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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롤즈
철밥통을 욕하면서도 철밥통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http://blog.jinbo.net/gimche/?pid=176
블로그 대문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고 고민지점도 명확하다. 나는 그런 면에서 둔하고 느리다. 그러면서도 모순되게 즉흥적인 부분이 많아 글쓰기는 평생에 나를 성찰하는 훈련의 과정 이상으로 의미는 없을 듯 하다. (띄어쓰기도 많이 틀리고, 적합한 용어나 논리의 흐름도 술을 먹으나 안먹으나 같다.)
윗글, 출처는 밝혔다. 재미있게 읽었다.
1. 재미있는 성찰(경험)과 분석은 "나 또한 과거 공무원이 되고자 했지만, 공무원직이 가진 안정적인 면만이 강조되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안정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정방향이 아님은 분명하다."라고 하는 부분.
(말장난을 좋아하는 선생들은 주로 "과거"에 방점을 찍기도 한다. 무슨 과거에는 안정적이지 않고 다른 이유로 공무원을 하려고 한 것이냐는 졸렬한 비판. 나는 그들의 비판방식과 수사법이 씨발 누구를 위해 적대적인지 묻고싶다. 공무원들이 공직사회의 개혁을 위해 노동조합을 통해서 그걸 촉구하러 동, 구, 시청에 다니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안다.)
2. 그러면서 "철밥통을 욕하면서도 철밥통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재벌을 욕하면서도 자신도 기회가 되면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돈을 왕창 벌고자 하는 사람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 라고 하면서 진보적인, 그것이 매혹적인지는 몰라도 해법을 못찾고 있다고 한다.
생각의 흐름이 진실하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가 어떤 노동을 하는지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의 일일 뿐이고 내가 평가할 생각은 없다. 더욱더 솔직하면 정답이 나올 듯하다.
인용에 대한 생각. 1번은 두 문장 간에 "모순"이다. 인식의 모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본질은 "안정성"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첫 문장은 안정성에 대한 비판이나 뒷 문장은 안정성에 대한 긍정이다. 그이가 왜 공무원이 되려고 했을까.
2번 인용에 대한 생각. 앞의 두 문장 간에 "비약"이다. 첫 문장은 안정성에 대한 문제이고, 뒷 문장은 돈에 대한 물신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말, 자본주의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공무원이면 돈을 왕창 벌지는 않는다. 특히 "무슨 수단을 써서". 나는 믿는다. 공무원들도 무슨 수단을 써서 공무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정성이 항상 '돈을 왕창 벌게'해주지는 않는다고 본다. 변칙과 편법이 주로 그렇고. 원칙으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꽤 있다.
그래서 솔직하지 않다는 느낌.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성찰이 잘못되어 있어 해법을 못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을 많이 본다. 갑자기 '공공성' 문제가 튀어나오는 것도 그렇고.
아직 손도 못대본 책이다. 하종강의 홈페이지에 누군가 글을 올렸는데 출처는 밝혀야겠다.
http://www.hadream.com/ 여기에서 박종호 <말꽃마당> 56번, 진호님의 글.
그의 글을 간단하게 요약해본다. 그냥 이 책에 대한 설명이므로 다른 평가는 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그 책에서 책을 쓴 저자 할러웨이(John Holloway)는 본문에서 "권력의 논리에 빠져드는 저항의 논리"를 논박한다. 모종의 진보정당을 통해 의회 집권을 통해 세상을 바꾸던(베른슈타인), 전면적인 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꾸던(로자 룩셈부르크), 이는 결국 '국가(the state of nation)' 중심적인 저항이며, "의도적이던, 의도치 않았던, 권력의 룰에 참여하게 되는, 즉 자신이 저항하고자 했던 것에 대해 도리어 그것이 되어 저항하는 모순"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분석한 뒤,
"할러웨이는 이러한 시도들이 모두 역사적으로 패배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권력에 저항하려면 반(反)권력이 되어 저항해야 한다면서, "권력을 쟁취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바꾸기"에 대해 그 자신의 독특한 문체를 이용, 기염을 토한다."
기염까지 토했는지는 몰라도 반권력이 권력화됨을 비판하면서 게거품은 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대상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상대방의 수사법을 채용해서는 안 된다."
이에 글쓴이도 "당연히 권력에 저항하려면 반권력적이어야 한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꽤나 상식적인 글을 어렵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인용이 누구의 이익에 혹은 누구의 손해를 가하는지에 대한 손익계산서를 작성할 때, 사람들은 또 개떼같이 공박을 시작한다. '그를 욕하지마, 혹은 그는 비난받아 마땅해.' 그리고 내가 공격받게 되고, '내가 공격받고 있다. 뭉쳐라. 적들이다. 조지자.'. 이러한 수순들. 후지다. 요게 그들의 수사법이고, 우리의 수사법이라는 말일 것이다.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과 집단의 문제가 다 그런 식이다. 일반적인 지지와 일방적인 반대만 있다. 중간적 입장은 매우 희귀하다. 양극단의 전선이 형성된 ‘전시체제’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전시체제’에서 ‘내부비판’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건 이적행위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내부의 문제는 스스로 곪아서 터질 대까지 내버려둔다는 게 사실상 철칙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 '이건희 시대' 중에서
중간적 입장에 대해서는 노동운동 진영도 동일한 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노동시장이 경직적이고 임금투쟁에만 주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 안정만이 취약해 자신이 혼자 가족 등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의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직 먹고 살기 위해 임금 인상에 매달리고 해고에 극단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사실 노동귀족을 낳는 가장 큰 요인은 '기업별 교섭'이라는 한국의 노동조합체계다. 서구의 노조가 개별 기업의 '시장임금' 자체를 받아들이는 대신 국가 차원의 복지와 '사회적 임금'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타협을 추구했다면, 한국의 노조는 고립 분산적인 기업별 교섭을 통해 자기 회사 노동자들의 이익만 추구했다… 한국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오직 분파적 임금 인상에 매몰되는 '경제주의 전투성'에 그쳤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겨레21(조계완 기자) 576호 '노동귀족은 어떻게 탄생했나'
이런 것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많으나, 현장에 뿌리를 박고 있는 노동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은 이러한 지적을 심심찮게 하고 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노동교육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래서 카프카를 인용해보았다. 앞의 글 참조.
난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언어의 메타포적인 것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대가리가 날개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디로 날아갈지의 방향. 왼쪽이든 오른쪽 날개든 간에 사실 모든 방향은 대가리가 결정하는 것인데.
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다시 정돈해서 써봐야 겠다. 그냥 글쓰기 연습으로 말이다.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이 같은 생각의 본질에는 변함은 없다.
글쓰기 연습이 많이 부족하다. 그리고 너무 거칠고 논리적 전개가 너무 허술하다.
45갑바 형님이 죽었다. 그 형님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내 나이 45살. 그래 든든한 배우자 없이, 이 낡은 골방에서 오늘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이 방에서 나 홀로 나와 함께 그득히 깊은 술잔을 들이키고 있다. 내 옆에는 나와 함께 하던 의자와 내 키 길이의 나일론 끈을 하나 두고 잇다. 그리고 이 글을 쓴다. 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러한 모습이 나를 더이상 지켜주지 못함에, 나의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모두 지구를 떠났음에, 나도 함께 떠날려고 한다."
그 형님은 아쉽게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리하려고 한다. 말릴 여유도 시간도, 단서도 없어 그냥 그는 그렇게 글을 잇고 있었다.
"과거는 묻고 싶지 않다. 미래가 보이기에 나는 지금의 선택을 믿는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선택에 대해 어떠한 평가도 없었으면 한다. 그 평가가 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든 아니면 나의 인생에 불구한 모습을 반영하듯 이 같은 똘아이를 요절이라는 낭떠러지로 모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나는 결혼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의 연속적 결정, 다시말하면 오래동안 그와 함께 사랑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진지하게 언약했다면 나는 그것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그러질 못했고, 나 또한 나의 이기와 연약한 세상살이의 아픔으로 더 이상 한 발걸음도 나아가질 못해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다. 결혼이 죽음에 대해 일시적으로 혹은 장기간 삶에 대한 끈기를 제공하지는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러한 조건과 상황이 아니고 그러한 조건과 상황에 대해 후회도, 절망도 하지 않는다."
그는 참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나 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내가 볼 때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을 발견할 새로운 것도, 자신을 통해 타인을 보는 것도, 타인을 통해 자신과 교감하는 것도 자신이 없었나 보다.
"나는 오늘 여기를 떠난다. 아름답게 떠나고 싶다. 그것이 남들의 환송을 받으면 가는 것이 항상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비록 오늘 떠나는 것이 외로울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삶에서 내가 나의 우주를 소멸시키는 거대한 자유를 내가 온전히 가져갈 수 있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다. 그것이 이기적이든 어떻든 간에 나는 내 우주의 한계와 소멸의 정점을 내 스스로 규정짓고 간다. 아쉽게도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나의 모든 신체장기는 여기에 두고 간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 쓰일 수 있는, 가동력있는 물건이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나는 모든 신체와 장기를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한다. 그리고 나는 떠난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야기 했다.
"나를 생각치 마라. 생각한다고 나는 너희들이 어떤지 모른다. 그냥 생업에 충실해라. 나는 즐거웠고 또한 즐거워해준 너희들을 사랑한다. 잠시 여기 들렀다가는 사람처럼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그게 내가 편해. 나는 잠든다. 잠든 나를 깨우는 것은 실례다. 너희들이 아름다움 삶에 내가 방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냥 나는 갈 뿐이다. 모두들 마지막까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말기를. 나는 모든 것이 한가롭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떠났다. 아무말도 없이. 그러나 많은 말을 남기고.
뱀발: 픽션입니다.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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