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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리즈카 농민 반란이 남긴 것들
[이영채의 일본사회운동](2) - 진보운동은 공동체의 재구성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이영채
1. 글로발리즘에 저항하는 진보운동의 전략과 산리즈카 투쟁의 교훈
60년대 중반 고속 경제성장 속에서 일본정부의 일방적인 나리타공항건설을 반대하여 일어난 농민의 반란을 [산리즈카투쟁(三里塚鬪爭)]이라고 부른다. 이 산리즈카투쟁은 미나마타의 공해투쟁과 함께 전후 일본 사회운동의 유명한 2대 주민투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위상은 확고하다.
산리즈카 투쟁에 참가한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지금도 아무리 바쁘고 비용이 배로 들더라도 나리타공항을 이용하지 않고 하네다공항이나 관서공항을 이용하는 것은 이 산리즈카투쟁의 일본 사회운동에서의 의미를 실감하게 한다.
산리즈카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을때, 산업화에 맞서 마을을 지키고 토지를 지키고,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하는 [백성]들의 저항을 고속 경제성장과 기술혁신의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시대적 보수로, 낙후한 사고방식으로 일본사회는 인식하였다. 노동운동 및 좌파운동세력들도, 공항반대투쟁에 참가하였지만, 고속 경제성장에 편승하여 기술혁신주의와 근대화의 망령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토지와 농업을 지키고자하는 농민들의 보수성과 대립하였다. 공동투쟁 속에서 애매하게 처리되었던 이 인식의 차이는 결국 운동전체의 방향성과 결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었다.
수입개방 저지에 맞서 싸우는 농민투쟁이 국가의 개방정책에 대한 반대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토지,농민 그리고 농업의 문제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하는 과제를 산리즈카 농민투쟁은 제시해주고 있다. 사회진보운동의 대안사회의 새로운 전략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도 이 산리즈카 농민투쟁은 내포하고있다. 글로발리즘에 맞서 저항운동과 대안운동을 동시에 고민해야하는 현재의 진보운동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랜 역사를 기반으로 광범위한 테마로 거론되며, 일본의 사회운동 내부에서조차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산리즈카투쟁의 역사와 교훈을 운동의 흐름을 중심으로 정리해본다.
2. 국가정책의 대상이었던 나리타 지역의 역사와 차별구조
나리타공항 문제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지역의 역사성에 기반한 국가와 농민의 대립구조, 그리고 토착민이 살고있던 고촌과 이주민 중심의 개척마을의 차별구조가 공존해있기때문이다.
나리타는 광대한 벌판이 있으며, 고대에서부터 야생마의 산지로 알려져왔다. 과거 야마토정권에 의한 군사정벌이 이루어졌을 때 이곳은 벌판에서 군마를 양성하는 정벌의 군사거점이었으며, 메이지유신이후 천황의 직영목장이 있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1000년전의 역사를 보더라도 국가가 정책적으로 손을 떼지 않았던 지역이었으며, 따라서 국가정책과 현지민의 대립구조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메이지정부는 말기에 이 지역에 목장을 건설하여 우유와 치즈 등의 제품을 적극적으로 제조하였다. 이러한 목장관계의 일을 하기위한 직원들의 거주지가 점점 확대되어갔으며, 이 지역이 현재의 산리즈카이다. 반대동맹위원장인 토무라 씨의 조부는 산리즈카에서 메이지 중기부터 농기구업을 시작하였고, 청년행동대의 리더인 야나카와 씨의 조부도, 목장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리타 북부지역에 일본정부가 60년대 중반 나리타 신공항의 건설을 결정한 것은 천황의 국영목장을 이번에는 국가의 비행장으로 대체하려는 국가논리의 연장에 불과하였다. 오랜 역사는 흘렀지만, 토지는 농민의 것이 아닌 국가정책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나리타 북부지역에는 토착민과 개척민이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착민은 3대째 농업을 하는 백성으로서 삶의 터전을 가지고 있었으나 개척촌은 신 이주민으로서 아직까지 농업을 천업으로 생각하는 농민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지역 내부간의 농-농차별 구조가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러한 차별구조를 이용하여 나리타공항 건설지를 산리즈카의 개척촌의 경계선과 의도적으로 일치시켰으며, 고촌(古村)이라고 불리는 토착농민들이 살고있는 시바야마(芝山)지역을 공항 건설지에서 제외하였던 것이다.
시바야마 지역은 농업을 지속할 수 있었고, 공항건설에 따른 소음 피해지역에 해당하였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개척촌의 주민은 직접적인 피해의 당사자(주체)인 반면 고촌의 주민은 간접적인 객체에 머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투쟁에 있어서도 개척촌은 투쟁의 주체세력이지만, 고촌은 투쟁의 지원세력이 됨을 의미하였다. 결국 양 마을은 서로 다른 형태의 조직으로 대처하였으며, 나리타공항 반대투쟁은 산리즈카 마을의 동맹조직과 시바야마 지역 대책위의 연합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갖게되었다.
3. 민주주의 절차의 무시에서 시작된 공항반대투쟁
1966년 7월, 하네다공항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운 국제공항 건설 예정지가 치바현 나리타시 산리즈카(千葉縣成田市三里塚)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결정된 당일, 이 지역의 농민들은 공항건설지가 자신의 논과 밭이다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였다. 일본정부가 내각에서 공항예정지를 결정할 당시, 지역주민과 일체의 상담을 하지 않고, 극비리에 이 사업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내각 결정이 발표된 당일, 산리즈카 주민들은 [TV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반신반의했지요.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라는 반응을 보였으며, 이것은 내각 결정 이전에 농민들과 직접적인 의견 교환이 없었음을 반영한다.
이처럼 산리즈카 농민반란은 정부가 단순한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농민들의 인격과 실체를 완전히 무시한 공항 결정의 방식은, 촌락의 주민, 즉 농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농민들은 정부 발표 직후 자발적으로 [농지사수], [선조전래의 토지를 지키자], [돈은 일시적이지만, 토지는 영원하다], [부락의 평화를 지키자] 등 고색창연한 슬로건을 내세웠다. 7월10일 [내각결정분쇄 총궐기집회]을 시작으로, 8월 22일에는 공항 건설지 나리타지구와 소음지구 시바야마지구의 운동체를 통합하여 [나리타시/시바야마연합공항반대동맹]을 출범시켰으며, 이것이 소위 농민들의 투쟁체인 [공항반대동맹]이며, 이 반대동맹을 통해 농민들은 국가프로젝트에 대한 전면 도전을 감행하였다.
4. 3개의 링으로 연결된 연대투쟁
반대동맹은 3개의 링을 연결한 모양이 그려져있는 붉은 깃발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일본공산당, 사회당 그리고 신좌파세력의 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초기의 운동을 리드한 것은 일본공산당과 사회당이었다. 투쟁경험이 없는 농민들에게, 그들은 나리타 지역에 앞서 공항부지로 선정된 토미리(富里)공항을 저지시킨 [선봉]대들이었다. 연일 집회와 데모, 관계단체에의 진정과 청원이 이루어졌다. 운수성, 공항공단, 치바현, 현의회, 자민당치바현련, 나리타시, 나리타시농협, 그리고 황실에까지.농민들은 여러방면에 걸쳐, 지칠줄 모르고 선전활동을 다녔다. 하지만, 농민들은 어디에 가더라도 문전박대를 당하였으며, 운동의 돌파구가 점점 보이지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허무함과 실망감이 감돌던 때, 정부의 측량대와 농민의 충돌이 있었으며, 농민들은 강렬하게 저항하였다. 하지만, 일본공산당과 민청(공산당의 청년조직)은 길옆에서 농민들의 투쟁을 그냥 지켜보는 소극적인 자세로 대응하였다.
일본공산당의 이러한 소극적인 지원과 선전활동 중심의 캠페인투쟁은 단호한 반대투쟁의 원칙을 굽히지 않은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반면, 신좌파는 운동의 성격상 타협 없는 전투적 행동으로 돌파구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실력투쟁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농민들은 자연히 신좌파의 단호한 입장에 동조하였다.
67년8월, 반대동맹은 [모든 민주세력과의 공투]를 확인하며, 신좌파의 학생단체연합인[3파전학련](공산당계를 제외한 각 당파의 전국학생조직연합)의 지원을 받기로하였다. 신좌익의 비타협적인 투쟁태도는 농민들의 근본적인 갈망을 풀어주는 듯 했으며, 반대동맹은 동년 12월, 동맹을 약화 및 분열시키는다는 이유를 들어 일본공산당의 지원과 개입을 배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3개의 링으로 연결된 단일한 연대투쟁의 첫 균열이었다.
5. 실력투쟁과 동맹의 분열 : 공항반대투쟁과 농업사수투쟁의 차이
반대동맹의 신좌파와의 연대투쟁은 [실력투쟁]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청년행동대를 중심으로한 [무장]이라는 테마가 진행되었다. 1968년2월부터 공항반대 분실투쟁 등 무장투쟁의 전개가 대표적이었으며, 산리즈카의 영화로 국제영화제에서 널리 알려진 오카와 프로덕션의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이 촬영된 것도 이 시기이다. 하지만, 신좌파의 실력투쟁 노선은 결국 인명 손실을 불러왔다. 1971년 9월16일, 도호쥬지로의 충돌에서 경관 3명이 죽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동맹의 실력투쟁노선은 지속되었으며, 78년부터 산리즈카투쟁은 세대교체를 이루어 청년행동대원들이 중심 세대로 등장하였다.
청년행동대원들의 실력투쟁은 78년 공항개항기를 맞이하여 최고조에 달하였다. 신좌파와 연결된 청년행동대는 78년 3월 26일 관제탑을 점거하는 등 무력에 의한 실력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5월의 공항 개항 이후 반대동맹의 입장은 다양화하기 시작하였으며, 83년까지 단일했던 반대동맹은 서서히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맹분열의 주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들은 1)대정부 비밀 교섭 문제 2)나리타지역 용수사업 문제 3)땅한평재공유화문제 등이다. 각 테마를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나,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문제의 배경에는 공항반대 투쟁인가 농업사수 투쟁인가에 대한 산리즈카투쟁을 둘러싼 제 세력간의 인식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공항반대투쟁보다는 농업사수투쟁을 전개해왔던 세력은 공항반대투쟁 일변도보다는 농업을 살리기위한 방안들을 모색하여 공항건설 자체가 확장되지 못하도록 하길 원했다. 여기에는 토착민을 중심으로 한 고촌지역의 농민들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공항반대투쟁을 주장한 세력은 공항이 건설되면 농업용 토지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공항건설이 되지않도록 정치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는 개척촌의 농민이 주로 대상이 되었다. 나리타농업용수 건설을 둘러싼 논쟁은 이러한 인식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논쟁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기반으로 반대동맹에 존재했던 세력을 성향별로 나누면 대체로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나리타용수 추진에는 신중한 입장이지만, 농업에 기반을 두면서 다양성 및 애매함속에서 대중적 운동을 지향하려했던 아츠타파(熱田派), 나리타용수 추진에 반대하며 원칙적이고 강한 정치투쟁을 주장한 기타하라파(北原派), 그리고 나리타용수 추진그룹(用水派)이다. 1983년 시점에서 아츠타파는 약70호, 기타하라파는 약 30호, 용수파가 약 100호라는 비율이었다.
결국 인식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은 채, 1982년1월, 동맹의 부위원장 및 4명이 동맹 이탈, 83년 3월에 아츠타파와 기타하라파의 분열, 그리고 아츠타파의 그룹에서 나리타용수추진그룹(용수파)의 분열, 또한, 1987년9월, 기타하라파에서 오가와,시마무라요수케 등이 이탈하여 오가와파(小川派)를 결성하였다.
이러한 동맹의 분열 이후 동맹의 내부 민주주의 절차도 붕괴하기 시작하였으며, 각 지역의 대표로 구성되던 동맹의 운영도 대표자 선출이 불가능한 사태를 맞이하였다. 결국 운동의 분열은 저항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산리즈카투쟁은 국가와의 대화라는 방식을 끝내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6. 관료주도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전환
담당부서인 일본 정부의 운수성과 반대파의 농민은 66년 투쟁 이후 처음으로 공식 테이블에 앉았다. [나리타공항문제 심포지움]이라고 불린 이 토론회는 1991년 2월부터 15회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정부의 나리타지역 선정 과정에서부터 나리타공항 반대투쟁의 농민의 내부 문제까지 나리타공항 문제의 전 분야에 대해 학계를 포함하여 검토하였다.
나리타공항이 산리즈카에 결정될 때 일본의 운수성과 농림성의 의견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농림성은 토지 매입에 대한 농민과의 의견 조정의 필요성을 제안하였지만, 운수성은 국가정책이라는 명분을 들어 도지사와 자치체의 양해는 인정했지만, 농민에 대해서는 의견수렴의 필요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운수성차관은 [운수성은 비행장을 만들려고 할 때 웃어른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농민은 그것에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비행장을 건설해왔으며, 한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라고 인식하는 농민과 대의적인 절차적 민주주의를 밟았다고 주장하는 운수성과의 사이에는 [대화]가 성립할 이유가 없었다. 농민 측은 나리타공항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를 제대로 다시 처음부터 끼워야 하는 것처럼, 처음의 백지 상태로 돌아가서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운수성은 나리타공항 문제의 해결은 현재의 공사를 전제한 조건 위에서 대화를 통해 미완성부분의 추가건설을 의미하였다. 결국 93년 5월, 심포지엄 결과를 바탕으로 운수성이 사건 발생후 27년이 되는 날, 정식으로 농민에게 사죄를 하였다.
이 정부의 사죄로 60년대 이후 지속되어왔던 국가프로젝트의 결정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전후 관료 주도의 민주주의를 뒤집어엎는 새로운 민주주의로의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하지만, 단순한 민주주의 절차의 문제를 바로잡는데 무려 2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지금은 누구나 공항건설부지 결정에 있어서 국가의 절차적 민주주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당시의 고속 경제성장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비단 국가만이 아니었으며, 국민 일반의 의식도 근대화와 기술혁신, 새로운 고속도로 건설을 [당연한 국가정책]으로 강요하였다. 여기에 대부분의 노동운동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산리즈카 농민투쟁의 의의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7. 근대화, 고속경제성장에 제동을 건 농민의 보수성
60년대 중반, 고도 경제성장이 한창이었으며, 전후의 일본 사회는 근본부터 변화하고 있었다. 도쿄올림픽(1964)의 해에, 고속도로망과 병행하여 전국신간선망이 스타트하여 고도 경제성장의 동력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속 경제성장의 회오리에 국가와 사회의 모든 것이 휩쓸려갔으며, 여기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한 시대였다.
60년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결이라고 불린 미츠이미이케 탄광투쟁(三井三池炭鑛鬪爭)에 패배한 일본의 노동자는 기술혁신에 의한 고도경제성장의 시대를 맞이하여 생산현장에서 기술혁신의 한축을 담당하였다.
[기술혁신에 의해서 노동자의 질이 대폭적인 변화를 이루고있을 때, 노동자 자신의 안에서도 주저와 혼돈이 존재하였다. - 숙련노동자는 하룻밤 사이에 미숙련노동자로 전락하였다. 단순한 노동을 반복하면서도 노동 밀도는 증대하여갔다. - 그러나, 그때, 몸으로 느끼는 불만과는 다른 차원에서, 많은 노동자는 이성 속에서는 기술혁신에 따른 생산근대화는 노동의 근대화, 과학화를, 역사의 하나의 진보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을까.](內山節,戰後勞 者の勞 意識と勞 觀)
노동운동은 기술혁신에 따른 생산의 근대화야말로 진보이며, 국민에게 기여하는 것으로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 중심을 이루었던 것이 국민의 리더(내셔날센터)라고 자칭했던 총평계의 조직노동자였다. 즉, 고도 경제성장은 재계와 총평이 [춘투]라는 공동연극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무대 위에서 분배를 둘러싼 두 연기자의 대립은 있었지만, 사상적인 의미에서 노사대립은 없었다. 한편, 일본의 노동조합운동은 일관되게 임금인상과 고용안정만을 강조해 왔으며, 일하는 것의 내용, 동료들간의 연대방식, 고도성장에의 의문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
고도 경제성장이 종언할 때까지 조직노동자는 숙련노동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밀어내었으며, 그들이 쌓아온 직업적 기풍과 직장공동체까지 파괴하는 참담한 상황을 만들었다. 개개인의 노동자들은 고도 경쟁사회에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내팽겨 쳐졌으며, 마침내 노동자들간의 연대의 근거도 없어져갔다. 공해 문제가 다발하고, 주민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누구보다 반응이 늦고 때로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기업 편에 선 조직 노동자들도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공업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우선시되고 노동운동이 사회적 통제 역할보다는 기술혁신의 한축을 담당하며 해고되는 비정규직의 동료 노동자들을 방치하고 있을 때, 농촌과 농민의 이익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농민 무시정책이 사회적 중심을 이루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농촌은 [조용한 안락사]를 국가와 많은 국민들에게서 강요당한 시기였다.
나리타공항 반대투쟁은 농민들이 몇백 년간 지켜온 부락공동체가 일본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가려고하는 바로 그 순간, [농촌]을 살리고, 마을을 지키려는 보수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도전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시대의 주요한 조류에 대해서, 민초에 불과하고 한줌도 안되는 농민이 자신의 언어로 행동을 조직하여 국가정책에 균열을 만들었다. 결국 농민의 보수성이 고속경제성장의 국가적 흐름에 제동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8. 대안농업을 지향한 산리즈카투쟁
산리즈카 농민들의 투쟁의 성과는 단지 국가프로젝트에 대한 반대만이 아니라 대안농업을 모색하였다는데 또 하나의 의의가 있다. 산리즈카는 유기농업을 채택하여 새로운 농촌살리기운동을 실시하여 왔다. 이후 유기농법은 공항에 반대하는 농업적 근거를 세우는 논리로서 발전해갔다. 유기농법을 제창한 이시이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항에 반대한다고 하면서, 농업은 정부의 방침대로 근대농법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어요. 말하자면 공항을 만드는 이론과 대형기계를 사용하여 화학비료나 농약을 마구 사용하는 것은 근대농업과 같은 논리였습니다. 즉 저는 머리는 반권력으로, 신체는 권력융합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으며, 농업 속에서도 공항에 반대하는 이론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산리즈카의 농민들은 유기농업과 농업살리기를 실시하였으며, 이것은 [투쟁만들기]와 일치하였다. 유기농법은 이후 농가의 야채를 도시에 직판하여 소비자와 연결하는 원파크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농민들은 1992년부터는 나리타원탁회의를 개최하여, 공항 주변을 새로운 대안 공동체로 만드는 실험마을(實驗村)구상을 제안하였으며, 95년1월 운수성 주최로 [지구적과제의 실험마을(實驗村)] 구상을 위한 회의 및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현재까지 [실험마을] 운동이 한참 진행중이다.
실험마을 운동의 구체적인 성과를 지금의 단계에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고속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논리에 저항한 산리즈카 투쟁이었던 만큼, 산리즈카를 새로운 삶의 공동체로 만들기위한 농민들의 저항은 새로운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9. 결론
산리즈카 투쟁을 한마디로 평가하기에는 쉽지 않다. 농민들은 자시들이 전개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싸웠지만, 결과는 공항건설과 농업의 피폐, 거주지의 이전, 잠정 활주로의 건설을 보게되었다. 많은 농민들은 국가의 프로젝트에 의해 삶의 공간을 잃고 이주해야 했다.
표면상 공항건설은 산리즈카 투쟁의 패배로 인식되지만, 국가전략 또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 문제를 전 사회적으로 제기하는 눈에 보이지않는 커다란 승리였다고 자찬하기에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하지만, 패배의식은 농민보다도 좌파세력에게 강하다. 투쟁에 참여한 좌파세력들은 농민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었기에 공항건설을 끝으로 운동의 전선에서 이탈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산리즈카투쟁을 또 하나의 정치투쟁의 장으로 인식한 것에 불과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을 보수라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많은 촌락들이 고도 경제성장의 파도에 동승하여, [진보]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때, 산리즈카 농민들은 [보수]라는 깃발을 들고,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어긋난 선택을 하였다. 이러한 산리즈카 농민들의 [어긋난 선택]은 산리즈카 투쟁의 [사상의 발로]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정책에 균열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후 일본의 사회운동의 새로운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산리즈카 농민들의 저항이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있을까?
진보운동 속에는 근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논리가 항상 강하게 지배하고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산력 중심의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산리즈카 농민들은 이러한 생산력 중심의 공동체 재편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전통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대항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재구성을 추구하려고 하였다.
결국, 보수가 진보를 극복하고 새로운 진보철학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데에 신선한 충격이 있다. 산리즈카 투쟁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진보진영에게 전통적인 공동체의 보호와 새로운 공동체의 재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어려운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공항반대동맹의 간부인 야나가와 씨가 대중집회에서 발언한 내용은 산리즈카가 추구하고자했던 시대적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생활의 편리추구가 매일매일 만연하고있던 고도 경제성장, 그 한가운데서 산리즈카의 농민들은 [절제의 사상]을 실천하였다. 산리즈카 투쟁이 일어난 수년간, 반대동맹에 속한 농촌은, 주변의 농촌에 비교하면 수년은 [뒤떨어진] 느낌이다. 거기에는 전통적인 농가의 순수함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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