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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 훼가 좋다.

밤기차를 타고 훼에 도착한 그날부터 비가 내린다. 숙소를 정하고 잠시 쉬다가 비가 멈춘 틈을 타서 거리로 나서본다. 하노이보다 훨씬 조용하고 쾌적하다. 그러나 비가 그치는 것도 잠깐 다시 비가 내린다. 뭐 열대지방의 비는 한 30분 정도 내리다가 그친다고 알고 있어서 그냥 다리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본다. 잠시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내리기를 몇 차례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황산에서 혹시 몰라 산 1원짜리 우비가 가방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우비를 입고 그냥 강변을 걸어 시장까지 가본다. 훼까지 내려와도 날씨는 그저 한낮에 약간 더운 정도다. 비까지 내리니 제법 선선하기 하다.


비내리는 향강


훼는 베트남 마지막 왕조였던 응웬 왕조가 1945년 바오다이 황제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150년간 수도였던 곳이란다. 황궁이 있는 구시가와 여행자 거리가 있는 신시가 사이에 향강이 흐르고 있지만 그저 산책삼아 걸어 다닐만한 거리이다. 대략 비자 날짜를 세어보니 베트남에선 한도시에서 하나 3일씩 묵어도 되겠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노이에서 빼놨던 정신도 챙길 겸 조금씩 천천히 다니기로 한다. 이전 같으면 관광지 갈 시간을 계산해 놓고 날짜가 비면 아.. 뭐 하고 시간을 때우지.. 하는 고민이 먼저 들었는데 이 도시에선 아무 것도 안 하도 쉬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내리는 거리를 쏘다니다가 돌아와 훼의 명물이라는 반코아이에다 맥주를 한잔한다. 아.. 물론 여전히 혼자지만 그것도 뭐 이제 괜찮다.



베트남 빈대떡 반코아이


훼지방의 전통국수, 분보훼. 곁들이로 주는 숙주와 야채를 국물에 넣어 먹는다. 국수에는 살이 무지 많이 붙은 소뼈가 들어있다.

 

다음날도 그저 걸어서 황궁까지 가본다. 훼의 관광지 입장료는 베트남 물가대비 꽤나 비싼 가격이다. 공식적으로 외국인 이중가격제이기도 하다. 황궁과 각각의 황제능 입장료가 오만오천동이다. 내국인도 이만동이나 하니 만만한 가격은 아니다. 가이드북에는 그 비용이 문화재복구에 쓰인다니 기꺼이 지불하자고 쓰여 있다. 입장료라면 이미 중국에서 단련된 몸, 그리 아깝지 않게 낸다. 황궁은 앞의 전각 두어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폐허다. 전쟁 중에 미군에 폭격에 의해 그리 되었다는데 몇 남은 주춧돌들 위로 푸른 풀들만 무성하다. 비내리는 황궁을 걸으며 불과 오륙십년전만해도 여기에 황제라고 불리는 사람이 살았겠구나 생각하니 살아있다는 게 무상하게 느껴진다. 유홍준 아저씨가 쓴 문화유산답사기라는 베스트셀러에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 뭐 표현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요지는 이런거다. 답사의 고수들은 절집보다 절집의 흔적 즉 우리가 무슨무슨 사지라고 부르는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느낀다고.. 뭐 답사의 고수는 아니지만 내리는 비 탓인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다.

 


황궁, 폭격으로 뒷부분은 거의 폐허가 되었다.


그 다음날은 각각의 황제능을 보트를 타고 돌아본다. 응웬 왕실에는 9명의 왕이 있었다는데 그중 아름답다는 3개의 능과 두개의 사원을 보트로 둘러보는 투어다. 이전에는 보트가 아니면 접근이 힘들었다는데 이제 다리가 놓여 쎄옴으로도 접근이 가능하단다. 호치민에서 하노이로 올라가거나 반대로 내려오는 짧은 여행자들을 위해 시내관광과 묶어 하루코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상품화해 놓았다. 나야 남는 게 시간이니 굳이 시내투어까지 묶어서 할 것도 없고 보트투어 가격이 점심 포함 이천동이니 그냥 보트로 돌아보기로 한다. 물론 입장료와 두개의 황제능까지 진입하는 쎄옴 가격은 별도다. 전날 내린 비로 불어난 향강은 그 이름 같지 않게 -향강의 영어 이름은 퍼퓸 리버다- 배설물이 둥둥 떠다닌다.


훼라고 바가지가 아니 사기극이 없겠는가. 첫번째 황제능에 가는 쎄옴을 탄다. 황제능 가는 쎄옴은 대략 왕복 이만동으로 담합이 되어있다는 정보는 입수해 둔 터다. 가격을 물어본다. 이만동이란다. 배에서 쎄옴타는 데 까지 안내해주러 온 꼬마도 쎄임쎄임이라며 빨리 타기를 권유한다. 그냥 탄다. 근데 막상 황제능에 도착하니 이 쎄옴기사, 편도 이만동이라며 우기기 시작한다. 나도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는다. 만동을 건네주면서 받을려면 받고 말려면 말아라하고 버텼더니 왕복은 사만동이라고 끝까지 우긴다. 결국 같은 보트에 탔던 다른 사람들이 타고 온 쎄옴 가격을 확인하고서야 그냥 기다리겠단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만동만 주고 보내고 싶은데 돌아갈 길이 막막하니 그러라고 한다^^ 다음 황제능에서의 쎄옴은 삼만동을 부른다. 깍아서 이만동에 간다. 처음 황제능보단 조금 먼듯도 싶다. 갔다 왔더니 쎄옴 가격을 확인하느라 배안이 시끌시끌하다. 누구는 왕복 이만에, 누구는 삼만에 갔다 왔단다.. 심지어 편도 삼만씩 육만을 준 커플도 있다.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누군가 너는 얼마에 갔냐고 묻는다. 기쁘다. 이만이라고 담담한 척 대답한다^^


앞에서 두 번째 왕인 민망 황제의 능. 베트남 고유의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뒤에서 두 번째 왕인 카이딘 황제의 능, 프랑스의 영향으로 다른 능들과는 달리 유럽식이 많이 가미되었다고 한다.


황제능은 투어만 아니었으면 꽤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베트남의 유적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이번에는 50분입니다, 40분입니다 하는 바람에 거의 단체 관광객처럼 정신없이 다니다 온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사실 관광지로서의 베트남을 생각했을 때 몇몇 자연 경관들과 먹을 것 그리고 베트남 전쟁 정도 외엔 다른 생각은 거의 못한 것이 사실이다. 훼에서 보는 유적들은 전쟁 이전 아니 식민지 이전의 베트남은 끊임없이 주변국들의 침공에 시달리기는 했어도 베트남이 고유의 양식과 문화를 누려오던 나라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러나 유적 어느 곳이나 어디나 전쟁 중의 폭격으로 거의 파괴되다시피 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보트를 타고 돌아오는 향강은 물이 많이 줄어있다. 내가 이 도시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훼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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