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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갓 휴가나온 나는 한 선배의 집에서 '전쟁입문'이라는 낡은 책자를 집어들었다. 근데 글자보다는 그림이 많았던 걸로 기억되는 그 책은 바로 브레히트가 쓴 것이었다. 그렇게 브레히트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만남은 시작되었고, 복학이후 브레히트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그의 대한 매력은 점점 더해갔다.1999년. 극단새벽에서 브레히트의 원작인 '코카서스 백묵원'을 새로이 재구성하여 '어느 골짜기에 관한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연극 보지 못했다. 많이 아쉬웠다.
2003년 올해 어느 대학에서 원작을 충실하게 연출한 브레히트의 희극을 맛보게 되었다. 실로 이게 몇 년만인가? 빼고 더하는 일이 자루할 정도로 시간은 오래되었지만 망설임없이 이 연극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학생들의 연기지만 그래도 많은 노력이 있음이 느껴졌다. 다만 연기의 숙련정도가 차이가 많이나서 어색하다는 느낌이 다소 있었지만 그렇게 껄끄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대학에서의 연극이 3,000원을 받을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회의적이다.)
장장 2시간 40분에 달하는 코카서스 백묵원.
'솔로몬의 재판'과 12C 중국고대소설 '회란기'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한 아이를 가운데 두고 친모를 가리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그러나 본래 관점은 시작부분에 골짜기의 소유권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특히 극단 새벽의 '어느 골짜기에 관한 논쟁'은 "땅은 가치있게 쓸 사람이 소유해야 한다"는 원작의 결론과 달리 비무장지대의 소유권 분쟁을 통해 "땅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원작의 내용을 번역하는 수준의 연기가 아닌 한국사회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수준의 연출과 각색이 필요한 것이 이 작품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것이 자칫 원작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기도 위험이 항상 이 작품에는 도사린다. 그러나 걱정은 마시라. 브레이트의 탁월한 계산이 이 극작에는 단연코 돋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틀사건 안에 또다시 또다른 사건이 내부에 다시 액자식으로 끼워져 있는 연극으로 보통 '연극속의 연극'(극중극)이라고 한다. 나중에 장 뤽 고다르는 이것을 영화에 도입하기도 한다는데, 여하간 틀사건은 2차 대전 후 러시아의 두 집단 농장 사이에서 벌어지는 토지 소유권 분쟁을 다룬다. 그래서 틀사건을 어떻게 조명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내가 본 연극은 조금 이 부분이 부족해서 아쉬웠다. 주요 포커스가 연극의 말미에 아즈닥의 재판에 그 포커스를 잡은 것으로 보여서 그렇다.)
이 연극에서 우리는 틀사건으로서 소유권 논쟁과 그 내부에 존재하는 총독의 아이를 키우게 되는 한 하녀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골짜기의 소유권 논쟁이 결과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데 이는 결국 '극중 속의 극'인 딸의 친자확인 소송에서 구체화된다.
원래 총독의 아이였던 '미헬'
미헬의 친어머니 나텔라(총독의 부인이다)와 재판정에 서게 된 그루쉐라는 하녀. 그루쉐는 미헬이 자신의 아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우둔한 재판관인 아츠닥은 검사를 시켜 미헬의 주위에 백묵으로 하얀 동그라미를 그리게 한다. 그 동그라미의 안에 아이를 들어“?한 뒤, 양어머니와 친어머니가 미헬을 그 원 밖으로 아이를 끌어내는 어머니가 진정한 어머니라고 판단할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루쉐는 아이를 차마 잡지 못하고 말한다.
"나는 아이를 꽉 잡지 않았어요. 재판관님.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한 것 취소하지요. 용서를 빕니다. 아이가 모든 이야기를 할 때까지 그를 단지 데리고만 있겠어요. 그 애는 아직 말을 몇 마디밖에 못합니다."
그러자 재판관 아츠닥은 그루쉐와 나텔라에게 다시 한번 아이를 잡아당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루쉐는 아이를 끄렁당기지 못한다.
'재판관님. 제가 무례했던 것은 죄송해요. 그렇지만 제가 아이를 키웠어요! 내가 아이를 다치게 해야겠어요? 나는 못해요."
변호사를 대동한 나텔라는 승소를 확심하지만 아츠닥은 결국 그루쉐에게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 그루쉐에게 멀리 떠날 것을 요구한다. (극중에서는 이 부분이 압권인데, 조금 아쉬운게 있다면 음향이나 그런 결정적 판결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여하간 나텔라를 추방하고 총독의 재산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공원을 만들도록 한다. 물론 그 공원의 이름은 재판관 아츠닥의 이름 딴 '아츠닥 공원'.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그 나름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결국 브레히트는 키운 자식의 정을 혈육의 정보다 강하게 긍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앞서 소유권 논쟁에서도 그 소유권이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필요한 자에게 분배'한다는 강한 이념적 메세지와 화학적으로 결합한다. 이는 두가지의 극이 서로 다르지 않는, 서로를 관통하는 극으로 마무리된다.
2003.09.18 21: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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