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조선이랑 동아랑 골라잡은 사설이 똑같다.
조선 http://news.chosun.com/editorials/
"문 판사는 유모차를 앞세운 젊은 어머니와 죽기 싫다는 어린 여학생들이 거리를 메우고 정체불명의 선동자들이 '청와대로 가자'를 외쳐대던 2008년 5~8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동아 http://news.donga.com/Column
"일부 법관이 아집에 사로잡혀 상식과 사리를 벗어난 판결을 하는 것은 독재권력 이상으로 위험하다."
중앙은 두 개를 뭉개서 한 방에 끝냈다. 그래서 순위에서 제외.
중앙 http://news.joins.com/article/346/3977346.html?ctg=2001
조선과 중앙은 PD수첩 사건에 대해 특정 판사를 거론하고 나섰다. 판결을 비판하기 위해 법리가 아닌 판사 개인의 이름를 거론하는 방식은 위험하다. 사법부에 특정한 이념이 작용하고 있고, 그것을 일부 판사들이 조장 및 이용하고 있으며, 이번 사건이 누구누구가 대표적이다, 라는 인과관계로 묶는 일은 비열하기 짝이 없다. 다만 신영철과 같이 판결에 영향을 주는 개입행위의 경우에는 다르다. 그 때는 '누가'가 중요하다.
사설은 결국, 잘쓰면 思說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死設이 될 뿐이다. 그러나 조중동의 사설은 사설이라기 보다는 "설사"에 가깝다.
한편 괴수퇴치연구실 세리자와 연구실장은 "미국의 레몬수입이 50톤 증가하면 교통사고 사망율이 1.8퍼센트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전직 국회회의원인 모 씨가 제3노총 작업을 오랫동안 추진해 온 것으로 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429184349
"전교조 숫자 많으면 성적낮다?"…전교조 반발
http://www.sisaseoul.com/news/articleView.html?idxno=15140
[정책브리핑]
전교조 교사가 많을수록 수능성적이 낮나? 그 반대인가?
노동연구원의 교원 노사관계 토론회...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잘 구분해야
19일 한국노동연구원이 주최하고 교과부가 후원하는 “교원 노사관계 평가와 발전방안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교원노조의 법률적 특수성 검토’ 등 4개 주제가 발표되었다.
제3주제인 “전교조와 학업성취도의 상관관계 분석”에서는 전교조 가입교사 비율과 수능성적 간에 유의한 부(-)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밝힌다. 전교조 교사가 많을수록 수능성적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 연구는 상관관계 분석이다. 발표문의 결론에서도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전교조 교사가 많을수록 수능성적이 떨어진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 반대로 수능성적이 낮을수록 전교조 교사가 많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전교조 활동은 긍정적이다. 열악한 지역이나 뒤쳐진 학교에 전교조 교사가 많다는 것으로, 사회양극화와 교육양극화의 시대에 전교조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편, 담임교사가 전교조인지 여부와 수능성적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왔다. 담임은 상관없고 다른 교사들의 전교조 가입비율만 관련이 있다는 의미인데, 학교생활에서 담임의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신중한 해석이 요구된다. 전교조 가입교사 비율과 수능성적 사이가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다른 변수(예컨대, 학내 비리 등)를 매개로 한 간접적인 관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직업능력개발원의 교육고용패널(KEEP) 1차년도 데이터를 활용하였다. 교육고용패널은 종단분석을 목적으로 설계되었고, 2004년부터 시작되어 작년 2008년까지 5차년도 데이터가 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첫 해의 자료만 가지고 횡단분석을 하였다. 종단분석을 하기 위한 데이터임에도, 한 해의 자료를 바탕으로 횡단분석을 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래서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인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는 “한 해 데이터만 활용한 횡단분석, 인과관계분석이 아닌 상관관계 분석이기 때문에, 섣부른 해석은 곤란하다”고 평했다. “전교조 교사가 많으면 수능성적이 떨어진다고 말하지만, 수능성적이 낮을수록 전교조 교사가 많다고 분석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능성적과 전교조 교사 비율 사이에 다른 변수가 매개될 수 있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였는지도 의문”이라며 신중한 해석 및 보다 정밀한 후속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하였다.
*첨부 : [메모] 전교조 교사가 많을수록 수능성적이 낮나? 그 반대인가?
2010년 1월 19일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문의 : 송경원 정책연구위원(02-6004-2034)
[메모] 전교조 교사가 많을수록 수능성적이 낮나? 그 반대인가?
노동연구원의 교원 노사관계 토론회...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잘 구분해야
송경원(진보신당/ 교육), 100119
□ 한국노동연구원의 “교원 노사관계 평가와 발전방안 토론회”
◦ 1월 19일 화요일 오후 2시부터 여의도에서 진행
◦ ‘전교조와 학업성취도 간의 상관관계 분석’ 등 4개 주제 발표
□ 제3주제 “교원노조와 학업성취도의 관계”
◦ 발제문은 전교조 가입교사 비율과 수능성적 간에 유의한 부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밝힘. 그러면서 “전교조 가입교사 비율의 10% 증가는 언어영역 수능 표준화점수의 0.5-0.6점 감소 및 백분위 점수 1.1-1.3점 감소와 관련이 있다” 등으로 언급.
◦ 하지만 본 연구는 상관관계 분석임. 인과관계 분석이 아님. 결론에서도 “본 연구가 제시하는 결과는 교원 노동조합과 수능성적 간의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음.
◦ 전교조 가입교사 비율과 수능성적 간의 반비례 관계를 의미함. 이는 “전교조 가입교사가 많을수록 수능성적이 낮다”로 해석할 수 있지만, “수능성적이 낮을수록 전교조 가입교사가 많다”로 해석할 수도 있음(통계적인 검정을 해봐야 하나).
◦ “수능성적이 낮을수록 전교조 가입교사가 많다”로 해석하면, 전교조 활동은 긍정적임. 열악한 학교나 뒤쳐진 학교에 전교조 교사가 많은 것으로, 사회양극화와 교육양극화의 시대에 전교조 교사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임.
◦ 한편, 담임교사가 전교조인지 여부와 수능성적은 아무런 관계가 없음. 다만, 전교조 가입교사 비율과 반비례 관계임. 학교생활에서 담임교사의 영향력을 생각해볼 때, 담임과는 관계가 없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전교조 가입여부와 관계가 있다는 뜻인데, 이는 신중한 해석을 요구함. 즉, 전교조 가입교사 비율과 수능성적 사이에 다른 변수가 개입되어 있을 확률이 높음. 예컨대, 학내 비리가 있으면 전교조 가입교사가 많아지는 것과 면학분위기 저하로 수능성적 하락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음. 이 때는 전교조 가입교사 비율과 수능성적이 반비례 관계로 나옴(하지만 실제로는 학내 비리 만연이 문제).
□ (보론) “평준화 지역, 공립일수록 수능성적이 더 많이 높아진다”
◦ 발제문 108-111쪽에 관계 표가 4개 제시되어 있음.
◦ 변수 중 공립, 평준화지역, 학생 1인당 예산은 수능성적과 정(+)의 관계를 보임. 그리고 이 때 추정계수의 값은 전교조 가입교사 비율보다 큼(예컨대, 108쪽 평준화지역의 경우 2.873, 4.292, 10.494, 9.643, 10.300으로 전교조 가입교사의 -0.062, -0.068, -0.056의 절대값보다 큼)
◦ 따라서 표 4개만 보면, “평준화지역일수록, 공립일수록 수능점수가 높다. 전교조 가입교사가 많을수록 수능점수가 낮지만, 평준화지역과 공립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고 말할 수 있음.
◦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의문임.
◦ 물론 이 때의 해석은 인과관계가 아님.
조선일보, 법조계 "판결에 이념·주관 개입… 대법 판례 무시도"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그런 판결을 일컫는 '기교(技巧)사법'이라는 신조어도 있다"고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6/2010011600060.html
중앙일보, 강기갑 판결문의 ‘기교 사법’ 혐의들
‘기교 사법’이란 말이 있다. 학문적 용어는 아니다. 판사가 미리 결론을 정해 놓고 언어적 기교로 사실과 법리를 꿰맞추는 행태를 풍자한 것이다.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1/17/3599902.html?cloc=nnc
잘 보면 "기교사법"이라는 말은 검찰이 사법부(법원)을 때리기 위한 언술에 불과한 것을 마치 대중들이 사법부를 비난하고 있는 언어인냥 포장하고 있다. 둘 다, 검찰의 얘기를 받아쓰기한 것에 불과하다. 용산의 경우를 보라. 수사기록 공개에 대한 재판부의 명령을 검찰이 어떻게 씹어버리는지.
"이를테면 오늘 루이는 이른바 '행복과 미래'를 얻기 위해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느라 정작 단 한 순간도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인생을 소모하는, 돈 귀신에 들린 '멀쩡한'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이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 비판이란 지비체제가 하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안전하다."
"그러나 아예 체제 자체를 부인해 버리거나 적대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체제는 개혁을 수용할 수 있어도 변혁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여 개선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완전히 뒤집에 다시 세우려 한다."
"신도들이 복음서를 읽으며 의문이나 토론과정을 거쳐 예수에 대해 이해해 가는 쪽보다는 무작정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하는 쪽이 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복종심을 관리하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교회들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
"예수는 요즘 말로 '계급적 관점'을 가진 셈이다."
"하느님은 교회나 기독의 성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 얼마전 말레이시아 법원은 그들의 말로 하느님이라는 뜻의 '알라'를 회교도가 아닌 자신들도 사용할 수 있게끔 해달라는 소송을 내어 승소한 바 있다. 그냥 그렇다고....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쑤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대라'는 그의 말(마태 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활동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다. 그러나 오늘 좀 더 섬세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 잡이다. 오른 손은 '바른 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건 오른 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재대로 때려라'라고 조용히 외치는 것이다.
* 사실 일일이 자판을 두드리는 것 또한 고통스럽지만, 김규항의 억지해석에는 몇 마디 적어야 겠다. 나는 예수를 잘 모르나, 멸시를 당했다고 다시 제대로 때리게 하여 존엄성을 찾게 한다는 의미는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때리는 사람이 오른손잡이든 왼손잡이든 간에, 택스트는 전후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건 성서도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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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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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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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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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위 표와 같이 마태오 복음(공동번역을 본다. 루카복음 이외 마르코, 요한 복음에는 동일한 내용이 없다.)의 5:38부터 5:42까지를 보면 맥락상 "저항의 의미"로 해석되기 어렵다. 특히 루카복음의 내용 중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는 문구에서도 저항의 의미를 내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저항은 빼앗기는 것을 막고 지키는 것이자 적극적으로는 되찾아 오는 것이다. 그런데 전후 맥락상 이것이 저항하라는 의미인가. 성서에 이 구절의 표제어는 '폭력을 포기하여라'이다.
그 다음 표제어는 "원수를 사랑하여라"이다. 5:43, 44에서는 이러한 행동지침을 통해 결과적으로 더 큰 과제를 던진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결국 예수의 말은 '소극적 저항'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포용과 희생, 이타적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일 뿐 이 문맥에서 어떠한 사회구조, 관행에 대해 저항하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사실이다. 예수와 관련된 모든 해석과 의견들은 예수가 '왜 사형당행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 조금 설득력이 없는, 예수 하나가 총대메고 사회를 변혁하는데 일조했다는 것엔 동의하지 않는터라, 더구나 그 당시 역사적 맥락 또한 잘 가미되지 않아 해방신학을 대중화, 현대화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수를 부여잡기 보다는 아예 그만두는 것도 예수를 보다 객관적으로 만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다음 글을 참조.
내가 마지막으로 갔던 교회가 바로 소망교회였다. 명박명박 장로 시절의 바로 그 교회였다.
법학도의 임무(다나다 고타로, 田中耕太郞, 1890-1974), '법과 종교와 사회생활(정종휴)'
다나카 고타로는 한국의 김홍섭(金洪燮)판사, 우징숑(吳經熊)박사와 함께 동양의 3대 법사상가라고 한다. 동경대 상법교수이자 카톨릭 자연법학자이며, 일본 최고재판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독일의 라드부르흐는 법대학생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법학이 화려한 지위를 보장하기 때문에, 둘째 매우 지적인 친구, 셋째 강한 감수성은 있으나 예술가로서 창작력이 없어 법학을 선택했다는....등등의 분석.
일본에도 첫번째가 제일 많다. 참된 법률의 이해가 없는 놈들이 많아 걱정이라는 내용. 그래서 다수의 법대생은 법률공부를 일종의 수단으로 본다능...
법학도들의 동기가 그러하니 "법학도 대부분은 학문에 대한 열의 없이 매우 불철저한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모두 오합지졸이다".
"전공하는 학문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결과, 그들은 그것을 출세하는 수단으로 여기게 된다."
"그 그본은 학생들의 최초의 결심이 법률 공부를 수단시하고, 이에 대해 전혀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며 현재의 유행을 따르는 불건전한 풍조 속에서 방황하며, 또 드물게 존재하는 양심의 참된 학구적 태도에 대하여 눈을 돌리고...."
" 이와 같은 상태에서 결국 참된 학구적 정신의 한 부분도 살피지 못한 채, 최고학부의 생활을 그저 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보내는 학생들이 점차 정계에서, 관계에서, 실업계에서, 그 밖의 방면의 사회에서 유력한 지위를 점하기에 이르니 그 결과는 짐작할 만한 것이다."
" 정계부패의 원인 가운데 대부분은 실로 이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일생에 한 번이라고 수단이라는 생각을 떠난 진리의 발견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 기쁨을 경험한 것과 안한 것과는 그 사람의 생의 기본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얼마나 중대한 의의를 갖는가?"
"법학은 실로 "빵을 위한 학문(brotwissenschaft)"이라는 성질을 갖고 있다."
"거의 모든 학문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인데....법학은 그 성질상 학문 가운데 가장 이러한 경향에 빠지기 쉬운 것 중 하나이다."
"나는 종래의 법학자들의 태도와 세상의 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은 학자들에게 당면의 필요한 시사문제의 해결을 부과한다. 그리고 학자가 기초이론의 연구에 몰두하여 시사문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대는 학자들의 우원한 태도를 비웃는다."
"그들은 나이에 맞는 진지한 반성을 따라서 한 번은 개인주의, 주관주의, 회의주위의 사례를 받고 그 철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사회생활의 전총과 형식이 지금까지처럼 자기의 생활과 무관하지는 않게 된다. 여기에서 사회생활 속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법률이라든가 언어라든가 하는 것이 처음으로 그의 주의를 환기하게 된다.....그의 세계관의 주심은 자기뿐이었던 것이 그것과 더불어 가족, 국가, 민족, 인류 등도 상대하게 되어 개인의 인격의 존엄과 가치 이회에 단체의 의와 가치에 대하여 눈뜨기 시작하여 전체의 일부로서 그것에 의해 유지되고 완성되는 자기를 볼 수가 있게 된다."
*사실 다나다 고타로는 민주주의와 천황제가 양립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요컨대 법률이라듣가 국가라든가에 대한 참된---딜레탄트적이 아닌---흥미가 생기기에는 상당한 나이와 그에 따른 체험이 필요하다."
"먼저 법률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볼 수 있는 학식과 더 나이가 법률을 가치판단의 대상으로서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실을 관할하는 학식만 갖고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지 못할 때 자기를 해치고 사회를 해치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점들은 법률이 인생에서 어떠한 지위에 있고, 종교, 도덕, 예술, 경제 등에 대하여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커다란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는 학문적으로 언제 풀릴지 모를 난문이지만 법학적 통찰을 가질 수 없다 해도 어떻든 우리를 법학도는 각자의 세계관에서 나오는 결론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현실세계의 연구는 필연적으로 그것에 대한 불만을 갖게하여 보다 높은 세계에의 길을 찾게 하기 때문이다."
"또 한낱 법기술의 의미가 아닌 참된 일반적 법학은 다른 특수 학문과는 달리 법학도만이 아니라 널리 사회인인 일반 대중이 흥미를 가져야 하고 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학 교욱을 늦게 시작한대서 나쁠 것이 없다."
".....그 기술적인 법규를 인간성의 표현으로서 관찰함에 태만하지 않고 또 그 기술이 스이고 있는 것의 보다 높은 원리에 주의하고 부분을 통하여 법률의 본질에 미치며 다시 인생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법학도는 기필코 저 시인의 말과 같이 "법학과의 타산적 결혼(하이네)"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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