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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행동이란 무엇인가?

  • 등록일
    2005/03/12 13:22
  • 수정일
    2005/03/12 13:22
직접 행동이란 무엇인가?
- 매닉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미즈타 후

일본의 한 아나키스트 아줌마는 직접행동을 이렇게 쉽게 정의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쉬운 말이 실제로는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각자는 각기 다르면서도 또 어찌 보면 비슷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이성 문제, 입시에 대한 고민, 가정 문제, 성 폭력, 군대 내에서의 욕설과 구타, 학교제도 속에서의 억압, 직장 상사에 의한 스트레스 등등. 대개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견디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해결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도 싸우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기 보다는, 직접행동이 불가능한 사회의 부조리를 체험한다.
개인의 직접 행동을 막는 사회의 장치들을 열거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경찰, 군대, 사법 제도, 행정 제도, 선거 제도 등등의 온갖 사회 제도들은 우리의 문제를 그들이 대신 해줄 것처럼 약속한다. 도둑과 강도의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를 해코지한 사람들을 대신 혼내주고,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빈곤으로부터 구제해 줄 것을 약속한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우리는 이미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이러한 것에 길들여져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선생은 학생에게, 정부는 국민에게 내 말만 잘 들으면 다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 말을 듣지 않는 경우 엄청난 제재와 폭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직접 행동은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 행동은 빛을 발할 수 있다. 자신이 한 직접 행동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그때서야 비로서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폭력적 실상을 파악하게 되고 자기 행동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래서 직접 행동을 통해 직접행동을 배운다는 동어반복적 명제가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말에는 함축된 두 가지 직접 행동의 조건을 살펴보자. 첫째,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라. 남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는 것은 나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떠 넘겨주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의지를 부모에게, 선생에게, 경찰에게, 정당에게, 법관에게, 때로는 노조에게 그리고 각종 리더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자기 보다 큰 조직에게 자신을 맡김으로써, 그것이 자신을 대신해 말하고 행동하고 또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폭력체계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허울좋게 떠들고 있는 미국의 사이비 민주주의를 보라. 얼마나 많은 젊은 이들이 전쟁에서 죽고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죽여왔는지를. 이것이 모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코웃음을 칠 것이다.    
둘째,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라. 때로는 많은 사회 운동가들이 더 큰 ‘대의’를 위해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한다.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문제따위는 잊어버리고 조직이 내세우는 대의를 위해 조직이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 몸에 신나를 끼얹고, 단식 투쟁을 벌이는 등의 자해가 만연하게 된다. 이러한 투쟁 방법은 그때는 잠시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넓게 보면 매우 영웅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자해적 방식은 조직내의 개인들에게 일종의 암묵적 강요로 까지 번질 수 있다. 그래서 자해가 일종의 통과의례가 되어버리고, 극한 자기 고문을 이겨낸 사람만이 지도자의 위치로 부상하게 된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열사’들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보다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저항 방법들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의 촛불시위는 운동권 중심의 과격시위를 넘어서 비폭력 평화 시위를 활성화 시킨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평화 시위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다른 가능성들을 차단해서도 안될 것이다.
결국 이것이 직접 행동이고 저것이 직접 행동이다 라고 일반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직접 행동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개인이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을 택할 수 있고 또 한 친구는 여자친구의 가발을 빌려 신체 검사 중에 쇼를 할 수도 있다. 또 한 친구는 군대에 가서 비로소 군대내의 폭력을 체험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셋 다 징병제라는 문제에 대한 각각 나름의 직접행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떠한 효과적인 직접행동이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각 개인의 상상력과 판단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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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내에서 여성의 당파성은 “보지”다?

  • 등록일
    2005/03/12 13:21
  • 수정일
    2005/03/12 13:21
자본주의 내에서 여성의 당파성은 “보지”다 라는 아나키75의 주장에 대해

이것은 자본주의 내에서의 노동의 내러티브를 성(보지)의 내러티브로 간단하게 바꾸고 변주한 것이입니다. 자본주의 내에서 여성의 보지는 곧 여성의 노동 상품이다라고.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노동 상품을 전유(전유:자기 것으로 만들다)하고 적극적으로 그 자리에서 투쟁해야 한다. 그럴 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되면 다른 노동 상품과 달리 성 상품이 가지는 구체적인 결들을 놓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임금 노동의 경우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직접적으로 상품화하지는 않습니다. 노동은 자본가 측에서 보면 비용에 속하는 것이고, 상품은 그 노동의 결과물입니다. 노동자가 소비자앞에서 직접 자신의 노동을 보여주고 호객하는 것은 아니죠. 반면 성매매(여기서 저는 단순히 매매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의 성이 상품화 전반을 의미합니다.)는 노동 그 자체가 상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보여주고 꾸미고 치장하는 여성의 몸 그것 자체가 상품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기자신을 객체화시켜서 고객의 욕구에 부흥하는 상품을 만들어야 하죠. 여기서 여성의 몸을 상품으로 만드는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야겠네요. 사회적 가치란 아름다움, 섹시함, 귀여움, 착함 등등이겠죠. 섹스를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보지”가 아닙니다. 이러한 온갖 잡다한 관념들과 환상들이 여성의 몸에 다닥 다닥 붙어있죠. 이러한 관념들과 환상들은 단순히 “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굉장히 구시대적이고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치들이죠. 이러한 비자본주의적인 것들이 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 맞물리게 된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문화 현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그 자체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습니다. 많은 좌파들이 이것을 망각하고 곧잘 경제주의적 환원론에 빠지죠) 따라서 여성의 해방은 이러한 비자본주의적인 것들에 대한 투쟁도 함께 병행되어야 하죠.
두 번째 여성이 보지를 자기의 것으로 전유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장벽이 있습니다. 이것또한 굉장히 비자본주의적인 것입니다. 그 장벽이란 자본주의 생산영역과 그 법의 테두리에서조차 소외된 가정이고, 뒷골목이고, 포주, 기둥서방들로 대표되는 남성들입니다. 단적으로 여성의 성 매매는 뒷골목에서 이루어지죠. 그래서 최근들어 공창화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젠 법의 테두리에서 노동매매와 같이 성매매를 관리하겠다는 것이죠. 노예해방, 농노해방으로 이루어진 도시 임금 노동자 집단의 출현처럼 성매매가 합법화 된다면, 즉 “창녀”들이 해방된다면 자연스럽게 성노동자집단이 당파성을 가지고 출현하게 되겠죠.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파성이란 그냥 가진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가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성의 성노동은 이렇듯 다른 임금노동과는 달리 이러한 몇겹의 장벽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임금노동의 내러티브를 그대로 성노동의 내러티브로 번역해내는 것은 일견 타당하지만 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아직 한국에서 성매매 노동자는 그 당파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지 그 사회적 조건을 먼저 따져봐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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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으면 안해!!!

  • 등록일
    2005/03/12 13:18
  • 수정일
    2005/03/12 13:18
밑에 아나클랜 시위에 대해서 엄숙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묘사를 했는데, 나는 이말이 그렇게 나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예전에 게시판에서 "재미"에 관한 논쟁이 생각난다.
어떤 사람들은 진정성 타령을 하며 재미를 찾는 건 자기만족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재미있게 운동하자"라는 것이 과연 운동의 소위 말하는 "진정성"에 위배되는 것일까...
나는 오히려 "진정성" 운운하는 것보다는 운동의 지속성 차원에서 재미의 당위성을 끌어내고 싶어진다.

즉, 조직도 없고, 지도자도 없는 !!!

그러한 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나 스스로가 즐겁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 내가 즐겁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뻘짓들을 창조해야 한다.
셋째, 뻘짓이 늘 즐거운 건 아니다. 그 중에서도 반응이 좋은 뻘짓이야 말로 나에겐 샘솟는 기쁨이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반응이 좋은 뻘짓들을 집중 개발해서 업그레이드 시킬필요가 있다.

바로 "재미"란 조직도 지도자도 없는, 또한 조직도 지도자도 반대한는, "한 사람으로서의 조직"인  "나"들의 행동방식이고, 또한 운동을 재미로써 확산시키는 나름의 '전술'이다.

아, 물론 모든 사람이 똑같은 걸 다 재미있어하는 건 절대 아니다.
재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 바로 그 점이 우리들이 다양한 재미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재미없으면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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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더글라스 러미스의 책 (녹색평론에서 펌)

  • 등록일
    2005/03/12 13:11
  • 수정일
    2005/03/12 13:11
녹색평론에서 펴내는 책 중에서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은
간디의 물레와 바로 이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김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

머리말
  21세기의 상식을 위해서

  1775년에 토마스 페인이 그후 그가 쓴 것 가운데서 가장 유명하게 된 책을 집필하였을 때, 국왕제를 부정하고 미국 독립을 옹호하는 그 책의 중심적 주장은 소수파의 견해였다. 책의 내용은 당시의 상식에 거꾸로 된 것이었지만, 그는 감히 그 제목을《커먼센스(Common Sense)》라고 불렀다.

  실제, 페인은 그 시대를 정확하게 읽었다. 책 출판 당시, 미국의 상식은 대전환의 한가운데 있었다.《커먼센스》는 수십만부나 팔리고, 미국 독립혁명의 사상선언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상식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크게 변화하는 것도 있다.
  지금 우리는 결코 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상식의 대전환, 즉 대다수 사람들이 '비상식'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사고방식이 주류의 상식이 되는, 새로운 상식을 위한 대변혁 직전의 단계에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변혁에 조금이라도 공헌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는 처음에 이 책에《21세기의 커먼센스를 위해서》라는 제목을 붙여볼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본어로 '커먼센스'는 독자들에게 그다지 익숙한 말이 아니고, 일본어의 '상식'도 영어의 '커먼센스'의 의미와는 꽤 떨어져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출판사측과 상당히 오래 의논한 결과 현재의 제목으로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제목이?

  이 책은 경제발전만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 안전보장, 일본국 헌법, 환경위기, 민주주의 등, 여러가지 테마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장은 각각의 문제에 대한 '상식'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고방식이 정말은 현실에서 유리된 것이며, 21세기에 살아남고 싶다면, 우리가 실제로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 부합하는 사고방식을 상식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제목은 협소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는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사고방식(이것은 경제학의 객관적인 결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결론이지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거야말로 우리의 눈을 진정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는, '현실에서 유리된 현실주의'의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일본에서는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소득배증론(所得倍增論)은 정부가 1960년에 제안했지만, 그것은 또하나의 깊이있는 풍요로움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의 대체물로서, 즉 그 운동을 깨기 위한 무기로서 제안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60년대 안보투쟁이 목표로 한 풍요로움은 경제적 풍요만이 아니라, 평화, 민주주의(작업장에서의 민주주의까지 포함하여), 사회적 평등, 정의 등이 포함된 것이었다. 소득배증론, 즉 사회의 풍요로움은 GNP에 의해서 측량된다, 라고 하는 빈약한 풍요를 구하는 논리는 당시의 민중투쟁에 대한 정부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소득배증론은 이데올로기로서 괄목할 성공을 거두어 주류의 상식이 되었다. 보다 깊이있는 풍요로움을 겨냥하는 사상은 완전히 궤멸된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버렸다.

  "그것은 좋은 이상일지는 모르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돈을 벌어야 한다"라든가, "싫어도 직업이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다" 등등, 우리가 흔히 듣는 이와 같은 상투적인 말들은 "소득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현실성이 있다"라는, 경제발전론의 발상이다.

  나는 이러한 발상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기 위해서 이 제목을 선택하였다. 경제발전론 = 소득배증론이 사회의 상식이 되어있는 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밖의 다른 테마에 관해서 깊이있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학용어를 빌려 말하면, 경제발전론은 현대사회 속의 사고장해(思考障害)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사고력을 억압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에 대해, 이 책의 각 테마를 자유롭게, 또 냉정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장소를 머릿속에 비워놓자는 게 이 제목의 목적이다.

  이 책은 어떠한 독자를 상정하고 있는가?

  우선, '연구자'나 '학자'는 아니다. 이 책에는 연구논문 테마가 될 수 있는 문제가 더러 나오지만, 이 책 자체는 연구논문이 아니다.

  또,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이 책은 전쟁, 평화, 노동착취 등, 좌익의 전통적인 테마에 언급하고 있지만, 특히 좌익사상을 제공할 의도는 갖고 있지 않다.

  물론 학자도, 좌익도, 우익도 읽어준다면 나로서는 기쁜 일이겠지만.

  대체, 어떠한 불가사의한 역사적 경위에 의해, 전쟁을 피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좌익'이라고 간주되기에 이르렀는가. 이 20세기의 가공할 전쟁을 경험한 이상, 사상과 관계없이, 보통 사람들 누구라도 전쟁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유감스럽게도 '죽음의 상인' '군국주의 정치가' 등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국의 정책에 반대하여 반전이나 군축을 희구하는 참된 목적은 자본주의 국가 쪽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만들고, 소련 쪽의 승리를 실현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냉전이 끝난 지금, '반전'이라는 당연한 감성은 오로지 좌익이나 무슨무슨 사상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러한 것이 다만 보통의 상식이 되어도 좋은 시대가 된 것은 아닌가.

  이 책에서 취급하고 있는 다른 테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어줄 독자로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상상한다.

과로에 지쳐 있는, 혹은 노동현장의 부자유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샐러리맨이나 사무직 여성을 포함하여) 노동자.
자신의 밭이 공장화되는 것에 혐오감을 갖고 있는 농민.
'경제'(구체적으로, 앞으로의 취직)라는 요소가 자신의 교육의 자유에 장애물이 되어있다고 느끼고 있는 학생.
광고산업이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는 소비자(특히 주부).
전쟁체험을 기억하고, 지금의 일본정부가 재군비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데 대해 충격을 받고 있는 노인.
전쟁을 체험한 바는 없지만, 앞으로도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젊은이.
남북문제는 '남'의 문제라기보다, 어느 쪽인가 하면, '북'의 문제라고 느끼고 있는 사람.
세계의 자연계가 사멸을 계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염려하고 슬퍼하고 있는 사람.
왠지 모르게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막연하고,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생각해보면, 이 리스트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이외에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통의식을 갖게 될 때, 그 의식이 '상식'으로 변할 수 있을까.

   C. 더글러스 러미스 (C. Douglas Lummis)

  193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 졸업. 정치사상 전공. 1960년에 미해병대에 입대하여 오키나와에서 근무. 1961년에 제대 후, 버클리로 되돌아가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다시 70년대 초 일본으로 와서 활동을 시작함. 1980년에 도쿄에 있는 쓰다(津田塾) 대학 교수가 되어 2000년 3월 정년퇴임. 현재는 오키나와에 거주하면서 집필과 강연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래디칼 데모크라시》(코넬대학 출판부, 1996년, 영문판),《래디칼한 일본국 헌법》,《헌법과 전쟁》,《이데올로기로서의 영어회화》(東京:晶文社)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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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은 근대건축이다

  • 등록일
    2005/03/12 13:10
  • 수정일
    2005/03/12 13:10
더글라스 러미스의 책 <경제 성장이 안되는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구구절절 주옥같은 문장들로 가득하더군요. 그 중에서 "자연이 남아있다면 더 발 전할 수 있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슬럼은 근대건축"이다라는 소제목의 글을 뽑아봤습니다. 제가 손수 타이핑( - -;) 한 것인만큼 감동 두배 받아가시길...

슬럼은 근대건축이다

이 발전 이데올로기가 지금 세계를 크게 신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탈신화화하려면, 혹은 신비화되어 있는 것을 보통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몇가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세계경제 시스템이라든가 세계화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세계경제는 이미 하나가 되어있다고 진지하게 믿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세계화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계속 진행되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 이 자본주의 산업경제 시스템은 지구 구석구석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인간은 이 지구 위에 이미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좋을 테지요.

이것이 경제발전의 알맹이입니다. 우리들이 경제발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그것은 지구 위의 모든 인간과 모든 자연을 산업경제 시스템 속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제발전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이미 수백년간 계속되어 왔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 즉 경제발전 이데올로기가 세계적으로 등장한 단계로부터 헤아려 보아도 반세기 동안이나 그 일을 계속되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발전은 앞으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보는 게 옳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오늘날의 세계를 볼 때 잘 돼가고 있는 곳은 발전돼 있다, 사람들이 고통을 많이 받고 있는 곳은 '발전도상국' 혹은 '아직 발전이 충분하지 않다'는 식으로 나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환상입니다. '발전한 나라'나 '발전도상국'을 모두 발전이라는 과정이 만든 세계라고 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만, 예를 들어 우리들은 건축을 생각할 때 고층빌딩이라든가 비행장이라든가 철근과 콘크리트라든가 유리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건물을 보고, 그것을 '발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근대건축의 이미지입니다. 또는 포스트모던 건축 쪽이 더욱 멋진 모양을 갖추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슬럼 사진을 본다거나 실제로 보러 가면 "이것은 아직 발전이 돼 있지 않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실제로 '남'('제3세계)의 국가의 슬럼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그 대부분은 신축입니다. 슬럼에서는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는 곳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매우 근대적인, '발전된' 건축재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블록이든가 플라스틱이라든가 베니어판 등, 주로 주워온 것이 많을지는 몰라도 첨단기술로 만든 건축재료가 많습니다. 슬럼이란 근대건축입니다. 슬럼은 현대건축으로 옛날에는 없었습니다. 지금 포스트모던 슬럼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여튼 슬럼이란 경제발전의 결과로서 나타난 건축 스타일입니다.

슨대건축을 보려고 한다면, 거의 모든 '남'의 국가의 경우, 고층빌딩과 슬럼을 함께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슬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냐 하면 그 대다수는 고층빌딩 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청소부라든가 창문닦이라든가 부자의 하인이라든가, 모두 세계경제 시스템의 톱니바퀴 속에 완전히 들어가 있습니다.

경제발전이란 '슬럼세계'를 '고층빌딩의 세계'로 조금씩 변신시키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자 속임수입니다. 경제발전의 과정에 따라 예전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가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바뀐 것이 20세기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필리핀의 마닐라에 있는 유명한 '스모키 마운틴'이 사라졌다고 최근 들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하여 일본 텔레비전에도 나왔는데, 아마도 필리핀 정부가 그 나쁜 평판을 걱정하여 없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지금도 수많은 '남'의 국가들에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모키 마운틴'은 마닐라의 모든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도쿄의 유메노시마 같은 곳인데, 최근까지 수천명이 거기서 살고 있었습니다. 쓰레기 속에서 나오는 가스에 절로 불이 붙어 늘 연기가 나오며 불이 타고 있기 떄문에 스모키 마운틴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건기에는 불길이 나오고 우기에는 따뜻합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수천명의 사람이 무엇을 하며 사는가 하면 주로 플라스틱을 모으고 있습니다. 플라스틱을 모아 무엇을 하느냐 하면 공장에서 매일 트럭이 와서 그것을 사가는 회사가 있습니다. 아이에서 노인까지 가족 모두가 플라스틱을 모으면 어떻게든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돈이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플라스틱을 재활용하여 다른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수십년 전에는 없었던 첨단기술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우 근대적으로 '발전돼서' 일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분명히 그들은 가난하지만 발전이 안돼 있기 떄문에 가난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제3세계 또는 '남'의 국가는 '발전되어'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발전되어' 그렇게 됐습니다. 발전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니라 발전되어 있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가난하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이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세계경제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완벽하게 물려있다, 그런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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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비폭력(2)

  • 등록일
    2005/03/12 13:09
  • 수정일
    2005/03/12 13:09
어제 준비 모임은 약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대강의 논의 주제는
-폭력에 대한 정의를 둘러싼 여러 가지 논의 -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비폭력인가? 개인폭력과 사회폭력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 의미있게 받아들이고 맞써 싸워야할 폭력은 무엇인가?
-방법론으로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즐기면서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폭력혁명에 대해서
-맑스주의나 여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은 어떻게 다른가?

그중 폭력 혁명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나키의 상황이란게 도대체 뭘까?  예를 들어 폭력 혁명이 일어나면
일순간에 소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권위와 권력의 체계가 모두 무너져 내린다.
그 때 아나키가 도래하는데,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 아나키의 상황을
다시 권력의 체제로 전환하려는 무리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는 마치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이 다시 권력을 독점하고
또 다시 저항에 무너지고...하는 비극의 순환처럼 보인다.
이것은,  진정한 아나키란 다른 권력이 빨려들어오게 하는 진공의 상황이 결코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폭력혁명 하에서 잠시 반짝하는 아나키는 반드시 이러한 진공의 형태로 나타나
곧 또 다른 권력에 필연적으로 자리를 내어줄 수 밖에 없다.
혁명의 이러한 부정적인 면까지도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개개인, 잡민들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분들도 내가 생각하는 비폭력 릴레이에 동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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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에서 로맨스

  • 등록일
    2005/03/12 13:02
  • 수정일
    2005/03/12 13:02
매일같이 9시 퇴근 6시 출근의 지루하고 고된 일상에 오아시스처럼 여름 휴가가 찾아왔다. "이번 여름에 꼭 새만금을 가보리라"고 계획하던 차에 마침 멍청이로부터 부안 소식이 날아들고 오마이뉴스에서 부안 투쟁에 관한 짧은 비디오 스트림을 보고 나서 "부인이 먼저다"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 불과 이틀 전이다. "이곳은 마치 해방구와 같다"라는 멍청이의 말에 다소 로맨틱한 감성이 나를 사로잡았다고나 할까?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한다는 내 특유의 강박관념이 그 짧은 휴가를 이곳에서 보내라고 독촉하는 것일까? 어찌되었건 11시에 버스를 타고 부안에 도착하니 4시가 다 되었다. 시내는 곳곳에 플래카드와 깃발이 걸려있고 군데군데 몇명의 전경들이 도열해있을 뿐, 별다른 기색은 없었다.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자본가와 권력가, 이른바 가진자들이고 환경 파괴를 고스란히 떠맡는 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라고  잠시 도다키 요시의 [환경정의를 위하여]의 서문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그래서 환경운동은 단순히 환경문제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그 문제에 얽킨 사회 불평등 관계를 함께 해결해 나아가야 한다고...그래서 환경운동이 아니라 환경정의운동이라고...

부안은 낡았다. 활동가들이 기거하는 성당을 가기위해 골목을 돌아서니 조그만 시계방이 눈에 띈다. 분침과 시침이 언제 멈추었는지도 모를 낡은 시계가 진열대에 먼지를 뽀얗게 맞으며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그 옆에 어렸을 적에나 보았던 연탄가게. 같이간 캐나다 친구가 신기한듯 연탄들을 바라본다. 그들이 핵 쓰레기를 버리겠다는 곳이 청화대 앞마당도 아니고 날고 긴다는 자본가들의 주택가도 아닌 바로 이곳인 것이다. 가난한 이곳 주민들에게 대도시의 엄청난 에너지 낭비와 자본가들의 탐욕의 결과를 모두 받아안으라는 것이다. 그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그들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어여쁜 땅에 함께 핵을 묻으라는 것이다.

메이저 언론들이 조장하는 여론은, 사람들의 행동은 과격하다, 그들의 행동은 단순히 지역 이기주의, 님비(not my backyard)현상에 불과하다, 어차피 핵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화석연료의 고갈에 앞서 미래의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겠는가, 그러니 부안이든 어디든 핵폐기장은 있어야 하지 않는냐, 정부가 그렇게 많은 돈을 지원하겠다는데 또 무슨 욕심이 있어서 부안사람들은 그렇게 과격하게 나오냐고... 한결같이 떠들어댄다.

정부 지질조사팀의 단 한차례 조사, 그리고 과학자들이라고 하는 비양심적 엘리트들이 제시하는 "지질학적 안전성"에 대한 증거들... 그러던 와중 절대로 폐기장을 유치하지 않겠다던 군수 김종규가 부안 군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쥐새끼처럼(부안군민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어느날 아침 조간 신문에 정부관계자들과 함께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위도에 핵폐기장 건설 확정" 이라는 대문짝만한 타이틀과 함께.

이게 왠일인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칠 일이다. 한번도 그곳 주민들과 상의한 일도 없고 또, 군의회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지 혼자 이 일을 강행했다. 간이 배밖으로 나온 인간이다. 한 주민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이번 결정이 전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군수의 그러한 배신행위 더 화가 나 있다."

"김종규는 무소속으로 그래도 꽤 인기가 많은 군수였다. 그런데 이번일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어떠한 "지도자"도 믿을 수 없다. 우리 주민들의 힘밖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기댈 언덕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절실히 깨닫는다."

라며 말하는 그 사람의 얼굴은 열에 달뜬 에로틱함 그 자체다. 그 사람 뿐 만이 아니었다. 8시가 되어 거리에 모인 수백명의 사람들 하나같이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람들처럼 보였다고 하면 과장일까? 이곳 저곳에서 터져나오는 박수소리, 환호성,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모두가 흡사 축제를 여는 듯한 분위기에 스스로 취해있다.

"처음에는 김종규 한 사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었지만, 이제는 정부와 자본과의 싸움이다."

22일 경찰의 가혹한 탄압이 있은 다음부터 계속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주민 활동가의 이야기다. 그는 이미 새만금반대 운동을 통해 잔뼈가 굵어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새만금처럼 장기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 투쟁은 단지 '우리 지역에 양성자가속기(핵폐기물 재처리시설)를 설치하지 않겠다'는 차원이 아니다. 만약 핵산업에 대한 합리적인 중장기 대안이 제시되고 그 결과 정말로 꼭 핵폐기장이 필요한 경우에는 유치할 의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굳이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핵산업을 추진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지 한수원의 권력유지를 위한 구실일 뿐이다."

한편 핵폐기장 반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그는 상당히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내어놓는다.

"미래에너지 단지"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부안의 핵폐기장 건설을 시발로 전북을 이 "미래에너지 단지"로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라북도를 핵단지화하겠다는 거다. 앞으로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핵발전소만해도 무려 10여기가 넘고 그걸 전북에 고스란히 심겠다는 것이다. 왜 하필 핵폐기장까지 있는 전라북도에다 또 핵발전소를 건설하는가? 이미 핵폐기장이 들어섰으니 "더렵혀진 땅" 더 더렵혀지면 어떠리. 돈 한줌 안기면 그것으로 되지 않겠는가!

"다른 지역에 핵폐기장을 짓는다고 해도 우리는 반대다"

몇몇 주민들의 생각은 벌써 이만큼 나아가 있다. 그들의 생각은 "과학주의"를 뒤집어쓴 엘리트들의 핵논리, 대체 에너지 논리에 저항하며 이미 핵에 대한 근본적 문제의식에까지 닿아있다. 우리가 왜 궂이 핵에너지를 계발해야하는가? 결국 그것은 현사회의 에너지 낭비 경제 구조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나아가 계속해서 경제는 발전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그것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삶을 사는 주민들까지 포함해서) 은 쩔 수 없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해야한다는 경제발전, 자연파괴 논리가 아닌가? 또 그 인간의 이익이란 결국 자본가들의 이익이 아닌가?
온갖 기만과 술책, 유혹과 탄압,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아무래 이곳의 민주주의를 말살하려고 하면 할 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손에 손에 건내는 촛불을 통해 자신들의 진정한 민주주의와 연대감을 깨닫는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들밖에 없다.

이제 8시만 되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광장으로 모여든다. 내 옆에 선 캐나다 친구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어디서 왔냐, 왜 왔냐, (내 친구가 가장 싫어하는 질문인) 나이가 몇살이냐 등등을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짜고자 내친구앞에서 "한국 사람들은 아주 성숙하고 순결한 민족이다"라고 뜬금없는 "민족 찬양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나에게 한번 놀러오라며 자기 집 주소까지 적어주었다.

10시쯤이 되자 시위대는 행진을 하기 시작해서 군청앞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바퀴벌레같이 갑옷과 투구를 쓴 다스베다의 군인들이었다. 멍청이의 말에 따르면, 방패를 뽀죡하게 갈아서 사람들을 찍는다는 1001부대 대원들도 전방에 도열해있다. 지난 토요일에 크게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문규현 신부의 형 문정현 신부의 모습도 보인다.

뭔가가 일어나지 않을까 초조한 마음에 같이 구호를 외치던 중, 한 사람이 나와 이제 보다 긴 투쟁을 위해 우리의 힘을 비축해야하지 않겠냐며 집회해산을 제안한다. 그리고 모두 박수를 치며 다들 집으로 해산했다.

시위가 끝난 지금 나는 아직도 좀 유치하다싶게 로맨틱한 감정에 휩싸여 있다. 너무 과장되거나 신비화되어 촉촉해져버린 문장들은 내일 아침이면 다시 빳빳하게 말라버리겠지만 어쨌든 오늘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 나름대로 행복했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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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런 생각을...

  • 등록일
    2005/03/12 13:00
  • 수정일
    2005/03/12 13:00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맑시스트들이 존재하는 게 참 신기하다. 

 

"노동자 평의회는 국가의 군대, 경찰과 비슷한 역할을 해야할 때도 있다" 또 시에틀 N30에 대해서 "전체 행사의 핵심 조직자는 분명한 결정에 도달하고 그 결정에 따라 활동하기는커녕 오히려 각 바리케이드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라고 했다. 그 결과 혼란이 빚어졌고, 혼란은 항의 행동 전체를 약화시켰다. 말할 나위 없이 경찰은 자신의 의사 결정을 ‘분권화’하지(분산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 전역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처리해 항의를 분쇄했다."

 

결국 모든 시위대가 경찰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했다는 건데, 시에틀 시위가 그토록 유명해지고 곳곳으로 퍼져나간 이유중에 하나가 일사불란하고 중앙집권적이지 않았기 때문인거 다 알지 않나? 사람들은 시위의 자발성에 흥분하고 경도되었다. 시위, 그것은 신자유주의를 향한 저항이지만,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혁명인 것이다. 다시말해 단순히 수단과 과정이 아닌 시위, 그것 자체로 존재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어떤 것에 대한 수단과 과정 전략으로 파악한다면, 결국은 자기가 지향하는 사회를 위반하는 괴물(중앙집권이라는...)을 낳는 자가 당착에 빠진다.
그래서 아나키에선 의사결정, 토론, 모든 전략과 전술, 이른바 과정과 방법이라고 불려지는 모든 것이 아나키가 되기 모자란, 혹은 아나키가 아닌 것이 아닌, 다 아나키인 거다.

그래서 어떤 창조적인 과정을 모두 통과해야만 나올 수 있는 새로운 것이다.
중앙집권이야 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고 편하지만,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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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의 바다와 갯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아나키즘과 맑시즘)

  • 등록일
    2005/03/12 12:59
  • 수정일
    2005/03/12 12:59

맑시스트와 아나키스트의 방법론적 차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본다. 둘은 자연을 보는 근본적인 시각에서 완전히 다르다. 방법론의 차이는 보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새만금의 바다와 갯벌을 그 둘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추론하면서 둘의 자연관의 차이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맑시스트 자연관 - 계급투쟁 이전에 인간의 원초적인 투쟁은 자연과의 투쟁에서 왔다. 자연과의 투쟁에서 어느정도 우위를 확보(산업혁명)하며 인간은 자기 동족인 다른 인간들과 개급투쟁의 역사를 이어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계급투쟁은 결국 아주 원초적인 자연착취의 위에 서 있다. 이것은 계급투쟁이 여성착취 위에 서 있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주의자들의 자연착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똑같이 닮아간다. 그래서 구 소련은 미국의 생산성을 쫓아가기 위해 못지 않은 엄청난 환경파괴와 공해를 일으켰으며, 맑스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경영자들 못지 않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선전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또 환경문제에 대해서 자연과 어울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맑시스트는 전적으로 새만금의 갯벌과 조개를 캐는 아낙네들의 편에 설 수 없다.(전략적으로는 설 수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재생산의 영역, 예를 들어, 가사, 육아, 나아가 비정규직(대부분의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적 위치에 서 있다고 한다면 유사 재생산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등등의 영역에서 착취받는 "여성"의 입장에도 설 수 없다. 자본주의가 인간과 자연을 서로 소외시키면서 이루워놓은 휴머니즘, 생산주의와 궤를 같이해온 맑시즘은 결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국가자본주의(혹은 국가관리주의)로 귀결할 수 밖에 없었다.

아나키스트 - 인간은 자연과 공생하면서, 자연이라는 조건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이 자본화(상품을 위한 자원)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자연이 비록 자연 아닌 제2의 자연이 되었다 할지라도(미국과 캐나다의 울창한 산림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제3세계의 열대림을 벌목하고 파괴하면서 보호되고 있는 그들의 자연은 자연이라기 보다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자본화된 제 2의 자연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자연과의 관계와 유대의 문제를 맑시스트처럼 폐기처분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새로이 발굴하고 발견해서 자연과 인간과의 투쟁이 인간과 인간의 투쟁으로 옮아온 역사를 치유하고 회복하고자 한다. 또한 자연과 인간관게의 회복과 더불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보아왔던 역사를 자율적인 상호부조의 시각에서 다시 쓰기도 한다.  따라서 아나키는 "인간은 자연처럼 쓰고 버리는 자원이나 도구가아니므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휴머니즘도 아니고, 휴머니즘을 자연에 역투사해서 동물에 대한 물신화된 애정을 표해야하는 그런 종류의 동물보호주의도 아니다. 물론 숙명이나 운명 따위로 얘기되는 자연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연주의는 휴머니즘의 자유의지론에 대한 역담론일 뿐이다. 아나키는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추구한다. 바다를 땅으로 만들어 금그어서 니것 내것 혹은 자본과 국가의 소유로 만들어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금이 그어지지 않은 바다와 갯벌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역담론(혹은 대항담론): 아떤 담론에 대항하기 위해 나온 담론이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맞서고자 하는 그 담론과 매우 닮아있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같은 조건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전제들(패러다임 혹은 에피스테메)을 공유한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맑시즘 혹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의 경우 다위니즘에서 파생한 사회진화설의 적자생산에 기반한 제국주의와 똑같이 입각해서 부국강병과 산업화에 의한 독립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쟤들처럼 똑같이 힘을 길러 우리도 쟤들과 똑같이 되거나 앞지르자라는 논리.  발전이데올로기, 국민통합, 동아시아 중심국가설 등등. 그리고 가까운 예로 군대반대 운동에 반대하는 몇몇 사람들이 부르짓는 "우리도 미국처럼 군사력이 있어야 남들이 함부로 넘보지 않을 것 아니냐는 " 주장...

 

돕헤드 매닉의 주장을 크게 보아 동의는 하지만 맑스주의를 너무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혹시 맑스주의 한 분파의 생각을 너무 일반화시켜 모든 맑스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많은 맑스주의자들이 결코 '생산력 발전'이라는 잘못된 신화(이자 가장 대표적인 통치이데올로기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맑스주의자들은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못하며 아나키스트들은 자연과의 공생을 추구한다'는 말은 제게는 타당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나친 단순화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임금노동제도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시키는 제도이므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맑스주의자는 충분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 역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다양한 현대 맑스주의 분파들 중에는 실제로 자본주의제도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 역시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완전한 조화와 공생을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나가자는 주장이 아나키스트에게만 독특한 것도 아니죠.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를 들면 제가 아는 '참여불교'쪽의 주장은 이와 상당히 흡사합니다.
삼보일배에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나타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아나키스트들은 아니었잖아요?

하여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착취와 폭력과 반대하며 탈권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관심을 나타내며 실천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사실입니다.
2003/08/06 x  
  매닉 맑시스트에 대한 일반화라는 비판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주의 분파에 대한 매닉의 무지라고 생각합니다. 맑스주의의 분화가 워낙 복잡하게 일어나고 있는지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점도 있죠. 혹시 그러한 친환경적 맑스주의(에코맑스주의가 있으려나...)가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다만 저는 맑스 저작의 핵심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그것에 입각한 사적 유물론이 가지는 자연착취적인 측면, 자본주의에 대한 역담론으로서 자본주의와 자연에 대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맑시스트들도 새만금공사에 충분히 반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입장에서 어떠한 맥락화에 따라 반대하느냐는 또다른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제도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 역시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맑시스트의 경우에도 혹시 (잘은 모르겠지만) 환경문제 또한 계급해방으로 해결된다고 하는 그러한 환원주의가 아닌지...의심이 갑니다.
또한 '참여불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저도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한 주장이 아나키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고전적인 서구 아나키스트들은 맑시스트들과 비슷한 자연관을 갖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모두 어차피 근대의 산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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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등록일
    2005/03/12 12:56
  • 수정일
    2005/03/12 12:56
[폭력론 노트]의 저자이자 평생을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어온
무까이 꼬오가 지난 8월 6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 2001년 여름에 오사카에서 만나뵌 적이 있는데
이야기는 오래 나주진 못했지만
느긋하고 여유롭고 지혜로우면서도 평범한 할아버지를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 김원식 할아버지로부터 이 얘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했답니다.
곧 제가 얼마전 부안에 갔다온 얘기며 새만금 이야기 등등을 하다가
주책스럽게도 왈칵 눈물이 삐져나오더군요.
그랬습니다. 제가 지나온 지난 몇 개월간
그 행동과 생각의 매듭 매듭마다 무까이 꼬오의 생각이
서려있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안을 생각하며, 새만금을 생각하며, 삼보일배를 생각하며,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며, 전쟁반대와 군대반대를 생각하며,
무까이 꼬가 비폭력직접행동의 모델로 보여준 인도의 소금행진을
생각하며 그렇게 함께 무까이 꼬오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나키에는 스승과 제자의 위계도 없다고들 하지만
제가 커다란 스승 중의 한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편안하게 주무시듯 가셨다고
말씀하시는 김원식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배어있었습니다.

간단한 추모회를 가져서 그분의 명복을 빌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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