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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
먼저 학벌 문제를 말한다. 학벌이 좋은 사람들이 나에게 피해 준 적 없다. 그러나 솔직히 불편하고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은, 있다. 학벌이라는 건, 없어지지 않는다. 지식이라는 것이 뭉치면 학벌은 생기기 마련이다. 학벌은 소위, 배운 놈들끼리 노는 것이다. 그건 권력을 형성하려는 속성 때문이다. 따라서 실력에 따라 어느 학벌에 편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정치에 의해, 처세에 의해, 학벌이라는 기존의 방호구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을 부여하여 서로를 방어하면서도, 때로는 그 집단에 대한 배타적인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좋은 학벌. 그게 인생의 목표이든, 그것을 이용하여 이타적인 목적을 달성하든 간에, 어짜피 불공정한 게임이라는 점에서는 불편하기 그지 없으며, 그런 비과학적인 근거로 사람을 나누고 무리짓은 것 또한 용서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의 높은 학력에 대한 사회적 지위는 한 사회가 부여한 것이고, 좋은 일에 써달라는 인민의 배려라면, 학력을 권위쯤으로 여기고 남들과 다름을 강조하는 것은 장사꾼과 다름없다.
인생의 목표? 하고싶은 일? 인생의 목표는 여유롭고 잉여가 있다면 속된 것이기 마련이다. 마냥 돈을 많이 벌거나 승진하거나 인정받는 일 등. 그러나 몸 아픈 사람들의 목표는 건강이다. 그 뿐이다. 생계가 힘들지만 돈을 벌겠다는 이들, 그들은 독한 마음을 먹고 돈의 노예가 되기는 보다는, 돈을 벌어 자신과 남을 돕는다는 생각부터 한다. 그게 있는 놈과 없는 놈의 차이다.
없는 놈은 없을 때 행복을 알며,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행복의 최단거리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과도하면 부담스러워하고 상위의 것을 취하는데 망설인다. 그러나 편케 살아온 자들에게는 그런 삶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바닥은 쉬이 보이지도 않으며 쉽게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게 루소가 말한 불평등의 본질이다. 그래서 있는 놈들이 바닥을 보는 순간, 세상은 뒤집히기 마련이다. 그 또한 맑스가 알려줬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주어지는 선택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도전, 성취라는 말들은 좋은 의미로 세뇌되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인간에게 몇 개나 되는가. 결국 어떤 것을 도전하고 성취하고도 공허간 이유는 무엇인가.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든, 해야 할 일이든 간에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모두들 행복하려고 하는데, 인생의 목표에, 하고 싶다는 일에, 자기만 있고, 남은 없다. 때로는 남은 있지만 남이 대상이 되어 있다. 내 행복 때문에. 그건 옳지 않다. 행복은 좀 더 배운 놈이, 좀 더 건강한 사람이 좀 더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과 좀 더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행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사회생활에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을 변태적으로 포장하거나, 잘못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생활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도피적인 대답이 될 수 있는 통로가 되거나, 목표의 정당성, 도전의 진취성을 포장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 틀림없다.
사람은 사회를 구성하지만, 사람은 여러 종류의 사람이므로 결국 한 사회는 다양한 색을 띨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색이 원색을 가져야 한다면 원색을 많이 투입해야 할 일이지 그 잡종색의 원색으로 둘러싸봐야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본질을 왜곡하는 사회생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또한 진정 행복이 뭘까,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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