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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혹은 어머니의 노동력에 대하여

아내 혹은 어머니의 노동력에 대하여

- 서울남부지방법원 2005. 7. 13. 2004가단67459. 손해배상(자) -

 

‘좋은’ 판결문, 찾기 어렵다. ‘대타’로 최근 판결문을 찾아봐도, 이미 다 소개되어 버렸고. 미친 척하고 지방법원에 전화를 했다. 어둠의 통로로 전달받은 몇 개의 판결문. 영 간이 맞지 않는데다, 밍밍하다. ‘뜨끈뜨끈한 게 뭐 없나’하고 생각하던 중,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 방송으로 전해오는 광고 멘트. ‘2008 세계여성포럼(World Women’s Forum 2008)’. 성우가 내뱉은 이 포럼의 주제에 필자, 뻑 갔다. “변화의 주역, 여성: 다양하고 지속가능한 미래 건설”. 와우. 그리고 광고멘트가 고막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 버스 밖에는 다른 풍경이 동공을 사로잡았다. 아침부터 츄리닝 패션에 등짝의 ⅓밖에 되지 않는 ‘노란가방을 둘러맨 그 어깨가 아름다운’ 그녀. 그리고 아이를 유치원 선생에게 ‘토스’해주고 돌아선 그녀들이 시작할 일과가 어른거린다. ‘살림의 주역: 다양하고 지속가능한 가사노동’. 이게 이번 호의 주제다. 판례리뷰를 받아보는 날이 공교롭게 그 포럼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고.

 

사실관계

이번 호, 최근 판결보다는 묵은지를 선택했다. 어차피 이 꼭지도 리뷰(review)니깐 진짜 리뷰 한 번 해보자는 의미. 모든 판결은 사실관계(Tatsache)에서 출발하지만, 이 판결은 사실 세계관(Weltanschauung)의 문제다. 따라서 사실관계는 한입에 끝난다. 택시기사 아저씨, 아줌마를 태우고 가시다가 정차중인 승용차와 진한 키스. 아줌마, 뇌진탕 증세 보이고. 여기까지 사실관계. 아줌마 스펙이래 봐야 연식이 1949년이라는 것 밖에(당시 나이 55세). 법원은 이 아줌마의 남은 여생까지도 판단해줬다. 약 27.24년 정도로.

어찌되었든 간에, 아줌마와 아줌마에게 손해를 물어줘야 할 회사(회사가 공제조합에 가입되어 있어,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가 피고다.)사이에 손해배상액의 범위를 둘러싼 쟁점이 이 판결의 노른자위 되겠다.

 

가사노동은 얼마짜리 노동인가

자, 아줌마가 뇌진탕 증세를 보이게 되면서 실제 가사노동에 전념하지 못해 생기는 ‘손해’를 회사측은 금전적으로 보상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법률적으로는 ‘상실한 가동능력에 대한 금전적인 총평가액 상당의 일실수입 손해’라고 엘레강스하게 표현한다. 뒷골을 한 손으로 받쳐 든 아줌마는 자신의 가사노동에 대한 하루치 수입을 ‘보통인부의 수입’을 기준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게 사실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이래서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아줌마의 주장에 손사래를 치며, 더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쪽은 다름 아닌 법원이었다. 웬일일까? ‘파격적인’ 판결을 자주 내리던 판사의 단독사건이기는 했지만, 감동의 거품이 빠지면서 한편으로 허탈함이 몰려왔다. 왜냐? 지금껏 판사들이 뭐했냐 이거다.

판사들도 제 어미가 있는 법. 어미의 발품을 밑천으로 신림동 고시촌에 틀어박혀 공부하던 그들이 판사가 되어 ‘불효자는 웁니다’며 용트림을 할지언정, 여지까지 과연 그들이 법원에서 제 어미와 같은 사람들의 노동력을 제대로 인정한 적이 있었나. 그런 의미에서 이 판결이 파격적이라면 우리도 어머니의 노동력을 노동이 아닌 ‘당연한 희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그런 의미에서 이 판결이 파격적이라고 평하는 건,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노동의 기초는 가사노동에서부터

우리가 노동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 더 나은 삶을 위해서도 있지만, 우선은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노동을 통해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 자아를 발견한다는 소리. 흔하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전제에는 또 다른 노동이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직장에서 품을 파는 일보다 밥 해먹고,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잠자리를 깔고 치우는 노동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우리들의 정서가 대를 잇고 있다. 오죽했으면 가정주부의 수입을 식모살이 수입에 맞춰서 계산한 것이 미안했던지, 대법원이 ‘그건 아니지’라고 판시한 것이 1968년이었다(대판 1968.12.24. 68다536.). 그래봐야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을 일용직 보통인부의 그것과 같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대법원의 인식은 40년에 걸쳐 지금까지 ‘지속가능한’ 것이 되어 있다.

 

가정주부=보통인부?

여하간 가사노동의 노동력 가치에 대해서는 1966년 대법원 판례가 최초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판결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보통 건강체로서 생존하고 있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성별 또는 결혼하여 가정주부가 되고 아니 되고를 불문하고 적어도 그 성별과 연령에 따르는 보통 노동임금 정도의 수입은 있는 것’으로 판단한 바 있다(대판 1966.11.12. 66다1504.).

사실 가사노동을 일용직 보통인부의 노동력과 ‘쌤쌤이’하는 게 사회적으로 합의된 바도, 어떤 근거도 없다. 판결문을 죄다 뒤져보고 하는 말이다. 그냥 판사들 꼴리는 대로 정한 것이다. 요기까지는 애교다. 가사노동에 대한 대법원의 기념비적인 작품은 따로 있다.

바로 가정주부를 시골형과 도시형으로 나누는 세포분열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시골에 사는 가정주부는 ‘농촌일용노동자’의 일당, 도시에 사는 가정주부는 ‘도시일용노동자’의 일당으로. 이러한 이상한 방정식 때문에 ‘삼천포시’에 사는 가정주부에게 농촌일용노동자의 일당을 적용할 것인지, 아니면 도시일용노동자의 일당을 적용할 것인지가 다퉈진 웃지 못할 사례도 있다(대판 1987.10.26. 선고 87다카346.). 개그맨들은 뭐하나, 이런 좋은 소재를 두고.

 

반기를 든 하급심

그러다 2005년에 들어 하급심에서 대법원의 입장에 반기를 들고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이유와 결론은 숙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별도로 가공하지 않고 날 것으로 내놓는다. 숨이 차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종래부터 가정은 재화나 용역의 소비만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을 뿐이나, 주부들이 가정에서 음식물을 만들거나 옷을 세탁·수선하며 육아와 자녀교육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당해 가정의 미래 설계 등 가정 경제의 경영업무’를 행하는 곳이라고 하면서, ‘가정을 소비의 주체로만 파악하는 전통적 견해에 따라 가정에서의 생산활동은 국민소득계정이나 국내총생산에도 포함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손해배상을 받음에 있어서도 근로자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수입을 얻는 도시일용보통인부를 기준으로 하여 그 수입을 산정’하여 온 지난날의 관행에 대해, 법원은 ‘가정에서의 주부의 역할이 앞서 본 바와 같이 단순 육체노동을 넘어서 가정 경제의 경영에까지 미치고 있는 이상, 가정 주부를 기능을 요하지 않는 경작업인 일반잡역에 종사하면서 단순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인 보통인부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 아니할 수 없고, 그 업무 성격상 보통인부보다 다소 높은 기능정도를 요하며, 특수한 작업조건하에서 작업하는 사람인 특별인부’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가동연한에 대해서는 판결문을 참조). 참고로 대한건설협회의 개별직종 노임단가표에 따르면 당시의 보통인부 일당은 52,374원이고, 특별인부는 66,051원이었다.

 

양질의 노동을 위한 가사노동

학자들께서 주구 창창 떠드는 양질의 노동(decent work). 먼저 이 분들께 한 말씀. 가사분담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강단에 서시기 전에 아내가 혹은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먹고 빨래해서 다려준 와이셔츠 입고서, 하루에 단 1분만이라도 그 노동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길 바란다. 물론 이건 필자를 포함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가사노동의 혜택을 입는 모든 분들께도 이하동문이다. 가능하면 함께 특별인부가 되셔서, ‘투잡’을 가지시기를 권한다.

양질의 노동이 정책적으로,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확대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양질의 노동은 아침에 따스한 밥을 먹고, 저녁에 깔끔하게 치워진 깨끗한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배려한 ‘특별인부’의 노동에서 시작된다는 점,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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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공공부문은 넓고 짜를 건 많다

 

공공부문은 넓고 짜를 건 많다

- 대법원 2008. 6. 12. 2006두16328.

전임계약직공무원(나급)재계약거부처분및감봉처분취소 -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 비정규직 확산이 사회적 문제로 고개를 치켜들게 되면서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 남용을 자제하겠노라, 정부가 먼저 ‘모범적 사용자’가 되겠노라고 이 대책을 만들었단다. 모범적 사용자? 웃기고 자빠지셨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가 되는 건 기대도 안했다. 하지만 ‘카노사’도 울고 갈 ‘굴욕의 칙서’가 된 이 대책. 이 대책이 천국과 지옥 사이의 연옥(煉獄)에서 무기계약직이라는 이름의 중생들과 재계약거절과 계약해지라는 위협적인 불길이 치솟는 24시 불가마에서 몸을 웅크린 비정규직들에게 염라대왕 장부로 둔갑할 것이라고는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건의 쟁점

원고와 피고는 ‘전임계약직 공무원(나급)’과 ‘서울특별시’. 먼저 ‘전임계약직’은 상근이고, 상근하지 않는 경우에는 비전임 계약직으로 구분한다(지방계약직공무원규정 제2조). 다음으로 ‘나’급. 나급 정도면 보통 ‘가방끈’이 긴 분들이 되시겠다. ‘급’이 된다는 말씀. 박사학위 소지자, 석사학위일 경우에는 2년 이상 해당분야의 경력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사건 고갱이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계약직 공무원에 대한 ‘재계약거절’이 정당한가의 여부. 둘째는 근무실적이 불량한 계약직 공무원에 대해 ‘보수를 삭감’한 것이 정당한지의 여부.

특히 이 사건은 행정소송이라, 계약직 공무원에 대한 재계약 거부나 보수삭감이 민간기업과 달리 ‘처분’인가 하는 점에서 행정법적 기본소양을 요구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소양, 운운하기가 어렵겠다. 이 사건 판결문만 보면 ‘안구 건강’에 위협이 될 만한 소지, 다분하다. 판결문 첫 문장이 15줄에 글자 수만 518개가, 막 뽑아낸 가래떡 마냥 한 문장으로 늘어져 판결문 서두에 똬리를 틀고 있다. 망막과 홍채에 경련이 오는 문장이 이 뿐만은 아니지만. 좀 먹기 좋게 썰어주시면 안되나.


원심과 대법원의 판단

행정소송에서 위법․무효를 다투기 전, 먼저 판단하는 것이 ‘법률상 이익’이 있는지의 여부다. 소송남발 때문인데, 법률상 이익이 없으면 판사들은 ‘기각’이라는 카드를 내민다. 첫 번째 쟁점에서 원심과 대법원은 계약만료 이전 계약해지 등의 불이익을 받은 뒤, 계약기간이 만료되었다고 하더라도 ‘법률상 이익은 없다’고 판단했다. 왜?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계약직 공무원에 대해 ‘재계약의무’를 부여하는 근거규정이 없으므로, 계약만료로 신분이 상실되면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해 봐야 별 볼일 없다, 이거다. 여하간 대법원은 이 사건 공무원에 대한 구제의 길을 친절(?)하게 옵션으로 던져주시고 있다(판결문 중 1. 참조).


두 번째 쟁점. 이 사건 공무원이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보수가 삭감되었는데. 이에 대해 원심과 대법원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원심은 「지방계약직공무원규정」․「서울시지방계약직공무원인사관리규칙」(이하 규정․규칙)에 의해 근무실적 평가결과 근무실적이 불량할 경우, 봉급액을 조정할 수 있으므로 보수삭감은 ‘징계’가 아니라 ‘계약의 변경(「규정」 제8조)’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상 공무원도 ‘근로자’이므로 임금에 관한 일반원칙을 비껴갈 수 없음을 못박았다. 그런 다음, 위 「규정․규칙」의 ‘상위법’인 「지방공무원법」뿐만 아니라 「지방공무원 보수규정」을 뒤져봐도 ‘보수삭감’의 직접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다만 보수삭감과 관련된 법적 근거는 「지방공무원법」의 징계규정 중 ‘감봉’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보수삭감 조치는 ‘징계’라고 보았다. 결국 징계라면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법하다. 또한 위 「규정․규칙」은 보수삭감에 대한 당사자의 절차적 권리나 구제수단도 마련하고 있지 않아 법률에 의한 위임의 근거나 그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써 ‘무효’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서울시장이 위 「규정․규칙」에 근거하여 계약직 공무원의 보수를 삭감할 권한을 사실상 부정했다. 너무 복잡한가. 그렇다면 엑기스만 뽑자. ‘법률에 의한 명확한 위임이 없는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으로는 공무원의 보수를 삭감할 수는 없다’에 형광펜으로 밑줄. 


재계약을 부여하는 근거규정이 없다?

다시 첫 번째 쟁점으로. 대법원은 이 사건의 재계약거부에 대해 법률상 이익이 없어 재계약거절의 정당성을 심사하지 않았다. 왜냐, 재계약의무를 부여하는 근거규정이 없기 때문이란다. 궁색하다. 노동법에 재계약의무를 부여하는 규정이 있는가. 좋다, 몰라도 된다고 치자. 재계약의무, 이런 게 있으면 기간의 정함이 있는 계약은 왜 체결하는가. 가만히 있어도 사용자가 재계약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말이다. 넌센스다.

재계약의무를 규정하는 법률이 있든 말든 간에, 재계약을 거절한 경우 그 거절이 정당하지 않다면 ‘해고제한의 법리가 유추 적용(서울행판 2008. 3.26. 2007구합37629; 最高裁 1974. 7. 22. 東芝柳町工場 사건)’되어 부당해고로 인정된다. 그러면 당연히 이러한 법리가 계약직 공무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가. 안될 이유, 없다. 앞서 대법원도 공무원이 ‘근로자’임을 전제하지 않았나. 그러나 안된다. ‘정원과 예산’이라는 ‘티오와 돈줄’, 특히 정부가 영구버전으로 ‘예산음~따’라고 하면, 더 이상 법적으로 다투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이건 삼척동자 사촌 동생의 옆 집 친구도 다 아시는 바고.


불합리한 기준과 원칙들은 제거해야

지난 해 6월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이 나왔을 때다. 무기계약 전환을 둘러싸고 공공기관들은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정부는 공공기관들에게 이 대책에 따른 추진경과를 제출하라고 닦달했고, 기관들은 머리를 싸매고 ‘묘수’를 찾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내놓은 묘수라는 게 가관이었다. 심지어 행정수도 지방이전 때까지 ‘개기면 되지 않겠나’라는 입장까지 내비치는 건, 단연 압권이었다.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 현재 위치와 향후 방향을 가늠할 육분의와 나침반이 되겠다고 했음에도 실상 그것들은 자침(磁針)도, 눈금도 없었다.

이 사건의 경우에도, 계약직 공무원에 대한 「규정․규칙」중에는 ‘업무를 태만히 하거나 업무수행 능력이 부족한 때’, ‘기타 채용계약상의 해지조건에 해당될 때’ 등 애매한 조항들로 계약해지의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더구나 무기계약으로 전환된 공무원이든, 공공기관의 근로자든 간에 이들에 대한 별도의 인사관리규정을 두고 근무평가를 실시하여 계약해지 등의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건 고용에 있어 분명 차별적 소지가 있다.

그런데 이건 일도 아니다. 심각한 건, 정권 바뀌면서 위아래 좌우 구분 없이 정부․위원회․공공기관을 불문하고 말단의 비정규직부터 꼭대기의 기관장까지 댕강댕강 짤라내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골 때리는 건, 이런 일들이 일단 화끈하게 법전을 덮고 시작된다는 점이다. 심히 걱정된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놓아버린 정신’을 한시라도 빨리 찾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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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대리운전에 짧은 보고서

 

대리운전에 짧은 보고서

- 대구지방법원 2008. 5. 9. 2007가단108286 채무부존재확인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영국 경험론의 ‘본좌’다. 그의 유명한 한 마디. ‘푸딩을 증명하는 방법은 푸딩을 먹어보는 것이다’. 이번 사건, ‘대리운전기사’의 근로자성과 관련된 것인데. 이 참에 ‘르뽀형’ 판례평석을 시도했다. 우선 현장으로 직접 출동. 대리운전 불러서 아현동에서 부천까지 가봤다. 요금은 2만원. 약 45분가량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여 차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 결론도 내려졌다. 역시나 푸딩의 맛은 달지 않았다.


사건의 얼개

이 사건은 대리운전회사에서 대리운전기사로 ‘일해 온’ 사람의 퇴직금과 관련된 것이다. 근데 소송을 제기한 측은 회사다. 퇴직금을 지급해달라는 대리운전기사에 대해 되려 회사는 자신에게 퇴직금 채무가 없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회사측 승소. 퇴직금 안줘도 됨. 허나 뒤끝이 남았다. 확인차, 현장 투입. 시동걸고 출발.


대리운전, 실태는 이렇다

대리운전, 신종업종이라지만 나름 족보 있다. 대리운전의 원로급들은 최초로 대리운전이 등장하게 된 시기를 1980년대로 본다. 당시 서울 강남의 고급유흥업소들이 고객관리차원에서 대리운전을 시작했단다. 부유층 양주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자동차 보급이 늘어나고 음주단속이 강화되면서 1998년 기점으로 부흥의 쓰나미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택시의 빈틈을 비집고 ‘신종사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후 시장규모도 점점 커져 현재까지 대리운전 업계의 ‘보이지 않는 손’이 주무르고 있는 돈은 약 3조원정도, 그 종사자는 대략 1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이 중 전업 대리운전기사는 53%정도이고, 나머지는 부업으로 핸들을 잡고 있다. 주 연령은 약 43%가 30-40대. 여기까지 인터넷에서 모셔온 글.

다음은 업계 종사자의 목소리. 대리운전의 주된 고객은 만취고객. 허나 장애우나 환자들의 이송을 위한 대리운전도 필요하다는 지적은 신선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리운전, 대중적으로 애호하기는 불편한 부분이 있다. 최근 ‘혜진이․예슬이 사건’의 범인이 대리운전기사라고 밝혀져 주변의 시선, 곱지는 않단다. 여하간 패스. 대리운전의 특징은 야간근무에, 주말이나 휴일이 대목이라는 점. 여기서부터는 스피드 일문일답.

하루에 몇 건? 보통 3건. 콜수수료? 20%. 보험? 비싸고 가입해도 혜택 못 받는다. 사고처리? 다 내 책임. 노조? 못 만든다. 야간수당? 장난치나. 집에는? 지하철이나 택시 탄다. 산재는? 되면 고맙지. 휴일? 두 번 쉰다. 월수입? 150만원 안되고, 지난달 110만원. 퇴직금? 없다. 불합리한 점은? 보증금. 또? 회사 나갈 때 제때 보증금을 안준다. 투잡인가? 전업이다. 기름값이 오르는데? 우린 기름 안든다(아, 맞다!).


근로자성 판단, 무엇이 문제인가

특수한 형태로 근로를 제공하고 있는 일군의 종사자들(‘특수고용직 종사자’)에 대한 ‘근로자성’ 여부가 바로 이 사건의 쟁점이다. 근로자성과 관련된 판례들은 수북하다. 근데 도움, 안된다. 노동시장은 계속 변모하고 있지만, 그에 대응한 법원의 근로자성 판단기준은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 판결문에도 언급되어 있는, 근로자를 판단하는 기준(대략 큰 카테고리로 10개 정도), 법원에게는 금과옥조다. 자판기처럼 저마다 똑같은 판결을 뱉어나고 있나니. 사실 법원의 기준이 넌센스인 경우도 있다. 가령 사회보험의 가입여부가 기준이 되는 것이 그렇다. 산재법이나 고용보험법이 당연히 근로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인데, 애시당초 대리운전 기사에게는 적용될 여지는 ‘없음’이다.

외형적으로 사용자와 근로자의 ‘종속관계’가 흐릿하다고 해서, 근로자다 아니다라고 명암을 가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게다가 근로자를 옭아맨 목줄과 밥줄이 걸린 마당에 법원의 판단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이 사건도 마찬가지. 대리운전기사에게는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으나 대리운전과 비슷한 근로형태인 ‘퀵서비스 근로자’에게는 다른 하급심에서 근로자성을 인정한 바 있다(서울행법 2007.10.23. 2006구단10552.).

더군다나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는 것은 법원의 주특기 아닌가. 그러나 제대로 종합이 안되거나 어떤 부분이 고려되고 있지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회사의 임원’을 근로자라고 판단하는데는 주저함이 없으면서(대판 2005.5.27. 2005두524), 특수고용직의 경우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다시 생각해 볼 부분이다. 학계에서도 판례의 태도를 지지하는 견해는 거의 없다. 이는 현재의 판단기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퀵서비스 판결의 시사점

앞서 소개한 ‘퀵서비스 판결’에서 주목할 점은 이 사건과 사실관계면에서 유사한 측면이 많다는 데 있다. 이 사건 법원에서는 자신의 비용으로 교통사고 보험에 가입하는 점, 출퇴근이 자유롭다는 점, 수수료가 자동으로 출금되는 방법으로 수익을 배분한 점, 취업규칙 등이 적용되지 않아 징계처분을 할 수 없다는 점 등을 기초로 근로자성을 부정하였다. 한 편 퀵서비스 판결에서는 근무시간과 근무일이 특별히 정해져있지 않은 점, 직접적인 보수를 지급받지 않은 점,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점, 오토바이가 근로자의 소유이지만 배송지시를 따르지 않아도 정해진 제재가 없다는 점, 4대 보험가입이 되어 있지 않은 점 등을 인정하면서도 근로자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결국 ‘종속적 관계’에서 노무를 제공하였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을 내린 이유는 ‘노동관계법에 의해 보호를 받을 필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법에 의한 보호 필요성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노동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는데 따른 기본 포지션이다. 분명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에게 노동법을 적용한다면 기업들의 볼멘소리, 쌍메아리로 들린다. 왜, 여지껏 싸고 수월케 써왔으니깐. 그러나 한 산업의 균형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서라면 이제는 쌍팔년도식은 안된다. 일방의 희생을 강요한다면, 양초공장 불티난다. 행여 규제완화, 이런 말 마시라. 당연히 보호할 대상을 보호하는 것은 규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의’다. 대안은 널려있다.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아니 주워 담을 생각부터 하자.


너 아니어도 쓸 사람 많아

근로자들이 쉽게 이직을 생각한다면 그 직종의 사회적 지위는 낮다. 앞서 대리운전기사도 기회가 되면 언제든 다른 일을 고려중이라고 했다. 질 낮은 직장으로 전락되면 될수록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기도 힘들다. 이러한 사정 아래서 근로자성을 인정하라고, 노조를 설립하겠다고 하면, 사용자들은 ‘너 아니어도 쓸 사람 많아’라고 되받아칠 것이다. 그렇다. 신규인력은 계속 빈자리를 대체하고 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좋은 근로조건이 보장된 직장은 그만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은 곧 기업의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보라. 법원 또한 근로자라고 인정하는 일에 경영계 눈치보며 쫄지 마시라. 오히려 근로자들이 늘어나면 국가차원에서 이롭다. 왜? 세원(稅源), 노출되고 소비가 늘어나니깐. 그럼에도 현실은 근로자로서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근로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답답하다. CEO라고 행세하시는 이 땅의 최고지도자께서 국민들을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직원으로 여기시면서도 정작 ‘근로자성’은 어지간히도 인정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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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수습할 때 ‘수’자는 짐승 수(獸)자 거든

 

수습할 때 ‘수’자는 짐승 수(獸)자 거든

- 서울행법 2008. 1. 18. 2007구합13968 부당해고구제재심신청기각판정처분취소 -


사건의 재구성

한국영재아카데미아학원의 김중기 원장실 앞. 이명백(가명)은 한 숨을 쉬고 노크를 한다.

“원장님, 저 명백이예요.”

“어, 명백이 왔어? 앉아. 야, 근데 너 수학강의 좀 해봤어?”

“제가 예전에 토피아 학원에 있을 때 수학을 맡았는데요. 고등부 수학은 껌이예요.”

그래도 학원장을 안다는 게 큰 도움이다. 이제 매달 이명백의 수중에 월 200만원이 떨어지게 되었으니. 여하간 내일부터 출근하란다. 몇 일이 지나 학원장이 이명백을 불러, 이력서를 내보라고 한다. 그러나 이명백은 학원장에게 이력서를 주지 않았고, 몇 일이 더 흐른 뒤 학원강의가 시작되었다.

이명백은 초등부 2개, 중등부 2개, 고등부 1개 반을 맡아 1개월 동안 학생유치를 위해 무료강의를 시작했다. 한 달 후. 모든 강의를 유료로 전환한 뒤, 고등부 1개 반이 폐강되는 일이 발생되었다. 수강신청자가 없었기 때문. 처음과 다르게 학원장은 이명백에게 학원생 관리와 학생부일지를 작성하라고 다그쳤고, 보강수업까지 요구했다.

얼마 후,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학원장은 이명백에게 학생부일지 작성과 보강수업을 빼먹었다는 등 별에 별 이유를 들어 학원을 나가라고 지시한 것이다. 불과 ‘69일’만의 일이었다.

이미 학원장은 이명백의 경력을 토피아 학원에 문의해 확인했고, 토피아 학원측에서는 고등부 수학까지 담당할 수 있는 정도의 경력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학원장은 결국 사기죄로 이명백을 고소하기로 맘먹는다. 더구나 고등부 1개 반의 폐강이 이명백 때문이라며, 결국 이명백을 학원 밖으로 내쫒았다. 그리고 학원장은 이명백을 ‘사기죄’로 고소까지 하게 되었지만, 이명백은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명백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들의 감정싸움은 점점 법정싸움으로 비화되게 되는데…….


판사님의 문학적 상상력에 관하여

이 사건에 대해 지방노동위원회(2006부해136), 중앙노동위원회(2006부해1010) 모두 이명백의 손을 들어준다(이 사건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이 학원이 5인 이상 사업장인가의 여부이고, 또 하나는 해고의 정당성 문제이다. 첫 번째 쟁점은 판결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왜? 사안에 비해 해고라는 조처가 과도하다는 이유다.

그러나 행정법원은 입장이 달랐다. 근로자측 패소. 법원은 ‘시용(試用, 참고로 우리 판례상 ‘수습’과 시용은 구분이 안된다)’이란 걸 들고 나와, 이명백이 ‘시용근로자’이기 때문에 해고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필자, ‘급당황’했다. 잠시 ‘실용’이 아닌지 확인해봤다. 아, 시용, 맞다. 좌심방 우심실 안정시키고 나서, 판결문을 쓴 판사들의 이름을 찬찬히 점검했다. 민중기, 원익선, 정욱도 판사. 마침, 하나 걸렸다.

이 세 분들은 ‘이색적’인 행정판례들로 신문에 여러 번 오르내린 적이 있다. 얼마 전 이런 기사가 떴다. 지난 1월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이 노원구청에 납골당 설치 신고서를 제출했지만 학교보건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이 신고는 반려된다. 천주교측은 노원구청의 처분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하였고, 이 과정에서 법원은 학교보건법의 관련 조항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를 심사해달라는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다. 바로 이 사건의 주심판사가 원익선 판사였는데, 당시 결정문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음이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볼 수 없는데도 정작 우리는 죽은 이들의 공간을 먼 세상으로 떠난 이들만을 위한 자리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중기 판사도 이 결정문을 보고서는 ‘흡족’했다고 하고, 필자도 흡족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아름다운 말로 속을 뒤집는 판결이 나올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   


느닷없는 시용(試用)논리

여하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먼저 ‘시용’이라는 건, 정식으로 채용하기까지는 ‘아리까리’한 부분이 있으니깐, 일단 시간을 좀 두고 해당 근로자의 능력이나 적격성을 지켜보겠다는 거다. 그러니 사용자는 보통 1-3개월 동안 시용기간을 두고 해당 근로자가 ‘영 아니다’ 싶으면 시용근로자에 대해 해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처럼 통상해고보다는 쉽게 사람을 내보낼 수 있다는 것이 시용제도의 잇점이다.

근데 시용기간을 명시하지 않았다면 정식채용으로 보는 것이 대법원(대판 1984.1.24. 83도2068 등)의 일관된 입장 아닌가. 이 사건에서 징계대상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법원은 이명백이 ① 입사시 구두로 근로계약을 체결하였다는 점, ② 능력을 검증받는 별도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점, ③ 입사이후 해고까지 불과 2개월 남짓 근무했다는 점, ④ 이 학원은 이명백이 입사 후에 개원한 소규모의 신설학원이었다는 점 등을 들어 이 학원과 이명백과의 근로계약을 ‘시용계약’으로 보았다. 더구나 법원은 이러한 근로계약에 대해 ‘통상의 근로계약에 대한 것보다 낮은 수준의 기대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관심법까지 행하셨다. 이렇게 판결하면 ‘흡족’한가? 이번에는 아니다. 

이 사건 사실관계에서 눈알에 식염수를 됫병으로 갖다부어도 ‘시용’이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추정할만한 건덕지도 없다. 이 판결문 전체에 ‘시용’이라는 단어는 판결문 말미에 딱 4번 나온다. 그게 전부다. 시용계약에 대한 명시적인 내용도 없고, 취업규칙에도 시용이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으며, 시용에 관한 관행도 나타나지 않는다.


사회통념상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다는 말

독자 분들도 판결문을 보셨겠지만, 해고사건의 패소판결문, 맨 마지막에는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하여 어쩌구저쩌구 사회통념상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 사회통념이 뭔가? 통념이라는게 일반적으로 고개가 앞뒤로 끄덕여지는 뭔가인데, 이 사건이 언급한 통념에 대해서는 고개가 좌우로 끄덕여진다. 사회통념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 사기다.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1심, 2심, 대법원까지 지네들 사회통념이 다 다르다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나. 결국 ‘통념’은 판사들의 주관적 ‘관념’에 불과하다. 판사들의 주관적 관념이 사회통념을 지배할만한 근거라도 있으면, 좋다, 그걸 사회통념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처럼 ‘있지도 하지도 않은 계약’을 법원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놓고, 이를 가늠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더구나 논리전개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판결문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낱글 몇 자를 판결문에 박아넣기 보다는 정확한 사실관계와 명확한 법적 논리라는 씨줄과 날줄로 소송당사자를 빼도 박도 못하게끔 치밀하게 엮어놓을 때이다.


수습, 인턴, 견습, 시용이라는 굴레

얼마 전 M본부의 TV 드라마에서 “수습할 때 ‘수’자는 짐승 수(獸)자거든. 따라서 군대로 치면 군견이나 군마에 해당돼. 고로 수습동안은 인간이 아니라는 얘기지”라는 대사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 수습, 인턴, 견습, 시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많은 근로자들이 불안정한 고용상태에서 불이익을 감내하는 경우, 적지 않다. 고용안정이라는 에덴동산에 들어가기 위해 장미덩쿨에 찢어지고 베이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 또한 노동법의 임무다. 노동법이 말랑말랑했으면 하고 바라는 분들께는 큰 짐이 되는 이야기이나, 이것이 약자보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노동법의 알파요, 오메가란 사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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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아줌마라고 만만히 보지 말라

 

아줌마라고 만만히 보지 말라

- 대판 2007.12.28. 2007두5011.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 취소 -


아줌마의 본령은 ‘무대뽀’와 ‘배째라’다. 적어도 앞뒤 가림 없이 들이대는 것이 무대뽀라면 그냥 ‘몰라’하고 버티는 게 배째라다. 버스에서 양말 신는 건 애교다. 지하철에서 ‘좌우로 밀착’을 온몸으로 행하사 홍해바다를 가르듯 2호선 은빛 좌석을 찬란하게 열어재끼는 생활기적은 더 이상의 전도가 필요 없는 대목. 최근에는 투기는 아니라며 땅만 사랑했노라는 아줌마나 유방암이 아닌 것이 기뻐 오피스텔을 선물 받은 아줌마의 등장은 ‘권력형’ 무대뽀와 배째라의 출현을 예고해 기존의 ‘줌마계’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 기존의 무대뽀와 배째라 정신을 뚝심과 근성으로 승화시킨 ‘정통 스탠다드 엑셀런트 케이스’ 되겠다. 


이 사건은 이렇다

이 사건, 대법원 사건답다. 소송관련 당사자만 25명. 원고는 수원시장. 피고는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는 죄다 ‘피고측 보조참가인’이다. 즉, 대법원 판결 정본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은 ‘아줌마들’. 현정, 영란, 순애, 기순, 순자, 숙자, 상희, 미순, 금숙, 춘자, 옥임, 미경, 미숙 등등. 아줌마, 맞다. 행여 ‘처이’가 계셨다면 사과드린다.

사실관계, 고맙게도 너무 간단하다. 아줌마들은 수원시내 구청 및 동사무소 청사관리원 등으로 일했다(지방노동위원회 초심판정을 보면 사용자가 ‘동장’인지, ‘수원시장’인지도 다퉈졌다). 이들은 2001년 이전부터 상용직으로 고용되어 근무하여 왔다. 길게는 16년 동안 근무한 아줌마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고용이 유지되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 소위 ‘자동갱신’. 철밥통은 아니더라도 ‘스댕밥통’은 되었다는 말인데. 여하간 수원시는 ‘비정규인력 상용직 감축계획’에 따라 아줌마들을 해고하고 2001년 1월 ‘일시사역인부’라는 이름의 계약직으로 다시 재고용한다. 그러다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에서 ‘지침’이 내려왔다. ‘일시사역인부’의 상시고용을 금지하라고. 수원시야 행정자치부가 까라면 까는 수밖에. 수원시는 근로계약기간이 종료되었다는 이유로 아줌마들의 재고용을 거절한다. 결국 아줌마들, 정부의 지침으로 인해 스댕밥통이 찌그러지면서 지방노동위원회부터 대법원까지 숨찬 법정 투쟁을 시작한다. 얼마 전 이랜드 아줌마들도 그랬지만, 정작 그들이 투쟁하는 이유는 스댕밥통 때문이 아니라 장기간 쌓아놓은 신뢰와 그들의 자존심이 찌그러졌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의의

이 사건의 고갱이는 두 가지다. 첫째는 정부의 지침과 경영상 해고문제이다. 종래의 판례는 경영상 해고를 다툼에 있어 정부가 예산삭감, 구조조정 등 지침을 내리게 되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대판 2002. 7. 9. 2000두9373 등). 정부예산이나 정부보조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의 경우에는 정부의 지침을 피할 수 없다는 점, 법원도 왜 고민이 없었겠나. 그러나 냉면 면발이 한 입에 끊어지듯 지침 한 방에 밥줄이 묶음채로 끊어지는 사태를 막는 최후의 보루는 법원이다. 적어도 경영상 해고를 규정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제24조가 있는 한, 경영상 해고에 대한 판단은 엄격히 이뤄져야 한다. 이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행정자치부의 강력한 지침’이 내려진지 얼마 되지 않아 고용 중지의 통보가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도 근로기준법 제24조의 적용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둘째, 반복 갱신된 근로계약이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의 여부. 이 사건의 경우, 지속적인 고용관계를 장기간 유지한 점, 일부 아줌마들은 2003년경 근로계약을 체결하면서 61일 내지 75일을 일하기로 했지만 150일 이상 근무하거나 계약서를 아예 작성하지 않은 채 계속 근로를 제공한 점 등을 들어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으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판례 법리는 ‘연세대 한국어학당 사건(대판 1994.1.11. 93다17843)’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는데, 법원은 여전히 이 판례 법리를 적용하는 데는 인색하다. 그래도 이번 사건에서는 이 판례법리, 대법원이 과감하게 한 번 쏴주셨다.

옵션 하나. “기장갱반 형사기근”. 앞서 소개한 판례와 유사한 판례가 워낙 귀해 공인노무사 시험 공부할 때 위 판례를 이렇게 외워두었다. “ ‘기’간을 정한 근로자라 할지라도 ‘장’기간에 걸쳐서 그 기간의 ‘갱’신이 ‘반’복되어 그 정한 기간이 단지 ‘형’식에 불과하게 된 경우는 ‘사’실상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 참고로 중간 중간 기억이 안나는 부분은 ‘기간’을 넣어주면 연결된다는 점, 기억하시라.


과연 고용보장조치가 경직적인가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이런 기사가 떴다. 2007년 세계은행(IBRD)이 178개국의 기업환경을 조사해 봤는데 우리나라가 기업환경 여건 30위, 고용분야 131위, 노동경직성은 동아시아 평균보다 2배 높게 나타났단다. 아무리 그래도 선진 노사관계, 선진 노동시장을 얘기하는데 동아시아와 우리랑 비교하는 건, 좀 밸이 꼴린다. 그리고 기사가 의도하는 수가 너무 약지 않는가. 이런 수치를 가져다 쓰는 사람들은 우리 노동시장이 ‘경직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게다. 그래도 우리나라, 그리 뭔가 심각한가 싶어 ‘세계은행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져봤다.

‘2008 기업환경보고서’, 일단 뭘 보고 쓰긴 썼더라 이거다. 내용을 살펴봤다.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보고서의 평가기준에는 고용난이도, 근무시간 유연성, 해고난이도, 고용경직성, 비급여 노동비용, 급여 대비 해고비용 등이 제시되어 있었다. 일단 점수는 1점에서 100점까지. 1위는 당연 미국. 비급여 노동비용이 8점인 것을 빼면, 모든 항목이 ‘0’점이다. 아, 깬다. 이게 선진국이란다. 근데 유럽 쪽으로 가보니, 더욱 황당하다. 해고난이도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독일, 그리스, 프랑스 등이 40점인데, 우리나라도 40점이다. 일단 이 모든 나라들은 미국에 비해 60점이 모자라므로 후진국 대열에 들겠다. 다음은 고용경직성. 일본과 스위스가 17점, 그 외 이탈리아(38), 오스트리아(37), 네덜란드(42), 노르웨이(47), 스웨덴(39), 독일(44), 프랑스(56) 등은 우리나라(37)와 더불어 투자위험 국가라고 할 수 있겠다.


복직에 대한 희망마저 빼앗지 말아야

앞서 고용경직성, 해고난이도 운운하면서 외국인의 투자를 무기로 근로자들을 위협하는 논리, 그 이면에는 이번 사건과 같은 해고의 최대 피해자들 중 많은 수가 아줌마들과 같은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면서, 묵묵히 일해온 이들에게 해고는 형벌과 다름없다. 지난 십 수 년간 저항 없이 일해오던 그들에게 해고는 그들을 인생의 벼랑에 내모는 일이다. 아줌마들은 그 형벌의 부당함을 2003년 지방노동위원회를 시작으로 대법원까지 근 5년을 싸웠다. 결국 국가가 아줌마들을 ‘투사’로 만든 셈이다. 더 큰 문제는 다시 복직이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용자들이 ‘개길 수 없도록’ 만든 법적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부당해고에 대한 벌칙이 삭제되었다는 말씀. 설사 소송에서 이겨도 복직을 시켜주지 않으면, 여태까지 들락거렸던 법원이 아닌, ‘천막’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법상식에 비춰볼 때, 지극히 당연한 판결이다. 당연한 판결을 받는데 몇 년씩 걸리는 비극이 그나마 ‘승소’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그나마 이번 판결로 노동법이 아줌마들을 껴안아 줄 수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권리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격언, 아실게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에서는 깨어있는 것만으로는 보호받지 못한다. 싸워도 절반만 보호되는 현실. 나머지 절반을 위해 이 땅의 아줌마들은 다시 또 싸울 것이다. 갑자기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렇다. 태초에 아줌마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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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민주주의의 척도는 노사관계

 

민주주의의 척도는 노사관계

- 서울행법 2007. 12. 27. 2007구합19300 부당징계구제재심판정취소 -


화투(花鬪), 꽃들의 싸움. 꽃들이 아름답다고 해도 싸움은 싸움이다. 나고 피고 지고 떨어지는 4계절 속에 담겨있는 치열함이 바로 삶, 그 자체다. 게다가 화투가 제 마음대로 되나. 뒤집은 패가 쩍쩍 달라붙는 놈이 있는가 하면 지질이도 안 붙는 놈도 있다. 이게 인생이다. 실력은 ‘끗발’의 동생친구의 친구동생뻘이다. 더구나 단 한 번, 잘 못 던진 패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왜? 화투계의 법치주의, ‘낙장불입(落張不入)’ 때문. 우리 근대사도 낙장불입의 폐해를 충분히 경험했다. 식민지 이후 한국전쟁으로, 군부독재와 외환위기로 이어지는 광박과 피박의 역사. 여태껏 우리는 광박과 피박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쳐왔다. 광박이나 피박이야 벗어날 구멍이나 있었지만. 근데 이번 정부, 불길하다. 연 경제성장률 7% 공약. ‘멍박’은 열끗 7장, 둘 다 쉽지는 않지만. 진짜 ‘멍박의 시대’가 도래하는 건 아닌지.


사건의 배경

이 사건의 두 주인공을 모시겠다. 한쪽은 철도노조의 조합간부 3명. 이들이 원고다. 이중 1명이 선정당사자가 되어 소송을 진행했다. ‘선정당사자’란 소송의 편의상 동일한 사건에 대해 한 사람이 총대를 메는 것이다. 물론 총대 멘 사람에게 내려진 판결의 효력은 나머지 두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아참, 다른 한쪽은 한국철도공사.

일단 이 사건의 배경부터 살펴보자. 때는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도산업’은 정권이 식칼을 잡는 순간 제일 먼저 도마 위에 올리는 주요 메뉴라는 사실, 다 아실게다. 노태우씨가 주방장 하실 때부터 현 봉화마을 주민 노무현씨에 이르기까지 민영화 논란이 줄곧 이어졌다. 결국 공사로 전환되면서 면영화 논의는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미 팔을 걷어 붙였다. 여하간 2005년 철도청이 철도공사로 전환되면서 철도공무원들의 신분이 일반 근로자로 바뀌게 된다. 신분 전환, 타격 크다. 임금부터 퇴직연금까지 줄빠따로 영향있다. 게다가 조직개편과 경영혁신에 따른 불만이 고조되어 갔다. 결국 노조는 한 번은 들이박아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고 판단한다. 사실 ‘내 속에 정부있다’라고 뇌까리는 철도경영진에게 ‘쨉’만 던져서는 철도 경영진이 움직일 리 만무하다. 내장을 진동시켜야 뭔가 뱉어낸다. 이러한 대정부투쟁, 철도노조는 이미 2003년에도 결행한 바 있다. 이러한 얼개는 철도노사관계를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알파이자, 오메가다.


사건의 내용

사건의 내용, 비교적 간단하다. 조합간부 3명의 부당징계를 다투는 이 사건. 그러나 본질은 직권중재의 문제다. 우선 철도노조 파업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당시 철도노조가 총파업에 돌입하기 전, 중앙노동위원회는 ‘총 3번’에 걸쳐 중재회부 보류를 결정을 내린다. 교섭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사의 입장 차이가 커 최종합의에는 이르지 못한다. 결국 노조는 2006년 3월 1일 총파업 깃발을 올린다. 이에 공사는 최종 긴급업무복귀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에 불응한 조합원 2,754명에 대하여 직위해제 처분을 내리는 강경책을 선택한다. 직위해제 처분을 받은 이들 중 원고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직위해제 처분은 철도노조의 파업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파업이 정당성을 가지는지를 따져보아야 징계 또한 정당한지를 한 큐에 알 수 있다.


주장과 판단

원고들은 중앙노동위원회의 중재회부 결정에 하자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주장의 요지는 두 가지다. 첫째는 특별조정위원회가 조정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수공익사업장은 일반 사업장과 달리 ‘특별조정위원회’가 조정을 담당한다. 당시 특별조정위원회가 철도노사의 조정과정에서 조정안을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동 위원회의 권고결정도 없이 중재회부 권고를 했고, 이 권고를 받아 중앙노동위원회가 직권중재를 때렸기 때문에 중재회부 결정은 무효다, 이게 원고측의 주장이다. 둘째는 특별조정위원회가 중재회부 권고를 ‘조건부’로 했는데, ‘조건부 중재회부 결정’은 법적 근거가 없다, 그래서 위법하다는 게 원고들이 주장하는 요지다. 

이에 대해 법원은 노동위원회 규칙(제48조 제6항)에 의해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경우, 특별조정위원회가 조정안을 제시하지 않아도 위법하지 않으며, 중재회부 시기를 조정하여 권고하는 조건부 중재회부 결정권한도 있다고 봤다. 결국 파업은 ‘불법파업’이라는 말이다.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다.


징계 최소화 합의, 구색 맞추기였나

철도노사는 파업 이후 단체교섭을 계속한다. 그리고 2006년 4월 1일 단체협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 합의서에는 조합원들의 징계를 최소화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위해제 처분 이후 징계위원회가 십 수차례 열렸다. 물론 징계가 일부 완화되거나 감경된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년 8월까지 2006년 3월 1일 파업에 대한 징계처리가 계속되었다. 특히 중징계를 받은 395명 중 303명이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하고, 취하자 30명을 제외한 273명 중 57명이 부당징계 판정을 받는다. 그러나 공사는 57명에 대하여 재징계를 결정한다.

노사가 단체협약을 체결하면서 공사는 징계를 최소화하겠다는 합의서에 싸인을 했다. 물론 징계를 최소화하겠다는 것이 징계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공사 입장에서 볼 때 불법파업이니깐 징계, 할 수 있다. 다만 ‘최소화’ 하라는 것이다. 최소화의 의미는 ‘수와 정도를 가장 작고 적게’, 이거다. 왜? 공사도 불법파업에 대한 자기 책임을 없다고 할 수 없으니깐. 따라서 징계를 최소화한다는 의미는 징계 받은 자의 죄를 사해주심이 아니라 징계한 자의 과오도 있으니 ‘똔똔’하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또 싸울 순 없지 않나. 근데 아직도 싸우고 있다. 원래 처지가 비슷하면 똔똔하는 거지, 한 쪽으로 힘이 쏠리면 똔똔할 이유, 없다.


자율적인 분쟁해결 운운하면서

작년 11월 16일에도 철도노조가 파업을 예고했었지만, 불발에 그쳤다. 이때도 중앙노동위원회는 직권중재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사실 파업 3일전인 11월 13일, 직권중재를 폐지하고 ‘필수유지업무’로 대신하는 노조법 시행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게 자뻑이 아니고 뭔가. 직권중재 폐지는 자율적인 분쟁해결을 위한 디딤돌이었다. 근데 국무회의에서는 직권중재 없애자, 해놓고 딴 데에서는 직권중재 결정을 내리는 건 뭔가.

물론 갈등적인 노사관계, 좋아하는 사람 없다. 하지만 조합원 3만, 3만 명의 근로조건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노사관계 협조가 안된다, 이런 어불성설도 없다. 당연히 싸움이 생길 수밖에. 문제는 해결방법. 3만의 근로조건 문제, 쉽게 볼 문제가 아니다. 왜냐, 3만 개의 우주가 그 밑에 딸린 어림잡아 10만개 밥숟갈을 쥐락펴락하기 때문이다. 협조, 협조 노래를 부르는데, 유럽의 노사관계 역사가 200년이라고 싸움 안하는가. 우린 ‘노사관계’라는 걸 겨우 20년 경험했다. 아직도 180년 남았다. 게다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좋은 근로조건은 옵션인가. 이번 정부가 기업에게만 ‘싹쓸이’할 수 있는 여건만 고려하는 건 옳지 않다. 근로자들의 삶의 질도 고려하기를 바란다. 노사관계는 게임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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