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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2
    승봉도 여행
    공돌
  2. 2006/08/02
    성모자애병원에 대한 하종강의 글
    공돌
  3. 2006/08/02
    노조가 사탄인가 - 성모자애병원
    공돌
  4. 2006/08/02
    아홉살 인생, 나는 아직 아홉살?
    공돌
  5. 2006/08/02
    해외여행
    공돌
  6. 2006/08/02
    한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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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8/02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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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8/02
    조종사 파업에 대한 짧은 생각
    공돌
  9. 2006/08/02
    촛불 아래 죽은 소녀
    공돌
  10. 2006/08/02
    병에 대해서
    공돌

승봉도 여행

일단 갈무리만 해둔다. 승봉도를 다녀왔다.

1) 1박 코스로 갔으나 파랑주의보 관계로 인해 결국 이틀을 더보내게 되었다. 결국 4일을 섬이 있었던 셈이다. 갇힌 게 맞는 표현이다.

 

2) 자신에 대하여 끝없는 성찰이 필요했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하는 삶을 생각해야 했다.

 

3) 시시각각 변하는 생각과 행동, 그리고 여유와 긴장, 짜증과 권태 속에서 결국 나는 공동체 내에서 불안한 존재였다. 결국 자신의 재능만으로 살아갈 순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4) 소유욕은, 나아가 욕구를 통제하는 방식을 좀 익혀야 겠다. 남이 하기 싫은 것도 나도 하기 싫다. 그러나 해야 할 때 같이 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5) 담배는 결국 사람을 무료하게 한다. 건강에도, 몸에도 그리 좋은 효과가 없고 의지를 상실케 한다. 생각을 정리해 보면, 내 두뇌의 통제권은 내가 가져야 한다. 그러나 약물이나 다른 물질에 의해서 두뇌의 통제를 상실한다면 결국 그것이 목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6) 남들이 어렵다고, 극복하기 어려운 것들을 생각해 보고, 그것들을 이기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해 보아야 겠다. 김진애가 그런 것 처럼 "Suspend your belief(너 자신의 신념을 흔들어라)"해야 겠다. 좀 더 강력하게 말이다.

 

7) 섬에 여행을 갈 때에는 2명이 가는 것이 좋으며, 가능하면 많은 수가 갈 때에는 일정한 몫을 각자가 부담해야 한다. 역할이든, 돈이든 간에. 그리고 시간은 충분해야 한다. 이번에 느낀 것이지만,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를 가진 사람들은 여행을 할 때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기 때문에 별로 대책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번 여행에서도 고양이 한 마리가 따라와서 결국 주인집에 잡혀서 포로가 되었는데, 새벽에 내가 칼로 잘라주었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고양이가 죽든 말든간에, 일단은 자유로운 몸이었으니 그 상태로 복원하되, 자기 발로 다시 주인집으로 들어간다면 나도 그건 말릴 수가 없다.

 

8) 쓰레기 분리에 대해서 각별히 생각을 해봐야 겠다. 쓰레기 최소가 맞을 것이다. 최소화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겠나?

 

9) 휴대폰은 중요한 것이다.

 

10) 여행의 목적이 분명치 않으면 결과적으로 여행이 유흥에 불과하게 된다. 술이나 마시는 여행이 되버렸다. 그 섬의 특징이나 그 섬에 갔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전혀 없이 오직 몸만 갔으니, 돈만 깨지고 단발적 개그나 유머로 버티었다. 일부는 재미가 있었으나 웃겨준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나는 별로 즐겁지는 않았다. 좀 active한 사람과 같이 가보고 싶다.

 

귀찮다고 무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11)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당장에 처리해야 하는 일을 처리하자. 여행의 후유증은 일로 극복해야 한다.

 

12) 멤버들이 놀고 떠날 때에는 즐거워야 하는데, 그러한 방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마지막에 멋지게 헤어지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이상 여기까지 갈무리 한다.

 

2005.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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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자애병원에 대한 하종강의 글

병원에는 염분을 섭취하면 건강에 해로운 ‘저염 식이 환자’들이 있다. 한 병원에서 저염 식이 환자용 물김치에 누가 소금을 집어넣는 일이 벌어졌다.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대부분 경력 10년이 넘은 식당 아줌마들은 “우리들은 그런 실수를 절대로 할 리가 없다. 아무래도 식당 일을 외주로 돌리기 위한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 고의로 소금을 집어넣은 것 같다.”고 했다.

아줌마 노동자들은 “실제로 상당히 의심이 되는 사람도 있으니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를 맡기자.”고 했지만, 병원 측에서는 이상하게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아줌마들에게 '살인자'라고 협박을 하더니, 결국 그것이 빌미가 돼 식당 운영은 외주 용역으로 전환됐고 30명 가까이 되는 식당 아줌마 노동자들은 모두 해고당했다. 환자들에게는 약이나 다름없는 치료식을 이윤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용역업체에 맡긴 것이다.

그 아줌마 노동자들이 복직시켜 달라고 싸운 지 벌써 100일이 넘었다. 수녀님이 원장을 맡고 있는 그 병원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할 때마다 아줌마 노동자들은 펑펑 눈물을 흘리며 운다. 수학여행 가야 한다고 손을 내밀던 아이들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진다. 식당 일을 해 온 10여년 세월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복받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일인시위를 한다.  

아줌마 노동자들이 밤 새 병원 담벼락에 붙인 대자보들을 아침마다 수녀들이 나와서 모두 떼어버리면 아줌마 노동자들은 또 다음날 밤 새 대자보를 붙이고 수녀님들은 아침에 또 모두 떼어내는 일이 몇 번이나 되풀이 됐다.

아줌마 노동자들은 점심시간마다 식당 앞에서 선전전을 벌인다. 그분들께 미안하다고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조합원들이 대부분이지만, 관리자들과 의사들은 줄을 서서 밥을 타 먹는다. 병원이 법원으로부터 받아낸 접근금지가처분 때문에 자신의 일터였던 식당 문을 잡아보지도 못한 채, 유리문 너머에서 일하는 용역직원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줌마들은 가슴이 찢어진다.

가톨릭 내에서 웬만한 사업장들의 경영 책임자를 두루 거쳤다는, 자타가 인정하는 유능한 CEO인 원장 수녀는 이미 상당한 저명인사가 된 사람이다. 정치권과 검찰과 정부와 청와대 곳곳에 원장 수녀가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인력 풀’을 갖추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당 대표급 국회의원들, 검찰 수뇌부 간부들, 청와대 요직 인사들과 직접 통화하는 사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원장 수녀는 지방노동사무소장이나 경찰서장급 정도는 잘 상대하지도 않는다. 사건을 처리하는 검찰, 경찰, 노동부의 공무원들은 위의 높은 분들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줌마 노동자들은 흡사 거대한 대한민국 국가권력 전체와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노동부 본청의 높은 관리가 원장 수녀를 만나 “노동조합과 좀 협상을 해 보시지요.”라고 권유했을 때, 원장 수녀는 얼굴 표정 하나 흩뜨리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도 마귀와 협상하지 않았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이런 때 하는 말이다. 노동문제에 대한 천박한 인식이 보수적 신앙과 결합하면, 그때에는 정말 대책이 없다. 노동문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공부를 제도권 교육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 세월동안 언론의 그릇된 보도를 통해 얻은 자신의 노동문제 이해 능력이 얼마나 천박한 수준인지 알지 못하는 인사들이 지도자로 행세하는 사회에서는 헌법상의 권리인 노동조합을 부인하는 것을 일류기업의 경영철학인 양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자랑하고, 그 경영자에게 대학교에서는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하는 코미디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도 마귀와 협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장 수녀도 노동조합과는 협상할 수 없다? 그 말을 예수님이 들었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종교 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노동조합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 수준인 나라에서 "맞아 죽을 각오로 하는 친조종사노조 선언"을 했으니, 맞아 죽을 만한 일을 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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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사탄인가 - 성모자애병원

한 번 물어보자. 지난 청구성심병원 이후, 성심이든 성모든 이런 성(聖)자가 들어가는 거룩하신 자본은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병원 파업에 주목하기 보다는 병원이라는 자본조직 내에서 가장 힘없는 약자가 주님의 보호 아래서 탄압받는 노동자로 전락하는 현실을 주목하고 있다. 결국 수녀도 신부도,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다면 결국 시발놈에 시발년일 수 밖에 없다.

 

예수님도 마귀와 협상하지 않았다고 하는 성모자애병원 병원장 수녀 시발년은 아무리 생각해도 조지기에는 너무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모르는 국회의원이 없고, 모르는 부자가 없다. 자기 자신도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당연히 노동자는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 개인은 질 수 있어도 노동자들, 노동조합은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동영상을 보는데, 아무런 자극적이지도 않은 이 동영상을 보는데, 눈알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눈물이 비집고 나오는데, 그 안압을 견디자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힘들고 아픈 사람은 들은 정작 내가 아닌데, 왜이렇게 감정이 이입되는지 모르겠다. 청구성심 이후 또 여지없이 내가 생각한 노동정책이든, 노동법이든 간에 상식없이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없이는 다 쓰레기에 불과하다.

 

내 어머니라고 생각해보라. 내 이모, 고모라고 생각해보라. 내 누이라고 생각해보라. 투쟁이라는 낯선 글자를 주먹에 움켜지고 그들이 벽보를 붙이고 시발 수녀들은 떼고. 이런 일상이 반복되는 한 아직도 우리 노동의 희망은 없다. 결국 루신이 말한 것과 같이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셈이다. 다만 그것은 땅위의 길과 같이 걸어가면 생기는 것이고 걸어가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걸어가고 있다. 노동자들도 이제는 더이상 마귀와 협상하지 않는다. 다만 투쟁으로 돌파할 뿐이다.

 

뱀발: 관련 동영상이 아직도 살아있다.

        mms://media.cast.or.kr/kndic/movie/05_0809_cmc100.wmv

 

        이 사건은 이후 인천지노위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게된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투쟁은 끝이 나지 않게 된다.

 

200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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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나는 아직 아홉살?

위기철의 소설이 원작이다. 난 소설은 읽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았는데, 불편했다. 불편한 이유는 - 어릴 때 기억들이 다른 사람도 비슷하겠지만 - 뭔가 숨겨진 것이 들켜버리는 감정때문 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백여민, 장우림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러면서도 오금복과 신기종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다. 영화는 여민이와 우림이의 감정의 굴곡이 느슨하면서도 팽팽하게 연결된다. 여민이 뒤에는 여민의 깊은 뜻을 아는 든든한 기종이가 있고, 우림이와 여민이와의 미묘한 감정 속에 금복이는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여민이를 늘 생각한다.

 

어릴 때의 감정은 어른들이 말하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사랑보다 더욱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들의 사랑은 물신에 찌들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덕보려는 생각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지는 어른들의 사랑보다 비교할 수 없을만치 기름지고 야무지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본주의에서도, 공산주에서도 사랑은 없다는 '사랑의 기술'이 전하는 핵심교지를 다시 되돌아보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사랑이 그 때의 사랑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다시 돌아가는 것도 부질없다. 오직 지금 내가 벗어나야 할 것은 바로 모든 애욕과 물욕이다. 사물을, 세계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결국 자격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어떤 것도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저 행할 뿐일때,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나의 옆에 기대어 있을 것이다.

 

우림이와 여민이는 결국 사랑에 있어 우리들의 스승이다. 그러나 결코 닮을 수 없는 스승이다.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회용으로 사용되고 버려지는 익숙한 일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랑은 새롭지만 항상 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고 받는 것에 익숙하며 계산이 앞서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람은 어머니 밖에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이 숭고하지만 결국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학습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주는 자체에 감사해하고, 받는 마음 또한 감사해야 한다.

 

우림이가 마지막에 서울에 떠나면서 여민이에게 보낸 안경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그것은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 여민이의 어머니를 위해서 선물한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여민이의 두 번째"기 되어도 기분나쁘지 않다고 하는 우림이의 마음 씀씀이도 너무 고왔다.

 

뱀발: 이 책을 읽지 못한 사람들 중 돈이 없어 사보지 못하겠다면 다음 주소를 눌러주세요.

http://cyimg9.cyworld.nate.com/common/file_down.asp?redirect=%2Fh25901%2F2005%2F8%2F5%2F17%2F%BE%C6%C8%A9%BB%EC%C0%CE%BB%FD%2Etxt

        책은 기본적으로 사서 보는 겁니다.

     

2005.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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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차타고 가는 기분 좋지만 그대 두고 가야 하는 이내맘 안타까워 그러나 이젠 떠나가야 하는 길위에 서서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누구는 외국에 가서 신나게 외국문물과 문명을 탐닉한다. 나는 외국 코끝도 못가봤다. 그런데 전혀 부럽지 않다. 왜냐면 그 만큼의 정신이 국제적인가? 시샘나기 보다는 가소롭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기풍을 느끼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되고, 적어도 러시아 현실에 눈물 쯤은 흘려주는 센스는 있어야 한다. 미국에 가서는 자본주의의 극단적 문명이나 다양한 인종들에 대한 생각들또한 거대 조각상이나 마뉴멘트들에 놀랄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가 아직도 부시가 먹고자는 백악관에 돌이라도 하나 던지고 와야 국제적인 여행이다.

 

중국에 가면 하염없이 만리장성을 걷기 보다는 텐안문에 서서 민주주의 만세 삼창은 해주는게 도리다. 물론 티벳에 가면 가능하면 인간이 손발이 닫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안가는게 예의다. 술쳐먹고 하면 신이 노여워 하시니깐.

 

국제적인 여행은 정신적인 교감과 연대를 의미한다. 그런 여행을 해야지 독일가서 누구 묘지가고, 맥주가 뭐 맛이 밍숭맹숭하다느니, 그 거리가 아름답다느니. 화폐가 아깝다.

 

2007.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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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

겨울새를 본다.

 

노동의 새벽, 헌정음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한대수의 '겨울새를 본다'는 한대수의 설명이 딱 들어맞다. 너무나 놀랄 정도이다.

 

"춤을 추며 듣다가 눈물을 흘리게 되는 곡"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눈물이 나는데, 희망이 계속 비좁은 살틈과 머리 속을 비집고 나오고 있다. 아껴 들어야 하는 곡이다. 완성도에 놀라기보다는 사람을 너무 부끄럽게 하면서, 고통스럽게 하면서도, 뭔가를 하게끔하는 곡이다. 설명할 수 없을 만치.

 

뱀발: http://mediafile.paran.com/MEDIA_763632/BLOG/200511/1133319445_poem16.wma

        아직도 노래가 나올지는 의문이다.      

 

        한대수에 대해서는 나중에 꼭 다시 한 번 쓰고 싶다. 다시. 그에 대한 인터뷰는 많이

        읽었지만, 그의 책은 아직 사보지 않다. 사실 두렵다. 돈이 아까울 까봐서.

 

2005.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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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우리, 사람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이다.

 

오늘 거울을 보았는데, 아무리 웃어보아도 나는 어느 순간인가, 괴물이 되어 있었다. 뚱뚱한 괴물이든, 인상더러운 괴물이든 간에. 나는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어떻게든 현실의 이 마법을 벗어나야 하는데, 점점 나는 괴물들과 만나면서 괴물이 되고 괴물과 인간의 차이를 못느끼겠다.

 

인간으로 살아남듯, 괴물으로 살아있든 간에 제일 중요한 차이는 인간은 언젠가 자신의 운명으로 장렬하게 결정짓고 이 세계를 떠나지만, 괴물은 누군가의 손에 처절하게 쓰러져 죽어간다.

 

내공이 필요하다. 인간이 되기 위한 내공이 필요하다. 내 나이 서른 살에 서른 밖에 안되는 정신연령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그 만큼의 인생과 세계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뛰어 넘어야 하고, 넘어서야 한다. 분발하자. 내게 익숙한 모든 것을 버릴 때가 된 거 같다.

 

2005.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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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사 파업에 대한 짧은 생각

조종사들은 연봉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연봉이 적은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 이주 노동자들은 기분이 나쁘다. 그러나 노동기본권은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간에 평등하게 주어지는 권리이고, 그것을 우리 헌법이 기분상하지만 보장하고 있다.

사회양극화 문제가 조종사들이 파업을 하지 않는다고 양극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종사들도 파업이라는 선택에 먼저 우선해야 할 것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도 있다. 적어도 바베큐를 먹어도 가려가면서 먹어야 했다. 사실 바베큐 그거 비싼 것도 아니다.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고, 사회변혁을 위한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바베큐 이전에 함께 나눠 먹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어야 했다.

같은 직원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은 승객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것보다 그 파괴력에 있어 더욱 강하다. 강한 파괴력 만큼 그것을 연대의 힘으로 이용하면 더욱 강했을 것을 나는 너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이만이 말했듯이, 노조는 결국 두개의 칼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정의 칼'은 결국 불의에 대항하여 이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평등하지 않은 불의를, 이 사회의 노동을 평등하게 하는 정의의 칼로 다스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타깝다.

파업에서는 승리해야 한다. 그러나 파업의 승리는 조종사들이 이긴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항공 노동자가 승리해야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이 싸움은 진 싸움이 될 수 밖에 없다. 왜냐면 연대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어 그렇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다. 그들의 노동조건의 개선이 승객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별 것 아닌 얘기를 왜 공론화하지 못하는지, 나는 그게 안타깝다.

제3자가 되어 바라 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파업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이 지지를 유도하지 못한다면 그들만의 파업에, 그들만의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나는 그러한 이기주의라는 비난이 무섭다.

그렇지만 조종사들의 파업이 정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그들의 주장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주장이 정당하게 받아지려면 그 만큼의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다는 것이다.

2005.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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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아래 죽은 소녀

한전이 원망스럽다. 전력노조가 더 원망스럽다. 발전노조도 원망스럽다. 어짜피 촛불켜놓고 죽을 목숨이라면 이미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촛불을 산 그녀가 가엽지도 않은가?

예전에 내가 누차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한전과 노조가 함께 단전된 생계빈곤형 가정에 전력을 공급하자고 말이다. 이제 회사도, 노조도 같이 사는 기본 전제라고 했다. 특히, 전력은 우리나라 산업의 기간산업자 동시에 필수공익사업이다. 이만큼 공익을 위해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 더 공격을 받게 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프랑스는 에너지에 대한 기본권을 인정한다. 내용은 이렇다.

'곤궁 상태로 특별한 곤란에 직면해 있는 이들은 국가로부터 가스, 수도, 전기, 전화 서비스를 받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보조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는 전력 회사, 가스 회사, 수도 공급 회사 등과 협정을 체결하여 '에너지 연대 기금'으로 빈곤층에게 전력을 공급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사례들 필요도 없다. 법적 근거를 찾으려면 프랑스에서 찾을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찾으면 된다. 그리고 산자부 돌망치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만 개소리하지 않으면 된다.

우리 헌법 10조는 기본적인 인권과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고, 인간답게 살게끔 국가가 보장해주도록 의무 짓고 있다. 이건 좀 추상적이라면, 헌법 34조는 아예 더 구체화된다. 1항부터 5항까지는 인간답게 살게끔 해주겠다. 바로 이소리다.

3, 4항의 경우 사회보장, 사회복지를 증진하고,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를 보장하겠다고 한다. 누가? 국가가. 헌법 35조도 인간이 건강하게, 쾌적하게 살 권리를 보장한다. 헌법 37조 1항은 이외에도 열거되지 않는 권리를 보장한다. 그렇다면 에너지를 보장하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산자부는 없다고 한다. 돌탱크들이다. 상식적으로 봐라. 못사는 사람 사회부조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하고, 빈곤층 지원하고. 이게 전부 자원봉사활동인가? 소위 우리가 맨날 이 나라 조선을 좆같이 안되어 잇는 것 중에 하나를 꼽는 바로 '사회보장'이다. 사회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보장해주겠다는 거다. 물론 세금내면 말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세금 낼 형편이 안되면 갂아주거나 면제해주기도 한다. 일정한 나이에 이르거나 돈이 생긴다 싶으면 세금을 얄전없이 거두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민주노동당에 의문이 있다. 이게 정당이니깐 법안발의를 하는 것 같은데. 적어도 법안 발의를 하려면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한전과 노조 불러놓고 기금조성하자, 안그러면 국정감사때 한 번 보자, 이렇게 조져야 먼저 시스템을 만들 조건을 완성시킬 것이고 그에 따라서 법제도로 온전히 정립될 수 있다. 그런데 될 지 안될지 모르는 법안 던져놓고 사람이 죽었다, 이렇게 하면 결국 선동밖에 안되는 것이고, 선동도 제대로 안되는 것이다.

여하간 오늘 여중생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고, 나는 눈물이 난다. 너무나 슬프다. 룸쌀롱에서 돈지랄하는 인간들이 뒤지는 것은 그랬구나 해도, 이건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한전의 올해 전기요금 체납액이 340억 정도다. 이건 큰 액수가 아니다. 제발 다른 것에 비교하지 않도록 해달라. 나는 이것이 더 갑갑하다. 참고로 내 개인적으로 볼 때 방법이 있다. 도저히 안되면 이 방법을 쓸수는 있다.

"로또 기금을 활용하라."

200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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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대해서

짧게 쓰고 싶다.

병은 사람을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외로움을 이겨내지 않으면 병에서 이겨낼 수 없기도 하다. 그것은 마음의 병이든, 육체의 병이든 다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육체의 병은 중하고 중하지 않는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약이나 의학기술로 극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그렇지 못하다. 오직 시간이 해결한다. 다른 모든 치료제는 플라시보 효과에 지나지 않는, 쓸데 없는 것들이다. 오직 시간, 그 속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치료제로 시간을 떼울 뿐이다.

2005.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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