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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운받아놓은
Andre Gorz의
에콜로지스트 선언을 읽었다.
자율평론에서 윤인환씨가 번역했는데,
에이포로 24쪽 남짓 되는 글이 전문인지
아니면 발췌인지 잘 모르겠다.
김원식 할아버지가 가지고있는 일본어로된 에콜로지스트 선언은 꽤 두꺼운 책이라고 한다.
80년대 말에 한길사에서 조홍섭씨가 번역한, 지금은 절판된 [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해방]에도 에콜로지스트 선언이 한 장으로 껴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아마도 선언 자체는 24페이지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불어를 모르는 까닭에 영어웹사이트에서 영어로된 걸 찾다가 포기했다.
앙드레 고르의 다른 저작은 있는데, 에콜로지스트 선언이라는 제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다른 제목의 저작 속에 뭍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책들도 그 제목만 봐서 내 흥미를 끄는 것들도 몇개 있었다.
[Reclaiming Work: Beyond the Wage-Based Society],
[Farewell to the Working Class] 등이 그렇다)
에콜로지스트 선언이라는 제목에서도 풍겨지는 것처럼
Gorz는 아마도 "공산당 선언"을 생태주의적으로 패러디하려고 했던 것 같다.
특히 생산성 향상을 통해 자본은 그 과잉축적의 위기를 맞아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맑스의 사적 유물론을 환기시키면서,
과잉축적의 위기가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석유위기 등 점점 희소화되어 가는
자원, 재화의 문제(절대적 희소성, 재생될 수 없음)로 인해
더욱더 돌이킬 수 없이 된다는 생태주의적 시각을 접목시킨다.
아니, 맑스의 유물론을 생태주의적으로 사이좋게 접목시킨다기 보다는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다시 쓰는 것을 시도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대부분의 좌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평등"관에 대해 그가 아래에 비판하는 대목만 읽어도 명확해진다.
유럽의 사회주의가 어떻게 사민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더욱더 글의 맥락이 머리에 들어 올 것이다.
한국에서 정규직과 연대한 비정규직 투쟁의 한계,
"우리는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원한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슬로건이 가진 한계를 생각해보면 읽어봐도 재밌을 것이다.
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부정하는 아나키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글은 그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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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등과 차등
물질적 평등이 더 이상 계급적 분화를 표현하지 않을 때 그것은 이미 인간의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특권과 권력을 수반하지 않을 때, 물질적 부는 다른 사람에게 모욕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을 빈곤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물질적 빈곤도 그것이 사회의 하층계급으로 내쫓기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은 것으로도 만족한다는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굴욕적이지 않다. 서구의 좌파가 이러한 진리에 대해 품는 저항감은, 그들의 문화적 세계와 그들이 입각해 있는 가치가 얼마나 상품관계에 의해 획일화되고 말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 불평등은 차등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인간이 보다 많이 갖는가, 혹은 보다 적게 갖는가에 따라서 계급적으로 분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가치와 생활양식과 개인적 목표의 획일화만으로 상품관계와 임금노동을 인간활동의 모든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 버린 것이다. 평등 혹은 사회정의의 이름 아래 참다운 경쟁과 선망과 권리 요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오직 동질적인 사회적 우주에서 뿐이다. 그곳에서는 차등이 순수하게 양적 차원의 것으로 되고 따라서 측정이 가능할 것이다. 보다 많이 혹은 보다 적게라는 범주는 주로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서 불평등이 다만 경제적 차등으로서 간주되는 사회/문화적 우주를 전제로 한다.
원리적 평등이라는 허구가 자본주의의 문화적 기초이다. 이것을 통해서만 모든 차등은 화폐로 보충할 수가 있으며 또한 모든 차등을 수입의 불평등으로 옮길 수 있게 된다. 부르주아 지배의 확립기에 문화적 소수자와 문화적 편향에 대해 행해진 광폭한 억압은 이것으로써만 설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문화적 소수자와 문화적 편향은 그들의 가치의 특수성과 차등성을 고집함으로써, 상품의 지배에 필요한 사회/문화체제의 단일 차원성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또한 보통교육을 위한 학교제도의 탄생은 이것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학교가 획일성 바로 그 자체에 의해 가장 혜택받는 자를 한층 우대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이다. 나아가 국가에 의해서 특수한 직업윤리(혹은 의무론)의 파괴가 수행된 것도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직업을 영위하는 구성원이라면 그들의 기량을 팔거나 빌려주는 것을 거절하기 위해서 그러한 직업윤리를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활동에 고유한 의미와 내용은 억압되었으며, 화폐에 의한 보상 즉 상품적 소비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로 대체되고 말았다. 이 보상의 총계가 사회활동, 즉 노동의 결정적인 목적으로 된다. 노동은 그 고유한 내용을 남김없이 빼앗겨버린 채 임의의 상품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연속으로 측정되고 근로자로부터 사들인 부역으로 환원되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의 활동은 일체의 자율적인 합목적성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주요한 목적으로서 돈과 상품의 구매력을 할당받는 것은 이러한 노동의 소외상태를 보여준다.
이상의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부정되는 경향을 보이는 평등화를 항상 추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부류의 임금노동자도 바로 위의 부류의 소득수준에 도달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어느 소득수준을 넘으면 소득의 증가는 그 자체로서도 또한 그 결과 얻어질 여분의 소비를 위해서조차도 불필요한 것이 된다. 소득의 증가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사회적 가치를 내게도 용인해 주면 좋겠다는 욕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노동에 대하여 불평등한 보수를 지급하는 제도에 기초를 둔 이 사회에서 평등에 대한 요구는 소비에의 요구라든지, 사회적 불만, 또는 사회적 경쟁 등에 대해 끊임없이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감추어진 원동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득수준의 안정화가 달성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로 한정될 것이다. 첫째,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노동이 평등한 사회적 승인(및 보수)을 향유할 때, 둘째,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무한히 다양한 자유활동 덕분에 개인적인 능력과 욕망과 취미의 무한한 다양성을 실현할 가능성이 만인에게 주어질 수 있을 때이다.
사회적 노동에 종사하는 시간의 단축과 자유로운 시간을 생산적 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품관계와 경쟁관계의 쇠퇴를 위한 조건이다. 소비수준과 생활양식에서의 차등이 이미 보수의 다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이 자유시간에 추구하는 여러 가지 활동의 결과가 될 때 그러한 차등은 더 이상 불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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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n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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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김원식 선생님 만나서 이 책 얘기 들었는데 마침 올려놓으셨군요. 그간 막연하게 품어왔던 생각들이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네요.그리고 서대문에선가 모이신다는, 탈개발에 관한 일본 책 읽는 모임에 저도 가보고 싶은데, 시간이나 장소 알려주실 수 있나요?
cosmo골뱅이chol닷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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