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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행동이란 무엇인가?
- 매닉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미즈타 후
일본의 한 아나키스트 아줌마는 직접행동을 이렇게 쉽게 정의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쉬운 말이 실제로는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각자는 각기 다르면서도 또 어찌 보면 비슷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이성 문제, 입시에 대한 고민, 가정 문제, 성 폭력, 군대 내에서의 욕설과 구타, 학교제도 속에서의 억압, 직장 상사에 의한 스트레스 등등. 대개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견디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해결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도 싸우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기 보다는, 직접행동이 불가능한 사회의 부조리를 체험한다.
개인의 직접 행동을 막는 사회의 장치들을 열거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경찰, 군대, 사법 제도, 행정 제도, 선거 제도 등등의 온갖 사회 제도들은 우리의 문제를 그들이 대신 해줄 것처럼 약속한다. 도둑과 강도의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를 해코지한 사람들을 대신 혼내주고,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빈곤으로부터 구제해 줄 것을 약속한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우리는 이미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이러한 것에 길들여져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선생은 학생에게, 정부는 국민에게 내 말만 잘 들으면 다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 말을 듣지 않는 경우 엄청난 제재와 폭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직접 행동은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 행동은 빛을 발할 수 있다. 자신이 한 직접 행동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그때서야 비로서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폭력적 실상을 파악하게 되고 자기 행동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래서 직접 행동을 통해 직접행동을 배운다는 동어반복적 명제가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말에는 함축된 두 가지 직접 행동의 조건을 살펴보자. 첫째,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라. 남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는 것은 나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떠 넘겨주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의지를 부모에게, 선생에게, 경찰에게, 정당에게, 법관에게, 때로는 노조에게 그리고 각종 리더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자기 보다 큰 조직에게 자신을 맡김으로써, 그것이 자신을 대신해 말하고 행동하고 또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폭력체계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허울좋게 떠들고 있는 미국의 사이비 민주주의를 보라. 얼마나 많은 젊은 이들이 전쟁에서 죽고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죽여왔는지를. 이것이 모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코웃음을 칠 것이다.
둘째,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라. 때로는 많은 사회 운동가들이 더 큰 ‘대의’를 위해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한다.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문제따위는 잊어버리고 조직이 내세우는 대의를 위해 조직이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 몸에 신나를 끼얹고, 단식 투쟁을 벌이는 등의 자해가 만연하게 된다. 이러한 투쟁 방법은 그때는 잠시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넓게 보면 매우 영웅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자해적 방식은 조직내의 개인들에게 일종의 암묵적 강요로 까지 번질 수 있다. 그래서 자해가 일종의 통과의례가 되어버리고, 극한 자기 고문을 이겨낸 사람만이 지도자의 위치로 부상하게 된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열사’들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보다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저항 방법들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의 촛불시위는 운동권 중심의 과격시위를 넘어서 비폭력 평화 시위를 활성화 시킨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평화 시위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다른 가능성들을 차단해서도 안될 것이다.
결국 이것이 직접 행동이고 저것이 직접 행동이다 라고 일반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직접 행동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개인이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을 택할 수 있고 또 한 친구는 여자친구의 가발을 빌려 신체 검사 중에 쇼를 할 수도 있다. 또 한 친구는 군대에 가서 비로소 군대내의 폭력을 체험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셋 다 징병제라는 문제에 대한 각각 나름의 직접행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떠한 효과적인 직접행동이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각 개인의 상상력과 판단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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