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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협해지 잔혹사

기고예정인 글이라, 퍼 담으지 마셈..^^;; 부탁드림~OTL. 

 

1. 기억. 기억의 뭉치들이 사가(史家)의 손을 거치면 역사가 된다. 대서방에서 전입신고를 대행하던 시대가 끝나고 인터넷 한 방으로 모든 걸 쫑내는 이 시대에, 역사는 꼭 사가의 손을 거칠 필요는 없는 법. 모두가 기록하고 생각을 담으면 역사가 된다. 역사의 본질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대로 기억해내고 읽어내면 현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변화무상한 자신의 ‘현재’ 삶을 제대로 드리블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토록 신종 독재망령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이유, 사실 과거를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탓 아닐까. 

 

2. 진화론의 본좌 ‘다윈’. 올해 딱 200살 잡쉈다. 다윈하면 그의 복음서 ‘종의 기원’과 이꼬르 관계가 성립한다. 인류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 없었다면 앙꼬 없는 찐빵이요, 고무줄만 남은 빤스, 되겠다. 그러나 필자, 이 진화론이 북반구 조선 민중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현생 인류의 탯줄을 따라가 보면, 결국 우린 영장류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허나 우리 민족 중 일부는 이러한 영장류의 유전자와 다른 유전자가 짬뽕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가설되시겠다. 그리도 어마어마했던 사건, 사고들은 상처로 남아 기억으로 남을 법 한데도, 얼마 안가서 다 잊어먹는 기억력 자진삭제 현상이 단순히 핸드폰, 네이게이션, 닌텐도 때문만은 아니며, 필시 역사적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다.

 

그 증거가 바로 ‘삼국사기’다. 이 책의 저자, 김부식 선생께서는 조선 민중의 시조(始祖) 중 알에서 부화한 분이 있음을 간증하고 있는 바, 분명 조선 민중의 일부 무리들 중에는 ‘조류’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토대를 제공하셨다.

 

하여 본인의도에서 초연하게 열반하사 가스불에 올려둔 액체 음식을 열분해하여 비결정성탄소, 소위 재로 만드는 일이 허다하거나 돌려서 따는 병따개를 굳이 도구나 이빨 등 신체의 일부를 이용하여 개봉하는 개탄스러운 사태에도 뿌듯해 마지않는 이들에게 우리는 통상 ‘닭대가리’나 ‘새대가리’라고 별칭을 부르는 것이 이냥저냥 붙여진 것이 아닌, 역사적 맥락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바이다.

 

하지만, 여기까진 애교다. 정작 이 시국에 그 서슬 퍼런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유전적 귀책사유, 논할 성질 아니다. 문제는 망각이 아니라 인식이다. 평생 동안 본인 해당사항 없는 감세정책에 환영하고, 지구 표면의 일부분의 면적도 소유 못한 자들이 대운하에 흥분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시츄에이션일 뿐이다.

 

3. 스물 한 번의 세기를 반복하면서 좌회전을 하든, 우회전을 하든 우리 역사는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고, 상승과 하락 그리고 보합의 차트를 그리며 여기까지 왔다. 노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로 우리는 조금 더 전진할 수 있는 에너지와 약간의 후퇴를 감내하고 양보하는 지혜를 얻었다. 하지만 이번 정권의 후진 속도는 가히 오바이트가 쏠릴 정도라 하겠다.

 

여하간 그 후진의 역사가 다시 노동에서 반복되고 있다. 역사가 수직으로 진보하든 나선형으로 진보하든 간에 노동은 항상 21세기에도 어김없이 탄압을 받으며 두산의 ‘배달호’, 한진의 ‘김주익’ 등 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난 몇 년 전 노조와 노동자들에게 ‘때려버린’ 손해배상과 가압류는 노동의 역사를 한 세기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분노하고 저항했고, 노동자 자신과 노동조합을 지켜냈다.

 

4. 그러나 한 세기 전으로 되돌아간 노동의 역사를 업데이트 하기 위한 노력도 잠시, ‘단체협약 해지’라는 신종 최루액을 쏘아대며 자본이 공세를 퍼붓고 있다. 노사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격론과 고성을 주고받으며, 때론 파업과 직장폐쇄라는 맞짱을 떠가면서 어렵사리 노사 양손 맞잡고 맺은 단체협약. 이걸 없었던 걸로 하겠단다.

 

더구나 ‘생존의 등기부’를 말소하겠다는 사용자들의 맨 앞줄에는 ‘정부’가 있다. 교육청, 시청, 공공기관 등 앞다투어 얼굴에 단체협약 해지라는 철판 깔고 용접질을 하는 이 정부의 노사관계 인식이 다시 노동의 역사를 후퇴시키고 있는 것이다.

 

5. 단체협약 해지, 노조법에 근거가 있다. 해지해도 합법이다. 노조도, 사용자도 할 수 있다. 다만 노조법 제32조 3항의 내용은 이렇다. 사실 ‘단체협약 유효기간이 끝나고도’ 기존 단체협약이 새로운 단체협약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거나 새롭게 갱신된다는 내용을 단체협약에 별도로 규정하는 경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노조나 사용자가 생각하는 해지일로부터 6개월 전에 상대방에게 통보하면 6개월 뒤 단체협약의 효력은 소멸된다. 무단협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아시는 상식으로는 무단협 상태가 되어도 임금, 근로조건 등에 대한 규범적 부분은 유지되지만, 조합활동과 관련된 사항인 채무적 효력은 소멸된다고 아실테다.

 

허나 이는 독일이 단체협약법 제4조 제5항에 ‘단체협약상의 법규범은 그 종료 후에도 새로운 단체협약, 사업장 협정 또는 근로계약으로 대체가 될 때까지 계속 효력을 가진다’는 아름다운 조문을 삽입하기 전, 써먹었던 논리들이다. 다소 억지라고 생각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학자들이 애써 만든 자구논리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 입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근데 우리는 1998년 노동법을 개정해 단체협약 해지와 관련된 조항을 신설하여 문제를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6. 생각해 보시라. 단체협약 해지를 할 노조가 몇이나 되겠는가. 노조 실력부족으로 인해 견디지 못할 정도의 단체협약을 체결했다고 치자. 이 경우 유효기간이 지나면 해방된다. 그리고 단체협약 새롭게 체결하면 그만이다. 굳이 해지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통상 단체교섭이라는 것이 기존의 단체협약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므로, 노조는 기존의 단체협약을 바닥에 깔고 시작한다. 노조 스스로가 해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단체협약의 해지권을 활용할 이유는 사용자에게 있는 셈이다. 근데 이 해지권, 그리 빈번하게 사용치 않았다. 노사의 힘이 대등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노사의 신뢰가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까지 앞장서서 단체협약 해지를 독려하는 마당에, 노사간 신뢰, 이젠 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7. 더구나 현행 노조법 하에서는 무단협 상태가 되면 노조의 활동을 제약하는 효과를 가져와 노조가 무력화되기 십상이다. 단체협약 해지라는 것이 해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정의 변경이나 중대한 사유가 발생하는 등 기존 단체협약을 유지하는 것이 노사에게 치명적인 문제를 가져온다면 모를까, 여태까지 그런 사례는 접신을 해야 파악할 정도로 흔하지 않다.

 

결국 단체협약 해지는 노조에 있어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어, 노조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게 되고 그 결과 노사관계는 파탄에 이르기 일쑤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옵션으로 사장님 명성과 인간성에도 흠집이 날 수 밖에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고.

 

8. 기억하자. 일자리 창출 운운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시대를 열 것처럼 장담하던 이 정권의 노동에 대한 인식의 끝은 ‘배반’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가 담대하게, 때론 장렬하게 피흘리며 목숨을 댓가로 얻어내었던 노동의 권리를 어찌 삽 한자루와 바꿀 수 있겠는가.

 

87년 이전 살기 위해 투쟁했고, 98년 외환위기까지 살아내기 위해 투쟁했으며 오늘날에 비로소 인간답게 살기 위해 투쟁했음을 그들이 기억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우리의 기억이다. 분명하게 기억하자. 그 기억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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