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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중항쟁 39주년에 즈음한 민가협 목요집회

5.18 광주민중항쟁 39주년에 즈음한 민가협 목요집회
이종문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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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6  23:3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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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민중항쟁 39주년을 맞이해서 민가협 1222회차 목요집회가 5.18광주 영령을 기리는 추모로 시작했다. 첫 여는 발언을 시작하는 권오헌 명예회장.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민가협 1222회차 목요집회가 16일 오후 2시 탑골공원 앞에서 열렸다. 이날 목요집회는 광주민중항쟁 39주년을 맞이해서 5.18광주 영령을 기리는 추모로 시작했다.

사회를 맡은 민중공동행동 이종문 사무처장은 39주년 맞는 518광주민중항쟁의 민주주의 정신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소중한 자산이라고 하면서 광주민중항쟁 정신을 계승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더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켜나갈 것을 결의하면서 민가협 목요집회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날 첫 여는 발언으로는 양심수 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나섰다.

권 명예회장은 여는 발언을 통하여 광주민중항쟁 39주년을 맞이하여 전두환 군부독재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역사적 기억과 다시는 그러한 역사적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한다고 다짐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최근 전 주한미군 방첩대원으로 활동했던 김용장 씨의 증언으로 전두환의 광주시민들에 대한 학살만행이 만천하에 들어난 것과 관련하여 철저한 처벌을 요구하였으며, 특별법 제정에 방해하고 국회를 공전시키고 있는 자유한국당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5.18당시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었던 권 명예회장은 당시 MBC기자로부터 엄청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현재 제대로 된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면서 5.18민중항쟁 39주년을 맞이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결부하여서도 수많은 사건들이 조작되고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었으며 그중에는 양심적인 경찰공무원들도 전두환 신군부에게 고문당하고 희생당하기도 하였다고 전했다.

또한 권 명예회장은 5.18은 미국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하면서 계엄군을 이동시키고, 미 함대를 출동시켜 한국군의 발포를 묵인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다.

나아가 우리 현대사 비극에서 미국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남북분단에서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지금의 적대적 대결에서 강도 같은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도 끊임없이 핵위협을 가하면서 북이 핵을 갖게 된 것도 미국의 핵위협과 적대정책의 산물임을 분명히 하고 북핵문제의 해법은 한반도 비핵화의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해결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 범민련 남측본부 노수희 부의장은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미 대사관이 바로 총독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이어서 범민련 남측본부 노수희 부의장의 발언으로 이어졌다.

노수희 부의장은 국가보안법은 일제 강점기의 태동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법이라고 하면서 양심적인 애국자들을 탄압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미국 CIA에 보고하는 체계를 갖춘 잘못된 법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미 대사관이 바로 총독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계속되는 민족공동선언 이행을 가로막고 훼방질하는 미국의 행태에 대해 비난하면서 우리 국민들이 현실을 냉철히 봐야한다고 강조하면서 사대주의적 관점이 아닌 우리 민족 주체적 관점에 서서 현실을 똑바로 보자고 호소했다.

   
▲ 박교일 평화협정운동본부 대표는 39년전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단죄하는 투쟁에 함께 나서자고 호소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이날 마지막으로 발언에 나선 평화협정운동본부 박교일 대표는 오늘 저녁 전두환 집 앞에서 집회 신고를 내고 촛불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서 39년전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단죄하는 투쟁에 함께 나서자고 호소했다.

마지막으로 사회자의 선창으로 참가자 전원이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의 구호를 외치면 1222회차 민가협 목요집회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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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식량지원을 새로운 돌파구로 만들려면…

[창비 주간 논평] 문재인 정부, '쌀의 정치화'와 결별하라
 
북미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한미 간에 어렵게 합의를 이룬 대북 식량지원이 과연 비핵화협상 교착 타개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논란이 분분하다. '단거리 미사일 도발에 보상이나 하듯이 쌀 지원하는 것은 안 된다'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고, 심지어는 북한이 쌀 지원을 받을 것이냐를 두고도 전망이 갈린다. 북한의 대남매체 <메아리>가 "몇건의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놓고 마치 북남관계의 큰 전진이나 이룩될 것처럼 호들갑을 피우는 것은 민심에 대한 기만이며 동족에 대한 예의와 도리도 없는 행위"(5월 12일)라고 주장한 것이 이런 논란에 더욱 불을 지피고 있다. 

예외없는 '쌀의 정치화' 

대북 식량지원, 특히 쌀 지원 문제는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과 성격이 다르다. 대북 쌀 지원은 정부 당국이 주체이고 규모 역시 일반 민간단체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다. 김영삼정부부터 시작된 정부 직접지원 방식의 대북 쌀 지원은 물량으로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총 265만 5000톤, 금액으로는 1조 1015억 원 정도가 지원되었다.

상당 규모의 예산 편성이 필요하기에 그동안 정부 차원의 쌀 지원은 인도주의 일반원칙보다 핵문제와 국내정치 상황 등 정치적 조건에 민감하게 연동돼왔고, 그런 배경 때문에 대북지원단체 등 시민사회에서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접근은 '쌀의 정치화'를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 폭주와 군사적 긴장 증대, 국제 대북제재 확대가 가중되는 상황에서 쌀의 정치화를 벗어나는 새로운 접근은 사실상 봉쇄되어왔고, 이는 '촛불 정부'인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쌀 지원 카드를 꺼내든 것도 과정이 어떠했건 예외없는 '쌀의 정치화'라 할 수 있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밀어놓고 '인도주의'니 하며 공허한 말치레와 생색내기"를 한다거나, "남조선 당국이 북남선언들을 철저히 이행하려는 입장과 자세부터 바로 가지지 않는다면 북남관계의 전진이나 평화번영의 그 어떤 결실도 기대할 수 없다"는 최근 북한의 거듭된 발언은 비핵화협상 및 남북관계 진전과 쌀 지원을 연계하고 있는 문재인정부에 대한 섭섭함과 원망의 직설적 표현이다. 조건부 식량지원에 대한 북한의 부정적 의사 표명이 분명한 이상,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실제로 북한이 쌀 지원을 수용할지조차 불투명하다.

여전히 유용한 식량지원 카드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대북 식량지원을 설득해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과거와 달리 북한의 핵능력이 게임체인저 수준에 달해 있고 엄밀한 국제 대북제재 시스템이 작동하는 조건하에서 식량지원 카드의 확보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장은 북한이 쌀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대의 인도적 협력사업인 쌀 지원을 확보함으로써 남북 관계 발전의 중요한 레버리지 하나를 확보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이후 적절한 시점에 북한에 '쌀을 지원'하고 대신 광산물과 같은 물자로 돌려받는 물물교환(구상무역) 방식의 단발성 식량지원을 추진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일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면 현 교착국면을 비껴가거나 혹은 단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은 과거에도 사례가 있고, 또 퍼주기 논란이나 제재위반 논란도 피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2007년 남북은 8000만 달러 경공업 원자재 지원과 매년 3% 물자 상환에 합의해 남북관계가 단절되기 전인 2008년에 240만 달러 상당의 북한 단천산 아연괴를 상환받은 일이 있다). 물물교환 형태의 인도적 지원 방식은 국제 대북제재 시스템의 작동과 대북 정책을 둘러싼 국내 정치 갈등 등을 고려할 때 지금도 여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 

공공성을 앞세운 적극적 대응으로 전환해야 

현재 북한의 태도로 보아 대북 식량지원을 비핵화 교착상황 타개와 직접 연동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조건에서 정부는 비핵화 협상이나 남북 관계 진전과 관련해서 더 새롭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 첫 수순은 '쌀의 정치화'와 결별하는 것, 즉 식량지원과 인도적 협력을 비핵화 협상과 분리하는 것이다. 식량지원 문제를 로우키(low-key)로 바꾸고 주체, 방식 등도 기존과 달라질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인도적 대북협력 사안에 관해서는 대북제재를 의식한 소극 대응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와 공공성을 앞세운 적극 대응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정부 중심 교류 협력 기조를 민간 중심으로 과감히 전환하고, 여러 민간단체와 지자체들이 계획하고 있는 보건의료 및 공공인프라 관련 인도적 협력 사업들을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민간의 대북 협력 사업 추진에 필요한 대북제재 면제 지원에도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대북 식량지원을 '쌀의 정치화'에서 해방하는 것은 비핵화 동력의 촉진과 시야(視野)의 전환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한반도 대전환이 시작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전후 상황을 되돌아보면 더욱 명료해진다. 핵 문제에 대해 그토록 완고하던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고, 이후 일련의 전환적 움직임에 나선 첫 단추는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 정부 승인 없이 한반도에서 전쟁 불가'라는 전쟁 반대 선언과 '평창올림픽 기간 중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단'이라는 군사 긴장 완화 조치였다. 매우 비판적 언사를 구사하며 문재인 정부 초기 상황을 관찰하던 북한은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평창올림픽 참가 및 특사단 파견'을 결정했다.

'한국적 해법'의 가능성 

'2018년의 추억'은 현재의 비핵화 협상 교착 타개를 위해서는 식량지원을 넘어 안보 우려 해소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새로운 접근법이 비현실적이라거나 '빅딜'만 고집하는 미국이 거부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은 일종의 편견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주장하는 빅딜론 역시 한번에 모든 걸 끝내자는 주장이 아니고 단계적 실행 과정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실행'(comprehensive agreement and phased implementation)의 기본 방침과 일치한다. 또 빅딜과 대북 강경론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국에서도 안보 우려 우선 해소를 강조하는 새로운 대안들이 나오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미국 외교협회 회장 리처드 하스(Richard Haass)의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가 즉시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는 단계적 접근을 제안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북한이 핵실험,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생산 동결 및 핵시설 신고, 국제기관의 검증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전쟁 종식, 워싱턴-평양 연락사무소 개설 등 북한의 안보 우려를 우선 해소하고, 그다음에 북한의 핵무기와 시설 해체에 비례하는 경제제재 완화를 통해 완전 핵 폐기와 경제제재 완전 해제 및 북미관계 정상화를 도모하자는 주장이다.(☞관련 기사 : 3월 15일 자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Picking Up the Pieces After Hanoi')

하스의 주장은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그의 부정적 전망으로 인해 사실상 비핵화협상 초기 단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또 그 초기 단계 실행 과제도 북한 입장에서는 등가교환이 아니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하스와 같이 안보 우려 우선 해소를 중시하는 접근법을 골격으로, 완전 비핵화 실행 단계를 좀더 구체화하는 압축적이고 포괄적인 2단계 비핵화 추진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거기에 국제 대북제재와 무관한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 등을 적절하게 결합하여 상호 이행 조치의 등가성을 높인다면 더욱 실현 가능한 한국적 해법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은 국제 제재의 결과는 아니지만, 내용적으로는 벌크캐시(대량 현금) 유출 금지와 기계·전자·운송수단 반출 금지, 그리고 합작 사업 금지 등의 여러 유엔 대북제재와 연동되어 있으며, 개성공단 문제는 북한의 주요 외화가득원인 노동력 고용제한 문제도 걸려 있다. 특히 개성공단 재개는 대북 합작 및 북한 노동력 고용 등을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 대북제재 시스템 협조 문제와 바로 연동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북한이 최근 개성공단 재개를 부쩍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국제 대북제재 시스템의 약화를 위한 북한식 포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금강산 관광을 우선 순위로 점차 개성공단 재개까지 포괄하는 신중한 프로세스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대북제재의 결과물도 아니고 미국 등이 북한에 새로 자원을 투입하는 것도 아닌, 또 북핵 논란 속에서도 국제사회의 동의하에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대표적 남북 경협 사업이 제재 대상에서 예외임을 설득해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안보 우려 우선 해소와 남북 경협의 특수성을 적극 활용하는 한국적 해법은 미국을 설득하고 북한을 움직이게 할 만한 충분한 동력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난 적정 방식의 대북 쌀 지원과 인도적 협력 확대는 한국적 해법의 성공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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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차리고 보라!! 미친녀석들, 조선일보 망할년놈들 짓거리..!

 

조선일보, 5·16쿠데타는 ‘기적의 리더십’

[아침신문 솎아보기] 양상훈 주필 “5·16, 오늘의 한국 출발한 날”… 악화한 경제 지표 “정부, 현실 직시해야”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9년 05월 16일 목요일
 

“5·16 군사혁명, 엄연한 역사”

5월16일 아침신문 중 ‘5·16’을 다룬 곳은 조선일보가 유일했다.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은 이날 “58년 전 오늘이 없었어도 지금의 우리가 있을까”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군사 혁명’이라고 치켜세웠다.

칼럼 부제는 “5·16은 이승만 건국과 함께 오늘의 한국 출발한 날”, “기적의 리더십 없었다면 지금 잘돼도 태국 정도일 것”, “역사를 있는 대로 인정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등이었다. 요즘 말로 5·16에 ‘엄지 척’이다.

그는 “오늘로 5·16 군사혁명 58년이다. 이날은 이승만의 건국과 함께 오늘의 한국이 시작된 출발점이다. 박정희 매도가 유행이지만 엄연한 역사를 바꾸지는 못한다. 세계 최빈국이던 우리가 미국 대통령이 ‘가장 부자인 나라’로 지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16일자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 칼럼.
▲ 16일자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 칼럼.
 

양 주필은 “기적의 리더십이 흙집 국가였던 1875년부터 일제강점기이던 1936년까지 연이어 태동했다. 이승만 1875년, 구인회 1907년, 이병철 1910년, 정주영 1915년, 박정희 1917년, 최종현 1929년, 김우중이 1936년에 태어났다.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들이 50~60년 동안에 한꺼번에 태어나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며 재벌 1세와 이승만·박정희 등장을 강조했다.

 

양 주필은 또 “이승만의 자유민주 건국과 농지개혁, 국민교육 제도 확립, 한미 동맹 쟁취의 바탕 위에서 박정희가 외자 도입, 수출 입국, 전자·중화학 육성, 농촌 혁명 전략을 밀어붙였다. 수천년 농업 노예(노비) 국가를 근대 공업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기치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한국 광부들에게 “나라가 못살아 이국 땅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것을 보니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라며 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을 전한 뒤 “광부들도 다 울었다. 그 현장 목격자 중엔 이 통곡 현장이 한국 기적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여럿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문 대통령이 지난 4월 “일부에서 우리 역사를 그대로 보지 않고 대한민국의 성취를 폄훼하는 것은 자부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발언한 내용을 인용하고는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다. 그 실천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치졸한 박정희 욕보이기, 지우기부터 그만뒀으면 한다”고 끝맺었다.  

칼럼은 ‘다시는 박정희를 무시하지 마라’로 요약되는 글로 ‘경제 성장’이라는 박정희의 업적만을 강조했다. 양 주필은 박정희에 대한 칭송과 비장함으로 지면을 채웠다.

박정희에 대한 다른 평가는 서울신문에서 볼 수 있다.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실장이다. 그는 “박정희 시대 독재는 ‘긴급조치’로 대변된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 제53조항으로, 대통령이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일시 정지하는 것”이라며 “대통령에게 반하는 정치적 소신을 밝힌다는 이유로 대학생과 지식인들을 탄압했다”고 ‘박정희 시대’를 설명했다.  

문 실장은 “더 나아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날조된 반국가단체 조직 활동으로 엮어 재판하고 사형하는 등 ‘사법 살인’이 횡행했다”며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막걸리에 취한 김에 대통령 욕을 했다고 붙잡혀 가던 엄혹한 시절이다. ‘없으면 나라님 욕도 한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였다”고 밝혔다. 독재와 국가 폭력 없이 박정희를 평가하는 건 반쪽에 불과하다. 

‘4월 고용’ 낙제점에 언론 비판 

통계청이 15일 ‘4월 고용동향’을 발표했다. 실업률 4.4%를 기록했다. 2000년 통계 집계 이후 최고치다. 조선일보는 16일 1면 머리기사 제목을 “실업民國”으로 뽑았다. 조선일보는 “국민 세금으로 만든 노인 일자리 덕분에 두 달 연속 25만명을 넘던 취업자 증가 폭이 지난달 17만여명에 그쳤다”고 했다. 언론들 제목을 모아봤다.

“지난달 취업자 17만1000명 늘어… 40대 고용 부진에 개선세 주춤”(경향신문 22면)
“취업자 증가폭 10만명대로 ‘털썩’… 실업자도 19년 만에 최고”(국민일보 19면)
“4월 청년 실업률 11.5%…20년 만에 최악”(동아일보 1면) 
“경제허리 3040 취업자 27만명 줄고, 초단시간 근로자 사상 최다”(동아일보 2면)
“단기알바 확 늘리고도… 실업률 19년 來 최악”(매일경제 14면)
“청년 ‘알바’·노인 공공일자리가 떠받친 고용지표”(서울신문 20면)
“4월 취업자 17만명 늘었는데 실업자 124만명 사상 최대”(중앙일보 4면)
“취업자 증가폭 10만명대로 뒷걸음… 실업률 19년 만에 최고”(한겨레 16면)

 

 

▲ 조선일보 16일자 1면.
▲ 조선일보 16일자 1면.
 

정동욱 통계청 고용통계과장은 “청년 실업률 상승은 지방직 공무원 원서접수가 4월에 있었던 탓에 응시자 17만9000명이 ‘취업준비생’에서 ‘실업자’로 잡힌 영향이 컸다”고 했다. 취업준비생들은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인구(비경제활동인구)이지만 시험에 응시하게 되면 구직 활동을 한 실업자로 분류된다.

 

사설도 정부 비판으로 한 목소리다. 한국일보는 “공무원 시험 일정 변경이 실업률을 출렁이게 하는 웃지 못할 현상은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일자리 확대 정책의 부작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정부가 2022년까지 공무원을 17만4000명 채용하겠다고 밝힌 이후 다른 직업을 찾지 않고 공무원시험에만 매달리는 청년들이 크게 늘어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는 “고용의 질도 악화하고 있다. 취업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은 1~17시간 일하는 초단기 일자리”라며 “4월 초단기 일자리 종사자는 178만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25.5%나 늘었다. 1982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많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주휴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주 15시간 미만 취업자, 일명 ‘쪼개기 알바’가 빠르게 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신문은 청와대와 정부 인식의 안이함을 질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최초로 수출 6000억 달러를 돌파했다”고 발언한 것이나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고용의 질 향상”, “고용회복 기미 강화” 등을 강조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청와대와 정부가 긍정적 통계만을 부각한다는 것.  

서울신문은 “병세는 깊어지는 데 반짝 호전에 병이 나을 것이라고 진단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며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정확한 진단이 나올 수 없고, 백약이 무효하다는 걸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강신명 전 경찰청장 구속 

강신명 전 경찰청장이 박근혜 정부 시절 국회의원 선거에 불법 개입한 혐의로 15일 오후 구속됐다.  

신종열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피의자(강신명)가 영장청구서 기재 혐의 관련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증거를 인멸할 염려 등과 같은 구속 사유도 인정된다”며 구속 영장을 발부했다. 법원은 같은 혐의로 청구된 이철성 전 경찰청장 등의 구속 영장은 기각했다.  

앞서 검찰은 지난 10일 2016년 4월 총선 당시 친박근혜계 후보 당선을 위해 정보 경찰을 동원하는 등 선거에 불법 개입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등)로 강 전 청장 등의 구속 영장을 청구했다. 강 전 청장 측은 영장실질심사에서 “청와대가 시키는 대로 정보를 만들었다. 그 정보가 어떻게 쓰일지는 잘 몰랐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 경향신문 16일자 12면.
▲ 경향신문 16일자 12면.
 

전직 경찰총수 구속이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동아일보는 “정보 경찰 조직의 체계와 역할, 규모가 경찰 개혁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며 “정보 경찰이 법령상 허용된 범위를 벗어나 선거를 앞두고 지역별 판세를 분석하고 선거 대책을 수립했던 관행에 제동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이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상황에서 이번 사건은 향후 논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경찰의 ‘맞불 수사’도 주목받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임은정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가 고발한 김수남 전 검찰총장, 김주현 전 대검 차장, 황철규 부산고검장, 조기룡 청주지검 차장검사 등 4명을 직무유기 혐의로 입건했다.

서울신문은 “임 부장검사는 지난달 19일 고발장을 서울경찰청에 제출해 ‘김 전 총장 등이 2016년 당시 부산지검 소속 A검사가 사건 처리 과정에서 민원인이 낸 고소장을 위조한 사실을 적발하고도 별 다른 징계 조치 없이 무마했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세계일보는 “검찰이 전직 경찰 수장을 비롯한 전·현직 경찰 고위 간부를 직접 겨냥하자, 경찰도 전직 검찰총장은 물론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는 현직 고검장을 수사 선상에 올리는 맞불을 놨다. 국민을 생각하는 건전한 정책비판을 팽개치고 오직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상대측 망신주기 수사로 ‘진흙탕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일보는 “김(수남) 전 총장은 박근혜 정부 마지막 검찰 총수이고, 구속된 강 전 청장 역시 박근혜 정부에서 경찰 총수를 지냈다는 점에서 검경이 공히 이전 정부의 상대 수뇌부를 정조준한 모양새”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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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김대중도 포기... 노무현은 끝까지 갔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5/16 09:20
  • 수정일
    2019/05/16 09:2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노무현, 부동산을 알았다 ②] 투기차단 및 주거복지 정책

19.05.16 08:56l최종 업데이트 19.05.16 08:56l
디자인: 고정미(yeandu)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동산 정책을 두고 실패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일반 시민이나 전문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 일부도 그렇게 생각한다. '토지+자유연구소'는 5월 '노무현의 달'을 맞이하여, 4회에 걸쳐 노무현의 부동산 정책을 '제대로' 평가해보고 무엇을 계승·발전해야 하는지 살펴보려 한다. - 기자 주

한국경제는 부동산투기라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다. 부동산투기는 생산을 제약하고 분배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환경까지 파괴한다. 투기가 기승을 부리면 집값·건물값·땅값이 치솟아 신규기업은 시장 진입이 힘든 반면 부동산을 많이 보유한 기존 기업이나 개인은 기술개발과 같은 생산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보유한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돈을 쉽게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부동산투기는 생산을 제약한다.

그뿐 아니라 집값이 치솟으면 집 없는 서민들의 주거비는 늘고 다주택자들은 더 큰 돈을 벌게 된다. 다시 말해 투기 때문에 집 없는 서민들의 소득수준은 더 나빠지고 다주택자들의 소득수준은 더 올라간다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주택자가 벌어들이는 소득의 상당 부분이 집 없는 서민들에게서 이전된 소득이라는 점이다. 어디 그뿐인가. 집값이 폭등하면 덮어놓고 공급확대가 대안이라며 그린벨트를 해제해서 주택을 공급하니 환경까지도 파괴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부동산투기가 노리는 걸 차단해야 한다. 부동산투기는 불로소득을 노리고 일어나는 비생산적 경제활동, 즉 지대추구행위다. 불로소득이 없으면 집을 몇 채씩 사들이지 않는다. 사용하지도 않을 땅을 보유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불로소득은 무엇인가? 그것은 매매차익(매각가액-매입가액)과 임대소득(보유부동산의 임대가치–매입가액의 이자)의 합이다. 생각해보라. 부동산을 가지고 있어도 매매차익도 별로 안 생기고 은행 이자 수준의 임대소득이 발생한다면 사용 목적 이외에 부동산을 소유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그런데 이런 부동산 불로소득을 환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보유세 강화라는 것이다. 보유세로 부동산투기를 완전히 차단할 순 없지만, 보유세 강화 없이 투기를 제거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보유세를 꾸준히 강화하면 임대소득도 줄어들고 부동산 가격이 하향 안정화 되어 매매차익도 줄어든다. 어떤 이는 양도소득세가 불로소득 차단에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고 하지만, 양도소득세는 부동산 소유자로 하여금 보유 부동산의 매각을 꺼리게 만든다. 양도세를 아무리 많이 올려도 그냥 보유하고 있으면 속수무책인 것이다.

최초로 보유세 강화 로드맵 제시한 노무현 정부
 
 2006년 10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직 대통령 초청 간담회 자리에 참석하려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들이 함께 오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2006년 10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직 대통령 초청 간담회 자리에 참석하려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들이 함께 오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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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세 강화가 부동산투기 차단의 핵심수단이라는 것은 일종의 공리와 같기 때문에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제외하고 역대 정부들은 임기 초 보유세 강화를 천명해왔다. 김영삼 정부는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하겠다"라고 할 정도로 보유세 강화에 의욕적이었고, 김대중 정부도 집권 초기에 보유세 강화를 천명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는 얼마 안 가서 바로 포기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노무현은 중간에 굴곡은 있었지만 보유세 강화의 기조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로 보유세 강화 로드맵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른다. 보유세는 한꺼번에 올릴 수 없기에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하므로 목표와 로드맵 제시가 필수다.

노무현 정부의 보유세 강화 로드맵은 2005년 5월 4일에 처음 나왔다. 당시 0.15%였던 보유세 실효세율을 2017년까지 1%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부동산정책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일이다.

노무현 정부는 같은 해 8월 31일 이른바 '8.31대책'에서는 주택에 한해서 2017년까지 실효세율을 0.61%로 강화한다는 정책을 발표하고 연말에 이를 입법화 했다. 고가부동산과 다주택자를 대상으로 한 종합부동산세는 2009년까지 가파르게 증가하도록 했고,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 내는 재산세는 2017년까지 느리게 증가하도록 설계한 것을 법제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보유세 강화 대책이 너무 늦게 나왔다. 보유세 강화처럼 중요한 정책은 지지율이 높은 집권 초기에 잘 준비해서 추진해야 했다. 아마 집권 초기, 그러니까 2003년에 철저히 준비해서 2003년 연말이나, 늦어도 2004년 연말에 입법화했다면 노무현 정부 내내 부동산은 안정되었을 것이고, 2005~2006년 폭등 현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집권 3년이 지난 2005년 연말에 가서야 입법화 했다. 그것도 지지율이 20%로 안팎이었을 때. 이런 이유로 입법화에 성공했지만, 당시에는 재집권이 난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즉 시장 참가자들은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집권하면 강화된 보유세를 후퇴시킬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보유세 강화 입법화의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노무현은 대체 어느 정도 보유세를 강화한 것일까? 실효세율 0.61%로는 감이 오지 않기 때문에 주택가격에 따른 보유세액을 통해서 비교해 보자. 아래 [표1]은 노무현 정부가 입법화시킨 보유세 강화가 2017년에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2017년에 부담할 보유세액과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후퇴시킨 보유세액을 비교한 것이다.

30억 원 주택이 부담해야 할 보유세액 2,500만원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보유세액 비교
▲  [표1]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보유세액 비교
ⓒ 고정미  
  
[표1]에서 보듯이 노무현 정부가 만든 보유세 강화 정책이 2017년까지 지속되었다면 시가 15억 원 주택의 경우엔 799만 원의 보유세를 부담해야 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후퇴시켰기 때문에 실제로는 213만 원만 부담했다. 거의 1/4토막이 난 것이다. 시가 20억 원, 25억 원, 30억 원 주택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부가 만든 정책과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후퇴시킨 정책을 비교하면 3~4배 차이가 난다. 노무현 정부가 만든 보유세 강화 정책이 계속되었다면 시가 30억 원의 주택의 경우 2,124만 원(부가세까지 합치면 2,500만 원이 넘는다)을 부담해야 했는데, 이런 상태에서 투기목적으로 30억 원의 주택을 매입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노무현의 주거복지정책

한편 주거복지에서도 노무현은 우뚝하다. 주거복지는 시장에서 주거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가구에 정부가 제공하는 것인데 보통 여기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하나는 장기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여 저소득층(소득분위 1~4분위)의 주거안정성을 높이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중소득층 이상에게 자가 소유를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의 주거복지는 후자보다 전자, 즉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에 집중했다.
 역대 정부의 저소득층 주거안정성을 위한 장기 공공임대주택공급 실적
▲  [표2] 역대 정부의 저소득층 주거안정성을 위한 장기 공공임대주택공급 실적
ⓒ 고정미  
 
[표2]를 보면 역대 정부 중 노무현 정부는 공공임대주택을 가장 많이 공급했다. 노무현 정부가 공급한 공공임대주택 중 저소득층을 위한 장기공공임대주택 공급비율은 무려 85.9%에 달해 역대 정부 중 최고였다.

이런 주거복지 정책은 비주택거주가구, 즉 쪽방, 고시원, 비닐하우스 등에 거주하는 가구 수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아래 [표3]을 보면 63,312이었던 2000년 비주택거주가구의 수가 2005년에는 57,066가구로 줄어들다가 2010년(126,058가구) → 2015년(393,792가구) → 2017년(429,730가구)로 폭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저소득층에게 얼마나 많은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했느냐가 비주택거주가구 수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지만,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약 노무현 정부처럼 이명박, 박근혜 정부도 주거복지정책을 추진했다면 비주택거주가구는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비주택가구 가구수 비율 추이
▲  [표3] 비주택가구 가구수 비율 추이
ⓒ 고정미  
 
게다가 노무현 정부는 비주택주거 종식을 위한 로드맵까지 제시했다. 2007년 5월 노무현 정부는 고시원·쪽방·비닐하우스 거주자들을 2009년까지 종식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쪽방·비닐하우스 거주가구 주거지원 업무처리지침'으로 제도화한다. 다시 말해 노무현 정부는 주거복지 영역에서도 가시적 목표를 세우고 정책을 수립·추진했다는 것이다.

부동산, 특히 주택정책에서 정부가 추진해야 할 중요한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투기차단대책을 확실하게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다주택자들의 투기가 줄어들고 투기목적으로 보유하는 주택들이 시장에 재등장하여 중소득층 이상의 자가보유율이 높아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주거복지수요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시장을 통해서 주거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성 제고에 주거복지의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는 정책추진 타이밍 등에서 아쉬운 면을 보였지만, 문재인 정부와 차기 정부가 본받아야 할 모범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노무현은부동산을 알았다 2부
ⓒ 토지+자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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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부동산을 알았다]
① 이명박은 노무현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http://omn.kr/1j8ny

덧붙이는 글 | <토지+자유연구소>는 토지공개념이라는 철학 하에 부동산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사회를 정의롭고 효율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이론과 구체적이고 치밀한 정책설계도를 연구하는 민간 연구소로, 이 취지에 동의하는 시민들의 개인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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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한 복지ㆍ노동예산 확대를 요구한다”

“긴급한 복지ㆍ노동예산 확대를 요구한다”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5/16 [00:2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긴급한 복지ㆍ노동예산 확대 등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진 : 참여연대)     © 편집국

 

경기 둔화가 본격화 되고 있는 가운데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긴급한 복지노동예산 확대 등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양대노총 및 경실련참여연대 등 26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은 15일 오전 10시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긴급한 복지노동예산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 단체들은 “OECD 국가들의 평균적인 사회복지지출이 GDP대비 20% 수준인 것에 반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지출은 그에 절반 수준인 11% 정도에 불과하다며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사회복지 예산을 확대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게다가 현재 우리나라는 1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심각한 경기 하강 국면으로확장적인 재정운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상황이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 예산이 충분하게 투입되지 않는다면 경제 부진의 고통은 노동자와 서민에게 떠 맡겨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들은 장애인 복지빈곤주거복지연금보건의료노인돌봄 등의 분야에서의 재정확대 요구안을 마련해 청와대에 전달했다.

 

이들 단체들은 이러한 요구안은 그리고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라며 우리가 요구하는 지금 당장 긴급한 복지노동예산의 총액은 17조 원 정도이며 이는 기획재정부가 목숨처럼 지키려고 하는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실제 정부가 발표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2020년 관리재정수지는 -44.5조원, GDP대비 -2.3% 수준이라며 우리가 증액을 요구하는 17조 원 전액을 모두 적자로 계상한다고 해도 이는 -61.5조원, GDP대비 -3.2% 수준이며 이는 정부가 지키고자 하는 관리재정수지 GDP대비 -3% 수준에 부합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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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지금 당장 긴급한 복지노동예산 확대를 요구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그리고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이 누구나 꿈꾸는 복지국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꿈과는 거리가 멀다심각한 불평등과 저출생고령화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꿈꾸는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회복지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OECD 국가들의 평균적인 사회복지지출이 GDP대비 20% 수준인 것에 반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지출은 그에 절반 수준인 11%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사회복지 예산을 확대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게다가 현재 우리나라는 1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심각한 경기 하강 국면으로확장적인 재정운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상황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정부 예산이 충분하게 투입되지 않는다면 경제 부진의 고통은 노동자와 서민에게 떠 맡겨질 것이다.

 

수입과 지출을 맞추는 것이 가계의 살림살이라면 정부의 살림살이는 기계적으로 수입과 지출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지향해야 할 방향과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운용 되어야 한다그러나 재정 당국인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한 현재의 정부는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는 보수적인 방식으로 재정을 운용하고 있다하지만 지금은 전통적으로 재정 운용에 보수적인 관점을 보이는 IMF나 KDI마저도 적극적 재정정책 추진을 제안하고 있는 상황이다게다가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GDP대비 일반 정부의 부채 규모의 경우 OECD 국가 평균이 111.3%인데 반하여 우리나라는 46.3%에 불과하다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적극적 재정정책이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장애인 복지의 경우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예산은 2013년 기준 GDP대비 0.61%로 OECD 평균 2.11%의 1/3수준에 불과하다장애등급제가 변화되는 올해 7월에 맞추어 장애인 복지지출을 확대하는 것만이 장애인정책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빈곤의 경우중위소득 50% 이하의 비율을 의미하는 상대적 빈곤율에 있어 우리나라는 17.4%로 OECD 국가의 평균인 11.8%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이다이러한 상황은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 기능한다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 하는 것에 기인한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고질적인 문제이나 예산 등을 이유로 이루어지지 못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등이 절실한 상황이다.

 

주거복지의 경우쪽방이나 고시원 등 비주택에 거주하지만 주거급여를 수급하고 있지 않은 가구가 약 37만 가구에 이른다그리고 주거급여는 1인가구 기준 최대 23.3만원에 불과해 최저주거기준에 해당하는 면적의 시장임대료에 절반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다그리고 주거취약계층을 비롯해 전반적인 시민의 주거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장기공공임대주택은 전체 주택 대비 4.1%에 불과하다따라서 주거취약계층에 대한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하고보장성이 매우 취약한 주거급여를 인상하고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금의 경우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은 45.7%로 OECD 평균 13.5%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상황이다이는 노후소득보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노후소득보장 강화를 위해서는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기초연금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건의료의 경우, 2017년 기준 경상의료비에서 정부 의무재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우리나라는 58.2%로 OECD 평균인 73.3%에 한참 못 미치고 있어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노력이 시급한 상황이다그러나 보장성 강화를 위해 필요한 재원조달과 관련해 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지원마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노인돌봄의 경우,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도입되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요양기관 중 국공립시설이 1%에 불과하다대부분의 서비스공급이 민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서비스의 질은 악화되고 돌봄에 종사하는 요양보호사의 노동조건은 심각하게 열악한 상황이다따라서 공공요양시설의 확충이 절실하다.

 

이러한 요구안은 그리고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다우리가 요구하는 지금 당장 긴급한 복지노동예산의 총액은 17조 원 정도이며 이는 기획재정부가 목숨처럼 지키려고 하는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수준이다실제 정부가 발표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2020년 관리재정수지는 -44.5조원, GDP대비 -2.3% 수준이다우리가 증액을 요구하는 17조 원 전액을 모두 적자로 계상한다고 해도 이는 -61.5조원, GDP대비 -3.2% 수준이며 이는 정부가 지키고자 하는 관리재정수지 GDP대비 -3% 수준에 부합한다그리고 이러한 수치가 국제적으로 보아도 매우 양호한 수준이라는 것은 재정 당국이 더 잘 알 것이다.

 

따라서 재정당국인 기획재정부를 비롯하여 정부는 예산안 편성 시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여진정으로 사람이 중심이 될 수 있는 혁신적 포용국가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기 바란다.

 

2019년 5월 15

건강세상네트워크경실련공공운수노조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전국활동지원사지부공공운수노조 보육1,2지부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국민건강보험노동조합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내가만드는복지국가노인장기요양 공공성 강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무상의료운동본부민주노총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빈곤사회연대)보건복지자원연구원보육더하기인권함께하기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서울시어르신돌봄종사자종합지원센터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주거권네트워크참여연대한국노총한국비정규노동센터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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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플라스틱 바다'와 우리 삶은 연결돼 있다

김찬국 2019. 05. 15
조회수 465 추천수 1
 
찰스 무어의 '플라스틱 바다'를 읽고 우리의 미래를 생각한다
 
06017513_P_0.jpg» 지난해 9월 11일 강원도 하점면 창우 포구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새우 등 수산물에서 40여 년 전에 버린 과자봉지가 최근 버려진 플라스틱이나 비닐 봉지와 함께 섞여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 권의 책을 읽어가면서 하나의 주제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얻게 된다면, 그 책을 읽는 과정이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찰스 무어 선장(Captain Charles Moore)의 책 '플라스틱 바다: 지구의 바다를 점령한 인간의 창조물'1)이 그렇다. 한 권을 읽어나가면서 그가 태평양에 위치한 거대한 ‘쓰레기 해역’을 우연히 발견한 이후, 플라스틱 쓰레기가 어디서 와서 어떻게 태평양 한가운데 모이게 되었는지 찾아가는 과정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p1-1.jpg» '플라스틱 바다'의 영문판(왼쪽)과 한글판(오른쪽) 표지.
 
태평양에 거대한 쓰레기 해역이 있다!
 
찰스 무어는 태평양의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사이에 ‘태평양 거대 쓰레기 해역(the Great Pacific Garbage Patch)’이 있다는 것을 1997년에 처음 발견한 환경운동가이자 선장이다. 일부 신문이나 어린이용 도서는 ‘플라스틱 대륙’이나 '플라스틱 섬'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넓은 해역은 새로운 대륙이나 거대한 섬이 아니라 플라스틱을 비롯한 각종 쓰레기가 모여 ‘묽은 플라스틱 수프’와 같은 형태를 띤다(관련 기사태평양 한가운데 거대한 ‘플라스틱 수프’ 있다).
 
이렇게 해양 쓰레기가 밀집된 곳은 북태평양의 하와이와 미국 캘리포니아 사이, 일본과 하와이 사이에 위치한 넓은 고기압대 환류(gyre) 해역이다. 태평양 바다에 이런 해역이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관심이 많지 않은 이들이라면 해양 쓰레기 문제에 관해 최근 본격적으로 듣게 된 계기는 아마 2018년 언론 등을 통해 많이 다루어진 미세 플라스틱 이슈를 통해서일 것이다.
 
북태평양에 해양 쓰레기가 모여 있다고 하였을 때, (물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이는 먼 곳의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 우리가 먹는 굴이나 생선 등의 해산물은 물론이고 소금(해염)에도 미세 플라스틱이 포함되었다고 알려졌을 때, 우리 사회의 관심 수준은 상당히 달라졌다(▶관련 기사홍합·굴 통해 매년 미세 플라스틱 1만1천개 먹는다).
 
이 책은 태평양에 플라스틱이 많아져서 생기게 될 환경과 우리 건강상의 위협뿐만 아니라, 이 플라스틱이 어디서 생겨나서 그곳까지 이동하게 되었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씩 조명하여 보여준다.  
 
‘고체 석유’와 앨버트로스
 
이 책의 표지에서는 21세기판 '침묵의 봄'이라고 홍보한다. '침묵의 봄' 만큼 이 시대에 영향력을 끼치는 책이 될지는 아직 짐작하기 어렵지만, ‘플라스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 세대에게 플라스틱에 대해 성찰하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주기에는 충분할 듯하다.
  
04724684_P_0.jpg» 내전으로 쓰레기 관리 체계가 무너지자 세르비아의 한 강이 '플라스틱 강'으로 바뀌었다. 이런 쓰레기는 결국 바다로 모인다. 에이피=연합
 
현재 인류가 2년 동안 생산하는 플라스틱의 양은 지구 상 모든 남녀의 몸무게를 합친 것에 맞먹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생산되어 소비되는 플라스틱은 육지보다 바다에서 더 오래 지속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 편리한 물질이 바다에 도달한 이후에도 쉽게 분해되지 않은 채로 쌓여 해양 환경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스틱은 석유를 기반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고체 상태의 석유’라고 볼 수 있다. 2007년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발생한 삼성중공업-허베이스피릿호 기름유출사고는 액체 상태의 석유가 바다와 바다를 근간으로 살아가는 우리네 사람들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면, 현재 우리가 직면한 해양 플라스틱의 문제는 ‘고체 상태의 석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요구한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몸에 걸치고 헤엄치는 바다거북이나 뱃속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플라스틱을 품고 죽은 고래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게다가 우리가 먹는 해산물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걱정은 더 늘어난다. 
 
최근 성곡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작가 크리스 조던(Chris Jordan)의 사진과 영화 '알바트로스(Albatross)'가 다룬 것처럼 해양 플라스틱을 먹고 피해를 입는 대표적인 생물로 태평양 미드웨이 섬에 서식하는 레이산앨버트로스를 들 수 있다. 세계 레이산앨버트로스의 70%가 둥지를 트는 미드웨이 섬에서는 매년 약 10만 마리의 새끼가 죽는데, 이 중 40%인 약 4만 마리는 부모 새가 물어주는 플라스틱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앨버트로스의 부리로 낚아 올리기에 좋은 크기의 반짝이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에 많이 떠 있기 때문이다. 앨버트로스 새끼는 생후 5개월이 지났을 때 뱃속에 소화되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토해내는데, 부모 새가 주는 ‘플라스틱 먹이’를 먹고 자란 앨버트로스 새끼는 첫 역류까지 살아남아 플라스틱을 함께 토해내야만 한다. 이러한 역류 기능 때문에 성장한 앨버트로스는 플라스틱의 피해를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새끼는 안타깝게도 상당수 죽게 된다. 
 
p3.jpg» 플라스틱 쓰레기로 뱃속이 가득찬 채로 죽은 레이산앨버트로스의 새끼.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해양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이 앨버트로스 새끼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든 내가 먹는 해산물에 대한 우려 때문이든 태평양 상의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플라스틱 일회용품을 조금 적게 쓰고, 상식 있는 시민으로 플라스틱을 분리배출하면 충분할까?
 
이 책의 15장 ‘플라스틱 발자국 지우기’는 플라스틱의 재활용을 염두에 둔 마음 편안한 소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 사회가 플라스틱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하고 석유에 기반한 플라스틱 산업을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플라스틱이 모두 정해진 방식대로 분리 배출되지도 않지만, 분리수거가 잘 이루어져도 재활용이 가능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5만종이 넘는 플라스틱을 어떤 방식으로 구분하여 어떤 플라스틱으로 다시 만들어야 하는지도 남은 과제이다. 
 
오늘날 우리가 주로 듣게 되는 메시지는 “(플라스틱) 쓰레기 버리지 않기”와 “(플라스틱 분리 배출을 통한) 재활용하기”일 것이다. 이는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의 책임을 대부분 소비자 개인에 맡기는 것일 수 있다. 글로벌 경제의 부산물로 넘쳐나는 플라스틱 제품이 해양 플라스틱 문제의 핵심이라는 진단에 대해 우리가 공감한다면, ‘플라스틱 발자국’을 보다 본격적으로 지우기 위한 이 책의 제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GettyImages-897472034-2.jpg» 타이의 세계적 관광지 피피 섬 바다에 떠다니는 플라스틱 쓰레기. 게티이미지뱅크
 
바다에 가득 찬 미세 플라스틱에 대한 최근의 관심 이전에도 일회용 플라스틱은 오래 동안 우리 사회의 고민거리였다. 모두 재활용되는 것도 아니고 바다나 다시 우리 몸에 쌓이게 될 화학물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지금처럼 충분히 소비하면서 플라스틱의 재활용을 조금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더이상 충분하지 않다. 현재 우리가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 사회는 성층권 오존층을 고갈시키는 프레온 가스를 지구상에서 없애려는 시도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하지만 대기 상에 배출된 프레온 가스를 날아다니면서 없애려고 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바다에 이미 배출된 플라스틱 폐기물을 모두 치우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바다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모아 재활용하려는 공상적 또는 혁신적인 장치가 여러 차례 제안되었으나 플라스틱 쓰레기가 엄청나게 넓은 바다에 흩어져있어 그러한 구상이 현실화되지 않았다. 
 
성층권 오존층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이상 프레온 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성층권 오존층은 2080년 즈음에나 1980년대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지금과 같이 매일 바다로 흘러들어가 쌓이는 플라스틱의 흐름을 이제는 멈출 필요가 있다.   
 
해양 플라스틱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끝없이 쓰레기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경제 체제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무 생각 없는 소비가 사라지고, 꼭 필요하면서도 계속 쓸 수 있는 (고장이 나면 고쳐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신중하게 구매하는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 현재 삶에 대한 성찰 없이 즉흥적이거나 과시적인 소비 방식이 유지되는 한 ‘플라스틱’ 바다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03176875_P_0.jpg» 버려진 스티로폼 어구 등 바다쓰레기는 이제 해안의 일상 풍경이 됐다. 연합뉴스
 
이 책은 ‘일회용 플라스틱의 사용 줄이기’나 ‘플라스틱 포장재를 적게 사용하는 물품 구매하기’와 같은 기본적인 실천의 확산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생산하여 소비하게 될 제품들이 다음 특징을 갖추도록 요구하여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 재활용 가능성: 이 제품은 어느 정도 재활용할 수 있는가?
 
- 교체 주기: 이 제품은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는가?
 
- 보수 관리 시간: 이 제품은 보수 관리가 필요하지 않는가? 
 
- 원자재 추출 스트레스: 이 제품은 사용 후에도 100% 원자재가 되는가?  
 
- 무독성: 생물학적 관점에서 독성이 없는 부품을 사용하는가? 

 

그 외에도 지역 먹을거리와 같이 플라스틱 포장재가 적게 필요한 소비 방식으로 살아가거나, 바다에서 분해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하도록 요구하고, 플라스틱 쓰레기의 국제적 이동에 저항하는 방식도 시민으로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참여의 방식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태평양의 플라스틱 쓰레기와 대한민국에서의 삶 
 
이 책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헌정되었다. “플라스틱 오염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길” 요청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할 책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보다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 세대에게 있지 않을까?
 
모든 바다가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북태평양의 거대 쓰레기 해역과 무척이나 먼 거리에 있다. 하와이와 미국 캘리포니아 사이나 일본과 하와이 사이의 환류 해역에 떠있는 플라스틱은 대한민국에서의 삶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나라(한국)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이 적지 않다. 우선 세계적인 석유화학 산업 시설이 플라스틱의 원료를 생산해내고 있다. 인상적인 다른 사례로는 하와이의 카밀로 해변이라는 곳에서 눈에 띄는 세 종류의 쓰레기 중 하나로 “한국에서 정력제로 알려진 장어 어획을 위한 플라스틱 통발”이 소개되고 있다. 하와이의 카밀로 해변에서는 “참치잡이 선박과 주낙 어선이 사용하는 플라스틱 야광봉”과 “일본의 굴 양식장에서 나온 플라스틱 굴 분리기”도 눈에 띈다고 한다.  
 
p4-1.jpg» 우리나라에서 장어 어획을 위해 사용하는 플라스틱 통발. 이 책 '플라스틱 바다'에서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국 대한민국에서의 삶과 태평양의 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찬 해역의 연결고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셈이다. 우리가 먹는 해산물이나 소금에 미세 플라스틱이 포함되어 있을까봐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20년 전부터 바다의 쓰레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결국은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일 것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가졌다면, 20년이 지난 지금 바다 플라스틱 문제의 해결에 보다 가까이 가 있지 않았을까? 
 
김찬국/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1) 이 책의 원제는 'Plastic Ocean: How a Sea Captain’s Chance Discovery Launched a Determined Quest to Save the Ocean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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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진압에 전두환 각하께서 ‘Good idea’

[아침신문 솎아보기] 광주 진압 관련 모든 회의 참석… 경향신문 군 문서 입수해 1,4,5면에 진상규명 보도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9년 05월 15일 수요일
 

전두환 각하께서 ‘Good idea’

광주 5·18 민주화운동 39주기를 앞두고 15일자 아침신문 가운데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이 먼저  진상규명 탐사보도와 기획기사를 각각 내놨다. 

경향신문은 1980년 2군사령부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문서를 입수해 5월23일자 기록에 “각하께서 Good idea”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손글씨가 적힌 사실을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를 1면 머리기사에 이어 4,5면 전면을 털어 보도해 가장 집중력을 보였다. 내용도 단순 기념보도가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1980년 5월 한 달간 행적을 추적해 광주 진압의 책임을 물어가는 탐사보도 형태를 취했다. 

5월23일은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면서 계엄군이 잠시 광주 시내에서 후퇴한 시점이었다. 2군사령부는 이날 ‘충정작전’이란 이름으로 광주 재진입을 건의했다. 이날 회의엔 진종채 2군사령관이 계획을 보고하고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누군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반응과 지시사항을 자필로 옮겨 적었다.

 

▲ 15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
▲ 15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
 

경향신문은 “당초 5월24일 오전 2시에 실시될 예정이었던 이 작전은 군사행동에 반대한 미국의 요청으로 국방부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고 전했다. 해당 문건에는 “5월25일 오전 2시 이후까지 작전 연기”라고 기록돼 있다. 계엄군은 5월27일 새벽, 광주 재진입작전을 실행해 옛 전남도청 등을 무력 진압했다.

 

경향신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최종 진압작전의 기획단계부터 개입해 작전을 승인했음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 15일자 경향신문 5면.
▲ 15일자 경향신문 5면.
 

이어 경향신문은 15일자 5면에도 ‘각하로 불린 전두환, 광주 재진입·도청 진압회의 모두 참석’이란 제목으로 관련 기록 12건을 통해 1980년 5월 전두환의 한 달간 행적을 추적해 “권력 찬탈을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은 이날 4면엔 1980년 5월 한 달간 전두환이 등장한 각종 회의와 행사장 참석 행적 34건을 분석해 1980년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된 뒤 5월4일 시국수습방안 회의 참석 이후 5월31일 국보위 상임위원장 취임까지 모든 장면을 날짜 순으로 기록했다. 경향신문이 기록한 전두환의 1980년 5월 행적은 권력장악을 위한 동분서주라고 할 만하다. 그럼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선 “당시 나는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고 해명했다.

▲ 15일자 경향신문 4면.
▲ 15일자 경향신문 4면.
 

 

한겨레는 사라진 사람들에 주목 

한겨레신문은 ‘5·18 사라진 사람들’이란 기획기사로 1980년 광주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한겨레는 15일자 10면에 기획기사 첫 회분으로 ‘주남마을 버스 총격사건’을 집중 조명했다.  

 

▲ 15일자 한겨레 10면.
▲ 15일자 한겨레 10면.
 

한겨레의 이 기사는 ‘주남마을 버스 총격 최소 3건…22구의 주검이 사라졌다’는 제목을 달고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의 사격명령에 매복한 군인들이 집중 사격해 버스 속 승객 10명이 몰살했다고 전했다. 한겨레는 주남마을 일대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총격사건 5건을 날짜와 피해자, 목격자 등으로 나눠 상세히 소개했다.

 

1980년 광주에서 사라진 사람은 확인된 사람만 70여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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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8419#csidxe1d05ef9e3353c09b605bd4ce7353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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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야기

  •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승인 2019.05.15 09:06
  • 댓글 1
▲ 이덕인 열사 시신[사진 : 필자 제공]

1. 인천의 연수구에 위치한 작은 섬 아암도

아암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설마 섬이었을까 싶을 이곳은 매립 이전에는 송도유원지 후문에서 5백여 미터 떨어진 작은 섬이었다. 개펄 위로 겨우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돌다리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바닷물이 빠진 개펄 위에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바닷물이 빠지면 돌다리로 인해 홍해를 연상케 하는 길이 열렸고, 송도유원지를 찾은 시민들은 마치 피난민의 행렬처럼 줄지어 아암도로 향했다. 그리곤 손바닥만한 섬에 올라앉아 바다의 정취를 만끽했다. 그러나 면적 1천8백32평에 불과한 작은 바위섬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였는지 인천시가 발간한 안내 책자에서조차 섬 취급을 받지 못하고 외면당했던 섬이다. 그리고 왜 똥섬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이 고향인 사람들은 아암도를 "똥섬"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잊혀진 작은 섬, 그 섬에서 유명을 달리한 한 젊은 장애인 노점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덕인(남, 당시 29세)이다.

1995년 11월 28일 몹시도 추운 겨울날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삼삼오오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다들 인천의 "아암도"에 망루를 세우고 농성 중인 노점상들이 걱정되어서인지 그날따라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노점상 단체의 여성부의장 유희 씨의 입담으로 분위기가 다소 활기차졌다.

"정말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지 이 싸움이 끝날 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말이 씨가 되지."
"삐삐 왔네, 확인하고 올께…."
"뭐라고? 누가 죽었다고?"

인천 연수구의 아암도 앞바다에서 한 구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당사자는 덕인이었다. 망루에서 내려간 뒤 행방불명되었던 그는 상반신이 벗겨진 채 온몸에 밧줄이 감겨 아암도 근처 갯벌 위로 떠 오른 것이다. 우리는 인천으로 달려가 곧바로 "장애인 노점상 고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여 사인에 대한 규명에 나서기 시작했다.

2. 눈 맑은 청년 이덕인

최정환 열사 투쟁이 끝나고 장애인과 노점상은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직업을 얻지 못한 이들과 노점상 그리고 장애인이 모여 청계천과 인천 아암도에 새로운 생계 터전을 일구어 나간다. 하지만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단속과 탄압으로 이어진다. 청계천에서만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소속 5명의 장애인과 노점상이 구속되었다.

한편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는 여름부터 인천의 아암도에 노점 좌판을 깔기 시작한다.
바닷물을 만질 수 있고 갯벌에 뛰어다니는 망둥이와 게를 볼 수 있어 인천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아암도는 송도유원지 공유수면 매립공사로 인해 일대를 3개 지구로 나눠 56만4천 평을 메운다. 아암도 바로 앞 갯벌까지 송도 3지구 매립공사가 완료되면서 해안선 백사장에서 돌출한 형태의 작은 언덕이 되었다. 그리고 1994년 7월 개통된 폭 40m의 해안도로가 뚫리면서 아암도 근처에 노점상이 하나둘씩 들어서게 된다.

덕인이와 첫 번째 만남은 1995년 같은 해 3월 장애인으로 강남역에서 장사하다 분신자살한 최정환 열사" 투쟁 후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이를 계기로 몇몇 활동가들이 장애인 운동과 노점상 운동을 병행하게 된다. 청계천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된 후 출소한 김종상씨와 함께 인천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덕인은 나보다 한 살이 어리다. 턱수염을 기르고 말이 없어서 처음에는 나이가 한참 더 먹었거니 생각하였다. 그도 내가 작아서 자기보다 서너 살 어린 줄 알았다고 했다.

"한 살 많으니 내가 형이네" 했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네 마음대로 하십시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또 웃었다. 첫 만남부터 시원시원했다. 강해 보이는 인상 속에 맑은 눈을 가진 이였다. 어디서든 그는 눈에 띄었다. 정열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쉽게 눈에 밟혔는지 모른다. 집회 때는 선봉에 서서 구호를 외치거나 언제나 깃발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목소리가 컸고 웃음이 많았던 그였다. 하지만 그의 일기장에는 가족과 장애인인 자신의 앞날에 대하여 고민이 담겨 있었다. 일기장에 쓰여 있는 한 구절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의 가난과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나의 어린 시절을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버텨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강해져야 한다. 세상이 비록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할지라도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미래의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 지금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까…."

1995년 3월 인천시와 군부대가 용현 갯골수로에서 아암도까지 설치된 군 철책선을 철거하기로 합의 각서를 체결한 뒤, 같은 해 6월 아암도를 중심으로 4백여 미터 구간의 철책선을 철거했다. 그리고 아암도를 하와이 와이키키형 관광위락단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에 따라 일대에 모래를 부어 인공 백사장을 꾸미기도 했다. 그러나 인공 백사장은 사실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얼마 안 가 모래는 바닷물에 휩쓸려 다 없어졌고, 예산만 낭비한 것이 됐다. 더욱이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와 이권 문제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후 이에 관련된 공무원들이 오히려 상을 받았다. 그리고 인천시는 철책선 철거 후 새로 발생한 노점상 문제에 대한 아무런 대책과 대안을 수립하지 않고 공권력과 철거 용역반원들을 투입하여 강제 철거를 무리하게 강행했다. 이 모든 것은 금전적 손실뿐만 아니라 행정력 낭비로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었던 것으로 기획단계부터 과욕이 앞섰다. 인천시의 뜨거운 감자였던 아암도는 노점상에 대한 대대적인 철거뿐만 아니라 여러 문제와 의혹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암도는 행정기관의 단속뿐만 아니라 지역의 조직 폭력배들과 싸움 또한 만만치 않았다. 95년 9월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 인천의 폭력조직인 소위 '꼴망파'라 불리는 폭력배들이 개입하여 장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좌판을 깔기 시작하면 이들과 싸움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당시 총무국장을 맡고 있던 이덕인은 장애인이지만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었기에 이들과 충돌에서도 언제나 앞장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불편한 몸으로 금품을 갈취하려는 건달들과 맞섰다. 한번은 꼴망파 행동대원들이 아암도 장사 현장에 들이닥쳐 노점 좌판과 포장을 걷어치우기 시작했는데, 덕인은 끝까지 이들과 맞붙어서 돌려보냈다. 폭력배들도 끈질긴 저항에 기가 질려 그가 버티고 있으면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인천시와 연수구청에 단속이었다. 그들은 도로를 뚫고 바다를 메꾸었지만, 정작 노점상에게는 자연경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장사를 허가하지 않고 단속을 반복하였다.

그해 10월 나는 인천 새날 청년회 회원과 함께 아암도를 방문하였다. 인천시는 노점상에 대한 행정 대집행을 계획하고 있어서 이에 대응하고자 망루를 만드는 것을 계획하던 중이었다. 망루는 울산의 현대중공업 농성자들이 거대한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하던 골리앗 투쟁이라 불리던 것을 철거민이 개발지역에서 전술로 응용하였는데, 노점상이 용역 깡패의 단속에 맞서 생존권을 방어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는 등 투쟁은 격렬하고 희생이 컸다. 그날은 늦가을 날씨답지 않게 더웠다. 덕인이와 나는 마침 바닷가까지 차오르는 바다를 바라보며 조개를 구워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덕인씨? 망루를 세우기로 하였다는데 잘돼?"
"네, 아직은 판단이 잘 서지 않네!"
"사람들 의견은 어떤데?"
"사실 이곳은 동떨어진 해안가이기에 농성자들이 망루 안에 고립될 수 있지. 그리고 사람들의 왕래도 잦지 않아서 과연 선전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어…."

덕인은 망루를 세우고 단속에 맞서는 것에 대하여 자신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회의를 통하여 조직이 결정한다면 따라야 하지 않겠냐며 술을 한잔 털어 넣었다. 그날 아암도 근처는 때마침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노을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몇 잔의 술기운 때문인지 덕인의 얼굴도 붉게 타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 인천 아암도의 망루와 철거모습[사진 : 필자 제공]

3. 죽음을 부른 인천 아암도

'인천 장애인 자립추진위'는 물리적인 힘으로 저들의 강제 철거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심 끝에 1995년 10월경 약 10m 가까운 (망루)을 건설하기로 결의를 모았다.
언제 공권력이 밀려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겨울을 맞이한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4일 4시 30분경 며칠 사이 떨어진 기온을 이기기 위하여 농성자들이 전날 피워놓은 장작더미가 거의 타들어가 재로 변할 즈음이었다. 시청과 구청에 동태를 살피던 노점상 회원들에게 연락이 왔다. 포크 레인과 전경 버스 30대, 철거 용역 깡패들이 타고 있던 서우관광 버스 4대가 연수구 일대를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애인과 노점상 40여 명은 즉시 총회를 개최하여 망루에 올라가 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노점상 25명은 망루에 올라가 대기하였고, 나머지 20명은 아암도 주차장에서 상황을 보거나 싸움에 대응하였다.

새벽 6시,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경찰병력 8대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90년대 재개발 철거 현장에서 악명을 떨치던 무창용역 소속 철거용역깡패 300명이 푸른색 청카바를 입고 나타났다. 구청 직원 50여 명, 타이탄 트럭 15대, 덤프트럭 5대, 포크레인 3대, 물 대포용 소방차 3대가 아암도에 속속 도착하였다. 다시 한 시간 후 철거 병력 총 1400명이 아암도 현장에 도착하였다.

새벽 7시, 하늘은 이제 막 어둠이 걷히고 인천 앞바다는 서서히 푸르른 빛으로 제 모습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그날따라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 대었다. 바다로 통하는 어통소에서 아암도 방향으로 노점 설치물에 대하여 포크레인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포크레인은 새벽의 정적을 가르며 포장마차와 좌판들을 하나둘씩 찍어 눌렀다. 상인들의 생계수단은 조각조각 뜯겨 아스팔트위에 맥없이 허물어졌다. 주차창 근처 노점상들은 손 쓸 틈도 없이 흩어져 철거되는 포장마차와 좌판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소방차는 망루 위로 물대포를 마구 쏘아대자 한겨울 바닷바람에 힘이 실려 망루 상층을 흔들어 댔다. 눈조차 뜨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저항을 했지만,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과 노점상에게 물대포는 살인적인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물대포 쏘기가 끝나자 포장마차와 좌판을 철거하던 포크레인이 망루 지지대를 찍었다. 높이 10미터가량의 망루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위에 있던 농성자들은 극도의 위협을 느꼈다. 계속 포크레인에 찍힌 지지대를 여러 차례 흔들어대자 조금씩 기울어졌다. 위기감에 처한 망루 위의 농성자들은 인분과 화염병을 망루 아래로 던졌다. 그러나 위협용으로 제작된 인분과 화염병은 곧 바닥이 났다. 농성자들은 죽음의 위협과 싸웠다. 계속된 공권력 앞에 마지막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흩어져 있는 물건과 집기, 심지어는 먹으려고 갖고 있던 무와 감자 등의 식료품을 던지며 필사적인 저항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1시간 남짓 시간이 흐르자 포장마차 2개를 제외한 모든 좌판이 철거가 완료되었다. 오전 8시 30분경 사다리가 달린 소방차가 망루에 도착하였다. 경찰은 방송을 통해 농성자들을 상대로 해산하라며 협박을 하였다. 서로 대치된 상태에서 긴장과 함께 시간이 흘렀다. 위협적인 철거가 진행되고 중단하기를 반복하다가 오후 4시, 잠시 조용해진 듯싶더니 동시에 3단의 원형 철조망을 망루 주변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망루 농성자의 탈출을 막으려 했다.

싸움은 밖에서도 이루어졌다. 근처에서 서성이던 한동열의 형 한동일(남)과 이석근의 형 이회근(남)이가 동생 신변을 확인하려고 1t 트럭을 타고 가다 주차장 차도에서 용역 철거반 20여 명에 의해 발견되었다. 서슬 퍼런 눈빛의 철거반들은 이들마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저 새끼들도 한통속이다."라며 달려들어 집중적으로 구타하였고 아암도에서 끌고 나왔다.
부근엔 경찰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외면하였다. 분노를 참지 못한 가족 50여 명은 오후 3시경 인천 시청을 항의 방문해 울부짖었다. 시청 측에서는 국장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한 후 전경을 동원해 강제로 시청 밖으로 끌어내었다. 이 과정에서 2명은 실신한다. 인천 시청에서 강제로 끌려 나온 50여 명의 가족과 장애인 노점상은 오후 7시경 아암도로 진입을 시도한다. 경찰은 이미 송도 삼거리와 아암도 주변의 약 2km의 거리를 바리케이드로 완전히 막고 모든 차량과 사람의 왕래를 봉쇄하였다. 일부 가족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아암도에 진입하려다 연행된다. 이들은 남편과 자식을 살리려고 경찰과 악에 받친 싸움을 한다. 이 와중에 전투경찰에게 걷어차여 배미옥(여), 박길림(여) 씨가 다치어 인천 시립병원에 실려 가기도 한다. 오후 7시 30분, 이제 인천의 아암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물대포를 맞아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 권순희(여)와 한은미(여)는 탈진 상태에서 치료를 받고자 망루에서 내려오자 경찰은 연행하였다. 권순희(여)의 증언에 따르면 망루 위에는 28명의 농성자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상황으로 총 연행자는 모두 15명으로 늘어나고 면회조차 거부당한다. 쏘아대는 물대포와 돌 세례를 맞아 이미 탈진의 지경에 이른 농성자들에게 공포와 추위 못지않게 허기진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공권력에 의해 일체의 식수와 음식물을 차단 당한 채 뜬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낸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덕인이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다고 기억한다. 대부분 탈진 상태에 빠져 있어도 그는 선봉에 서서

"장애인 생존권을 쟁취하자",
"노점단속 자행하는 김영삼 정권 퇴진하라"
고 구호를 외쳐댔다. 그리고 모여있는 농성자들을 위로하며,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무엇이 됐냐, 우리 가족 먹여 살리려 노점상이 되었단다"
하며 '늙은 노점상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이때 빨간 츄리닝을 입고 선동하던 덕인 이를 경찰은 주동자로 주목하게 된다. 망루 아래의 용역은 "빨간 츄리닝! 내려와, 죽여버린다!"라는 욕설과 협박을 당한다. 11월 25일 오후 1시경 박흥수(남)가 경찰과 협의 하에 망루 위로 올라갔다. 박흥수는 덕인이에게 '빨간 츄리닝이 경찰의 눈에 띄니 옷을 바꿔입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경찰이 방심한 틈을 타 자신이 입고 있던 검정 골덴 바지를 덕인이와 바꿔 입은 후 보급품을 전달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약속을 하였다. 망루 밖에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경찰을 상대로 집회와 인천 남부경찰서에 항의 방문을 하였다. 그리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 및 종교인을 중심으로 안전을 보장토록 촉구를 하였다. 농성자가 먹을 물과 담요 그리고 하루 두 끼의 음식을 올려 줄 것에 대해 요구를 했지만, 경찰은 무시하였다. 남부 경찰서 관계자들은 "죽을 지경이면 내려온다"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오후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노점상과 장애인 등 80여 명이 망루에 있는 농성자들에게 의약품과 물, 빵을 전달하기 위해 망루에서 150m 거리까지 진입하여 전달하려 하였다. 그러나 경찰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제지당하였다. 이어 당뇨병, 폐결핵 환자를 비롯해 부상자에게 전달할 구급약품이라도 전달하고자 노점상 배미옥 씨가 지원하여 재진입을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팔이 뒤로 꺾이는 등 폭행과 폭언을 들으며 구급약 전달은 또 실패하게 된다. 이때 경찰병력은 도로에 전경들이 있었고, 어통소 포장마차 주변에는 백골단과 체포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농성자 중 황재안(남)이는 당뇨 환자라 경찰측에 약품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여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의 소변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음식과 의약품을 구하러 망루를 내려간 덕인이는 사라지고 소식이 없었다.

사태의 심각함이 더해지자 이석근은 바닷가 쪽 아래로 밧줄을 내려놓고 보급품이 전달되기를 기다렸다. 26일 오후 11시 15분경 보급품을 찾으려 윤태열이 망루에서 내려왔지만 역시 곧바로 남부서로 연행되었다. 보급품을 찾으러 간 사람은 경찰에 의해 하나둘씩 연행되거나 지쳐나가는 상황이었다. 당시 망루에 있었던 노점상은 '물대포를 맞아 몹시 춥다. 배고프다.' 며 고통을 큰소리로 호소했지만, 절규의 목소리만 바닷가를 맴돌았다. 농성자들은 살인적인 추위와 물대포 세례 속에서 28일까지 5일 동안 죽음과 같은 상황을 견뎌야 했다. 11월 28일 아침 해안가에 한 구의 시신이 포승줄에 포박되고 상의가 벗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덕인이었다. 다시 공권력은 서둘러 망루를 무력적으로 철거하였다. 농성자들은 덕인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전의를 상실하고 농성을 해제한다. 그들은 곧 전원 인천남부경찰서로 연행된다.

** 이덕인 열사의 투쟁과 몇 가지 의문을 중심으로 한 번 더 이어집니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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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앞 93일째 농성중인 ‘5·18농성단’ 허화평에 공개질의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5/15 10:19
  • 수정일
    2019/05/15 10:1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지만원 구속, 5·18역사왜곡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천막농성
 
임두만 | 2019-05-14 14:50:4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2월 8일 국회에서 열린 지만원 초청 공청회에서 지만원은 물론 당시 자유한국당 이종명 김순례 의원은 5.18 광주항쟁에 대해 심각한 왜곡 발언을 했다.

이에 5.18 사형수인 김종배 전 의원을 비롯한 5.18 생존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이 망언을 계기로 2월 11일부터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약칭 5·18농성단)을 조직, 국회 앞에서 93일 째 농성 중이다.

▲ 5.18 농성단이 장세동 씨 집으로 가고 있다. © 농성단 제공

즉 이들 농성단은 자유한국당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 국회 제명과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 구속, 5·18역사왜곡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농성단은 중간에 행동의 날을 정하고 4월 4일부터는 광주학살의 실질적 책임이 있는 이들의 집을 찾아가 공개질의를 던지는 등 행동으로도 압박하고 있다.

이에 농성단은 ‘행동의 날’ 첫날인 4월 4일 학살주범으로 꼽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집 앞에서 제1차적으로 행동을 보였다. 이어 4월 11일 영등포경찰서에서 제2차, 4월 18일 정호용 전 의원의 과천 집 앞에서 제3차, 4월 25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집 앞에서 제4차 ‘5·18행동의 날’ 행사를 통해 전두환과 지만원 처벌을 촉구하고, 집단발포 명령의 진범을 추적하고 있다.

▲김종배 농성단 대표(전 국회의원)가 정호용 씨 집에 질의서를 전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어 농성단은 또 지난 5.2 목요일 제5차 ‘5·18행동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오후 2시 양재역 9번 출구 앞에서 집결, 인근에 거주하는 허삼수 전 의원(5.18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1980년 5월부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혐의사실을 공개했다.

또 당시 보안사가 전두환 집권을 위해 저지른 5,17신군부 쿠데타에서 희생양으로 삼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고 광주항쟁과 연계, 폭동 혐의 씌우기를 주도한 자가 누구인지, 5월 광주항쟁 당시 일어난 5.21 헬기사격 주도 등에 대해 공개질의를 했다.

이런 가운데 농성단은 오는 16일 1980년 5.18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신군부 쿠데타 핵심이었던 허화평 전 의원의 집을 찾아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공개질의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농성단에 따르면 허 전 의원은 전두환 신군부 핵심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연금하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는 핵심이었으며,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서 시민사살명령이 내려진 5월 21일 전두환과 함께 광주에 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연희동 전두환 씨 집 앞에서 농성을 벌인 ‘5.18 농성단’ ©농성단 제공

이와 관련, 전날인 13일 1980년 당시 주한미군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 씨와 광주 주둔 505보안부대 수사관 출신 허장환 씨는 국회에서의 공개증언을 통해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를 희생양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김용장 씨는 이날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정오께 K57(제1전투비행단) 비행장에 와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대장 등 74명이 회의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었다.

이에 농성단은 당시 전두환 비서실장이었던 허화평 대령 또한 광주에 있지 않았는지, 전두환의 광주시민 사살명령에 개입되지 않았는지, 이 범죄를 자백할 의향은 없는지 공개적으로 질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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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식량지원에 민간·종교단체 나섰다

(추가)민화협·북민협·7대종단, 범국민 캠페인 발표...통일부장관과 간담회도 진행(전문)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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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4  17: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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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철 통일부장관은 14일 오후 남북회담본부에서 민화협, 북민협, 7대 종단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 방침에 이어 종교·민간단체들이 적극적인 추진 의사를 밝히고 이에 통일부장관이 이들 단체 대표자들과 즉시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사업 진행에 속도가 붙는 양상이다.

김연철 통일부장관은 14일 오후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대표의장 김홍걸)와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회장 이기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대표회장 김희중 대주교)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다.

이들 대북지원 민간단체 대표자들은 이날 오전에는 서울 중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북 식량지원을 위한 범국민 캠페인을 전개하여 각계의 지원금과 국민성금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긴급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날 방한중인 데이비드 비슬리(David Beasley) 세계식량기구(WFT) 사무총장과 대북 인도지원 사업 협의를 위해 면담을 가진 김연철 장관은 이날 간담회 모두 발언을 통해 "인도주의 현장에서 경험과 철학을 두루 갖춘 단체들의 의견을 청취하겠다"며, 구체적인 방법론을 포함해서 인도주의 지원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구했다.

김홍걸 민화협 의장은 "북미간 비핵화협상이 난관에 부딪치거나 남북 정부간 교류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민간차원의 교류는 계속 활성화시켜야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고 하면서 "4.27 이후 지금까지 남북교류가 관 주도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번 대북 식량지원 사업에서는 민과 관이 협의, 협력해서 상호보완적 관계가 되도록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태성 KCRP 사무총장은 "대북제재와 계절적 요인으로 인해서 북한내 식량사정이 아주 엄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종교계에서는 지난 부처님오신날에 교단 수장들이 함께 모여서 이 문제를 깊게 논의했다"고 하면서 "각 종단은 대북 인도적 지원을 재개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북민협 회원단체인 평화3000 박창일 운영위원장은 "북민협은 지난 연말, 올초에 밀가루 5천톤을 대북지원했는데, 유엔제재 때문에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하면서 "그전에는 정부가 대북지원에 나설 경우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민간단체를 많이 활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부가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 외에 국내 종단이나 민화협, 북민협을 통해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한다면 오히려 정책부담을 덜고 모니터링도 더 잘할 수 있지 않느냐"며, "중국을 통해서 물자를 보내는 경우 유엔 제재외에도 중국 정부가 가하는 여러 가지 보이지 않는 제약이 있으니 개성육로, 개성철길, 남포-인천, 부산-원산 뱃길 등 통로 다각화를 검토해 달라"는 요청도 덧붙였다.

통일부는 이날 간담회에서 "통일부장관이 북한주민에 대한 동포애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식량지원을 검토해 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 다만 대북 식량지원에는 국민적 공감과 지지가 필요한 만큼 국민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추진할 계획"이라는 점을 설명했다고 밝혔다.

간담회 참석자들은 대북 식량지원의 규모와 시기, 필요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고 조속한 시일내에 대북 식량지원이 필요하다는데 공감을 표시했으며, 민간차원의 대북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물자의 반출 등 절차에 대한 신속한 지원과 민간단체 및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도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김 장관은 이같은 건의에 대해 제도적 지원 방안 등을 적극 검토해 나가겠다고 답변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박창일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북민협에서 4명, 김홍걸 민화협 상임대표의장을 비롯해 5명, 김태성 사무총장을 비롯해 KCRP에서 8명 등 총 17명의 종교·민간단체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 민화협, 북민협, KCRP는 14일 오전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대북식량지원을 범국민적 캠페인으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에 앞서 이들 종교·민간단체 관계자들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민화협 공동의장인 한영수 한국YWCA연합회 회장이 발표한 기자회견문을 통해 "올해 북한의 식량사정이 최근 10년 사이에 최악이라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고 "우리 정보도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식량지원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발표하였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내놓지 않은 상태"라고 하면서 "결국,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우리가 아무 대책없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식량지원에 나선 이유를 밝혔다.

정부에는 "민간차원의 식량지원이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물자의 반출과 방북에 보다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을 해 줄 것"을, 국제사회에는 "북쪽 주민들의 아픔을 공유하고자 하는 한국 국민들의 의지와 노력에 지지를 보내주고 함께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북측 당국에는 "대북제재 등 국제정세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정치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에는 너와 내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한국 시민사회의 식량제공 노력에 적극 협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시민들에게는 "북한 주민에 대한 식량지원은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사는 통일준비의 과정이며, 우리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과 평화통일 의지를 제고하는 데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며 "생명을 존중하고 통일의 미래를 생각하는 길에 함께 해달라"고 호소했다.
 
"지원물자에 대한 전용의혹을 해소할 수 있도록 분배의 투명성을 더욱 높여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이날 민화협, 북민협, KCRP 공동명의로 발표한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북한 동포들에 대한 식량지원은 남북을 잇는 평화의 끈이며, 남북이 상생하는 평화와 통일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출발이고 통일 후 함께 살아갈 우리의 동포들, 우리의 아이들을 살리는 일"이라며, "생명을 살리고 존중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이는 그 어떤 정치적 이유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북녁 동포들을 돕기 위한 식량지원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기범 북민협 회장은 지난 5월 3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이 발표한 '북한의 식량안보분과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의 식량 작물 생산량은 약 490만톤으로 2008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여러 가지 원인 중에 인산, 칼륨 비료의 부족 그리고 농장의 전력 및 연료의 심각한 부족이 식량 생산 저하에 영향을 미쳤다고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또 "올해 수입해야 할 곡물의 양을 약 136만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 주민 약 1,010만명이 먹을 수 있는 양 "이라며, "이를 충당하기 위해 인도적 개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특히 올 1월부터 1인당 식량배급량도 전년 대비 80g 줄어든 300g이 지급되고 있으며, 7~9월에는 배급량이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춘궁기인 5~9월 사이에 식량사정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즉각적인 인도주의 조치가 요청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현재 북녘 인구의 43%에 해당하는 1,090만명이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생후 6개월에서 23개월까지의 어린이들 중 3분의 1이 하루 최소량의 식사만 공급받고 있으며, 그 결과 어린이 5명중 1명은 만성적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발육부진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엔 대북제재 품목으로 묶여있는 영농기자재와 영농장비도 지원하는 농업분야 개발협력사업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 인도지원 영역에 대한 즉각적인 대북제재 완화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남북협력을 통해 식량상황 개선뿐만 아니라 주민과 어린이들의 영양상태 개선과 질병관리를 위한 보건, 의료, 영양 분야 대북지원도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홍걸 민화협 의장은 지난해 4.27 판문점선언 이후 1년간 남북교류가 관주도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번 식량지원사업을 계기로 민과 관이 협력하는 상호보완적 관계가 되도록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나아가 "이번 기회를 잠시 닫혀있는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달 말 중국 선양에서 북측 인사들과 실무접촉이 예정돼 있는 김 의장은 북측에서 간접적으로 대규모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는 전언이 있었다며, 민간의 대북 식량지원 계획에 북측이 호응할 것이라는 기대를 표시했다.

KCRP 남북교류위원장인 원불교 정인성 교무는 "우리 7대 종단은 북한이 어려울 때마다 항상 기도와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왔다"며 "조선불교도연맹,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가톨릭교협회, 조선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등 4대 종단이 구성한 조선종교인협회와 한국종교인평화회의는 늘 파트너십을 가지고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어려운 북녘의 동포들을 위해 인도적 지원에 우리 종단은 적극적으로 함께 나서겠다"며,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와 고뇌를 공유하는 것이 신앙하는 이들의 마땅한 책무이다. 정치인들은 굶주린 동포를 위해, 내 형제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나누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행위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도리로서 나누는 밥그릇에 제발 이념을 덮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식량지원에 대해 북측이 소극적 입장을 밝힌데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의 비핵화협상을 진행중인 북측으로서는 식량문제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요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조금 소극적으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어려움을 겪는 북측 주민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기범 회장은 "굶주림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생명과 성장에 부작용을 초래하는 구체적인 경우는 엄격히 다르다는 점을 유념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앞으로 진행상황을 국민들께 소상히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대국민호소문(전문)


북한 동포들을 위한 긴급 식량지원에 동참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한민족의 피를 나눈 우리의 형제들이, 통일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갈 우리의 아이들이, 심각한 식량난에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방관만 할 수 없기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작년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넘어 <4·27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하여 한반도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회담 이후 북미관계는 물론, 남북관계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립과 갈등을 뛰어 넘어, 생명과 인권의 존엄성을 함께 실현해 나갈 것을 호소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건강한 통일의 미래를 위해 이제는 대승적 차원에서 대북 식량지원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북한주민들이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이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북한은 ‘136만 톤의 식량이 부족한 상태이고, 북한 인구의 40%인 1,010만 명이 심각한 굶주림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선뜻 북한을 지원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 정부도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식량 지원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 발표하였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내놓지 않은 상태입니다. 결국 어려움에 처한 북한 동포들을 살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도움의 손길을 보내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남북의 군사적․정치적 긴장상태와는 별개로,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부족한 식량사정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도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대북 식량지원을 둘러싼 여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고통 받는 동포들을 돕기 위한 식량지원이 절실합니다. 

  북한 동포들에 대한 식량지원은 남북을 잇는 평화의 끈이며, 남북이 상생하는 평화와 통일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출발입니다. 통일 후 함께 살아갈 우리의 동포들, 우리의 아이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에 생명과 평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정성을 모아 북한 취약계층을 위한 긴급 식량 지원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각계의 지원금과 국민성금을 통해 북한주민들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국민여러분께 호소합니다. 북녘 동포들을 돕기 위한 식량지원에 동참해 주십시오. 생명을 살리고 존중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는 그 어떤 정치적 이유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우리정부에 요청합니다.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보다 유연한 입장을 가져 주십시오. 시민들의 작은 정성으로 마련한 식량이 북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창고에 쌓여 있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부는 민간차원의 식량지원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물자의 반출과 방북에 보다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을 해줄 것을 촉구합니다. 정부 차원의 대북 식량지원을 재개하는 것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것이 어렵다면, 민간단체나 국제기구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제사회에도 호소합니다. 북쪽 주민들은 한반도 남쪽의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이웃이라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들이 힘들어 할 때 그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인도주의의 가장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북쪽 주민들의 아픔을 공유하고자 하는 한국 국민들의 의지와 노력에 지지를 보내 주시고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북쪽 당국에도 촉구합니다. 대북제재 등 국제 정세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정치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에는 너와 나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 시민사회의 식량 제공 노력에 적극 협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대북 지원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논란과 지원물자의 전용가능성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북 지원의 효과를 높이고 분배의 투명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여러분, 종교인 여러분, 각계의 지도자 여러분, 함께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9. 5. 14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7대 종단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추가-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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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당 장외투쟁, 국민 10명 중 6명 "공감 안해"

[오마이뉴스 주간 현안 여론조사] 비공감 60.3% vs 공감 35.2%... 중도층 62.6% 비공감

등록 2019.05.15 07:17수정 2019.05.15 07:17유성애(findhope)

 

 

 

 
우리 국민 10명 가운데 약 6명은 약 2주째 진행중인 자유한국당의 장외투쟁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0명 가운데 약 5명은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정치적으로 무당층, 이념성향상 중도층에서도 공감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0%대에 달했다.
 
<오마이뉴스>는 14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성인 500명(응답률 6.9%)을 대상으로 한국당의 장외투쟁에 대한 국민인식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질문은 이랬다.
 

Q. 선생님께서는 자유한국당의 장외투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택지 1~4번 순·역순 배열)
1번. 매우 공감한다
2번. 다소 공감한다
3번. 별로 공감하지 않는다
4번.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5번. 잘 모르겠다

 
조사 결과, 비공감 응답이 60.3%를 기록해 공감 응답 35.2%보다 25.1%p 높게 나타났다(모름/무응답 4.5%).  특히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50.5%로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 비공감의 강도가 매우 센 것으로 조사됐다("별로 공감하지 않는다"는 9.8%). 반면 "매우 공감한다"는 21.8%, "다소 공감한다"는 13.4%에 그쳤다.
 

▲ 청와대로 향해 거리행진 벌이는 자유한국당과 지지자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원과 지지자들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집회를 마친 뒤 국회 선거법과 공수처법 패스트트랙 강행처리를 규탄하며 청와대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조사결과를 보면 한국당의 장외투쟁은 무당층과 중도층을 설득하는데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당 지지층의 88.5%가 공감한다고 응답하고, 반대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의 93.0%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해 지지성향에 따라 입장차가 확인히 갈리는 가운데, 무당층의 경우 공감 22.0% - 비공감 60.9%로 나타났다. 비슷한 구도는 이념성향별 분석에서도 확인됐다. 보수층 응답자의 67.3%가 공감, 진보층 응답자의 86.9%가 비공감에 답변을 하면서 대립하는 가운데, 중도층 응답자의 경우 공감 35.4% - 비공감 62.6%로 한국당의 장외투쟁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높았다.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대구/경북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비공감 답변이 과반을 넘기며 높았다. 특히 광주/전라의 경우 비공감 답변이 89.0%에 달해 가장 높았으며, 서울 64.6%, 경기/인천 61.4%는 장외투쟁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대구/경북은 공감 50.2% - 비공감 48.1%로 오차범위(95% 신뢰수준에 ±4.4%) 내에서 팽팽했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60대 이상을 제외한 전 연령대에서 비공감 답변이 50% 이상을 기록했다. 특히 40대의 경우 비공감 답변이 75.0%로 나타났다. 반면 60대 이상은 공감 51.8% - 비공감 44.7%로 오차범위 내에서 공감한다는 답변이 높았다.
 
성별로는 남성의 55.5%, 여성의 65.0%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지난달 20일 주말 집회에서 시작된 한국당의 장외투쟁은 개혁법안 패스트트랙 처리 직후인 지난 2일부터 본격화되 현재 2주째 지속되고 있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는 한국당의 장외투쟁이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는 있지만, 그만큼 또는 그보다 강하게 반대층도 결집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당층 또는 중도층의 약 60%가 장외투쟁에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 장외투쟁의 지속 동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줬다.

현재 정부와 여당은 5월 추가 경정예산처리를 위해 장외투쟁 중인 한국당에게 '5당 협의 후 대표와 일대일 대화'를 제안했다. 하지만 황교안 대표는 문 대통령과 일대일 회동을, 나경원 원내대표는 '교섭단체만 참석하는 3당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번 조사는 무선 전화 면접(10%) 및 무선(70%)·유선(20%) 자동응답(ARS) 혼용 방식으로 진행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p이다. 조사 대상은 무선전화(80%)와 유선전화(20%) 병행 무작위생성 표집 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 방식으로 선정했고, 통계보정은 2019년 1월 말 행정안전부 국가인구통계에 따른 성·연령·권역별 사후 가중 방식으로 이뤄졌다. 자세한 조사 결과는 오른쪽 '자료보기' 버튼을 클릭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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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목숨이 낙엽처럼

[왜냐면] 아, 목숨이 낙엽처럼 / 김훈

등록 :2019-05-14 04:59수정 :2019-05-14 07:01

 

김훈

 

소설가

 

고층건물 신축공사장에서 추락사하는 노동자가 일년에 270~300명에 달한다는 정부 통계가 티브이 뉴스에 나왔다. 금년 1월부터 4월까지는 100여 명이 떨어져서 죽었다고 한다. 부상당해서 불구가 된 사람은 더 많을 터이다.

 

뉴스를 보다가 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랐다.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계산해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대형참사이고, 숫자가 적으면 소형참사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꺼번에 수백 명이 떼죽음을 당하면 대형참사이고, 동일한 유형의 사고로 날마다 한두 명씩 죽으면 대수롭지 않은 사고인가.

 

고공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다. 떨어져서 부서지고 으깨진다.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은 땅을 치며 울부짖고 노동을 관리하는 정부관리가 와서 손수건으로 눈물 찍어내는 시늉을 하고 돌아가면, 그다음 날 노동자들은 또 떨어진다. 사흘에 두 명꼴로 매일 떨어진다.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왜 떨어지는가. 고층건물 외벽에 타일을 붙이거나 칠을 하려면 건물 외벽을 따라서 비계를 가설해야 하는데, 이 비계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비계 발판이 무너져내리거나 비계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았거나, 비계를 외벽에 고정시키는 볼트가 허술했거나, 노동자의 몸을 외벽과 연결시키는 장치가 부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사고 원인이라는 것을 들여다보니까, 그 원인을 시정하는 데는 돈도 별로 들지 않고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비계바닥을 튼튼히 하고 나사를 똑바로 박아서 비계를 외벽에 튼튼히 고정시키면 되는 일이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고, 최고급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갤럭시를 만들고 첨단유도무기를 만드는 나라에서 돈이 없고 기술이 없어서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는가.

 

돈과 기술이 넘쳐나도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바로잡을 능력이 없다. 내년에도 또 270~300명이 떨어진다. 이것은 분명하다. 앞선 노동자가 떨어져 죽은 자리에 다른 노동자가 또 올라가서 떨어진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 그랬으니, 내년인들 무슨 수가 있겠는가.

 

왜 바로잡지 못하는가. 나는 그 이유를 안다. 돈 많고 권세 높은 집 도련님들이 그 고공에서 일을 하다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죽었다면, 한국 사회는 이 사태를 진작에 해결할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부는 기업을 압박하거나, 추경을 편성하거나, 행정명령을 동원하거나 간에,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층에서 떨어지는 노동자들은 늘 돈 없고 힘없고 줄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나의 이러한 주장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권문세가나 부유층의 도련님들이 그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은 사례가 없기 때문에 나는 방증 자료를 제시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나의 생각은 계급적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다. 나는 적어도 70년 이상을 이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의 경험칙에 입각하고 있다. 내가 살아온 이 사회는 5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니 내년이라고 무슨 별 볼 일이 있겠는가.

 

한국 사회가 이 사태를 바로잡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큰 이유는 경영과 생산구조의 문제, 즉 먹이 피라미드의 문제다. 재벌이나 대기업이 사업을 발주하면 시공업체가 공사를 맡아서 힘들고 위험한 작업은 원청, 하청, 재하청으로 하도급되고, 이 먹이 피라미드의 단계마다 적대적 관계가 발생한다. 이 피라미드의 최하위에 속하는 노동자들은 고층으로 올라가고, 고층에서 떨어진다. 책임은 아래로 내려가서 소멸하고 이윤은 위로 올라가서 쌓인다. 모든 국민이 법률 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헌법의 멋진 문장이 그렇다는 얘기이고, 지금 한국 사회는 신분이 세습되는 고대국가라는 것을 나는 이번에 티브이 뉴스를 보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 사태가 계속되는 한 4차 산업이고, 전기자동차고 수소자동차고 태양광이고 인공지능이고 뭐고 서두를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날마다 우수수우수수 낙엽처럼 떨어져서 땅바닥에 부딪쳐 으깨지는데, 이 사태를 덮어두고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앞으로 나갈수록 뒤에서는 대형 땅 꺼짐이 발생한다.

 

티브이 뉴스를 보면서, 방안에서 벽에 대고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급히 몇 자 적어서 신문사에 보낸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893771.html?_fr=mt1#csidx0a01801a28a085c838f02188b7ab1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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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잡는 쥐, 아프리카 호저…외톨이 수컷 주로 당해

조홍섭 2019. 05. 13
조회수 1264 추천수 0
 
30㎝ 가시 찔려 평생 고통, 식인 사자 되기도
 
h1.jpg» 아프리카포큐파인 대 사자. 얼핏 상대되지 않을 것 같은 대결에서 종종 사자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에릭 킬비(왼쪽),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아프리카포큐파인은 몸무게가 열 배는 무거운 최상위 포식자 사자도 쓰러뜨리는 당찬 동물이다. 쥐목 호저과에 속하는 이 동물은 몸무게 13∼27㎏으로 제법 크지만, 초식성 쥐의 일종이다. 그러나 몸 옆구리와 뒤에 밤송이처럼 돋은 강모 깃은 치명적 무기이다.
 
아프리카포큐파인과 사자의 관계를 생태학적으로 분석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연구자들은 1960년 이후의 연구 문헌을 비롯해 신문기사, 유튜브 등 인터넷 자료 등을 조사해, 이 동물로 인해 다치거나 죽은 사자의 사례 50건을 찾았다.
 
연구 책임자인 줄리언 커비스 피터한스 미국 루스벨트대 교수는 “기록을 검토한 결과 어떤 조건에서 사자가 포큐파인 사냥에 나서는지, 또 깃에 찔린 사자가 어떻게 되는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됐다”고 필드 박물관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공동 연구자인 개스톤 셀레시아 미국 시카고 로욜라대 명예교수는 “한 마디로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벌어지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백수의 제왕이 맛좋고 통통한 포큐파인을 먹으려 하지만 결국 깃에 찔리고 만다”고 말했다.
 
h2.jpg» 포식자의 공격을 받으면 아프리카포큐파인은 몸 뒷부분의 깃을 곧추세워 위협한다. 토마스 핸드위케,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아프리카포큐파인은 포식자에 맞서 몸 뒷부분의 강모 깃을 곧추세워 위협한다. 길이가 35㎝에 이르는 뾰족한 깃은 사람의 손톱이나 머리카락 성분인 케라틴 성분인데, 몸에서 쉽게 빠지기 때문에 길고 뾰족한 깃에 찔린 포식자는 크게 다칠 수 있다.
 
50마리의 불운한 사자들에게서 공통점이 드러났다. 다른 먹이 찾기가 힘든 가뭄이 심할 때 젊은 수컷 사자가 대부분 피해를 봤다. 피터한스 교수는 “수컷이 더 자주 포큐파인에 당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며 이를 ‘젊고 멍청한 수컷 신드롬’이라고 불렀다. 경험 없는 젊은 수컷이 위험한 공격에 쉽게 나서는 데다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 외톨이여서 깃에 찔렸을 때도 동료가 빼주지 않기 때문이다.
 
Stekelvarken_Aiguilles_Porc-épic.jpg» 포큐파인의 강모 깃. 손톱이나 머리카락과 같은 케라틴으로 돼 있으며 길이가 30㎝를 넘기도 한다. 스텔켄바르켄,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사자의 무모한 공격은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 깃에 찔려 야생동물 사냥을 하지 못하게 된 사자가 가축과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1965년 사람을 잡아먹었다 붙잡혀 박제된 사자 2마리를 단층촬영으로 조사했다. 한 마리에는 23㎝ 길이의 깃이 코를 관통해 꽂혀 있었고, 다른 한 마리의 부러진 송곳니의 신경에 3㎝ 길이의 부러진 깃이 박혀 있었다.
 
두 마리 모두 뼈에 감염된 흔적이 있었고, 냄새를 맡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사람 사냥에 나서게 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피터한스는 “포큐파인 부상은 사자가 사람을 공격하는 전조”라고 말했다.
 
h3.jpg» 포큐파인에 찔린 뒤 사람을 잡아먹다 1965년 사살된 사자. 코에 박힌(흰 부분) 포큐파인의 깃이 보인다. 존 페로트, 줄리언 커비스 피터한스 제공
 
생태계의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 피터한스 교수는 “1960년대부터 사자의 행동을 연구해 오면서 우리는 사자가 영양, 얼룩말, 들소 등 발굽 달린 대형 먹이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안다”며 “사자가 이들보다 먹이로서 질이 떨어지는 포큐파인을 공격하는 것은 이미 지역적 먹이 공급에 차질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과학저널 ‘동아프리카 자연사’ 최근호에 실렸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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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 어지럽히는 트럼프-네타냐후 동맹의 희생자들

[김재명의 월드포커스] 이스라엘 건국 71년에 부쳐
2019.05.14 02:27:36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 친구가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동예루살렘 쪽으로 바람을 쐬러 갔더니 성벽 위에 전에 없던 볼거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미국 국기(성조기)가 펄럭이는 문양을 배경으로 '트럼프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Thank You President Trump)라는 글자가 대형 빔프로젝터 스크린으로 성벽을 수놓고 있다는 얘기였다. 

5월14일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이스라엘에선 국토대행진, 야외 음악회, 전시회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요란스런 이벤트가 벌어지는 와중에 미국 대통령에게 고맙다는 문자 메시지가 빔프로젝트로 선보인 것이다.  

사진을 보내온 유대인 친구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공존만이 이스라엘이 살길이라 믿는 소수의 유대인에 속한다. 그의 눈에는 이스라엘의 극우-보수-종교 세력을 지원하는 트럼프 미 대통령이 곱게 비칠 리가 없다. 하지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끈끈한 유착을 가리켜 "적어도 당분간은 깨뜨리기 어려운 현실이기에 답답하기만 하다"고 친구는 이메일에 덧붙였다. 
 

▲ 이스라엘 건국기념일 기념으로 예루살렘 성벽에 빔프로젝터로 쏜 트럼프에 대한 감사 인사 ⓒ김재명


극우-보수-종교 세력의 재집권 도운 트럼프 

지금부터 꼭 71년 전(1948년 5월 14일) 중동 지도 한복판에 새로운 국가가 그려졌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그날부터 지금껏 중동에 평화로운 날은 없었다. 늘 어디선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집이 헐리고 피가 피를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폭력의 중심엔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 그리고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걸어온 미국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해마다 30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공짜로 이스라엘에게 건네주어 왔고, 이스라엘은 그런 미국을 뒷심 삼아 주변의 중동 아랍인들을 눌러왔다.  

최근 들어 미-이스라엘 동맹은 더욱 강화된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사이의 유착은 더 이상 끈끈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지난 4월 이스라엘 총선에서 네타냐후의 극우-보수-종교 연합 세력이 가까스로 과반수를 넘겨 승리한 것도 따지고 보면 트럼프의 거듭된 지원 사격 덕분이다. 

그 보기를 꼽자면, △국제사회의 세찬 비판을 무시하면서 미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고(201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헤브론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유네스코(UNESCO)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탈퇴했고(2019년 1월 1일) △이스라엘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이른바 6일 전쟁) 때 빼앗은 뒤 지금껏 점령중인 골란고원(국제법상 시리아 영토)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에 서명했다(2019년 3월 25일).  

트럼프의 중동 정책은 지난날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공화당 출신이냐 민주당 출신이냐를 떠나) 보여 왔던 중동정책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한마디로 노골적인 친이스라엘 일방주의이다. 이스라엘에서 지난 10년 동안 정권을 잡아 온 네타냐후로선 트럼프의 전임자인 조지 부시나 바락 오바마보다 트럼프가 더없이 고마울 것이다. 특히 오바마와는 이스라엘 정착촌 철거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냉랭한 관계를 이어오지 않았던가. 

"내가 총리에 다시 오른다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에 합병하겠다"  

네타냐후는 4월 총선을 앞둔 보수 유권자 층의 표심을 다지려고 이런 광기를 부렸다. 국제사회의 세찬 비난과는 달리 유대인 정착촌 확장에 대해 눈을 감아온 트럼프가 그의 뒷심이 아니라면, 보이기 어려운 광기였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는 이스라엘이 전쟁(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차지했기에 국제법에 따라 언젠가는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1967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 군이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못 박은 바 있다(유엔안보리 결의안 242). 

2개 국가 해법 내버렸다 

지난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1996년 팔레스타인에 자치정부가 들어선 뒤로 중동평화협상을 말할 때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2개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역대 미국 행정부의 정책도 그러했다. 이스라엘도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2개 국가 해법'을 부정하지 않았다. 트럼프 집권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 협상은 물 건너간 모습이다. 여기엔 여러 요인들이 깔려 있지만, 네타냐후와 트럼프가 2개 국가 해법을 노골적으로 뭉갠 탓이 크다. 이즈음 네타냐후와 트럼프는 2개 국가 해법을 아예 입에 담지 않는다.  

네타냐후는 지금의 팔레스타인 점령 상황을 그대로 고착화하는 이른바 '현상 유지를 위한 시간 끌기' 전략을 지녔다.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 자체를 부정해온 그의 마음속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란 없다. 네타냐후-트럼프의 유착이 빚어내는 최대 희생자는 다름 아닌 팔레스타인 민초들이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280만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억압(유대인 정착촌 확장, 8미터 높이의 분리장벽 등)으로 생존권을 위협 받으며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팔레스타인 가자(Gaza) 지구의 180만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하늘만 뚫린 감옥'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는 상황이다. 

실업률 52%,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 

지난 5월 1일 노동절을 앞두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통계국이 밝힌 바에 따르면, 가자지구의 실업률은 52%에 이른다. 전년도 실업률이 44%였던 점에 견주면 그곳 사람들의 살림살이 형편이 갈수록 더욱 나빠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전 세계 사람들은 걸핏하면 가자지구에서의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익숙해 있다.  

유혈 충돌이 왜 그치지 않을까 헤아려 보면, 그 밑바닥엔 절망감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이스라엘 군의 총격을 무릅쓰고 돌을 던지며 시위를 벌이다가 죽고 다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마음속엔 "이런 한계 상황에선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깊은 절망감이 깔려 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만 5000달러쯤에 이르지만 팔레스타인은 겨우 3000달러에 머물러, 소득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팔레스타인 현지 취재 때 만났던 자치정부 경제무역부의 한 실무자는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의 기준으로 보면, 팔레스타인 사람 2명 중 1명이 절대빈곤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절대빈곤의 국제적인 기준은 한 사람이 하루 1.25달러(구매력평가 기준)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절대빈곤의 책임은 고스란히 이스라엘 몫이다. 서안지구에서 만난 한 유대인 정착민으로부터 "아랍인들(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대인들보다 게을러 못 산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도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푹~하며 웃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중동평화 어지럽히고 한국에도 악영향 

트럼프-네타냐후 유착은 팔레스타인 사람들뿐 아니라 지구촌 사람들에게도 해악을 끼치고 있다. 미 오바마 행정부의 주도 아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P5+1)이 이란과 핵협정(정식 명칭: 포괄적 공동계획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2015년)을 맺은 바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 협정만으론 이란의 핵 위협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며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그리고는 "2019년 5월부터 어떠한 국가도 이란 석유를 수입해선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야말로 21세기 패권 국가 미국의 일방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렵게 또는 고상하게 말할 것도 없이 "이로써 트럼프의 미국은 국제사회의 깡패"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문제는 트럼프의 조치가 한국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2015년 핵협상이 타결되기 전인 지난 2010년 당시 미국 부시 행정부는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한국의 동참을 요구했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동맹이란 이름 아래 석유를 뺀 이란과의 대부분의 교역을 중단시키고, 서울에 있는 이란 멜라트 은행 한국지점 문을 닫도록 하며 미국의 비위를 맞춘 바 있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 가운데 이란산의 비중은 약 8%. 문재인 정부가 그 요구에 안 따른다면? 트럼프가 내지르는 강압책으로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 뻔하다. 국내 업계는 지금의 상황을 내다보면서 일찌감치 석유 수입선을 다변화했다고 한다. 이란 석유 수출량의 절반 가량을 들여오는 중국조차 움츠리는 모습을 보면서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유대인들의 손에 놀아나는 세계 

이런 상황의 뿌리에는 결국 이스라엘이 있다. 미국의 최우선으로 챙겨주는 동맹국인 이스라엘은 중동의 군사 강국인 이란을 경제적으로 붕괴시키려 한다. 남미의 반미 국가인 베네수엘라의 경제 붕괴를 노리는 미국과 닮은꼴이다. 9.11 테러 뒤 미국이 벌인 잇단 군사작전으로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위협할만한 군사력을 지닌 국가는 이란 단 하나뿐이다. 그런 이란이 핵무기를 만들어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국제정치학자들이 말하는 합리적 선택이론을 들먹일 것도 없이 제정신이 박힌 이란 지도자라면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이란의 군사적 위협을 막겠다며 폭격기를 실은 항공모함 전단을 중동으로 출진시키는 등 법석을 떠는 상황이다. 미국의 보수 매체들은 날마다 이란 위기설을 증폭시키며 전쟁의 북소리마저 둥둥 울려댄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긋한 미소를 짓는 사람은 다름 아닌 트럼프의 친구 네타냐후이다.  

지정학적으로 이란은 미국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사정거리 3000km의 샤하브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 중인 이란이지만, 미국의 본토를 위협할만한 처지도 못 되고 능력도 안 된다. 그런데도 미국의 트럼프는 왜 이란의 핵개발 문제에 그토록 과민반응을 보일까. 결국 이스라엘의 극우-보수-종교 연합세력을 이끄는 네타냐후가 바라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네타냐후를 위해 이란을 압박하고, 한국의 문재인 정권은 트럼프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이란 석유 수입을 포기하는 모습이다. 결국 유대인들의 손에 놀아나는 셈이다. 트럼프-네타탸후 동맹이 중동평화뿐 아니라 세계평화를 어지럽히는, 참으로 이상하고 답답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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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민군 엄마가 산 시민군에게... "살아야제, 29만원 전두환도 골프치는디"

[오월ing ①]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씨와 시민군 아들을 잃은 어머니 김길자씨

19.05.14 07:37l최종 업데이트 19.05.14 07:37l

 

5.18민주화운동 후 39년.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말]

 

시신 속 아들 모습 가리키는 김길자씨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시신들 사진 속에서 아들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 "아들이 여기 있어"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시신들 사진 속에서 아들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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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그날 이후, 엄마는 투사가 됐다. 아들을 잃은 뒤다. 전두환 정권은 '막둥이'를 폭도로 둔갑시켰다. 엄마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전두환 정권은 엄마도 폭력으로 진압했다. 어느 날, 엄마는 머리가 깨져 피범벅이 됐다. 전두환 정권은 힘으로 안 되자 돈으로 꼬드겼다. 가만히 있겠다면 논 100마지기를 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자식 팔아먹는 부모'가 될 수 없었다. 단칼에 거절하고,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농성을 했다. 오월의 그날, 옛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에 나섰던 문재학(당시 16세·광주상고1)군의 어머니 김길자(80)씨 이야기다.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 사진사'가 된 사람도 있다. 그는 문재학군과 같은 '고등학생 시민군'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사회문제에 일찍 눈떴다. 1980년 당시 금서였던 김지하의 <오적>을 읽고,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교사 박석무(전 518기념재단 이사장)씨도 만났다.

 

하지만 그는 공수부대의 '폭도 소탕작전'이 펼쳐진 날 체포됐다. 1980년 5월 27일, 공수부대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고 군홧발에 짓밟혔다. 등에 '극렬폭도'란 글씨가 새겨진 채 오랏줄에 묶여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잔혹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오월의 그날, 광주 최후의 항쟁에서 살아남은 김향득(57)씨다.

5.18민주화운동 39주년을 앞두고 두 사람을 만났다.

두 명의 고등학생 시민군

지난 8일, 두 사람을 만난 장소는 광주시 북구 신안동 김길자씨 집에서였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남은 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고등학생 시민군'이어서일까. 김길자씨는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김향득씨를 소개했고, 김향득씨는 김길자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김길자씨가 '오월 투쟁'을 하는 곳이면 김향득씨가 나타나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둘 사이 간격은 좁아졌다. 오월 광주의 어머니와 아들은 이렇게 만났다.

"처음엔 재학이 어머님인지 몰랐당께. 나중에 물어물어 알아보니 재학이 어머니라는 것이여. 다른 사람 이야기가 나오믄 별로 눈물이 안 난디 재학이 이야기만 나오면 꼭 눈물이 난당께. 같은 시절을 산 또래고 '고등학교 시민군'이었응께. 마지막 날 살아남았다는 부채 의식도 느껴지고, 그리고 그때 청소년들이..." (김향득씨)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 바라보는 문재학 어머니 김길자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바라보고 있다.
▲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 바라보는 문재학 어머니 김길자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바라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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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득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름진 손으로 눈을 훔쳤다.

"80년 항쟁 후에 내 자식 살려내라고 소리치믄서 다녔제. 이것 말고 할 말이 없응께. 그럴 때마다 향득이가 와서 사진을 찍음서 뒤따라 다니데. 그렇게 하다가 알게 됐제. 향득이 울지 말고 말해." (김길자씨)

"뜻하지 않게 사진을 하게 되믄서 자꾸 문재학, 박현숙 같은 사람들 생각이 나는 거여. 당시 같은 또래였던 사람들잉께. 왜 다들 억울하게 죽었는지, 한 번 제대로 피어보도 못하고 죽어야 했는지. 그런 부채 의식이 남아서 13년 동안 사진을 찍었제. 그러다 현장에 가믄 '여기가 혹시 재학이가 사망한 자리는 아닐랑가' 이런 생각을 들어 카메라를 들기도 했제." (김향득씨)

"그려, 우리 재학이. (1980년 5월) 25일 날인가. 그때 도청으로 애기를 데리러 강께 재학이가 (양)창근이 이야기를 하는 거여. 동산초등학교 동창이었제. 아따 동산초 있잖여. 이참에 전두환이 왔을 때, '전두환 물러가라'라고 했던 애기들 있던 곳. 음... 그랑께 우리 재학이가 (처음) 18일 날 전화가 왔어." (김길자씨)


김길자씨는 기억을 더듬었다. 39년 전 5월 18일로 돌아가 아들의 전화를 받았던 일부터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지(구묘역)에 그를 묻기까지 사연을 들려줬다.

[어머니 김길자씨의 증언] 시신이 되어 돌아온 고등학생 아들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영정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영정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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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문재학군은 집에 전화를 했다. 계엄군이 곳곳에 누비고 다녀 집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엄마에게 친구 광호네로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엄마와 광주교대를 지나가는데 엄청난 수의 계엄군을 발견했다. 엄마는 문재학군의 팔짱을 꼈다.

21일, 김씨는 아들을 찾아 집을 샅샅이 뒤졌다. 어딜 갔는지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돌아온 아들은 목이 쉬어 있었다.

"목 왜 쉬었냐?"
"차 따라다녔제."

"뭣헐라고 니가 차를 따라 댕겨야"라며 한소리를 했다. 아들은 "선배들이 김대중 석방하고 전두환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칭께 같이 따라했소"라고 했다. 형을 앞세워 "계엄군 온당께 절대 나가자 마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23일, 문재학군은 가족들에겐 아무 말도 안하고 문밖을 나섰다. 다음날(24일)이 돼서야 "(전남)도청 상황실에 있소"라고 집에 전화를 걸었다. 25일, 김씨는 남편 문건양(84)씨와 함께 도청으로 달려갔다. 민원실 2층에 서 있는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집으로 가자는 말에 아들은 "엄마, 꼭 (양)창근이 같은 시체가 들어왔는디 총에 맞아 죽었는지 아닌지 모르것소. 나는 역서 창근이도 봐야하고 심부름이라도 해야 항께 어서 가쇼"라고 했다. 김씨와 남편 문씨는 완강하게 거절하는 아들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26일, 문재학군은 도청 본관 앞에서 다시 부모님을 만났다. 엄마는 다시 설득했다. 문군은 이번에도 "엄마, 창근이 수습도 못하고 있어요. 저녁에 차가 와서 실어준당께, 그때 갈라요. 걱정말고 가쇼"라고 했다. 부모님은 "오늘은 꼭 돌아온단 약속 지켜라잉"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통금시간 7시가 넘어도 아들은 오지 않았다. 밤늦게야 "차가 끊겨서 못가겄소"라는 전화가 왔다.

"오늘 계엄군이 쳐들어온단디 어쩔라고 그라냐, 진짜!"
"학생들은 손들고 나가믄 괜찮다고 항께 걱정마쇼. 엄마, 차근이가 저러고 있는디 어째 저만 살자고 집에 간다요."

김길자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옷을 잡아끌어서라도 데려오지 못한 걸,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으로 아들을 죽인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27일, 김길자씨는 새벽 두세 시 즈음에 콩 볶는 소리마냥 총소리가 울러 펴지는 걸 들었다. 옥상에 올라가니 군인들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새벽 6시, 남편 문건양씨와 외삼촌을 앞세워 도청으로 갔다.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문재학군은 도청에서 '엠(M)-16 총상'으로 사망했다.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가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가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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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이 찾을라고 시체가 있다는 데는 다 가봤제. 외삼촌 친구가 병원에 있어서 거그다가도 연락을 했어. 그랬더니 금방 전화가 와서 거기 있다고 하데. 현충일에 계엄사 가믄 (아들을) 내준다고 항께 살아있는지 알았제. 근디 현충일이 내일인데도 연락이 없어브러. 그래서 다시 연락해봉께 우리 재학이가 아닌겨(동명이인). 넋이 나가서 있는데, 즈그(문재학) 담임선생님이 연락을 해와야. 신문 봉께 재학이가 망월동에 가매장된 거 같다고. 6월 7일인가 망월동에 갔어.

묘지(번호 104, 관번호 94)를 팔라고 하는디 안 된다는 거여. 시청이나 경찰서에서 나와갖고 시체를 확인해야 가능하다고. 그랑께 즈그 아부지가 삽을 들고 화를 내며 '내 자식 아니면 안 가져 갈 것잉께 비켜, 다 때려죽여븐다'고 덤벼. (결국) 묘를 파고 봤는디 우리 재학이가 아닌 것 같은 거여. 근데 남들은 다 재학이가 맞다여.

그래서 아빠가 머리를 만져봤제. 애기가 시골 살 때, 다리에서 떨어졌거든. 내가 냇가에서 빨래하는디 다리 위에서 '엄마'하고 부르다가 떨어져서 머리 한쪽이 오그라졌는디, 커서도 안 펴지는 거여. 그걸 아빠가 확인하는디, 머리카락도 뭉텅뭉텅 다 빠졌고, 목도 덜렁덜렁해야. 제대로 확인이 안 돼. 이때까지도 우린 재학이가 아니길 바랐제. 근데 나중에 검찰청 8호 검사한테 갔더만 사진을 보여주는디 재학이가 맞어. (6월) 21일 망월동 묘지에 묻었제."


[김향득씨의 증언] 등에 '극렬폭도' 낙인, 체중 35kg까지 줄어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씨와 고 문재학 어미니 김길자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와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
▲  "우리 어머니도 좀 더 건강하셔서 좋은 세상 보셨으믄 좋겄어요. 진상규명 되는 날 올 때까지 저도 노력할랍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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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향득씨는 어떻게 고등학생 신분으로 시민군이 됐나요?
"고등학생 때부터 김지하의 책 <오적> 등 금서를 많이 봤제. 박석무(전 518기념재단)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기도 했고. 당시 독서회를 했는디 거기서도 리더여서 학교나 기관에서 주시하는 인물이었어. 그렇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지믄서 자연스럽게 시민군이 됐제."

-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겠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긴디, (5월) 27일 아침부터 아버지가 시신이 있는 곳마다 가서 나를 찾았대. 지나가는 지프차를 잡고 이름을 적어주면서 간곡하게 사정해서 알아보기도 하고. 향득이란 이름이 특이하잖아. 그렇게 며칠 고생하다가 아들이 살아서 상무대 영창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데. 부모 마음 다 똑같제 뭐."

- 상무대에 끌려가서는 어땠나요?
"계엄군이 내 등에 '극렬폭도'라고 쓰고, 오랏줄에 묶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어. 아우슈비츠 포로만도 못했제. 체중이 35kg까지 줄어들었응께. 아버지한테도 맞아본 적이 없는디, 걱서 진짜 군홧발로 죽도록 맞았당께. 잠도 안 재우고 패는데, 그냥 개돼지였어.

고문도 당했제. 아니 이놈들이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서 고문을 하데. 그라믄 손이 퉁퉁 붓어.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빌었제. 거기선 어떤 힘 좋은 장사도 못 버텨. 나도 살집을 꼬집음서 버텼제. 아버지가 정신 놓지 말라고 한 거 기억함서. 걱서 고문 받고 구타 당해서 멍청해지는 사람 여럿 봤거든. (결국 풀려나긴 했어도) 고문 독은 안 빠지데. 영창에서 나와갖고 몸에 좋다는 거 다 먹었어. 오소리, 개구리 뒷다리, 심지어 인분이 고문 독 빼는데 좋다고 해서 똥오줌도 뒤집어 썼응께.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게 다행이지..."

어머니 내동댕이치고 돈으로 회유하려 한 전두환

국가는 피해자로 살아가는 '남은 자'에게도 폭력을 가했다. 김향득씨 뿐만 아니라 김길자씨도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기까지 갖은 고초를 당했다. 전두환이 광주에 오는 날이면, 안방에 형사들이 드러눕고 집밖에는 전경이 배치됐다.

감시의 눈을 피해 전두환 앞에서 시위를 하는 날이면, 경찰차 실려 삼척으로 남원으로 끌려가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1986년도엔 강제로 제주도행 배에 오른 적도 있다. 하지만 몸이 상하는 잃은 없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1984년 4월, YWCA에서 유가족협회 2세들이 청년회 발족식을 가졌다. 김길자씨는 딸과 함께 구 호남전기에 모여 YWCA가 있는 광주 유동으로 행진하려 했다. 하지만 경찰이 앞을 가로막았다. 몸싸움이 벌어졌다.
 
5.18진상규명 시위 도중 피 흘리는 김길자씨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공개한 사진들.  고 문재학씨 시신 사진과 함께 진상규명을 위한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피 흘리는 김길자씨의 모습도 보인다.
▲ 5.18진상규명 시위 도중 피 흘리는 김길자씨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공개한 사진들. 고 문재학씨 시신 사진과 함께 진상규명을 위한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피 흘리는 김길자씨의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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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덩이가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김길자씨가 한 경찰의 귀에 꽂혀 있는 무전기 리시버를 뺐다. 경찰은 김씨의 머리를 무전기로 내리쳤다. 시뻘건 피가 김씨의 머리에서 흘러내려 얼굴을 타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병원에서 여덟 바늘을 꿰맸다. 하지만 김씨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했다.

"내가 재학이 보내고 석 달 동안 물만 먹고 살았어. 근디 곰곰이 생각해 봉께 우리 재학이가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를 했는디 폭도라고 하는 것이여. 재학이 사망신고 하러 갔을 적에도 '학생이 총 잡았응께 폭도'라며 위로금도 안 줍디다. 우리 재학이 폭도 누명 벗겨야지. 진상규명해야지. 그래서 유족들 찾아다니면서 활동을 시작했어."

전두환 정권은 힘으로 안 되자 돈을 썼다. 김길자씨에게 소란을 피우지 않는 조건의 각서를 쓴다면, 논 100마지기를 준다고 했단다. 김씨는 이를 거부했다.

"한 번은 505보안부대에서 연락이 왔어. 안부말을 하더니 부대로 오라고 하데. 내가 뭣헌다고 거길 가냐고 볼일 없다고 했제. 그래도 자꾸 재촉해서 갔는디 '각서를 써줄 수 있냐'고 묻데. 무슨 각서냐고 하니까 다시는 소란 피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평생 먹고 살만치 준다고 하데. 영암에 논 100마지기 사준다고.

각서 쓸 만한 일한 적 없고, 내가 노동해서 먹고 한다고 했제. 자식 팔아서 부자 되면 뭣허냐고. 그랬더니 그럽디다. 역시 그놈의 집구석이라고. 그람서 당신 아들이 잘했냐, 학생이 총칼 드는 게 잘한 짓이냐고 따져. 나는 내 자식 폭도 누명 벗기려고 하는 거라고 그랬제. 잘못한 게 뭐이 있냐, 누가 먼저 사람을 죽였냐고 따진 거여."

 
고등학생 시민군 '오월의 사진가' 김향득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 현재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 고등학생 시민군 "오월의 사진가" 김향득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 현재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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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득씨는 국가폭력에 카메라로 맞섰다. 사라져가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지키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지난 2007년, 도청 별관 철거 논란이 불거졌을 때부터 5.18 사적지와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어느 샌가 '오월 사진가'라고 불리게 됐다.

"도청 원형복원 문제를 처음 제기했을 때만 해도 아무도 안 들어줬어. 그때는 단독군장을 꾸려갖고 혼자 돌아다님서 기록했제. 공간이 5.18을 기억하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았으믄 해. 5.18 어머님, 아버지 다들 산 증인인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까 하나하나 기록해야제. 노시는 모습, 힘들어 하는 모습, 그게 다 기록잉께.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내가 죽었으면 유족들처럼 했을 것이여.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겄지만은 아무튼 최대한 기록해야제"

"즈그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하려 했는디..."

그렇다면 김향득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일까. 김향득씨는 김길자 어머님이 5.18 기념행사 전야제에서 거리행진을 하던 때를 떠올렸다.

"2016년께 5.18 전야제 행사 때 (김길자) 어머니가 광주공원에서부터 걸어왔어. 다른 어머니들이랑 하얀 소복에 검은 리본을 달고 오시는데,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더랑께. 저 어머니 한을 누가 풀어드려야 하나, 가슴이 짠했어. 사실 나는 5.18 이후 어버이날에 부모님한테 카네이션을 달아준 적이 없어. 5.18 진상규명 되는 날, 유공자들이 편안한 삶을 누릴 때, 달아드리겠다고 혼자 다짐하고 있는 거여."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씨와 고 문재학 어미니 김길자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로 활동하는 김향득(57)씨가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 "5월 어머니" 모습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 김향득 80년 5월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씨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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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자씨는 사진을 꺼냈다. 서랍 속에 간직해온 아들 사진이었다. 영정사진이 되어버린 중학교 졸업사진과 수학여행 때 친구랑 찍은 사진. 집 앞에서 혼자 찍은 사진 등이 김길자씨 집 거실에 펼쳐졌다. 거기엔 뜻밖의(?) 사진도 있었다.

그건, '인간 사냥'의 증거였다. 김길자씨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5월 27일 촬영한 거라고 했다. 참혹한 현장이었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길 위 곳곳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엎드려 있는 사람들 곁에 등허리에 총을 어슷하게 멘 군인들이 서 있다. 김길자씨는 이 손가락으로 아들을 짚었다.

"여그 있는 애가 우리 재학이여. 밑에 교련복 바지 입고, 위에 카키색 면티 입은 애기. 이렇게 입고 집을 나갔제. (광주) 가톨릭센터에서 사진 전시회를 했는디, 이 사진을 보고 재학이 형이 그라데. '엄마, 재학이 여기 있다'고. 딱 보니까 우리 재학이여. 5.18재단에 부탁해서 사진을 복사했어. 여기 우리 재학이 옆에 누워있는 게 재학이 친구 안종필이고, 그 옆에가 조대부고 3학년 박성룡이여. 종필이네는 아들 '폭도'로 몰리면서 식당 크게 했다가 망했고, 성룡이 엄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

- 국가폭력 피해자로 살아가면서 얻은 후유증 없나요?
"나는 아닌디, 아부지(남편 문건양)가 트라우마센터에서 미술치료 받을 때여. 찰흙을 가지고 집을 만들었는데 울타리고 있고, 집도 큰 거여. 그때 옆에 있던 기자가 아부지한테 물어봤제.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그러니까 아부지가 그라데. 우리 재학이 공부방 하나 못해줘서 공부방도 만들고 그랬다고. 그리고 혹시라도 나쁜 놈들이 또 해칠까봐 울타리도 쳤다고. 짠하데." (김길자씨)

"사진을 찍다봉께 가기 힘든 공간은 없는디, 습한 곳에 가면 고문 받았던 때가 생각나. 505보안부대, 도청 민원실 지하, 국군통합병원 소각장... 이런 곳에 가면 그때 기억이 떠올라." (김향득씨)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남의 자식 죽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제. 말로 천냥 빚 갚는다고 하는디. 전두환이는 29만원 밖에 없담서 골프 치러 다니고, (자유) 한국당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의원이랑 지만원이는 '괴물집단이네', '북한군 있었다' 이런 소리하는데, 자기 자식들도 그런 정부에서 죽어봐야 우리 속을 알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당께. 진짜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사회에서 멸종시켜브러야 돼.

우리도 사람이라고 즈그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할 수 있제.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는 그렇게 못하지. 아부지(남편 문건양)가 아파서 병원에 있어서 그렇지 이런 식이면 다시 (거리로) 나가야제. 진상규명 되는 거 꼭 보고 죽어야제. 그리고 향득이, 고문 받아서 오지게 고생하고 사는디, 그라지만 살아야지. 그렇게라도 살아야지. 난 우리 재학이도 어떻게든 살아있었으면 좋겠어." (김길자씨)

"우리 어머니도 좀 더 건강하셔서 좋은 세상 보셨으믄 좋겄어요. 진상규명 되는 날 올 때까지 저도 노력할랍니다." (김향득씨)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인터뷰 장소였던 김길자씨 집 거실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5.18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는 출범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가 자유한국당에 조사위원을 다시 추천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재추천을 하지 않고 있다.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어머니와 김향득씨 5.18민주화운동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와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
▲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선 고 문재학씨 어머니 김길자(80)씨와 김향득(57)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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