쉼터의 안전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이와 관련된 조치는 필수적이다.
또한 쉼터의 억압적인 규율로 인해 도리어 쉼터를 나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근로의욕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노숙자로 생활했던 잔때를 씻어낼 수 있는 재활교육이 필요하다. 무작정 노동을 강요하면 그들은 쉼터를 떠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쉼터는 자활공동체의 형식을 빌려 그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되, 사회복귀가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이라크 자이툰부대의 경우 신형 방탄조끼의 보급률이 100%인 반면 아프간 다산·동의부대는 50%다. "
동아일보 기사 중 한 구절. 국익이 부족해서 나머지 50%의 방탄조끼를 지급하지 못했다면 적어도 방탄조끼 없는 50%의 병력을 파병하지 말았어야 했다.
"도착해 보니 현지인들과의 갈등으로 현지인들이 ‘한국인들이 카불에 오면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
서울신문의 한 구절. 이라크가 안정을 되찾았다는 말은 이미 개소리라는 걸 몰랐던 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언론과 정부만 몰랐다.
그리고,
"이 부대에서 근무했던 한 전역병은 미군의 활주로 닦기와 미군창고 짓기 등 대민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노콧뉴스의 한 구절.
평화유지와 이라크 재건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파병한 군인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옳다. 국익이라고 해서 봐 줄 여지도 없다. 이미 정부가 국익의 실체로 말한 중동석유자원 확보라는 것은 이미 이라크 전후 처리과정에서, 그리고 아직도 폭탄테러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한국기업들이 무슨 배짱으로 이라크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정부의 논리는 유치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국가가 국민의 방탄조끼가 되지 못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한가. 더 이상 국익이라는 논리 속에 포장된 제국에 대한 머리조아리기는 그만 두었으면 한다. 한 젊은 친구의 희생을 값싸게 훈장으로 떼우는 대한민국이 부끄럽다.
속아줄만큼 속았고, 더 이상 속아주기에는 스스로가 참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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