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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침해...엄마들이 학교를 찾아가다

먼저 학교와 학생과의 관계를 규명해본다. 쉬운 예로 미국을 보자. 1965년 틴커 판결 전후에 나왔던 논의로 학교와 학생과의 관계를 특권이론, 부모대위이론, 계약이론, 행정작용의 재량권통제이론 등으로 각자 보는 시각이 달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지 모르지만 약 7-8년전만 해도 행정작용의 재량권통제이론이 통설이다.

 

각 학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특권이론은 전통적으로 재학관계를 학교가 학생에 대해 가지는 특권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초헌법적 특권을 서당의 훈장에게 부여한다. 말이 안되는 이론이다. 다음으로 부모대위이론은 학생에 대해 부모의 지위를 대위하여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견해다. 이번 사건에 비추어보거나 개정 사학법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은 이야기다.

 

학생과 학교는 계약관계라는 입장 또한 의무교육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곤란한 측면이 있다. 물론 의무교육 외에 비상식적인 부분도 이해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여하간 학교가 학생에서 일련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일정한 행정작용과 비슷하게 보는 것이 설명하기에도 학생의 권리를 보호하는데도 쉽다. 왜냐하면 사법적인 구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학교와 학생의 소송상의 대립. 이건 뭔가가 좀 어색하다.

 

이런 어색함은 '교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움에 있어 기본적인 전제는 선생과 학생간의 신뢰와 존경,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의 흐름은 이와같지 않다.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통제와 규율, 지배와 공포에 있다. 이건 학교도 산재되어 있는 권력기구에 불과하다는 미셀푸코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학교는 당연히 아이들의 신체일부까지도 간섭하고, 또한 폭력을 행사한다. 교사의 폭력은 사실상 국가폭력과 다르지 않는 미시적 권력의 폭력이라고 본다. 여하간 이러한 이론의 밑바탕으로 가지고 이번 교권침해 논쟁에서 빠져있는 것을 살펴보자. 생각해보니 위의 이론은 그냥 재미삼이 써 놓았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히 든다. 지울까 말까.

 

1. 본질

 

교사가 무릎을 꿇다, 요게 굴욕적이고 교권침해라는 이야기인데, 부모들이 굴욕적으로 한 것이 무엇일까. 전후좌우를 살펴봐도 나는 부모의 입장을 먼저 이해할 수 있다. 아이가 10분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에 밥을 먹어야 하고, 어느 놈은 마늘쫑을 제대로 씹지못해 마늘쫑을 그대로 토하기까지 하니 부모의 마음에 마늘쫑이 아니라 마늘이 다발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다.

 

급식 3교대. 요게 문제다. 급식체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고 부모들은 먼저 선생과 교장에서 일단 이성적으로 급식의 문제를 이야기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사태의 흐름은 이렇게 가지 않았다. 부모들은 선생의 집으로 가서 항의를 했고, 선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둘다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있었고,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다 외면하고 있었다.

 

근데 급식지연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밥을 빨리먹으라는 종용이 반성문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너무 간과하고 있다. 밥을 늦게 먹은 것이 죄인가. 아이들이 밥을 늦게 먹는다는 이유로 채근하는 것이 교육인가. 행정상 다음 교육일정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선생의 책임이니, 책임을 벗고자 밥을 빨리 먹게 하고, 늦게 먹은 아이들에게는 반성문을 쓰게 해서 다음부터는 화이팅해서 더 빨리 먹으라는 것인가.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게, 반성문의 내용이 과연 어떠했을까가 문제다. 틀리지 않은 것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적어도 밥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이 시간을 벌어주어 밥먹는 시간을 확보해주었어야 했고, 선생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관련 학교회의나 교사의 신분으로 교감, 교장에게 이런 문제를 건의했어야 했다. 그래서 일단 교사가 옳지 못했다.

 

 

2. 학교측과 교원단체의 반응, 심지어 전교조까지.

 

절망이다. 실망이 여러 개 모여도 절망까지 잘 안간다. 그냥 실망이 많을 뿐이다. 그러나 절망은 단 한개만 다가와도 숨쉴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학교측은 대책이 없었다. 교원단체는 화났고, 전교조도 뿔다구났다. 근데 문제는 교육적 대책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다. 뭐가 문제인지에 대해서 말이 없고, 그냥 부모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학교에서 선생을 몰아세우고 결국 선생이 무릎을 꿇은 사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이게 자칫 자기 family챙기기로 가면 결국 이기적인 모습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철밥통이야기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전교조의 대응도 문제이다. 이게 절망으로 간 결정타이다. "무릎꿇린 것은 심각한 교권침해"...신문의 제호들은 그랬다. 전교조의 논평을 담아낸 언론의 문제는 제껴둔다고 하더라도, 이건 씨팔 믿었던 도끼에 대가리를 찍힌 기분이다. 진상조사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정작 밥 늦게 먹는 아이들이 사실 수업을 받기 싫어 태업을 하는 건지, 준법투쟁을 하는 건지, 아니면 실제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자질 없는 선생들에게 받은 굴욕과 상처가 일순간 떠오르면서, 정수리에 철밥통으로 한 대 맞는 기분이다. 극복해야 하는데...떠오르는 걸 어쩌겠나?

 

3. 언론의 태도

 

요건 간단하게 해 논평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방송사들은 과연 기사를 보도하는 건지, 영화를 만드는 건지 구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중심이 무릎 꿇는 극단적 모습만을 여러 차례 방영하면서 선생에 대한 애처로움을 극대화시켰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로 묘사했다.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학생들이 선생에게 맞는 사건을 보도하면서 말이다. 이해가지 않는 대목이다. 이 두가지 상반된 기사를 해석하고 내놓는 대책이 일관성을 가져야 언론의 시각에 대해 시청자와 독자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다.

정말 무식한 작자들이 아닐 수 없다. 자기들은 아이들이 없는지 모르겠다. 오바이트 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4. 부모들

 

부모들의 문제는 다음과 압축할 수 있다. 먼저 부모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선생을 위압적인 분위기로 몰고 간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선생 옆에는 최고 책임자인 교장이 있었다. 교장은 말이 없었다. 나비처럼 날아서 어디론가 가고 싶었을 뿐이다.

 

부모들이 적절한 대책을 제안하고 그에 대해 일정한 요구를 제안하는 하는 수준이 아닌 선생의 사직을 종용했다. 좋은 선생들이 많다. 짤렸다가 구사일생으로 다시 복직한 선생들 생각하면 선생들이 외압에 의해 짤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선생에 대한 일말의 양심과 도덕적 태도에 실망을 하게 될 때가 문제이다. 폭행, 성추행 등 아이들에 대한 반교육적이고, 반인륜적인 작태에 대해서는 지탄받아 마땅하고, 오히려 이러한 부분에 교권의 정화를 위해 학교당국의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부모들의 이러한 문제는 문제일 뿐,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아쉬울 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는 이성적으로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선생들이 왜 인식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5. 무릎을 꿇다

 

결국 선생은 부모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중에 비티 인터뷰에서 사건의 진정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고 하였다. 무릎, 함부러 꿇는 것이 아니다. 선생의 입장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대책을 내놓고 부모들에게 사과를 했었더라면 사건은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미 선생과 부모들은 한바탕 싸웠고, 이에 분이 안풀린 아지매들은 결국 학교로 달렸갔다. 당연히 선생의 입장에서는 이런 부모들의 태도에 대항할 정당성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무릎을 꿇는가. 교육자의 태도는 정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진정이나 봉합을 위해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옳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건 다분히 쑈라고 보이는 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뱀발: 일단 생각만 갈무리. 비정규직 교사를 이야기하면 더더욱 골때리다. 비정규직 교사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공격받을 대상은 학교, 부모, 정규직 교사. 그들은 자신들만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더 치열해야 한다. 더욱더 철저해야 한다. 그러나 글에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다음 기회로 미룬다.

 

200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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