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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원 상당의 책을 중고로 만원에 구입했다.
<사육과 육식> 리처드 W. 불리엇 저, 임옥희 옮김, 알마 출판사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햄스터5마리와 개 두마리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한 의문,
집지키는 개, 복날에 잡아먹는 개, 장난감처럼 키우는 개, 반려동물로 변화되고 확장되는 개에 대한 인식의 복잡 다단함과,
반려동물을 맞이하면서 맞딱뜨린 동물을 향한 그 엄청나고 방대한 모순들,
가령 먹어도 되는 개, 먹으면 안되는 개, 먹으면 안되는 동물, 먹어도 되는 동물,
유기견의 보호와 안락사, 동물의 기본권과 사회적 합의의 문제, 동물의 보호와 동물의 자유 등등,
그리고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며 가슴을 면도날로 긋는것 같은 아픔을 주었던 그 사건...
어릴 적 삼촌이 우리집 마당에서 기르던 개를 잡는 장면을 엿보았다.
목에 올가미를 씌워 베란다 난간에 매달았다.
그 눈빛, 처절하게 목졸려 죽어가던 우리 강아지, 그 옆에서 무표정으로 물을 끓이고 있는 삼촌
요즘 나는 기억의 창고에 오래 묻어둔 이 장면을 꺼내어 되내이고 되내인다.
끔찍한 기억이라 꼭꼭 닫아걸고 싶지만, 이 기억에서 나는 뭔가를 도출해야하는 강박 같은 걸 느낀다.
뭔가 이 기억 속에 내가 요즘 고민하는 모순들의 실마리가 들어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다른 살육의 장면보다 더 끔찍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무력하게 희생되는 개의 고통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사자가 가젤을 사냥하는 장면에는 비록 가젤에 대한 연민은 있지만 끔찍하거나 잔혹하다는 느낌은 덜하다.
그렇다면, 그 개가 나와 친밀함을 나눈 존재이기 때문일까?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고, 학교 갔다 오면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존재라서 더 끔찍한 것일까?
하지만 내 기억에 그 강아지와 다정하게 놀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워낙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 사실 앞뒤 맥락은 크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 장면, 삼촌이 물을 끓이고 그 옆에 강아지고 목졸라 죽어가고 있는 그 장면만이 나에게 문제가 된다.
아마도 삼촌의 존재가 그 장면을 더욱 몸서리치게 만드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개가 사고로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면 큰 연민의 마음은 있을지언정,
불쌍함과 뒤섞인 몸서리치는 공포와 혐오감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육자가 삼촌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 공포스럽게 했을 것이다.
'어느 인간이 힘없는 동물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고 있다.
그 동물을 눈이 튀어나오고 혀가 축 늘어진채로 헐떡이며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고통은 극에 달해 있다.
그 가해자는 바로 나와 같은 인간이고, 나의 삼촌이다!'
죽음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고기가 되었을 때에 그것은 그저 무생물에 불과하다.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
문제는 개가 고통받는 존재라는 사실이고
그 고통을 인간인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얼마전 홍대에서 지인과 술자리에서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우연히 육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그분께 그 기억에 대해 이야기 했다.
덧붙여 얼마전 인터넷에서 개식용 반대 캠페인에 서명했다고 했다.
그분은 실은 부모님이 지방에서 보신탕집을 하신다고 했다. (헉~)
그분의 말씀이 개를 먹는 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지금도 그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며 어릴적 길렀던 염소 얘기를 한다.
매일 동산에 데리고나가 풀을 먹이던 염소가 있었는데 어느날 사고로 죽었다.
그 염소 고기를 처음에는 잔인하다며 밥상 머리에 앉아 울면서 먹지 말라고 떼를 쓰고 있는데,
엄마가 맛이 기가막히다며 자기 입 속으로 자글자글 잘 구어진 고기 한점을 넣더라는 거다.
씹어보니 맛이 기가막히더라는 거다.
확실히 그분의 생각과 인식의 배경에는 <사육과 육식>에서 구분한 사육시대와 후기사육시대에서
인간과 가축동물이 공존하던 사육시대에 속해 있다.
그 시대에서 가축을 도살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배부른 사람들"의 고민이다.
실제로 동물보호를 부르짓는 문화는 대부분 서구 문화권이며 이들은 대체로 다른 나라보다 배가 부른건 맞다.
그리고 특별히 개 식용을 반대하는 것이 서구적 편견인 것도 맞다.
어쩌면 나의 고민도 사육가축과 인간이 멀어진 후기사육시대의 감수성에 의해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의 고통을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를 단지
시대적 차원의 분석으로만 환원할 수만은 없다.
여전히 그 어릴적 기억은 붙잡고 늘어져야할,
때론 가만히 바라보고 머물러야 할 화두이다.
어쨌든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또 다른 생각에 도달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과 그것을 글로 남기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강이 흐른다.
글은 경험에 의존한다.
글은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다.
글은 권위에 의존하고, 그 자체가 권위다.
글은 죽은 말이고, 말은 죽은 생각이고, 생각은 죽은 느낌이다.
일단 글을 쓰면 거기에 매인다.
그러면서 나는 글을 쓰려 하고 있다. 시체 수집가처럼.
모순이다. 이처럼 모순된 갈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된 걸까?
어느 인도의 철학자는 글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글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것이다.
권위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군위와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 것처럼.
결국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한 집착을 증폭시킨다.
마치 하얀 도와지같은 마음 가운데 선이 그어지면 자유롭던 공간이 좌,우로 나뉘어지는 것처럼
(아, 선이 좌우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중앙과 좌우라는 사고가 그것을 좌우로 나눈 거였다!)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것도 글을 쓰겠다는 것도 결국은 글에 대한 집착이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머물며 바라보는 것,
행위를 스스로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머물며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의 움직임을 보았다.
나는 순간 스스로를 검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뭐 대단치 않은 생각이지 않은가"
"인도 철학자라는 권위를 거들먹거리다니"
"어느 책에서 본 나부랑이들을 주절대고 있구나"
크리슈나무르티의 "생활의 기술"을 소개하고 싶은 욕망은
내가 그 책을 읽고 있음을 자랑하고 싶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의 발로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조롱하고 있다.
그런 마음이구나 하고 관찰하면 될 것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글쓰기에 대한 공포에서 한발짝 떨어지는 듯 싶다...
아직 써보진 않아 어떤 기능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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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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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글쓰기를 한다'라고 하니까 뭔가 어색한 '느낌'이. ㅎㅎ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에 '먹기를 한다'고 하지 않고
'잠자기를 한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글쓰기도 그저 글을 쓰는 거고... 말장난 같은가?
아님 이 사이에 어떤 알아차림이 있는 걸까? ^^;
책의 말들이 당신을 채우고, 그래서 그게 그렇게 드러나고 표현되는 일일 뿐인걸.
과일이 익어서 빨개지는 것을
익었는데도 밖으로 빨간 색을 띄는 것을 조롱할 일이 아니듯
글을 쓰는 것도 개체의 자기 표현이고 생명활동일 뿐인 듯.
그것이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생명활동이 세계와 개체 사이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운동들이라 한다면 글을 쓰는 것도 무수한 알아차림 속에서 이미 행위되어 나오는 것들일 수도...
웰컴~ ON/OFF로 종종 볼 수 있기를.
덧) 커피는 곧 볶아 대령하겠사옵니다.
언제 빈집에 함 놀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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