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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6/04
    그날이 오면
    공돌
  2. 2009/05/05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공돌
  3. 2009/05/05
    참터 권두언 몇 개_3
    공돌
  4. 2009/05/05
    참터 권두언 몇 개_2
    공돌
  5. 2009/05/05
    참터 권두언 몇 개_1
    공돌
  6. 2008/02/02
    봉제사와 의사
    공돌
  7. 2008/02/02
    착한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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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12/04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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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12/04
    가을옷 한 벌
    공돌
  10. 2007/12/04
    새로운 옷의 기원
    공돌

그날이 오면

참신나는 소식을 열면서

그 날이 오면

 

충격적이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멍해졌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이내 멍해졌습니다.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정신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몸이 한 발 늦게 도착했습니다. 경찰이 있었습니다. 소리치기도 어렵습니다.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자칫 쫓겨날 수도 쫒길 수도 있습니다. 꽉 막힌 그곳을 보니 호흡이 가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뭉치지도 못합니다. 모일 수도 없습니다. 모인 것처럼은 보입니다. 사실 그들이 몰아둔 것입니다. 하지만 항의할 수도 없습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피눈물도 흘렸습니다. 그 죽음뿐만 아니라 다른 죽음을 배웅한 저 잔악한 이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마음도 몰라준 채 미사일이 창공을 나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슬픔을,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빗겨갑니다. 푸른 기와로 향하지 않아 애석할 따름입니다.


하루가, 또 하루가 지납니다. 언젠가는 이 고통이, 이 분노가 저절로 사그라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가, 또 하루가 길어집니다. 목에서는 피냄새가 올라오고 코끝은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찡합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있는 두 눈알은 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몸은 지치고, 또 지칩니다. 온 몸에 모든 구멍을 봉해 놓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양보할 곳도, 뒤로 물러날 곳도 없습니다.

 

가진 자들은 춤을 춥니다. 더 가질 수 있어 춤을 춥니다. 밟을 수 있는 것들이 있어 더욱 푹신하게 춤을 춥니다. 약한 자들도 춤을 춥니다. 없는 자들도 춤을 춥니다. 미천하고 박해받는 이들도 춤을 춥니다. 우리에게 음극과 양극의 전류를 흘려 미치게, 아니 춤추게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미친 춤을 추고 동공이 풀리면 우리들은 쓰러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살아낼 것입니다. 자유를, 고귀한 자유를 간직해야 하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경제와 맞바꿀 수 없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노립니다. 그래서 육신을 앗아 갑니다. 그리고 정신을 파내어 갑니다.


늘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잡혀가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현혹되지도 마십시오. 하지만 기억합시다. 잊지 맙시다. 어제와 오늘을. 다가올 내일은 담담하게 준비합시다. 늘 준비합시다. 그리고 가까운 슈퍼로 갑시다. 촛불과 종이컵을 사둡시다. 하지만 너무 서둘러 종이컵에 구멍을 뚫지 마십시오. 그들의 가슴을 뚫어 버릴 때까지는 우리의 분노를 조금 더 모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뱀발: 원고 보내면서, 삼성, 이것들 조져야 되는데, 생각만 하고 있고. 일단 까먹지 말자. 삼성. 그리고 대법원 법정의 맨 오른쪽에 살포시 두손 모으고 앉아 있던 신영철도 옵션으로 줘 패야될 듯. 원고가 내용은 없으나, 기동성은 빨라지면서 찌라시에서 삐라로 한층 무게감을 덜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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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참신나는 소식을 열면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나오기 전입니다. 조영래 변호사(1947-1990)께서 이 평전을 한 걸음에 한 글자, 한 획 한 획을 이어붙여 한 문장을 완성하고서도 ‘전태일’이라는 이름 석자를 쓰지 못했습니다. 1983년, 이 평전은『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명찰을 달고 지겹도록 모진 독재의 검열을 피해 사람을 건너 사람으로 전해졌습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몽골에서 이 평전이, 아니 전태일이 새롭게 부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전태일이 아닌 세계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다시 쓰여지고 다시 기억되는 ‘전태일’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 잔인하고 무참한 5월, 38년 전 그 때와 다름없이 노동자와 시민들은 곤봉에 방패에 다시 찍히고 매맞아가며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2009년 우리에게 저항은 쉽게 허락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88만원 세대에게 고하는 전도서에서 우석훈 박사가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는 메시지를 일갈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청년들은 짱돌을 들더라도 토플책은 가방에 넣고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왜일까요? 집회가 끝나고 시위가 정리되면 다시 도서관에 돌아가 공부를 해야 해서 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에 상응하는 대가는 너무 큰 나머지 행여나 경찰서에 붙들려가도 토플책이라도 내놓아야 ‘훈방’을 기대할 수 밖에 없는 폭압의 현실 때문입니다.

작년, 뜨거웠던 우리는 늦봄에 촛불을 들고 침착하고 냉정하게 이 정권에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쪼잖은 컨테이너 박스를 몇 개를 쌓아두었고, 우두머리인 대통령은 거리로 나오기는 커녕 청와대 뒷산에 올라 우리들을 관람했었지요. 그 결과 거짓말은 도를 넘어서고 시민들의 뒤통수는 얼얼하다 못해 전경의 높은 구두굽에 밟혀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와 생명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의 이름을 잃지 않기 위해 서로를 호명하며 획일화된 모든 것과 획일화되도록 강요하는 모든 것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낮은 음성으로, 엷은 공명으로는 더 이상 후퇴하고 있는 이 세상을 진동시킬 수 없습니다. 전태일이 ‘어느 청년 노동자’라는 비특정 인칭대명사로 가려져야 하는 현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되기 위해서는 광우병의 위험을 알렸다는 이유로, 용산에서 철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거리와 광장으로 나왔다는 이유로 잡혀가고 곤봉으로 난도질 당하는 이 시대를 고발해야 합니다. 녹색성장 부르짖으며, 선진화를 이유로 모든 것을 사유화하는 이들은 고작해야 나무 깎아 곤봉을 만들고, 동네 약수까지 팔아먹을 파렴치한과 다름없습니다. 이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작은 소원이 하나 있다면 촛불을 들었다는 이유로 ‘난동꾼’에서 ‘데모꾼’으로 다음 세대에 기억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머지 않아 전태일이 산화한 이후 4천 8백만개의 분신사리가 하나의 거대한 정신으로 부활하리라 믿습니다. 더 이상 우리를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작년 늦봄, 올해 늦봄, 그리고 내년 늦봄 아니 매년 매달, 촛불이 치솟고 우리 마음이 불바다가 될 때쯤, 우리는 서로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며 거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리라, 저는 그렇게 믿고 오늘을 버티고 이겨내고 있습니다. 올 5월, 새삼스럽게 제 이름을 불러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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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터 권두언 몇 개_3

참신나는 소식을 열면서

 

여리박빙(如履薄氷)

 

 

여리박빙(如履薄氷).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써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이 위태롭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로 이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미 권두언에서 여러 차례, 현 경제사회적 환경의 절망을 표현한지라 새삼스럽게 얘기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의 발밑을 한 번쯤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들어 연예인 자살, 묻지마 살인 사건 등 머리 속을 하얗게 질리게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현실이 우리를 괴롭히게 되었을까요. 연예인 자살 사건과 최근 묻지마 살인 사건은 동전의 이면과 같습니다. 두 가지 사건 모두,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용납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저항했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더구나 단순히 이러한 일들이 악성 댓글 때문이나 개인의 사회에 대한 분노심 때문에 발생한 일들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을 쉬며, 추락하는 주가와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환율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뛰는 물가에 시장보러가는 일도 조심스러운 마당에 공과금 고지서는 우편함에 꽂혀있고,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멀리서 찾아든 초겨울 삭풍에 보일러만 원망하고 있습니다. 내 일자리 또한 낙엽처럼 가지 끝을 겨우 부여잡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없는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어죽이며 끝내 스스로도 목숨을 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러 파탄에 이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지금 어려운 경제난에 분노심만 터트릴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분노는 사회적 에너지가 아니라 사회적․정신적 공해일 뿐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진옥 박사께서 특별기고문을 보내셨는데, 최근 인기 탤런트였던 최진실씨의 죽음에 대해 짧지만 깊은 생각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공방 보다는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할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번 달 7일에는 ‘참 신나는 일터’가 문을 열었습니다. 꿈꿔왔던 공동의 작업장에서 사회적 기업으로 거듭나는 징검다리로써 참터 회원과 수다공방의 교육생 및 졸업생들에게 참 신나는 일터가 자그마한 희망과 열정이 시작될 수 있다는 점에 다 같이 큰 박수를 보냅시다.

수다공방의 패션쇼가 근 한 달에 남짓 남았습니다. 패션쇼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수다공방의 관계자분들과 교육생 여러분들에게 큰 소리로 외쳐봅니다. “화이팅!”



참신나는 소식을 열면서

 

호시우행

 

 

어김없는 새해입니다. 내년에도 후내년에도 새해는 찾아오겠지요. 그러나 올해는 새해 정초부터 어두운 사건들이 우리를 쓸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6명의 인명을 앗아간 ‘용산참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사실 용산참사는 경찰에 의해 자행된 살인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만행’에 가깝습니다. 테러진압에 투입되는 경찰특공대를 시민들의 진압에 투입하게 한 것은 환각상태가 아니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겨울철, 철거는 인권의 차원에서 당연히 보류해야할 일입니다. 이것은 상식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으로 합의된 것이기도 합니다. UN 사회권규약위원회에서는 퇴거를 당하는 사람들이 원치 않을 경우 겨울철과 같은 악천후에는 퇴거를 수행해선 안된다고 못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인권을 지키는커녕 인권의 ‘인(人)’자를 무시하고 저네들의 ‘법’만 우선시킴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올 한해부터 이런 우울한 사건이 한해를 뒤덮게 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움이 급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이 정부를 탓할 것만이 아니라 더욱더 호랑이와 같은 눈으로 이 사태와 이 정부를 직시해야 합니다. 이미 퇴행되고 있는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양손에 촛불을 들고 느린 소의 걸음으로 멈춘 걸음을 다시 걸어가야 합니다.

이번 소식지에서는 용산참사의 유가족 중 이현선씨가 추모제에서 발언한 내용의 전문을 실었습니다. 함께 고통을 같이 하면서 추모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새해를 시작한터라 이번 소식지 편집팀은 수다공방과 동대문에 대한 고민을 지면에 담아냈습니다. 다소 길더라고 봉제시장의 현실과 전망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수다공방에서 기술교육 강사를 맡고 계시는 한상민 강사님께서 귀한 기고문을 보내주셨습니다. 현장에서 보내온 서신인지라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특히 ‘내가 내 일을 부끄러워하면 봉제기술은 영원히 부끄러운 직업일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씀이 메아리가 되어 귓전을 때립니다.

얼마 전 2009 수다공방 교육에 대한 교육설명회와 교육생 선발 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앞으로 교육생들의 힘찬 도약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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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터 권두언 몇 개_2

참신나는 소식을 열면서

 

더위를 피하는 방법

 

 

휴가철입니다. 멀리, 마음이라도 떠나고 싶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현재를 벗어나고픈 이유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어진 삶에 쉬이 싫증을 내거나, 따분해하거나, 답답해합니다. 그리고 여유 있는 삶을 동경합니다. 짧게나마 ‘여행’은 그런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모두들 떠나는 이 여름, 사실 자기 스스로 여유를 찾아서 떠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들이 가니깐, 작년에도 갔으니깐, 누군가 가자고 하니깐 이런 등등의 이유는 결국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마저도 누군가에게, 어떤 것에 의존하게끔 합니다.

몇 해 전부터 더운 여름 수다공방의 교육생들을 지켜봤습니다. 더운데도 불구하고 양산으로 햇빛을 가리고,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4층 수다공방까지 올라와 다만 1시간이라도 더 연습하려고 열정을 보이는 아줌마들이 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여름휴가 가지 않냐고.

“여름휴가요? 그런 걸 다챙기는 사람이 어딨어요? 여기도 시원하잖아요? 내가 못하는 부분 연습도 하고. 물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깐. 여기 있는 게 피서지 다른 게 피서예요?”

실없이 던진 한 마디에 그 교육생 아줌마는 똑똑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사실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할 만큼. 제가 분명하게 느낀 점은 더위를 피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추위도 마찬가지죠. 방법은 간단합니다. 바로 더위를 ‘잊는 일’을 찾는 것이지요. 더위를 찾기 위해 그늘을 찾아 땀을 뻘뻘 흘리는 일만큼 우둔한 일도 없습니다. 그 더위에 자가용을 몰고 막히는 도로 위에서 에어콘을 켜고 있어도 더울 수밖에 없습니다. 피서지에서 몇 시간을 편케 보내려는 그 과정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여름, 수다공방에서 보내는 아줌마들의 피서법이 더욱 더 빛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2008년 상반기 수다공방 훈련프로그램 보고서』를 실었습니다. 수다공방의 발전 방향에 대한 많은 의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2008년 상반기 참터 정기이사회 회의소식을 첨부하였습니다. 아울러 이진옥 박사님이 보내주신 글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가내노동에 대한 법적 보호의 취약점에 대해 조명하고 있는데요. 연재되고 있는 글들을 유심하게 읽어볼 때, 우리의 문제를 ‘세계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이번호 인터뷰는 쉽니다. 이번 권두언의 말을 책임이라고 지려는 듯, 인터뷰를 책임지고 있는 편집장의 부덕함이 오른쪽 인대에까지 미쳐, 현재는 깁스 상태인지라 인터뷰 강행이 무리였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완쾌 되는대로 인터뷰는 새로이 진행될 것입니다. 여름, 마냥 ‘덥다, 덥다’하지 마시고, 사계절의 흐름을 넓고 길게 생각하시어 ‘시원해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는 여유를 가져봄직도 필요할 듯합니다.



참신나는 소식을 열면서

 

물가에 대하여

 

 

물가가 치솟고 있습니다. 경제학의 문외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작금의 상황이 심각하고,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물가를 잡지 못하는 이유가 어떤 것인지까지 알 필요는 없지만, 오르는 물가에 대한 정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생필품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목록까지 뽑아놓고선, 관리대상이 된 생필품의 가격이 오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가격이 한 번 오르면 내려가질 않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이 오르는 물가에 대해 임금인상을 요구하면 법과 원칙을 운운하며, 기업이 잘 되야 노동자도 잘 된다는 뻔한 논리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분명 기업은 잘되고 있습니다. 법인세도, 각종 규제들도 기업들이 좋아라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지만, 정작 우리 서민들과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져가고 있으니 이 정부가 살리겠다고 한 경제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한탄이 동대문 시장과 창신동 골목을 올라가다보면 더욱 더 현실감있게 느껴집니다. 밥 한끼를 시켜먹어도 물가에 대한 푸념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정작 서민들끼리 사정을 뻔히 아는지라 밥 한끼 가격을 몇 백원 올리는데도 고민이 깊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말로만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지만, 서민들이 느끼는 고충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가 봅니다. 현 정부가 잘하기를 바랍니다. 서민들과 노동자들이 현 정부에 대고 비판적 자세를 취하는 이유를 잘 생각했으면 합니다. 서민들이 시장에서, 거리에서, 폭염과 추위를 이겨내면서 일구는 살아있는 경제에 정부의 정책이 영양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주)참 신나는 일터가 본격적으로 가동됨에 따라 사회적 기업에 관한 특별기고를 담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기업의 사명과 목적, 그리고 사회적 효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이번 2008년 8월호부터 연재됩니다. 인도에서 열렸던 “사회적 기업 벤처 컨퍼런스”에 참관했던 후기도 실릴 예정입니다. 다만, 인터뷰를 이 주제가 연재되는 동안에는 쉬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번 호에서 이진옥 박사님께서는 한미 FTA와 관련하여 미국과 멕시코가 체결한 FTA 사례를 통해 한미 FTA가 과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회원님들의 숙독을 권해드립니다.

올 상반기까지 많은 분들께서 도움을 주셔서 ‘참 신나는 소식’이 별 탈이 잘 발간되었습니다. 보다 좋은 품질과 내용으로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회원들님의 많은 관심과 독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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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터 권두언 몇 개_1

참신나는 소식을 열면서

 

촛불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말합니다. 100원을 주면서 이 방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냐고. 모두들 투덜거렸지만, 한 아이만 묵묵히 시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예정한 시간이 다 되어 아버지가 계신 방에 모두가 모였지요. 첫째 아들은 볏단을 사왔고, 둘째 아이는 신문을, 셋째 아이는 촛불을 사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방을 제대로 채운 것은 셋째라고 하면서, 셋째를 본(本)으로 삼아라고 합니다.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 문제로 촛불이 모여 불기둥을 이루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소녀들이 미국산 쇠고기는 먹기 싫다며 대통령께서 이것을 막아달라고 애원을 하였지요. 그러나 두 귀를 틀어막은 대통령은 전경들의 전투화를 빌려 이들을 발로 차고 짓밟고 있습니다. 성난 시민들은 촛불 대신 두 주먹을 움켜쥐고, 생명에 대한 고귀한 투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대통령은 배후가 누구인지, 몹시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그 배후. 바로 접니다. 저에게 모든 문제를 묻는 편이 가장 빠를 것입니다. 사실 저에게 묻는 것이 바로 그들에게 묻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만.

촛불을 들고 세상을 밝히는 이들을 본(本)으로 섬기지 않고 마구잡이로 연행하고 폭행하면 할수록 시민들은 대통령을 국가의 원수(元首)가 아닌 우리 사회의 ‘원수(怨讐)’로 생각할 것입니다. 도대체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크리스챤 출신의 대통령은 성경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호, 인터뷰에서는 장효웅 선생을 인터뷰 했습니다. 장효웅 선생은 수다공방에서 강사로 활동하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사물을 보는 촘촘한 시각이 수다공방과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집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박성환 팀장이 인터뷰의 상당 부분을 정리해주어 비교적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숙독을 부탁드립니다.

수다공방 공모전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많은 분들의 참여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주변에 잘 알고 계시는 분들의 공모전 참가를 독려바랍니다. 또한 우리 공모전 소개와 홍보를 부탁드립니다.

6월, 뜨거운 한 달이 될 것 같습니다. 수다공방생들 뿐만 아니라 참터 회원님들의 건강과 그러한 건강을 지키는 시민행동에 많은 지지와 격려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참신나는 소식을 열면서

 

여름

 

 

장마가 온 건지, 간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날씨가 궂긴 듯하면서도 이내 햇살을 머금고 대지의 수분을 빨아올립니다. 그러나 점점 여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요. 여름이 항상 우리에게 더위만 주는 것은 아닙니다. 덥다는 것과 시원하다는 것은 항상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더운 만큼 시원함을 찾습니다. 그 때의 시원함은 초겨울 느끼는 쌀쌀함과는 차이가 큽니다. 여름의 시원함은 어느 계절에도 견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조금 덥다고 이내 에어컨을 틀고 집안에 틀어박혀, 냉방병에 걸려 콜록거리는 ‘현대적 야만병’을 조심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뭐니, 뭐니해도 건강이 최고니깐요.

저번 인터뷰에 대해서 반론이 있었습니다. 독자분께서 봉제공장 사장들에게 대한 비판이 온당치 않다는 것이었는데,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1970년대 이후 공돌이․공순이 공장문화가 여지껏 변화하지 못한 이유는 공장사장들의 마인드가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공장사장들이 예전과 같이 늦게까지 일을 시키는 경우는 없으며, 오히려 공장사장들이 고용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공장운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봉제업종에 종사하는 것을 기피하기 때문에 일할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 대우를 하고 있다는 요지였습니다.

먼저 장효웅 선생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들이 맥락상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지 못한 편집장의 책임이 크다는 점에 사과를 드립니다. 인터뷰가 워낙 길다보니, 중간에 세세한 설명을 짤라먹는 바람에 내용상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인터뷰의 일부가 다소 자극적이어서 충분히 감정적인 분란을 자극할 수 있었다는 점은 편집장으로서, 앞으로 충분히 고려하여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다만 수다공방에 대한 불만이 늘 발전을 위한 제언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서로가 항상 배려하는 태도를 가지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늘 아낌없는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제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답답하다, 이건 고쳐야겠다, 그런 부분이 있다면 과감히 전화를 주십시오. 그리고 술 한잔 하시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만들어보지요. 날씨 때문에 더운 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 때문에 더워지는 일만은 최대한 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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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사와 의사

 

찢어진 상처를 꿰매거나 혈관 등을 서로 잇는 일을 천직으로 하는 의사들이 있습니다. 외과의사들이 이런 봉합 혹은 문합하는 일을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바느질’ 기술입니다. 예전에 ‘성공시대’라는 TV프로그램에서 국내에서 최초로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한 ‘송명근 박사’가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좀 더 빠른 수술을 위해 왼손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담요에다 왼손으로 거의 수를 놓다시피 연습을 합니다. 그것이 결국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로 발전하는 거름이 되었지요.

이러한 의사들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봉제사입니다. 똑같이 바느질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느질만으로 의사가 될 수 없듯이, 봉제사들도 봉제로만 진정한 봉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의사가 해부학을 공부하듯, 봉제사들도 패턴을 알아야 제대로 된 옷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바느질을 하고, 봉제사들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들이 입는 옷을 만듭니다.

위대한 기술은 그 자체만 보면 보잘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보잘것 없다는 기술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아서 걷게 하고, 옷 한 벌로 품위가 나게 만듭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고, 봉제사는 살아있는 사람을 빛나게 합니다. 봉제가 저임노동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깨기 위해 수다공방은 한  발짝 더 도약하려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옷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잇는 정성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2008년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2008년 1월호에서는 2007년까지 오도엽 선생님께서 맡아 주셨던 우리 봉제사들의 이야기들을 이어서 편집장이 대신하였습니다. 수다공방 소식과 참 신나는 소식을 아울러 담았습니다. 올해부터는 회원님들의 글과 소식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회원님들의 글과 소식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미싱으로 다져진 손으로 보낸 글들도 대환영, 대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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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이야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많은 시련이 닥치게 됩니다. 거기에 그것을 잘 극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질펀하게 말하면 독한 국물이 줄줄 흐르는 놈과 물러 터져 질질 흐르는 놈이 있다는 말이죠. 더군다나 힘들 때 잔머리 굴려 요리조리 피하는 사람과 그대로 정면으로 ‘꽝’하고 현실과 맞붙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금만 약아도 두 다리 정도야 뻗고 살 수 있습니다. 근데 그걸 못해서 힘들게 사는 분들, 제 주변에 몇 명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래도 제 소신 하나 붙들어 쥐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번 호는 그 분들 중 한 분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제 친구 이야깁니다.

 

이 친구, 왕고집으로 세계적인 사람입니다. 일단 제 스스로 지켜야 겠다고 하는 건, 목숨 걸고 지킵니다. 목숨, 참고로 저는 목숨 여러 번 끊겼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헌데 그 친구 목숨, 여지껏 단 하나였습니다. 대단한 뚝심의 소유자라는 말이죠.

 

횡단보도 파란불은 기본,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쓰레기통 없으면 집에까지 들고 갑니다. 요건 약과죠. 쓰레기를 아예 줍습니다. 육교에 소쿠리통에 돈 넣는 것도 취미입니다. 젓가락, 복주머니, 복조리 파는 외국 젊은 이들, 무슨 청각장애인 기부함을 들고 있는 할머니, 지하철이나 서울역에서 차비달라는 사람. 다 줍니다.
술 취한 사람, 길거리에 누워 있으면 집에까지 보내줍니다.

 

지하도에 할머니, 봇짐을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신문지 뭉치를 들고 갑니다. 당연히 그냥 갈 수 없지요. 일단 그 친구, 양 손에 봇짐과 신문지 들고 계단을 오릅니다. 어린이가 길 물어 봅니다. ‘자, 다 왔어요. 빨리 들어가세요.’

여기까진 좋다. 착하다고 해두자. 문제의 발단은 이 친구 30살 먹고도 직장이 없다는 사실. 그래서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서 빠지지 않았죠.
어느 날, 술자리에 그 친구가 왔습니다. 친구들은 그 친구를 도마 위에 얹어놓고선, 요리 뒤집었다 저리 뒤집었다, 엎었다가 매쳤다가, 끼웠다가 뽑았다가 난리도 아닙니다. 그러다 ‘천사논쟁’, 일어납니다.

“니가 천사가? 뭐 할라꼬......참나.”, “그냥 니는 목사나 스님해라.” “그거 다시 수능봐야 돼서 안된다카니깐.”

 

“점마 보면 내는 술맛 떨어진다” “마셔, 마셔” “니는 술도 안묵나?” “빨리 장가가야지” “부모님 좀 생각해라”. 이 모든 이야기, 그 친구 위해서 한답시고 하지만 사실 면박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아, 술? 안먹는 친구입니다. 그냥 친구들이 몰아쳐다는 잡소리에 그냥 광대뼈를 들었다 내렸다 할 뿐 미동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이런 얘기 듣는 동안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술자리가 끝나고 먼저 일어나 집으로 간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밤 12시가 다되어서야 술집을 나섭니다. 계산? 물론 돈도 없는 녀석이 계산을 해뒀습니다. 친구들은 그냥 그런모양이다, 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1년 정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1년 뒤 그 친구는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몸을 다른 이에게 기부하고 말이죠. 그리고 친구들은 매년 그 친구와 고등학교 때 노래를 불렀던 그 곳에 모여 그 친구를 회고합니다. “그 때 잘해 줄 껄”하고 후회하면서 말이죠. 지금은 제 친구들, 열심히 봉사활동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 친구의 마지막을 지키려는 것처럼.

“남 돕는 기 피해주는 기 아이면 내는 그거 하는 기 부끄럽다는 생각 않안다. 사람들도 알끼다. 그렇게 저거들도 하고 싶어도 부끄러버서 몬한다는 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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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대선

 

난리법석입니다. 애시당초 예상했던 바이지만, 가는 곳 마다 선거포스터에 홍보물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각 후보들이 저마다 내세우는 공약들만 실현되어도 세상은 엄청나게 바뀔 것 같습니다. 공약대로 된다면야, 저는 기표용지에 1번부터 12번까지 잉크가 마를 때까지 죄다 찍고 싶습니다만. 선거가 자판기는 아니죠.

 

한 두 번 속는 장사가 아니라서 이제는 그 공약들이 딱히 신뢰는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누굴찍을 것인가를 고민하기 보다는 투표장에 갈까말까를 고민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딱히 찍을 후보자도 없을뿐더러 자기들 마음대로 뭉쳤다가 헤어졌다가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니 지금 마음 속에 누굴 하나 정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도,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습니다. 투표날이 지나고 대통령이 선출된다고 하루 아침에 경제가 보일러 돌아가듯 뜨끈뜨끈하게 돌아가지도 않으며, 막힌 하수구가 뻥하고 시원하게 뚫리지도 않습니다. 라이터 불 하나로 세상을 밝힐 수 없고, 성냥불 하나로 온 방을 데울 수는 없습니다.

 

쇼펜하우어란 철학자가 바늘두더지 일화를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날, 바늘두더지 한 쌍은 너무나 추운 나머지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서로를 끌어안습니다. 그러자 뾰족하게 돋아난 털이 서로의 몸을 찌르게 되고 그 둘은 다시 떨어집니다. 다시 몸이 얼어붙자 서로를 끌어안지만 털이 서로의 몸을 찔러 그 고통으로 다시 떨어집니다. 결국 바늘두더지 한 쌍은 얼어죽고 맙니다. 이게 소위 ‘바늘두더지 딜레마’라는 겁니다.

 

신문을 보는데 눈을 바짝 갖다 댄다고 해서 신문의 작은 글자가 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거리가 유지될 때 신문의 작은 글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법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도, 어떤 일을 판단하는 일도 그것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비교적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술집에 들어가도, 아주 친한 친구를 만나도, 간만에 부모님을 만나도, 생판 모르는 보험외판사원을 만나도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는 “누굴 찍을 겁니까”입니다. 죄다 대선 외에 다른 이야기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사람과도, 대선과도 거리를 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어차피 대통령이 당선되면 국민들은 “저럴 줄 알았다”는 탄성을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후보가 당선이 되어도, 혹은 당선이 되지 않아도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나는 저 사람 찍었으니 욕해도 돼”라고 하시면 되고, 자기가 원하지 않은 후보가 당선되면 “저럴 줄 알고 나는 안 찍었으니깐 저 놈은 욕먹어도 싸”라고 하시면 됩니다.

 

인도의 정치인인 네루는 ‘정치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선거광고를 보면 정치인, 저네들이 울고 자빠졌습니다. 가끔씩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뭘로 닦아주실지 솔직히 겁부터 납니다. 이번 대선, 너무 걱정하시지도 마시고 너무 깊이 관심을 가지시지도 말고, 그냥 실눈을 뜨고 모르는 척하고 지나치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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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옷 한 벌

가을옷 한 벌

 

낙엽이 들어갑니다. 신림동 관악산에도, 종로의 인왕산에도, 여의도 거리에 늘어선 가로수에도 수줍은 듯 붉게 낙엽이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밤거리를 지나면 형형색색 즐비한 네온사인이 비추는 색들은 동공을 자극

 

하기만 하지만, 자연 스스로가 온 몸을 물들인 색들은 인간의 시야를 맑게 합니다.
그런 이유에 오래전부터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낸 천연의 색을 이용하기 시작했지요. 천연의, 자연의 색들은 눈 뿐만 아니라 몸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쪽물이나 홍화물을 들여 옷을 염색했습니다.

 

그러다 염색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고려시대 때부터는 오늘의 공기업에 해당하는 ‘관영직조’에서 염색을 전문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빗깔나는 옷을 위해 염색을 하고 수를 놓게 됩니다. 물론 왕족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들이 주로 입는 옷이 되었지만요.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다 장인들 손에서 빚어졌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아참, 그리고 천연염색하면 그 옷에 항균기능, 냄새제거기능, 항알러지기능이 강해진답니다. 요즘 어린이들의 아토피 때문에 천연소재와 천연염색을 한 웰빙의류가 히트를 치고 있는 것도 아마 그 탓이겠지요. 우리 ‘수다공방’에서 아줌마들의 손을 타는 그 옷감들이 천연염색을 한 옷감들이니 앞으로는 어른, 아이할 것 없이 그 옷들이 살갑지 않겠습니까.

 

가을바람이 이마를 타고 넘어갈 때 즈음이면 옷장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천연의 옷을 입고 거리를 나서는 행복을 상상해 봅니다. 수다공방이라는 이름의 천연색을 빛과 바람으로 엮어 만든 그 옷을 입을 날만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가을이 되면서 ‘참 신나는 학교’도 새 단장을 했습니다. 지난 13일에는 한 기업과 하비타트라는 사랑의 집짓기 봉사단체에서 우리 학교의 속살을 다듬어 주셨습니다. 게다가 책상, 의자, 예쁜 메모지 판까지 달아주셨다고 하니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롭고 말끔한 옷을 갈아입고 우리 학생들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학교를 생각하니 흐뭇하기 그지없습니다. 학교 몸단장에 도움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또한 학교 선생님들께서도 항상 헌신적인 열정을 쏟아붓고 계시니 제 마음마저 훈훈해집니다.


며칠 있으면 11월입니다. 꺼내놓은 선풍기도 어느 덧 창고에서 동면을 준비하고 있고, 이불 아래는 전기장판이 자리를 틀었습니다. 계절 탓이야 하겠지만 몸도 따스함을 원하고 있지만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고 있는 일들도 많아졌지만 서서히 정리해야 할 일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이 시큰해지지 않게 서로의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줍시다. 그러나 그럴 준비가 다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안겨줄 옷을 만들어 솜씨를 뽐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새 단장을 해서 좋은 분위기에서 우리 학생들을 품어줄 수 있는 공간도 있으니깐요. 그럼, 가장 좋은 천연의 가을 옷을 한 벌 준비하면 어떨까요? 그게 진짜 옷이어도 좋고, 서로의 따스한 마음이 옷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 옷 하나면 칼바람이 불어도 무섭지 않을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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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옷의 기원

새로운 옷의 기원

 

사실, 제목은 그럴싸하지만 옷의 기원, 은박지처럼 얇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필자가 설명할 길이 없다. ‘옷’이라는 말의 어원이 윗옷을 가리키는 말로 ‘우티’에서 연유했다는 설 정도 밖에는. 그것도 정확한지 모르겠고,

 

옷의 기원을 설명하는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냥 상상력으로, 옷의 기원, 파고 들어가 본다.
옷. 이거 사실 본질은 ‘가리개’가 아니다. 벌거벗고 다녔던 것이 인류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속된 말로 다들 벗고 다니니깐, 쪽팔린 줄 몰랐던 것이다. 근데 날씨의 변동이 생기고, 춥고 덥고, 또 사냥하다가 긁히고. 그러니 몸을 보호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처럼 ‘사과’를 먹자마자 부끄러워 황급히 나뭇가지로 중요부분을 가렸다는 것은 조금 억척스럽기는 하다. 여하간 몸을 보호하기 위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옷의 대용품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 최고는 동물의 가죽 아니겠는가.

동물의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사냥을 해야했고, 사냥을 통해 얻게 된 동물의 가죽을 도려내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칼같은 도구를 필요로 했다. 그러한 도구의 발명. 이것도 옷의 기원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날카로운 도구의 발명은 인간의 손기술이 그 만큼 발전해갔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얻어진

 

동물의 가죽을 이어붙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도구를 만들 수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선사시대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보면, 주로 낚시에 사용된 것들이 많다. 돌칼, 낚시바늘, 뼈바늘, 바늘통 등이 대표적이다. 낚시그물을 엮는 것은 옷을 짜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옷의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나.

옷을 보편적으로 입고 다니게 되는 시기부터는 옷이 ‘가리개’라는 본질과 더불어 ‘신분’을 상징하는 용도로 드러난다. 특히 신분을 드러내는 기능을 가진 옷을 만들게 되면서, 옷감과 옷을 만드는 기술은 더욱더 발전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과정 이후에는 옷도 시대의 요구와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게 되면서 신분을 탈피하고 자유롭게 되지만, 그것은 사실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옷의 모양과 경향들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는 점은 그 만큼 옷에 대한 기능적 부분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표현해내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옷의 본질이 이제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옷을 찾는다면 그에 맞는 옷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대안으로 수다공방이 만들어내는 옷이 유력할 수 있다. 수다공방이 빚어내는 옷이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 게다가 인체에 유익하기까지 하다면 옷의 기능을 총망라한 최고의 옷이 아니겠는가. 옷은 제2의 피부이자, 이제는 자기 자신의 얼굴이 되고 있다. 수다공방의 자부심으로 만든 옷이 ‘새로운 옷의 기원’을 여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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