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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로 가는 길은 두 번째라 그런지 별 설레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밤을 달려 새벽 무렵에 태국 쪽 국경도시인 농카이에 도착한다. 다시 툭툭을 타고 국경에 도착하니 7시가 조금 넘어있다. 국경에서 비자를 받는데 수수료가 31불이다. 어라 비자는 30불에 지금은 업무외 시간도 아닌데 왜 1불을 더 받나 물어 봤더니 이럴 수가.. 오늘이 라오스 독립기념일이란다. 고로 라오스의 휴일인 것이다. 아.. 꼬인다.. 라오스가 휴일이면 미얀마 대사관도 휴일이고 내일은 토요일, 모레는 일요일.. 비자는 삼일 뒤인 월요일에나 신청이 가능한데다 라오스에 있는 미얀마 대사관은 급행이란 것도 없어 발급까지는 꼬박 이틀을 더 기다려야 한단다. 그렇다면 죽으나 사나 위앙짠에서 6일이나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별로 볼 것도 할 것도 없는 동네에서 뭐 하고 지내나 막막해진다.
다행히 위앙짠에는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가 있어 도미토리에 짐을 풀고 책이나 읽다가 책 읽는 것도 지겨우면 사람들 구경이나 하면서 보낸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방콕에서 밤을 달려 도착해선 하루를 묵고 방비엥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별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지만 두어 명 장기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과 사장과 친분이 있어 보이는 몇몇 라오스 거주 한국인들이 게스트 하우스 죽돌이 비슷하게 진을 치고 있어 별로 심심하지는 않다. 하루 이틀은 서먹하더니 이삼일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저녁마다 만들어지는 술자리에 끼게 된다. 참 이상한 게 한국 여행자 없는 곳에서는 나랑 조금 다른 사람을 만나도 그러려니 금방 친해지는데 오히려 한국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말 건네기도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그저 옆에 앉아서 고개나 끄덕이고 있는다. 왠지 낄 자리가 아닌데 끼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편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런 몇 날이 흘러간다.
그 와중에 게스트 하우스 앞마당에 두개의 가게가 오픈 한다. 앞마당이라야 그저 게스트하우스 입구에 있는 한평 남짓한 진입로가 다긴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 선반이며 파라솔 등이 놓여 있고 간단하게 조리가 가능 한 취사도구들도 갖춰져 있다. 이전에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했다는 여자친구 둘이서 사장의 동의 하에 하나는 죽이며 국수를 다른 하나는 쉐이크를 팔기로 했다는 것이다. 오픈한 집 개시는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죽과 쉐이크를 시켜 먹는다. 제법 김치 비슷한 곁들이도 따라 나온다. 한참 맛있게 먹다보니 헉 닭죽이다. 하도 조류독감, 조류독감 해서 가급적이면 닭 하고는 친하게 안 지내볼려고 했는데 뭐 할 수 없지.. 계속 맛있게 먹는다^^. 볶음밥도 국수도 지겨운 판에 잘됐다 싶다. 쉐이크도 처음 만드는 솜씨치곤 그럴 듯 하다. 이날 오후부터 주변의 권유로 국수집의 메뉴엔 라면도 두 종류나 추가가 된다, 신라면과 너구리다.
왼쪽이 국수집, 오른쪽이 쉐이크집
이 두 가게가 오픈하니 뒤론 안 그래도 게으른 인간이 더욱 게을러지는데 그나마 밥이나 먹으로 걸어 나가던 것도 중단하곤 그저 삼시 세때 커피며 쉐이크까지 죄다 이 두 집에서 해결한다. 그렇게 끼니를 때우다보니 국수집 주인인 닛과도 친해진다. 하루는 닛이 김치거리 사러 시장에 가지 않겠냐고 해서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다녀온다. 일반적으로 외국인들이 구경가는 시장이 아니라 말그대로 로컬시장이다. 뭐 어릴때 익숙하게 보던 우리네 재래시장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배추며 당근, 고추 등의 김치거리를 사서 돌아오는데 주면 사람들이 잘 됐다면서 닛에게 김치 담는 법을 가르쳐주란다. 헉 나라고 김치를 담아봤나.. 게다가 그 김치 내가 담은 거 보다 낫더구만.. 그저 옆에 앉아서 간이나 보고 구경이나 한다.
담날에는 다시 시장에 가잔다. 이번에는 중국 시장이다. 그전에 신라면과 너구리를 다섯 개들이 한봉지씩 사왔는데 신라면이 다 떨어져 라면을 사러 가는 길이란다. 이 시장에선 중국에 만든 한국 라면을 판다. 신라면과 김치라면을 하나씩 사려는 걸 그저 한국 사람은 그저 신라면이라고 그냥 신라면만 두 봉지사라고 권한다. 라면 종류 많아봐야 성가시기 밖에 더하겠는가. 안 그래도 꼬들하게 끓이라는 사람, 퍼지게 끓이라는 사람, 물이 많다는 사람, 적다는 사람.. 한국 사람들의 90%는 자칭 라면 전문가들이라 한 종류라도 입맛 맞추기가 쉽지 않은 터에 말이다. 나 같으면 그저 니가 끓여드세요 하겠더구만 그럴 수도 없는 걸 종류까지 늘려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 너구리에는 다시마가 없다는 슬픈 소식도 함께 전한다^^
국수집 주인 닛
쉐이크집 주인 띠아
이 두 가게의 하루벌이가 대략 십불은 되는 모양인데 재료비랑 이것저젓 빼면 반정도가 남는단다. 그럼 이 추세로 나간다면 한달에 백불에서 백오십불쯤은 벌 수 있는 셈인데 이곳 공장에서 일하는 라오스 여자들의 벌이가 50불 정도라니 제법 괜찮은 장사인 셈이란다. 라오스 거주 한국인들이 옆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국수집 주인인 닛과 쉐이크집 주인인 띠아는 그래서 그런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데도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밤에는 제법 두둑한 돈주머니를 꺼내놓고 뭔가를 쓰고 계산기도 두드리는데 뭘 하는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 ㅎㅎ 저건 내 전공인데 김치 담그는 거 말고 저거나 가르쳐주라고 하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본다. 여튼 이 두 집 덕분에도 며칠 심심하지 않게 지낸다.
이래저래 시간이 흘러 비자 나올 날짜가 되어가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한다. 미얀마 남쪽은 예정에 없던 곳이라 별다른 준비도 안 되어 있고 가이드북에도 별다른 정보가 없는 곳이다. 트레블 게릴라에서 몇 군데 정보를 내려받고 론리 플래닛 지난 버전 하나를 구입하고 저녁에 빡세로 떠나는 버스표를 예약해둔다. 다행히 미얀마 비자가 별 문제 없이 나와 준다. 역시 미얀마 전산은 아직 내 편인 것 같다^^. 앙코르와트에서 방콕, 또 이곳 위앙짠까지는 거의 한국 사람들 틈에서 지낸 것 같다. 며칠 안 보이면 어디 한국사람 없나 싶다가도 또 많아지면 이래저래 심경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제 한 열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지내게 된다. 좋기도 하도 다시 막막하기도 하지만 뭐 이게 여행이 아니겠는가.. 남부를 한바퀴 돌고 방콕으로 돌아가면 나도 일행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은 덜 외로운 느낌이 든다.
방콕의 카오산 로드는 벌써 성수기가 시작된 건지 아님 일년 내내 그런 건지 거리마다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전에 왔을 땐 태국이 좀 못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 비하면 여긴 거의 선진국 수준이다^^. 느닷없이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아이처럼 세븐일레븐도 있고, 버거킹도 있네.. 하면서 새삼 신기해하며 거리를 다닌다. 원래는 방콕에 도착해 한 일주일 빈둥거리면서 12월 초에 태국으로 온다는 일산주민이나 기다리려고 했는데 막상 연락을 취해 보니 일산주민의 일정이 열흘 정도 늦추어진단다. 어라, 그럼 대략 보름을 빈둥거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대략 난감이다. 일산주민은 태국이든 말레이시아든 아무데나 갔다 오라지만 태국이야 일산주민과 같이 다니는 것이 일정상 훨씬 낫고, 말레이시아 쪽으로 가자니 물가도 만만치 않은데다 볼만한 관광지가 죄다 해변이라 별로 내키지 않는다. 고민 끝에 일산주민에게 일정을 사오일 더 늦추라고 하고 미얀마를 먼저 다녀오기로 한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한다. 일단은 비행기표와 비자가 필요한데 비행기표는 원하는 날짜에 다행히 있다. 문제는 비자인데 대행하면 4일이 걸린단다. 하지만 그 4일이란 게 휴일을 제외한 기간이라 토요일, 일요일 하고도 하필이면 월요일이 태국 국왕 생일이라 공휴일, 이렇게 휴일 삼일을 더하니 이래저래 비자 발급에 일주일이나 걸리는 셈이다. 안 그래도 미얀마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삼주 남짓인데 방콕에서 일주일이나 시간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홍익여행사 사장님이 직접 대사관에 가서 급행으로 처리하면 하루만에도 발급이 되니 직접 가보라고 한다. 그러지 뭐.. 대행료도 굳히고 오히려 잘 됐다 싶어 직접 대사관으로 가기로 한다.
비자 신청은 일반적으로 오전에만 업무를 본다고 하니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선다. 접수하러 왔다갔다, 찾을 때 왔다갔다, 네 번을 택시 타면 비자 발급 비용보다 택시비가 더 나오지 싶어 물어물어 버스를 탄다. 다행히 버스에서 헤매지는 않았지만 태국의 악명 높은 트래픽 잼에 걸려 업무 시작 시간보다 20분 늦게 도착한다. 미얀마 대사관 안은 벌써 사람들로 가득하다. 관광비자 신청용지를 작성하고 접수줄을 찾아보니 사람들이 그냥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의자를 따라 줄이 이루어져 있다. 끄트머리에 앉아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니 대략 삼사십 명 수준이다. 업무 시간이 12시까지니까 대략 오전에 접수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앉아서 기다리는데 웬걸 처리 속도가 장난이 아니게 느리다. 한 시간에 다섯 사람이 안줄어드는 데 이건 황당 그 자체다. 다시 가만히 살펴보니 비자 접수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여행사 대행 업자들로 보이는데 이 사람들이 한번에 이삼십 명분을 접수시키니 컴퓨터도 없이 수기로 처리하는 창구에서 저 정도 하면 느린 것도 아니다 싶다.
결국 오전 업무가 끝나고 줄 선 순서대로 이름을 적더니 점심 먹고 한 시간 후에 오란다. 사람이 많아서 오후에도 업무를 보나 하면서 이름을 적는다. 21번이다. 1시에 시작된 오후 업무는 3시가 되자 마감이 된다. 다시 이름을 적더니 다음날 오란다. 이번엔 13번이다. 두 시간 동안 8명이 줄어든 셈이다. 한시간당 평균 네 명쯤으로 계산해 보면 오전 업무 시간이 세 시간이니 내일 오전에도 가능할지 말지 한 상황이다. 하지만 뭐 별다른 방법이 있나.. 그저 오라는 대로 다시 올 수밖에.. 홍익여행사에 돌아가 상황을 설명하니 사장님도 황당해 한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데 뭐 어찌 된 노릇인지 파악이 되질 않는다. 여튼 담날에는 비자 접수가 될 테니 오전에 접수되면 오후에, 최악의 경우 오후에 접수가 되더라도 그 다음날 오전에는 찾을 수 있을 테니 안전하게 그 다음날 저녁 비행기표를 끊어 놓는다.
다음날은 트래픽 잼을 감안해 꼭두새벽에 길을 나선다. 여덟시 반경에 대사관에 도착하니 벌써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다. 이러다가 대기번호가 무용지물이 되는 건 아닌가 싶어 얼른 끄트머리에 가서 줄을 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사관 문이 열리자 어제 대기 번호대로 줄이 정렬된다. 다시 지루한 시간이 이어지고 이번에는 좀 편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사십 줄의 한국남자 하나가 비자 신청서를 쓰고 있는 게 보인다. 차림새로 보니 여행자는 아닌 것 같은데 사업차 미얀마에 가나 싶어 말을 건네 본다. 미얀마에서 6년째 선교를 하고 있는 목사님인데 늘 비자를 대행시키다가 일정이 급해 직접 왔다고 한다. 내 경우를 미루어 보면 이 목사님 지금 줄을 서봐야 낼 오전 접수도 힘들지 싶어 내 것과 같이 접수를 시켜주겠다고 한다. 뭐 일종의 새치기라고 보면 된다^^다행히 내 앞에는 개인여행자가 몇 명 있어 오전에 접수가 된다. 목사님의 비자신청서도 다행히 같이 접수가 된다. 오후 4시에 비자를 찾으러 오라기에 점심이나 먹고 시내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비자를 찾으러 다시 대사관으로 간다.
그러나 당연히 발급될 줄 알았던 비자는 발급이 거절된다. 목사님과 나 둘 다 거절이란다. 나의 거절 사유는 직업난에 회사 이름을 미디어센터라고 썼다는 것인데 미얀마에서는 기자나 저널리스트 등의 미디어관련 종사자에게는 비자 발급이 안 된다는 것이다. 참 미디어 관련된 일이 기자만 있나 원.. 짧은 영어로 미디어센터가 그런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고 설명해 봐야 신청서에 붙어 있던 사진과 발급 비용을 돌려주곤 그만이다. 그 사이 다른 담당자와 미얀마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목사님도 상황은 마찬가지인지 그대로 돌아선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이 목사님은 탈북자 문제랑 연관되어 미얀마에서 추방된 상태였다고 한다. 다시 들어가는 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한국대사관과는 이야기가 되었다는데 그 이야기가 미얀마 정부랑은 안 되었던 모양이다^^ 거절 사유가 내 직업 때문인지 아님 그 목사님과 일행으로 보였기 때문인지는 아님 둘 다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일년에 한두 건 있을까 말까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갑자기 막막해진다. 비행기표는 할인항공권이라 환불도 안 되는데다 꼼짝없이 방콕에 이십일이나 발이 묶여 있어야 하나 심란하기 그지없다. 홍익여행사로 돌아가 일단 비행기표를 연기시켜 놓는다. 다행히 비행기표는 환불은 안되도 유효 기간은 넉넉한 편이라 다른 방법으로 미얀마 비자를 받을 방법을 알아본다. 홍익여행사 사장님이 라오스에도 미얀마 대사관이 있다고 귀뜸해 준다. 라오스는 비자 기간이 십오일이니 비자를 받고도 남부 지역을 한바퀴 둘러볼 만한 시간이 된다, 문제는 태국에서 거절당한 비자를 라오스에서 발급해 줄까 인데 밑져야 본전인데다 미얀마의 전산이 그리 훌륭하지 않다는데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부랴부랴 일산주민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보니 다행히 아직 항공권을 끊지는 않은 상태다. 사오일 늦추었던 일정을 다시 앞당겨 16일경에 만나기로 하고 12월 1일 밤버스를 탄다. 위앙짠 도착이 금요일 아침이니 당일로 미얀마 비자를 신청하고 바로 라오스 남부로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브라보 빌라-씨엡립에서 유명한 한국게스트하우스-에는 한국인으로 가득하다. 한국인들이 없는 곳에서는 심지어 단체 관광객에게도 넙죽넙죽 인사만 잘했는데 막상 숫자가 많아지니 오히려 말 붙이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보통은 앙코르와트 3일권을 끊은 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야 들어오니 같이 투어라도 다니면 모를까 그냥 책이나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다행히 많지는 않아도 만화책이며 잡지 등이 있어 무료하지는 않다. 그러다 로비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한 무리의 한국인들 틈에 낀다. 밖에서 보기엔 다들 일행인 듯 보였는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렇지도 않다. 간만에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수다의 반을 차지하는 내용은 자칭인지 타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 명의 젊은 사장 중에서 이제는 홀로 남아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롱다리 사장이란 사람에 관한 얘기다. 다리가 롱다리인지야 모르겠지만 키가 많이 큰 이 젊은 부산 남자는 부산사투리 특유의 톤으로 말끝마다 “미쳤어요”를 달고 다니며 손님들을 괴롭히는데 이상하게도 손님들은 그 구박을 즐기는 눈치다. 뭐 이를테면 욕실에 형광등이 깜빡거린다고 하면 “때려서 쓰세요 아님 그냥 쓰든지.. 나이트 분위기도 나고 좋네” 하는 식인데 그 이야기거리가 무궁무진하여 이삼일 먼저 온 사람이 그 뒷사람에게 일화를 전수해주는 데만도 하루 저녁이 부족하다. 이제 제법 지쳐보이는 롱다리 사장에 대한 뒷담화의 대단원은 대략 이렇게 장사해서 얼마냐 남겠냐.. 이거 오래 못 간다.. 빨리 장가를 들여야 유지가 되지.. 하는 걱정으로 마무리가 된다.
앙코르와트는 그냥 자전거를 타고 하루만 다녀온다. 11월이라 그런지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서 그럭저럭 자건거를 타는데는 무리가 없다. 단지 자전거를 서양애들 기준으로 만들었는지 아님 이 동네에는 롱다리만 사는지 페달에 발이 간신히 닫는다. 천천히 앙코르와트 쪽으로 달리니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앙코르와트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이렇게 빨리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떠날 때는 몰랐었는데 사람일이란 그래서 뭐든 장담할 건 못 되는 것 같다. 앙코르왓 꼭대기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다시 앙코르 톰으로 간다. 이년 전 공사중이던 왕궁은 아직도 공사중이다. 두어시간을 앙코르톰에서 보내고 나니 딱히 더 할일도 남아 있지 않아 일몰 포인트인 프놈바깽에 잠시 들렀다가 해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온다. 해지고 난 뒤 전기사정도 좋지 않은 이곳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갈 수야 없는 노릇이다.
앙코르왓. 연못에 연꽃이 활짝 피어 있다.
앙코르톰, 바이욘의 미소라는데 많이들 보셨을 게다
프놈바깽, 일몰직전
숙소로 돌아오니 프놈펜에서 잠시 만났던 한국인 여행자 둘이 도착해 있다. 전직 사회복지과 공무원이자 고등학교 친구 사이인 두 명의 여자여행자인데 1년 반 예정으로 여행 중이란다. 그 복잡한 원월드 티켓도 끊어서 왔다는데 친구가 아니라 자매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얼굴과 행동이 닮아 있다. 그 친구들이 중국에서 같이 다니다 잠시 헤어진 또다른 언니를 찾아와서(?) 넷이서 저녁을 먹는다. 간만에 먹는 한식이다. 씨엡리업에는 한국 식당도 꽤 많은데다 메뉴도 떢볶이에 순대까지 없는 것이 없다. 안 먹을땐 모르겠더니 먹기 시작하니 한식만 찾게 된다. 결국 한식 먹고, 한국말로 수다떨고, 한글로 된 무협지나 읽으면서 사나흘을 보내고 넷이서 함께 국경을 넘는다.
깜뽓에서 프놈펜으로 돌아와 하루를 더 묵고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엡리업행 버스를 탄다. 씨엡리업은 한 번 기본 곳이기도 하거니와 여행 이후 처음으로 한국인 숙소를 찾아갈 예정이어서 여느 때보다 편한 마음이 된다. 숙소에 짐을 풀고 로비에 나가봐도 그 말많은 한국인 여행자들에게서 꽤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주인도, 다른 한국인 여행자도 보이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공원 쪽으로 나가본다. 거리는 제법 큰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도로도 말끔이 포장되어 있다. 음.. 여행 많이 다닌 인간들이 여기는 너무 변해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공원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그리 크지도 예쁘지도 않다. 인간이 참 간사한 게 내 기억 속의 그 공원은 한번쯤은 책이라도 들고 뒹굴거리고 싶은 공원의 전형처럼 기억되어 있는데 막상 보니 조금 실망스럽다. 그래도 벤치에 조심스럽게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놀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시킨다.
아까 거리에서 잠깐 눈이 마주쳐 하이하고 지나쳤던 동양남자다. 서른 너댓이나 되었을까..여행자 같지는 않은 게 세상이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서 있다. 앉아도 되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여행자 대화가 시작된다. 일본인이냐고 물었더니 타이완 차이니즈란다. 사업차 이곳에서 9달을 살았는데 9년은 된 것 같단다. 어딘가 나른해 뵈는 인상이 그런대로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레드피아노를 아냐고 묻는다. 물론 안다-안젤리나 졸리도 다녀간 씨엡리업의 유명한 카페다-고 했더니 자기가 살테니 맥주나 한 잔 하러 가잖다. 잠깐 망설여지긴 했지만 아직 대낮인데다 여긴 길도 알고 있고, 술값이야 뭐 사기당해야 맥주일테고.. 하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반 음주욕구반에 따라 나선다. 뚝뚝을 타고 카페에서 내려 맥주를 시킨다.
의심점1. 뚝뚝을 타고 가는데 내릴 때 1달러를 주는 게 보인다. 보통 그 거리면 현지에서 오래 살았다면 1/4정도만 주는 게 정상이다. 뭐 그냥 돈 많은가보다 하고 넘어간다.
순식간에 맥주 2병이 비워진다. 어.. 이건 거의 한국남자랑 먹는 수준인데 싶을 만큼 속도도 빠른데다 꼬박꼬박 잔도 채워 주지.. 매번 건배도 하자고 하지.. 게다가 안주도 먹겠냐고 물어보지.. 아 타이완이랑 우리랑 그냥 문화가 비슷한가 보다 싶다가도 너무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결국 둘이서 거의 한시간만에 앙코르비어 큰병 6병을 죄다 비우고 나니 이번엔 노래 좋아하냔다. 노래야 안 좋아하지만 그래도 앙코르와트에 가라오케라니 신기해서 한국노래도 있냐니까 중국노래, 영어노래, 캄보디아 노래 다 있단다. 그래.. 가보자 가봐.. 설마 뭔일이야 있겠어.. 내가 나이가 몇갠데.. 정 안되도 주머니에 칼도 있겠다^^너하나 정도는 내가 무력제압이 가능하겠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줄래줄래 따라간다.
의심점2. 술값을 낼 때 내껀 내가 내겠다고 하니 극구 사양하면서 남자가 술값을 내는 게 동양의 문화 아니겠는냐고 하는데 내 보기에 뭐 동양이 다 그런거 같진 않다. 그러나 그냥 대만은 그런가보다 한다.
다시 뚝뚝을 타고 카라오케로 옮기는데 거의 100m도 안되는 거리다. 그냥 걷지 하면서 돈을 낼려고 하니 이번에도 지가 낸다. 이번에도 1달러다^^ 웨이터들은 어디나 비슷한지 아님 이 아저씨 여기 단골인지 매우 친한 척을 하고 수선을 피우더니 방으로 안내를 한다. 가라오케는 한국의 노래방처럼 생겼는데 룸이 제법 큼직한 게 어찌 보면 변두리 룸살롱처럼 생긴 게 분위기가 묘하다.
의심점3. 웨이터들이 내가 들어서니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이 아저씨야 대만사람이니 일단 나한테 한 거라고 봐야 하는데 내가 한국인이요하고 써 붙인 것도 아닌데 어찌 알았을까 싶긴 했지만 씨엡리업에 한국사람이 워낙 많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일단 과일 안주가 들어오고 술이 탁자위에 놓인다. 드디어 이 시점에서 문제가 발생하니 어디선가 들리는 또렷한 한국말 <오.징.어. 드.실.래.요.> 잠시 귀를 의심하다 이 아저씨를 쳐다보니 대략 난감한 얼굴이다. 내가 정색을 하고 묻는다. 가만있어 봐요. 지금 한국말 했죠. 한국말 할 줄 알아요?. 그러더니 다시 영어로 딴소리다. 한국말 아는 거 같으니까 한국말로 물을께요. 당신 한국 사람이예요? 했더니 그제서야 한국말을 한다. 한국 사람은 아니고 화교인데 한국에서 열여덟살까지 살았단다. 그때 기억이 안 좋아서 한국말은 하기 싫다고 하면서 주섬주섬 증명서 같은 걸 꺼내 보인다. 순간 술이 확 깬다. 사기꾼이구나 싶다. 마음 한켠으로 이 말이 사실이면 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묻는다. 당신 사기꾼이에요? 다시 대답은 영어다. 내가 뭘 사기를 치겠느냐면서 여기 술값? 하더니 미리 계산하겠다고 웨이터를 부른다. 그래서 먼저 계산을 시킨 후 여기는 막힌 공간이라 내키지 않는다고 일단을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밖에서 한 잔 더하자고 하곤 가방을 들고 나오다 그 사람이 화장실에 간 사이 오토바이를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와 버린다. 덕분에 공짜술만 엄청 먹었다^^담날 정신을 차리고 곰곰 생각해보니 그 자식이 나한테 사기를 친 게 아니라 내가 그 자식한테 사기를 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봐도 올릴 사진은 없고 안 올리자니 서운하고 그래서 골랐다. 앙코르톰의 부조인데 웬지 약오르지? 하는 거 같은 느낌이라 하나 붙여 본다.
기사는 나를 태우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더니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린다. 하지만 현지인만으로 승객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리다보니 한 시간이 지나도 손님 하나가 늘지 않는다. 뭐 안되면 하루 더 있다 가지하는 맘으로 앉아서 기다리는데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자 기사가 다가오더니 두 시간이 될지 세 시간이 될지 모르니 10불만 더 주면 나 혼자 태우고 깜뽓으로 가겠단다. 뭐 깜뽓에 기다리는 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10불씩이나 더 주고 빨리 갈 이유도 없어 그냥 기다리겠다고 한다. 두어 시간을 더 기다리니 앞자리에 스님 한분, 옆자리에 할머니 한분 그리고 손자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타고 차가 떠난다. 떠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막상 출발하고 나니 두 시간도 안 되어 차는 깜뽓에 들어선다.
깜뽓을 가로지르는 뜩주강,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른 다리 세 개가 하나로 붙어있다.
깜뽓은 조그마한 시골 동네인데 깜뽓 그 자체를 보러 오는 사람보다 주로 그 근처에 있는 보꼬국립공원에 가기 위해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면 보꼬국립공원은 또 뭐하는 곳이냐.. 식민지 시절 프랑스가 비교적 기후가 선선한 이곳 보꼬산에 자신들의 휴양 도시를 건설했는데 지금은 페허로 변한 건물들의 잔해가 흩어져 있는 곳이다. 이런저런 설명보다 그저 알포인트 촬영지라고 하면 더 간단하게 이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 여튼 기사가 내려준 미얼리첸다라는 게스트 하우스는 상태가 좀 안 좋기는 해도 따로 여행자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 동네를 배낭 메고 헤매기도 싫어 그냥 방을 잡고 투어를 신청한다. 이 투어는 베트남에서 했던 열 개 남짓의 투어들을 제치고 가장 기억에 남는 투어가 되니 역시 베트남보다는 음식 맛이 좀 떨어져서 그렇지 캄보디아가 인간적인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꼬산으로 가는 지프차는 앞자리에는 여자들을, 뒷자리 트럭칸에는 남자들을 싣고 굽이굽이 산길로 들어서는데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군데군데 웅덩이가 패여 있기는 하지만 포장도로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도로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그들이 휴양지를 오가기 위해 만든 도로라니 어디나 식민지 백성의 고충은 별로 다르지 않았나 싶다. 짚차는 두시간을 달려 한때는 황제의 별장이었다는 곳에 잠시 쉬어간다. 차에서 내리니 제법 차가운 공기의 기운이 느껴진다. 폐허가 된 별장은 한 눈에 봐도 산 아래 도시며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게 전망이 끝내주는 곳에 세워져 있다. 멀리 바다 너머로 베트남의 영토인 푸꾸억섬이 보인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그 섬이 원래 캄보디아 영토였다는데 전쟁 이후 베트남에게 빼앗겼다는데 그 섬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하도 비장(?)하여 나중에 영토분쟁이라도 생기면 꼭 캄보디아 편을 들어야겠다는 쓸데없는 마음이 생긴다.
황제의 별장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푸구억섬이 보인다.
차는 다시 산길을 달리더니 작은 오솔길 앞에 우리를 내려준다. 이제부터는 한시간 반동안 트레킹이란다. 분명 처음 투어 설명을 들을 땐 차를 타고 가든지, 걷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뭐 다들 걸으니 차타고 갈래요 하기도 머쓱해 그냥 따라 걷는다. 산길을 걸으며 가이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무슨 말인가 끝에 대학을 나왔냐기에 그렇다니까 나보고 행운아란다. 자기는 어부의 아들이라고, 몇 년전까지는 자기도 어부였다고, 집도 어렵고 동생도 있어 공부를 더 할 수 없었다는데 넌 대학 나온 나보다 영어도 잘 하잖아^^ 할 수도 없고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다. 그는 대화 짬짬이 뒤쳐지는 사람이 없는지 기다리고, 험한 곳에서는 일일이 손도 잡아주고, 산나무에서 오디같은 열매를 따서 먹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베트남의 뺀질이 가이드들만 봐서 그런지 웬지 순박한 얼굴의 그에게 마음이 쓰인다.
여기저기 폐허로 흩어져 있는 휴양지의 건물들의 잔해를 지나 알포인트의 주촬영지인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교회니 폭포니 하는 몇 가지 코스를 더 둘러본다. 폭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는 가이드의 사진을 몇 장 찍는다. 디카로 보이는 자신의 사진을 보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그에게 메일 주소를 주면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하니 자신은 메일은 없고 친구의 메일을 적어주겠단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사진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봐서 꼭 보내주겠다고 손가락까지 걸어준다. -그러나 저녁에 친구의 이메일주소라고 건네준 쪽지에 친구의 이름만 덜렁 적혀 있는 걸로 봐서 이 친구 아무래도 아직 컴퓨터를 써 본적이 없는 것 같아 태국쯤에서 인화를 해서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냥 숙소 주소를 적어온다-
지금은 폐허가 된 호텔, 알포인트의 주 촬영지다.
보꼬산은 거의 우리나라 가을 정도의 기온이다.
다시 덜컹거리며 산길을 내려오니 이번에 바다 길을 돌아 숙소로 돌아간다며 배로 갈아타란다. 배를 타니 맥주를 한 캔씩 준다. 점심때 공짜로 음료수를 주는 투어도 처음이었는데 맥주씩이나.. 사람들의 입이 벌어진다. 맥주를 마시며 저녁 노을을 지는 바다를 건너, 강을 건너 숙소로 돌아온다. 벌써 주위는 캄캄해지고 어느새 하늘에는 별이 두어개 빛나고 있다.
배에서 본 노을
가이드 Negth과 함께.. 얼굴색깔이 거의 비슷하다. 흑흑
이년 전인가.. 없는 시간을 쪼개어 휴가를 갔었더랬다. 앙코르와트를 돌아보고 나서 그래도 휴가의 한자락은 해변에서 보내야지 하는 생각에 방콕에서 비교적 가까운 꼬사멧섬으로 홀로 갔다는 거 아닌가. 뭐 바다 빛깔도 고왔고, 대나무로 만들어진 방갈로도 운치 있었지만 문제는 도무지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틀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내다가 나오는 날 다시 혼자는 해변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어찌어찌 또 해변에 와 버린 것이다. 사실 내 인도차이나 여행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인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의 작가 유재현의 <시하눅빌 스토리>라는 소설 제목에 끌린 바 크긴 하나 오기 전 그 소설을 결국 못 읽었으니 그 핑계를 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캄보디아는 갈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핑계나 대기로 한다.
오쯔띠알 해변,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첫날은 바다를 지척에 두고도 그냥 숙소에서 TV나 보고 지낸다. 일행과 시간을 맞추다보니 너무 바쁘게 다닌 탓이지 아님 선풍기나 에어컨 탓인지 딱히 감기는 아닌데 목도 아프고 몸상태도 별로 좋지 않다. 내가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아직 제대로 된 여행자가 못 되서 그런지 쉬는 것도 잘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각 같아선 맘에 드는 작은 마을을 만나면 며칠이고 쉬어가고 싶은데 막상 작은 마을이 현실로 다가오면 괜히 답답해지면서 여기서 뭐하고 지내지 하는 마음에 금세 짐을 싸게 되는가 하면 도시에선 자꾸만 움직여야 하는데 하는 초조함이 든다. 다행히 해변에서야 그리 답답할 것도 많이 움직일 것도 없어 그냥 쉬기에는 가장 적당한 장소이지만 그도 하루가 지나니 좀이 쑤신다.
결국 햇빛을 피해 아침부터 바다로 나가본다. 그저 해변이나 걷다가 햇살이 퍼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 올 생각이었다. 해변에는 제법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에 여념이 없다. 오쯔띠알 해변은 자국민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몇군데 되진 않지만 여태까지 가본 동남아 해변에서 늘 서양 여행자만 득시글거렸는데 여름 휴가라도 온 듯한 가족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하다. 더러는 버리바리 싸온 음식들을 풀어놓고 먹고 있는가하면 더러는 아이들과 함께 모래성도 쌓고, 모래 찜질도 하며 한가한 시간을 즐긴다. 어린 시절 가족들과 같이 갔던 여름휴가가 겹쳐지면서 이내 행복한 기분이 된다.
해변에서 노는 아이들
해변에서 노는 어른들
결국 제법 긴 해변을 끝에서 끝까지 걷고도 숙소로 들어가기가 싫어져 그냥 비치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한다. 하지만 해변에는 행복한 가족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거의 일분에 한 번 꼴로 무언가 사라거나 돈을 달라거나 하는 사람들과 마주쳐야 한다. 여기는 물건을 사라고 보채는 상인들이 거의 아이들인데 서너살짜리로 보이는 꼬마부터 제법 큰 아이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그나마 팔찌 등의 조악한 약세사리나 불량 식품 비슷한 먹을거리를 들고 다니는 아이는 좀 나은 편이고 캔이나 병 따위를 모으는 아이들이나 그냥 구걸하는 아이들도 여럿 있다. 안쓰러운 마음도 잠시 좀 지나니 누군가 다가온다 싶으면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그래도 그냥 가는 경우는 없고 옆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는 가는데 결국 30분쯤 뒤에는 똑같은 아이와 또 부딪치게 된다.
이렇게 앉아서 하루종일 사람구경이나 한다.
그러다 해가 진다.
해변에서 하루를 빈둥거리다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에 들어선다. 마침 옆자리에선 캄보디아 아저씨들이 술자리를 벌이고 있다. 옆자리 남자들은 여느 캄보디아 사람들과는 달리 배까지 나온 아저씨들이다. 그 옆에서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남자애 하나가 맥주캔이 비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그 아이는 내가 들어가고 술자리가 끝나기까지 이삼십분을 기다려 캔 2개를 더 챙긴다. 그러더니 종업원들의 눈을 피해 주섬주섬 남은 음식들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뭐 남긴 게 없는 듯 손가락으로 음식 찌꺼기 몇 개를 집어먹고 만다. 마침 입맛이 없어 밥을 깨작이고 있던 나는 이거라도 먹으라고 하려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아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왜 처음부터 접시 하나 더 달라고 해서 밥 덜어줄 생각을 안했는지 후회하고 있는 사이에 또다른 여자애 하나가 다가오더니 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까만 비닐봉지에 남은 밥을 담아서 간다.
오죽하면 아이들을 저렇게 내몰까 싶어 안쓰럽다가도 애들을 이용하면 물건이 더 잘 팔리니 저러겠지.. 그러니 저 물건을 사주면 저애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저런 애들을 더 많이 만들게 되는 거야.. 라며 영악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건 좀 아니다 싶다. 그냥 좀 못사는 거 하고 밥을 못 먹어 배가 고픈 거 하곤 가난의 차원이 다른 거다. 그 애가 배가 고플 거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멍하니 있다가 계산을 하고 그 애가 사라진 쪽으로 따라가 본다. 뭐 어찌할 생각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다시 만나게 되면 밥이라도 한 끼 먹이고 싶다. 하지만 그 애는 보이지 않고 어둠이 내려앉은 해변 가득 또다른 그애들이 여전히 무언가 팔러 다니고 있다.
먼저 나란히 붙어있는 박물관과 왕궁을 둘러본다. 박물관은 그 외관부터 앙코르의 유적인 반따아이 스레이를 본떠서 만들었다는데 내용물도 거의 앙코르와트의 유적들로 채워져 있다. 그저 조상의 유적으로 먹고 사는 나란가 싶은 게 어제의 영향인지 맘이 곱게 먹어지지가 않는다. 그 맘은 왕궁까지 이어져 제법 규모있게 지어진 왕궁을 보고도 국민들을 죽어가는 데 지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네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맘만 든다. 다음에 프놈펜에 오는 분들은 킬링필드와 뚜얼슬랭은 마지막날 가시기를 권해드린다. 뭘 봐도 겹쳐 보이는 게 후유증 생각보다 오래 간다--;: 왕궁을 나와서도 계속 걷는다. 걷다보니 프놈펜이라는 수도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왓프놈 사원이 나오고 호수 주변에 형성되어 있다는 조그만 여행자 거리도 나온다.
국립박물관. 외관이 반띠아이 스레이와 비슷하다.
왕궁 내에 있는 실버파고다. 바닥이 은으로 깔려 있어 그렇게 부른단다.
근데 이놈의 호수도 참 문제인 게 도대체 주변에서 호수를 바라볼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어느 나라건 호수 주변은 벤치도 놓여 있고 사람들도 좀 나와 앉아 있고 하기 마련인데 호수를 주변으로 건물이 빙 둘러서 있어 도무지 호수 쪽으로 진입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거기 호수가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게 되어 있더라는 거다. 여행자 거리 쪽으로 한참을 들어가 카페에 들어서고 나서야 호수가 눈에 보인다. 콜라 한병을 시켜놓고 앉아있으니 호수가 전부 시야에 들어오는 게 풍경이 그만이다. 호수 주위에 건물이 있는 사람들이야 이보다 좋을 순 없겠지만 다시 뭐 이런 나라가 있나 싶어진다. 후유증 오래 간다니^^
호수 주변의 까페들
마침 내가 머문 기간이 캄보디아 최대의 축제인 워터페스티발이 시작되는 날이라 담날은 강변으로 나가 본다. 워터 페스티발은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카누같은 배를 저어 누가 빠르나 경주하는 게 주 내용인데-TV에서 생중계도 한다- 이미 강변에는 노점상이며 응원하는 사람들로 한창 축제 분위기다. 나야 경기에는 관심이 있을 리 없고 그저 축제분위기에 휩쓸려 이리저리 다녀본다. 가족들의 손을 잡고 나온 나들이객이며,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젊은이들이며 모두 환한 표정들이다. 프놈펜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누군지에게 모르게 화가 났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워터페스티발, 경기 준비가 한창이다.
응원도 한창이고
거리는 축제 분위기다.
거리에는 여전히 팔다리 잘린 구걸하는 아저씨들이며, 아이를 주렁주렁 달고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는 아낙네들이며, 하루 종일 팔아도 돈 될 것 같지 않은 조악한 기념품 따위를 파는 열 살도 안 됐을 것 같은 아이들로 넘쳐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심하게 귀찮다 싶은 오토바이 아저씨들의 호객행위도 그럭저럭 견딜만해진다. 그러고 보니 캄보디아에 들어오고 부터는 숙소비니, 차비니 따위에 크게 신경이 곤두선 적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눈에 띄게 친절하진 안하도-베트남인의 아니 베트남 상인의 친절은 너무 속이 빤히 보여 그리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순박한 구석이 느껴진다. 한나절을 강변에서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워터페스티발에서 만난 캄보디아 소녀의 웃음이 환하다.
킬링필드로 가는 길에 바라본 ,프놈펜 시내는 한나라의 수도라기보단 그저 지방도시 같다. 한나라의 수도에 시내버스도 미터택시도 없고, 길도 중앙도로 몇 개를 제외하면 대충 비포장도로다. 그나마 아침에 두어시간 내린 폭우로 군데군데 도로가 잠겨 있다. 그래도 우리를 태운 툭툭은 물웅덩이를 이리저리 피해 한 삼십분을 달린 끝에 킬링필드 앞에 내려준다. 킬링필드로 불리는 이곳은 프놈펜에서 약 15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쯔엉아익이라는 곳으로1980년에 발견된 폴폿 정권의 집단학살지인데 이곳에만 약 8,900여구의 시신이 집단 매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킬링필드에 들어서면 일단 위령탑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80m 높이의 위령탑 가득히 유골이 전시되어 있다. 마음이 서늘해지는 한편으로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맘이 복잡해진다.
킬링필드내의 위령탑
위령탑 가득 유골이 들어있다. 정작 캄보디아인들은 영혼이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무슨 마음으로 유골을 저리 쌓아 둔 것일까
위령탑 근처의 들판에는 여기저기 웅덩이가 패여 있고 적게는 수십 구에서 많게는 수백 구까지 시신이 발견된 곳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그나마 아직 수습되지 않은 혹은 수습하지 않은 옷가지며 뼈들이 바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나마 학살지 여기저기에 유남히 까만 캄보디아 아이들이 관광객들을 따라다니며 “핼로핼로원투쓰리스마일.. 핼로핼로원투쓰리스마일..” 하며 표정도, 억양도 없이 계속 중얼거리는데 -통역하자면 사진을 찍혀줄테니 돈을 달라는 소리다- 거짓말 안 보태고 그 소리 그대로 따다가 단편영화 사운드로 쓴다면 어지간한 괴기영화 한편쯤은 사운드만 가지고도 제작이 가능하겠다 싶은 게 영 오싹하다. 그나마 학살의 현장을 이렇게라도 남겨두고 교훈을 삼으려는 것일까.. 시간이 조금 더 되었다 뿐이지 만만치 않은 학살의 역사를 가졌으나 어느 한곳도 제대로 보존은커녕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문득 겹쳐진다.
아직 수습하지 않은 뼈들이 땅위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때 집단 매장지였던 웅덩이에 이제 나팔꽃이 핀다.
무거운 마음으로 킬링필드를 나와 찾아간 곳은 뚜얼슬랭 박물관이다. 말이 박물관이지 이곳역시 학살의 현장이다. 이곳은 원래 뚜얼슬랭 고등학교였던 곳을 크메르루즈가 21보안대 건물로 사용한 곳으로 전 정권의 관리들에 대한 심문장소와 고문장소, 그리고 나중에는 정적들을 숙청하기 위한 곳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크메르루즈의 통치 기간인 1975년 4월에서 1979년 1월까지 2만명이 들어가서 불과 6명이 살아 나온 악명 높은 장소였단다. 뚜얼슬랭 박물관 입구에 도착하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는 내리는데 철조망이 쳐진 건물의 스산함이라니.. 들어가니 심란함이 하늘을 찌른다. 사진 위주로 전시된 전시관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시신들의 사진을 필두로 이곳에 끌려와서 찍힌 듯한 사람들의 사진이며 심지어 사형집행 직전의 사진까지 온갖 사진들이 건물 한층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전시야 이후 정권이 했겠지만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야 가해자 당사들일텐데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생생한 사진을 낱낱이 찍어 놓았을까.. 옆건물로 옮기자 고문실로 쓰인 곳이 나온다. 교실크기의 반 정도 되는 방에는 철제 침대와 고문 도구가 놓여 있고 벽에는 그 침대 위에서 죽어간 시신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런 고문실이 일층에만 7-8개가 있고 그것도 모자라 이층으로 이어진다. 더는 보지 못하고 그냥 건물을 나온다.
뚜얼슬랭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고문실. 시신의 사진이 걸려있다.
나머지 건물들도 그저 우울하고 음산하기만 하다. 방 하나에 한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있을 만큼 벽돌로 칸을 나눠 둔 감금실이며, 한때는 유골들로 캄보다아 지도를 채워 전시했다가 비난 여론에 밀려 이제는 그저 캐비넷에 담아둔 유골들을 돌아보다가 마지막 방에 이르자 살아나온 사람들의 지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는 방이 나온다. 끌려 온 사연도 가지가지지만 대부분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다 모진 고문 끝에 운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여기서 죽어간 사람들도 살아있다면 그저 보통사람들로 늙어 갔겠거니 싶은 게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살아나온 사람들, 왼쪽 아래가 끌려간 당시고 큰 사진이 현재의 모습이다.
박물관을 나오자 비는 어느새 그쳐 있다. 일행들도 마음이 무거운지 말이 없다. 그저 다른 소리나 하다가 밥을 먹고 일행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온다. 혼자 있는 오후 내내도 마음이 편치 않다. 프놈펜에서의 우울한 첫날 풍경이다.
결국 일행들의 일정에 따라 예정보다 하루 빨리 베트남을 떠나기로 한다. 메콩델타를 돌아보는 투어는 메콩델타를 지나 캄보디아 국경을 넘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하고 1박 2일짜리 투어를 신청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육로로 흔히 넘는 목바이 국경이 아니라 쩌우독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이 국경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비자 발급이 안된단다. 1달러를 수수료로 내고 캄보디아 비자를 대행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대사관에 갔다오는 비용이나 수수료나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배낭여행자 의식(?)이 발동 잠시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가볍게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생각을 바꾼다. 점점 게을러지는 것이 이젠 어디가 1달러라도 싸나 하면서 다니는 발품도 팔기가 싫어지는 게 다 더운 날씨 탓이지 싶다.
일행이 있어서인지 베트남 남부 지방부터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 것 같다. 막상 호치민을 떠나려니 뭔가 두고 온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가면 안 될 것도 같은 게 묘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래도 짐을 싸고 투어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는 두어시간을 달려 메콩강가에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거기서 다시 보트를 갈아타고 코코넛 캔디를 만드는 곳이며, 라이스 페이퍼를 만드는 곳이며 -죄 가내수공업 수준의 제작 공정이다- 몇 군데를 보여주더니 다시 보트에 태워 메콩강을 흘러간다. 메콩강은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을 거쳐 흐르는 거대한 강인데 이것이 베트남으로 와서 바다에 이르기 전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메콩델타라 부른다고 한다. 메콩강이라면 이전 라오스에서 스피드보트-말이 스피드보트지 나룻배에 모터를 장착한 매우 작고 시끄러운 배다- 7시간이나 탄 경험이 있어 그런지 강가의 풍경들도 그만그만하다. 배는 육지에 닿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 서너시간을 달리니 국경도시 쩌우덕이다.
배에서 본 메콩델타1
배에서 본 메콩델타2
쩌우덕 가는 길은 이때까지 본 베트남들의 모습들과는 사뭇 다르다. 군데군데 강이 펼쳐져 있어서 그런지 수상 가옥들도 종종 눈에 띄고, 벼가 자라는 마을이며, 동네 어귀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며,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이 그저 70년대쯤의 우리네 시골로 시간을 돌려놓은 것 같다.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드는 어린 아이들의 웃음도 그저 맑기만 하다. 쿠의 비웃음이 눈에 선하지만 별 쓸 말이 없는 고로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고향이 쩌우독인 한 시인의 시를 인용하기로 한다. 물론 가이드북에는 해석도 되어 있지만 여러분들의 영어실력을 너무 무시하는 행위가 될까봐 해석은 생략하오니 알아서 해석하시도록..
Thinh's story
when I think of Vietnam
I don't think of naplam
I don't think of a war
when I think of Vietnam
I just think of Chau Doc
where I grew up
길에서 만난 아이들
쩌우독에서 하루밤을 묵고 다시 보트를 탄다. 투어의 일정이 아직 안 끝났는지 이번엔 작은 나룻배를 타고 액젓 만드는 곳과 쌀로 만드는 강정 따위를 만드는 공정을 보여준다. 나룻배는 주로 두명씩 태우고 여자들이 뒤에서 배를 저어 가는데 이미 땀꼭에서 경험한 바 팁을 요구할 것 같은 불길하나 예감이 든다. 그러나 베트남동은 이미 죄다 담배로 바꿔버려 한 푼도 없는데다 담배를 팁으로 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일행에게 돈을 좀 빌려야 하나 하고 있는데 먼저 내린 배에서 배젓는 아낙네 하나가 이만동 짜리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흔들고 있다. 또 어떤 정신 나간 서양애가 팁을 저렇게 많이 줘서 사람 난처하게 하나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돈이 없으니 그냥 내린다. 어차피 그 보트가 몇군데 들리니 팁을 주더라도 마지막에 줘야 할 것 같은 생각도 있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로 가니 다른 아낙네가 똑같은 짓을 한다. 아.. 작전이었구나 싶다. 결국 마지막에 일행에게 빌려서라도 팁을 좀 주려던 마음을 바꿔먹고 그냥 내린다. 참 가지가지 하는 나라다.
나룻배, 사람이 직접 젓는다.
이제 국경을 넘을 시간이다. 다시 큰 보트로 갈아타고 잠시 내려 국경을 넘는다. 대략 짐작은 했지만 새까맣게 몰려있는 구걸하는 애들과 환전상들을 헤치고 강가에 있는 소박한 국경사무소에서 간단히 국경을 통과하고 이번에는 캄보디아 보트로 갈아탄다. 보트에 적혀 있는 코카콜라 2000에 뭔 물가가 이리 싸나 잠시 당황하다 아.. 단위가 동이 아니라 리엘이구나 생각하니 국경을 넘은 실감이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 보트는 하염없이 메콩강을 달려 어느 선착장에 사람들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다시 버스로 갈아타란다. 버스의 상태는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나 거기서 거긴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사뭇 다르다. 게다가 도로의 상태도 말이 아니어서 포장도로이긴 하나 군데군데 패인 곳이 많아 덜그럭거리는 짐들과 억, 억 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날이 다 저물어서야 최종 목적지인 프놈펜에 들어선다.
베트남측 국경 모습
캄보디아에서 갈아탄 보트
버스는 정확히 11시 40분에 카오다이 사원에 내려준다. 별다른 문화재라거나 눈에 띄는 사원 하나 제대로 없는 베트남에서 오래 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외관을 갖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실내는 더 으리 번쩍하다. 용이 휘감고 있는 여러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사원에는 이들의 상징인 카오다이 즉 하늘의 눈이 정면에 자리를 잡고 있다. 유교, 불교, 도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교리를 가진 종교답게 하늘의 눈 아래에 공자님, 부처님, 에수님 그리고 노자 내지 장자님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사이좋게 부조되어 있는데 총 8명인 그 부조들의 나머지 4명을 두고 같은 버스에 탔던 한국인 일행 2명과 추측을 해보았으나 별로 아는 사람도, 그나마 아는 이름의 얼굴도 가물가물해 결국 훌륭한 사람이겠지 뭐 하고 포기하고 만다^^
정오 예배가 시작되자 흰옷을 입은 카오다이교 신도들이 열을 지어 사원 안으로 들어오고 정확히 간격을 맞추어 자리에 앉는다. 이 모습은 이층에 마련된 관광객 전용으로 보이는 난간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움직임이 무슨 매스게임이라도 하듯이 일사불란하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들은 선한 본심과 평등을 추구하며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교리는 얼마나 훌륭한가 말이다. 종교란 그 교리대로 산다면 혹은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누구를 믿든지 간에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은 드는데 외형적인 질서가 주는 일사불란함 때문인지 무슨 사이비 종교 행사나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무슨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어쩌자고 자신들의 종교적 의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지 알 수가 없다. 글쎄, 이것도 넓은 의미의 선교 활동일지도 모를 일이다^^
카오다이교 사원
카오다이교 정오 예배 모습
예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고 구찌로 향한다. 정확하게는 구찌지역 주변에 있다는 여러 개의 지하터널 중 하나를 보러 가는 것이다. 구찌터널은 프랑스 식민통치 시대에 지방게릴라들이 파기 시작한 것을 베트남전 당시에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보수하고 확장하게 되었다는데 총연장 250km에 지하 30m 지점까지 마치 개미굴같은 땅굴이 만들어져 게릴라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물론 미국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아 이 지역 주변에 하루 80톤의 폭탄을 쏟아붓는가 하면 그걸로도 모자라 고엽제 7,200만 리터를 살포해 지금까지 도 그 후유증이 심각하다고 한다.
그러나 터널이란 지하에 있는데다가 워낙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모형단면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 막상 구찌 터널에서는 그 입구 몇 개와 실물 크기의 인형을 제작해 재연해놓은-우리 나라의 민속박물관을 떠올리면 된다- 몇 개의 모형이 있을 뿐이다. 뭐 한 20미터 가량 터널 속을 들어갔다 나오는 체험코스도 있긴 하지만 이도 관광객을 위해 실제보다는 약간 넓게 되어 있다고 하고, 부분부분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그저 투어의 이벤트 정도로 느껴진다. 물론 구찌 자체가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반나절 구찌투어라는 상품이 그렇다는 말이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들이 먹었다는 파피오카라는 고구마 비슷한 음식을 시식하게 되는데 육이오때 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주먹밥먹기 행사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차이가 있다면 시식 이후 판매가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뭐 물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코스의 마지막은 실탄 사격을 하는 것이다. 물론 돈을 내고 신청한 사람에 한해서인데 다행히 우리 투어에서는 신청한 사람이 없어 그 꼴은 안 봐도 되긴 했지만 투어 내내 들리는 총소리는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땅굴입구,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넓이가 아니다^^
땅굴체험, 길진 않지만 폐쇄공포증이 있는 분들은 삼가하시는 게 좋겠다. 아울러 덩치 큰 분들도 가급적 자제하시기를..
시식용 파피오카. 고구마랑 감자를 섞어놓은 맛이 난다.
여느 투어와는 이번 가이드는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다. 당연히 베트남전 즈음에는 열혈 청년의 나이이었을 그는 나만 그렇게 보였는지 몰라도 뭔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보인다. 한때 자신들의 생존 기지였을 땅에서 그 적들의 나라에서 온 관광객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는 기분이라니.. 그는 투어 내내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더니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 베트남에 평화가 온 것은 그저 30년 정도의 세월일 뿐이라고, 전쟁 기간 중에 사람들은 고통스러웠으며, 아직도 그 고통은 계속되고 있지만 지금 찾아온 이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며칠 들렀다 가는 관광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이 나라 어디에나 전쟁의 상흔은 마을마다, 거리미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마다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상처의 깊이를 내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저 베트남에도, 한국에도 그리고 전세계 어디에도 전쟁이라는 광기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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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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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죽.. 먹고싶당~~그나저나, 너구리 판다고 해서 저가지 기뻤는데, 다시마가 없다니, 정말 슬픈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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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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쫌만 기둘려. 안숙 곧 도착할꺼야. 근데 나 같으면 버선발로라도 공항으로 달려나가겠다.부가 정보
j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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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닭죽 나도 다시 먹고 싶당.. 라오스 남부에서 라이스치킨슾이 있어 시켰더니 닭국물에 밥말아 나왔다는ㅠㅠ<김박사> 난 (잘생긴) 남자 아니면 아무리 안숙이라도 그리는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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