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2/01
    <씨엡리업2> 앙코르와트에서 퍼지다.(2)
    제이리
  2. 2005/12/01
    <씨엡리업1> 오징어 드실래요(6)
    제이리
  3. 2005/11/27
    <깜&#48979;> 보꼬국립공원에 가다(14)
    제이리
  4. 2005/11/27
    <시하눅빌> 여기도 심란하다.(6)
    제이리
  5. 2005/11/20
    <프놈펜2> 다시 혼자가 되었다.(7)
    제이리
  6. 2005/11/20
    <프놈펜1> 첫날부터 우울한 풍경이 계속된다.
    제이리

<씨엡리업2> 앙코르와트에서 퍼지다.

 

브라보 빌라-씨엡립에서 유명한 한국게스트하우스-에는 한국인으로 가득하다. 한국인들이 없는 곳에서는 심지어 단체 관광객에게도 넙죽넙죽 인사만 잘했는데 막상 숫자가 많아지니 오히려 말 붙이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보통은 앙코르와트 3일권을 끊은 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야 들어오니 같이 투어라도 다니면 모를까 그냥 책이나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다행히 많지는 않아도 만화책이며 잡지 등이 있어 무료하지는 않다. 그러다 로비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한 무리의 한국인들 틈에 낀다. 밖에서 보기엔 다들 일행인 듯 보였는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렇지도 않다. 간만에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수다의 반을 차지하는 내용은 자칭인지 타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 명의 젊은 사장 중에서 이제는 홀로 남아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롱다리 사장이란 사람에 관한 얘기다. 다리가 롱다리인지야 모르겠지만 키가 많이 큰 이 젊은 부산 남자는 부산사투리 특유의 톤으로 말끝마다 “미쳤어요”를 달고 다니며 손님들을 괴롭히는데 이상하게도 손님들은 그 구박을 즐기는 눈치다. 뭐 이를테면 욕실에 형광등이 깜빡거린다고 하면 “때려서 쓰세요 아님 그냥 쓰든지.. 나이트 분위기도 나고 좋네” 하는 식인데 그 이야기거리가 무궁무진하여 이삼일 먼저 온 사람이 그 뒷사람에게 일화를 전수해주는 데만도 하루 저녁이 부족하다. 이제 제법 지쳐보이는 롱다리 사장에 대한 뒷담화의 대단원은 대략 이렇게 장사해서 얼마냐 남겠냐.. 이거 오래 못 간다.. 빨리 장가를 들여야 유지가 되지.. 하는 걱정으로 마무리가 된다.

 

앙코르와트는 그냥 자전거를 타고 하루만 다녀온다. 11월이라 그런지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서 그럭저럭 자건거를 타는데는 무리가 없다. 단지 자전거를 서양애들 기준으로 만들었는지 아님 이 동네에는 롱다리만 사는지 페달에 발이 간신히 닫는다. 천천히 앙코르와트 쪽으로 달리니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앙코르와트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이렇게 빨리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떠날 때는 몰랐었는데 사람일이란 그래서 뭐든 장담할 건 못 되는 것 같다. 앙코르왓 꼭대기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다시 앙코르 톰으로 간다. 이년 전 공사중이던 왕궁은 아직도 공사중이다. 두어시간을 앙코르톰에서 보내고 나니 딱히 더 할일도 남아 있지 않아 일몰 포인트인 프놈바깽에 잠시 들렀다가 해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온다. 해지고 난 뒤 전기사정도 좋지 않은 이곳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갈 수야 없는 노릇이다. 


앙코르왓. 연못에 연꽃이 활짝 피어 있다.


앙코르톰, 바이욘의 미소라는데 많이들 보셨을 게다


프놈바깽, 일몰직전


숙소로 돌아오니 프놈펜에서 잠시 만났던 한국인 여행자 둘이 도착해 있다. 전직 사회복지과 공무원이자 고등학교 친구 사이인 두 명의 여자여행자인데 1년 반 예정으로 여행 중이란다. 그 복잡한 원월드 티켓도 끊어서 왔다는데 친구가 아니라 자매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얼굴과 행동이 닮아 있다. 그 친구들이 중국에서 같이 다니다 잠시 헤어진 또다른 언니를 찾아와서(?) 넷이서 저녁을 먹는다. 간만에 먹는 한식이다. 씨엡리업에는 한국 식당도 꽤 많은데다 메뉴도 떢볶이에 순대까지 없는 것이 없다. 안 먹을땐 모르겠더니 먹기 시작하니 한식만 찾게 된다. 결국 한식 먹고, 한국말로 수다떨고, 한글로 된 무협지나 읽으면서 사나흘을 보내고 넷이서 함께 국경을 넘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씨엡리업1> 오징어 드실래요

 

깜뽓에서 프놈펜으로 돌아와 하루를 더 묵고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엡리업행 버스를 탄다. 씨엡리업은 한 번 기본 곳이기도 하거니와 여행 이후 처음으로 한국인 숙소를 찾아갈 예정이어서 여느 때보다 편한 마음이 된다. 숙소에 짐을 풀고 로비에 나가봐도 그 말많은 한국인 여행자들에게서 꽤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주인도, 다른 한국인 여행자도 보이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공원 쪽으로 나가본다. 거리는 제법 큰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도로도 말끔이 포장되어 있다. 음.. 여행 많이 다닌 인간들이 여기는 너무 변해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공원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그리 크지도 예쁘지도 않다. 인간이 참 간사한 게 내 기억 속의 그 공원은 한번쯤은 책이라도 들고 뒹굴거리고 싶은 공원의 전형처럼 기억되어 있는데 막상 보니 조금 실망스럽다. 그래도 벤치에 조심스럽게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놀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시킨다.


아까 거리에서 잠깐 눈이 마주쳐 하이하고 지나쳤던 동양남자다. 서른 너댓이나 되었을까..여행자 같지는 않은 게 세상이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서 있다. 앉아도 되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여행자 대화가 시작된다. 일본인이냐고 물었더니 타이완 차이니즈란다. 사업차 이곳에서 9달을 살았는데 9년은 된 것 같단다. 어딘가 나른해 뵈는 인상이 그런대로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레드피아노를 아냐고 묻는다. 물론 안다-안젤리나 졸리도 다녀간 씨엡리업의 유명한 카페다-고 했더니 자기가 살테니 맥주나 한 잔 하러 가잖다. 잠깐 망설여지긴 했지만 아직 대낮인데다 여긴 길도 알고 있고, 술값이야 뭐 사기당해야 맥주일테고.. 하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반 음주욕구반에 따라 나선다. 뚝뚝을 타고 카페에서 내려 맥주를 시킨다.


의심점1. 뚝뚝을 타고 가는데 내릴 때 1달러를 주는 게 보인다. 보통 그 거리면 현지에서 오래 살았다면 1/4정도만 주는 게 정상이다. 뭐 그냥 돈 많은가보다 하고 넘어간다.


순식간에 맥주 2병이 비워진다. 어.. 이건 거의 한국남자랑 먹는 수준인데 싶을 만큼 속도도 빠른데다 꼬박꼬박 잔도 채워 주지.. 매번 건배도 하자고 하지.. 게다가 안주도 먹겠냐고 물어보지.. 아 타이완이랑 우리랑 그냥 문화가 비슷한가 보다 싶다가도 너무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결국 둘이서 거의 한시간만에 앙코르비어 큰병 6병을 죄다 비우고 나니 이번엔 노래 좋아하냔다. 노래야 안 좋아하지만 그래도 앙코르와트에 가라오케라니 신기해서 한국노래도 있냐니까 중국노래, 영어노래, 캄보디아 노래 다 있단다. 그래.. 가보자 가봐.. 설마 뭔일이야 있겠어.. 내가 나이가 몇갠데.. 정 안되도 주머니에 칼도 있겠다^^너하나 정도는 내가 무력제압이 가능하겠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줄래줄래 따라간다.


의심점2. 술값을 낼 때 내껀 내가 내겠다고 하니 극구 사양하면서 남자가 술값을 내는 게 동양의 문화 아니겠는냐고 하는데 내 보기에 뭐 동양이 다 그런거 같진 않다. 그러나 그냥 대만은 그런가보다 한다.


다시 뚝뚝을 타고 카라오케로 옮기는데 거의 100m도 안되는 거리다. 그냥 걷지 하면서 돈을 낼려고 하니 이번에도 지가 낸다. 이번에도 1달러다^^ 웨이터들은 어디나 비슷한지 아님 이 아저씨 여기 단골인지 매우 친한 척을 하고 수선을 피우더니 방으로 안내를 한다. 가라오케는 한국의 노래방처럼 생겼는데 룸이 제법 큼직한 게 어찌 보면 변두리 룸살롱처럼 생긴 게 분위기가 묘하다.


의심점3. 웨이터들이 내가 들어서니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이 아저씨야 대만사람이니 일단 나한테 한 거라고 봐야 하는데 내가 한국인이요하고 써 붙인 것도 아닌데 어찌 알았을까 싶긴 했지만 씨엡리업에 한국사람이 워낙 많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일단 과일 안주가 들어오고 술이 탁자위에 놓인다. 드디어 이 시점에서 문제가 발생하니 어디선가 들리는 또렷한 한국말 <오.징.어. 드.실.래.요.> 잠시 귀를 의심하다 이 아저씨를 쳐다보니 대략 난감한 얼굴이다. 내가 정색을 하고 묻는다. 가만있어 봐요. 지금 한국말 했죠. 한국말 할 줄 알아요?. 그러더니 다시 영어로 딴소리다. 한국말 아는 거 같으니까 한국말로  물을께요. 당신 한국 사람이예요? 했더니 그제서야 한국말을 한다. 한국 사람은 아니고 화교인데 한국에서 열여덟살까지 살았단다. 그때 기억이 안 좋아서 한국말은 하기 싫다고 하면서 주섬주섬 증명서 같은 걸 꺼내 보인다. 순간 술이 확 깬다. 사기꾼이구나 싶다. 마음 한켠으로 이 말이 사실이면 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묻는다. 당신 사기꾼이에요? 다시 대답은 영어다. 내가 뭘 사기를 치겠느냐면서 여기 술값? 하더니 미리 계산하겠다고 웨이터를 부른다. 그래서 먼저 계산을 시킨 후 여기는 막힌 공간이라 내키지 않는다고 일단을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밖에서 한 잔 더하자고 하곤 가방을 들고 나오다 그 사람이 화장실에 간 사이 오토바이를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와 버린다. 덕분에 공짜술만 엄청 먹었다^^담날 정신을 차리고 곰곰 생각해보니 그 자식이 나한테 사기를 친 게 아니라 내가 그 자식한테 사기를 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봐도 올릴 사진은 없고 안 올리자니 서운하고 그래서 골랐다. 앙코르톰의 부조인데 웬지 약오르지? 하는 거 같은 느낌이라 하나 붙여 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깜&#48979;> 보꼬국립공원에 가다

시하눅빌에서 깜뽓으로 가는 방법은 택시를 합승하거나 픽업트럭에 얹혀 가는 것 정도가 있다고 하는데 둘다 다운타운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기사와 흥정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숙소에 보니 택시 서비스가 있다. 가격을 물어보니 4불이다. 직접 흥정할 경우 3불이나 그 이하로도 갈 수 있다고는 하지만 뭐 흥정도 잘 못하는데다 어차피 오토바이를 타고 버스정류장까지 간다면 절약할 수 있는 돈이래야 일불도 안되는 것 같아 그냥 숙소에서 택시를 신청한다. 성수기에 앞에 기사까지 네 명, 뒤에 네 명, 심지어 트렁크에 두 명, 도합 열 명도 타고 갔다는 택시는 픽업하러 올 때 보니 손님이 하나도 없다, 설마 다른 숙소에서라도 픽업당해 오겠지 하고 있는데 정말 나 하나란다.


기사는 나를 태우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더니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린다. 하지만 현지인만으로 승객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리다보니 한 시간이 지나도 손님 하나가 늘지 않는다. 뭐 안되면 하루 더 있다 가지하는 맘으로 앉아서 기다리는데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자 기사가 다가오더니 두 시간이 될지 세 시간이 될지 모르니 10불만 더 주면 나 혼자 태우고 깜뽓으로 가겠단다. 뭐 깜뽓에 기다리는 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10불씩이나 더 주고 빨리 갈 이유도 없어 그냥 기다리겠다고 한다. 두어 시간을 더 기다리니 앞자리에 스님 한분, 옆자리에 할머니 한분 그리고 손자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타고 차가 떠난다. 떠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막상 출발하고 나니 두 시간도 안 되어 차는 깜뽓에 들어선다.


깜뽓을 가로지르는 뜩주강,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른 다리 세 개가 하나로 붙어있다.


깜뽓은 조그마한 시골 동네인데 깜뽓 그 자체를 보러 오는 사람보다 주로 그 근처에 있는 보꼬국립공원에 가기 위해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면 보꼬국립공원은 또 뭐하는 곳이냐.. 식민지 시절 프랑스가 비교적 기후가 선선한 이곳 보꼬산에 자신들의 휴양 도시를 건설했는데 지금은 페허로 변한 건물들의 잔해가 흩어져 있는 곳이다. 이런저런 설명보다 그저 알포인트 촬영지라고 하면 더 간단하게 이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 여튼 기사가 내려준 미얼리첸다라는 게스트 하우스는 상태가 좀 안 좋기는 해도 따로 여행자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 동네를 배낭 메고 헤매기도 싫어 그냥 방을 잡고 투어를 신청한다. 이 투어는 베트남에서 했던 열 개 남짓의 투어들을 제치고 가장 기억에 남는 투어가 되니 역시 베트남보다는 음식 맛이 좀 떨어져서 그렇지 캄보디아가 인간적인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꼬산으로 가는 지프차는 앞자리에는 여자들을, 뒷자리 트럭칸에는 남자들을 싣고 굽이굽이 산길로 들어서는데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군데군데 웅덩이가 패여 있기는 하지만 포장도로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도로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그들이 휴양지를 오가기 위해 만든 도로라니 어디나 식민지 백성의 고충은 별로 다르지 않았나 싶다. 짚차는 두시간을 달려 한때는 황제의 별장이었다는 곳에 잠시 쉬어간다. 차에서 내리니 제법 차가운 공기의 기운이 느껴진다. 폐허가 된 별장은 한 눈에 봐도 산 아래 도시며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게 전망이 끝내주는 곳에 세워져 있다. 멀리 바다 너머로 베트남의 영토인 푸꾸억섬이 보인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그 섬이 원래 캄보디아 영토였다는데 전쟁 이후 베트남에게 빼앗겼다는데 그 섬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하도 비장(?)하여 나중에 영토분쟁이라도 생기면 꼭 캄보디아 편을 들어야겠다는 쓸데없는 마음이 생긴다.


황제의 별장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푸구억섬이 보인다. 

 

차는 다시 산길을 달리더니 작은 오솔길 앞에 우리를 내려준다. 이제부터는 한시간 반동안 트레킹이란다. 분명 처음 투어 설명을 들을 땐 차를 타고 가든지, 걷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뭐 다들 걸으니 차타고 갈래요 하기도 머쓱해 그냥 따라 걷는다. 산길을 걸으며 가이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무슨 말인가 끝에 대학을 나왔냐기에 그렇다니까 나보고 행운아란다. 자기는 어부의 아들이라고, 몇 년전까지는 자기도 어부였다고, 집도 어렵고 동생도 있어 공부를 더 할 수 없었다는데 넌 대학 나온 나보다 영어도 잘 하잖아^^ 할 수도 없고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다. 그는 대화 짬짬이 뒤쳐지는 사람이 없는지 기다리고, 험한 곳에서는 일일이 손도 잡아주고, 산나무에서 오디같은 열매를 따서 먹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베트남의 뺀질이 가이드들만 봐서 그런지 웬지 순박한 얼굴의 그에게 마음이 쓰인다.


여기저기 폐허로 흩어져 있는 휴양지의 건물들의 잔해를 지나 알포인트의 주촬영지인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교회니 폭포니 하는 몇 가지 코스를 더 둘러본다. 폭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는 가이드의 사진을 몇 장 찍는다. 디카로 보이는 자신의 사진을 보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그에게 메일 주소를 주면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하니 자신은 메일은 없고 친구의 메일을 적어주겠단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사진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봐서 꼭 보내주겠다고 손가락까지 걸어준다. -그러나 저녁에 친구의 이메일주소라고 건네준 쪽지에 친구의 이름만 덜렁 적혀 있는 걸로 봐서 이 친구 아무래도 아직 컴퓨터를 써 본적이 없는 것 같아 태국쯤에서 인화를 해서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냥 숙소 주소를 적어온다-


지금은 폐허가 된 호텔, 알포인트의 주 촬영지다.


보꼬산은 거의 우리나라 가을 정도의 기온이다.


다시 덜컹거리며 산길을 내려오니 이번에 바다 길을 돌아 숙소로 돌아간다며 배로 갈아타란다. 배를 타니 맥주를 한 캔씩 준다. 점심때 공짜로 음료수를 주는 투어도 처음이었는데 맥주씩이나.. 사람들의 입이 벌어진다. 맥주를 마시며 저녁 노을을 지는 바다를 건너, 강을 건너 숙소로 돌아온다. 벌써 주위는 캄캄해지고 어느새 하늘에는 별이 두어개 빛나고 있다.


배에서 본 노을


가이드 Negth과 함께.. 얼굴색깔이 거의 비슷하다. 흑흑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하눅빌> 여기도 심란하다.

시하눅빌은 이전에는 다른 이름이었지만 70년대 국왕의 이름인 시하눅빌로 개명되었다는 캄보디아 최대의 해변도시이다. 버스가 시하눅빌에 도착하자 대략 난감해진다. 해변이 여섯 개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대충 해변을 둘러보다 괜찮은데 짐을 풀어야겠다는 야무진 꿈은 바다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버스 정류장에서 와르르 무너진다. 해변과 해변사이가 걸어다닐만한 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 주워들은 정보에 의하면 빅토리와 오쯔띠알, 두 해변에 게스트 하우스가 모여 있는 모양인데 이 두 해변이 하나는 이쪽 끝이요 하나는 저쪽 끝이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바다 빛깔이 그나마 더 낫다는 오쯔띠알 해변으로 간다. 이름도 빅토리 해변보다야 캄보디아스럽지 읺은가 말이다. 기사가 내려주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보니 이곳의 숙소들은 모두 바다와는 도로 하나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다.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꼬싸멧의 악몽이 떠오른다.


이년 전인가.. 없는 시간을 쪼개어 휴가를 갔었더랬다. 앙코르와트를 돌아보고 나서 그래도 휴가의 한자락은 해변에서 보내야지 하는 생각에 방콕에서 비교적 가까운 꼬사멧섬으로 홀로 갔다는 거 아닌가. 뭐 바다 빛깔도 고왔고, 대나무로 만들어진 방갈로도 운치 있었지만 문제는 도무지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틀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내다가 나오는 날 다시 혼자는 해변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어찌어찌 또 해변에 와 버린 것이다. 사실 내 인도차이나 여행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인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의 작가 유재현의 <시하눅빌 스토리>라는 소설 제목에 끌린 바 크긴 하나 오기 전 그 소설을 결국 못 읽었으니 그 핑계를 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캄보디아는 갈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핑계나 대기로 한다.


오쯔띠알 해변,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첫날은 바다를 지척에 두고도 그냥 숙소에서 TV나 보고 지낸다. 일행과 시간을 맞추다보니 너무 바쁘게 다닌 탓이지 아님 선풍기나 에어컨 탓인지 딱히 감기는 아닌데 목도 아프고 몸상태도 별로 좋지 않다. 내가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아직 제대로 된 여행자가 못 되서 그런지 쉬는 것도 잘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각 같아선 맘에 드는 작은 마을을 만나면 며칠이고 쉬어가고 싶은데 막상 작은 마을이 현실로 다가오면 괜히 답답해지면서 여기서 뭐하고 지내지 하는 마음에 금세 짐을 싸게 되는가 하면 도시에선 자꾸만 움직여야 하는데 하는 초조함이 든다. 다행히 해변에서야 그리 답답할 것도 많이 움직일 것도 없어 그냥 쉬기에는 가장 적당한 장소이지만 그도 하루가 지나니 좀이 쑤신다.


결국 햇빛을 피해 아침부터 바다로 나가본다. 그저 해변이나 걷다가 햇살이 퍼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 올 생각이었다. 해변에는 제법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에 여념이 없다. 오쯔띠알 해변은 자국민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몇군데 되진 않지만 여태까지 가본 동남아 해변에서 늘 서양 여행자만 득시글거렸는데 여름 휴가라도 온 듯한 가족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하다. 더러는 버리바리 싸온 음식들을 풀어놓고 먹고 있는가하면 더러는 아이들과 함께 모래성도 쌓고, 모래 찜질도 하며 한가한 시간을 즐긴다. 어린 시절 가족들과 같이 갔던 여름휴가가 겹쳐지면서 이내 행복한 기분이 된다.


해변에서 노는 아이들


해변에서 노는 어른들


결국 제법 긴 해변을 끝에서 끝까지 걷고도 숙소로 들어가기가 싫어져 그냥 비치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한다. 하지만 해변에는 행복한 가족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거의 일분에 한 번 꼴로 무언가 사라거나 돈을 달라거나 하는 사람들과 마주쳐야 한다. 여기는 물건을 사라고 보채는 상인들이 거의 아이들인데 서너살짜리로 보이는 꼬마부터 제법 큰 아이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그나마 팔찌 등의 조악한 약세사리나 불량 식품 비슷한 먹을거리를 들고 다니는 아이는 좀 나은 편이고 캔이나 병 따위를 모으는 아이들이나 그냥 구걸하는 아이들도 여럿 있다. 안쓰러운 마음도 잠시 좀 지나니 누군가 다가온다 싶으면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그래도 그냥 가는 경우는 없고 옆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는 가는데 결국 30분쯤 뒤에는 똑같은 아이와 또 부딪치게 된다.   


이렇게 앉아서 하루종일 사람구경이나 한다.


그러다 해가 진다.


해변에서 하루를 빈둥거리다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에 들어선다. 마침 옆자리에선 캄보디아 아저씨들이 술자리를 벌이고 있다. 옆자리 남자들은 여느 캄보디아 사람들과는 달리 배까지 나온 아저씨들이다. 그 옆에서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남자애 하나가 맥주캔이 비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그 아이는 내가 들어가고 술자리가 끝나기까지 이삼십분을 기다려 캔 2개를 더 챙긴다. 그러더니 종업원들의 눈을 피해 주섬주섬 남은 음식들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뭐 남긴 게 없는 듯 손가락으로 음식 찌꺼기 몇 개를 집어먹고 만다. 마침 입맛이 없어 밥을 깨작이고 있던 나는 이거라도 먹으라고 하려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아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왜 처음부터 접시 하나 더 달라고 해서 밥 덜어줄 생각을 안했는지 후회하고 있는 사이에 또다른 여자애 하나가 다가오더니 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까만 비닐봉지에 남은 밥을 담아서 간다. 


오죽하면 아이들을 저렇게 내몰까 싶어 안쓰럽다가도 애들을 이용하면 물건이 더 잘 팔리니 저러겠지.. 그러니 저 물건을 사주면 저애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저런 애들을 더 많이 만들게 되는 거야.. 라며 영악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건 좀 아니다 싶다. 그냥 좀 못사는 거 하고 밥을 못 먹어 배가 고픈 거 하곤 가난의 차원이 다른 거다. 그 애가 배가 고플 거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멍하니 있다가 계산을 하고 그 애가 사라진 쪽으로 따라가 본다. 뭐 어찌할 생각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다시 만나게 되면 밥이라도 한 끼 먹이고 싶다. 하지만 그 애는 보이지 않고 어둠이 내려앉은 해변 가득 또다른 그애들이 여전히 무언가 팔러 다니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프놈펜2> 다시 혼자가 되었다.

다음날 일행들이 아침 일찍 일행들이 앙코르와트로 떠난다. 잠시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와 시하눅빌쪽 국경으로 빠질까 하는 생각도 안해 본 건 아니지만 언제 헤어져도 헤어질 건데 이삼일 더 같이 있는 게 뭔 소용이랴 싶어 그냥 혼자 남기로 한다. 창문도 없는 3불짜리 싱글룸으로 방을 옮기고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자니 괜시리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 같아 좀 덥더라도 움직여 보기로 한다. 캄보디아로 넘어오니 날씨가 제대로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한낮에는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거리로 나서니 햇살이 따갑다. 그저 그늘을 골라 밟으며 지도대로 왕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본다.


먼저 나란히 붙어있는 박물관과 왕궁을 둘러본다. 박물관은 그 외관부터 앙코르의 유적인 반따아이 스레이를 본떠서 만들었다는데 내용물도 거의 앙코르와트의 유적들로 채워져 있다. 그저 조상의 유적으로 먹고 사는 나란가 싶은 게 어제의 영향인지 맘이 곱게 먹어지지가 않는다. 그 맘은 왕궁까지 이어져 제법 규모있게 지어진 왕궁을 보고도 국민들을 죽어가는 데 지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네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맘만 든다. 다음에 프놈펜에 오는 분들은 킬링필드와 뚜얼슬랭은 마지막날 가시기를 권해드린다. 뭘 봐도 겹쳐 보이는 게 후유증 생각보다 오래 간다--;: 왕궁을 나와서도 계속 걷는다. 걷다보니 프놈펜이라는 수도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왓프놈 사원이 나오고 호수 주변에 형성되어 있다는 조그만 여행자 거리도 나온다.


국립박물관. 외관이 반띠아이 스레이와 비슷하다.


왕궁 내에 있는 실버파고다. 바닥이 은으로 깔려 있어 그렇게 부른단다.


근데 이놈의 호수도 참 문제인 게 도대체 주변에서 호수를 바라볼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어느 나라건 호수 주변은 벤치도 놓여 있고 사람들도 좀 나와 앉아 있고 하기 마련인데 호수를 주변으로 건물이 빙 둘러서 있어 도무지 호수 쪽으로 진입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거기 호수가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게 되어 있더라는 거다. 여행자 거리 쪽으로 한참을 들어가 카페에 들어서고 나서야 호수가 눈에 보인다. 콜라 한병을 시켜놓고 앉아있으니 호수가 전부 시야에 들어오는 게 풍경이 그만이다. 호수 주위에 건물이 있는 사람들이야 이보다 좋을 순 없겠지만 다시 뭐 이런 나라가 있나 싶어진다. 후유증 오래 간다니^^


호수 주변의 까페들


마침 내가 머문 기간이 캄보디아 최대의 축제인 워터페스티발이 시작되는 날이라 담날은 강변으로 나가 본다. 워터 페스티발은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카누같은 배를 저어 누가 빠르나 경주하는 게 주 내용인데-TV에서 생중계도 한다- 이미 강변에는 노점상이며 응원하는 사람들로 한창 축제 분위기다. 나야 경기에는 관심이 있을 리 없고 그저 축제분위기에 휩쓸려 이리저리 다녀본다. 가족들의 손을 잡고 나온 나들이객이며,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젊은이들이며 모두 환한 표정들이다. 프놈펜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누군지에게 모르게 화가 났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워터페스티발, 경기 준비가 한창이다.


응원도 한창이고


거리는 축제 분위기다.


거리에는 여전히 팔다리 잘린 구걸하는 아저씨들이며, 아이를 주렁주렁 달고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는 아낙네들이며, 하루 종일 팔아도 돈 될 것 같지 않은 조악한 기념품 따위를 파는 열 살도 안 됐을 것 같은 아이들로 넘쳐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심하게 귀찮다 싶은 오토바이 아저씨들의 호객행위도 그럭저럭 견딜만해진다. 그러고 보니 캄보디아에 들어오고 부터는 숙소비니, 차비니 따위에 크게 신경이 곤두선 적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눈에 띄게 친절하진 안하도-베트남인의 아니 베트남 상인의 친절은 너무 속이 빤히 보여 그리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순박한 구석이 느껴진다. 한나절을 강변에서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워터페스티발에서 만난 캄보디아 소녀의 웃음이 환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프놈펜1> 첫날부터 우울한 풍경이 계속된다.

프놈펜에 도착한 날 구찌 투어에서 만난 여자친구 2명이 합류해 일행이 다섯이 된다. 그래봐야 넷은 하루정도 프놈펜을 돌아본 뒤 모두 앙코르와트로 갈 예정이라 일행으로 같이 보낼 시간은 단 하루다. 일행은 도착하자마자 시내와 근교를 포함한 하루투어를 신청한다. 시간이 없을 땐 비용이 좀 들더라도 투어를 신청하는 편이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긴 하다. 나야 어차피 이삼일에 슬슬 돌아볼 생각이라 그냥 숙소에서 쉴까하고 있는데 인원수가 안 차서 투어가 무산되었단다. 프놈펜의 볼거리 중에서 유일하게 걸어갈 수 없는 거리에 있는 킬링필드를 툭툭을 섭외해 간다길래 나중에 혼자 갈 생각 하니 그도 썩 내키지는 않는데다 같이 움직이는 편이 비용면에서도 나을 것 같아 킬링필드와 뚜얼슬랭 박물관만 동행하기로 하고 일행을 따라나선다.


킬링필드로 가는 길에 바라본 ,프놈펜 시내는 한나라의 수도라기보단 그저 지방도시 같다. 한나라의 수도에 시내버스도 미터택시도 없고, 길도 중앙도로 몇 개를 제외하면 대충 비포장도로다. 그나마 아침에 두어시간 내린 폭우로 군데군데 도로가 잠겨 있다. 그래도 우리를  태운 툭툭은 물웅덩이를 이리저리 피해 한 삼십분을 달린 끝에 킬링필드 앞에 내려준다. 킬링필드로 불리는 이곳은 프놈펜에서 약 15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쯔엉아익이라는 곳으로1980년에 발견된 폴폿 정권의 집단학살지인데 이곳에만 약 8,900여구의 시신이 집단 매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킬링필드에 들어서면 일단 위령탑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80m 높이의 위령탑 가득히 유골이 전시되어 있다. 마음이 서늘해지는 한편으로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맘이 복잡해진다.


킬링필드내의 위령탑


위령탑 가득 유골이 들어있다. 정작 캄보디아인들은 영혼이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무슨 마음으로 유골을 저리 쌓아 둔 것일까  


위령탑 근처의 들판에는 여기저기 웅덩이가 패여 있고 적게는 수십 구에서 많게는 수백 구까지 시신이 발견된 곳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그나마 아직 수습되지 않은 혹은 수습하지 않은 옷가지며 뼈들이 바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나마 학살지 여기저기에 유남히 까만 캄보디아 아이들이 관광객들을 따라다니며 “핼로핼로원투쓰리스마일.. 핼로핼로원투쓰리스마일..” 하며 표정도, 억양도 없이 계속 중얼거리는데 -통역하자면 사진을 찍혀줄테니 돈을 달라는 소리다- 거짓말 안 보태고 그 소리 그대로 따다가 단편영화 사운드로 쓴다면 어지간한 괴기영화 한편쯤은 사운드만 가지고도 제작이 가능하겠다 싶은 게 영 오싹하다. 그나마 학살의 현장을 이렇게라도 남겨두고 교훈을 삼으려는 것일까.. 시간이 조금 더 되었다 뿐이지 만만치 않은 학살의 역사를 가졌으나 어느 한곳도 제대로 보존은커녕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문득 겹쳐진다.    



아직 수습하지 않은 뼈들이 땅위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때 집단 매장지였던 웅덩이에 이제 나팔꽃이 핀다.


무거운 마음으로 킬링필드를 나와 찾아간 곳은 뚜얼슬랭 박물관이다. 말이 박물관이지 이곳역시 학살의 현장이다. 이곳은 원래 뚜얼슬랭 고등학교였던 곳을 크메르루즈가 21보안대 건물로 사용한 곳으로 전 정권의 관리들에 대한 심문장소와 고문장소, 그리고 나중에는 정적들을 숙청하기 위한 곳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크메르루즈의 통치 기간인 1975년 4월에서 1979년 1월까지 2만명이 들어가서 불과 6명이 살아 나온 악명 높은 장소였단다. 뚜얼슬랭 박물관 입구에 도착하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는 내리는데 철조망이 쳐진 건물의 스산함이라니.. 들어가니 심란함이 하늘을 찌른다. 사진 위주로 전시된 전시관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시신들의 사진을 필두로 이곳에 끌려와서 찍힌 듯한 사람들의 사진이며 심지어 사형집행 직전의 사진까지 온갖 사진들이 건물 한층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전시야 이후 정권이 했겠지만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야 가해자 당사들일텐데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생생한 사진을 낱낱이 찍어 놓았을까.. 옆건물로 옮기자 고문실로 쓰인 곳이 나온다. 교실크기의 반 정도 되는 방에는 철제 침대와 고문 도구가 놓여 있고 벽에는 그 침대 위에서 죽어간 시신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런 고문실이 일층에만 7-8개가 있고 그것도 모자라 이층으로 이어진다. 더는 보지 못하고 그냥 건물을 나온다.


뚜얼슬랭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고문실. 시신의 사진이 걸려있다.


나머지 건물들도 그저 우울하고 음산하기만 하다. 방 하나에 한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있을 만큼 벽돌로 칸을 나눠 둔 감금실이며, 한때는 유골들로 캄보다아 지도를 채워 전시했다가 비난 여론에 밀려 이제는 그저 캐비넷에 담아둔 유골들을 돌아보다가 마지막 방에 이르자 살아나온 사람들의 지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는 방이 나온다. 끌려 온 사연도 가지가지지만 대부분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다 모진 고문 끝에 운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여기서 죽어간 사람들도 살아있다면 그저 보통사람들로 늙어 갔겠거니 싶은 게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살아나온 사람들, 왼쪽 아래가 끌려간 당시고 큰 사진이 현재의 모습이다. 


박물관을 나오자 비는 어느새 그쳐 있다. 일행들도 마음이 무거운지 말이 없다. 그저 다른 소리나 하다가 밥을 먹고 일행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온다. 혼자 있는 오후 내내도 마음이 편치 않다. 프놈펜에서의 우울한 첫날 풍경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