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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2nd round

  • 등록일
    2005/03/12 13:55
  • 수정일
    2005/03/12 13:55

 

아낰

초근대적 욕망 또한 근대를 통과하면서 나타나는 반응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명제로 부터 출발 하셨군요. 이것이 현대성의 착오로 봐야지요. 우리의 입장으로 미 개발단계의 혹은 자본주의를 통과하지 않은 지역을 분석하는 착오를 법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 명제가 갔는 근대화 혹은 자본주의를 모든 나라들을 통과하여야 한다라는 명제로 오인 될 때가 있었지요. 아나키들 내부에서는 이러한 착오가 덜합니다만 푸르동이나 로버트 오엔 생시몽으로 대표되는 공상적인 사회주의자들은 곧 바로 꼼을 구현하려고 했기 떄문에 별문제는 없으나 마르크스주의자들 특히 ㅅ비에트 맑시즘과 중국 등지의 맑시즘은 생산력의 충분한 발전 이후에 가능한 꼼이라는 명제에 중독되어 있었던 듯 합니다. 근대성을 통과하여야만 근대성의 착오를 안다라는 말 또한 경험주의적인 오류라고 봐야 겠지요. 룰라정부 역시 이러한 근대성의 착오에 빠진 듯 하며 전 사회적인 탈근대의 노선을 보여주지 않고 있는 듯 합니다. 지속가능한 생태공동체적인 사회발전 모댈 말이지요. 그것이 이 노동자 출신으로 구성된 정부의 한계라고 보고요. 동시에 각계 각지의 자치주의적 발전과 차별철폐 근대성이라는 개발주의적 착오의 철폐 및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 또한 부족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쿠바의 몰락 이후의 풀뿌리들의 자발전인 삶에의 추구에서 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고요. 사파티스타의 봉기 또한 이러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다. 그러니 사파티스타 역시 분리 독립과 상대적인 자본주의 시장으로 부터의 독립이라는 조건 속에서의 생태사회로의 전망에 대한 부득히한 접근 정도로 봐야 하겠지요. 이것은 반군 정부의 주도라고 보다는 신자쥬주의 세계 질서라는 세계 시장으로 부터의 상대적 격리 속에서 풀뿌리들 스스로의 삶의 선택 방식이였다라는 객관적 조건의 무의식적 강제로 부터의 풀뿌리적 의식화의 과정으로 부터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공상적 사회주의자로부터의 그 뿌리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생태 공동체와 히피 공동체에 이르기까지의 엘리트에 의한 위로부터의 대안 사회발전 모델이 있다고 봅니다. 이 둘중에 어떤 것이 바람직하냐는 선험적인 판단이나 도덕적이 가치가 개입된 판단을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보지요. 둘다 우리에게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니 흔히 레디컬한 그룹들에게는 사파티스타와 쿠바의 벌전 모델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그런데 이 모댈에 집착하다가 보면 플연적으로 민중 봉기와 지배계급과의 충돌이라는 모델이 나오는데 꼭 그 모델만이 전일 적인 방식일 것이다라는 생각 또한 문제가 많다고 봐야지요. 이것은 한 문제를 풀기 위한 단일 공식만이 유일한 해법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둘째는 관심의 전환점에 대한 지나친 폄하 경향에 대한 지저을 하고 싶습니다. 초근대성 혹은 탈근대적인 경향으라는 이른반 포스트 모던한 관신의 전향성으로 나타나는 각각의 문화현상이 이미 자본에 포섭되어 있으며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아무런 실천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 청교도적인 편협성만을 강화시키는 결과라고 봐야 겠지요. 이 문제는 군중적인 관심의 전환과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제기를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다라는 긍정적인 면과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라는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변증법적 인식이 가반하여야 하고 그 인식에 기초하여 이 종속적인 부분을 어떠한 방식으로 비 종속적인 단계로 까지 이끌어 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수행되어야 한다라는 지점에서 별반의 이견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다시마라자면 탈근대적인 관심사에 기반한 상업화는 그 자체로는 한계를 지니나 의미가 있다는 사싱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탈근대적 혹은 탈자본주의 적인 해법 찾기가 라다크 등지의 외지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와 의미 해석이 이루어 지고 있으며 이 의미해석 속에서의 20세기를 주도 했던 바로 그 생산력론에 대한 극복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흔히 러시아로부터 수입되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나 임무로 보는 것에 대한 오류 정정이 이루어졌다는 점 또한 주목하여야 할 듯합니다. 매닉은 이 부분에서 모호한 입장을 띠고 있지 않난 하는 생각이지요.
그러므로 생산력주의라는 근대성의 착오를 일으켰던 바로 그 주술로부터 에코 토피아가 제시한 대안사회적 전망으로의 시급한 입장 전환들이 탈근대적인 진보운동들 내에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것이 생태적 가치에 기반한 자립과 자치의 전망이자 도시화 산업화등 이른바 필연이라고 생각되었던 사회발전의 모델로 부터의 탈피라는 생각을 하지요. 그 리고 그 과정에서의 중앙권력과 다국적 기업 그리고 자국의 거대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결국 이는 도시기반의 전략 전술로부터 농촌 공동체 지향 혹은 소규모의 촌락 규모의 꼼적 전망에 기반한 전략과 전술이라는 근본적인 실천 전략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여기서 사파티스타나 생태공동체들의 탈주와 전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부터의 독립 및 자립과 자치의 선언 그리고 이 자립 자치를 지키기위한 전민의 무장 및 민병대화라는 전략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횡설 수설한 듯 하군요 이만 줄입니다.

 

매닉

아낰님, 현실에 있어 어떠한 공동체 혹은 사회가 근대성을 통과하지 않았나요? 한번 예를 들어주시면 고맙겠어요.

 

제가 비판하려고 했던 대목은 "자본의 이동의 자유만큼의 이주노동자의 이주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말은 먼가 근대성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주노동자의 문제 또한 돈을 위해 이주할 것이 아닌 자신의 공동체를 어떻게 다져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가치 이전이 필요하다고 보지요." 이 부분입니다.

북이 남의 부분적 면모나 이미지를 빌어 와, 나름의 근대성에 대한 대안적 모델을 구축할 수도 있고 거기에서 뭔가를 배울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북이 스스로 구축한 대안적 모델을 그 남에 대고 너희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면 좀 "주제'넘는 짓이 아닐까 하는 우려죠. 좀더 설명하면, 산업화된 국가의 지식인 혹은 활동가들이 이런 저러한 근대성을 겪고 그것에 대한 반성 혹은 대안으로 쿠바나 사파티스타 같은 제 3세계의 공동체운동을 찾습니다. 이거 봐라! 생산력중심, 시장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보다 자급적인 공동체는 가능하다! 그러한 모델을 구축하고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봅니다. 하지만 그걸 남에게 제시할 때는 보야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모델을 "북"의 입장과 맥락에서 만들어진 그야말로 북의, 북에 의한, 북을 위한 모델일 것입니다. 남이 만약 그 모델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아마 다른 계기와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그 계기가 무엇인가요, 그 차원이 무엇인가요? 또 그 모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차원과 계기는 무엇일까요? 그걸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아낰님의 글쓰기가 더 당위론적이라고 느낀 겁니다.

"자본의 이동의 자유만큼의 이주노동자의 이주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말은 먼가 근대성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이라고 봅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뿌리뽑힌 그들의 이주는 결과이지 근대성의 원인이 아니죠. 하지만 아낰의 글에서 풍겨지는 뉘앙스는 그들의 이주가 뿌리뽑힘과 근대성의 원인인양 역전된 듯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걸 기반으로 후man같은 사람은 이주노동자들의 이주가 한국노동자의 삶을 뿌리뽑고 있는 원인이라고 왜곡하고 있고요.
제 생각에 이런 오류는 나와 그들이 다르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내린 결론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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