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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12
    <페샤와르> 사흘간 이동만 하다(4)
    제이리
  2. 2006/08/12
    <칼라시밸리> 한국 아저씨들을 만나다(5)
    제이리
  3. 2006/08/12
    <타르싱>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를 가다(3)
    제이리
  4. 2006/08/12
    <훈자> 일행과 헤어지다(3)
    제이리
  5. 2006/08/09
    <이슬라마바드>그래도 한국인 숙소가 좋다
    제이리
  6. 2006/08/09
    <라호르> 첫날부터 삽질이다(2)
    제이리
  7. 2006/08/09
    <암리차르> 그나마 다행이다(6)
    제이리
  8. 2006/08/08
    <다람살라> 월드컵 축구 보다(3)
    제이리
  9. 2006/06/20
    <델리> 더위는 여전하다(12)
    제이리
  10. 2006/06/20
    <바라나시2> 조금씩 무심해진다(3)
    제이리

<페샤와르> 사흘간 이동만 하다

디르에서 페샤와르 가는 길은 이때까지 보던 길과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북부 지역에서는 내내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왔는데 여기서부터 완연한 평지다. 산은 눈에 보이지 않고 멀리 지평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래서인가 차도 제법 속력을 내서 달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출발이 조금 늦어서인지 차는 어두워진 후에야 페샤와르에 도착한다. 이때까지 낯선 도시에 들어갈 때는 어둡기 전에 도착하는 걸 목표로 삼아왔는데 이번에 도리가 없다. 버스를 내려 릭샤를 탄다. 페샤와르에 있는 투어리스트 인에 가자고 하니 다행히 알아듣는 눈치다. 하지만 이 릭샤가 제대로 가는지야 알 도리가 없으나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불빛 없는 좁은 길로 들어서기라도 하면 공연히 마음이 두근거린다. 다행히 릭샤는 오래 가지 않아 숙소 바로 문 앞에 차를 세워준다.

 

숙소에 들어가 보니 한숨만 나온다. 도미토리밖에 없다는 그 여행자 숙소는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허름하기 그지 없다. 아니 허름한 건 그렇다 치더라고 도무지 나란히 붙어있는 침대를 제외하곤 아무 것도 없는 게 무슨 수용소 같다. 파키스탄은 여행자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훈자 정도를 제외하면 대도시에 있는 도미토리는 거의 시설이 형편없다고 하는데 라호르와 이슬라마바드에서 분에 넘치는 숙소에 묵은 탓인지 이런 도미토리는 또 처음이다. 다행히 숙소에는 한국 여행자가 두 명 있다. 일년 반째 여행 중이라는 남자 여행자와 훈자에서 만난 적이 있는 여행 넉달째의 대학생이다. 파키스탄쯤 오니 대부분이 장기 여행자들이다. 이 친구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든다. 오늘은 늦었으니 하루는 묵는다만 내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숙소를 옮겨야지 다짐한다. -결국 숙소는 못 옮겼다. 딴 데도 그만 그만한데다 또 한국여행자들과 수다를 떨다 보니 그냥 머무르게 되더라는^^-


페샤와르 시내


바라 히사르성, 군인이 주둔하고 잇어 주말 특정시간대를 제외하고는 들어갈 수 없단다.

 

다음날은 만사를 제쳐두고 기차표를 끊으러 간다. 정보북에 따르면 페샤와르에서 끊을 수 있는 기차표가 한정되어 있어 원하는 날짜에 표 끊기가 쉽지 않다고 되어 있다. 페샤와르에서 이삼일 묵을 생각이니 표가 없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역에 나가보니 에어콘 슬리퍼는 이미 매진이고 그 아래 칸인 일반 슬리퍼만 남아 있다. 여기서 퀘타까지는 34시간이 걸리는 거리이고 파키스탄 기차는 학생할인이 되니 이번엔 좀 편안히 가보려고 했는데 별 수 없이 그냥 일반 슬리퍼를 끊는다. 이것도 학생 할인이 되는데 역사무실에 거서 서류를 한 장 작성해야 한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내 가짜 학생증의 나이와 여권 나이가 엄청난 차이가 있어 조마조마 하며 서류를 내미니 다행히 여권은 확인을 하지 않고 학생증만으로 할인을 해준다. 결국 가짜 학생증을 또 한 번 써 먹는다.

 

페샤와르에서는 블랙마켓 한군데만 다녀온다. 블랙마켓은 페샤와르 북쪽에 있는 암시장인데 총기류와 마약류는 물론 위조지폐까지 판매되는 이상한 곳이라고 한다. 아마 국경 근처라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 듯하다. 퍼미션을 받아야 된다는 말도 있지만 그냥 들어갔다 왔다는 친구들도 있어 일단은 그냥 가보기로 한다. 조금 위험한 곳이라 혼자는 가지는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기차표 끊으러 간 날 다른 친구들은 이미 이곳에 다녀왔기 때문에-퍼미션이 없어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별 수 없이 혼자 길을 나선다. 일단 카르카누마켓 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니 거대한 시장이 눈앞에 보인다. 카르카누 마켓까지는 합법적인 시장인데 이곳에도 미군 식량인 씨레이션이며, 담배, 술 등 다양한 물건들이 쌓여 있다. 이곳에서 위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블랙마켓이 나온다고 한다. 가는 길을 물어보니 하나같이 못 들어간다며 가지 말라고 말린다. 게다가 카르카누 마켓의 분위기도 그리 좋지가 않다. 결국 블랙마켓 쪽으로는 가지도 못하고 시장만 둘러보다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카르카누마켓에서1


카르카누마켓에서2

 

나머지 시간은 그저 시내에 있는 바자르를 돌아보거나 숙소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보낸다. 이곳 숙소가 그나마 좋은 점은 프리 키친이 있다는 것이다. 취사도구 뿐 아니라 여행자들이 남기고 간 여러 가지 양념들도 있어 식사는 간단하게 여기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주로 아침은 토스트를 구워서 오믈렛과 커피를 곁들여 먹고 저녁엔 라면을 끓이거나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는다. 식당 시설이 잘 되어 있으면 한식도 아닌데 굳이 번거롭게 이럴 필요는 없지만 사실 파키스탄은 치킨 커리를 제외한 음식은 거의 없다시피 한 편이니 그나마 이렇게라도 먹는 게 다행이다. 이곳에서도 이란으로 넘어가는 한국 여행자는 없다. 일년 반째 여행한다는 친구는 파키스탄의 북쪽을 돌고 한 달 뒤쯤에나 이란으로 넘어갈 예정이고 대학생 친구는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갈 예정이다. 아무래도 이란은 혼자 가야할 팔자인가 보다.

 

페샤와르에서 사흘을 머물고 퀘타로 가는 기차를 탄다. 파키스탄의 기차는 중국이나 인도의 기차와는 달리 컴퍼트먼트 형태인데 4 1실로 되어 있다. 아침에 기차에 타보니 객실에 손님이라고 나밖에 없다. 가만 있자.. 어차피 여기서 자야 하는데 남자 손님 하나만 달랑 타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든다. 다행히 기차가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자 아버지와 딸로 보이는 두 사람이 객실로 들어온다. 다행이다 싶다. 특히 아버지 되시는 분은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시는 대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것저것 챙겨주신다. 에어컨칸의 경우 식사주문이 된다는 말을 들어서 여기도 그렇겠거니 싶어 별 준비 없이 기차를 탔는데 웬걸 일반칸은 기차가 정차 했을 때 뛰어내려 먹을 걸 사와야 한다. 근데 도대체 이 역에 얼마나 정차할지 알 수가 없으니 이래저래 눈치만 보고 있는데 이 분이 끼니때마다 음식을 사오시면서 내 것도 함께 챙겨 주신다. 파키스탄에서 참 사람들에게 신세만 지는 것 같다


퀘타 거리 풍경


구두 수선 아저씨

 

다음날 5시를 훌쩍 넘겨 퀘타에 내려 바로 터미널로 이동한다. 몸은 조금 고되지만 아무 일없이 그저 이 도시에 하루밤을 묵는 것 보단 그냥 밤버스로 국경도시인 타프탄으로 넘어갈 생각이다.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6 10분전이지만 타프탄 가는 6시 버스에는 자리가 없다. 꼭 오늘 가야 된다고 생떼를 썼더니 그럼 통로에 있는 보조 의자에 앉아서라도 가라는 데 그건 또 자신이 없다. 결국 퀘타 시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밤을 묵고 다음날 저녁 타프탄행 버스를 탄다. 버스는 밤새 달려 아침 10시경에 국경 도시인 타프탄에 도착준다. 다시 트럭을 타고 몇 분을 달려 국경에서 내리니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에 출입국사무소만 덩그러니 서 있다. 출국수속은 간단하게 끝이 난다. 드디어 이란이다. 인도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두었던 스카프를 주섬주섬 꺼내 쓰고 조금은 비장한 마음으로 이란으로 가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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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시밸리> 한국 아저씨들을 만나다

칼리시밸리는 파키스탄의 서북쪽에 힌두쿠시 산맥에 위치한 곳으로 파키스탄에서 거의 유일한 비무슬림 지역이다. 그뿐 아니라 칼라시밸리 사람들은 그들만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언어를 가지고 수천년간을 살아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들만의 전통 복장으르 한 채 살아가고 있다. 쉽게 말하면 파키스탄의 고산족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 파키스탄 정부의 이슬람화 정책으로 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으며 지금도 많은 이슬람들이 이주를 하고 있어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들도 태국의 고산족처럼 관광 자원으로나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현재는 약 삼천여명의 사람들이 칼라시밸리에 위치한 봄부레트, 룸부르, 비리르라고 불리는 세 마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확실치는 않지만 알랙산더 대왕의 서아시아 원정 때 돌아가지 않은 병사들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복장 뿐 아니라 생김새도 여느 파키스탄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다.


전통 복장을 한 칼라시 여자 아이들


남자 아이들의 옷차림은 여느 파키스타니와 다르지 않다

 

길깃으로 돌아와 하루를 쉬고 아침 일찍 마스투지로 가는 버스를 타러 나선다. 전날 예매를 하지 못해 혹시나 했는데 다행히 쉽게 표가 끊어진다. 표 파는 아저씨가 이것저것 묻더니 표를 다시 돌려 달란다. 의아한 표정으로 표를 돌려주니 좌석번호를 지우고 VIP라고 써서 돌려준다. VIP하며 웃었더니 운전석 옆의 한자리 좌석인데 정말 좌석에 VIP석이라고 써 있다^^. 덕분에 마스투지까지는 편하게 온다. 아침 8시에 출발한 버스가 마스투지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8시니 꼬박 12시간이 걸린 셈이다. 터미널 근처 숙소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치트랄행 차를 타보니 이번에 버스가 아니라 미니 트럭이다. 그나마 이곳부터 어느 지점까지는 길도 비포장이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다가 여기가 치트랄이라고 해서 내려보니 치트랄은 맞는데 봄부레트까지 가는 버스가 있는 정류장까지는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대략 잘못 내린 것이다.

 

배낭을 메고 땡볕에 땀을 흘리며 길을 묻고 있는데 메이 아이 핼프 유? 마담하는 소리가 들린다. 에구 저 놈의 마담 소리는 좀 빼면 안되나 하면서 쳐다보는데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서 있다. 봄부레트로 가는 버스 타는 곳을 물으니 여기서 제법 멀다며 자기가 지프를 태워 주겠단다. 아싸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따라가니 근처 PTDC호텔로 들어간다.-PTDC호텔은 파키스탄 정부가 운영하는 호텔로 관광지라면 예외없이 한곳씩 있는데 하루 밤에 우리돈으로 삼만원씩이나 하는 비싼 호텔이다- 그러더니 자기는 지금 휴가 중이라며 안 그래도 봄부레트에 가려고 했는데 아예 짐을 챙겨 나올테니 터미널이 아니라 봄부레트까지 그냥 같이 가자고 한다. 갑자기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는데 이거 혹시 사기꾼은 아닌가 의심은 드는 데 지프의 유혹이 또한 만만치 않다. 칼라시밸리까지 다시 비포장도로를 트럭에 실려 갈 생각을 하니 암담한 마음도 들고 뭐 나한테 뭐 사기칠 게 있겠어.. 주는 거나 안 먹으면 되지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하기로 한다.

 

자기 이름이 사이프라고 밝힌 이 남자, 꽤 특이한 구석이 있다. 파키스탄 남자라면 대부분 입고 있는 전통 복장이 아닌 청바지를 입고 있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는 무슬림이 아니란다. 게다가 믿거나 말거나 나랑 동갑인데-물론 내 나이를 밝히진 않았다. 차에서 내리라고 할까 봐^^- 아직 미혼이란다. 그러더니 술도, 담배도, 춤추는 것도 심지어 하시시도 좋아한다는 이 남자 느닷없이 붐부레트에 있는 PTDC 매니저가 자기 친구이니 방을 싸게 줄 수 있을 거라며 거기서 며칠 묵으며 맛있는 거나 먹고 푹 쉬었나 가란다. 뭐 성의는 고마우나 어쩌고 저쩌고 해가며 대충 사양을 해도 차는 이미 PTDC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가운데 푸른 잔디를 중심으로 독립적인 방들이 둘러싸고 있는 이 호텔은 마치 우리나라 중급 리조트같은 느낌이다. 일단 따라왔으니 점심을 같이 먹고 난 뒤 싼방을 찾아보겠다며 배낭을 둘러메고 길을 나서니 이번에는 숙소까지  차를

태워주겠단다.

 

봄부레트의 PTDC호텔

 

대충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숙소를 찾아가니 이미 방은 이미 풀이란다. 길거리에 외국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은데 이상하다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방이 없다는 데야 도리가 있나.. 다른 숙소를 찾아보러 나서니 이 친구 그냥 그 호텔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옮기면 어떻겠냐고 꼬드긴다. 게다가 숙소는 매니저가 이미 무료로 주기로 했다며 정 부담스러우면 100루피만 내란다. -100루피는 우리돈으로 1500원이 조금 넘는다- 점찍어둔 숙소가 만원이라니 다른 숙소찾기도 엄두가 안나 못이기는 척 그냥 호텔에 짐을 푼다. 만약 정 이상하게 굴면 방값을 내고 나오면 그만이다 싶은 생각이다. 여행 다니면서 자본 방들 중에 두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시설은 훌륭하다. 오후에는 사이프의 차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다. 이 친구 여기가 처음은 아닌 듯 이것저것 설명을 해준다. 덕분에 간만에 편하게 이곳저곳을 다닌다.

 

저녁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이 마을에서 만든 밀주나 한잔 하자고 한다. 뭐 말은 칼라시 보드카라는데 별 맛은 없지만 도수는 장난이 아니다. 일단 긴장이 된다. 내가 어쩌자고 여기까지 따라 왔을까 하는 생각부터 괜한 의심을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친다. 일단 만약을 대비해서라더도 술에 취하지는 말자 다짐하며 조금씩 마시지만 술이라는 게 마시는 데야 안 취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잔에 잔을 거듭할수록 약간씩 알딸딸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친구도 취하는지 말이 많아진다. 왜 결혼을 안 했는냐고 물어보니 20대에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 방탕하게도 살아봤지만 그도 별 재미가 없어 이제는 그냥 평범하게 산다며 자기는 이제는 섹스니 하는데 흥미가 없으니 그냥 친구처럼 편안하게 생각하란다. 그제야 맘이 조금 편해진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자기는 내일 치트랄로 돌아가 이삼일 있다가 페샤와르를 거쳐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갈 생각이니 만약에 같이 갈 생각이 있으면 여기에 하루이틀 더 있다가 치트랄에 와서 자기를 찾아오란다. 어차피 지프는 비어 있고 자기 혼자 가기도 심심하니 부담가질 필요는 없다고 덧붙인다.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는 이미 내려갔는지 그의 지프가 보이질 않는다. 왠지 꿈이라도 한바탕 꾸고 난 거 같다.


칼라시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1


칼라시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2

 

다음날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로 숙소를 옮긴다. 마을은 이미 다 둘러보았으니 딱히 할 것도 없긴 하지만 이틀이나 차를 타고 와서 하루 만에 내려갈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저 숙소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으니 이번에 숙소 주인이 같이 놀자고 부른다. 알고 보니 잠셋이라는 이 친구,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아들이다.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아 그냥 아침 일찍 봄부레트에 도착했다고 하니 이 친구가 자기가 마을 안내를 해주겠단다. 됐다고 해도 괜찮다며 부득부득 나서길래 결국 따라나서 갔던 곳을 다시 한 번 둘러본다. 저녁에는 여행 중에 이 마을에 반해 10주나 머물고 있다는 영국인 커플이 찾아와 또다시 술판이 벌어진다. 이번에 음주에 이어 가무도 곁들여진다. 낡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파키스탄 노래에 맞춰 제각기 춤을 추는데 곡 우리네 춤사위랑도 제법 닮아 있는 것 같다.

 


칼라시밸리에 있는 마을, 이곳은 그나마 좀 큰 마을이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풍장을 한다는데 그 터가 마을에 있다

 

다음날이 사이프와 만나기로 한 날이라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숙소에 놀러 온 잠셋의 친구가 PTDC호텔에 한국인들이 다섯명이나 있다며 가보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반가운 마음에 따라나서면서도 그 호텔에 묵을 정도면 배낭여행자는 아닐텐데 누굴까 싶다. 따라가 보니 전형적인 우리나라 아저씨 세명과 우리나라 젊은이 두명이 술을 마시고 있다가 나를 보고 무척 반가와 하신다. 알고 보니 이 이분들 삼부건설이라는 회사분들인데 치트랄에서 페샤와르 사이에 있는 느와리라는 곳에서 터널 공사를 하고 계시는 분들이다. 한달에 한 번 있는 휴무를 이용해 이곳까지 오셨다는데 한국 여자는 거의 팔개월만에 처음 본다며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꼭 휴가 나온 군인 아저씨들 같다. 결국 또 술판이다. 언제 가냐는 말에 내일 내려갈 생각이라고 대답하니 이분들 이틀 뒤에 현장으로 돌아가신다며 내일은 양한마리 잡을 계획인데 먹고 같이 내려가자고 하신다. 안 그래도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복잡한데 차라리 잘됐다 싶어 하루 더 있기로 한다. 사이프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뭐 그려러니 하지 않을까 싶다.

 

다음날 저녁에 PTDC호텔 마당에서 자그마한 파티가 벌어진다. 의사소통이 잘 안된 관계로 양은 못 잡았지만 -이쪽에서 양을 잡아다가 구워달라고 했는데, 호텔 측에서는 잡아오면 구워는 주겠다 뭐 이리 대답한 듯 하다- 한편에서는 닭바베큐가 준비되고 아저씨들이 꽁꽁 챙겨오신 양주도 탁자에 나온다. 마당에서는 누가 불렀는지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숙소에 묵고 있던 파키스타니들과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까지 어울려 춤판이 벌어지고 몇 번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뛰어다니다-이건 춤이 아니라 운동이다- 자리에 돌아온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술을 마셔도, 시간이 조금 늦어져도 마음이 편하다. 결국 칼라시밸리에서 보낸 나흘간 단 하루로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시며 보낸 셈이다. 대체 누가 파키스탄에서 술을 못 먹는다고 했단 말이더냐.. 이제는 속이 쓰릴 지경이다.


호텔 마당에서 열린 댄스 파티


삼부 아저씨들과 함께, 내 상태는 말이 아니다^^

 

다음날 이 분들의 차를 타고 같이 공사현장까지 이동한다. 원래 생각에는 공사현장인 느와리까지 이분들 차를 타고 나가 페샤와르까지 가는 차가 있는 디르까지 이동해 하루밤을 자고 페샤와르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이 말을 들은 삼부아저씨들 디르가 얼마나 위험한 지역인 줄 아냐면서 이구동성 말리신다. 디르가 오사마 빈 라덴이 숨어 있다고 알려진 지역이라며 언젠가 미군이 폭격도 한 곳이라며 겁을 주신다. 그러면서 공사 현장에 게스트들을 위한-회사의 높은 분이나 가족이 오면 쓰는- 숙소가 있으니 하루밤을 묵고 다음날 일찍 디르로 나가 페샤와르로 가는 차를 타라고 권하신다. 저는 여행잔데 일하시는 곳에서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극구 사양은 했지만 사실 디르에서 하루밤을 자는 일은 나로서도 막막한 일이다. 결국 공사 현장에서 도착해 오랜만에 한식으로 된 점심을 먹고 전무님께-이 현장에서 제일 높은 분이란다- 인사를 드리니 전무님도 디르는 위험한 곳이라며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자고 가라고 허락해 주신다. 게다가 필요한 거 있으면 관리부장에게 말해 가지고 가라며 이것저것 챙겨주신다. 참 여행 다니는 게 무슨 벼슬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죄송스러워진다.


느와리 공사 현장


> 이 고개가 느와리패스인데 이 아래로 터널을 뚫는다고 한다

 

결국 게스트하우스에서 짐을 풀고 저녁을 먹는다. 이곳에서 일하시는 한국분들이 한 삼사십명 정도 되어 아예 한국인 주방장을 두고 삼시 세때 한식을 드신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묵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건 사실 낮에 먹은 점심 때문이기도 했는데 간만에 먹은 김치찌개가 너무 아쉬워 한끼만 더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이번엔 휴무를 나오지 않은 아저씨들과 술을 마신다. 두 명이 한 방을 쓰신다는데 이방저방 감춰 두었던 술병들이 나오고 어디선지 나왔는지 대구포까지 안주로 올라와 있다. 나로써는 해외 공사 현장하면 그저 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러 간 아저씨들밖에 떠오르지를 않는데 요즈음도 이렇게 많은 현장에서 일을 하시는구나 생각하니 나는 이 아저씨들이, 이 아저씨들은 일년 가까이 혼자 여행 다니는 내가 새삼스럽다. 파키스탄의 중부와 남부를 가로막고 있는 산에 터널을 뚫어 겨울이면 완전히 두절되는 이곳에 물류를 수송하는 동맥을 만든다는 이 공사는 앞으로도 삼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다들 가족 이야기며, 공사이야기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삭이고 있다.

 

다음날 삼부아저씨들 아침에는 페샤와르 가는 차가 있는 디르까지 차를 태워주신다. 그것도 모자라 표까지 끊어주시는데 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떠나기 전에 몇몇 아저씨들은 약이며 과자 같은 것도 한아름 싸주시더니 김치도 가져가라고 성화다. 그저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호의를 받으니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큰 사고 없이 모두 건강하게 일 마치시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 한국에 가서 연락하라는 메일 주소 몇 개를 쥐고 아쉬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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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싱>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를 가다

길깃으로 내려와 보니 당일 떠나는 버스는 이미 끊어지고 없다. 다음날 떠나도 칼라시 밸리에서 두어시간 떨어진 치트랄까지는 바로 가는 버스도 없어 마스투지까지 가서 하루밤을 자고 다시 치트랄까지 이동을 해야 한단다. 같이 내려 온 일행도 스카루드 가는 차가 당일에는 없다. 결국 길깃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밤을 묵는다. 길깃에 있는 마디나게스트하우스는 그 명성답게 제법 다양한 투어 프로그램을 마련해두고 있는데 그 중에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를 거쳐 스카루드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프로그램이 있다. 자전거팀에서 하차한 산악인 청년이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전세계에 8천미터급 봉우리가 14- 16개라는 말도 있다-있는데 낭가파르밧은 에베레스트, k2 등등에 이은 여덟번째 높은 봉우리라는데 작년에 우리 원정대가 34년 만에 정상에 오른 곳이라고 한다.

 

산악인 청년 왈 베이스캠프 가는 길이 지금 시기에는 온톤 꽃밭이라고 들었다며 지금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고 열의를 보인다. 사실 파키스탄의 트레킹 코스는 다양하긴 하지만 숙소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라 텐트며 취사도구를 대여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가이드와 포터도 써야 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비용이 만만치 않아 여행자가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는데 지금 이 청년은 텐트며 취사도구를 죄다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나도 솔깃해진다. 사실 티벳에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다녀오긴 했지만 거기는 베이스캠프라기보다는 관광지에 더 가까웠으니 진짜 베이스캠프다운 베이스캠프를 보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다른 일행들도 설득에 넘어간다. 결국 스카르두를 가려고 했던 일행들이 일정을 바꿔 베이스캠프를 가기로 한다. 물론 베이스캠프를 거쳐 스카르두를 다녀 올 수도 있지만 일정과 비용 면에서 부담이 되니 베이스캠프 까지만 다녀오기로 한다, 일단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가 있는 타르싱까지 왕복으로 지프를 대절하고 필요한 장비 몇 가지를 대여한다.


 타르싱 가는 길에 만난 살구 파는 아이들

 

다음날 아침 필요한 부식을 사고 장비를 실은 후 타르싱으로 떠난다. 사실 파키스탄의 지프는 말이 지프지 창문도 없는데다 차의 외형이 철제프레임으로 만들어 있어 장난감차 같다. 기사까지 일곱 명이 포개 앉은 차는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 타르싱에 도착한다. 낭가파르밧이 한 눈에 들어오는 타르싱의 호텔에는 작년 등정에 성공했다는 한국팀이 걸어놓은 플래카드가 그대로 걸려 있다. 설산이 가까워서인지 한여름인데도 제법 추위가 느껴진다. 아무리 텐트를 친다지만 설산에서 하루밤을 보낼 생각에 잠시 아득해진다. 게다가 저녁나절부터 추적주적 비까지 내린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안 갈수도 없는 노릇이니 짐을 실을 당나귀와 그 당나귀를 모는 포터 그리고 가이드를 섭외해 두고 호텔에서 하루밤을 지낸다. 침낭을 꺼내고 호텔에서 준 담요까지 덮어도 새벽에는 한기가 느껴진다. 내심 비라도 왕창 내려 안 가게 됐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낭가파르밧 가는 길1


낭가파르밧 가는 길2

 

다음낭 아침 눈을 떠 보니 여전히 비는 조금씩 내리고 있다. 어차피 산에서 하루밤을 자야하니 해지기 전에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터라 시간은 여유가 있다. 12시까지 기다렸다 비가 그치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자고 이야기를 해 두었는데 10시쯤 되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쨍 하고 해가 뜬다. 결국 짐을 챙겨 베이스캠프로 떠난다. 베이스캠프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다. 게다가 주변은 온통 들꽃이 피어 있어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다. 쉬엄쉬엄 걸어갔는데도 베이스캠프까지는 5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바로 눈앞에 낭가파르밧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잠시 설산에 넋을 놓고 있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짓는다. 바깥에는 바람이 제법 찬데 생각보다 텐트 안은 따뜻하다. 이만하면 얼어 죽지는 않겠다 싶다. 저녁을 먹고 모닥불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든다. 텐트에서 마지막으로 자본 게 언제였던가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늘에선 별이 쏟아지고 불빛 한 점 없는 설산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 가이드말로는 설산이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 건 드문 일이라며 우리더러 행운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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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자> 일행과 헤어지다

훈자에 도착하자마자 이번엔 설사가 시작된다. 사실 물갈이성 배앓이 내지는 가벼운 설사 증세야 나라를 바꾸거나 뭐 좀 지저분한 곳에서 음식을 먹었다 싶으면 늘 조금씩은 있어 왔지만 이번엔 제대로다. 인도에서 설사로 고생하는 여행자들을 꽤 여럿 보기는 했지만 그간 큰 증세는 없었기에 이제 만성이 됐나 보다 했더니 그런 게 어디 있나.. 역시 예외는 없는 법이다. 원인은 물인가 싶은데-사실 훈자의 숙소에서는 뿌연 계곡물이 그대로 수도꼭지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여튼 딱히 아픈 것도 아닌데 거의 한시간에 한두번 꼴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니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다 입맛도 없으니 그저 방안에 널부러져 있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혹시나 싶어 한국에서 가지고 온 정로환을 먹어봐도 별로 나아지는 기색이 없다. 그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꼬박 이틀을 앓고 나서야 설사가 멈춘다.

 

훈자는 파키스탄의 다른 지역보다는 한국인 여행자가 많은 편이다. 게다가 내가 묵고 있는숙소의 손님은 거의 일본인과 한국인이다. 이제 막 여름 방학이 시작된 탓인지 이삼일에 한번꼴로 한국 여행객들이 들어온다. 우리 옆방에 묵고 있는 부부는 이전에 묵고 있는 한국인들이 주고 갔다며 가스버너와 냄비, 양념 등을 갖추고 하루에 두 끼는 방에서 식사를 해 먹는다. -나머지 한끼는 숙소와 붙은 식당에서 뷔페 형식으로 차려진 저녁을 먹는다. 일종의 의무방어전 같은 건데 안 먹는다고 뭐라 그러지는 않지만 숙소비가 싼 대신 저녁 정도는 그 숙소에서 먹는 것이 관행인 듯 하다. 게다가 음식도 싸고 맛있다- 덕분에 슬쩍 끼어서 찌개며 밥, 라면 등을 끼니때마다 얻어먹는다. 이곳은 중국 국경과 가까워서 중국 라면이며 통조림 등이 들어와 있어 풀풀 날라가는 밥을 제외하면 제법 그럴 듯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이곳 식당 저녁 뷔페의 경우 한국인들을 위해 김치가 나오는데 이 김치는 주로 식당 주인의 부탁에 의해 묵고 있는 한국 손님들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번에는 이 부부가 김치를 담궈 주고 얻어 온 김치가 있어 심지어 김치찌개를 얻어먹기도 한다.


숙소에서 본 훈자의 전경-


숙소에서 본 훈자의 전경-

 

그렇게 지내다 보니 하는 일 없이 하루가 간다. 옆집 부부가 떠나며 주고 간 식사도구 일체를 넘겨받아 밥 해 먹고 하루는 식당에 김치도 담궈 주고 그도 모자라 사람들과 함께 방에서 따로 김치를 담아 두고 먹는다. 오후에는 따가운 햇빛을 피해 그저 방에서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들으며 뒹굴거리다 저녁에는 누군가가 새로 오거나 떠나거나를 핑계로 맥주나 한잔씩 하며 시간을 보낸다. -원래 파키스탄은 술을 팔지 않는 나라이지만 이곳 훈자에서는 가게에서 손쉽게 중국 맥주를 구할 수 있고 훈자워터라고 불리는 밀주를 숙소 식당에서 살 수도 있다. 값이 비싼 것이 흠이긴 하지만 그도 곧 익숙해진다^^- 마침 부부가 떠난 옆방에는 캄보디아에서 만났던 전직 사회복지과 공무원이었다는 여자 친구가 묵는다. 원월드티켓을 끊어 떠났으니 지금쯤은 남미에 있어야 하는 하는데.. 게다가 그전에는 일행이 같이 떠난 여자 친구였는데 어라 이번에는 남자친구다. 사연을 들어보니 같이 떠난 여자친구, 이집트에서 이집트 남자를 만나 9월에 결혼 예정이란다. 그래서 결국 혼자 여행을 계속하다가 지금의 일행을 만나 이 친구도 일정을 바꾸게 된 것이란다. 캄보디아에서 만났으니 거의 10개월 만에 본 셈인데 그사이 둘 다 제짝을 찾은 셈이다. 부러워라..

 

그러다 어느 날 두달 넘게 같이 다녔던 친구가 중국으로 떠난다. 원래 일정이 그렇기는 했지만 훈자에서 꽤 오래 머물 것처럼 보였는데 좀 갑작스럽다. 그래도 갈 사람은 가야 하는 법... 다음날 한국 친구들 몇 명과 근처에 있는 파수 방면으로 트레킹을 갔다가 친구는 국경 마을인 소스트로 가고 나는 다시 훈자로 돌아오기로 한다. 떠나기 전날 혼자 근처에 있는 울타르 빙하쪽을 다녀 온다길래 그런가보다 했더니 제법 어두워져서야 다리를 절며 나타나서는 길을 좀 헤맸다는데 인대가 상한 것 같다며 파수쪽 트레킹도 힘들겠다고 한다. 섭섭한 마음에서인지 공연히 짜증을 부리다 결국은 싸움이 된다. 떠나는 길에 싸우고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럭저럭 수습은 했지만 개운치 않은 상태로 다음날 같이 버스를 타고 가다 나는 파수에서 내리고 친구는 소스트로 떠난다. 파수에서 후세이니 마을로 이어지는 서너시간의 트레킹 코스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여전히 세 시쯤이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소스트행 버스를 탄다. 결국 소스트에서 한번 더 얼굴을 보고 친구는 중국으로 나는 훈자로 돌아온다.

 


파수트레킹 도중 만난 마을


일명 서스펜션 브릿지, 생각보다 많이 무섭다^^

 

두달만에 혼자가 되어서인지 꼭 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모든 일이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저 옆방의 친구와 수다나 떨며 지내다가 그 친구마저 떠나고 나서는 그저 방안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나마 목도리도 다 뜨고 나니 친구가 주고 간 이북이 유일한 위안이다. 그렇게 이삼일을 보내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또 다른 한국인 여행자들을 따라 라카포시로 트레킹을 다녀온다. 훈자 근처에는 레이디 핑거, 라카포시 등 거의 8천미터에 육박하는 이름난 등정 코스들이 있는데 라카포시 트레킹은 그 라카포시봉의 베이스캠프가지 다녀오는 트레킹 코스로 중간에 설산의 눈이 녹아 만들어진 빙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원래는 제대로 간다면 라카포시봉 아래에 있는 미나핀 마을에서 하루, 중간 지점인 하파쿤에서 하루를 자고 디란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는 2 3일 일정이지만 이 경우 텐트까지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일반적으로는 디란베이스캠프가 아니라 미나핀 마을에서 하루 거리인 라카포시 베이스캠프만 다녀온다고 한다. 그나마 우리는 그냥 지프를 대절해 아침 일찍 미나핀으로 떠나 라카포시 베이스캠프까지 갔다 저녁에 다시 지프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아침 일찍 출발한 지프는 미나핀 마을에 있는 디란게스트하우스에 우리를 내려준다. 거기서 아침을 먹고 간단한 점심거리를 챙겨 출발한다. 라카포시 베이스캠프까지는 왕복 8시간 거리다. 저녁 6시에 다시 지프를 타고 돌아가기로 기사와 약속을 하고 가이드 없이 그냥 게스트북에 그려진 지도만 가지고 길을 떠난다. 계곡을 따라 두어 시간을 올라가니 제법 큰 마을이 보인다. 마을에서 길을 물으니 꼬마 둘이 길안내를 해 준다. 두어 시간을 더 올라가니 멀리 라커포시봉과 그 아래 빙하가 보인다. 이제 한두 시간만 더 가면 되려니 했지만 꼬마 가이드 왈 4시간 남았단다.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그냥 따라가 본다. 어느 지점에서 저 등성이만 넘으면 베이스캠프라고 일러주곤 아이들은 다시 마을로 되돌아간다. 어느새 빙하는 발밑에 보이지만 저 등성이는 아득하기만 하다. 결국 시간이 오후 3시가 되어갈 무렵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온다. 아무리 내리막길이라도 온 시간을 생각하면 더 올라가는 것은 무리다. 결국 마을에 내려오니 저녁 7시가 훌쩍 넘어 있다. 꼬박 11시간 가까이 걷고도 베이스캠프는 구경도 못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꼬마들이 안내한 것은 라카포시 베이스캠프가 아니라 디란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1 2일 걸리는 거리를 당일로 다녀오려 했으니 도착을 못 한 것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가이드해 준 동네 아이들


> 앞에 보이는 것이 라카포시 봉이고 옆에 보이는 것이 미나핀 빙하다.

 

트레킹도 했으니 이제 슬슬 훈자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또다른 일행을 만난다. 한국에서 포르투칼까지 자전거로 횡단하는 팀인데 숙소에서 만난 젊은 친구들이 중국에서 만난 이 팀을 훈자에서 다시 만났다며 같이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해서 만나게 된다. 일행은 모두 4명인데 누가 봐도 자전거 아니라 뭐라도 타게 생긴 두 사람과 자전거라곤 동네 오락실에서 오락으로나 타 봤을 것 같은 두 사람이다. 전자의 두 사람은 사실 자전거가 전공이 아니라 산악인들인데 그 중 한 사람은 어느 등정에선가 크레바스에 빠진 후배의 자일을 차마 끊지 못해 10시간 넘게 잡고 있다가 동상으로 손가락 8개를 자른 분이다. -다행히 그 후배도 죽지 않고 살아났단다- 같이 숙소마당에서 백숙을 끓여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아쉽게도 그분은 원래 중국까지만 같이 하기로 한터라 그날이 마지막 날이었고 또다른 산악인 청년은 허리디스크 때문에 훈자에서 중도 하차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동네 오락실 청년 둘이 이 여정을 이어가게 된 모양이다. 여튼 이 친구들이 며칠 훈자에서 쉰다며 잡는 바람에-게다가 훈자에 무슨 페스티발도 한다나- 내친김에 이삼일을 훈자에 더 머무른다. 사실 페스티발은 예상했던 대로 안 보는 게 나을 뻔 하긴 했다.


훈자페스티벌, 사람은 많이 모였는데 별 재미는 없었다는^^

 

결국 엉성한 동네 페스티발이 끝난 다음날 아침 일찍 두 사람이 자전거로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로 길깃으로 떠난다. 길깃까지 가서 나는 칼라시 밸리가 있는 치트랄로, 나머지 친구들은 스카루드로 떠날 예정이다. 자전거팀에서 하차한 친구의 자전거며 짐이 많아서 길깃까지는 지프를 대절해 함께 내려온다. 결국 거의 삼주를 훈자에서 뒹굴거리다 내려오는 셈이다. 아마 이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훈자에서 한달을 머물렀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부터는 다시 혼자 움직여야 한다. 사실 여행 전체를 통틀어 보자면 혼자 움직인 기간이 훨씬 더 긴데도 어째 쉽사리 적응될 것 같지가 않다. 뭐 딱히 외로운 것도, 무서운 것도 아닌데 이 막막함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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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마바드>그래도 한국인 숙소가 좋다

아침에 호텔을 나와 미리 예약해 놓은 대우 버스를 탄다. 아니 이제 삼미 버스인가.. 여튼 간만에 타보는 안락쾌적한 버스다. 에어콘은 기본에 비디오 청취용 핸드폰을 일일이 나눠주는 안내양 언니가 있는 전형적인 우리에 80년대 버스다. 게다가 샌드위치며 음료수까지 나눠 준다. 차이가 있다면 안내양 언니가 검은 머리 수건을 쓰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인도에서 찢어지는 스피커 소리에 아랑곳없이 틀어대던 음악과 사람들의 소음 속에 버스를 타다가 간만에 조용한 버스를 조금 이상한 느낌마저 든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도 우리네 고속도로 비슷하다. 거의 8차선은 되어 보이는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있어 차가 도착하는 라왈핀디까지는 300km 정도가 된다는데 시간은 5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다만 창밖으로는 가끔 집들이 두어 채 보일 뿐 끝없는 황토빛 벌판만 계속된다.

 

차는 라왈핀디에 우리를 내려준다. 이슬라마바드에 간다더니 웬 라왈핀디냐고? 그게 말이지 파키스탄 정부가 카라치에서 이슬라마바드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슬라마바드를 우리에 창원이나 분당처럼 계획도시로 만든 모양이다. 그래서 주소도 F구역 15번 거리 홈넘버 39 정도만 가지고 거의 모든 곳을 찾아갈 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그전부터 제법 큰 도시였던 이슬라마바드 바로 옆의 도시인 라왈핀디는 그냥 교통의 요지로 두고 이슬라마바드는 행정과 주거를 담당하는 정도로 역할 분담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뭐 말은 다른 도시지만 이 두 도시는 차로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니 대략 같은 도시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여튼 라왈핀디에 내려 또다른 대우버스를 갈아타고 이슬라마바드로 향한다.


라왈핀디의 대우버스터미널

 

이슬라마바드에도 한국인 숙소가 하나 있는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배낭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곳이 아니라 파키스탄에 잇는 한국인 회사나 비즈니스맨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숙소도 이슬라마바드의 고급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고 식당도 거의 호텔 수준이다. 물론 방값도 거의 한국 수준이다. 인터넷 어디선가 배낭 여행자에게는 약간의 할인이 된다고 해 미리 메일을 보내두었는데 답장을 받아보나 할인이 되기는 해도 그 역시 만만한 가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호르에서의 출혈이 채 가시지도 전에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놈의 월드컵 때문이다. 예선전 3경기 중 마지막 경기인 스위스전을 보기 위해 굳이 한국 숙소를 찾아 온 것이다. 하지만 고급 주택가에 자리잡은 이 쾌적한 숙소에는 같이 월드컵을 볼만한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결국 달랑 둘이서 경기를 본다.

 

숙소 주인은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분인데 우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앉아 있으니 밥한공기를 들고 와 같이 먹으며 두런두런 말을 건넨다. 파키스탄에 오자마자 그냥 시작한 숙소라고.. 이제 5년쯤 되었다고.. 아들이 친구처럼 키가 크다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친구가 숙소가 참 편하다고 했더니 그말이 가장 듣기 좋다며 진짜냐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알다시피 고급주택가에 있다보니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아 배낭여행객들에게는 할인을 해 준다 해도 비싼 걸 안다며 미안하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편해서 좋다며 장기여행자들 중에 며칠씩 묵어가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그냥 집같이 편하게 있다 가라신다. 아닌게 아니라 책장엔 한국책도 가득하고, 한국 음식에, TV, 에어컨에 며칠 확 묵고 가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만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다. 쉬는 건 훈자에 가서 하기로 하고 결국 다음날 다시 길을 나선다.


파키스탄의 버스들, 심하게 화려하다.

 

다시 라왈핀디로 나가 길깃행 버스를 탄다. 길깃은 훈자에서 세시간 가량 떨어져 있는 도시로 훈자로 가려면 이곳에서 내려 다시 미니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대우버스는 대도시들 사이에서만 다니는 모양이다. 버스는 다시 인도 버스 비스름해져 있다. 3시에 출발한다던 차는 4시가 다 되도록 지붕위에 짐을 싣더니 4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출발한다. 게다가 에어컨 틀어 놨다고 커튼도 못 열게 한다. 살짝 커튼을 젖혀 창밖을 본다. 이 길이 그 유명한 카라코람 하이웨이다. 사실 리왈핀디에서 길깃까지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반이상을 달리게 되는 셈인데 버스가 주로 밤에 달리니 경치를 감상하기는 쉽지 않다. 저녁을 먹으라고 내려 준 식당에도 아침을 먹으라고 내려준 식당에도 도무지 먹을 만한 음식이 없다. 저녁은 빵으로, 아침은 그냥 음료수 한잔으로 때운다. 14시간 걸린다던 버스는 거의 20시간을 달려 다음날 정오쯤에 길깃에 도착한다. 상태가 말이 아니지만 바로 미니버스-말이 미니버스지 우리네 8인승 봉고를 20인승으로 개조한 거다-를 갈아타고 훈자 밸리의 한 마을인 카리마바드로 향한다.


훈자가는 길

 

훈자가 제법 유명한 여행자이니 거리만 봐도 내릴 수 있겠거니 여유를 부리고 있다가 친구가 내리라고 하는 소리에 정신이 든다. 그냥 마을 어귀인 거 같은데 여기가 우리가 갈려고 숙소인 올드 훈자인이 있는 곳이란다. .. 여기는 아닌거 같은데 하며 부랴부랴 따라내리니 올드 훈자인 간판이 보인다. 간판을 따라 들어가니 웬 할아버지한 분이 이리로 오란다. 올드 훈자인이냐니까 그렇단다. 따라가 보니 옆방에 한국인 부부도 묵고 있고 방도 나쁘지 않아 그냥 묵기로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는 올드 훈자인이 아니라 할아버지 집으로 유명한 하이데르인이다. 할아버지, 버스에서 내리는 모든 여행객들이 말하는 숙소는 죄 여기다 하며 데리고 오신단다^^ 결국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숙소에 도착한다.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한지 꼬박 하루만에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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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첫날부터 삽질이다

암리차르에서 하루를 묵고 나서 곧장 인도 국경으로 향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에서는 날마다 국기 하강식때 일종의 이벤트가 벌어진다고 하는데 이름하여 군사 연극이 그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한때는 한나라였지만 국민감정은 그리 좋지 않다. 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두나라 사이에 유일하게 열려 있는 이 국경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경비대들이 일종의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다. 힘겨루기라고 해 직접 몸싸움을 하는 건 아니고 과장된 몸짓과 동작으로 국기 하강을 위해 움직이면 이를 보고 있는 관중들도 질세라 큰 소리로 함성을 질러 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이걸 보기 위해 날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양쪽 국경으로 모여든다고 한다. 이 이벤트를 보기 위해 국경을 넘지 않는 외국관광객들도 찾아와 이 행사만 보고 돌아가기도 한다니 꽤나 유명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가 국경에 도착한 시간은 낮 2. 국기하강식을 보기 위해선 서너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다 무엇보다 그걸 보고 나면 이미 국경이 닫혀버려 국경마을에서 하루를 자던지 다시 암리차르로 돌아가야 한다. 뭐 그렇게 까지 해서 보고 싶은 건 아니니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국경에 도착해 음료수나 한잔 마시려고 가게에 앉으니 가게 주인이 맥주가 있단다.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가면 당분간 못 마실테니.. 해가며 남은 인도 루피를 털어 맥주를 마신다. -오마니 죄송합니다. 그렇게 술 조금만 마시라고 이르셨거늘.. 마침내 낮술까지^^-  마침 가게에서 군사 연극을 찍은 VCD를 보여 준다. 닭벼슬같은 모자를 쓴 인도 군인이 쿵쿵거리며 국기 근처로 가는 모습이 코메디를 연상시킨다. 아마 판매를 위해 틀어 놓은 모양이다. 친구가 그걸 하나 산다. 나한테도 하나 구워 주겠다는 데 내 노트북엔 CD롬이 없다. 결국 한국에 가서 받기로 하고 군사 연극을 못 보는 아쉬움을 달랜다. 이제 파키스탄으로 넘어갈 시간이다. 해는 여전히 머리 꼭대기에 있고 낮술에 정신은 해롱거리는데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은 뭐가 이리 긴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몇 번인가 여권 검사를 하고 두어장의 종이를 쓰고 나서 결국 낮술이 깰 때쯤에야 라호르행 버스를 탄다

 

라호르에 도착해선 삽질이 시작된다. 라호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게스트하우스인 리갈 인터넷인으로 가기로 하고 릭샤를 잡아탄 것 까지는 좋았는데 릭샤 아저씨 왈 그곳은 호텔이 아니란다. 그러고보니 론리에 있는 리갈 인터넷인이 숙소 편에 있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게 극장이었던가.. 마구 헷갈린다. 파키스탄부터는 사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어온 데다 가이드북이라곤 <이스탄불 투 터키> 즉 별로 두껍지도 않은 책에 네팔, 인도, 파키스탄, 이란, 터키까지 다섯 나라나 들어있으나 정보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영어로 되어 있으니 눈에 쏙쏙 들어오지도 않고 하는 이유로 대충 도착한 게 화근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하루만 묵고 이슬라마바드 거쳐 훈자로 쏠려고 했으니 그냥 대우터미널로 방향을 돌린다. 어차피 터미널 근처면 숙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곳 파키스탄엔 대우버스가 있는데 가장 시설도 좋고 독자적인 터미널까지 있는 고급 버스이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터미널 근처엔 터미널 이층에 있는 비싼 호텔 달랑 한 개뿐이다. 그나마 ATM도 국내 카드밖에 되질 않아 한참을 은행을 찾아다니다 결국 포기하고 그냥 환전을 하고 만다. 친구와 터미널에 앉아 그냥 밤차로 이슬라마바드로 갈지, 좀 비싸지만 터미널 호텔에 그냥 묵을지 아니면 다시 싼 여행자 숙소를 찾아 다시 돌아갈지 의논을 해 본다. 이슬라마바드로 바로 가기엔 너무 피곤한데다 시간이 고작 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니 늦은 시간에 버스를 탄다 해도 새벽에 도착하게 되니 이동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고 호텔은 아무래도 너무 비싸고-둘이 삼만원 돈인데 이 나라에선 그게 왜 그리 비싸게 느껴지는지- 여행자 숙소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다. 게다가 어차피 내일 아침에 다시 이곳으로 와야 하는데 차비도 만만치 않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터미널 의자에 널부러져 있다가 내가 결단을 내린다. 근처의 싼 숙소를 찾아보자.

 

론리를 뒤지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스호스텔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으니 거기로 가기로 한다. 릭샤를 잡아타고 지도를 보여 주니 안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애매한 표정이다. 일단 숙소가 있다는 거리인 후세인 쪼크까지 가기로 한다. 거기서부터 지도에 있는 길이라 추정되는 길을 아무리 헤매도 숙소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릭샤에서 내려 가방을 메고 이리저리 길을 묻는다. 삼십분 남짓 헤매다 결국 찾긴 했는데 이 숙소 없어진지 오래란다. 벌써 연립 주택 같은 것이 들어서 있다. 내가 가자고 했으니 화도 못 내겠고 그저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다. 나는 하릴없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친구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근처에 호텔이 있는지 묻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친절한 파키스타니들은 인사에 여념이 없다. 하우 아 유? 표정 보면 모르겠냐.. 나 지금 심히 안 좋거든 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도 파인, 오케이 해가며 지들이 대답까지 한다. 몬살아^^그 와중에 한둘은 메이 아이 헬프 유? 하고 다가오긴 하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 결국 이러고 있어 봐야 시간만 흐르니 그냥 비싸더라도 터미널의 호텔에 가기로 하고 다시 릭샤를 탄다.

 

호텔에 짐을 푸니 날이 벌써 어두워져 있다. 거의 서너 시간을 숙소 잡으려고 삽질을 한 셈이다. 간신히 씻고 터미널 매점에서 파키스탄판 KFC를 사다가 숙소에서 대충 저녁을 때운다. 뭐 이런 날도 있지.. 하고 생각하려고 해도 괜히 친구보기도 미안하고 몸도 피곤하고 그러다보니 마음도 우울해져 괜히 파키스탄이 싫어질려고 한다. 게다가 파키스타니들.. 참 사람들에게 관심도 많다. 보는 사람마다. 핼로우에 하우 아 유인데 생각해 보라 하우 아 유에 대답이 얼마나 기냐 말이다. 파인 땡큐에 앤드 유까지 하면 이미 인사한 사람은 지나가고 없다 말이다^^. 게다가 결정적일 때 도움은 전혀 안된다니.. 군시렁군시렁.. 공연한 짜증이 결국 파키스탄을 지나 파키스타니들에게 까지 이어진다.

 

** 뭐 딩연하게도 사진찍을 여력은 전혀 없었으며 고로 사진도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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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차르> 그나마 다행이다

암리차르로 가는 버스에서 결국 문제가 생긴다. 다람살라에서 암리차르로 가기 위해선 중간도시인 빠탄곳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버스 지붕에 올려 둔 가방을 꺼내보니 친구의 배낭 어깨끈 부분이 예리한 칼로 반쯤 찢겨져 있고 허리벨트 부분이 전부 망가져 있다. 누군가가 중간에 버스 위로 올라 가 가방을 가져가려 한 모양인데 첨엔 다른 짐들 사이에 있으니 있는 힘껏 당겼을 테고 -허리벨트는 이때 망가진 게 아닌가 싶다. 다행히 허리벨트 부분은 버스 프레임에 묶여있었다- 그게 여의치 않자 어깨끈 부분을 잘라내려 한 모양이다. 여행 떠나기 전 간혹 가방이 통째로 없어지는 경우가 있으니 트렁크에 넣든지 지붕 위에 올리든지 할 때는 버스 정차 시간에 꼭 가방의 이상 유무를 살피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거의 10개월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누가 인도 아니랄까봐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지 않던 일이 일어난다. 친구의 가방에는 카메라가 무려 세대나 들어 있었는데-그나마 한대는 들고 있었다는^^- 아마 가져갔다면 누군가는 팔자를 고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한 건 그 옆에 내 배낭도 있었는데 그건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거다. 도둑들한테는 배낭속이 들여다보이는 모양이다^^

 

거의 40도가 남는 더위에 에어콘도 없는 만원버스를 타고 게다가 난도질 된 가방을 들고 암리차르에 들어서니 녹초가 된다. 황금사원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숙소와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 있다. 사실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 순례객들을 위한 시설인데 이 한켠에 여행자를 위한 시설도 함께 마련해 둔 것이다. 하지만 무료 시설이라는 게 보지 않아도 뻔하지 싶어 그냥 일반 숙소를 찾아간다. 론리 첫 줄을 장식하고 있는 숙소임에도 시설이 열악하기 그지 없다. 열악하면 가격이라도 싸면 좋으련만 심지어 가격까지 만만치 않다. 별 수 없이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간 식당은 게다가 채식 식당이다. 씨크교도들은 거의 채식주의자라 도시 전체에서 고기를 찾아보기가 싶지 않다고 한다. 에구 오래 머물 곳은 아니다 싶다. 다행히 식당은 에어컨도 나오는 것이 제법 깨끗하다.


황금사원 입구, 건물이 흰색이어서 누구는 데려다 준 릭샤왈라에게 여기가 아니라고 박박 우겼다는데.. 들어가면 황금색 사원이 있다.


이거다.

 

씨크교는 약 500년 전 구루 나닥이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에 불만을 품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을 모아 만들었다는 종교인데 그러다 보니 이슬람과 힌두교 양쪽으로부터 받은 박해의 역사도 만만치 않다. 특히 1980년대에는 이곳 암리차르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인도 정부는 황금 사원까지 탱크를 몰고 들어와 피의 진압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인도 전역에서 수천명의 시크교도들이 힌두교도들에게 테러를 당해 사망하기도 했다는데 어디서나 민족 문제와 종교 갈등은 분쟁의 씨앗인 모양이다. 씨크교도 남자는 머리에 터번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기 때문에 외면적으로도 다른 힌두교도들과는 확 구별이 된다. 아니게 아니라 이 도시에는 거의 모든 남자들이 터번을 두르고 있다. 반면에 여자들의 복장은 다른 인도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씨크교도들만 물안에 들어갈 수 있다.

 

저녁을 먹고 황금 사원을 들러본다. 이곳은 씨크교도의 성지라 그런지 거의 새벽의 두어시간을 제외하고는 문을 닫지 않는다. 게다가 입장료도 없다^^제약이 있다면 반드시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들어가야 하는 건데 별 수 없이 친구와 사원 앞에서 싸구려 손수건을 하나씩 사서 쓴다. 70년대 장보러 나온 가정부 같은 모습이다. 사원 입구에 신발을 맡기고 흐르는 물에 발을 씻고서야 사원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이 황금사원이라 불리는 이유는 중앙에 있는 사원의 지붕이 750kg이나 되는 금박으로 입혀져 있기 때문이라는데 그 주변이 물로 둘러싸여 있어 저녁 무렵에는 제법 선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사원 안은 성지를 찾은 씨크교도들과 그저 관광하러 온 인도 여행객들로 부산하다. 천천히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본다. 한켠에는 예의 무료급식소가 보이고 조금 더 들어가니 무료 숙소도 보인다. 게다가 사원 코너에서는 순례객과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마실 것을 나눠 주기도 한다. 씨크교도들이 인도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더니 이를 통해 종교 확장과 사회 환원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황금사원의 야경


사원에서 만난 인도소녀와 함께 

 

결국 암리차르에서 하루를 머물고 인도의 국경 마을인 와가로 가는 버스를 탄다. 인도에서 한달을 머물렀지만 간 곳이라고 바라나시, 델리, 다람살라가 고작이다. 뭐 다른 사람들처럼 인도에 대한 이런저런 환상을 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여행 끝 무렵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님 나중에 다른 기회가 닿으면 천천히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싶다. 인도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넓으니까.. 못 가본 곳이 많으니까.. 그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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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 월드컵 축구 보다

다람살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람살라에서 차로 약 30분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맥그로드 간지는 티벳 망명 정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달라이 라마를 따라 많은 티베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주해 와 마을을 이루고 살아 인도 속에 작은 티벳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특히 인도 북부에 자리잡고 있어 레, 마날리와 더불어 여름철에는 더위를 피해 올라온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오후 4시에 빠하르간지를 떠난 여행자 버스는 델리 외곽의 티베탄 마을인 티베탄 꼴로니에서 거의 두시간을 정차해 사람을 태우더니 주변이 어둑해서야 델리를 벗어난다. 떠나기 전 버스 뒤 트렁크에 짐을 싣더니 짐 싣는 값을 따로 달라기에 어이가 없어 그저 코웃음을 치고 말았더니 정차하는 사이에 다시 차에 올라와 돈을 안주면 짐을 내리겠다는 둥 행패가 가관이 아니다. 인도에서는 종종 이런 일이 생긴다는데 그냥 관행이라고 생각하고 줘야 하는지 아니면 싸워야 하는 건지 잘 가늠이 서질 않는다. 결국 달라는 돈의 반을 주고서야 실갱이는 끝이 난다. 뭐 이것도 지들 말대로 디스 이즈 인디아라고 생각해야 하는 모양이다.

 

아침에 자다 일어나 보니 어느새 차는 맥그로드 간지에 들어서고 있다. 여튼 아무데서나 잘 자는 거 하나는 타고 난 듯 친구는 물론 같이 타고 온 신혼부부도 머리를 아주 창밖으로 내놓고 주무시던데요 하며 놀려댄다. 뭐 창문이 열려 있으니 그럴 수도.. 하고 생각해보지만 약간 민망하기는 하다^^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길에서 전통 복장을 한 티베탄이며 라마승들이 눈에 띄는데 그래서인가 아무래도 인도가 아닌 다른 곳에 온 것 같다. 거리도 인도의 다른 곳보다는 깨끗하고 무엇보다 살만한 건 기온이 제법 선선하다는 건데 아무래도 고도도 높은데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탓이지 싶다. 방을 잡고 나서 보니 바라나시와 델리에서 연이어 만났던 가이드와 여행자 커플의 옆방이다. 원래 다람살라에 올 계획이 아니어서 인사까지 다하고 헤어졌는데 결국 다시 만나 버린 것이다. 원래 혼자 다닐 때는 기피 여행자 1호가 커플인데 이상하게 둘이 다니니 신혼부부랑 이들 커플까지 주변에 커플들이 꼬인다^^


맥그로드 간지 전경


거리의 과일 가게

 

맥그로드 간지는 티벳 사원 주변의 코라를 산책하거나 주변 마을 두어 군데를 다녀오는 것 이외에 크게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다. 그저 하루 한군데씩 박수 마을이니 다람콧 마을이니 하는 곳을 산책삼아 다녀온다. 하지만 이곳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은 듯 론리에도 밤에 혼자 다니지 말라는 경고가 나와 있고 한국식당 주인에게도 한 달 전에도 영국여행자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며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으니 대낮에 다녀도 조금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대낮에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간에만 움직인다. 나머지 시간은 그저 티비를 보거나 수다나 떨면서 지낸다. 숙소의 전망이 좋아 굳이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털실을 한 뭉치 사다가 뜨개질을 해 본다. 거의 10년 만에 뜨개질을 해보는 것 같다. 한때는 조끼 같은 것도 떴던 것 같은데 지금 기억나는 건 목도리밖에 없으니 이 더운 날 별 소용도 되지 않을 게 뻔하지만 그냥 떠 본다. 뜨다 보면 훌쩍 몇 시간이 흘러 있다. 참 여행도 오래 하다 보니 가지가지 다해보는 것 같다.


박수마을 가는 길에서 만난 아이들


다람콧 마을의 공사현장, 일은 여자들만 하더만^^

 

다람살라에는 한국인 여행자가 많다. 고로 당연히 한국 식당이 있다. 것도 두개씩이나.. 그 중 한 식당에서 월드컵 중계를 같이 보기로 한다. 저녁 6시에 시작된 토고와의 경기를 보기 위해 다람살라에 있는 한국여행자는 모두 모인 듯 그리 크지 않은 식당에 탁자와 의자를 치우고도 거의 빽빽하게 사람들이 들어선다. 한국에서 가져 왔는지 몇 년 전 보았던 그 빨간 티셔츠를 입고 온 커플도 있다 -대단한 분들이시다^^- 사실 2002년 그 월드컵 광풍 때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사무실에 앉아 쏟아져 나온 인간들을 보고 다들 미쳤나보다 냉소를 보냈는데 4년 뒤에 내가 한국도 아닌 인도에서 월드컵 보겠다고 이러고 있을 줄을 몰랐으니 사람일이란 한치 앞도 모르는 법이다. 뭐 같이 보니까 재미는 있더구만^^ 경기가 시작되자 독일경기장 한국응원석이 비춰진다. 누군가의 <역시 유럽 배낭여행하는 여자들은 물이 좋구만>하는 소리에 졸지에 물 안좋은 배낭 여행자가 되어버린 인도 여성여행자들의 한바탕 야유는 연이은 응원 소리에 묻혀진다. 전반전 어느 시간대인가 10분가량 정전이 된 걸 제외하고는 경기는 순조롭게 끝나고 한참 응원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은 결국 누군가의 방에 모여 축하주를 한잔씩 마시고서야 일어선다.

 

결국 토고전만 보고 떠나기로 했던 일정이 프랑스전까지 보고 떠나는 걸로 바뀐다. 프랑스전은 거의 자정을 넘긴 시간에 시작된다. 결국 경기 시작 전 두어 시간을 술을 마시면서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이날은 이상하게도 케이블TV가 나오지 않는다. 그것도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숙소와 한국 식당이 있는 블록만 나오지 않는 거다. 초조해진 식당 주인이 여기저기 전화를 해 거의 경기 시작 이삼전 분에 TV가 나오기는 했으나 이 역시 10분을 못 버티고 다시 끊어진다. 결국 조그만 영화관-말이 영화관이지 액정 하나 걸어놓고 비디오 보여주는게 고작인-으로 자리를 옮겨 일인당 40루피-천원정도인데 평소에는 30루피란다-를 주고 경기를 본다. 재미있는 건 먼저 보고 있던 프랑스 여행자들과 몇몇 티베탄들이 경기를 보고 있다가 한국인들이 들이닥치니 얘네들, 경기보다 우리들 하는 짓이 더 재미있는지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믿거나 말거나 그날의 케이블티비 불방 사태는 이 영화관 주인인 인도인이 저지른 일이라는데.. 글쎄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뭐 이것도 역시 디스 이즈 인디아인 것이다.


먹는 것도 일이다. 한국 식당에 앉아 뭘 먹을까 고민 중

 

결국 예정을 훌쩍 넘겨 다람살라에 열흘 가까이 머물고 나서야 암리차르로 떠난다. 신혼부부는 마날리로, 또 다른 커플은 델리로, 그리고 나와 친구는 인도의 마지막 도시가 될 암리차르로 떠난다. 암리차르는 파키스탄으로 넘어가기 위해 들러야 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씨크교도의 성지인 황금 사원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오래 머무르진 않겠지만 이곳은 인도의 여느 도시들처럼 다시 40도를 오르내리는 곳이니 다시 당분간은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시작되려나 보다. 가이드북을 찾아보니 인도와 파키스탄은 5,6월이 가장 덥고 이란은 7,8월이 가장 덥다. 어째 이 더위는 당분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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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더위는 여전하다

 

저녁 6시 30분에 바라나시 출발해 아침 8시 경이면 델리에 도착한다던 기차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뉴델리역에 들어선다. 인도에서 기차 연착이란 대단한 화젯거리도 못 되어서 누구는 자고 일어났는데도 기차가 아직 안 떠났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저 담담한 걸 보면 4시간 연착 가지고야 명함도 못 내밀 일이긴 하지만 에어컨도 없는 기차에서 이유도 모른채 그냥 몇시간씩 갇혀 있어야 하는 일은 그저 황당한 일을 당할 때 여행자들이 위로랍시고 하는 말들-여긴 인도잖아요^^-로는 용서가 안 되는 맘이다. 그래도 어쩌랴.. 그저 배낭을 메고 내리니 델리의 더위 역시 만만치 않다. 다행히 델리의 여행지 거리인 빠하르간지는 뉴델리역 바로 앞에 있어 릭샤들과 실랑이는 안해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혼잡하기 그지없는 역을 빠져 나와 역시 혼잡하기 그지없는 빠하르간지로-대체 인도에는 무슨 사람이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로 들어서니 이곳 거리 역시 쓰레기며 오물 천지다.


바라나시의 한국인들이 추천해 준 숙소에 짐을 푼다. 날이 더워 에어컨을 쓸까도 했지만 인도는 이상하게 같은 방이라도 에어컨을 사용하는 경우에 그냥 팬만 쓰는 것의 두 배 이상의 방값을 요구하는 지라 그냥 팬으로 견뎌보기로 한다. -이를테면 내가 쓴 객실의 경우 팬만쓰면 6,000원 가량인데 에어컨을 틀면 거의 14,000원 정도를 내야 한다- 그러나 팬에서 더운 바람만 나오고 방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더위를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밥 먹으러 찾아간 한국인 식당들도 대부분 그냥 건물 옥상에 있는 곳들이라  더위를 고스란히 견디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밥을 먹고 돌아와 물을 한바가지 뒤집어쓰고 그냥 방에서 지낸다. 그날 일기 예보에서 알려준 델리의 온도는 무려 42도다. 말이 42도지 아마 사우나를 제외하고 일상에서 느껴 본 가장 높은 온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여튼 추위도 문제지만 더위도 여행엔 만만치 않은 적수다.


델리의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


지금은 인도는 망고가 제철이다.


그래도 담날에는 비자 신청을 위해 일찌감치 길을 나선다. 다행히 아침부터 비가 조금 내리더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먼저 이란 비자를 받기 위해 필요한 레터를 받으러 한국대사관으로 간다. 네팔의 한국대사관에서는 한국인 직원은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이곳 델리에서는 한국 직원이 나와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콜라도 한잔 얻어 마시며 잠시 기다리는 사이 간만에 한국TV도 보고 여튼 편안한 분위기다. 한국인 직원은 레터를 건네주며 집에 자주 전화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한해에 인도대사관에만 150여건의 실종신고가 들어오는데 대부분 집에 전화를 안 해서 생긴 일이라면서 주변 여행자들에게도 꼭 전해달란다. 흐믓한 맘으로 한국대사관에서 나와 이번엔 중국대사관으로 향한다. 친구는 파키스탄에서 다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중국비자를 받아야 한다. 중국 대사관은 비교적 한산하여 금세 일이 끝난다. 다음은 이란대사관이다. 이란대사관 역시 신청서 두장을 작성해 사진과 함께 제출하니 다음주 금요일에 오란다. 여튼 대충 비자 신청은 끝낸 셈이다.


비자를 찾는 날까지 대략 일주일이 남았으니 좋으나 싫으나 델리에서 일주일은 보내야 하는데 그래도 델리는 수도라 그런지 이곳저곳 갈 곳은 많다. 유적지도 찾아보면 이래저래 꽤 되는 모양이지만 이 더위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결국 여행자 거리에서 가까운 델리 중심가인 코넛 플레이스에 나가 냉방장치가 된 커피숍이며 레스토랑, KFC, 맥도날드 등만 찾아다닌다. 인도 물가를 생각해 보면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한국 가격으로 환산해보면 여튼 한국보다는 싼 게 사실이라 큰 부담은 없다. 이곳에는 영화관도 있어서 하루는 인도 영화를 보러 간다. Fanaa라는 영화인데 대략 우리나라의 쉬리와 비슷한 내용이다. 어느날 델리, 스리나가르에서 온 여자가 어떤 남자가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남자는 인도에 투입된 파키스탄의 스파이였던 것이니.. 결국 남자는 폭탄테러의 임무를 완수한 뒤 죽음을 가장해 떠나고 여자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작전 중 부상을 당한 남자가 우연히 그 집 앞에 쓰러지고.. 하는 그렇고 그런 얘기다. 힌디로 대화가 진행되지만 내용상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고 인도 영화 특유의 흥겨운 뮤지컬들이 삽입되어 세시간이 넘는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극장이 너무 좋아서인지-우리나라 멀티플렉스 저리 가라다- 영화를 보면서 노래도 따라 부르고 심지어 춤도 춘다는 인도 영화팬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인데 그건 좀더 작은 도시에서나 가능하지 싶다.


하루는 길거리에서 헤나를 해 본다, 손바닥


손등, 한 열흘이면 거의 지워진다.


델리에서 딱 하루, 그래도 왔으니 유명하다는 곳 한두 곳 정도는 가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가이드북을 뒤져 붉은성(레드포트)과 그 근처에 있는 자마 머스짓을 보러 간다. 레드포트는 붉은 사암으로 지어서 성전체가 붉은 색을 띄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타지마할을 지은 샤 쟈한이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천도하기 위해 지은 성이라고 한다. 결국 그는 천도를 채 끝내지 못하고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폐위되어 아그라성에 유폐되고 말아 결국 아우랑제브가 이 성의 주인이 된 셈인데 그가 무글제국의 마지막 왕이니 그 영화가 오래 가지는 못했던 듯싶다. 게다가 인도가 영국을 대상으로 항쟁을 계속할 때 영국군의 공격으로 페허가 되다시피 했다니 지금으로서야 온갖 보삭으로 치장되었던 그 당시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대리석 건물의 흔적만으로도 그때의 화려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더위를 피해 느즈막히 출발했건만 햇살은 여전히 따가워 한시간 여 만에 레드포트를 빠져 나와 인도 최대 규모의 모스크라는 자마 머스짓으로 걸어간다. 모스크는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배경삼아 장대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막상 도착하니 이미 입장 시간이 지나 있어 모스크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단다. 좀 아쉽긴 하지만 인도만 지나면 보이는 건축물들이 죄다 모스크일텐데.. 위안하면서 숙소로 돌아온다.


레드포트


자마 마스짓, 역광이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는..


이렇게 며칠을 빈둥거리다 날짜가 되어 비자를 찾으러 다시 대사관으로 간다. 비자피만 은행에 내면 그 날로 발급해 줄줄 알았더니 비자피 영수증을 챙긴 대사관 직원은 다시 월요일에 다시 오란다. 금요일에 비자를 받을 줄 알고 토요일 밤차를 끊어 놓았다며 예매한 기차표까지 보여줘도 원래 2주 걸리는 걸 특별히 월요일에 해 주는 거라며 대사관 직원도 막무가내다. 별 수 없이 돌아와 수수료까지 물고 예매한 기차표를 환불한다. 원래 기차표는 암리차르행으로 델리 거쳐 바로 파키스탄으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월드컵 축구를 무척 보고 싶어하는 친구의 일정에 왕창 차질이 생긴다. 결국 월드컵 축구 한국전을 보기 위해-물론 같이 다녔던 신혼부부의 꼬임에 넘어간 탓도 있지만- 암리차르행을 포기하고 다람살라행 버스를 끊는다. 다행히 월요일에는 비자가 나와준다. 그날 저녁 결국 국경도시인 암리차르가 아닌 티벳 망명정부가 있다는 다람살라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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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2> 조금씩 무심해진다

 

바라나시의 평균 온도는 대략 40도를 오르내리는 듯 도무지 낮에는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담날 아침부터 생각나는 단어는 무거움이나 아득함이 아니라 그저 덥다이다. 그랬던 것 같다. 그저 담담해지려고 나가 본 강가도, 익숙해지려고 나간 골목길도 도무지 다니기 힘든 온도가 계속된다. 더워더워 하다가 그저 숙소로 돌아온다. 물론 숙소도 시원하진 않지만 그나마 볕이라도 안드니 그래도 바깥보다는 조금 낫다. 이곳 숙소에는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어서인지 꼭 이곳에 묵지 않더라도 다양한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지금은 인도 여행의 비수기인 5월임에도 불구하고 꽤 다양한 연령층의 한국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인도에서 3년 동안 살았다는 남자와 첫 여행에서 그 남자를 가이드로 만나 사랑에 빠져 두 번째 인도로 온 여자, 인도로 신혼여행을 온 새내기 부부, 도로공사에서 회사 연수차 왔다는 직원 일행, 그리고 시따르, 따블라, 반수리 등의 인도 전통 악기를 배우는 바라나시 죽순이 언니들이 끼니때마다 바꿔가며 얼굴을 보인다. 이곳 인도는 장기 여행자 아니면 수차례 다녀간 여행자들이 많아서 인지 적당히 수다를 떨고 적당히 정보도 나누다 또 적당하게 일어서는 미덕이 몸에 배인 듯 그저 편안한 분위기다.


아침에만 여는 4루피(100원)짜리 탈리집


꽃불(디아)을 파는 부자


가끔은 더위를 피해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보트를 탄다. 강가에 다가면 거의 예외 없이 구걸하는 아이들이나 물건을 팔려는 사람, 마사지를 권하는 사람 아님 그냥 저팬? 코리아?를 묻는 사람들로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는데 그 중 가장 말을 많이 건네는 사람은 보트를 타라고 권하는 사람들이다. 마담, 보트, 베리 췹 프라이스, 보트 호객꾼들은 지치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성별에 따라 마담이나 써 혹은 마이프렌드로 호칭만 바꿔가며 보트 탈 것을 권한다. 바가지로 악명이 높은 이곳에서도 그들이 부르는 가격은 그리 높지 않다. 대체로 4인 정도가 1시간가량 타면 50에서 60루피 정도를 주는데 뭐 우리 돈으로 1500원이 넘지 않는 가격이다. 아침에 해가 막 떠오르는 때나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즈음 아무 생각없이 보트에 앉아 강변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 그저 시간이 흐른다. 결국 한시간 가량 보트를 타다보면 어김없이 화장 가트를 지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시신이 운구 되어 오거나 뽀얀 연기로 피어오르는 모습도 무심히 보게 된다.     


가트에서 목욕하는 사람들


여자들은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간다


그러다 하루는 혼자 걸어서 화장 가트쪽으로 가본다. 아직 한낮이라 강변에는 호객꾼 몇을 제외하곤 순례객도 그리 많지 않다. 화장가트인 마니까르니까 근처에 가니 사람 타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온다. 차마 가트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화장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피어오르는 연기로 봐서 서너 구의 시신이 화장되고 있는 것 같다. 화장하는 사이사이로 오가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근처를 서성이는 사람들로 화장터는 그저 다른 가트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돌아설까 좀더 가까이 가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온다.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 화장을 하는 것은 가족만 볼 수 있다, 여기에 있지 마라, 하지만 나는 화장터가 잘 보이는 곳을 알고 있다. 나를 따라 와라, 인터넷에서 이미 읽은 전형적인 사기 수법이다. 따라가면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모여 있고 그들에게 박시시(기부)를 하라며 거의 협박조로 돈을 뺏는다고 하는데 그 돈이 결국 그 노인에게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에고.. 역시 예외는 없는 듯.. 귀찮아.. 하면서 사진은 안 찍었다. 화장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보고 싶은 맘이 없다. 하면서 돌아선다. 굳이 누군가 화장되는 모습을 꼭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굳이 실랑이까지 하면서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결국 화장가트 입구에서 그냥 돌아선다.


오후가 되면 갠지스강가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수영교실이 열린다


수영을 배우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는 엄마들


이렇게 한차례 실랑이라도 하고 나면 저녁 무렵에는 맥주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데 정작 인도에서는 허가를 받은 식당이 아니면 술을 팔지 않는다. 물론 여행자 식당 같은 데에서는 몰래 술을 팔기도 하지만 모든 몰래가 그렇듯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인도에서 술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주류 판매점까지 릭샤를 타고 가서 직접 사오는 방법이 제일 저렴한데 이 또한 더위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맥주를 사와도 얼음이나 냉장고가 없으니 곧 식어버려 차가운 맥주를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방에 꽁꽁 싸온 맥주를 다시 수건으로 말아 마셔도 도무지 시원하지를 않으니 이번엔 인도위스키를 사다가 찬 콜라나 소다와 섞어 마셔 본다. 그래도 갈증은 쉬 가시지 않는다. 결국 하루는 릭샤를 타고 나가 주류 판매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맥주 한 병을 마시고 돌아온다. 오가는 인도 사람들을 죄다 쳐다보고 골목에는 파리가 들끓는데 시원한 맥주 한 병 마셔 보겠다고 한 짓이라니.. 그래도 뭐 시원하기는 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누군가의 주도로 인도 전통 음악 공연을 보러간다. 그저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한명이 따블라를, 다른 한 명이 시따르를 연주하고 나머지 하나가 인도의 전통춤인 까딱댄스를 잠시 보여주는 공연인데 인원이 일정 정도 되면 의뢰를 해서 만들어지는 공연이다. 한국사람 열대여섯 명이 우르르 공연을 보러간다. 밤에도 덥긴 마찬가지여서 옥상으로 바람이 통함에도 불구하고 땀이 비오듯 흐른다. 싯따르의 연주에 이어 따블라가 이어지고 그 다음은 댄스가 이어진다. 인도의 까닥댄스는 남자가 여장을 하고 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인데 여성스러운 손동작에 비해 현란하면서도 힘이 많아 들어가는 발동작을 보니 남자 무용수들에게 전수되는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하다. 한시간반 가량 되는 공연을 보고 다시 밤길을 걸어 우루루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다. 같이 다니니 밤에는 나갈 엄두가 나지 않던 가트도 그리 무섭지 않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간다.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열린 작은 콘서트


그러다 어느 날 델리로 떠난다. 바라나시와 델리 사이에는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가 있건만 이 더위에서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처음에는 델리에서 그래도 시원하다는 북부를 돌아볼까 하는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지만 흔히 가는 코스인 다람살라-마날리-레-스리나가르 코스가 대략 티벳이나 안나푸르나와 비슷하다는 소문에 것도 그냥 건너뛰기로 한다. 그래도 스리나가르는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이곳은 여전히 파키스탄과 분쟁 중인데다 얼마 전 반군이 공공연히 외국인에 대한 살해를 공언한 곳이라니 아무리 가고 싶어도 참아 주어야 할 것 같다. 결국 바라나시 찍고, 델리 찍고, 암리차르 찍고 파키스탄을 넘어가는 일정이 될 것 같은데 인도가 아무리 아쉬워도 이 날씨에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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