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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관계론"

관계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교각사이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교각이 절단되면 결국 관계는 파괴된다. 우리가 만나도 만나도 일정한 사람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는 대상이 있다. 특히 가족. 동생이건 오빠건 형님이든 간에 항상 싸우거나 티격태격하는 사이라면 그런 관계와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관계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태도의 문제는 일정한 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변화하지 어렵다. 그게 소위 선입관이라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관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미 형성된 관계는 익숙해진터라 그것이 쉬이 변화되거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구조로 변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예수가 고향인 나자렛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거의 돌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성경구절에는 "어디서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쓰여져 있다(마르코 6장 4절). 결국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목수집 꼬마아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목수집 아이로 본 것이다. 이런 관점과 태도는 개선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변화해도 상대방이 그러한 변화을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관계는 기존의 관계를 더욱 고착화하게 한다.

 

결국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지기 바란다면 예수처럼 기적을 행하거나 인류를 위해 죽는 길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수 있다. 다만 상대의 인식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계기로 부터이다. 그런 계기의 형성, 계기의 형성은 간접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경험(experience)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한 경험도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보통 우리는 선생을 요구하게 된다. 스승이라고 칭할 수 있는 좋은 선생.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 경험을 극대화하고 경험 속의 깨달음을 그 범위 내에서 국한 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확장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스승의 존재가 바로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간 관계에 있어 상대의 변화된 태도를 바란다면 스스로의 계기 형성과 그리고 행동, 자신 스스로의 태도변화. 그러한 과정을 극대화 하는 스승의 존재. 이로써 상대방이 나의 계기와 경험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그러한 경험치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이 행동과 결부될 때 상대방은 한 개인의 변화를 인지하고 이에 대한 태도를 달리할 수 있다......아~어렵다..무슨 말인지...내가 써도써도~~~

 

200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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