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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에서 펴내는 책 중에서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은
간디의 물레와 바로 이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김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
머리말
21세기의 상식을 위해서
1775년에 토마스 페인이 그후 그가 쓴 것 가운데서 가장 유명하게 된 책을 집필하였을 때, 국왕제를 부정하고 미국 독립을 옹호하는 그 책의 중심적 주장은 소수파의 견해였다. 책의 내용은 당시의 상식에 거꾸로 된 것이었지만, 그는 감히 그 제목을《커먼센스(Common Sense)》라고 불렀다.
실제, 페인은 그 시대를 정확하게 읽었다. 책 출판 당시, 미국의 상식은 대전환의 한가운데 있었다.《커먼센스》는 수십만부나 팔리고, 미국 독립혁명의 사상선언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상식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크게 변화하는 것도 있다.
지금 우리는 결코 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상식의 대전환, 즉 대다수 사람들이 '비상식'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사고방식이 주류의 상식이 되는, 새로운 상식을 위한 대변혁 직전의 단계에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변혁에 조금이라도 공헌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는 처음에 이 책에《21세기의 커먼센스를 위해서》라는 제목을 붙여볼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본어로 '커먼센스'는 독자들에게 그다지 익숙한 말이 아니고, 일본어의 '상식'도 영어의 '커먼센스'의 의미와는 꽤 떨어져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출판사측과 상당히 오래 의논한 결과 현재의 제목으로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제목이?
이 책은 경제발전만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 안전보장, 일본국 헌법, 환경위기, 민주주의 등, 여러가지 테마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장은 각각의 문제에 대한 '상식'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고방식이 정말은 현실에서 유리된 것이며, 21세기에 살아남고 싶다면, 우리가 실제로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 부합하는 사고방식을 상식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제목은 협소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는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사고방식(이것은 경제학의 객관적인 결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결론이지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거야말로 우리의 눈을 진정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는, '현실에서 유리된 현실주의'의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일본에서는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소득배증론(所得倍增論)은 정부가 1960년에 제안했지만, 그것은 또하나의 깊이있는 풍요로움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의 대체물로서, 즉 그 운동을 깨기 위한 무기로서 제안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60년대 안보투쟁이 목표로 한 풍요로움은 경제적 풍요만이 아니라, 평화, 민주주의(작업장에서의 민주주의까지 포함하여), 사회적 평등, 정의 등이 포함된 것이었다. 소득배증론, 즉 사회의 풍요로움은 GNP에 의해서 측량된다, 라고 하는 빈약한 풍요를 구하는 논리는 당시의 민중투쟁에 대한 정부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소득배증론은 이데올로기로서 괄목할 성공을 거두어 주류의 상식이 되었다. 보다 깊이있는 풍요로움을 겨냥하는 사상은 완전히 궤멸된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버렸다.
"그것은 좋은 이상일지는 모르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돈을 벌어야 한다"라든가, "싫어도 직업이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다" 등등, 우리가 흔히 듣는 이와 같은 상투적인 말들은 "소득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현실성이 있다"라는, 경제발전론의 발상이다.
나는 이러한 발상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기 위해서 이 제목을 선택하였다. 경제발전론 = 소득배증론이 사회의 상식이 되어있는 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밖의 다른 테마에 관해서 깊이있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학용어를 빌려 말하면, 경제발전론은 현대사회 속의 사고장해(思考障害)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사고력을 억압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에 대해, 이 책의 각 테마를 자유롭게, 또 냉정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장소를 머릿속에 비워놓자는 게 이 제목의 목적이다.
이 책은 어떠한 독자를 상정하고 있는가?
우선, '연구자'나 '학자'는 아니다. 이 책에는 연구논문 테마가 될 수 있는 문제가 더러 나오지만, 이 책 자체는 연구논문이 아니다.
또,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이 책은 전쟁, 평화, 노동착취 등, 좌익의 전통적인 테마에 언급하고 있지만, 특히 좌익사상을 제공할 의도는 갖고 있지 않다.
물론 학자도, 좌익도, 우익도 읽어준다면 나로서는 기쁜 일이겠지만.
대체, 어떠한 불가사의한 역사적 경위에 의해, 전쟁을 피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좌익'이라고 간주되기에 이르렀는가. 이 20세기의 가공할 전쟁을 경험한 이상, 사상과 관계없이, 보통 사람들 누구라도 전쟁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유감스럽게도 '죽음의 상인' '군국주의 정치가' 등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국의 정책에 반대하여 반전이나 군축을 희구하는 참된 목적은 자본주의 국가 쪽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만들고, 소련 쪽의 승리를 실현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냉전이 끝난 지금, '반전'이라는 당연한 감성은 오로지 좌익이나 무슨무슨 사상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러한 것이 다만 보통의 상식이 되어도 좋은 시대가 된 것은 아닌가.
이 책에서 취급하고 있는 다른 테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어줄 독자로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상상한다.
과로에 지쳐 있는, 혹은 노동현장의 부자유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샐러리맨이나 사무직 여성을 포함하여) 노동자.
자신의 밭이 공장화되는 것에 혐오감을 갖고 있는 농민.
'경제'(구체적으로, 앞으로의 취직)라는 요소가 자신의 교육의 자유에 장애물이 되어있다고 느끼고 있는 학생.
광고산업이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는 소비자(특히 주부).
전쟁체험을 기억하고, 지금의 일본정부가 재군비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데 대해 충격을 받고 있는 노인.
전쟁을 체험한 바는 없지만, 앞으로도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젊은이.
남북문제는 '남'의 문제라기보다, 어느 쪽인가 하면, '북'의 문제라고 느끼고 있는 사람.
세계의 자연계가 사멸을 계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염려하고 슬퍼하고 있는 사람.
왠지 모르게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막연하고,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생각해보면, 이 리스트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이외에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통의식을 갖게 될 때, 그 의식이 '상식'으로 변할 수 있을까.
C. 더글러스 러미스 (C. Douglas Lummis)
193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 졸업. 정치사상 전공. 1960년에 미해병대에 입대하여 오키나와에서 근무. 1961년에 제대 후, 버클리로 되돌아가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다시 70년대 초 일본으로 와서 활동을 시작함. 1980년에 도쿄에 있는 쓰다(津田塾) 대학 교수가 되어 2000년 3월 정년퇴임. 현재는 오키나와에 거주하면서 집필과 강연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래디칼 데모크라시》(코넬대학 출판부, 1996년, 영문판),《래디칼한 일본국 헌법》,《헌법과 전쟁》,《이데올로기로서의 영어회화》(東京:晶文社)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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