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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2만원 상당의 책을 중고로 만원에 구입했다.
<사육과 육식> 리처드 W. 불리엇 저, 임옥희 옮김, 알마 출판사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햄스터5마리와 개 두마리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한 의문,
집지키는 개, 복날에 잡아먹는 개, 장난감처럼 키우는 개, 반려동물로 변화되고 확장되는 개에 대한 인식의 복잡 다단함과,
반려동물을 맞이하면서 맞딱뜨린 동물을 향한 그 엄청나고 방대한 모순들,
가령 먹어도 되는 개, 먹으면 안되는 개, 먹으면 안되는 동물, 먹어도 되는 동물,
유기견의 보호와 안락사, 동물의 기본권과 사회적 합의의 문제, 동물의 보호와 동물의 자유 등등,
그리고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며 가슴을 면도날로 긋는것 같은 아픔을 주었던 그 사건...
어릴 적 삼촌이 우리집 마당에서 기르던 개를 잡는 장면을 엿보았다.
목에 올가미를 씌워 베란다 난간에 매달았다.
그 눈빛, 처절하게 목졸려 죽어가던 우리 강아지, 그 옆에서 무표정으로 물을 끓이고 있는 삼촌
요즘 나는 기억의 창고에 오래 묻어둔 이 장면을 꺼내어 되내이고 되내인다.
끔찍한 기억이라 꼭꼭 닫아걸고 싶지만, 이 기억에서 나는 뭔가를 도출해야하는 강박 같은 걸 느낀다.
뭔가 이 기억 속에 내가 요즘 고민하는 모순들의 실마리가 들어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다른 살육의 장면보다 더 끔찍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무력하게 희생되는 개의 고통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사자가 가젤을 사냥하는 장면에는 비록 가젤에 대한 연민은 있지만 끔찍하거나 잔혹하다는 느낌은 덜하다.
그렇다면, 그 개가 나와 친밀함을 나눈 존재이기 때문일까?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고, 학교 갔다 오면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존재라서 더 끔찍한 것일까?
하지만 내 기억에 그 강아지와 다정하게 놀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워낙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 사실 앞뒤 맥락은 크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 장면, 삼촌이 물을 끓이고 그 옆에 강아지고 목졸라 죽어가고 있는 그 장면만이 나에게 문제가 된다.
아마도 삼촌의 존재가 그 장면을 더욱 몸서리치게 만드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개가 사고로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면 큰 연민의 마음은 있을지언정,
불쌍함과 뒤섞인 몸서리치는 공포와 혐오감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육자가 삼촌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 공포스럽게 했을 것이다.
'어느 인간이 힘없는 동물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고 있다.
그 동물을 눈이 튀어나오고 혀가 축 늘어진채로 헐떡이며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고통은 극에 달해 있다.
그 가해자는 바로 나와 같은 인간이고, 나의 삼촌이다!'
죽음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고기가 되었을 때에 그것은 그저 무생물에 불과하다.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
문제는 개가 고통받는 존재라는 사실이고
그 고통을 인간인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얼마전 홍대에서 지인과 술자리에서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우연히 육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그분께 그 기억에 대해 이야기 했다.
덧붙여 얼마전 인터넷에서 개식용 반대 캠페인에 서명했다고 했다.
그분은 실은 부모님이 지방에서 보신탕집을 하신다고 했다. (헉~)
그분의 말씀이 개를 먹는 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지금도 그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며 어릴적 길렀던 염소 얘기를 한다.
매일 동산에 데리고나가 풀을 먹이던 염소가 있었는데 어느날 사고로 죽었다.
그 염소 고기를 처음에는 잔인하다며 밥상 머리에 앉아 울면서 먹지 말라고 떼를 쓰고 있는데,
엄마가 맛이 기가막히다며 자기 입 속으로 자글자글 잘 구어진 고기 한점을 넣더라는 거다.
씹어보니 맛이 기가막히더라는 거다.
확실히 그분의 생각과 인식의 배경에는 <사육과 육식>에서 구분한 사육시대와 후기사육시대에서
인간과 가축동물이 공존하던 사육시대에 속해 있다.
그 시대에서 가축을 도살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배부른 사람들"의 고민이다.
실제로 동물보호를 부르짓는 문화는 대부분 서구 문화권이며 이들은 대체로 다른 나라보다 배가 부른건 맞다.
그리고 특별히 개 식용을 반대하는 것이 서구적 편견인 것도 맞다.
어쩌면 나의 고민도 사육가축과 인간이 멀어진 후기사육시대의 감수성에 의해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의 고통을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를 단지
시대적 차원의 분석으로만 환원할 수만은 없다.
여전히 그 어릴적 기억은 붙잡고 늘어져야할,
때론 가만히 바라보고 머물러야 할 화두이다.
어쨌든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또 다른 생각에 도달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토요일, 용산이다, 미디어법이다 도심에서 한창 집회가 벌어지고 있는 시간,
난 집에 콩 들어박혀서 나나를 봤어.
예전에 한번 5권 정도까지 읽은 적은 있어.
다시 읽으니까 새로 읽는 느낌.
딱히 꿈도 없고 중심도 없고, 늘 '나쁜' 남자들과의 관계에 휘둘리는 나나와
고아나 다름없이 버려져 외로움과 소외의 상처로 인해
강해져서 세상에 우뚝서야하는 강박에 늘 사로잡힌 나나
읽으면서 나는 어느 나나와 더 닮았을까 생각하게 되더라.
우선은 고마츠 나나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게 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솔직함, 그것을 날것 그대로 표현하는 꾸밈없음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에 더 괌심을 끈다. (왜 나는 내 몸 가는대로 사랑할 수는 없을까?)
강아지처럼 밥을 주는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것이 순수한 건지 타락인 건지,
본인도 계속 저울질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엉덩이를 가볍게 놀리는 여자'가 되거나 되고 싶지 않나?
펑크 나나도 멋지고 때로는 공감하는 캐릭이지만,
나에겐 고마츠 나나가 더 연구 대상이고 더 재밌는 캐릭이다.
엉덩이를 가볍게 놀리면서 순수한 여성이란 많은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었지, 사실.
엄청나게 많은 영화와 소설이 이런 여성에 바쳐져 있지 않아?
때론 그냥 그대로 남성들의 판타지인 것도 있고 (거의 대부분)
때론 판타지로 출발하지만 결국은 판타지를 해체하고 반성하고 다시
물음으로 돌아오는 것도 있지 (가끔)
그리고 판타지에 대한 거부와 상처가 위악으로 나타나는 것도 있고 (많아)
나나는 이것과는 좀 다른 판타지인것 같아.
나쁜 남자들에게 휘둘리는 여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 빛을 발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물론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나의 감상을 말하기는 부족한 것 같아.
오히려 정형화 되지 않은 관계의 복잡 다단함.
어떤 공식없이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와 눈이 맞을 수 있다는 활짝 열린 광장에서의 만남?
물론 개인들은 괴로워하고 상처받고 아파하지만
그걸 그리는 사람과 보는 사람은 저러기도 하고 이러기도 하는 거지 하며
여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것. 어느 특정한 캐릭터에 사로잡히지 않음?
순정의 공식에서 살짝 비껴갔기 때문인지,
예전처럼 주인공과 주변사람의 관계와 감정에 연연하지 않으며 읽게 되는
담담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
어쨌든 나한테 그랬다. 물론 아직 10권을 더 읽어야 하지만 ㅋㅋ 신난다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를 한달만에 다 읽었다.
지난번 오링스와 크레이크(국내선 민음사에서 "인간 종말 리포트"란 이름으로 작년말에 나왔다) 보다
박진감이나 깊이면에서 마음을 끄는 면이 좀 부족했지만, 역시 상상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80년대에 상상한 여성 역압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얘기다.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를 이유로, 종교와 결합한 한무리의 엘리트들이 혁명을 일으킨다.
여성의 몸과 신분은 철저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구분되고,
'부정한' 성관계를 맺고 '합법적인' 결혼 이외의 관계를 유지한 여성들은 Handmaid(시녀) 신분으로 전락하고 이미 나이가 지긋한 고위급 간부들의 '씨받이'가 된다. 물론 간부들에게는 Wife가 있고 이들은 바깥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지만 집안일을 모두 관장하는 안방마님들이다.
시녀는 순전히 몸을 이 안방마님들에게 빌려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다.
섹스를 할때도 마님이 시녀를 뒤에서 안고 간부가 섹스를 한다. 무슨 신성한 의식처럼.
(임권택의 '씨받이'에서의 마님은 적어도 문밖에서 씨받는 순서를 읊어주는 역할을 했었다.)
시녀들은 6개월 간격으로 3명의 간부를 옮겨 다니며 아이 낳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면 "식민지"에 버려져서 핵폐기물 등을 치우는 일을 하게 된다.
부정한 관계를 맺거나 지하혁명세력에 가담한 것이 밝혀지면 공개처형을 당하는데,
그때에는 그 동네의 모든 시녀들이 죄수의 목을 맨 밧줄을 당기게 되어 있다.
이런 반란자들의 시체는 며칠동안 사람들에게 전시된다.
끔찍한 식민지로의 추방과 처형의 공포로 시녀들은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며 또 의심받으며 산다.
결국 주인공 시녀 오프레드는 지하조직으로 탈출하고 육성으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게 되고
그 기록이 후대에 발견되어 '시녀이야기'로 문서화된다.
에필로그는 2100년대 후반에 교수들이 모여 이 시기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소위 '정치적 중립성'에 입각한 아카데믹한 연구 발표는 좀 우스꽝스럽고 풍자적으로 느껴진다.
아쉬운 건 읽는 내내 이야기가 너무 우울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오링스와 크레이크(인간 종말 리포트)는 훨씬 이야깃거리가 풍부하고 역동적이다.
아마도 애트우드의 20년 동안의 발전이겠지...
40, 50대가 10대를 인질로 잡고 20대를 착취하는 경제
- [88만원 세대]
토요일엔 서울리데리티 모임을 띵까고,
이주분들이 하는 방글라데시 연극을 보러 마석엘 갔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한글 자막을 띄우고 한 연극이었는데,
그 자막 번역을 나, 붑사마, 돕헤드, 디디가 나누어 했다.
물론 마지막 수정, 정리, 파워포인트 작업은 금요일에 내가 전부 해야했다.
처음 일을 받을 때는 붑사마의 뒤치닥거리를 왜 내가 하나 하고
짜증도 많이 냈었다. 가뜩이나 교통사고 이후 회사일도 밀리고
컨디션도 안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왕짜증이 폭발 직전이었다.
하지만 토요일 연극을 보면서 쌓였던 짜증은 많이 해소되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가구공장에서 잔업까지 하면서 바쁜 와중에
틈틈히 연극 준비를 하고 연습한 배우들과 스텝들의 열의와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할때는 그저 일로만 여겨졌던 자막작업도 나름 보람으로 다가왔다.
더 재밌었던 것은, 영화처럼 화면에 자막을 붙여나가는 것이 아니라,
연극 무대 옆에 건 스크린에 자막을 쏴,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일일이 키를 누르며
대사를 맞춰야 하는 왕 아날로그방식의 일인지라,
붑사마가 직청직해를 통해 자막 키를 누르면, 나는 옆에서 "이 대사 자막 두번, 이건 세번" 하는
식으로 자막의 갯수를 속삭여주어야 했던 것. 다행히 약간의 버벅거림을 제외하곤
실로 완벽한 씽크가 아닐 수 없었다.
연극 자체엔 몰입할 수 없었지만 제법 신선한 체험이었다.
일요일은 비가 오는 바람에 산행을 취소하고 집에 틀어밖혀
위화의 신작 "형제"를 읽었다. 3권으로 되어 있는 이 긴 장편 소설을
벌써 하룻만에 1권을 읽어치우고, 오늘 또 서점에 가서 2권을 살 예정이다.
"살아간다는 것"과 "허삼관 매혈기"을 읽고 범상치 않은 작가라 여겼는데,
이번 형제 1권도 나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공리가 나오는 "인생"을 영화로 봐서 그런지, 아니면 위화의 소설의 문체의 효과인지,
그의 소설을 보면 중국 문화혁명기의 주인공들의 모습이
마치 책위에 영상으로 재현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 번역도 왠만한 국내 소설가 뺨치도록 언어를 풍부하고 감칠맛 나면서도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
대단한 번역가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 그런지, 중국어와 일어 번역은 다른 언어 번역에 비해서 매끄러운 편이다.
영어나 다른 유럽어의 번역을 읽다보면 아무리 훌륭하다 이름난 소설도
어색한 문어체와 번역투가 눈에 걸려 제대로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미국 베스트셀러 미스테리 작가들의 소설의 경우, 급조한 번역티가 너무 심하게 나서
소설에 빠져들어가는 데 엄청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가급적 영어는 원서를 보려고 하는데, 한권을 감상하는데 시간이
번역본의 몇 배 가량이 걸리는 것이 문제다.
요즘은 한글로 된 소설을 주로 읽고 있다.
요 몇 개월간은 영어 소설을 몇개 읽었는데,
이야기 구조에 빠지면 재미가 있지만, 역시 영어인지라 시간도 걸리고 은근히 스트레스도 된다.
왜 스스로 스트레스를 주어가며 책을 읽나, 하는 생각으로
한 달 전부터 성석제 소설을 시작해서 주로 한글 소설을 읽고 있는데,
하도 오랫동안 소설을 읽지 않은지라,
어느 소설을 읽어야 할지 서점에 가면 고르기가 쉽지 않다.
이 글을 읽는 친구들에게
훌륭한 한국 작가와 작품을 추천해주길 바람.
트랜디 한 거 빼고.
석제 아저씨의 소설집 두개를 끊냈다.
확실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가 "참말로 좋은날" 보다 더 재미있다.
황만근이 산에서 길을 잃고 거대토끼를 만나는 대목은 정말 압권.
구렁이 담넘어가는 듯한 그의 말장난은 정말 감칠맛이 난다.
비판적이되 날카롭지 않고, 소실집 작가사진의 미소처럼 푸짐한 풍자, 해악 뭐 그런게 있다.
반면 "참말로 좋은날"의 '저만치 혼자 피어있네' 같은 작품은
20세기 초 사실주의의 21세기식 복원 같은 느낌이다.
희극적으로 시작했으나 섬뜩하게 끝나는 잔혹성.
말뚝이가 탈춤추다 돌연 칼부림하는 모습같다.
책 말미에 어느어느 대학의 교수라는 무슨무슨 비평가도 뭐라뭐라 썼듯,
(너무 어려워서 거의 이해를 못함 (- -;)
예전의 성석제의 스타일과는 다르게 베이면 아플것처럼 꽤 날이 서있다.
그래서인지 어제밤엔 책을 끝내고 잠을 자는데도 예전처럼 유쾌하진 않다.
석제 아저씨를 처음 안 건,
아릿아릿하던 대학 1학년인가 2학년 이던가,
그 때의 대학생들이 처음 품는 시집 하면 기형도,
유재하를 처음 듣고 그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알때처럼,
커트코베인이 죽고나서 그를 알아버린 것처럼,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피어오르던 그 시의 아우라
지금 생각하면 설탕물을 먹기 위해 커피를 마시듯 그의 시를 읽었다.
어쨌든 시어들은 세련되고 달콤했다. (- -;)
기형도 산문집이 나왔고, 그 글들 중에 문학반 친구인 성석제와 원재길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었다.
그 이후 성석제와 원재길의 소설이 시장에 나왔을때
읽어보지도 않고 왠지 짝퉁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형도의 아우라때문인지 영 들출 마음이 없었드랬다.
성석제가 뜨든 말든, 적어도 나에게 그는
죽은 천재 시인의 살아있는 영재 소설가 친구였을 뿐.
약 5년 전에 붕어가 몇번 성석제 소설이 재미있어, 라고 한 적이 있었지만,
그가 좋아하는 오에 겐자부로를 별 탐탁치 않게 읽었던 나에게
별 어필을 하지 못했다.
최근에야 그의 소설을 읽었다.
부담없이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기형도 오빠의 시도 한번 다시 읽어볼까나,
그때 읽었던 시들 쭉 다시 읽어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다.
주로 문지쪽을 많이 읽었었는데...
김중식은 지금도 시를 쓰나?
김영승 '반성'도 기억난다. ㅋㅋ
이 아저씨는 어떻게 살까?
ㅎㅎ마초들의 잔치
실은 그렇다
소설 하나를 잡고 한달 이상을 버티고 있다.
지하철에서 왔다갔다 할때만 읽어서 진도가 영 안나간다.
그리고 글이 너무 어렵다. 어려운 울트라 포스트모던 영어...
그래도 잡고 있는건, 번역된 책이 없고 상당히 재미있어서다.
서구권에서는 SF, 페미니스트 작가로 우명한 마가렛 에트우드 여사의 오릭스와 크레이크.
이야기는 상당히 있을법한 미래를 다룬 SF인데, 보통 비현실적이고 그걸 강점으로 갖는 기존의 SF와는 사뭇 다르다. 현실감 장난 아니다. 바로 코앞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다.
이미 고도화될 대로 고되화된 테크놀로지와 대기업의 세상,
사람과 똑같은 싸이보그나 자동차가 나는 허황된 상상이아니라,
지금 세상이 요모양 요꼴로 계속 가면 요롷코롬 되겠구나 할 정도로 예상이 가능한 세계다.
유전자조작으로 피군(Pigoon)이라는 돼지 몸 속에
사람 심장도 기르고, 간도 기르고, 콩팥 등등 다 기른다.
사회는 기업이 운영하는 상류 Compound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Pleebland 두 세계로 이루어져 있고,
양극화가 극에 달한 나머지 Compound사람들은 Pleebland 에서의 삶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에트우드 여사가 만든 신조어들도 재밌다.
Rakunk 미국너구리인 라쿤과 스컹크의 합성어, 유전자 조작으로 스컹크의 냄새를 제거한 애완동물
Wolvog 늑대와 개의 합성, 상당히 싸납다.
다른 재밌는 말들도 많은데 기억이 잘 안나네...
신조어들 하며, 에트우드가 쓰는 단어들이 너무 어렵지만(사전을 찾아도 안 나온다 - -;)
읽는 재미 쏠쏠.
-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기고한 서평 -
내 안에 들어온 제3세계 -굶주리는 세계 (창비)
나에게 처음 제3세계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서성거리는 검은 피부의 외국인으로 낯설고 두렵게 다가왔다. 두 번째는 서투르지만 한국말을 곧잘 하고 김치도 잘 먹는 신기한 이방인으로, 세 번째는 “강제추방반대”, “노동비자쟁취”라고 쓰인 붉은 띠를 두르고 준엄한 눈빛으로 이 사회를 노려보는 투사로 다가왔다. 지금은 그저 보통 남자인 남편으로 내 옆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는 여전히 나에게 수수께끼이고, 가장 밑바닥에서 내 존재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표면에는 떠오르지 않는 경계 밖의 그 무엇이다.
가장 큰 수수께끼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달랑 옷가방 하나 들고 고향을 떠나, 아는 사람도 없고 더욱이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맞지 않는 그런 낯선 나라의 대도시로 떠나게 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온갖 차별과 탄압, 강제추방의 공포를 감수하게 하는가? 이렇게 쫓기는 것 보다 고향에서 사는 것이 더 싫은 이유는 뭘까?
그런 와중에 떠난 인도, 방글라데시 여행은 제3세계 현실의 표면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말끔한 옷을 입고 방글라데시 다카 공항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편에,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세워진 철조망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이 저편에 있는 현실,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심한 대기오염 속에서 에어콘을 단 외제차량 안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사람이 이쪽에, 그리고 차가 정지하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차창을 두드리며 구걸하는 얼굴들이 저쪽에 있는 현실. 가난이 단지 남루한 것이 아닌 생존 그 자체의 문제인 저쪽. 그리고 그들을 풍경처럼 지나치는데 익숙해져버린 이쪽의 무관심과 냉담.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만난 자히드는 한국 기업도 대거 진출해있는 자유무역지대의 노동착취 공장의 비극을 얘기해주며, “돈 없으면 굶어 죽는 정글세계”라고 자기 나라를 묘사했다. 이주노동을 떠나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형편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 든 책이 창비에서 나온 굶주리는 세계였다. 전 세계의 식량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단체인 푸드퍼스트(원래 명칭은 식량과발전정책연구소 Institute for Food and Development Policy)가 펴낸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은 멕시코 깐꾼에서 생을 마감한 한국 농민 이경해씨에게 바쳐지고 있다. 굶주림이란 무엇인가로 시작되는 이 책은, 굶주림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국면이란 자기 삶을 통제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없는 무기력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세계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무기력한 굶주림의 상황에 빠져 있는가? 이 책의 대답은 간단하다.
분명 먹을 것이 모자라서는 아니다... 지금 세계는 먹을 것으로 가득하다. 자연재해 탓도 아니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자면, 굶주림의 근본 원인은 식량과 토지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에 있다.
여기서의 민주주의는 외형상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아닌 토지와 식량 접근권에 대한 민주주의이다. 즉 가장 가난하다고 알려진 나라에서 조차 모든 국민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식량이 있고, 심지어 식량 수출량이 수입량보다 현저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에 대한 접근권이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대량의 굶주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굶주림의 원인에 관련된 여러 ‘신화’들이 굶주림의 진짜 원인들을 가리고, 그것을 종식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 따라서 이 책의 대부분은 굶주림의 진짜 원인을 알지 못하게 만드는 신화들을 분석하고 깨는 것에 할애된다. 그 신화의 목록은 우리가 주류언론으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온 것들이다 ‘식량이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인구가 너무 많아서 인구를 줄여야 한다’, ‘시장과 무역의 자유를 보다 확대하면 식량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 된다’ 등등. 특히 굶주림을 종식하겠다며 자유무역을 주도해온 WTO와 FTA가 오히려 굶주림을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며 남미와 멕시코를 일례로 조목조목 따지는 부분은 지금 한창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를 추진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더욱더 귀 기울여 들어야할 얘기다.
부유한 사람들은 점점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는 세계화되는 현실의 문제. 그 세계화 속에서 나는 그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그 가난에 어떠한 책임을 지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는 결국 가장 밑바닥에서 현대의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성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우리 안에 들어온 제3세계와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화운동의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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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무나님 안녕하세요 있죠 어떤 외국인(이라 생각되는) 분이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 메일로 한국에 온 동안 "if there are any Seoul-based English groups or activities I could do" 추천해달라는데 서울리데리티가 생각나서 가봤는데 최근 업데가 없어서 거기 써도 못 보실 거 같아서 여기 씁니다 그 그룹을 알려줘도 될까요? 허락보다 거기 연락처를 몰라서-_-;;; 갠춘하면 알려주세염 저의 이메일은 taiji202@hanmail.net 아니면 돕헤드한테 물어볼까 우음.. 근데 서울리데리티는 지금 휴가 중인가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