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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가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은 거의 느껴본 적은 없다.
내가 그이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날 때, 내가 만나는 그 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어쩔 수 없어 "전태일"이란 이름을 거론할 뿐, 설사 그이가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라고 그 이를 제대로 알리도 없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때로는 발목이 잡히며, 필요 이상의 이해를 받지만 그이는 가장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잘난 척 하는 박사가 아니라 그냥 아줌마에 불과하다. 그것이 그것을 위장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이의 오랜 동안 독재와 남성중심사회와 맞부딪히면서 익힌 숙련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그이는 장인이다.
밥을 시켜먹어도 숟가락 갯수가 모자라도 그이는 밥 갖다주는 아줌마에게 있는 없는 쫑꾸는 다 준다. 짜증이 나면 가끔씩 약한 정도의 짜증도 낸다. 그러면서 웃기도 잘 웃는다. 자기가 아는 부분이 나오면 꼭 끼어들되, 대화에 있어 상당 시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데 할애한다.
정치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이지만 극단주의는 배격하는 듯하다. 혁명이라는 이야기에서 '추억'을 느끼는 듯한 그녀의 표정 속에는 어떤 세상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얘기해봐야 겠다.
찰라는 불교에서 말하는 최소 시간 단위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는 그 시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두 남자가 명주실을 붙잩고 있다가 한 남자가 칼(剛刀)로 그것을 끊어낼 때, 그 시간이 64찰라가 소요된다.
대충이라도 시간관념이 느껴지지 않는 짧은 순간이다. 이 책에서는 1주야를 30수유, 1수유는 30랍박(臘縛), 1랍박은 60달찰나, 1달찰나는 120찰나라고 하는데, 이것을 계산해 본 자에 따르면 1찰라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1/75초 정도 된다고 한다.
겁(劫)은 인간이 상상없는 시간이다. 잠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방과 상하로 1유순(由旬:약 15 km)이나 되는 철성(鐵城) 안에 장수 천인(長壽 天人)이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3년 마다 한알씩 빼내어 겨자씨가 모두 없어지면 그것을 1겁이라고 한다. 이것을 겨자겁이라고 하는데, 또다른 설명에 의하면 불석겁에 따라 1겁을 설명하기도 한다.
1유순이 되는 돌을 하늘 사람이 무게가 3수되는 천의(天衣)로써 3년마다 1번씩 스쳐서 그 돌이 달아서 없어지면 1겁이라고 한다. 이 시간도 현대의 계산방법에 의하면 약 4억 3천 2백만년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범천(梵天)에게 있어 하루에 불과한 시간이다.
우리는 이런 시간 속에 산다. 그리고 놓치고 미루는 일들이 많다. 내가 살아봐야 고작 기대수명 7-8년을 얹어도 80살 정도 산다고 가정하면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 니체가 '짜라투스투라'에서 말했듯이 때를 맞추어 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때를 맞추어 죽을 수 있냐고 했다.
아직 할 일이 많다. 어수룩한 시간관념이 오히려 나쁜 습관을 가져올 수 있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불장생 고능장생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비이기무사사 고능성기사
-노자(老子) 도덕경 제7장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 간다.
하늘과 땅이 그토록 길고 오래 가는 이유는 존재하려고 스스로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랫동안 존재한다. 그래서 성인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것으로 남의 앞에 서는 것을 삼는다. 세상의 밖에 자신을 둠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이것은 (작은) 사사로움을 버리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럼으로써 능히 사사로움을 얻느니라.
도덕경 제7장에서 핵심은 "천장지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능)장생"에 있다.
그래서 성인에게도 "외기신이신존"함으로써 진짜 사사로움, 즉 "고능성기사"를 얻는데 있다. 본질이 "비이기무사사 "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말들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사사로움에 얽매여 살아간다. 그러나 사사로움을 얻기위해서 살아간다는 의미는 결국 무엇에 대한 지속적인 갈망 혹은 욕구가 사사롭게 인식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갈망과 욕구, 이기를 버릴 때 진짜 사사로움을 추구하면서 얻어지는 질과 양만큼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사사로움을 버린다는 것은 사사로움을 추구하면서 얻어질 수 있는 행복의 크기를 능가하기 위한 방법론적 시도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바로 세상 밖에 자신을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노자철학의 응축된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데 과연 세상 밖에 자신을 둘 수 있나.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이는 제7장에서 강변하고 있는 노자의 이야기가 사실상 "체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여지가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내가 노자철학을 무용성의, 무기능의, 불임의 철학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마힐이 세상 밖에서 자신을 두지 않고 세상 속에 자신으로 둠으로써, 세상이 아프니 자신도 아플 수 밖에 없는 사회 속에서 자기 존재를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노자철학의 모든 부분이 무용하고 무기능한 것은 아니다. 노자철학이 자신에 대한 관찰과 사물에 대한 인식의 기초를 변증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자세가 교정된다고 인간의 삶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체질이 바뀌어야 삶의 내용이 바뀔 수 있다. 때로는 노장사상에 대한 매력도 많이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노장철학,학, 특히 노자를 읽으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근거를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여자가 있다. 왜 끌리는지 모르겠다.
연애하는 방법 다 까먹은지 오래나, 이번에는 그녀가 너무 보고싶다.
내가 미쳤거나 진짜 그녀가 좋은거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기다리다 지쳤어요~땡벌~~~"
예전에는 그랬다. 친구들과, 혹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전화연락을 하고 날짜와 시간을 정했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변동이 없었다.
누구를 만난다는 것이 그 때는 참으로 설레는 일이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포함되어 있던 모임에 참석할 때면 몇 일이고 뛰는 가슴에 꼴같잖은 상상도 많이 했다.
그래서 만남의 여운도 컸다. 그런데 지금은 덜 그런 것 같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거나 온라인 메신저를 통해서, 또는 문자 메세지를 쏴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실시간으로 만남을 거절하거나 연기할 수도 있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본다. 최근 나는 설레는 마음에 누구를 기다리고 만나봤는가. 핸드폰이 생기면서 설레는 모임이나 만남은 줄어들었으나 편리함과 신속함을 얻었다. 설레임과 여운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편리함과 신속함이다. 또 하나 더 있다.
핸드폰 덕분에 거짓말도 많이 늘었다. 약속장소에 출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응. 가고있어."라는 기망행위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처럼 약속시간을 잘 어기는 사람은 핸드폰 덕분에 만성적인 거짓말로 자신에 대한 신뢰수준을 성찰하게끔 한다. 그래서 핸드폰이 마냥 문명의 이기니 뭐니 하는 말에 대해서 그것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때로는 구분이 안간다.
손바닥 절반도 안되는 기계가 내 존재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하게한다. 그러나 그 조그만 기계 속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숨어있다. 그래서 단순히 기계라기 보다는 역사적 산물이고 문화적 현상을 만드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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