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상황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뒤바뀐 기분입니다. 특히나 이정희 대표에 대한 보수언론의 막가파식 공격을 보면 환장할 지경입니다. 이석기, 김재연 비례후보 당선자들에 대한 비난도 날로 수위를 더 해 갑니다. 이대로 이 동지들이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보수세력들은 벼르고 벼르다가, 이 때구나 하며 달려들고 있습니다. 저들이 바라는 것은 세 동지들의 정치적 살인이거나, 무력화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이들의 공격이 이정희, 이석기, 김재연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다음은 이들과 가까운 동지들이 될 것입니다. 또 그 다음의 동지들, 또 그 다음의 동지들. 그리고 마지막엔 아무도 남지 않겠지요. 이것은 피로 얻은 국내외 진보운동의 오랜 경험입니다.
위기상황입니다. 세 동지들에 대한 보수세력의 비난과 본질은 다르지만, 당내 동지들도 세 동지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저들의 비난과 우리의 비판이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상황은 우려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당 내부적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인데, 외부의 교활한 공작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문제는 부풀려지고, 복잡하게 꼬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당 내부에만 눈을 둘 것이 아니라, 당을 둘러싼 전반 정세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공권력에 대한 무경각한 모습들도 도처에서 보입니다. 보수언론이 뚫어낸 길을 따라 검찰이 들어오는 것은 이미 정해진 공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를 자초하는 의견들이 큰 문제의식 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강도가 칼을 들고 담이라도 넘을 기세인데, 대문을 활짝 열어준다면 그 집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총체적 부정선거’라는 표현이 등장하면서부터 당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수십 년을 함께한 동지들을 둘러봅시다. 이 표현의 적용이 가능한 동지들입니까. 지난 4.11 총선에서 자행된 보수세력들의 불법, 부정행위들에도 쉽게 내놓지 못하던 규정을 어찌 이리 쉽게 사용할 수 있습니까.
진보정당으로서의 사명과 처지를 잊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보수정당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당입니다. 보수정당과 사활을 걸고 싸우고 있는 진보정당입니다. 운동적 양심으로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정당입니다. 보수세력의 공격보다, 진보정당의 사명과 처지를 망각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진보식으로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자는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국민들을 상대로 문제를 부풀리고 선동한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총체적 부정선거, 사실이라면 당의 존망이 위태로울 정도의 사안입니다. 그런데 당의 동지들과 머리를 맞대고 문제해결의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언론에 흘리고 문제해결을 복잡하게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론플레이를 주도한 사람들의 정치적 의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고 응당한 책임을 어느 정당보다도 무겁게 지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정희 대표가 전국운영위에서 한 모두발언에도 이러한 입장이 먼저였습니다. 대표단 사퇴, 비례후보 사퇴라는 권고안도 결코 무거운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 다시 ‘부실’한 사과와 책임, 혁신안을 국민들에게 내놓아서는 안 되기도 합니다. 동지들의 진심과는 별개로 당면한 국면을 빨리 벗어나려고 하는 면피용 대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보정당은 달라야 합니다. 분명한 자기 평가와 당 전체의 책임적인 혁신안을 국민들께 내놓아야 합니다.
이미 사퇴, 조건부 사퇴를 선언한 비례후보자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전국운영위의 사퇴 권고를 거부하는 비례후보자들도 있습니다. 통합진보당의 비례후보 경선은 이미 국민들에게 ‘부정선거’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 선택일까요.
우리의 진심과는 달리, 비례후보 일괄 사퇴가 국민들에게 ‘부정선거’ 의혹을 확신으로 굳히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요. 선거관리 책임자들이나, 비례후보자들의 변론권도 중요하지만 통합진보당의 변론권도 보장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정희 대표는 여론에 동조하는 것이 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부정선거’라는 규정이 너무 많은 동지들의 명예를 부당하게 실추시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기에 진상조사보고서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부정선거’라는 규정은 몇몇 동지들의 명예만이 아니라 통합진보당에게 지울 수 없는 불명예도 남기게 됩니다. 진보정당의 역사에 ‘부정선거’라는 낙인을 이렇게 쉽게 남길 수는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만큼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쉽지는 않더라도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원인을 찾아서 반드시 통합진보당을 올바로 세워내겠습니다.’라고 해야 진보식, 우리식이지 않을까요.
판도라의 상자
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한 검증이 국민들에게 당장 큰 영향을 미치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미 쏟아진 물이기도 합니다. 작은 진실일 수도 있고, 지금보다 큰 진실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작든 크든 진상조사결과에 부족점이 있다면, 이젠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이 당 자체로는 당면한 분란을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어느 쪽의 의혹이든, 이것을 덮고서는 당의 단결은 요원해 집니다. 누명을 쓴 동지들이 신심을 다 해 당 사업을 할 수도 없고, ‘부정선거’ 규정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동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티끌만한 오류도 없는 진상조사여야 합니다.
발표된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미 많은 의문점을 낳고 있습니다. 부정선거의 해당자나 관련자들로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 당대표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언론발표. 보고서의 기본양식도 미비, 부정선거 관련 동지들에 대한 직접조사 전무, 제기된 부정선거 대상 편파선정, 데이터 조작 직접증거 전무...
진상조사위원장은 물론이고 전국운영위에 참가한 대다수의 인사들도 진상조사보고서의 부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의심과 의혹은 있다며 ‘총체적 선거부정’으로 강변한 전국운영위원들. 복잡합니다. 진상조사보고서가 부실할 수도 있고, 부정이 개입됐을 가능성도 매우 큰 정황입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진실을 꼼꼼히 파헤쳐야 합니다. 보고서가 부정하다면 정치적 의도를 가진 주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다양한 이유이겠지만 동조한 사람들도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사과하고 사퇴하는 것으로는 민심이 바뀌지 않습니다. 진보정당 본연의 몫인 투쟁을 잘해야 민심은 돌아옵니다. 그래야 부족함이 있더라도 진보정당의 필요성이 다시금 국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투쟁을 잘 하자면 결국은 통합진보당, 우리 당의 주체들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주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판도라의 상자는 반드시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가 이 상자 안에 있을 것입니다.
이정희 대표가 진상조사위원회에 공청회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원들은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진상조사보고서의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당원 전체의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당원 모두가 진상조사의 주체로 나서야 합니다.
당내에 대결적인 전선이 생기고 긴장한 상황이 조성되기는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동지입니다. 형식적인 수사가 아닙니다. 개인의 감정에 따라 우리가 어깨 겯고 걸어온 역사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당내에 정파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파 간 관계의 기본은 대결이 아닙니다. 대의를 위한 단결이 기본입니다. 장단이 있을 수는 있지만 모두가 자주민주통일의 길에서 피땀을 흘리며 고생한 동지들입니다.
지금의 대결국면이 비정상적입니다. 여기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당 외부세력의 개입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당내 야심가들의 분열조장 행위도 문제입니다. 그리고 기회주의자들의 편승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정당이라면 의례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진보정당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현상들입니다.
진보정당이 커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넘어야 될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진보정당의 발전은 필연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적이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은 궁지에 몰려 목숨을 걸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긴장을 더 해야 합니다. 투쟁을 더 강하게 해야 합니다. 순간 기본을 놓치고, 순간 방심한 후과가 큽니다.
위기 상황은 맞습니다. 당의 명운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 속에서 희망을 봅니다. 국민들이 가진 진보적 지향과 우리에게 거는 기대는 지금도 계속 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지혜를 모은다면 충분히 헤쳐갈 수 있습니다.
2012.5.8.윤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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