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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가 알고도 안 막은 45cm 틈…하청 노동자를 죽였다

“생산 라인 세우면 누가 책임지나” 위험 감수하며 작업하던 외주업체 직원 협착사...전형적인 ‘위험의 외주화’

홍민철·강석영 기자
발행 2021-01-05 18:28:20
수정 2021-01-06 08: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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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생산 라인을 정비하던 외주업체 노동자가 압축 기계에 상반신이 끼여 목숨을 잃었다. 압착 사고 위험이 상존하는 ‘A급 위험작업’이었지만, ‘라인을 멈추면 손해가 막심하다’는 경제 논리 앞에 위험을 감수하던 50대 하청 노동자는 결국 지난 3일 세상을 떠났다.

사고는 어디서 발생했나

사고가 발생한 곳은 철판을 압축해 차체 부품을 만드는 프레스 공정이다. 넓은 철판을 필요한 모양으로 눌러 구부리고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낸다. 잘린 철판 찌꺼기는 3~4m 아래에 있는 컨베이어벨트로 떨어진다. 철판 찌꺼기 크기는 다양하다. 손바닥만 한 철판이 있는가 하면 폭 5cm 길이 1m 이상 되는 대형 조각도 있다. ‘타당’ ‘우당탕’ 컨베이어벨트에 쉼없이 떨어지는 쇠붙이 소리에, 고함을 쳐도 바로 옆 사람과 대화하기 힘들다는 것이 현장 노동자들의 설명이다.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동한 철판 찌꺼기는 베일러머신이라 불리는 압축기에 들어간다. 압축기는 모인 철판을 블록 형태로 압착해 배출한다. 대형 압축기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철판 찌꺼기 부피를 줄인다. 전면에는 압축기가 과도하게 내려오지 않도록 막는 원기둥 두개가 있다. 압축기와 원기동 사이에는 40~50cm가량의 틈이 있는데 이 틈에 완전히 압축되지 않은 철판 찌꺼기가 쌓이곤 한다. 고인은 이 찌꺼기를 제거하려다 압축기와 원기둥 사이에 몸이 끼이면서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 현장을 처음 목격한 동료는 “압축기 스토퍼(원기둥) 옆에 고인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압축기 전면에 설치된 안전 철문. 문이 열리면 전원이 차단되면서 압축기가 멈춘다.
압축기 전면에 설치된 안전 철문. 문이 열리면 전원이 차단되면서 압축기가 멈춘다.ⓒ민중의소리
압축기 안전 문 뒷편 45cm 가량의 공간. 현대차 하청 노동자 사망 사고가 발생한 곳이다
압축기 안전 문 뒷편 45cm 가량의 공간. 현대차 하청 노동자 사망 사고가 발생한 곳이다ⓒ민중의소리
압축된 철판 찌꺼기들이 큐브 형태로 배출되고 있다.
압축된 철판 찌꺼기들이 큐브 형태로 배출되고 있다.ⓒ민중의소리

안전조치, 제대로 진행됐나

 

원청인 현대자동차도 위험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현대차가 외주업체에 발급한 ‘안전작업허가서’를 보면, 사고가 발생한 작업은 최고 위험 등급인 A등급이었다. 허가서엔 추락·누전 등과 함께 협착이 주요 위험요인이라고 명시됐다. 현대차가 작성한 ‘위험성평가표’에도 ‘보수·점검시 동력차단을 하지 않을 경우 협착·충돌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평가표는 안전 대책으로 ‘동력을 차단하고 조작 스위치를 잠가야 한다(Lock out/tag out)’고 권고했으나 현장에선 지켜지지 않았다.

외주업체 관계자는 “동력을 차단한다는 말은 라인을 세운다는 뜻인데, 지금껏 단 한 번도 우리 작업 때문에 라인을 세운 적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1분 50초마다 차가 한 대씩 생산되는데, 우리가 보수한다고 라인을 20분 멈추면 그 손해를 누가 어떻게 감당하나. 라인 정지 요청은 엄두도 못 낼 일”이라고 토로했다. 손해를 우려해 인명 피해를 강요하는 전형적인 ‘위험의 외주화’다.

사고가 발생한 압축기계 앞에도 긴급 안전장치는 있었다. 수리를 위해 작업자가 진입하는 노란 철문에는 감지기가 달려 있다. 작업자가 문을 열면 전원이 자동으로 차단되면서 동작을 멈춘다. 혹시나 모를 압착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장치다. 하지만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전원이 차단되면 라인이 멈추고 손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노동자들은 알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안전장치가 달린 문으로 출입하지 못했다. 대신 문 옆에 난 45cm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작업했다. 작업 내내 압축기는 쉴새 없이 오르내렸다.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라인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은 작업자도 외주업체에도 없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작업했다. 사고가 난 김모씨는 이 틈에서 작업 하다 상반신이 기계에 끼어 변을 당했다.

외주업체에선 안전 펜스로 틈을 막아야 한다고 여러차례 건의했다. 원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주업체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개인 과실로 묻히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2인1조 작업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주장도 나왔다. 현대차 울산비정규직지회 관계자는 “2017년 외주화 이전에는 2인 1조로 했던 업무였는데, 외주화 되면서 비용 때문에 수칙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금속노조는 “안전 의무를 지키지 않은 채 위험천만한 작업으로 노동자를 내몬 현대차의 살인행위”라고 비판했다.

금속노조가 공개한 현대자동차의 안전 작업허가서. 위험등급이 A등급이고 추락, 협착 등의 주요 위험요인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금속노조가 공개한 현대자동차의 안전 작업허가서. 위험등급이 A등급이고 추락, 협착 등의 주요 위험요인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제공 : 금속노조

작업은 왜 시작됐나

작업이 시작된 이유도 석연치 않다. ‘민중의소리’가 확보한 통화 녹음에 따르면 사고 당일 오후 12시40분께 외주업체 간부는 “안전쪽 중역들(현대자동차 울산공장소속 임원)이 작업 확인을 나온다고 하네, 그 전에 지저분한거 정리좀 해달라”고 지시한다. 작업자는 “어제 엄청 치워 놓았다”고 말했지만 관리자는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사람들 오기 전에 정리 부탁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지시를 받은 작업자들은 오후 1시경 현장으로 향했고, 30분 뒤 고인은 쓰러진 채 발견됐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관계자는 “대대장 온다니 닦았던 곳 또 닦으려다 끔직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와 정규직 노동조합은 안전교육실시, 재해예방 전문 요원 배치, 관련 임원 징계 등 재발방지 대책에 합의했지만, 안전펜스 설치가 합의에 포함 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은 지난 4일 신년사에서 “진심으로 깊은 애도를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안전한 환경조성과 안전사고 예방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짤막한 입장을 내놨다.

홍민철·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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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이란 긴장 고조 와중에 한국 선박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

외교부 "청해부대 즉각 출동...이란에 조기 억류 해제 요청 중"

아랍에미리트(UAE)로 향하던 한국 국적의 케미컬 운반선(석유 화학제품 운반선)이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이란의 혁명수비대에 의해 나포됐다. 정부는 사실을 확인하고 선박의 조기 억류 해제를 이란 측에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4일 외교부는 "이날 오후(현지 시각) 호르무즈 해협의 오만 인근 해역에서 항해 중이던 우리 국적 선박(케미컬 운반선) 1척이 이란 당국의 조사 요청에 따라 이란 해역으로 이동 중인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외교부에 따르면 해당 선박에는 20명의 선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중 한국 국적 선원은 5명이며 나머지는 각각 미얀마 11명, 인도네시아 2명, 베트남 2명의 선원이 탑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들은 이란 남부의 항구 도시인 반다르아바스에 구금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는 "외교부와 주이란 대사관은 선박 억류 관련 상세 상황 파악과 함께 선원 안전을 확인하고 선박 조기 억류 해제를 요청 중"이라며 "현재 청해부대(최영함)가 사고 해역으로 이동 중이며 인근 해역을 항해 중인 우리 선박에 대해 안전조치를 취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국방부는 "이란에 의한 우리 선박 억류 상황을 접수한 직후 청해부대를 즉각 호르무즈 해협 인근 해역으로 출동시켰다"며 "외교부, 해수부 등 유관부서 및 다국적군과 긴밀히 협조하여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영함은 5일 오전 작전 해상에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 한국 국적 케미컬 운반선이 4일(현지 시각) 호르무즈 해협 오만 인근 해역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 의해 나포됐다. ⓒ연합뉴스

앞서 이란 혁명수비대 측은 성명을 통해 이날 오전 10시경(현지 시각) 걸프해역(페르시아만)에서 한국 선박을 나포했다며, 해당 선박이 해양 환경 규제를 반복적으로 어긴 데에 따른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밝혔다.

 

혁명수비대는 "선박 나포는 호르무즈 주 검찰과 항만청의 요구에 의한 것이며 이번 사건은 사법 당국이 다루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들은 또 해당 선박에 7200톤의 화학 물질이 담겨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해당 선박의 선사인 디엠쉽핑(DM Shipping)은 선박과 혁명수비대가 접촉했던 해역은 공해상이었다면서, 소속 선박은 환경오염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이번 선박 나포가 이란과 미국 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 속에 발생함에 따라, 향후 사건 추이를 두고 긴장감이 높아질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최근 이란 내부에서는 미군의 공격으로 숨진 거셈 솔레이마니 전 쿠드스군(혁명수비대 정예군) 사령관의 1주기를 맞아 반미 분위기가 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세인 살라미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은 지난 2일(현지 시각) 군에 강력하고 단호한 대응을 주문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핵 추진 항공모함과 핵 잠수함 등을 페르시아만 인근에 배치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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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님, “적대를 청산하는 큰 뜻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21년 수형생활 장기수 오기태의 망향곡

  • 기자명 민병래 작가
  •  
  •  승인 2021.01.04 12:39
  •  
  •  댓글 0
    •  
  • <h4 class="subheading"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 0px 0px 1.875rem; padding: 0px 0px 0px 0.75rem; font-weight: bolder; text-rendering: optimizelegibility; line-height: 1.25; font-size: 1.25rem; letter-spacing: -0.075em; border-left: 3px solid rgb(174, 174, 174); word-break: normal; overflow-wrap: break-word;">21년 수형생활 장기수 오기태의 망향곡</h4>
 
 
 
▲ 오기태 선생

오기태는 잠을 설치다가 몸을 일으켰다. 새벽 2시, 사방이 깜깜하다. 동생 조상이는 어제 일이 고되었는지 이불을 저만치 밀어내고 곤하게 잔다. 오기태는 이불을 덮어주고 그의 손을 잡아보았다. 거칠고 팍팍하다.
 
오기태가 1930년생이고 조상이가 50년생이니 올해 90세와 70세, 두 사람은 북에서 남파되었다가 전주교도소에서 처음 만났다. 1989년 12월 24일 같이 출소했고 2000년부터는 전주 평화동 주공아파트에서 20년을 함께 살고 있으니 특별한 인연이다.
 
오기태는 오른쪽으로 굽은 허리를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쓰겠다고 마음 먹은 지 벌써 한 달. 눈은 컴컴하고 손마디는 힘이 없어 글씨는 엉망이었다. 컴퓨터를 들여 자판 연습을 해보다가 하루 만에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볼펜을 잡고 여러 날 동안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오늘은 어떻게든 마무리 지을 참이다. 갑자기 새된 기침이 나온다. 그는 조상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소리를 낮추고 휴지를 입에 갔다 댔다. 그리고 첫 줄을 적었다.

 대통령님께 부탁드립니다. 제 나이 올해 구십입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죽기 전에 북녘땅,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오기태는 노동당 문화부의 소환을 받고 남파되었다. 1969년 7월 황해도 해주에서 달빛을 안고 내려와 전남 장흥의 수문리 해안가에 닿았다. 그날 밤은 야산에서 남해 바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몸을 뉘였다. 다음 날 일찍, 전남대 출신의 조장 이봉로와 함께 기차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 달간 노동자와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임무였다.
 
오기태는 광주 대인동 근처 여인숙에 숙소를 잡고 일당 잡부로 건설 현장에 나갔다. 노동자들과 담배를 나눠 피며 "내 고향은 신안군 임자도요"라고 통성명을 했고 국밥집에서 대포 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일요일에는 이봉로 조장과 전남대 앞 서점에 들러 책도 사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금세 다가온 9월 하순의 귀환 날, 오기태는 해가 졌을 때 장흥군 월암리 바닷가에서 땅굴을 팠다. 무전기를 켜고 접선을 시도하려는 참에 "동무, 마을에 가서 담배 한 갑 싸게 사 오겠소"하며 조장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검은 바닷가에는 달빛을 실은 파도가 밀려왔다가 잔 물방울을 뿌려댔다. 사위는 물소리와 간혹 꾸룩대는 기러기 소리뿐이었다. 무전을 쳐야 할 시간이 넘었는데 조장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기태가 마을 쪽 어둠을 근심스레 바라볼 때 정적을 깨는 총성이 한 발, 곧이어 대여섯 발이 '드드드' 울렸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바닷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오기태는 무전기를 집어 들고 땅굴에서 솟구쳐 나왔다. 지금 가까운 보성역으로 서둘러 가면 경전선 새벽 첫차를 탈 수 있다. 만일에 대비했던 계획이 현실이 될 줄이야...
 
오기태가 가까스로 순천행 기차에 올랐을 때에서야 역전 마당에 호루라기가 울리고 경찰이 경계망을 펼쳤다. 그는 순천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2차 접선지인 부산 형제 바위로 갔다. 여기서도 접선에 실패한 그는 3차 장소인 광주로 되돌아왔다.
 
예전 여인숙에 행장을 풀었을 때, 그는 월암리 바닷가에서부터 일주일이나 옷을 갈아입지 못해 상거지 꼴이었다. 몇 시간 뒤 나타난 경찰 서너 명이 그를 에워쌌고 그날로 그는 서울 대방동 미군첩보부대로 이송되었다. 총상을 입고 치료받던 이봉로 조장도 거기서 다시 만났다. 그때는 몰랐다. 이 날이 길고 긴 징역생활의 첫째 날이 될 줄은...

▲ 오기태 선생
▲ 오기태 선생

오기태는 눈을 비비며 다음 문장을 썼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89년 12월 24일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21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일본놈 앞잡이처럼 민족을 팔아먹지 않았습니다. 살인을 한 흉악범도 아닙니다. 나는 분단된 땅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내려왔을 뿐입니다. 남쪽에 와서 노동자와 학생들을 만나 조직사업을 했으나 불과 2개월, 그저 이름 석자 주고 받고 친분을 나눈 정도입니다. 과연 20년 넘게 징역을 살아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건가요?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충분한 댓가를 치루지 않았나요? 

어렵게 한 자 한 자 써가던 오기태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는 2005년 급성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에서 두 달이나 있었다. 가까스로 회복이 되었지만 그 후 목소리는 새되졌고 마른 기침을 달고 살았다. 창문에는 한밤중의 한기가 달라붙어 성에를 수놓았고 그 위로 달빛이 실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오기태는 기침을 억누르고 다시 펜을 들었다.

 2000년 9월 장기수들이 송환될 때, 이 사람은 ‘전향’을 했다고 제외되었습니다. 정녕 그 실상을 모르는 겁니까? 전주교도소에서 있을 때 간수들은 한 겨울에 열두 명을 한 평도 안 되는 방에 몰아넣고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얼음칼이 옆구리를 찌르고 등 뒤로는 무수한 바늘이 파고드는 듯했습니다. 입이 쩍쩍 벌어지고 우리는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돌아온 건 비웃음과 찬물세례, 구두발자국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내 허벅지에 전선줄이 감겼고 땅바닥에 내평개쳐진 물고기 마냥 살점이 퍼덕거렸습니다. 전주교도소의 전향은 이런 고문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미 수없이 증언한 이야기들이고 나는 2001년 내 양심에 따라 ‘강제전향무효’ 선언을 한 바 있습니다.

오기태는 다시 옆구리를 쥐었다. 급성폐렴으로 사경을 헤맨 지 얼마 안되어 2008년 대장암이 발견되었다. 나이 팔순이 가까워 얻은 큰 병이었다. 가까스로 치료는 되었지만 그 후로 설사와 변비가 되풀이 되었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동네 학산을 오르내렸건만, 올해는 설사기가 심해져 이마저 그만두었다. 새벽이면 통증이 찾아오는 횟수가 늘었다. 오기태는 배를 어루만지며 잠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창가에는 여전히 어둠이 웅크리고 새벽 햇살을 가로막았다.  

오기태의 집은 9평 임대주택, 방·거실·부엌이 모두 하나다. 부엌 옆에는 손마디 같은 복도와 손뼘 같은 화장실이 전부다. 그나마 요런 임대주택이라도 있었기에 오기태와 조상이는 숨 쉬고 살았다.

89년 출소 후 오기태는 신원보증을 섰던 전주 남문화방 사장 밑에서 먹고 자며 일을 했다. 교도소 목공반에 있었던 그는 표구와 액자 일을 잘했다. 주변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들어왔냐”“할 정도로 성실하게 일을 했고 상점과 창고 등 열쇠 다섯 개를 도맡아서 관리했다.

하지만 IMF로 남문화방은 문을 닫았고 오기태는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 ‘나눔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살면서 그는 영세민들과 노숙자를 위해서 밥 짓는 일을 하고 상담 일을 맡았다. 어떤 신용불량자는 오기태에게 ”회장님 저 100만 원만 빌려주세요”라고 손을 벌렸다. 주방 아주머니도 “삼촌 30만 원만 꿔주세요”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오기태는 쉼터에서 받은 월급으로 이런 부탁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당시 전주에는 열 명 정도의 출소장기수들이 있었다. 오기태가 있는 쉼터는 이들에게 사랑방이었다. 와서 점심도 먹고, 안부도 물을 수 있는...그 무렵, 다행히 임대아파트가 배정되었고 쉼터를 나와 평화동으로 오게 된 것이다. 출소 후 두 번이나 결혼사기를 당했던 조상이도 오기태의 임대아파트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두 장기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조상이가 교도소에서 건축 1급 메달을 딸 정도로 실력이 있어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임대아파트 관리비래야 한 달 5만 원 안쪽이었고 두 노인네 쓰임새는 담배 한 갑 정도였다. 

▲ 오기태 선생
▲ 오기태 선생

오기태는 책상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 다시 볼펜을 잡았다. 

 저는 89년 12월 24일 출소해서 제일 먼저 고향 임자도엘 갔습니다. 아버지는 총살당하고 형님은 조계산 어느 골짜기에선가 숨졌다고 누이 동생이 일러주더군요. 고맙게도 임자도 초등학교 동창들이 아버지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저는 선산에 가서 아버님께 술잔을 올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총 맞아 돌아가신 그 한이 눈을 감으시고서라도 풀렸을까요? 
아버님 눈에 임자도 푸른 물이 핏빛으로 일렁거렸을 것이고 바다 갈매기는 시체 위를 떠도는 독수리 떼처럼 보였을 겁니다. 분단은 우리 가족에게 큰 한과 아픔을 주었습니다. 상처를 삭히기 쉽지 않았습니다. 

오기태는 1950년 전쟁이 일어나면서 빨치산이었던 형의 권유로 인민군에 입대했다. 목포에서 남해여단에 편입되어 낙동간 전선으로 가려던 차에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했다. 그는 여단을 따라 목포, 장흥, 지리산, 오대산을 거쳐 강원도 양양으로 후퇴했다. 여기서 인민군 2군단 9사단 32연대로 소속이 바뀌었다. 이때가 10월 말이었다. 당시 32연대는 국군 대대장 출신으로 대대병력 전체를 데리고 월북한 강태무였다. 32연대의 주요임무는 금강산 일대에서 미군의 남쪽 퇴로를 막는 것이었다. 

50년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이 개마고원의 장진호까지 전진했다. 10월 25일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 제 9병단의 3개 군단이 장진호 일대에 집결해서 이들에 대한 포위 공격에 들어가자 미군은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전황은 압록강 방면도 마찬가지여서 11월 30일 맥아더는 모든 전선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오기태가 속한 32연대는 이들의 퇴각 길목을 막으며 원산으로 진공했다. 원산항이 막히자 미군은 흥남항을 택해 12월 15일부터 ‘흥남 철수’를 시작했다. 

오기태는 참전 후 이곳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치렀다. 51년 여름에는 장티푸스에 걸려 큰 고생을 했다. 고열에 시달리며 6개월간 생사를 넘나들었다. 어렵게 회복한 그는 전방에 있을 때 노동당에 화선입당을 했다. 1953년 7월 27일 그는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에서 정전협정을 맞았다. 이후 4년간 복무를 더하고 1957년 중사로 제대해 함경북도 온성에 있는 탄광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북은 1차 5개년계획(1957~1961)에 따라 중공업 부문에 청년들을 집중배치했었다. 

그는 온성 탄광에서 근무한 지 얼마 안 되어 탄광지도원으로 승진했다. 1959년 초에는 청진 공산대학에 입학해 당의 정강 정책, 항일유격투쟁사들을 배웠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온성군 인민위원회 상업 검열국으로 배치받아 상점들의 부정행위들을 단속했다. 그 후 국토청 토지관리지도위원이 되어 온성군 내 토지, 산림 실태를 조사했다. 

이래저래 온성에서 일을 하던 오기태는 1959년, 군수방직공장에 다니던 김외식을 만나 혼례를 치렀다. 3남매를 낳고 막내가 아내 뱃속에 있을 때 문화부의 소환을 받았다. 그 후 6개월간 야간행군, 태권도, 무전기 사용법을 훈련받고 이봉로 조장과 함께 내려 왔다 귀환 길에 체포된 것이다.

▲ 오기태 선생
▲ 오기태 선생

새벽 4시에 예약 취사를 한 전기밥솥에서 쉬쉬 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새벽일 나가는 조상이의 아침상을 차려줘야 한다. 오기태는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일어났다. 청국장을 끓이고 겨울 시금치를 무쳤다. 후라이팬을 달궈 꽁치도 올렸다. 맛나게 먹이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선가 간을 맞추는 게 힘들어져 속상할 때가 많다. 요즘 들어 그를 보면 안쓰럽다. 칠십이 넘은 나인데 공사장 일을 나가고 전주에서 대전 유성까지 그 먼 길을 다니니... 오기태는 그를 깨우려다 조금 더 자게 놔뒀다. 밥상 준비를 얼추 마친 그는 책상에 앉아 다시 펜을 잡았다.

 대통령님, 2018년 평양 능라동 경기장에서 하셨던 감동적인 연설을 기억합니다. 온 겨레가 가슴 벅차게 들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더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히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사무치게 와 닿았습니다. 

오기태는 ‘닿았습니다’에 구두점을 찍고 다시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사실 오기태는 1차 송환이 좌절되자 혼자 온성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다. 2004년부터 여러 번 연변 조선족 자치구로 넘어가서 온성군이 마주 보이는 도문(圖們)시 쪽으로 이동했다. 어찌어찌 중국 공안과도 선을 연결해 가족들의 생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신통한 결과가 없자 그는 두만강을 그냥 건너가려 했다. 강만 건너면 바로 온성이고 그는 10여 년 이상 그곳에 근무했기에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너갈 수 있는 길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기태는 발걸음을 거두었다. 그는 판문점을 통해서 동료 장기수들과 함께 당당히 돌아가고 싶었다. 그게 올바른 길이고 다른 장기수들에 대한 도리라고 여겨졌다. 포기하고 연변에서 전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이 안개비처럼 고이고 가슴에는 검은 비가 흘렀다. 그러면서 늙은 몸은 오른 쪽으로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오기태의 기침이 더욱 심해지더니 오장육부를 게워낼 듯 소리마저 커졌다. 휴지를 급히 뜯어 입을 막았는데도 피가 한 움큼 쏟아진다. 기침을 할 때마다 오줌이 조금씩 새어 나와 속옷 마저 축축하다. 오기태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제 몇 줄만 더 쓰면 된다. 얼른 마무리하고 새벽밥 먹여서 조상이를 출근시켜야 한다. 

쿡 쿡 찌르는 배를 움켜잡고 기침을 억누르며 다시 볼펜을 꽉 쥐었다. 

 저는 부탁드립니다. 적대를 청산하는 큰 뜻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2차 송환을 간절히 바라는 어느덧 구순을 넘나드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둘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7월에도 강담선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두화 선생을 비롯 여러 동지들이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올해 구십 살인 나도 오늘,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2차 송환을 바라는 우리들을 보내주는 일은 평화를 위한 중요한 걸음입니다. 615선언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미국놈들 눈치 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할 수 있는 일, 대통령님이 결심하면 할 수 있는 일조차 늦추면 안됩니다. 우리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창문으로 슬그머니 어둠을 뚫고 달빛이 들어왔다. 조각같은 그 빛은 오기태가 벽에 붙여놓은 두 장의 사진을 비췄다. 한 장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이 평양순안공항에서 악수하는 장면이고 나머지 한 장은 2018년 백두산 천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이 두 손을 잡고 하늘로 치켜올린 장면이다. 

오기태는 두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침이 계속되었다. 고개가 자꾸 떨궈지고 눈마저  감긴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니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쓰러질 듯 다시 책상에 앉았다.  감기는 눈을 치뜨고 떨궈지는 고개를 가누며 마지막 줄을 써내려갔다. 

 죽기 전에 아내 김외숙과 춘자, 정자, 성일 그리고 이름조차 모르는 막내를 죽기 전에. 죽기 전에...

마지막 구절을 남겨두고 그의 손에서 볼펜이 툭 떨어졌다. 동시에 고개가 푹 책상으로 떨궈졌다. 기침과 숨이 가느다랗게 몇 번 이어지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오기태의 눈은 어느새 감겨버렸다. 시계는 3시 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오기태 선생 추도식 [사진 : 통일뉴스]
▲ 오기태 선생 추도식 [사진 : 통일뉴스]

<못다한 이야기> 

⓵ 오기태선생은 2020년 12월 4일 필자에게 생애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날 힘주어 문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올릴 것이고 그 요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청원서를 올렸는데도 2021년까지 송환이 안 되면 연변을 통해 온성으로 가서, 죽기 전에 가족을 만나겠다고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는 생애 구술 삼일 후인 새벽 4시에 숨졌습니다. 

⓶ 이 글에서 흥남철수 부분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간)을 참고했습니다. 

③ 아래 추모시는 정충식_전농 전북도연맹 정책위원장이 오기태 선생을 추모하며 남긴 시다. 

오기태 선생님을 추모하며

새벽 4시에
당신은 
북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농사짓던 땅
아이들의 살 내음
부인이 초가 살 밖에서 부르던 소리 담아오면
잠 못 이루고 일어났지
간수가 휘두르면 살덩이 떨어져 나오던 매질
의지를 꺾으려 육신을 가두었던 
독방의 쇠창살도 막지 못했지

버스 타면 한나절
기차 타면 반나절
갈 수만 있다면 기어서라도 갔을 
그러나 기어이 당신의 걸음으로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고 
의연히 걸어가고자 했던
해가 갈수록 사무치게 잠을 깨우던 그 시간

당신의 몸이 
북녘에 있을 때도 
그리움은 남녘의 바다 고향
회귀하는 민어를 품은 임자도 너른 물결따라 
뜨겁게 심장이 뛰었으니 
처자식을 뒤로 하고 내려왔었을 당신
당신이 사랑했던 조국은
당신에게 얼마나 무거운 짐을 안겼는지
이제
누구에게 물어보고 대답하지 못해도 돌아보리다

남아있는 자들이
슬픔을 머금고 
모여
오늘 이제야 북녘으로 
마지막 통일의 배 띄우네

철새의 날갯짓이 부러워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을
당신의 숨결을 싣고
얼어붙은 통일광장의 매운 먼지마저 삭삭 털어 담아
미련하도록 깊고 컸던 조국 사랑의 의지까지 
남김없이

영원히 안기고 싶었던
새벽 한기마저 따습게 데우는 아궁이 연기 피어오르는
꿈에 그리던 당신의 땅으로 훨훨
세상에 나온 것은 천명이었지만
기꺼이 고난의 운명을 선택하여
깃발처럼 펄럭이며
살았던 시대마저 태우고

님이여

당신이 떠났던 자리 뒤로
한겨울 추위를 물리며 꽃이 필 것이외다
통일의 꽃
해방의 꽃

눈물 대신에
뜨거운 심장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마다
다시는 마르거나 시들지 않을 꽃이 되어
남녘의 한라부터 북녘 백두산 골짜기까지
해마다 계절 구분 없이 
되살아나 필 것이외다
당신의 걸음마다 뿌린
씨앗이 
뿌리를 뻗고 땅의 숨통을 틔웠으니 
본디 
하나였던 반도
하나의 하늘 아래서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민중의 땅에서 영영 필 것이외다

                                                                                                                     

민병래 작가

1999년에 광고대행사 ‘황소와 나비’를 창업하여 현재까지 운영중이다. 1998년부터 문해교실과 다문화도서관을 운영하는 시민단체 ‘푸른’의 이사를 맡고 있고 2000년에 <호암미술관에 있는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파란자전거 출판)을 썼다. 2015년부터 군함도의 작가 이재갑 사진가와 함께 생각하는 사진모임 '포피엔스'에서 활동하고 있고 2017년 공동전시 ‘마포, 사진을 품다’에 참여한 바 있다. '오마이뉴스에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사수만보>를 2019년부터 연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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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은 2인자인가, 후계자인가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북한의 후계자 세습 공식에 대입해 보면

21.01.04 21:57l최종 업데이트 21.01.04 21:57l
김정은 국무위원장 방명록 작성 돕는 김여정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김 위원장 동생인 김여정 부부장이 준비해온 펜을 전달하고 있다.
▲ 김정은 국무위원장 방명록 작성 돕는 김여정 2018년 4월 27일 2018 남북정상회 당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 김 위원장 동생인 김여정 부부장이 준비해온 펜을 전달하고 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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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1월 초로 예정돼 있는 노동당 제8차 당대회에서 김여정의 입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관측도 제기된다. 

김여정은 노동당 제1부부장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훨씬 뛰어넘는 위치에 이미 도달했다. 그가 행사하는 권한이 그의 실질적 위상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해 3월 3일에는 김여정 명의의 대남 담화가 나왔다. 담화에서 그는 "불에 놀라면 부지깽이만 보아도 놀란다고 하였다"며 "어제 진행된 인민군 전선 포병들의 화력전투훈련에 대한 남조선 청와대의 반응이 그렇다"고 한 뒤 '나는'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나는 남측도 합동군사연습을 꽤 즐기는 편으로 알고 있으며 첨단 군사장비를 사오는데도 열을 올리는 등 꼴보기 싫은 놀음은 다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같은 달 22일엔 김여정 명의로 대미 담화도 발표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내 코로나19 방역과 관련된 협력 의사를 밝혔다는 점 등을 언급한 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을 거론했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다면 두 수뇌들 사이의 친서가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 력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평형이 유지되고 공정성이 보장되여야 두 나라 관계와 그를 위한 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식 담화에 '나는'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다면'
 
 북측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10일 오후 강원도 강릉 관동하키센터에서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대 스위스 관전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다.
▲  북측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사진은 2018년 2월 10일 오후 강원도 강릉 관동하키센터에서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대 스위스 관전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는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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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1인의 권위가 절대적인 북한 체제에서, 김여정은 '나는'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다면'과 같은 표현을 공식 문건에 사용했다. 이는 김정은의 신임이 매우 두터움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지위가 김정은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돼 있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최고 권력이 동일 혈통에서 2대나 3대째 승계되면, 그 가문은 남다른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공식적인 정권 핵심부와 더불어 지도자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권력 분배에 간여할 여지가 넓어진다. 그래서 김일성 가문 사람들이 김정은의 건강이나 자녀 나이 등을 고려해 김여정에게도 힘을 실어준 결과로 '나는' '개인적인 생각' 같은 표현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김여정은 김정은과의 공식 동행을 통해서도 위상을 드러낸다. 2019년 8월에는 초대형 방사포 시험발사 현장에서 김정은을 수행했고, 2020년 3월에는 전술유도무기 시범사격 현장에서 김정은을 수행했다. 정치국 후보위원이나 노동당 제1부부장 같은 공식 직함과 관계없이 이미 2인자 지위를 확보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런데 그의 2인자 지위가 곧바로 후계자 지위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2인자에 더해 후계자 지위까지 확보했는지를 판단할 때는 두 가지 선례를 참고할 만하다.

그동안 북한이 후계자를 띄운 방식

북한은 세습이 사실상 두 번이나 일어났지만 '공식적'으로는 세습이 용인되지 않는 국가다. 북한 헌법과 노동당 규약 내에서 김일성·김정일이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은 공식적으로 인민공화국의 국체를 띠고 있다. 2019년 8월 개정된 북한 헌법 제4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지식인을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일어난 두 차례 권력 승계는 그런 구도를 반영했다. '법적으로 세습 불허, 사실상 세습 허용'이라는 이 구도에 맞게 김일성의 권력이 김정일에게 승계되고 김정일의 권력이 김정은에게 승계됐다.

세습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에서는 후계자에게 태자나 세자 같은 지위를 부여한다. 이런 지위를 받은 후계자들은 국정에 개입하지 않고 공부나 자기수양에만 전념해도 된다. 이런 유형의 후계자들은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가 잦다. 세습이 인정되는 국가에서는 그렇게 하고도 후계자 지위를 안정시킬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은 그런 방법으로는 후계자 지위를 안정시키기 힘들다. '내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지도자의 언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법적인 후계자 지위가 없기 때문에, 그런 언명만 갖고는 지도자의 사후에 후계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북한이 그동안 사용해온 방식은 후계자에게 실질적 국가권력의 상당부분이 넘어갔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누구도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후계자의 양 어깨에 실질적 권력을 얹어주는 방식을 사용했다.

남한에서 박정희 유신체제가 등장한 1972년 4사분기에 북한에서는 김일성 유일체제가 확립됐다. 그런 뒤에 북에서는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 작업이 전개됐다. 1972년 10월에는 김정일이 노동당 중앙위원이 되고 1973년 7월에는 당 중앙위원회 부장이 됐다. 같은 해 9월엔 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가 됐다. 그리고 1974년 2월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이 되면서 '김심'이 김정일에게 있음이 확인됐다.

하지만 그것은 내부적인 후계자 공인에 그쳤다. 북한은 그후 6년간 김정일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문에 1974년 11월 남한에서는 도쿄 국제의원연맹(IPU) 총회에 김정일이 참석했다는 오보까지 나왔다. 1974년 11월 18일 치 <경향신문> 기사 '북괴 김정일 동경에'는 김정일이 이종혁이란 가명으로 총회에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기사 사진 속의 이종혁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외교관 리종혁과 비슷했다. 리종혁이 IPU 총회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당시에는 김정일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오보가 나왔다.

북이 김정일 후계 작업을 내부적으로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명시한 시점은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 때였다. 김정일의 얼굴이 남한과 국제사회에 알려진 것은 이때부터다. 이 해에 김정일은 묵직한 포스트를 받았다. 그는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노동당 비서국 비서, 노동당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이었다.

이종석 통일부장관이 쓴 <북한의 역사 2>는 "조선노동당 총비서인 수령 김일성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정치국·비서국·군사위원회라는 당내 3대 권력기구에 모두 선출된 것"이라며 "당시 김정일의 당 중앙위원회 공식 서열은 김일성·김일·오진우에 이은 4위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가 2인자임이 확실했다"라고 짚었다.

1974년에는 정치위원에 임명되면서 '김심'의 향방이 확인됐고, 1980년에는 노동당 3대 기구 지도부에 진입함에 따라 국가권력의 상당부분이 김정일에게 넘어갔다는 점이 확인됐다. 김정일이 군사위원 직까지 차지하면서 그의 후계자 지위는 국내외적으로 공고해졌다.

국가권력을 넘기는 방식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오전 8시30분 과로로 열차에서 사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사진은 지난 9월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노농적위대 열병식 모습. 김 위원장과 김정은이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2011.12.19
▲  2011년 9월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노농적위대 열병식 모습. 김정일-김정은 부자가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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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2009년부터 김정은 후계 작업이 진행될 때도 유사 현상이 나타났다. 그해 1월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은은 2010년 9월 인민군 대장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면서 명확한 후계자 지위에 올랐다. 군사권을 비롯한 국가권력 상당부분을 김정은에게 넘기는 방법으로 지위를 명백히 했던 것이다.

1980년에 김정일이 차지한 포스트보다 2010년에 김정은이 차지한 포스트가 훨씬 묵직했던 것은 상황의 긴급성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의 김일성 건강과 2010년의 김정일 건강이 확연히 달랐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두 가지 선례는 김정은의 후계자를 공식화할 때도 되풀이 될 수 있다. 김정은의 권력이 새로운 인물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사 조치가 그 신호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재의 김여정은 2인자 지위는 분명히 확보했지만, 1980년 김정일이나 2010년 김정은에는 아직 근접하지 못했다. 1974년 김정일에도 접근했다고 보기 힘들다. 국가권력의 상당부분이 김여정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증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현재 지위는 2인자일 뿐, 후계자는 아니다. 

현재는 2인자일 뿐
 
김여정, 김일성 사망 25주기 중앙추모대회서 주석단 착석 조선중앙TV는 8일 평양체육관에서 이날 열린 김일성 주석 사망 25주기 중앙추모대회를 녹화중계했다. 사진은 중앙TV가 공개한 것으로 김여정 당 제1부부장(가운데)이 리수용 부위원장(왼쪽), 최휘 부위원장(오른쪽)과 함께 주석단에 앉아있다.
▲  2019년 7월 8일 조선중앙TV가 방영한 김일성 주석 사망 25주기 중앙추모대회 당시 모습. 김여정 당 제1부부장(가운데)이 리수용 부위원장(왼쪽), 최휘 부위원장(오른쪽)과 함께 주석단에 앉아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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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김여정이 2인자에 이어 후계자 지위에 도달할 경우에도, 영속적인 지위일지 아니면 한시적인 지위일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도 선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1974년에 김정일의 후계자 지위가 내부적으로 확정되기 직전까지는, 김일성 동생인 김영주가 후계자가 될지 모른다는 관측이 많았다. 1974년 2월 16일 치 <동아일보> 기사 '김일성 후계로 부각'은 김영주가 부총리에 임명된 사실을 보도하면서 "김일성이 실제(實弟)인 김영주를 이 자리에 앉힌 것은 김영주에게 노동당과 행정부의 실권을 모두 장악시켜 그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저의를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았던 김영주는 그해에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정되면서 자연스럽게 2선으로 밀려났다.

김정일 집권기에는 동생 김경희가 한때 주목을 받았다. 김정일이 "김경희는 곧 나이고, 김경희의 말은 곧 나의 말이다"라고 발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을 정도다. 하지만 김경희의 지위는 노동당 경공업부장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자기 자녀에게 권력을 넘기기 전에 형제들에게 힘을 실어준 적이 있었다는 선례가 김정은-김여정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향후 김여정이 후계자가 된다 해도, 김정은이 살아 있는 한 한시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 정권 하에서 김여정의 존재를 더욱 더 부각시키는 요인 중 하나는 김정은의 자녀가 아직 장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녀가 장성하게 되면 김여정의 위상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

설령 김여정이 후계자가 된다 해도 그가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처럼 될지 아니면, 일시적인 후계자로 그칠지를 판단해야 한다. 한시적인 후계자에 그친다면, 한국의 국무총리나 미국의 부통령처럼 최고지도자의 유고 및 궐위에 대비하는 대타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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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 “이낙연 대표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10시간째 면담 요청 중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1/01/0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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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과 대학생들이 민주당 중앙당사민주당 경기도당사송갑석 민주당 광주시당 위원장 사무실민주당 부산시당사를 찾아 윤석열 탄핵과 이명박박근혜 사면 완전 철회를 요구했다

 

먼저 광화문촛불연대 회원들은 4일 이낙연 민주당 대표와 면담하기 위해 중앙당사를 찾았다.

 

하지만 이 대표는 면담에 응하고 있지 않다.

 

이 대표를 만나러 간 광화문촛불연대 회원들은 면담이 성사될 때까지 당사에 있겠다는 입장이다면담을 요청한 지 벌써 10시간이 다 되고 있다.

 

▲ 이낙연 대표가 올때까지 민주당사에 있겠다는 광화문촛불연대 회원들, 유튜브로 면담요청 상황이 생중계되고 있다. [사진출처-주권방송 생중계 화면 갈무리]  

 

 

이 대표의 이명박·박근혜 사면론에 대해 국민은 촛불 혁명의 배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의 면담 요청 상황은 유튜브 생중계로 시시각각 알려지고 있다시민들은 유튜브 대화창을 통해 이들의 투쟁을 응원하고 있다.

 

이 대표가 면담에 응하지 않자많은 시민이 민주당에 항의 전화를 하고 있다.

 

광화문촛불연대 회원들은 민주당에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뒤늦게 식사가 반입되었고방한 용품이 제공되었다고 알렸다. 

 

▲ 민주당 경기도당 사무실을 찾아 면담 후에 “윤석열 탄핵과 이명박, 박근혜 사면 완전 철회”요구서를 제출하는 최승재 경기주권연대 대표   © 김영란 기자

 

경기주권연대와 경인대진연도 이날 오후 1시 민주당 경기도당사를 찾아 면담을 했다.

 

민주당 경기도당 사무처장이 경기주권연대와 경인대진연 회원들과 면담을 했다.

 

이들은 민주당에 적폐 청산과 검찰개혁의 최대 걸림돌, 윤석열 검찰총장 탄핵에 앞장설 것 이명박· 박근혜 사면논의 완전히 철회할 것 적폐 청산에 앞장설 것을 요구했다.

 

이에 민주당 경기도당 사무처장은 국민적 분노를 알고 있다며 경기도당 위원장과 중앙당에 의견을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 민주당 광주광역시당 사무처장과 면담하는 광주전남주권연대, 광전대진연 회원  © 김영란 기자

 

▲ 면담 후에 기자회견을 하는 광전주권연대와 광전대진연 회원들  © 김영란 기자

 

광주전남주권연대와 광전대진연 회원은 송갑석 민주당 광주광역시당 위원장 사무실을 찾아 면담을 했다.

 

민주당 광주광역시당 사무처장은 이 대표의 사면론 발언에 대해 당황스럽다고 밝혔다또한 그는 윤석열 검찰총장 탄핵에 대해서 공감한다면서도 구체적인 답변은 메일로 주겠다고 답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온 광주전남주권연대광전대진연 회원은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 염원인 검찰개혁과 적폐 청산을 완수하는 사명을 다하고 가장 우선으로 개혁의 걸림돌인 윤석열 검찰총장을 파면하는데 나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 부경주권연대, 부경대진연과 면담하는 정경원 민주당 부산시당 사무처장, 박화국 정책실장.  © 김영란 기자

 

▲ 부경주권연대 대표와 부경대진연 대표가 민주당 부산시당 당직자와 면담 후에 “윤석열 탄핵과 이명박, 박근혜 사면 완전 철회”요청서를 제출하고 있다.   © 김영란 기자

 

부경주권연대와 부경대진연 회원도 이날 오후 1시 민주당 부산시당사를 찾아 면담을 했다.

 

정경원 민주당 부산시당 사무처장박화국 정책실장은 시민들과 면담에서 윤석열 탄핵과 이명박박근혜 사면 완전철회에 대해 아직 논의를 해보지 않아 입장을 밝히기 조심스럽다라며 이후 부산시당 회의를 통해 대책 및 입장 정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부경주권연대와 부경대진연은 국민들이 민주당에 180석 의석수라는 권력을 준 이유는 이를 누리는 것이 아닌 적폐 청산을 위해 싸우라고 준 것이라며 혹자는 이번 이낙연 대표의 발언을 중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권모술수가 아닌 정공법으로 적폐 청산에 나설 때 국민이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면담에 참여한 민주당 부산시당 인사는 이낙연 대표의 사면 발언에 대해서는 개인의 의견"이라고 밝혔다.

 

아래는 면담요청서 전문이다.

 

-------------아래---------------------

 

윤석열 탄핵과 이명박근혜 사면 완전철회를 요구하는 면담 요청서

 

"이낙연 대표님께 호소드립니다"

 

지난 24일, 윤석열 검찰총장의 ‘정직 2개월’ 징계처분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졌고 윤 총장은 검찰총장 업무에 복귀했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재가한 징계를 뒤집은 사법쿠데타’라며 분노했고, 검찰개혁과 사법적폐 청산 여론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국회가 윤석열 검찰총장을 탄핵해야 합니다.

 

촛불국민의 염원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입니다. ‘나라다운 나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하신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적폐를 완전히 청산하라고 집권여당에 압도적인 180석 의석을 몰아주었습니다. 적폐청산과 검찰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간절한 외침에 이제 국회가 과감하게 나서야 합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적폐청산의 최대 걸림돌이자 검찰개혁 저지의 선봉장입니다. 

 

윤석열이 검찰총장 자리에 있는 한 개혁은 온갖 방해에 직면하게 됩니다. 윤석열을 중심으로 검찰과 사법적폐, 보수언론과 수구세력은 더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각종 개혁조치들은 저항에 부딪힐 것입니다. 윤석열 정치검찰은 보궐선거와 대선에 개입해 반개혁 반정부 동맹을 형성해 민주개혁을 뒤엎으려 할 것입니다.

 

윤석열 검찰총장 탄핵 요건은 이미 차고 넘칩니다. 

 

국민을 위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윤석열을 탄핵해주십시오. 

 

지금 윤석열을 끌어내리지 못하면 적폐청산과 검찰개혁은 숱한 방해와 반대 속에 좌절되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또 다시 후퇴하게 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또 누군가를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슬픈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 사면논의는 즉각 중단되어야 합니다. 

 

적폐청산과제는 산처럼 쌓여있고 검찰개혁의 상징인 공수처 출범은 이제 걸음마를 뗀 상태입니다. “적폐를 청산하자!”,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촛불국민의 염원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고개 숙여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두 전직 대통령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이명박근혜 사면은 있을 수 없으며 사면논의는 즉각 중단, 완전 철회되어야 합니다.

 

‘다시는 지지 않겠다’며 촛불을 들고 일어선 국민과 함께 해주십시오. 철저한 적폐청산, 중단 없는 사회대개혁의 길에 이낙연 대표님과 더불어민주당이 함께 하리라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민주당은 윤석열을 탄핵해주십시오!

 

윤석열 처벌, 철저한 검찰개혁 반드시 실현합시다!

 

이명박근혜 사면 결사반대합니다! 사면논의 즉각중단, 완전철회 해주십시오.

 

촛불은 계속됩니다. 범죄자 윤석열을 국민들의 힘으로 끌어내리겠습니다! 

 

2021년 1월 4일

윤석열 응징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광화문촛불연대, 21C조선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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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노동자 해고사태에 분노한 LG 애용자의 불매선언...“더는 구매 않겠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1/01/05 07:54
  • 수정일
    2021/01/05 07:5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공대위, 청소노동자 집단해고 LG제품 불매운동 선포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21-01-04 15:59:28
수정 2021-01-04 16:11:51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공공운수노조 엘지트윈타워분회와 노동시민사회 공동대책위원회가 4일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열린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집단해고 LG 제품 불매 선포 기자회견에서 고용승계를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1.01.04
공공운수노조 엘지트윈타워분회와 노동시민사회 공동대책위원회가 4일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열린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집단해고 LG 제품 불매 선포 기자회견에서 고용승계를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1.01.04ⓒ김철수 기자  
 
“제가 지금 들고 있는 휴대전화가 LG 제품이고, 제가 이 발언문을 준비하면서 썼던 노트북이 LG그램입니다. 10년 넘게 셀룰러폰, 5G 시대에 이르기까지 LG(제품)를 썼고, LG그램이 생기기 전부터 LG 노트북을 썼습니다. 불매할 제품이 많아서 씁쓸합니다. 디오스, 휘센, 트롬, 코드제로, 퓨리케어 등은 더 이상 구매하지 않겠습니다. LG생활건강도 …”

4일, 한 시민이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 집단해고 사태를 비판하며 한 말이다. 그동안 LG 제품을 주로 애용해 왔던 김희연 서울서부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는 이날 LG 불매운동을 선언하며 이같이 말했다.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 집단해고 사태해결을 위한 노동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이날 여의도 LG트윈타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LG트윈타워에서 일하다가 연말에 일자리를 잃은 80여 명의 청소노동자가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LG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일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열린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집단해고 규탄 고용승계를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1.01.04
일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열린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집단해고 규탄 고용승계를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1.01.04ⓒ김철수 기자

공대위가 불매운동 시작한 이유

앞서 지수Inc 소속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 80여 명은 지난해 11월 말 계약 해지를 통보받았다. LG트윈타워 건물 관리 업체인 S&I코퍼레이션이 용역업체인 지수Inc와의 계약을 종료하면서다.

 

지수Inc 측은 건물 관리 업체인 S&I코퍼레이션과의 계약이 종료돼 어쩔 수 없다고 하고 LG는 자신들과 관련 없다고 하지만, 공대위 등은 LG가 노동조합을 조직해 생활임금 및 정년연장을 요구하는 청소노동자들을 표적 삼아 해고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S&I코퍼레이션은 LG가 지분 100%를 갖고 있는 LG 자회사이고, 지수Inc 또한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고모인 구미정 씨와 구훤미 씨가 지분 50%씩 나눠 소유한 회사이기 때문이다. 또 S&I코퍼레이션은 미화 부문만 계약해지하고 시설 부문은 지수Inc와 계약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업체는 고용승계를 통해 청소노동자들의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용승계를 하지 않고 있다.

청소노동자 30여 명은 지난해 12월 16일부터 LG트윈타워 건물 로비에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자, 임금 60원 인상만 가능하다던 회사는 경비용역을 동원해 청소노동자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전기·난방까지 끊었다. 심지어 가족들이 들고 온 음식 반입까지 차단했다. 이런 이유로 새해 첫날인 지난 1월 1일 농성 중이던 청소노동자들은 온종일 밥도 못 먹고 굶어야만 했다.

새해 첫날부터 이 같은 소식을 접한 일부 누리꾼들은 트위터 등 온라인에서 “LG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라며 불매운동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공대위도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LG 불매운동을 선포한 것이다.

공대위는 LG 계열사 중 생활 밀착형 소비재를 주로 생산하는 LG전자, LG생활건강, LG유플러스 등을 불매운동 대상으로 삼았다. 또 공대위는 공공운수노조 조합원을 시작으로 100만 민주노총 조합원 불매운동으로 확산, 광범위한 시민사회 연명 받아 불매 선언 발표, 청년학생이 주로 쓰는 제품으로 LG 불매 5대 제품 선정 및 온라인 홍보 등 영역별로 구체적인 불매운동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공공운수노조 엘지트윈타워분회와 노동시민사회 공동대책위원회가 4일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열린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집단해고 LG 제품 불매 선포 기자회견에서 고용승계를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1.01.04
공공운수노조 엘지트윈타워분회와 노동시민사회 공동대책위원회가 4일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열린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집단해고 LG 제품 불매 선포 기자회견에서 고용승계를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1.01.04ⓒ김철수 기자

기자회견문에서, 공대위는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은 무시당하지 않고 사람대접을 받고 싶어서 노조에 가입했다. 그뿐이다. 그것이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는 한겨울에 일터에서 쫓겨나야 할 이유가 되는가”라며 LG를 비판했다.

공대위는 “지금 LG는 그동안 쌓아온 ‘윤리경영에 신경 쓰는 착한 기업’, ‘좋은 제품 만들고 선행을 하면서 홍보도 잘 못 하는 안타까운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걸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라며 “이웃사랑 성금은 120억을 내지만 10년 일한 청소노동자들은 쫓아내는 LG의 위선적인 행태를 멈출 방법은 불매운동을 포함한 사회적 압력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는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이 제자리에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당분간 LG 제품들을 자리에서 치워주시길 모든 시민들께 호소한다. LG가 30% 이상 지분을 가지고 있는 세 개 회사 LG전자, LG생활건강, LG유플러스 제품을 우선 불매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LG가 청소노동자 집단해고를 철회하고 고용승계를 약속할 때까지 LG 생활건강이 만드는 엘라스틴, 페리오, 샤프란, 더페이스샵 등 제품의 구매를 잠시 멈춰주시길 부탁드린다. LG전자의 TV나 냉장고 등 가전제품, LG그램이나 LG스마트폰 구매를 고려한다면 청소노동자들이 돌아갈 때까지만 기다려달라. 통신사를 고르고 있다면, 가급적 LG유플러스는 피해 주길 바란다”라고 호소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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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장으로 향할 시간…죽음의 풍경도 달라졌다

등록 :2021-01-04 04:59수정 :2021-01-0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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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숨지면 염습 없이 소독…수의 대신 비닐백에 밀봉해 입관
코로나 사망자 입관·발인 현장
감염 막으려 ‘선 화장 후 장례’
유족에겐 비닐백 속 모습만 공개
장례지도사 “힘들어도 할 수밖에”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코로나19로 희생된 환자의 주검이 운구되고 있다. 박승화 &lt;한겨레21&gt; 기자 eyeshoot@hani.co.kr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코로나19로 희생된 환자의 주검이 운구되고 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2020년 12월26일 오후 3시30분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앞에서 두 관이 운구차에 오른다. 화장장으로 향할 시간이다. 관을 따르던 한 여성은 휴대전화를 들고 떠나는 장면을 촬영한다. 죽음의 장면이 낯선지, 한 학생은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다.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손진희(34) 장례지도사는 이날 코로나19에 확진된 뒤 유명을 달리한 두명의 입관과 발인을 진행했다. 코로나19 환자가 숨지면 ‘선 화장, 후 장례’가 원칙이다. 음압격리병동에서 사망자가 생겼다는 연락이 오면, 관을 준비해 일명 ‘우주복’이라고 하는 전신보호복을 챙겨 입는다. 병동까진 이송차량으로 이동해 주검을 확인한다. 그러나 염습은 불가능하다. 주검이 두차례 소독 뒤 밀봉되기 때문이다. 수의 대신 입던 옷 그대로 주검을 담는 비닐백에 안치한다. 유족이 고인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면, 입관 직전 병실 안에서 비닐백에 싸인 모습을 유리창문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결관(운반을 위해 관을 묶는 것)한 뒤 다시 이송차량으로 장례식장에 돌아와 안치실에 모신다. 결관한 뒤엔, 고인 이름만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엔 (고인) 사진을 찍는 걸 꺼렸는데, 코로나19 유행 초기엔 (가족이) 입관 과정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기도 했어요. 하루이틀 새 갑자기 안 좋아져서 (숨지면) 가족이 늦게 오시거나 외국에 있어서 (병원에) 못 오니까 그렇게도 하시더라고요.”손씨는 최근엔 이마저도 잘 안된다고 했다. 사망자 가족까지 격리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다. “가족이 같이 코로나19에 확진됐는데 한분은 일반 격리병실에 있고 다른 분은 중환자 병실에 있다가 돌아가신 사례도 있었어요.”
 
손진희 장례지도사가 장례식장 지하의 안치실 문을 열고 있다. 안에는 코로나19 확진 사망자와 비확진 사망자가 머무는 안치냉장고가 구분돼 있다. 박승화 &lt;한겨레21&gt; 기자 eyeshoot@hani.co.kr
손진희 장례지도사가 장례식장 지하의 안치실 문을 열고 있다. 안에는 코로나19 확진 사망자와 비확진 사망자가 머무는 안치냉장고가 구분돼 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코로나19 사망자를 향한 낙인과 두려움이 장례 절차도 바꾸었다. 보통 코로나19로 숨진 이들은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과 경기도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 절차를 거치는데, 다른 사망자(코로나19 비확진자)가 다 끝난 오후 5시가 넘어서야 화장이 가능하다. 장례도 3일장을 다 채우지 않거나, 아예 빈소를 차리지 않고 유족이 유골만 인수해 납골당에 가는 일이 종종 있다. 한달 평균 110∼120건씩 이뤄지던 장례가 지금은 40∼50건으로 절반 넘게 뚝 떨어진 이유다.반대로 화장장은 평소보다 바빠졌다. 장례지도학과를 졸업한 뒤 2007년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사해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도 겪은 손씨는 8월 말을 기점으로 사망자가 조금씩 늘어나는 걸 실감한다. 이날까지 그가 동료(7명)와 함께 이곳에서 보낸 코로나19 사망자는 어림잡아 34명.“메르스 땐 몇달만 고생하면 나아지겠지 했는데 계속되니까 다들 지쳐 있죠.” 손씨는 덤덤하게 말한다. “그래도 계속 가는 거예요. 힘들어도 어쩔 수 없으니까.” 이날 전국에서 18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숨졌다.관련 기사 보기 

목엔 파스 두 장, ‘코로나 중환자’ 병상으로 무전기 들고 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77061.html 

중증외상 환자에게 서울은 ‘지옥’…“외면할 순 없잖아요”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77073.html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77080.html?_fr=mt1#csidxaa3d6db6b4d2d8c99dfcb6aab5dff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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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집, 무소불위의 한국의 재벌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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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0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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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5000만 인구에서 1.3%의 재벌이 전체 민유지 65% 차지한 나라로 일제시대 일인이 차지한 토지의 65%(1928년 통계) 만큼 극소수 특권층에 토지가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벌들은 개발예정지나 대도시 주변에 토지소유를 편중하고 있다. 재벌들은 축산업, 골프장, 스키장, 레저타운을 통한 방법으로 농지를 소유한다. 이에 헌법에서 경자유전이 무너졌다. 나아가 증권회사. 보험회사, 건설업체 통하여 토지를 소유하기도 한다. 또한 연수원, 체육관, 축구장, 야구장, 직원훈련장을 짓는 목적으로 각종 땅 투기를 한다.
재벌들의 땅 투기로 인하여 땅값폭등이 집값폭등을 부르고 물가상승에 따라서 대부분 국민들 99%가 생존에 곤란을 겪는다.
한국이 현재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시대도 아니고 정부는 부동산 대책은 물론이고 만악의 근원 <재벌이 재산이 불어나면 불어 날수록 중산층이 무너지고 노동자, 농민, 서민들은 가난하다.> 재벌개혁을 왜 하지 못하고 이 나라를 지옥화 하는 것일까?
휴전선 이남에서 독도만 제외하고 전 국토는 무소불위 재벌과 미국<점령군>이 독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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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아이가 마주한 지옥 같던 2년 6개월

[아주 오래된 n번방, 미성년자 성매매 ①] '조건만남'게시물이 자발적이라는 당신에게

21.01.04 07:07l최종 업데이트 21.01.04 10:28l

 

<오마이뉴스>는 '미성년자 성매매' 판결문 219개를 분석했다. 또 피해 여성 5명을 인터뷰했다. 오늘부터 아홉 차례에 걸쳐 그 실태를 해부한다. 이 기사는 그 첫 번째다.  [편집자말]

그건 매매가 아니다. 착취다.

우리가 흔히 '미성년자 성매매' 혹은 '조건만남'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들. <오마이뉴스>는 피해자 5명을 어렵게 만났고, 판결문 219개를 검토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박주영 울산지법 부장판사는 지난 10월 판결문에 "자발적 성매매는 없다"고 썼다. 비슷한 맥락이다. 한 청소년 쉼터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소위 '까진 애들', '불량 학생'을 떠올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먹이사슬 맨 아래의 아이들이 피해를 입는다"라고 말했다.  지난 11월 조주빈에게 징역 40년 형이 내려졌다. 수사기관은 조주빈 일당을 때려잡았고 그의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조주빈의 n번방'은 그렇게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전된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방법의 성착취는 현재진행형이다. 수사기관은 범죄 기술로부터 한없이 뒤처져 있고, 처벌을 내리는 사법기관은 여전히 관대하다. 우리가 그것을 '매매'라고 부르는 사이, 다른 얼굴을 한 '조주빈들'이 대한민국 곳곳을 서성이고 있다.

그 남자의 일
     
 남성은 채팅 어플을 통해 열일곱살 한 아이와 만남을 가졌다. 이후 그는 아이를 가둔 채 24시간 감시했다.
▲  남성은 채팅 어플을 통해 열일곱살 한 아이와 만남을 가졌다. 이후 그는 아이를 가둔 채 24시간 감시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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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30대 남성이다. 마땅히 하는 일 없이 매일 채팅 어플을 켠다. 오늘은 앙톡이다. 앙톡에서의 성과가 시원찮아도 괜찮다. 즐톡, 영톡, 텐톡, 스윗톡, 심톡, 심팅, 채팅몬, 국민어장... 어플은 널려 있다. 그에겐 그게 일이다. 그날도 열일곱살 한 아이가 걸려들었다.

'성매매를 한다'는 아이지만 남자는 너무도 잘 안다. 아이는 집을 나왔을 것이고, 돈 한 푼 없을 것이며, 본인의 의지로 그 어플을 깐 게 아닐 것이다.

역시, 맞았다. 가출 후 남자친구라고 사귄 오빠가 몇몇 언니들을 소개해줬단다.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돈을 벌어오라"며 성매매를 시켰단다. 의지할 데 없이 잔뜩 겁먹은 아이, 그가 찾던 '돈벌이' 수단이었다.

남자와 아이가 만났다. 아이는 그를 '성매수남'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휴대폰을 꺼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휴대폰을 끄니 그가 돌변했다. 아이는 골목으로 끌려갔다.

"내가 일을 좀 해야 돼. 근데 여자가 필요해. 그걸 네가 해줘야겠어."
"네?"
"골목 뒤에 동생들 대기하고 있다. 도망칠 생각은 마. 할 거지?"
"네? 네..."
 

차에 올랐다. 얼마나 갔을까. 휴게소에 내려 그는 '형님'이란 사람에게 전활 걸었다.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더니 그는 휴대폰을 아이에게 넘겼다. 형님이 말했다.

"어, 이야긴 들었다. 근데 정말 원치 않으면 굳이 안 해도 돼."
"네? 네, 그럼 저 안 할래요."


옆에서 듣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자는 차를 돌리며 "네가 날 가지고 논 거야. 친구들, 가족들 다리를 다 부러뜨려 바닥을 기어 다니게 할 거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울면서 "살려 주세요"라고 빌었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그럼 다시 하겠다고 해."
"네. 제발 살려주세요."


다시 차를 돌렸다. 아이는 남자와 함께 그 형님이란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아이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가족관계 등을 받아 적었다. 휴대폰도 빼앗았다. 형님이 남자에게 돈뭉치를 쥐어줬다. 남자는 그 돈으로 1.5룸을 구했고, 그곳에 아이를 가둔 채 24시간 감시했다.

며칠 후 남자는 아이를 데리고 형님이란 사람을 다시 찾아갔다. 형님은 다른 여자들도 데리고 나왔다. 그녀들도 아이와 비슷한 처지인 듯했다. 형님은 '여행'을 간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을 이곳저곳 다녔다.

참혹한 숫자
  
 남자는 아이에게 성매매를 시켰다. 자신이 아이인 척 채팅 어플을 켜서 '일'을 잡았다. 최소 네 번, 많을 땐 여덟 번. 아이가 기억하는 '하루'의 숫자는 그렇게 참혹했다.
▲  남자는 아이에게 성매매를 시켰다. 자신이 아이인 척 채팅 어플을 켜서 "일"을 잡았다. 최소 네 번, 많을 땐 여덟 번. 아이가 기억하는 "하루"의 숫자는 그렇게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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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남자는 다시 아이를 1.5룸으로 데리고 왔다. 남자는 아이에게 성매매를 시켰다. 자신이 아이인 척 채팅 어플을 켜서 '일'을 잡았다. 아이를 차에 태워 '약속 장소'로 데려다준 뒤, 근처에 대기하다 다시 아이를 태워 다음 약속 장소로 이동하길 반복했다.

최소 네 번, 많을 땐 여덟 번. 아이가 기억하는 '하루'의 숫자는 그렇게 참혹했다. 돈은 모두 남자가 가져갔다. 아이의 몸이 망가져갔다. 고통을 이야기해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식사는 인스턴트뿐이었다. 집안일도 아이의 몫이었다. 아이의 호소에 남자는 폭력으로 대응했다. 머리와 뺨을 때리는 건 일상이었고, 배를 발로 찬적도 많았다. 칼이나 드라이버를 들고 "눈깔을 파버리겠다"는 말도 자주했다.

그렇게 두 달 쯤 지났다. 그날의 약속 장소는 어느 자동차였다. 아이가 차에 올랐다. 차 안에 있던 사람은 경찰이었다. 이른바 '위장수사'로 아이는 구조됐다. 하지만 아이를 집에 돌려보내는 것 외에 경찰의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집에 왔지만 아이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전부터 남자는 "네가 아무리 도망쳐도 소용없다"고 말해왔다. 남자는 아이의 모든 것을 알지만, 아이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남자는 이름도, 나이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는 지나가듯 들은 '○○이'라는 남자의 별명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집 앞에서 기다리진 않을까?', '통학길에 어린 동생을 납치하면 어떡하지?' 등의 생각이 아이의 머리를 뒤덮었다.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시달렸다. 극한의 공포심은 남자에게 다시 전화를 거는 것으로 이어졌다.

남자는 "일단 만나자"고 했다. 아이를 만난 그는 "네가 여기서 그만두면 나와 적이 되는 것"이라며 협박했다. 형님이란 사람도 전화로 "널 납치해 어디에 가둬둬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아이는 다시 납치됐다. 가족들의 실종신고도 소용없었다. 이전엔 두 달이었지만, 이번엔 2년 4개월이 걸렸다. 고통의 시간을 보낸 아이는 다시 경찰의 위장수사로 구조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 외에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아이는 결국 가족에게 모든 걸 털어놨다. "괜찮아.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야"라는 말이 돌아왔다. 고민 끝에 아이는 주변의 도움을 얻어 경찰에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그제야 경찰이 수사에 나섰지만, 남자의 행방은 묘연하다.

착취자, 이용자, 방관자

지난 12월 이 피해자를 만났다. 그녀는 "두 번째 구조돼 집에 오는 길에도 너무 무서워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살다간 죽어버릴 것 같았다"라며 눈물을 쏟았다.

이 피해자를 포함해 5명의 피해자가 용기를 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모두의 이야기가 마찬가지였다. '판결서 인터넷 열람서비스'를 통해 확보한 판결문 219개에도 참혹한,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거나 외면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2020년 1월~10월 선고, '대법원 판결문 검색 서비스' 통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중 성매수·강요행위·알선영업행위 등 키워드 검색).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2015~2019년)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12조(성을 사는 행위 또는 성착취물을 제작하는 행위의 대상이 될 것을 알면서 아동·청소년을 매매), 14조(폭행·협박 등으로 아동·청소년이 성매수 상대방이 되게 한 행위 등), 15조(아동·청소년 성매수를 알선한 행위 등) 혐의로 기소된 사건만 1682건에 달했다. 미성년자를 성매매 대상으로 내몬 사건 중 검거돼 재판을 받은 건만 이 정도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도록 만든 '수요자', 즉 성매수범(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13조) 또한 지난 5년 1711건이나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성매수 사건의 판결문을 분석해보니 처벌은 대부분 벌금 혹은 집행유예에 그쳤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매매가 아니다. 이 구조 속에 매매는 존재하지 않았다. 착취의 가해자,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자와 방관하는 자만 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서 피해자는 몸과 마음이 무너져갔다.

<오마이뉴스>는 오늘부터 총 아홉 차례에 걸쳐 '미성년자 성매매'의 실태를 해부한다. 더 나아가 이 기획을 통해 그것을 '매매'를 넘어 '착취'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n번방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곳곳에 n번방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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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애의 법원삼거리]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둘러싼 오해와 왜곡

오민애 법무법인 율립 변호사
발행 2021-01-04 09:13:19
수정 2021-01-04 09: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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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도 사무실에서도 나도 모르게 스며드는 냉한 기운에, 따뜻한 무언가를 찾게 만드는 그야말로 한겨울이다. 이 혹독한 추위 속에, 더 이상의 죽음은 없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곡기를 끊고 국회 안팎을 지키는 분들이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정부 부처간 협의안, 법사위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쟁점들에 대한 의견을 보면, 법의 취지와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여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지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 법이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짧게나마 쟁점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자 한다.

① 이 법은 소상공인, 자영업자를 살 수 없게 만든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대표이사를 포함하여 실질적으로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이들에게 생명, 안전과 관련된 주의의무를 부여하고, 이를 위반하여 사상의 결과가 발생한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동안 의무를 부담하는지 아닌지 불분명했던 이들에게 당신이 경영을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의무가 있다, 위반해서 피해가 발생하면 이런 책임이 있다고 분명히 밝혀 의사결정에 반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이 제정되면, 미용실, 목욕탕, PC방과 같은 경우, 일하는 직원이나 이용자의 부주의로 작은 사고가 나기만 하면 무조건 영업주가 책임을 져야 한다, 마음 편히 영업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주장 내지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사업주가 받게 되는 처벌의 정도가 강해지는 것은 맞지만, 이 법이 제정되기 때문에 무조건 사업주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은 다중이용업소에서 지켜야할 의무를 정하고 있고, 이를 위반하여 사상의 결과가 발생하면 관련 조항에 따라 처벌되거나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처벌받아왔다. 그리고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도 한다. 주의의무를 위반하였는지 여부, 이로 인해 사상의 결과가 발생하였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따지고 묻게 되는 것이지, 결과발생만으로 모든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아니다.

정의당 강은미 원내대표,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이사장, 고 이한빛PD 아버지 이용관씨(오른쪽부터)가 30일 여의도 국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논의를 위해 열린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의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2020.12.30
정의당 강은미 원내대표,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이사장, 고 이한빛PD 아버지 이용관씨(오른쪽부터)가 30일 여의도 국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논의를 위해 열린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의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2020.12.30ⓒ정의철 기자/공동취재사진

② 의무의 내용이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정하고 있는 ‘경영책임자 등의 의무’의 내용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과연 그럴까? 현재 법사위에서 심사되고 있는 법안에서는,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의 유해․위험방지 의무’,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의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 의무’를 정하면서, 관련 법령으로 산업안전보건법, 근로기준법상 의무를 포함하거나, 이 법 또는 다른 법이 정하고 있는 의무임을 명시하거나, 안전보건조치에 필요한 조직․인력․예산․편성과 점검의무 등을 부담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할 때 ‘업무’의 내용과 이에 따른 주의의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따지게 되고, 형사처벌을 예정한 이 조문에서 ‘업무’라는 단어 외에 다른 설명은 없다. 다만 이 법조항을 통해 지키고자 하는 법익과 다른 법조항과의 비교를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하고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사람의 생명, 신체의 안전 또는 보건상의 위해를 가했을 때 책임을 묻겠다는 명확한 입법취지를 전제하면서, 포함되어야 할 법령을 예시하고, 법률이 정하고 있지 않는 안전수칙(2인1조 작업 등) 또한 포함될 수 있는 방식으로 ‘경영책임자 등의 의무’에 대하여 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입법목적과 관계법령, 그리고 그동안 사업장 내에서 필수적인 안전장치로 확인된 요소들이 포함되도록 정하고 있는 의무조항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거나 불명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③ 위험의 외주화를 제대로 막아야 한다

제정안에서는 형식을 불문(위탁, 용역, 도급, 임대 등)하고, 외주화가 이루어질 경우 원청사업주에게 주의의무를 부과하고, 위반에 따른 결과발생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고자 한다. 보다 빠른 시간 안에, 가능한 낮은 비용으로 맡은 업무를 처리해야 지속적인 원하청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구조 속에서, 독립적인 하청사업주에게 업무를 맡겼기 때문에 관여하거나 개입할 수 없다는 원청사업주의 항변은 형식과 표면만 강조한 것일 뿐이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이 도급인에게도 안전․보건조치에 관한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위반하여 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수급인과 동일하게 처벌받도록 한 것에서 나아가, 다양하게 변형되는 위험의 외주화에 따라 책임까지 외주화하는 구조를 모두 막을 수는 없지만, 동등한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외주화’를 이유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현실에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④ 사업장 규모에 따른 적용유예, 법의 실효성은?

현재 논의되고 있는 법안에는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4년간 적용유예를 예정하고 있고, 정부부처 협의안에 의하면 여기서 나아가 50인 이상 10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에는 2년간 적용유예가 필요하다고 한다. 2020년 1월부터 9월까지 9개월간 중대재해 발생현황만 살펴보더라도,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전체 중대재해 중 84.9%가 발생했고, 사망자수도 79.1%에 이르렀다. 추락사고, 붕괴사고가 끊이지 않는 건설업의 경우 50인 미만 사업체가 93.3%에 이른다. 2018년 기준 전국 사업체 수 대비 50인 미만 사업장은 98.8%에 이른다. 여기서 나아가 50인 이상 100인 미만 사업장까지, 사업장의 규모에 따라 이 법의 적용을 2년, 4년을 유예할 경우 실제 이 법을 지켜야 할 유인을 제대로 제공할 수 있을지, 이 법의 제정을 통해 더 이상의 죽음을 막자는 법의 취지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면, 사업장 규모에 따른 일률적인 적용유예가 아니라 정부부처의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어떤 정책이 미비한지를 검토하고 갖추어 나가는 방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본부 회원들이 3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국화꽃과 함께 노동자들의 유품이 놓고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해고없는 세상을 촉구하고 있다. 2020.12.31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본부 회원들이 3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국화꽃과 함께 노동자들의 유품이 놓고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해고없는 세상을 촉구하고 있다. 2020.12.31ⓒ김철수 기자

⑤ 인과관계의 추정 – 왜 도입을 요구하는 것일까?

관련 법 위반 사실이 몇 차례 확인되었음에도 시정되지 않아 사상 사고가 발생했거나, 사고 현장을 은폐․훼손하는 경우 등, 일정한 경우에는 경영책임자 등의 주의의무 위반과 그 결과 발생 사이에 인과관계를 추정할 것을 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무죄추정의 원칙, 형사책임주의에 반한다는 반론과 지적이 있다.

왜 인과관계 추정 조항을 도입해야한다고 했을까? 모든 사례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산업재해, 시민재해가 발생하면 현장의 안전성에 관한 문제점이 지적되었음에도 시정하지 않다가 참사가 발생하거나, 사고 현장을 은폐하고자 한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산업안전보건 관련 범죄의 경우 초범에 대한 재범 비율이 97%에 이른다. 사상의 피해가 발생하기까지, 어떤 의사결정이 있었는지에 관한 모든 정보가 사업주에게 편중된 상황에서, 그동안 반복적으로 발생한 산업재해, 시민재해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요소를 불리한 사정으로 고려하겠다는 취지이다. 적어도 법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고 제정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면, 다른 법률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규정이니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기 때문에 인과관계 추정과 같은 조항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해가 바뀌고, 1월 5일이 되어야 법사위 소위가 다시 열린다고 한다. 10만명의 국민이 입법청원을 하고 여러 의원들의 법안이 발의되었음에도, 2020년을 마무리하는 12월이 되어서야 법안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와 논의가 시작되었다. 임시국회 내에는 꼭 통과시키겠다는 약속만큼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제정이다. 법조항 하나, 문구 하나는 그동안 산재와 시민재해로 희생된 피해자와 그 가족, 그리고 더 이상 그 아픔을 반복할 수 없다는 수많은 이들의 절규와 외침의 결과이다. 부디 법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제대로 된 법이 제정되기를 바란다.

오민애 법무법인 율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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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 영토에 두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

[개벽예감 426] 한 나라 영토에 두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1/01/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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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한 나라 영토에 두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

2. 민족동질의식과 조국통일의지의 결합이 이완되는 현상

3. 통일국가건설을 경제성장문제로 왜곡하는 현상

4. 두 지역으로 분렬된 나라를 두 나라로 분렬시키려는 분단원흉

 

 

1. 한 나라 영토에 두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다. 아침은 밝아왔어도, 통일의 여명은 아직 보이지 않는 2021년 새해 첫날, 지도를 펼쳤다. 20여 년 전 어느 날 통일강연을 하기 위해 고속렬차를 타고 서울역을 출발해 부산역에 내려 우연히 들른 역전책방에서 구입한 1:1,050,000 축적의 지도다. ‘우리나라 지도’라고 쓴 굵은 글씨체 제목이 선명하다. 미국에서 40년을 살아온 나에게 우리나라 지도는 떠나온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표상이다. 선조들이 수수천년 살아온 산천이 그 지도 속에 보이고, 내가 태어나 자란 서울의 낯익은 거리가 그 지도 속에 보이고, 우리나라가 통일되는 날 다시 돌아가고픈 새로운 세상이 그 지도 속에 보인다. 

 

지도에는 우리나라 국경이 표시되었다. 북방으로는 790km에 이르는 압록강과 547km에 이르는 두만강까지, 그리고 남방으로는 제주도 남쪽 11km에 있는 작은 섬 마라도까지 우리나라 영토다. 우리나라 중부지역의 동서를 관통하는 240km의 군사분계선은 국경선이 아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의해 그어진 군사분계선은 하루빨리 철폐되어야 할 분단선이지, 국경선이 아니다. 우리나라 북방국경선은 압록강 하구에서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1,400여 km에 걸쳐있으며, 우리나라 최남단영토는 섬면적이 0.3㎢밖에 되지 않아 한 개의 작은 점으로 지도에 표시되는 마라도이다. 새해 아침에 펼쳐본 지도는 조국의 영토관념을 일깨워주었다.  

 

북쪽으로는 백두산 천지에, 남쪽으로는 마라도에 이르는 우리나라 영토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두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 한 나라 영토에 두 나라가 존재한다는 말은 궤변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마라도에 이르는 우리 영토에는 오직 한 나라만 존재한다.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나라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우리나라는 두 나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통일국가가 건설될 때까지 서로 다른 두 개의 국명을 남과 북에서 각각 사용하는 것이다. 

 

남과 북이 한 나라 안에서 국명을 각각 다르게 사용하는 것은 상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북은 남조선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남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북은 남조선을 미국이 점령한 미해방지역으로 인정하고, 남은 북한을 미수복지역으로 인정하고, 미국은 북조선을 미점령지역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북은 미해방지역인 남조선을 해방하려는 것이고, 남은 미수복지역인 북한을 수복하려는 것이며, 미국은 미점령지역인 북조선을 점령하려는 것이다. 이런 첨예한 대결구도가 우리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깨뜨리고 전쟁재발위험을 항시적으로 조성하는 근본원인이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오늘까지 존속하는 첨예한 대결구도를 해체하고 평화와 안정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통일국가가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북은 미해방지역을 무력으로 해방하려는 것이고, 남은 미수복지역을 무력으로 수복하려는 것이며, 미국은 미점령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국가를 건설하지 않으면, 평화와 안정은 언제가도 실현될 수 없고, 전쟁재발위험은 항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통일국가가 건설될 때까지 남과 북은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남북평화공존은 분단체제에서 실현될 수 없으며, 평화적 분단체제라는 말도 어불성설인 것이다. 이처럼 명백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 남과 북이 분단체제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고, 분단체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명백하게도, 분단체제와 평화체제는 그 어떤 경우에도 공존할 수 없는 상극체제이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의 평화운동과 달리, 분단체제에서의 평화운동은 독자적 지위를 갖지 못하며,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조국통일운동에 종속된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분단체제에서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궤변이 남측 사회에서 떠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마다 성인 남녀 1,000여 명을 직접 만나 면접하는 방식으로 통일의식에 관한 여론조사를 진행한다는 통일연구원이 2019년 12월 12일 여론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은 1990년 8월에 제정된 민족통일연구원법에 의거하여 1991년 4월에 창립되었는데, 2020년 4월 문재인 정부는 탈북자를 원장에 임명했다. 대북적개심을 지닌 탈북자가 원장에 임명되었으니, 통일연구원의 사업이 얼마나 반북적으로 흘러갈 것인가는 더 이상 물어볼 필요도 없다. 통일연구원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 동안 진행한 통일의식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1) 우리나라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응답한 비률은 2016년 37.3%, 2017년 31.7%, 2018년 32.4%, 2019년 28.8%로 해마다 낮아졌다.

 

2)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공존할 있다면 통일은 필요 없다고 응답한 비률은 2016년 43.1%, 2017년 46.0%, 2018년 48.6%, 2019년 49.5%로 해마다 높아졌다. 

 

위에 인용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지난 4년 동안 남측 사회에서 조국통일의식이 점차 박약해진 반면, 남과 북이 분단체제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궤변이 점차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여론조사결과는 모든 연령층 응답자들 가운데서 20대 청년들이 남북공존론을 가장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장차 통일국가의 주역으로 나서야 할 청년들 가운데서 상당수가 분단체제에서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궤변에 속아 넘어가 조국통일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사진 1>  

 

 

▲ <사진 1> 위쪽 사진은 우리나라 북변에 있는 백두산 천지의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아래쪽 사진은 제주도 남쪽에 있는 우리나라 최남단영토인 마라도의 모습을 보여준다.백두산에서 마라도까지 우리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신성하고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이다. 백두산에서 마라도에 이르는 우리나라 영토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은 민족분렬의 상처를 안고 고통과 불행을 겪는 우리 민족을 통일국가건설에로 부르고 있다. 우리 민족이 백두산의 강의한 기상을안고 통일국가건설운동을 힘있게 밀고나가면, 미국과 종미예속세력의 방해와 도발을꺾어버리고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자주통일위업을 실현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1,084년 전에 등장했던 강대한 통일국가 고려를 계승하는 새로운 자주통일강국이 탄생하는 것이다. 오늘 8천만 민족은 비록 괴질확산 속에서 시련을 겪고 있지만, 새로운자주통일강국의 탄생이라는 웅대한 목표를 바라보며 2021년 새해를 맞았다.  

 

 

2. 민족동질의식과 조국통일의지의 결합이 이완되는 현상

 

우리 민족사에 처음 등장한 통일국가는 918년에 세워진 고려다. 통일국가를 건국한 태조 왕건(877~943)은 신성대왕이었다. 발해가 926년에 멸망했고, 후기신라가 935년에 멸망했고, 후백제가 936년에 멸망했으므로, 고려가 진정한 의미의 통일국가로 등장한 때는 936년이라고 보아야 한다. 통일국가 고려의 등장을 민족사적 대사변으로 보아야 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왕건대왕은 18년 동안 지속된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위대한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왕건대왕은 후기신라와 후백제를 각각 항복시키고 그 두 나라를 포섭하는 방식으로 통일전쟁을 수행하였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하면서 발해의 유민을 고려에 받아들였다. 통일전쟁에서 동족끼리 싸우더라도 살상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왕건대왕의 통일전쟁원칙이었다. 

 

2) 고려는 중국과 거란에 굴종하지 않는 자주통일국가였다. 왕건대왕이 고려를 건국했을 때, 중국은 오대십국시대(907~979)로 분렬되어 있었고, 거란(916~1125)의 국력은 아직 약한 상태에 있었다. 침략외세인 당나라와 동맹하여 동족국가들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기신라(676~935)는 고구려 영토에 재건된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698~926)와 공존하였으므로,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후기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민족사에서 발해를 배제시키는 엄중한 과오다. 

 

3)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위대한 통일국가였다. 왕건대왕은 서경(오늘의 평양)을 전략거점으로 중시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다. 고려의 북방국경선은 요수(遼水)에 그어졌는데, 그로써 광개토대왕의 강국건설정책에 따라 402년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던 요수의 광대한 동부지역(요동6주=강동6주)이 고려의 영토로 되었다. 오늘날 랴오허(遼河)라고 부르는 요수는 고구려 때부터 고려 때까지 압록수(鴨淥水)라고 불렀는데, 압록수는 오늘의 압록강이 아니다. 압록수의 록(淥)은 밭을 록자이고, 압록강의 록(綠)은 초록빛 록자다. 일본제국의 역사학자 쓰다 쏘우끼찌(津田左右吉)는 1913년에 펴낸 ‘조선력사지리’에서 고려의 북방국경선인 압록수(오늘의 랴오허)를 오늘의 압록강으로 바꿔놓고 고려의 영토를 반도로 축소시켰다. 일제의 식민사관은 강대한 대륙국가 고려를 왜소한 반도국가로 만들었다.    

 

고려가 통일국가로 등장한 이후 올해까지 1,084년 세월이 흘렀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선조들은 하나의 국가 안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왔다. 1,084년 동안 국가는 변천되었으나, 민족은 공고하게 결합된 사회적 집단으로 장성해왔다. 

 

민족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라는 말은 근대적 국가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2019년에 집필한 논문에 따르면, 1900년 <황성신문>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었고, 1919년 3.1운동을 거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1920년 4월 6일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민족은 역사적 산물이며, 생명을 가진 실체라고 서술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시대는 일제식민통치에 저항하여 민족동질의식이 강화되고 민족주의가 출현했던 반일항쟁기였다. 반일항쟁기에 등장한 민족주의가 민족담론을 자기의 전유물처럼 만드는 바람에 민족담론과 계급담론을 대치시키는 인식착오가 생겨났지만, 원래 민족담론은 민족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며, 민족담론과 계급담론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민족담론은 근대적 민족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생겨났지만, 근대적 민족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우리 민족은 스스로를 겨레라고 불렀다. 

 

중화민족, 일본민족, 윁남민족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겨레들이 한 나라 안에 공존하는 복합민족이지만, 우리 민족은 단일언어를 사용하는 단일겨레가 통일국가를 건설한 단일민족이다. 단일혈통과 단일언어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특성이다. 1,084년 세월 동안 우리의 단일언어 안으로 몇몇 외래어가 흘러들어왔어도 민족어의 단일성과 순수성이 변함없이 보전되어온 것처럼, 1,084년 세월 동안 우리의 단일혈통 속에 몇몇 외래혈통이 흘러들어왔어도 민족혈통의 단일성과 순수성은 변함없이 보전되었다. 단일혈통과 단일언어에 관한 담론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특성을 밝혀주는 것이지, 민족우월주의나 민족배타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도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바다처럼 민족은 크고 넓고 깊은 존재다. 사회적 관계로 결합된 여러 집단들 가운데서, 민족은 가장 크고 넓고 깊은 집단이다. 약 37조 개의 세포들이 결합된 개별적 생명체인 사람처럼 우리 민족은 약 8,000만 개의 개별적 구성원들이 결합된 집단적 생명체다. 인체에 상처가 나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집단적 생명체인 민족도 분렬의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우리나라의 분단은 1,000년 통일민족사를 훼손한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재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남과 북으로 분렬된 민족에게 통일국가건설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과업으로 된다. 

 

우리가 통일국가를 반드시 건설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이유는 집단적 생명체인 민족이 분렬의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완성하고 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통일국가는 민족이라는 집단적 생명체의 필수불가결한 존재근거이며, 통일국가건설은 민족이라는 집단적 생명체의 자주적인 요구다. 반일항쟁기에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민족적 권리였던 것처럼, 오늘 분단시기에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민족적 권리다. 통일국가건설의 기초는 민족의 자주성이다. 자주민족의식을 가져야 민족관을 세울 수 있고, 민족관을 세워야 자주통일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남과 북이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통일국가를 건설할 필요가 없다는 궤변이 남측 사회에서 떠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심각한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7년 12월 말 통일연구원이 펴낸 ‘통일 이후 통합방안: 민족주의와 편익을 넘어서 통일담론의 모색’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남과 북이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통일국가를 건설할 필요가 없다고 응답한 비률은 41.1%였고, 그와 반대되는 의견에 응답한 비률은 23.6%였다고 한다. 남과 북이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통일국가를 건설할 필요가 없다고 응답한 비률을 연령층으로 구분하면, 20대는 49.7%, 30대와 40대는 각각 43.8%, 50대는 37.2%, 60대 이상은 34.0%라고 한다. 또한 남과 북이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소망이라고 응답한 비률을 보면, 20대는 13.7%, 30대는 18.2%, 40대는 22.6%, 50대는 32.2%, 60대 이상은 30.3%라고 한다. 

 

위에 인용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남측 사회에서 민족동질의식과 조국통일의지의 결합이 이완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런 이완현상이 지금보다 더 악화되어 민족동질의식과 조국통일의지의 결합이 해체되면, 통일국가건설의 정신적 기초가 무너지고 통일국가건설운동은 쇠락할 것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민족동질의식과 조국통일의지의 결합이 이완되는 현상이 20~30대 청년들에게서 더 심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장차 통일국가의 주역으로 되어야 할 청년들 속에서 민족동질의식과 조국통일의지의 결합이 이완되는 것은 매우 위중한 사회적 병리현상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05년 8월 15일 서울에서 진행된 8.15민족대축전 참가자들이 커다란 통일기를 펼치며 조국통일의지를 드높이는 장면이다. 통일기는 일본이 감히 강탈하려는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2005년 8.15민족대축전에는남측 대표단 300명, 북측 대표단 200명, 해외동포 대표단 100명이 참가했다. 나도 해외동포 대표단의 한 성원으로 그 축전에 참석했었다. 우리는 분렬될 수 없는 단일민족이며, 우리나라는 분렬될 수 없는 단일국가라는 조국통일의지가 통일기에 어려있다. 통일기에 어려있는 그런 심오한 의미를 외면하고 통일이라는 말을 꺼려하는 가짜들이 '한반도기' 또는 '단일기'라는 이상한 명칭을 조작해냈다. 분단이 75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오늘, 8천만 민족은 통일기 아래 단결하고, 통일기를 높이 휘날리며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더욱 힘있게 투쟁해야 한다. 단결과 투쟁만이 자주통일국가건설의 원동력으로 된다.  

 

 

3. 통일국가건설을 경제성장문제로 왜곡하는 현상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통일국가를 반드시 건설해야 하는 이유는 집단적 생명체인 민족이 분렬의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완성하고 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런데 남측 사회에서는 통일국가건설을 경제성장문제로 왜곡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11년 10월 7일 통일부의 용역을 받은 연구진이 10개월 동안 연구하여 작성했다는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전망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가 2020년에 통일된다고 가정하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30년에는 통일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이 3조6,550억 달러로 급증하여 세계 8위의 경제강국으로 올라설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가 2030년에 통일된다고 가정하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40년에는 통일국가의 국내총생산이 5조4,081억 달러로 급증하여 세계 7위의 경제강국으로 올라설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그 보고서는 통일국가가 환서해경제권과 환동해경제권을 중심국가로서 동북아시아의 중심축이 되고, 통일국가의 교통망이 아시아의 대륙교통망 및 태평양 항로와 각각 연결되어 세계의 중심적 물류거점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통일국가건설을 경제성장문제로 왜곡하는 현상은 원래 미국의 국제금융자본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2009년 9월 21일 미국 뉴욕에 있는 국제금융기관인 골드만 삭스(Goldman Sachs)는 우리나라가 통일되면 30~40년 뒤에 국민소득이 87,000달러로 급증하여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강국으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했었다. 

 

하지만 남측 경제가 성장동력을 잃어버리고 파산위기에 빠져든 오늘의 현실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9년 전에 나온 그런 장밋빛 전망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비과학적 전망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비과학적인 경제전망을 가지고 통일국가의 미래를 예상하였다는 사실이다.  

 

국제금융자본의 비과학적인 전망은 조선을 핵포기와 개혁-개방으로 유인하여 사회주의계획경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시장경제로 변질시키려는 흡수통일론의 경제적 변종이다. 그런 흡수통일론은 북을 극도로 자극하는 도발담론에 불과하므로, 더 이상 거론할 가치가 없다. 

 

그와 다르게, 합리적인 정세분석에 기초한 전망은 통일국가가 건설되는 경우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과두제(international financial oligarchy)가 통일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 경제제재를 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나라의 통일을 반대하는 국제금융과두제가 신생통일국가에 경제제재를 가할 것이라는 전망은 조선의 사회주의계획경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시장경제로 변질될 것이라는 도발담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합리적이며 과학적이다. 

 

많은 사람들은 통일국가가 건설되면 북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남의 산업기술이 결합하여 통일국가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그것은 빗나간 예상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과두제가 통일국가에 가하는 경제제재 앞에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남의 산업기술력은 무용지물로 될 것이다. 이런 예상은 북의 자립경제가 통일국가의 경제발전을 이끌어갈 것이라는 점을 예고해준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과두제가 통일국가에 경제제재를 가해도, 미국의 집요한 방해와 도발을 꺾고 통일국가를 건설하게 될 우리 민족은 오랜 통일국가건설운동 속에서 단련되고 강고해진 주체력량으로 국제금융과두제의 경제제재를 무력화하고 자립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킬 것으로 예견된다. 국제금융과두제의 경제제재를 받는 통일국가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자립경제로선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개성시 남동부에 있는 개성공업지구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개성공업지구는 군사분계선에서 2.5km 떨어져있다. 개성공업지구는 2007년부터 운영되었으나, 2016년 2월 10일 남측의 종미예속세력은 개성공업지구 가동을 전면 중단한다고결정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개성공업지구는 폐쇄되어있다. 통일국가가 건설되어야개성공업지구가 재가동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은 분단체제에서 남과 북의 평화공존이나 상호협력이 실현될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안겨주었다. 명백하게도, 우리 민족이 통일국가를 건설하지 못하면, 민족의 자주적 발전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연방통일국가가 건설되면, 개성공업지구 같은 남북경제협력지구들이 연방국가의 남측 지역과 북측 지역 곳곳에 출현하여 연방국가의 통일적 경제발전을 적극 추동할 것이다.  

 

 

4. 두 지역으로 분렬된 나라를 두 나라로 분렬시키려는 분단원흉

      

2018년 12월 21일 <동아일보>에 또 다른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2018년 12월 2일 국회미래연구원이 진행한 ‘미래공론조사’에 참여한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의 체험담이다. ‘미래공론조사’에 참여한 그 대학생은 <동아일보> 취재기자에게 자신의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10여 년 동안 학교에서 통일 아니면 분단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교육을 받다가 그 중간에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런 중간의 국가간 형태들을 세계 각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왜 그걸 남북관계에 적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나 안타까움도 있었어요.” 그는 남북관계가 2030년에는 미국과 캐나다처럼 우호적인 국가관계로 변화되고, 2050년에는 건국 초기의 미국처럼 느슨한 연방국가로 전환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심각한 문제는, 그 대학생 한 사람만 그렇게 희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회미래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공론조사에 참가한 응답자들 가운데 46.3%가 앞으로 10년 뒤에 남북관계가 미국과 캐나다처럼 우호적인 국가관계로 변화되기를 바랐고, 응답자들 가운데 27.4%가 앞으로 30년 뒤에 남북관계가 느슨한 연방국가로 전환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공론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국회미래연구원이 나누어준 자료집을 읽고 학습과 토론을 벌이면서 세 차례의 설문조사에 응했는데, 1차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의 통일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응답한 참여자들은 2차 설문조사와 3차 설문조사를 거치면서 통일지연론에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 바람에 통일시기를 평화공존시기 이후로 더 지연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명백하게도, 이런 의식변화는 선평화, 후통일론을 주입받았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통일국가건설운동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선평화, 후통일론을 주입하면, 통일지연론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통일국가건설을 평화공존 이후로 지연시키는 선평화, 후통일론은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담론에 불과하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위에 서술한 것처럼, 국회미래연구원은 ‘미래공론조사’에서 우리 민족이 느슨한 연방국가를 건설하는 시기를 2050년으로 예상했다. 그런 예상에 따르면, 연방제 통일은 분단원년인 1945년을 기준으로 산정할 때, 105년 뒤에나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통일국가건설을 100년 뒤로 지연시키는 것도 용납될 수 없지만, 2050년으로 예상하는 통일시점도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설정한 것이므로, 연방제 통일이 105년 뒤에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통일국가건설시기를 사실상 무한정 연기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  

 

바로 여기서 선평화, 후통일론의 반역사성이 드러난다. 선평화, 후통일론은 우리 민족이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자주적으로 발전하려는 노력을 무한정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반역사적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시기 일제가 장악한 식민지체제에서 우리 민족이 수행해야 했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업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현 시기 미국이 장악한 분단체제에서 우리 민족이 수행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과업은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반일항쟁기 36년 동안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시기를 하루도 지연시켜서는 안 되었던 것처럼, 오늘 분단시대 75년 동안 우리 민족은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시기를 하루도 지연시킬 수 없다. 우리 민족은 75년 동안 깊어진 분렬의 상처를 하루빨리 치유해야 한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통일국가건설을 무한정 지연시키는 선평화, 후통일론이야말로 반역사적 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위에 서술한 것처럼, 국회미래연구원은 ‘미래공론조사’에서는 남북관계가 미국과 캐나다처럼 우호적인 국가관계로 변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남북관계가 미국과 캐나다처럼 우호적인 국가관계로 변화될 것이라는 예상은 우리나라가 두 나라로 완전히 갈라질 것으로 전망한 것이다. 누구나 직감하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두 나라로 분렬될 것이라는 말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반민족적인 망언이다. 남과 북 두 지역으로 분렬된 우리나라가 두 나라로 완전히 분렬되면, 우리 민족도 두 민족으로 분렬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두 나라로 분렬시키려는 것은, 통일국가 고려가 등장한 이후 1,084년 동안 집단적 생명체로 살아온 단일민족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끊어버리려는 잔인한 범죄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분단체제를 무너뜨리고 하루빨리 통일국가를 세워야 할 판에, 두 지역으로 분렬된 우리나라를 두 나라로 완전히 분렬시키려는 것은 극악한 국가분렬범죄가 아닐 수 없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우리나라 영토를 보여주는 위성사진이다.8천만 민족이 저 영토에서 살아가고 있다. 미국이 분할점령정책으로 갈라놓으려고 광분했으나 분렬되지 않은 우리나라 영토이며, 종미예속세력이 국가분렬정책으로 갈라놓으려고 광분했으나 분렬되지 않은 우리나라 영토다. 우리나라는 절대도 두 나라로분렬되지 않을 것이며, 뜻밖에 통일국가건설시기가 생각보다 훨씬 더 앞당겨질 것으로보인다. 왜냐하면, 남과 북의 민족주체력량이 분할점령정책과 국가분렬정책을 전면적으로 배격하면서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추진하기 때문이다. 비록 통일의 여명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우리 민족이 주체력량으로 가까운 장래에 통일국가를 건설할 것이라는전망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확정적이다. 통일국가건설은 과학이며 신념이다.  

 

두 지역으로 분렬된 우리나라를 두 나라로 분렬시키려는 국제음모를 꾸며낸 범죄자는 미국이다. 1975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씬저(Henry A. Kissinger)는 1975년 9월 22일 제30차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면서 남과 북에 대한 주변국들의 교차승인(cross-recognition)을 제안했다. 그는 “조선과 동맹국들이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면, 미국과 한국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세계사의 격변기에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체제가 연속 붕괴되고,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정세변화에 편승한 미국은 노태우 독재정권을 앞세워 이른바 ‘북방외교’를 추진했다. 노태우 독재정권의 북방외교는 우리나라를 두 나라로 분렬시키려는 키씬저의 교차승인음모를 실행에 옮긴 반민족적 외교정책이었다. 노태우 독재정권이 북방외교를 추진한 것으로 하여 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이 수교합의의정서에 서명했고,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한중외교관계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런 정세격변 속에서 미국이 노린 것은 남과 북을 유엔에 별개의 국가로 가입시켜 두 나라로 분렬시키려는 유엔동시가입이었다. 북은 남북유엔동시가입을 반대하면서 남북단일의석가입을 주장했다. 

 

1991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북방외교의 성과’에 의해 소련과 중국은 남측이 유엔에 단독가입을 신청해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고, 만일 북측이 끝까지 유엔동시가입을 거부하면 남측이 단독으로 유엔에 가입할 작정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만일 북이 남북유엔동시가입을 반대하고 남북단일의석가입을 끝까지 주장하면, 남측만 단독으로 유엔에 가입하고, 북측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는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북은 1991년 5월 자기의 남북단일의석가입안을 철회하고, 유엔에 가입신청을 냈다. 그렇게 되어 남과 북은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별개의 국가로 동시에 가입했다. 

 

키씬저가 꾸며낸 교차승인음모에 따르면,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과 일본도 조선과 수교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수교한 때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미국과 일본은 조선과 수교하기는커녕 조선과 대결하는 적대정책에 계속 매달리고 있다. 키씬저의 교차승인은 세상을 속인 기만음모였다. 30년 전 노태우 독재정권은 키씬저의 교차승인음모에 따라 남북유엔동시가입을 추진하면서 남과 북이 별개의 국가로 각각 유엔에 가입하더라도 일단 유엔에 들어가면 유엔성원국으로서 상호협력하게 될 것이라고 떠들었지만, 지난 30년 동안 남과 북은 유엔에서 상호협력하기는커녕 정면대결만 계속해왔다.  

 

북위 38도선을 분할선으로 획정하고 그 이남지역을 점령하였을 뿐 아니라, 남과 북을 유엔에 동시에 가입시켜 우리나라를 두 나라로 분렬시키려고 광분한 미국은 오늘도 여전히 분할점령정책에 집착하고 있다. 또한 그런 분단원흉을 숭상하고 추종하는 종미예속세력은 선평화, 후통일론이라는 궤변을 퍼뜨리며 국가분렬정책을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분할점령정책에 집착하고, 종미예속세력이 국가분렬정책을 자행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절대로 두 나라로 분렬되지 않을 것이며, 뜻밖에 통일국가건설시기가 생각보다 훨씬 더 앞당겨질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남과 북의 민족주체력량이 분할점령정책과 국가분렬정책을 전면적으로 배격하면서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추진하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이 분할점령정책에 계속 집착하고, 종미예속세력이 국가분렬정책을 계속 자행하면, 북은 그런 반민족적 책동을 저지, 파탄시키기 위해 통일전쟁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분단체제를 우호적인 국가관계로 변화시키려는 그 어떤 기도도 실패할 것이며, 그런 기도를 자행하는 세력은 파멸을 면치 못할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록 통일의 여명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우리 민족이 주체력량으로 가까운 장래에 통일국가를 건설할 것이라는 전망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확정적이다. 통일국가건설은 과학이며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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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철새 서식지와 지뢰 지역에 고속도로를?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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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21/01/03 10:24
  • 수정일
    2021/01/03 10:2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함께 사는 길] 남북협력 시대, DMZ이 위협받고 있다

남북협력 시대로 위협받는 서부 DMZ

 

산악지대로 이뤄진 동부DMZ일원과 달리 철원, 연천, 파주에 이르는 서부DMZ는 거의 대부분 농경지이다. 농경지는 온 국민들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밥상이면서 동시에 온갖 생명들을 더불어 키워낸다. 그러나 농경지의 공익적 가치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조건 생태자연도 3등급지로 분류돼 어떤 개발사업이든 가능한 부지로 취급되고 있다. 생태자연도 등급을 분류하기 위한 환경부의 전국 자연환경조사에서도 농경지는 조사대상지에서 빠져 있다. 그러나 논이 없으면 개구리와 뱀들, 그리고 수많은 새들의 산란터, 먹이터, 휴식지가 사라진다.


 

이런 한계 때문에 남북협력시대가 되면서 가장 위협받고 있는 지역이 파주, 연천, 철원의 민간인통제구역 내 농경지이다. 민간인통제구역 내 농경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농경지였으나 분단 70년 세월 동안 농사를 짓지 않아 자연습지가 된 DMZ 내부와 연결돼 또 다른 생태적 가치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파주의 경우 점원리, 노상리, 백연리, 거곡리, 정자리 등의 논들이 해당된다. 특히 거곡리의 장단반도는 그 규모가 넓고 북한의 개성과도 가까워 선거 때마다 '평화경제특구', '통일경제특구' 등 이름만 바뀐 채 모든 정당 후보들의 공약으로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 '제2의 개성공단'이라는 명목으로 장단반도 특구개발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100대 국정과제에도 포함돼 있다. 모든 개발을 위해서는 첫 사업이 전기, 가스, 수도 등을 놓기 위해 도로부터 연결되는 것이 순서인지라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감격스러운 역사적 사건을 놓고도 긴장할 수밖에 없던 터였다. 급기야 우려했던 일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2018년 11월 국회에서는 '문산-개성 간 고속도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결정했다. 임진강지키기파주시민대책위와 '임진강한강하구 시민네트워크'는 즉각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불과 일주일여 뒤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비 타당성조사 면제 항의 성명 때문에 '위에서' 빨리 만나보라고 했다는 거다.

 

▲ 철새서식지 초평도. 문산-도라산 고속도로는 초평도 바로 옆을 지나가도록 계획되어 있다. ⓒ함께사는길(이성수)

DMZ 생태 고립시키는 고속도로


 

'그래도 문재인 정부가 다르긴 하네, 성명서 한 장에 금방 만나자고 하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국도로공사가 갖고 온 노선 지도는 우려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노선은 DMZ남방한계선과 나란히 가고 있어 DMZ를 민간인통제구역과 생태적으로 완전히 고립시켰다. 게다가 파주민간인통제구역에서 생태적으로 매우 중요한 넓은 농경지 인근에 지뢰지역인 낮은 산지를 통과했다. 또한 '문산-개성' 간 고속도로가 아니라 '문산-도라산' 고속도로였다. 종점은 백연리 논에 인터체인지를 놓아 통일로로 연결한다. 도라산역 남북출입관리사무소에서 개성과의 연결은 언제 될지도 모르고 그곳은 무조건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통일로(국도1호선)을 확장하지 이 도로를 왜 새로 만들지?'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루미류, 뜸부기, 수원청개구리와 금개구리의 산란터이자 서식지인 장단반도, 백연리, 노상리, 점원리 논에 모두 악영향을 준다. 게다가 인터체인지만 연결하면 장단반도의 대규모 개발이 가능하다. 좀 달라진 듯하여 열심히 설명하면 달라질지 모른다고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략환경영향평가 과정 전반은 요지부동 하나의 노선만을 고집했다. 환경부가 '동측 노선(통일로 쪽)을 검토하라'는 보완 통보도 무시하는 보완서를 제출했다. 결국 환경부는 △임진강 통과 시 수생태계에 영향을 끼치는 평화대교 대신 하저터널을 검토할 것 △생태적으로 중요한 장단반도를 피해 동측 노선을 검토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조건부동의'를 하여 전략환경영향평가 단계가 끝나는 듯했다. 환경부가 '부동의'를 하여 현재 노선으로 재추진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웠지만, 고심한 흔적은 보였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현 정부 임기 내 착공해야 한다는 국토부


 

그런데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국토부가 환경부의 조건부동의에 '조건'을 지키지 못하겠다는 '의견서'를 환경부에 냈다. 그 이유의 핵심은 '현 정부 임기 내 착공'를 해야 하므로 빠른 추진을 위해 조건을 완화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국토부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다. 환경부는 △환경단체, 전문가 등과 공동조사를 추진할 것 △자치단체, 시민단체, 주민, 전문가가 참여하는 상생협의체를 구성할 것을 골자로 완화된 협의안을 다시 냈다. 환경부의 완화된 협의안이 국토부로 전달되자마자 국토부와 한국도로공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에서도 하루에 몇 통씩 만나자는 연락을 하고, 사무실로 급습하기도 했다. 공동조사단을 꾸리자는 것이었다. 해당 노선은 전 구간을 조사조차 할 수 없는 지뢰지역이다. 파주환경운동연합은 "지뢰지역이어서 조사를 할 수 없는데 무슨 공동조사냐"며 거부 입장을 정하고 이를 성명으로 발표하는 한편, 국토부와 환경부로도 보냈다. 그러자 듣도 보도 못한 지역환경단체 두 곳과 공동조사단을 꾸렸다.


 

주민 의견이 장식인가


 

얼마 뒤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전화가 또 불티나게 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모월 모일 모시에 '상생협의체'를 하려고 하니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 전화로 날짜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정식 공문으로 보내라 그래야 회의를 소집해 안건으로 논의한다'고 했더니 공문을 보내왔다. 국토부는 상생협의체는 예정대로 하니 나중에라도 입장이 정해지면 참여하라는 말도 전했다. 소위 '개문발차'다. 심지어 임진강 수생태계에 끼치는 악영향 때문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파주어촌계에는 어촌계장에게 2~3일 전 문자로 통보했고, 공문은 3선단장에게 보냈다.


 

주민 의견 수렴, 상생을 위한 논의는 장식품에 불과하고, 국토부는 처음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기존의 관행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상생협의체에 들어와서 논의하자'고 하는데 그렇게 논의구조에 들어갔다가 정부 안에 명분만 주는 들러리 놀음을 강요당한 게 여러번인지라 전혀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것이다. 아니 달라진 건 있다. 이명박근혜 정부조차도 '최소한 날짜는 사전에 협의'하려 했었다. 주민 의견을 장식으로 여기지 않는 다음에야 이런 식으로 일을 할 순 없다. 개발에 협조적인 민심만 조직해 개발 절차에 이용하려는 태도는 민주국가의 행정이 할 일이 아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22912594456833#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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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 식사·전기 끊긴 LG트윈타워 노동자들 “음식 싸온 가족도 막아”

오후부터 식사 반입 및 전기 공급...노동자들 검진 추진

김백겸 기자 kbg@vop.co.kr
발행 2021-01-02 17:35:07
수정 2021-01-02 18: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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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여의도 트윈타워 안에서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식사 반입과 난방, 전기 공급 등 차단을 규탄하며 허가할  것을 촉구하며 손자보을 들고 했다.   2021.01.02
2일 여의도 트윈타워 안에서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식사 반입과 난방, 전기 공급 등 차단을 규탄하며 허가할 것을 촉구하며 손자보을 들고 했다. 2021.01.02ⓒ김철수 기자  
 
LG그룹에 '집단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LG트윈타워 1층 로비에서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들이 식사 반입과 전기 공급이 막힌 채 하루를 꼬박 굶으며 추위 속에서 밤을 보냈다.

대부분 50~60대인 노동자들에 대해 가혹한 처사라는 논란이 일고 나서야, LG 측은 식사와 전기 공급 등을 허용했다.

'LG 트윈타워 청소노동자 집단해고 사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2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농성 노동자에 대한 LG 그룹의 반인권적 행태를 규탄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집단해고 통보를 받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원청인 에스앤아이코퍼레이션에 고용승계를 요구하고 면담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라며 "최후 수단인 파업권을 행사하는 노동자들은 2021년 새해의 첫날 온종일 밥 한 끼를 먹지 못하고 굶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어머니가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자녀가 음식을 싸들고 찾아갔지만 그것도 막았다"며 "직계가족의 만남조차 저지하는 것에 각계 우려와 권고가 전달됐지만 철저히 무시당했다"고 말했다.

 

또 "저녁밥을 가져온 인권, 사회단체 활동가와 시민들이 항의했지만 여전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며 "회전문을 밀어서 저녁밥을 전달하려 하자 경비용역들이 몰려나와 폭력을 행사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노조에 따르면 전날 저녁 건물 입구인 회전문을 사이에 두고 식사를 반입하려는 노조와 이를 막는 용역 측 간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준비한 도시락은 엎어져 쏟아져 버렸다. 청소노동자의 가족들이 보내온 초코파이와 두유가 겨우 안으로 전달됐지만, 보안직원에 의해 뺏기기도 했다.

이들은 "지금도 청소노동자들은 난방이 안 되는 농성장에서 굶고 있다"며 "농성 노동자들의 인권을 짓밟는 행위를 즉각 멈춰야 한다. 집단해고를 철회하고 고용승계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공공운수노조 엘지트윈타워분회와 노동시민사회 공동대책위원회가 2일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기본권인 건물 내부로의 식사 반입과 난방, 전기 공급 등 차단을 규탄하며 허가할것을 촉구했다.   2021.01.02
공공운수노조 엘지트윈타워분회와 노동시민사회 공동대책위원회가 2일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기본권인 건물 내부로의 식사 반입과 난방, 전기 공급 등 차단을 규탄하며 허가할것을 촉구했다. 2021.01.02ⓒ김철수 기자

이날 기자회견에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 권수정 정의당 서울시의원, 현린 노동당 대표 등 정치인도 참석했다. 이날 오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조사관이 나와 청소 노동자들의 상황을 점검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립된 노동자들의 사정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자 LG 그룹 측은 이날 오후부터 식사 반입과 전기 공급을 막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농성 중인 노동자들 40여명의 왕래는 막고 있어 고립된 상태는 그대로다.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서울지부 관계자는 "대부분 고령인 노동자들이라 약도 많이 먹는데 식사를 못하면서 약도 못먹는 게 큰 문제였다"면서 "내일(3일) 한의사를 들여보내 농성 중인 노동자들의 검진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앞서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은 지난해 12월 31일 LG트윈타워 건물 관리를 맡고 있는 에스앤아이코퍼레이션과 노동자들이 고용된 지수아이앤씨 사이의 청소 용역계약이 종료됐다는 이유로 사실상 해고됐다.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은 지난 2019년 10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사측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사측은 묵살로 일관했다. 이에 지난해 9월부터 노동자들이 건물 앞 천막농성을 벌이자 사측은 계약해지를 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노동자들은 '보복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지난달 16일부터 건물로비에서 농성을 진행해 왔다.

공공운수노조 엘지트윈타워분회와 노동시민사회 공동대책위원회가 2일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음식반입 저지 규탄 기자회견을 마치 뒤 준비한 음식들을 전달하기 위해 건물입구에 쌓아놓고 있다. 이날 음식 전달은 직접되지 않고 추후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가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2021.01.02
공공운수노조 엘지트윈타워분회와 노동시민사회 공동대책위원회가 2일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음식반입 저지 규탄 기자회견을 마치 뒤 준비한 음식들을 전달하기 위해 건물입구에 쌓아놓고 있다. 이날 음식 전달은 직접되지 않고 추후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 가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2021.01.02ⓒ김철수 기자
지난 1일 LG트윈타워 보안요원들이 식사반입을 막고 있다.
지난 1일 LG트윈타워 보안요원들이 식사반입을 막고 있다.ⓒ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김백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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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께 새해인사를 드리면서 ‘송환’을 기원하다

  • 기자명 김래곤 통신원 
  •  
  •  입력 2021.01.02 12:17
  •  
  •  댓글 1
 
왼쪽부터 비전향장기수 김영식 선생님, 양희철 선생님, 양원진 선생님, 박희성 선생님.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왼쪽부터 비전향장기수 김영식 선생님, 양희철 선생님, 양원진 선생님, 박희성 선생님.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새해를 축하합니다.”

(사)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과 회원들이 2021년 신축년 새해를 맞이하여 낙성대 ‘만남의 집’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께 안녕과 축원의 뜻을 모아 새해인사를 드렸습니다.

코로나19 감염병 때문에 남과 북이 한치도 오도가도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비전향장기수 양원진(93세, 29년 6개월 옥고) 선생님, 김영식(88세, 27년) 선생님, 양희철(87세, 37년) 선생님, 박희성(87세, 27년) 선생님과 당국의 방역조치에 따라서 권오헌 (사)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님 등 몇몇 회원들만이 함께 새해를 축하하였습니다.

비전향장기수 박종린 선생님(2020년 10월 16일 자택)께서 자택에서 투병생활 중 건강이 악화되어 인천사랑병원에 입원하셨다. [사진제공-김영승]
비전향장기수 박종린 선생님(2020년 10월 16일 자택)께서 자택에서 투병생활 중 건강이 악화되어 인천사랑병원에 입원하셨다. [사진제공-김영승]

다른 선생님들의 현황은 현재 인천사랑병원에서 투병 중이신 박종린 선생님(89세, 35년)을 비롯하여 많은 선생님들이 오랜 옥고의 후유증으로 병원이나 요양원 등 각지에서 오직 송환의 그날만을 위해 간고한 투병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날 새해를 맞아 전국의 통일원로들께 전화인사를 드린 권오헌 명예회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인사를 드렸던 허찬형, 강담, 오기태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 조국과 가족품으로 송환되지 못하신데 대해 애석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등 회원들이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과 평양시민 김련희 씨가 하루빨리 북으로의 송환을 위한 새해다짐을 하였다.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등 회원들이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과 평양시민 김련희 씨가 하루빨리 북으로의 송환을 위한 새해다짐을 하였다.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선생님들께서는 새해 덕담으로 “지금 세계적인 감염병이 휩쓰는 가운데 북과 남이 전혀 다른 차원의 사회에 있다고 하시면서 남녘의 민중들은 자주화된 새 사회를 만들어 우리 민족끼리 잘 살아나가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었습니다.

평양시민' 김련희 씨(왼쪽 첫 번째)가 설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평양시민' 김련희 씨(왼쪽 첫 번째)가 설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이날 설음식을 마련해준 '평양시민' 김련희 씨는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고무, 찬양죄)으로 대구지방법원에 기소된 상태에 있지만, 남녘에서 10번째로 맞는 새해라며 한해한해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려온 안타까운 세월이었다고 말하면서, 새해 2021년에는 정말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고대한다며 고향에 계시는 연로하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딸에게 상봉하는 그날까지 부디 건강해 주시기를 눈물 속에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양심수후원회 회원들도 이제 송환을 희망하시는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은 문일승, 최일헌, 박종린, 김영식, 박희성, 이광근, 이두화, 박정덕, 박수분, 양원진, 양희철, 김교영 선생님 등 열두 분만이 남아있다며,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과 평양시민 김련희 씨가 하루빨리 북으로의 송환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다시 한 번 새해 축원의 잔을 들었습니다.

이에 앞서 이날 아침, 미주 양심수후원회 장민호 선생이 “감옥에 있을 때 선생님들께 새해인사로 항상 큰절을 드렸다”면서 부인 김은경 선생과 함께 비대면 영상화면을 통하여 낙성대 ‘만남의 집’ 한분 한분의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께 정중한 새해인사를 올리면서 부디 건강과 안녕을 바라며, 꼭 송환되시기를 기원했습니다.

한편, 통일부는 지난달 31일 통일부장관 명의로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 추진위원회’에 보내온 답변서를 통해 “(코로나19의) 어려운 상황인 점을 깊이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향후 상황이 완화되는 대로 (통일부장관) 면담 추진을 검토할 것을 말씀드립니다”라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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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코로나’ 막으려면…“덜 쓰고 덜 먹는 삶으로 되돌아가야 해요”

등록 :2021-01-02 09:02수정 :2021-01-02 10:27 

 
[토요판] 커버스토리
‘평화일꾼’ 새 출발 강우일 주교

4·3 피해 실태 안 뒤 화해 앞장
강정 군사기지와 4대강 반대 등
생명평화운동 선두에서 이끌어
46간의 사제생활 최근 은퇴
“평화 도움되면 무엇이든 기꺼이”

“환경 파괴로 인류가 코로나 초래
방역·경제보다 삶 양식 바꿔야
지구 생태 파괴 멈추게 하려면
각자가 적게 쓰고 덜 먹어야”
“평화를 증진시키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기쁘게 할 생각입니다.” 성탄절 전날인 지난달 24일 오후 제주시 오등동 현해관(은퇴 사제 숙소)에서 강우일 주교가 인터뷰 도중 활짝 웃고 있다. 강 주교는 지난 11월 제주교구장에서 은퇴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평화를 증진시키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기쁘게 할 생각입니다.” 성탄절 전날인 지난달 24일 오후 제주시 오등동 현해관(은퇴 사제 숙소)에서 강우일 주교가 인터뷰 도중 활짝 웃고 있다. 강 주교는 지난 11월 제주교구장에서 은퇴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대학 입시를 한 달 앞두고 느닷없이 ‘뜻있는 인생’에 대한 갈망이 가슴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용솟음쳤다. 결국 평범한 세상살이를 접고 사제의 길을 택했다. 로마로 유학 가서 신학을 공부할수록 머리통만 커지고 가슴은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예비 사제는 귀국을 1년 미루고 예수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생활했다. 신부가 된 그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 곁에 있고 싶었지만, 한국 천주교 수장은 그를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 붙들어뒀다. 묵묵히 보좌만 하던 사제가 가슴속 온기를 본격적으로 끄집어낸 것은 2002년 제주교구장이 된 뒤였다. 강우일 주교는 지난 18년 동안 4·3 피해자 보듬기, 강정마을 해군기지와 4대강 대운하 반대 등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지난 11월 제주교구장을 정년퇴임한 강 주교를 성탄절 전날인 지난달 24일 오후 제주시 오등동의 현해관(은퇴 사제 숙소)에서 만났다.
‘으뜸되는 가르침’(종교의 본래 뜻)을 받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생명 존중 및 평화를 위한 행보를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단호하게 실천해온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혼탁함, 코로나 장기화로 인한 우울을 떨쳐낼 수 있는 따뜻한 연대와 희망도 찾고 싶었다.강우일(76·이하 호칭 생략) 주교는 2002년부터 지난해 11월 퇴임할 때까지 18년 동안 천주교 제주교구를 이끌어왔다. 제주교구는 한국의 16개 교구 중 규모가 가장 작다. 그러나 작은 동네의 사제가 내는 목소리는 섬 속에 갇히지 않았다. 바다 건너 반도 전체에 울려퍼졌으며, 가톨릭 울타리를 넘어 사회 구석구석까지 울림을 줬다. 그가 내놓은 사랑과 평화의 말은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는 자들에게는 죽비였지만,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였다. 그는 몇 년 전 한 시사주간지가 한 조사에서 한국 가톨릭 인물 중 만나보고픈 사람 1위(작고한 인물 제외)를 차지하기도 했다.
통진당 해산 비판하고 예멘 난민 보듬어
―퇴임 뒤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정해진 출근을 우선 안 하니까 아주 자유롭고요, 찾아오시는 분을 만나거나 부탁받은 원고를 쓰는 등 책상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주로 많습니다. 운동 부족이 안 되도록 가끔 테니스도 치고, 한 주에 한 번씩은 세 시간 정도 숲길을 꼭 걷습니다.”―아직 맡고 있는 직책도 있지요?“한베평화재단 이사장하고, 곧 내려놓을 겁니다만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평화일꾼이 되겠다”고 하시더니 둘 다 평화와 관련된 일이군요.“네. 평화를 증진시키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기쁘게 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베평화재단도 그렇지만, 강정마을의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는 국민들에게 평화는 절대로 무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 연대를 통해서 달성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죠.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완공이 됐지만, 오히려 기지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평화 교육의 시발점이 될 수 있거든요.”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죄와 성찰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고자 창립(2016년 9월)된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베트남전 종전 42주년인 2017년 4월 제주에 베트남 피에타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있는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는 문정현 신부가 받은 민주화운동 배상금을 종잣돈으로 해서 각계 시민들이 낸 20억원의 후원금으로 2015년 9월 문을 열었다.
“제주에 와서 4·3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게 됐어요.” 지난해 11월17일 천주교 제주교구장에서 은퇴한 강우일 주교가 지난달 24일 오후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제주교구 사제관(현해관) 뜰의 동백나무 앞에서 평화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제주에 와서 4·3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게 됐어요.” 지난해 11월17일 천주교 제주교구장에서 은퇴한 강우일 주교가 지난달 24일 오후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제주교구 사제관(현해관) 뜰의 동백나무 앞에서 평화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퇴임 미사 때 교우들이 ‘화해와 평화의 목자’라고 표현했던데, 딱 맞는 거 같아요.
“글쎄요, 제가 제주에 와서 우리나라 현실에 대한 이해와 사고가 많이 바뀌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고요. 사실 전혀 연고가 없는 제주에 가리라고는 상상을 못 해서 18년 전 처음 발령 때는 굉장히 황당하기도 했고, 어떻게 될 건지 걱정하기도 했죠. 그러나 아름다운 제주에 막상 도착해서는 아주 행복했어요. 사제가 된 뒤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 명동에서 보내면서 최루탄 가스를 많이 마시는 등 그동안 소용돌이와 소란 속에서 고생했거든요. 그래서 하느님이 이제 공기 좋은 데서 좀 살아보라고 포상을 주시는가 보다고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주도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의 여러 양상을 보니까 다들 과거에 입은 상처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더라고요. 그 원인인 제주 4·3에 대해서 차츰 알게 됐죠. 전체 인구의 1%밖에 안 되는 제주 사람들이 나머지 99%로부터 너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우리가 이분들께 엄청난 빚을 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이르렀던 거죠. 지난 18년간 겉으로는 아름답고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있었지만, 마음은 사실 편하질 않았어요.”―제주에 내려와서 사목 방향도 바뀐 건가요?“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저이지만, 현대사의 궤적이랄까 맥을 다른 시선으로 이해하게 됐죠. 그전에는 단락별로 이해했다면 제주에 와서 현대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흐름 속에서 어떤 부정적인 면, 아니면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4·3에 대해서는 제주에 와서야 깊이 알게 됐다고요?“2003년에 정부의 ‘4·3 진상보고서’가 나왔는데, 그 보고서를 보면서 이게 엄청난 일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고 관련된 여러 자료를 자꾸 들여다보게 됐죠.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구 사제들 중에서도 관계가 안 된 집안이 없더라고요. 그 정도로 아픔과 상처가 컸는데 이상하게도 50~60대까지만 해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의외로 4·3을 잘 모르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4·3을 겪은 1세대들이 자기 가족이나 자손들에게 말을 안 했더라고요. 너무나 끔찍하고 두려우니까 그걸 다시 말로 표현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한마디 했다가 붙잡혀가서 뭔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거였어요.”제주 4·3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숨지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만 해도 1만4천명이 넘는다. 강우일은 2008년 제주 4·3 60주년 추모미사를 집전했다. 4·3에 대한 시민적 화해와 사회적 성찰의 시발이었다. 그는 또, 강정마을 군사기지 건설에 줄기차게 반대하는 등 평화의 섬 제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평화 기도문’(2007년)과 성탄절 ‘평화 메시지’(2008년), ‘평화 호소문’(2009년) 등을 통해 군사기지 건설에 대한 단순한 반대를 넘어 뭇 생명들의 공존과 상생이라는 생명평화운동으로 승화시켰다. 4대강 대운하 사업 반대, 원전 재검토 촉구 등도 같은 맥락이었다.대다수가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사제는 자유와 사랑의 이름으로 발화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해산 결정(2014년)을 두고서는 “불관용과 억압, 단죄와 처단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어둠의 시대를 통탄한다”고 비판했으며, 제주로 온 예멘 난민 논란(2018년)에 대해서도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배척과 외면은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거부하는 범죄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질타했다.
강우일 주교는 제주교구장 시절 생명과 평화를 살리는 생명평화운동을 이끌었다. 4대강 대운하 반대는 그 일환이었다. 2010년 6월 경기 양평군 양수리성당에서 4대강 중단 촉구 미사를 마친 강우일 주교(오른쪽 셋째)와 최덕기 주교(오른쪽 넷째) 등 사제와 신도들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천주교 생명미사 기도처까지 순례하고 있다. 양평/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강우일 주교는 제주교구장 시절 생명과 평화를 살리는 생명평화운동을 이끌었다. 4대강 대운하 반대는 그 일환이었다. 2010년 6월 경기 양평군 양수리성당에서 4대강 중단 촉구 미사를 마친 강우일 주교(오른쪽 셋째)와 최덕기 주교(오른쪽 넷째) 등 사제와 신도들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천주교 생명미사 기도처까지 순례하고 있다. 양평/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푸코 따르려 독일 석면공장 등 생활
―제주로 오기 전 서울에 있을 때는 공개적인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요.“그때도 마음속으로는 느끼는 것이 많이 있었죠. 그러나 70~80년대는 끊임없이 소용돌이와 소란 속에서 살다 보니까 정신적으로 지친 면도 있었고, 그때 김수환 추기경님을 모시는 처지였기에 제가 나서는 것이 맞지 않았죠. 추기경님이 해야 할 말씀을 다 하셨기도 했고요.”강우일은 1974년 12월 사제 서품을 받고 서울 중림동성당 보좌신부로 잠깐 일한 뒤 곧바로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비서, 서울대교구 교육국장·홍보국장 등으로 김 추기경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1985년 8월 난곡성당 주임신부로 나갔지만, 김 추기경은 그해 말 또다시 강우일을 불러들였다. 그후 2002년 제주교구장이 될 때까지 그는 명동성당에서 일했다.―4대강 등 주요 사안은 개인 의견이 아니라 주교회의 결의로 반대했는데요.“저희가 입장 표명을 할 때에는 최소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합니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을 초대해서 강의와 질의응답 등 토론을 충분히 한 뒤에 합의하거나 결론을 내죠. 감성적으로 발언을 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제가 처음 주교가 됐을 때만 해도 선배 주교님들 중에는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발언하는 것을 거북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여럿 계셨어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분위기가 아주 서늘해지곤 했는데, 세대교체가 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씩 깊어졌어요.”―거리의 사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아픔과 갈등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신부들은 많이 계시지만, 고위 성직자로서 사회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줄곧 내온 분은 강 주교님이 처음이 아닌가 싶어요.“제가 주교회의 부의장과 의장(2008~2014년)을 상당 기간 하다 보니까 자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주교단이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니까, 주요 사안에 대해서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있는다는 것도 참 고통스러운 일이거든요. 물론 주교 등 성직자들이 사회문제와 정치문제에 대해서 왜 발언을 하느냐며 비판하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그런 발언은 천주교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0~64년) 정신에 따른 당연한 활동이에요. 바티칸공의회의 결론은 교회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거든요. 김 추기경님이나 저나 모두 세계 교회의 그런 흐름 속에 있는 거죠.”―‘빨갱이 사제’라는 등 터무니없는 공격도 많이 받을 때는 힘들지 않았어요?“우리 신부들도 선거 때 등 부모님들하고 정치문제나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집에서 나누면 의견이 달라서 애를 많이 먹지요. 저도 그런 셈 쳤죠. 일일이 대응하기도 힘들고, 그런 비판은 저희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일이기도 하니까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가야죠.”
“고기를 적게 먹는 본래의 인간다운 식사로 사람들이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24일 제주교구 은퇴 사제관인 현해관에서 인터뷰하던 중 강우일 주교가 코로나19로 불거진 지구생태계 회복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고기를 적게 먹는 본래의 인간다운 식사로 사람들이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24일 제주교구 은퇴 사제관인 현해관에서 인터뷰하던 중 강우일 주교가 코로나19로 불거진 지구생태계 회복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그는 ‘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라는 글(2012년, 제주교구 사회교리학교 강의)에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인간의 품위와 존엄이 잘 지켜지도록 하는 모든 일에 교회는 무관심할 수 없다”며 “교회는 세상의 정치·경제·사회 모든 문제와 관련하여 정의가 실현되는지 끊임없이 살피고 호소하고 경고하는 예언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회적 발언의 근거로 바티칸공의회가 정한 사회교리를 들고 있지만, 그의 본성 깊숙한 곳에는 오래전부터 약자에 대한 사랑이 터잡았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 경험은 이런 면을 보여준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사렛 예수의 삶을 살았던 샤를 드 푸코(1858~1916년) 신부를 따르는 국제 수도단체이다.강우일이 1973년 로마에 있는 우르바노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을 때였다. 원래는 바로 귀국해야 했지만, 그는 한국 천주교의 수장인 김수환 추기경한테 1년 휴가를 청했다. “바로 사제 서품을 받으면 제가 머리통만 커져 있고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 가슴에 온기를 좀 불어넣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1년 동안 그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 사람들이랑 독일의 공장, 스페인 빈민가, 북아프리카 오지 등에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원하던 온기를 얻었는지요?“그렇게 대단한 건 없었는데, 처음에 간 곳이 독일이었어요. 하이델베르크하고 만하임 사이에 있는 라덴부르크라고 하는 조그만 시골 동네였는데, 거기에 석면을 만드는 큰 공장에 들어갔어요. 그때는 석면이 얼마나 위험한 줄을 모르고 돈을 많이 준다니까 갔죠.(웃음) 거기 노동자가 주로 터키와 그리스, 스페인 등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였어요. 동양 사람은 저 혼자밖에 없었죠. 4개월밖에 안 있었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어떻게 차별당하면서 일하는지를 그때 경험했어요. 떠날 때는 정말 이를 갈면서 ‘내가 이 독일에 다시 오나 봐라’고 생각했죠.(웃음) 어쨌든 사회에서 혜택을 받지 못해 밀리고 쫓겨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어릴 때부터 있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꽃피우진 못했어요.”제주교구장 고위 성직 지냈지만
지난 18년 마음은 편하지 않아
상처받고 약한 이와 늘 함께 해
“더 다가가지 못해 죄송합니다”로마 신학대 마치고 1년 휴가 내
‘예수의 작은 형제회’와 민중 속 삶
귀국 뒤 김수환 추기경 오래 보좌
“교회는 예수 삶을 늘 돌아봐야”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운데)가 부교구장 문창우 주교(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2017년 7월31일 제주생명평화대행진 첫날 행진을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운데)가 부교구장 문창우 주교(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2017년 7월31일 제주생명평화대행진 첫날 행진을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대입 직전에 터진 ‘의미 있는 삶’ 고뇌
강우일은 1945년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2남3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4·19혁명(중3) 때 ‘집에 가서 가만히 있으라’는 학교 지침에 따라 일찍 귀가하면 오히려 종로에 나가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들의 행진을 바라보면서 벅찬 기분에 젖기도 했지만, 또래에 비해 중·고교 시절이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의 인생 행로가 정해진 것은 서울 경기고를 졸업한 뒤 1964년 일본으로 건너간 후였다. 앞서 일본으로 갔던 아버지 강영욱(2012년 작고)이 그를 도쿄로 불렀다. 강영욱은 경북 포항 근처의 강구에서 냉동수산업을 하다가 사라호 태풍(1959년)으로 시설을 잃은데다가 야당 정치인 출신의 장인 때문에 5·16 군사쿠데타 이후 대출 금지 등 정치적 탄압을 받자, 유학 때 살았던 일본으로 사업처를 옮겼다.―처음에는 조치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죠?“원래 신학과에 가려고 했는데 일본은 철학과를 졸업해야만 신학과에 진학하는 시스템이었어요. 그래서 철학과 4년과 대학원 2년을 마친 뒤에 조치대학 신학과에 들어갔어요.”―당시 이른바 명문고였던 경기고를 졸업했기에 선택지가 많았을 텐데 왜 사제의 길을 택했어요?“일본에 가서도 일반 대학에 들어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입학시험이 가까워오면서 뭔가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아주 물밀듯이 솟구쳤어요. 그러면서 ‘세상에 와서 한 번 살다가 가는 인생인데 그냥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 구해서 사는 그런 뻔한 길을 가기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인생을 살다가 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갑자기 많이 하게 된 거죠. 그런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들었어요.”―그런 생각이 저절로 나왔다고요?“저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데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한 번도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대학 입시 한 달을 앞두고, 사회적인 성공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좀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그런 충동이 갑자기 일어나더라고요. 저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그때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에게 상의를 드렸죠. 아버지가 신앙심이 깊으셔서 매일 아침 새벽미사에 가면서 저를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신부님이 조치대 신학대 학장이셨던 게페르트 신부님을 소개해주셔서 그분과 상의하고 이 길을 걷게 됐죠. 조치대학 신학과에 들어가자, 거기서 로마로 가라고 해서 옮겼고요.”―로마 생활은 어땠어요?“서양 사람들은 믿음을 자꾸 논리체계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런 신학이 저한테는 지루하게 느껴졌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신학을 배울수록 자꾸 머리통만 커지는 것 같아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공부하라고 수업을 비워둔 매주 목요일에 저는 ‘예수의 작은 자매회’ 본부에 가서 기도하고 수녀원 짓는 일을 도와주는 노력봉사를 했어요. 그게 로마 신학교 생활 중에 정신적으로 저 자신을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샤를 드 푸코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됐죠.”
강우일 주교가 2013년 9월30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동 해군기지 건설 공사장 앞에서 열린 ‘제주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 출범 2주년 생명평화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강우일 주교가 2013년 9월30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동 해군기지 건설 공사장 앞에서 열린 ‘제주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 출범 2주년 생명평화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그런 면에서 보면, 난곡성당의 주임신부가 주교님이 본래 추구했던 사제의 모습에 가장 가까웠던 시간이 아닐까 싶은데요.“네. 정말 좋았습니다. 난곡은 서울에서 제일 가난한 지역이었지만, 거기 교우들하고 정말 가깝게 느꼈어요. 산동네를 오르내리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드리고 싶었죠. 기쁘게 지냈는데 갑자기 6개월 만에 다시 연락이 와서 그렇게 됐습니다.(웃음)”―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낮은 데로 임하는 실천성 등의 성향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지향과 잘 맞는데, 사제단에 가입은 안 하셨죠?“정의구현사제단은 1974년 9월에 발족했고, 저는 그해 12월에 신부가 됐어요. 제가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돼 추기경 보좌신부를 맡은데다가 제 성격상 나서서 뭘 하는 게 맞지 않아서 사제단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일방직 사건 등을 겪으면서 기도회에 참석하는 등 마음으로는 늘 함께했어요. 1978년에 민주노조를 하다가 회사 쪽에 의해서 똥물을 뒤집어쓰는 등의 탄압을 당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일부가 명동성당에 들어와서 농성을 시작했어요. 추기경 비서로서 제가 왔다 갔다 하면서 뒷바라지를 했는데, 힘없는 사람들을 정부가 마구 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가냘픈 여성 노동자들이 온몸으로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가 힘이 되어주지 않으면 누가 도울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강우일은 김수환 추기경의 뒤를 이어 한국 천주교 최고 지도자가 될 1순위 후보로 늘 거론됐다. 그러나 1998년 서울대교구장 자리에 이어 2006년과 2014년 후임 추기경 임명 때마다 번번이 로마 교황청의 낙점을 받지 못했다.―서울대교구장이나 추기경이 안 됐을 때 실망하지 않았나요?“세간에 그런저런 기대나 얘기들이 있었지만, 저는 그냥 하느님의 뜻이거니 하고 받아들였어요.”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2014년 7월29일 제주시 노형동의 한 공원에서 ‘2014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합류하기에 앞서 ‘팔레스타인 학살을 멈춰라! 우크라이나에 평화를!’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2014년 7월29일 제주시 노형동의 한 공원에서 ‘2014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합류하기에 앞서 ‘팔레스타인 학살을 멈춰라! 우크라이나에 평화를!’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육식 위주는 인간다운 식사 아냐”
강우일은 제주교구장 시절 주교회의 참석 등을 위해 서울에 오면 항상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몸에 밴 검소한 생활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반 시민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하면서 그들의 희로애락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에서다.―2020년은 코로나 등으로 인해 유난히 힘든 한 해였어요. 사람들이 다 지쳐가고 있어요.“올해의 어려움은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세계가 동시에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서로 보듬고 연대하면서 이겨냈으면 합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인간이 얼마나 인간에게 소중한가,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야 인간으로서 스스로도 채워가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됐잖아요. 그러나 저는 이 코로나 사태를 단순히 방역이나 경제 이런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를 잠시 출몰했다가 사라지고 마는 일시적인 바이러스의 하나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고 있고 살고 있는 이 현대 문명의 시스템 전체를 향한 하늘의 질타와 깨우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백신으로 코로나19가 잡힌다 하더라도 또 다른 바이러스가 팬데믹을 다시 일으키는 현상이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경고하고 있죠. 현대 문명 시스템이라면, 우리들 삶의 형태를 바꿔야 한다는 뜻인가요?“주교회의에서 생태환경위원회 책임을 지면서 저도 생태문제에 많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알게 됐는데, 지금 지구가 마지막 위기 단계에 와 있어요. 우리 모두가 기후변화로 그것을 체험하고 있잖아요. 우리 삶의 양태를 바꾸지 않으면, 그래서 근원적인 전환을 하지 않으면 지구가 엄청나게 망가져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어요. 끊임없이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게 하는 현대의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이런 위기를 더 가속화시키고 있죠. 온난화가 진전되면서 밀림과 툰드라 지대의 얼음 속에서 잠잠히 있던 바이러스들이 바깥으로 끌려나올 수밖에 없게 됐죠. 그런 환경을 우리 인간들이 만들었잖아요. 탄소 배출을 중립으로 만드는 정도로는 지구 생태계 파괴에 브레이크를 걸 수 없다고 봅니다. 근원적으로는,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쓰고 더 큰 집에 살고 더 큰 자동차를 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제어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짊어지면서, 우리 모두가 좀 덜 쓰고 덜 먹는 식으로 현대 문명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먹는 것부터 본래의 인간다운 식사로 되돌아가야 해요.”―인간다운 식사라면요?“우리가 어릴 적에는 고기는 일 년에 제사나 생일 또는 큰 축일 때나 맛볼 수 있었을 뿐이에요. 근데 지금은 공장식 축산업이 되면서 회사에서 회식을 해도 다들 고기로 배를 채우고 있어요.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죄 없는 닭과 오리가 집단 도살을 또 당하는데,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을 지키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잖아요.”―이미 기름진 음식에 길들여진 욕망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까요?“결국 각자가 의식적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봐요. 요새 비건 등 채식 위주로 식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굉장히 긍정적인 표징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습관을 바꾸어가는 분들이 있으니까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먹거리 생활 패턴을 바꾸는 운동을 우리가 펼쳐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주교님의 식단은 어떤지요?“저는 되도록 육식은 최소한으로 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나오면 먹는데, 대부분은 채식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몸부림치면서 살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지 못해 하느님께 죄송합니다.” 강우일 주교가 성탄 전날인 24일 오후 &lt;한겨레&gt;와 인터뷰하던 중 사제로 살아온 삶을 회고하다 생각에 잠겨 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나름대로는 몸부림치면서 살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지 못해 하느님께 죄송합니다.” 강우일 주교가 성탄 전날인 24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하던 중 사제로 살아온 삶을 회고하다 생각에 잠겨 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성소수자 차별이나 단죄 안 돼”
강우일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에 대한 성찰과 쓴소리도 서슴지 않는다.―개신교나 가톨릭 할 것 없이 한국 교회들이 건물 신축 등 외양 가꾸기 경쟁을 하는 것 같아요.“교회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세속화되는 그런 과정을 로마시대부터 계속 반복해왔습니다. 지금도 교회가 세속화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세상의 물결에 완전히 떠내려가지 않도록, 결국은 성직자들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초대교회를 이끌던 분들 즉,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사셨던 삶을 성찰하고, 본래의 이상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을 반복해야 합니다.”―개신교 일각에서는 성소수자에게 축복을 준 목사를 징계하는 등 성소수자 차별을 여전히 하고 있어요.“혼인과 가정을 주제로 한 세계 시노드(가톨릭교회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모여 토론하고 결정하는 회의, 2014년)에서 제일 강조됐던 것은 혼인과 가정이 갖는 고유한 역할은 포기할 수 없지만, 성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성정체성에 관한 본성적인 성향을 존중해주어야지 그를 이유로 차별하거나 단죄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낮은 자리에서 약한 이들과 늘 같이 있고 싶어했던 강우일은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서울 한복판에서 긴 시간 머물렀으며, 교구장이라는 높은 자리에도 오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4·3 유족과 강정마을 주민, 세월호 유가족 등 “하소연할 데도 없이 내몰린 힘없는 사람들과 있을 때 가장 보람을 느꼈다.” 높았으되 낮고자 했던 사제의 인터뷰 마무리는 자기 성찰이었다.“저 나름대로는 몸부림치면서 살았지만, 정말 가난한 분들에게 좀 더 피부로 다가갔어야 했는데 그런 면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하느님 대전에 가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사죄해야 할 것 같습니다.”
 phillkim@hani.co.kr, 녹취 홍혜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976936.html?_fr=mt1#csidx3a1f65ba6b86d23bb9b6564b6fe434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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