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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4/24
    강된장찌개
    무나
  2. 2006/04/24
    감자브로콜리볶음(2)
    무나
  3. 2006/04/08
    봄은 누구에게나 봄이어야 한다(1)
    무나
  4. 2006/04/08
    오이도라지무침
    무나
  5. 2006/03/25
    정동진의 해돋이보다(1)
    무나
  6. 2006/01/17
    구해줘야할 라디카는 없었다(2)
    무나
  7. 2006/01/17
    제 몸 망치는 줄 모르고(3)
    무나
  8. 2005/12/31
    도시빈민여성들의 자립과 레비스와의 대화(1)
    무나
  9. 2005/11/30
    반칠환의 시 두편(1)
    무나
  10. 2005/11/23
    달거리대와 갯벌의 여전사(3)
    무나

강된장찌개

  • 등록일
    2006/04/24 21:27
  • 수정일
    2006/04/24 21:27
 재료; 불린 표고버섯 1/2컵, 양파 1/2개, 대파, 청양고추, 홍고추

     멸치다시마국물 ; 국멸치 7마리, 다시마 사방 10cm 1장, 물 1과 1/2컵

양념; 된장 2큰술, 고추장 1큰술, 다진 마늘 1큰술


1. 불린 표고버섯, 양파, 홍고추, 청양고추, 대파를 작게 사각모양으로 썬다.

2. 물과 멸치와 다시마를 끓여 국물을 우려내어 육수를 미리 만들어둔다.

3. 뚝배기에 육수 1과 1/2컵을 넣고 된장과 고추장을 풀고 마늘을 넣는다.

4. 썰어둔 표고버섯, 양파를 넣고 보글보글 끓인다.

5. 대파와 고추 썬것을 넣고 잠시 더 끓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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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브로콜리볶음

  • 등록일
    2006/04/24 21:23
  • 수정일
    2006/04/24 21:23
 

재료; 감자 2개, 브로콜리 1/4송이, 양파 1개, 마늘 5개, 슬라이스 치즈 1장

기타 ; 올리브유, 소금, 후추 


1. 감자는 긴 쪽으로 반을 나누어 얇고 길쭉하게 썰고,

   양파는 채썰고 마늘은 편썬다. 브로콜리는 작은송이로 떼둔다.


2. 감자를 한번 물에 씻어건져서 물기가 축축한 채로 그릇에 담고 전자렌지에 넣고 렌지용 뚜껑을 닫고  8분 돌려서 익힌다. (또는 전자렌지용 찜기에 물을 약간 붓고 감자를 올리고 뚜껑을 닫고 돌린다.


3.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썰어둔 마늘과 양파와 브로콜리를 넣고 볶는다.

  볶아지면 익힌 감자를 넣고 함께 살짝 더 볶는다.


4. 소금과 후춧가루를 넣는다. 완성접시에 담고 체다치즈를 가위로 길쭉하게 썰어서 군데군데 얹는다.


5. 다시 전자레인지에 넣고 전자레인지용 뚜껑을 덮고 30초간 돌려서 치즈가 살짝 녹으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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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누구에게나 봄이어야 한다

  • 등록일
    2006/04/08 02:32
  • 수정일
    2006/04/08 02:32

4월 2일 대추리 촛불집회에서 박노해 시인이 읊었다는 시

집회에서 듣진 못했지만,

읽고 있노라면 눈물이 저절로 넘쳐흐른다.

-------------------------------------------------

 

봄은 누구에게나 봄이어야 한다

- 박노해

 

우리의 소원은 부자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원은 출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원은 올해도 농사짓는 것이다

허리 숙여 불볕이랑을 기며
태풍 장마에 애간장을 졸이며
누구도 대신하고 싶지 않은 일
누구도 대신하고 싶지 않은 자리에서
올봄에도 내 땅에 씨뿌리는 것이다

누가 내 가난한 소망을 가로막는가
누가 내 소박한 봄날을 깨뜨리는가
누가 사람을 먹여 살려온 이 들녘에
사람을 죽이는 전쟁기지를 세우려 하는가

너희가 무력으로 내 땅을 강점하고
너희가 총칼로 내 봄을 짓밟는다면
이제 우리는 나라도 없다
이제 우리는 정의도 없다

미군의 민주주의
미군의 안보
미군의 권리에
내 땅에서 울부짖고 쓰러지고 쫓겨나는 나라라면
나라도 없는 우리는 이제부터 평화의 독립군이다
농사를 내려놓고, 삽도 호미도 내려놓고,
먼저 평화의 농사를 짓겠다

쫓겨난 빈손으로 촛불을 들고
너희들의 미사일
너희들의 전투기
너희들 탐욕과 전쟁의 마음을
내 안에서 조용히 불사르겠다

불살라, 이 새싹같은 촛불을 들고
저 우는 들의 눈물을 기름부어
너희들 무기의 어둠을 불사르겠다
우리들 인간의 봄을 시작하겠다

이제 나라도 정의도 없는 우리는
미군의 총칼에 울부짖고
미군의 폭력에 피흘리는
지구마을 어린 것들을 보듬어 안고
국경없는 평화의 봄을 꽃피우겠다

이 들녘에 떠오르는 아침해는
누구도 홀로 가질수는 없듯이
이 들녘에 차오르는 봄은
누구도 홀로 맞을 수는 없듯이
대추리 도두리에도
전쟁의 바그다드에도
새만금에도
쿠르디스탄에도
봄은 어디에서나 봄이어야 한다
아아 봄은 누구에게나 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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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도라지무침

  • 등록일
    2006/04/08 01:42
  • 수정일
    2006/04/08 01:42
재료::도라지한줌 오이1개 양파반개
양념:: 고추장(1)고추가루(0.5)설탕(1)식초(1.5~2)다진마늘(0.5)깨
 
 
 
1. 도라지는 소금넣고 주물르고 난 뒤 행궈준다.
(쓴 맛을 빼기 위해)
2. 오이는 씻어서 반으로 나눠 어긋썬다.
3. 양파도 먹기좋게 썰고, 모두 볼에 담는다.
4. 위의 양념을 넣어 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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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의 해돋이보다

  • 등록일
    2006/03/25 00:51
  • 수정일
    2006/03/25 00:51

 

 

대추리의 일몰이 더 아름답더이다.

어제와 오늘은 모판에 흙을 담았습니다.
모 파종을 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 모가 무럭무럭 자라 황새울 들녘이
지는 해와 함께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모습을

꼭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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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야할 라디카는 없었다

  • 등록일
    2006/01/17 16:49
  • 수정일
    2006/01/17 16:49
피자매연대에 달거리대를 만들어주던 라디카가
출입국에 붙잡혀 고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가 잡히기 바로 전에 어느 잡지에 기고를 했다고 해서
카피해 올수 없을가 여기저기 봐도 없더군요.
그런데 오늘 믹스터미널에서
http://mixterminal.net/rc/rc.html
라디카의 글을 만났습니다.

라디카가 잡혀간 날, 날개 다친 소중한 새 한마리를
옥상에서 떨어뜨린 것 같았습니다.
내가 손을 놓아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손가락에 조금만 더 힘을 주고 있었더라면 떨어지지 않을 새를
내 무관심과 방관으로 떨어뜨린 것 같았습니다.
그후 내내 그저 무기력해져 있었습니다.
내 책임이 아닌데도 내가 미안하고 내가 죄스러웠습니다.

아마도 내 머릿속에 '라디카 구출작전'이라고 명명된,
어쩌면 '허위의식'도 약간 섞인 그런 알량한 프로젝트가
가동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강인하고 낙천적인 여성을 내가 감히 "구하려" 했다니
주제를 넘어도 한참 넘었었던 게지요.
구해줘야 할 라디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을요.
그저 옆에서 함께 걸어가야했을 친구, 동지가 있었을 뿐인것을요.

요즘은 날마다 인도와 네팔의 지도를 펼쳐보며 그녀에게 가는 길을 가늠해보고 있습니다.
이번 2월 초에 방글라데시에서 자히드를 만나고 차로 유명한 인도의 다르질링
부근을 거쳐 네팔의 국경을 넘어갈 것 같습니다.
버스를 타고 약 이틀을 덜컹거리며 가야 카투만두에 닿을 수 있겠죠.
라디카가 벌써 그립습니다.


라디카의 글

안녕하세요. 저는 13년째 한국생활을 하고 있는 네팔인 미등록이주노동자 라디카입니다. 처음 한국에 올 때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몰랐습니다. 저는 한국 땅을 밟으며 2~3년만 고생하고 돌아갈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에 둔 가족이 있기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미래 걱정 때문에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한국에 온 것 입니다. 저희 고향 네팔은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 대부분 가난과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에 가는 게 미래의 부품 꿈 중 가장 행복한 생각 이였습니다. 그 꿈을 이루는 저는 그리도 가보고 싶던 나라 한국에 도착해서 한국 땅을 밟았을 때 너무나 좋았고 그 감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행복해 했습니다. 저의 행복한 감정이 가시기도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에 빠졌습니다. 저는 네팔에 있을 때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장에서 어떤 일을 할까? 그 일은 어떻게 해야 잘 할까?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을 할까? 문화를 극복하고 적응하기도 전에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 안에 꽉 차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사장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힘들게 살아온 날을 돌이켜 보자면 지금도 어떻게 버텼는지 신기하기도 합니다. 제가 살았던 네팔과 상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사회적 환경, 문화적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특히 한국음식이 적응이 안됐습니다. 처음에 공장에서 일할 때 출근시간 정확하게 있지만 퇴근시간은 없었습니다. 새벽2~3시까지 일하면서 운적도 많았습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인권적인 모독을 당했지만 참고 일만 했습니다. 그 때 나이가 21살 이였습니다. 지금까지 버텨온 건 아마도 고향에 있는 가족과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고 일한 것이 큰 힘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몇 년이 훌쩍 지나가자 이제 한국생활에 적응되어 불편하지 않게 살 정도가 됐습니다. 처음에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는 한국 사람을 보고 신기했는데 이제는 저도 밥 먹을 때 김치는 꼭 있어야 됩니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도 네팔음식보다 한국음식을 더 많이 해먹습니다. 특히 김치찌개 삼겹살 청국장은 제가 좋아하고 잘 해먹는 음식입니다.

한국에 와서 고생하는 것이 무엇인지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 알게 됐습니다. 20대 초반에 와서 10년을 훌쩍 넘어 30대가 됐습니다. 한국에 친구도 조금씩 생겼고 한국의 지방 사투리까지 알게 됐습니다. 한국 문화도 배우고 재미있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2003년 7월 말부터 고용허가제가 통과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4년 이상자 이주노동자들은 각자의 나라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그 때부터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단속추방의 위협에 시달리며 고통을 당했을 겁니다. 곳곳에서 단속추방의 위협에 시달리는 친구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도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 됐습니다. 공장에 지속적으로 일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일을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같이 일하는 한국 사람들이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짜증이 나는 화풀이를 이주노동자들에게 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과 공장 사장이 싸우면 그 불똥은 이주노동자들에게 튑니다. 사장과 싸우고 나간 한국 노동자들이 경찰에 신고하거나 혹은 출입국에 신고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출입국 직원에게 끌려간 이주노동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일 할 때뿐만이 아닙니다. 기숙사에서 한국 사람을 잘 못 만나면 쉬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늦게까지 술 먹고 밤새 소리 지르고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조용히 해 달라고 하면, 신고한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실제로 출입국 사람이 기숙사에 들어와서 끌고 간 적도 있었습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는 신분 때문에 사람을 피해 다니고 의심해야 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제 친구들은 친구를 만나러 가다가 혹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지하철, 버스 정류장 장소를 가리지 않은 채 잡혀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 한국 땅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특히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미래는 없을 것만 같습니다.

최근에 시민혁명으로 잘 알려진 자유와 박애의 나라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격리, 탄압, 차별 때문에 소요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저에게는 프랑스에 사는 친구는 없지만 독일에 살고 있는 몇몇 친구들이 있습니다. 독일에 있는 제 친구들은 저와 똑같이 관광비자로 독일에 갔습니다. 그리고 2,3년 정도 일을 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와 같이 해외에 나가 있는 친구들의 말을 들어 보면 한국에 있는 저를 비롯한 여러 이주노동자들보다 힘든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단속의 불안감 없이 맘 편히 일하고, 언제든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그 친구들이 저는 부럽습니다. 저는 한국에 온지 13년이 다 되어 가고 아들과 어머니 얼굴을 그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은 단속과 강제추방으로 인한 심리적인 불안감으로 매우 많은 곤란함을 겪고 있습니다. 그 억압 때문에 ‘차라리 죽어버리자’라는 생각들도 가끔씩 합니다. 실제로 자살을 하는 이주노동자 소식도 들려옵니다. 프랑스 사태를 미디어를 통해 보면서 물론 그런 심각한 사태까지 이르지 않겠지만 한국정부나 한국 사람들도 이주민을 위한 여러 준비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이주민들은 이주에 관한 한국정부의 정책과 법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미등록이주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어려움들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들이 많이 있어도 사랑하는 한국 친구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힘들 때 힘을 주고 많이 도와주고 언니처럼 누나처럼 친구처럼 딸처럼 사랑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현재 한국에는 여러 나라에서 여러 민족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40만이나 살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해서 한국 사람이 일거리가 없다는 말을 간혹 듣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이 기피하는 일들을 이주노동자들이 하고 있다는 것, 어렵고 힘든 일들을 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노동자로 생각해 주길 바랍니다.

실제로 올해 가을 마석에서는 잡혀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탄 경찰차를 한국인 사장과 공장사람들이 막아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제가 일을 찾으러 나가 보면 공장 사장님들은 ‘당신이 일하는 건 우리도 좋지만 단속 들어와서 당신이 잡히면 우리는 괜찮지만 당신이 힘들다. 우리도 맘이 너무 안 좋고...’ 그런 이유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사장님들도 힘들다고 이야기 합니다.

한국정부가 미등록이주노동자를 단속하고 강제 출국시키는 것이 현 미등록이주노동자문제의 해결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를 단속하고 강제추방을 시키고 나면 다시 새로운 이주노동자들이 유입됩니다. 이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6개월, 1년 있으면 이탈해서 다시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됩니다. 이 불법의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단속과 강제추방이 해결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재 있는 노동자에게 일할 수 있는 정책을 추구하기를 한국정부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현재 저는 건강이 매우 안 좋고, 단속으로 인해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한국친구들과 몇 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작은 대안무역과 함께 제가 만들고 있는 악세사리와 비즈공예를 파는 것입니다. 작은 대안무역은 강제추방 당한 친구들의 어려운 생활을 위해 그들이 본국에서 만든 물건들을 작은 형식의 무역을 통해 파는 활동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만드는 것을 누가 살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기쁨을 느낍니다. 물론 저에게 많은 돈이 되는 활동은 아니지만 한국친구들과 함께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피자매 연대와 함께 달거리대(대안생리대)를 만드는 일입니다. 처음에 제가 계속 일을 못해서 생활이 어려운 것을 듣고 피자매 연대에서 하나씩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시작했습니다. 저도 대안생리대에 대해 알게 되고 여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는 부분이 생기기도 하면서 서로의 활동을 연대하는 지점에 대서 큰 기쁨을 느낍니다. 이런 것들이 저와 한국인 친구들과 맺고 있는 연대입니다. 올해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이 작은 연대와 소통들이 저에게는 한국과 관계하는 또 다른 대안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점들이 점점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 이 글은 라디카가 11월 말지에 기고한 글이다. 이 글을 쓰고 며칠 후 그녀는 단속에 걸려 네팔로 돌아갔다.



Text by: 라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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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 망치는 줄 모르고

  • 등록일
    2006/01/17 09:23
  • 수정일
    2006/01/17 09:23

다들 멀쩡해보이는 사람들도 한가지 두가지의 마음의 병이든, 몸의 병이든 앓고 있다는 것 같다. 마음의 병이든, 몸의 병이든, 불면이든, 발가락의 고질적 습진이든 떼어버리려 안간힘을 쓰기보다 서로 돌봐야 다스려지는 듯 하다.

그제 이비에스에서 본 다큐멘타리에 보니 이 세상의 바이러스들, 조류독감이든 HIV든 다들 인간이랑 같이 살아볼려고 그 생난리를 치는 거란다.

숙주인 인간을 죽이는 것도 그네들의 입장에서도 치명적. 그래서 될수 있으면 인간을 죽이지 않고 살짝 더부살이 하다가 다른 인간으로 옮겨가는 기술이 그네들이 평생을 연마해야할 생존기술인 거다. 사람을 아작네는 조류독감이나 HIV는 아직 초보 하발이들이라는 얘기다.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니, 참 '현대 문명인'들이란 이 바이러스보다도 생존능력이 없는 존재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 그 자리에서 부시고 빼앗고 모두 자기것으로 만들려고 든다. 제 몸 망치는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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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빈민여성들의 자립과 레비스와의 대화

  • 등록일
    2005/12/31 16:50
  • 수정일
    2005/12/31 16:50
도시빈민여성들의 자립과 레비스와의 대화
- 작은자리 영농사업단에서의 대안달거리대 워크샵 후기

12월 26일 대안달거리대 워크샵을 하기 위해
작은자리 영농사업단이 있는 시흥 변두리의 유기농 재배 단지를 찾았다.
작은 자리 영농사업단은 시흥시가 지역의 저소득층 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한
창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레비스를 팀장으로 해서 약10명의 여성분들이 공동으로
2000평 대지위에 유기농 하우스 재배를 하는 곳이다.

레비스라는 여성의 존재는 피자매연대를 시작할 무렵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달거리대만들기 공개 워크샵을 홍보하기 위해
생태와 환경 관련된 웹사이트들을 검색하며 웹자보를 뿌리고 있었다.
우연히 "죽기살기"라는 사이트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레비스의 개인 홈페이지였던 것이다.
글 하나 하나에 서려있는 자유, 여성, 제3세계, 생태를 어우르는 매력적인 글들은,
삭막하고 비인간적인 직장 생활에 시달리는 나에게 단비 같은 존재로,
늘 내게 의지만 있으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도 하고,
빨리 이런 반생태적인 생활을 때려치우라는 재촉으로도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 네팔, 인도 여행을 계획 중인 나에게 그가 쓴 인도 여행기는,
시중에 출판되는 오리엔탈리즘으로 가득 색칠된 기행문들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그래서 만나면 네팔, 인도 여행에 대한 조언들을 좀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내심 있었다.

12시가 조금 넘어 컨테이너 박스 두동으로 연결된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파트와 빌딩들이 난립해있는 가운데 덩그런히 세워져있는 비닐하우스는 무척 생경하게 느껴졌다.
문득 '도시농업'이라는 화두가 떠오르기도 하고, 얼마 전에 번역했던 마리아 미즈의 말도 생각이 났다.
서브시스턴스(자급, 자립) 지향은 산골짜기 시골구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날품팔이로 전락한 여성들, 빈민들의 생존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
베를린 교외에 난민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공동텃밭 이야기가 머리속을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참조 : 마리아 미즈의 “서브시스턴스 관점”)

사무실 안에서는 방금 점심식사를 마친 듯 청국장의 꼬리꼬리한 냄새가 풍겨져왔다.
레비스와 점심을 먹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달거리대 만들기를 시작했다.
모두들 몇 번에 걸쳐 신문 보도 자료 등을 통해
일회용 생리대와 탐폰의 유해성에 대해 ‘학습’했다고 하니 그 부지런함이란...
지루한 ‘설명’ 따위는 생략하고 시작하자마자 달거리대 만들기에 돌입했다.
다른 워크샵과 마찬가지로 조금만 눈을 딴 데로 돌리면,
한 사람이 먼저 저 만큼 나갔다가 시접을 그리지 않고 자른다든지,
천의 안을 마주대고 꼬매고 있다든지 하는 사소한 실수들이 일어났지만
분위기는 그저 화기 애애. 홈질을 설명할 때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제일 간단한 바느질”이라고 설명하니, “그것 참 뭣 같네.” 하며
곧바로 질펀하고 야한 농담들의 향연으로 이어진다.
한 분이 “우리 선생님이 우리 흉보겠어. 고만해.” 하길래,
나도 이미 갈 데까지 간 유부녀이니 괘념치 말라 응수했다.
남성 중심적인 부르주아 성도덕이 끼어들 틈이 없는 유쾌한 대화들이었다.

만들기를 즐겁게 마치고
잠시 레비스와 여성들이 중심이 된 소규모 유기농 사업단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레비스가 생각하는 것은, 우선 여성 일자리 창출에 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실제적 자활과 자립을 위해서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개인 귀농이나 이상을 지향하는 공동체운동으로는 안 된다.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농업이면서도 어느 정도 수익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농업 전반의 현실로 볼 때, 쉬운 문제 같지는 않다.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으로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통과 판매가 정말 중요할 텐데,
여기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물어보았다.
작은자리 영농단에서는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알음알음 주문을 받고
직접 레비스가 차로 배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피자매를 비롯한 여러 홈페이지에 유기농 생산물들을 선전하고 주문을 받으면 어떻겠냐는 제안에,
유기농 농산물은 지역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맞고,
작은자리도 되도록 지역중심으로 판매하려고 한다는 대답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생협에 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레비스는 초기 생협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부지게 현 상황을 요약했다.
최근 웰빙 바람 이후에 계속해서 번져나가는 녹색가게, 유기농가게 등은 말할 것도 없이,
기존의 생협들도 점점 소비자 중심으로, 지역보다는 대도시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역과 생산자에 기반한 초기 생협운동이 점점 자본과 시장으로 포섭해 들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면 맛과는 상관없이 더 때깔 고운 것, 더 배송이 빠른 것,
더 편리한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결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지역의 자립과 자연의 순환리듬에 맞춘 생태적 가치관이 다시 속도와 가격 경쟁으로 대체된다.

생산이나 유통, 판매 어느 것 하나 쉬운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단순히 도시빈민여성의 부수입이 아닌 생계를 건 유기농업이란 도무지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사회의 변혁이란 도도해 보이는 대세의 흐름에 편입하거나,
중간에 막아서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지 않고 지줄대는 다양한 비폭력 직접행동과
끊임없는 개개인들의 자립실천의 노력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인도에 가서 반다나 쉬바를 직접 만나보고 올만큼
쉬바의 반세계화 운동과 에코페미니즘에 깊숙이 공감하고 있는 그녀와 소통하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 지역과 여성의 진정한 자립은 아나키적인 저항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그의 말은
평소 마음 속 깊이 담아두고 있던 내 생각을 그대로 공명해주고 있었다.
앞으로 레비스와 작은자리 식구들을 자주 찾아가 많은 걸 배워야겠다고 다짐해본다.



* 아래 글은 레비스의 홈페이지 ‘죽기살기’에서 퍼온 달거리대 만들기 워크샵 후기이다.



소리없는 저항의 손놀림-농한일기(22)  

"사람이 집을 짓는 것은 새가 둥지를 드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만일 사람이 자기 손으로 집을 지어 단순하고 정직하게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면
새가 그런 일을 하면서 언제나 노래하듯이 사람도 시심이 깊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 우리는 찌르레기나 뻐꾸기처럼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있지 않은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



농한기 학습 2회분은 <생활과 공예>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자료 학습을 하고
26일 대안생리대 만들기 교육에 대비한 '왜 생리대를 직접 만들어서 사용해야 하는가?'
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를 하였다.
도시소비적 삶의 기생성을 배운 터였고 자급자족의 생활을 경험하기 위해 팀원들
에게 유용하며 자녀들에게도 학습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대안생리대 만들기>였다.
또한 친환경 유기농업을 표방한 우리로서는 생리대의 원료에 대한 것까지 미칠
수 있는 것이었다.
간디가 물레를 돌리는 일을 왜 저항의 수단으로 사용했는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대안이란 결국 저항성을 띌 수 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2회분 학습 자료는 본 홈페이지 펌자료실에 있음)





26일 대안생리대 교육을 진행할 선생님은 내 홈피 방문손님 중의 한 분인 매닉
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피자매연대 이미영씨였다.
그 분은 나의 취지에 공감을 해서 무료강습을 하러 짧지 않은 거리와 시간,더더욱
월차까지 내어서 와 주었다.

"이거 안 새요?"
팀원들의 첫질문이었다.
"샐 수도 있지만 키퍼라는 것을 이용하면 거의 안 새요"
알록달록한 융천이 펼쳐지고 이미 만들어진 샘플을 내어놓은 것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호기심을 표현했다.

강사의 진행에 따라 팀원들은 제단을 하고 박음질를 하기 시작한다.
예쁘게 바느질하는 것에 전혀 자신이 없는 팀원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모두 정성을 다해 바느질을 해나간다.
속도가 천차만별, 강사가 한 사람 한 사람 지도를 한다.




제일 먼저 완성을 하는 이는 역시 손놀림이 빠른 2005년 반장님이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완성을 해 나간다.
옆사람이 완성하면 어떤 그 옆사람은 긴장을 하기도 한다.
어떤 그 옆사람은 아랑곳없이 한 땀 한 땀 손바느질을 해나간다.
시작한 지 2시간 30분이 지나자 거의 모든 팀원들이 완성을 했다.





한 곳에 모여서 직접 만든 생리대를 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생애 처음 자신이 몸을 위해 생리대를 만든 팀원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00 가 처음 생리하게 되면 내가 직접 만들어서 선물해야지"
엄마가 만들어서 자식에게 주는 생리대.




70년대, 그 당시에는 거의 모든 가정이 집 밖의 재래식 화장실을 가지고
있었다. 아침에 나는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뒷처리를 하는데 종이에 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엄마'를 울부짖으면서 뛰쳐나왔다.
울면서 엄마에게 엉덩이에서 피가 나왔다고 했고, 엄마는 '왔구나'라고 태연자약하게
방 안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주었다.
빨간 팬티와 가제 수건같은 것으로 도툼한 기저귀였다.
팬티에 조그마한 기저귀를 대고 입으라고 했다.
"아픈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하는 거야. 여자가 된 거야."
여중생이었지만 월경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랬다.
중학교 때는 이렇게 가제 패드를 사용하였다.
저녁에 돌아오면 빨아서 부엌 빨래줄에 널어서 말렸다.
빨 때도 오빠가 볼까봐 서둘러서 일을 끝내곤 하였고 어떤 때는
세수대야에 담궈놓고 있다가 깜빡 잊어서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었다.
그래서 월경을 하는 날이면 화장실에 앉아서 월경신에게 기도를 올리곤 하였다.
"제발 월경을 안하게 해주세요."
월경할 때 배가 아픈 것만이 아니라 불편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회용 패드를 사용한 것이 아마도 여고시절이었던 것 같다.
'후리덤'이라는 기저귀만한 것이 나오고 약국에서 팔았다.
월경하는 날이면 8살 아래인 남자 막내에게 약국 심부름을 시켰고
그 녀석은 멋모르고 생리대를 사오곤 하였다.
막내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심부를 하기를 거부했다.





어떤 여성들이든 월경이 불편스러운 일이지만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사용하는 더욱 불편한 일을 하는 것이지만
이것에 익숙해지면 그것도 그리 불편한 것이 되지 않는다.
나의 나이대에서는 최소한 중학교 때까지는 집에서 만든 생리대를 사용했고
우리의 부모 세대들은 거의 평생을 만들어서 사용했던 터였다.

일회용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생리대(달거리대)를 깃점으로 손수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일회용을 폐기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교육을 받은 우리 팀원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생리대 만들어 사용하기
운동을 위해 학교, 기관 등에 교육자로 나서게 될 것이다.
진정한 농의 가치는 자신만을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듯이.

일회용.
'넌 일회용이야' 이런 말을 듣기 원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회용이 되지 않기 위해 소리없는 저항을 해나가기 시작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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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칠환의 시 두편

  • 등록일
    2005/11/30 09:51
  • 수정일
    2005/11/30 09:51

풀꽃세상에서 퍼온 반칠환의 시 두편...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바퀴  - 속도에 대한 명상5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

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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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거리대와 갯벌의 여전사

  • 등록일
    2005/11/23 16:49
  • 수정일
    2005/11/23 16:49

지난 여름 부안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부안에 갔다.

방폐장을 반대하기 위해 매일 저녁마다 시내를 꽉 매운

촛불시위의 인파로 들떠 있던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거리의 풍경이었다.

부안성당 안에서 영화제가 조용히 치뤄지는 가운데,

나는 피자매연대 친구들과 함께 대안달거리대를 홍보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별로 없던 터라 달거리대를 만들며 수다를 떨다가,

몸이 뻐근해지면 옆 공터에서 그 좋다는 천연염색을 했다.

다라이에 황토와 숯 물을 퍼다 T셔츠를 치대고 또 치대기를 반복,

20분정도를 치대고 빨랫줄에 널어 햇빛에 바짝 말린다. 

다 마르면 또 다라이에 넣어 치대기를 반복했다.


천연염색과 피자매 홍보가 끝나고

부안영화제 준비팀의 짱돌씨를 따라 계화도엘 갔다.

주민들의 힘으로 방폐장 건설이 성공적으로 무산되었지만, 

새만금 반대는 눈물이 날 정도로 절박해진 상황이다.

"4공구를 터라!" "생명의 숨통을 터라!"

계화도는 새만금 반대 투쟁의 오랜 근거지이자,

이제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다 끝나가는 시점에서 마지막 투쟁의 보루와 같았다.

 



계화도에서도 갯벌체험 학교 '그레'는

활동가들이 다양한 활동들을 펼쳐나가기 위해 모이는 집합소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레에 도착한 것은 저녁 어스름 무렵.

짱돌씨가 힘들게 만든 갯벌 영화제 무대를 보여주겠다며 우리를 갯벌로 인솔했다.

갯모기들이 사정없이 달려드는 가운데 바라본 바다,

물을 따라 수평선으로 달려 나가던 시선이 우뚝 선 무언가에 가로막힌다. 

갯벌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새만금 방조제.

그 위로 한 웅큼 달무리를 가득 머금은 노란 달이 떠 있다.

영화제 무대는 만조가 되어 밀려든 물속에

아름다운 누각이 되어 달빛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었다. 

무대로 가기위해 바지를 걷고 물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보드랍고 폭신한 뻘이 발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자 보세요. 이 아름다운 갯벌이 곧 사라져 버릴거에요.” 하는 짱돌의 말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갯벌에서 그레로 돌아오니 사람들은 삶은 닭과 막걸리를 펼쳐놓고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낯선 사람들 속에 넉살 좋게 어울리지 못한 채,

구석에서 낮에 만들다 만 달거리대를 꺼내서 혼자 바느질하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인 듯 얼굴이 검게 그을린 한 아주머니가 말을 건다.

"이게 뭐에요?"

면으로 만든 생리대라고 대답하자 신기한 듯 쳐다본다.

“아주머니는 생리대 뭘로 쓰세요?"

내 질문에 조금은 쑥스러운 듯,

"난 그냥 휴지로 대충 대. 우리 애는 그 뭐시냐, 사다가 쓰는거, 그거 쓰는데,

나는 기냥 휴지 한장이면 돼. 양두 얼마 없구."

"사다가 쓰는 일회용 생리대는 우리 몸에도 안 좋고 환경도 엄청 파괴한대요.

휴지도 좋지 않고요. 저랑 같이 이거 만들어서 써 보세요.

양도 별로 안 많으시다면 천으로 이렇게 만들어서 쓰는 게 좋아요."

내 말에 아주머니는 “귀찮아. 그냥 휴지로 써도 되는데...”하며 손을 저으신다.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려 하자 아주머니는 바쁜 듯 냉큼 부엌으로 내빼신다.

작업은 대략 실패한 듯,

새만금사업 반대를 하는 주민분이니 생태적인 면생리대 더욱 공감하리라는 나의 기대가

살짝 무너지는 순간.


다음날 영화제는 전날의 무대 앞에서 조촐한 마을 잔치처럼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무대에서 떨어진 갯바위 위에 삼삼오오 물새 떼처럼 앉았다.

스피커가 무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반주와 가수의 노래가 엇갈리고, 노래와 관객의 박수 소리가 엇갈리는

난장판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달빛 아래, 갯벌 위에, 유쾌하기만 했다.

바야흐로 시간은 밤 10시가 다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다리던 영화 "갯벌의 여전사" 상영시간이 돌아왔다.

"갯벌"에 "여성"이 붙었다. 거기에서  "전사"라면 얼마나 래디컬하랴!

벌목을 막기 위해 나무를 껴안은 인도의 여성들의 운동,

다국적 기업들의 상업작물인 커피나무 사이사이에 온갖 곡식과 채소들을 심은

아프리카 여성들의 자급 실천 투쟁.

그만큼 여기 계화도의 "갯벌의 여전사"도 내 입맛만큼 에코페미적이고 래디컬한 장면을

연출해주리라는 기대. 몇 시간을 버스를 타고 일부러 내려온 부안이 아니더냐!

내 관념을 치장하고 있는 온갖 "에코"들이 메아리치고 있는 가운데,

영화 속에서 낯익은 한 여성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장면은 멀리 수평선과 섬들이 보이는 해창 갯벌 어디쯤일까?

갯바람 속에 한 여성이 생합을 캐기 위해 열심히 그레질을 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전날 밤 달거리대를 보며 뭐냐고 물어보던 그 아주머니가 아닌가!


그의 이름은 유 기 화.

평화로운 삶을 위해 갯벌로 들어와

생합을 잡으며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고 말하는 그는

자랑으로 내보인 대안달거리대가 무색하리만큼

도시의 “대안” 그 너머에 갯벌과 이미 하나가 된 삶을 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갯벌과 하나 된 삶을 지키기 위한 계화도의 주민들과 함께

도시인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가는 새만금 사업의 중단을 요구하기 위해

찬 바람부는 청화대 앞에 일인시위를 하며 열심히 투쟁중이다.

그런 그에게 알량한 지식과 대안생리대를 들이대며,

그의 생태감수성을 자의적으로 판단하려 들었다.


마리아 미즈가 말했던가,

“서브시스턴스 없는 저항 없고 저항 없는 서브시스턴스 없다”고.

글로벌 자본주의의 경쟁과 착취의 구조 속에서

지역의 자치와 자립이란 자본주의의 개발체제와 대량생산소비체제에 대한 저항 없이는 불가능하고, 또 반대로 이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 가능해지려면

바로 “우리의 것을 우리가 길러 먹고사는” 서브시스턴스, 그 위에 선

자립과 자치가 토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

그레질하던 그녀의 모습 위에 오버랩 되는 그녀의 일인시위 기사를 읽으며

나는 비로소 서브시스턴스와 저항이 하나 되는 것이라는 엄연하고 절박한 진실 앞에

숙연해진다.

그러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대안생리대 운동이 과연 어디까지 근본적일 수 있을까?

어디까지 “래디컬”해질 수 있을까? 어디까지 내려와 흙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소비와 생산이 분리되고, 개인과 개인이 찢어져 있는 도시의 생활 속에서

대안생리대는 또 하나의 웰빙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대안생리대를 직접 내손으로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자급이고 자치인가?

그 재료인 면은 목화 한 송이 이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제초제와 농약을 필요로 하는 헐값의 유전자 조작 목화이기에,

이미 그 목화 자체가 환경파괴와 농민들의 자치적 삶의 파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또, 대안달거리대가 이 사회의 진정한 대안이 되려면,

재료 자체가 친환경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생산, 유통, 소비와 폐기, 모든 것을 포함해서

다 대안적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면화를 길러내는 손, 그것을 면으로 짜는 손,

그것을 달거리대로 만드는 손, 그것을 사용하는 손, 그것을 버리고 처리하는 손,

이 모든 손들의 관계, 다시 ‘사회관계’라고 하는 우리들의 모든 관계망들도

모두 대안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동안 대안달거리대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석연치 않은 마음의 실마리가

어느 정도 잡히는 듯하다.

모든 것이 물신화되고 상품화된 도시의 때를 버리지 못한 채 “대안”을 논하다 보니,

“대안”의 의미마저 물신화되고 관념화되어

시장의 교환가치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그 무엇쯤으로 여겼었나 보다.

육체와 삶은 상품과 소비의 홍수 속에 갈갈이 찢어지더라도

마음은 한 가닥 행복과 안정의 주술 속에 놓이고 싶은 나머지

이렇게 살아도 충분히 생태적일 수 있고 대안적이라며 속으로 거짓말 치고 있었나 보다.

어서 빨리 이놈의 정신분열에서 벗어야 한다.

그래서 천성산의 땅에 몸을 낮추어 뭇 생명들의 신음소리를 들은 지율스님처럼

그레질하는 갯벌의 여전사들처럼, 세 번 걷고 한번 땅에 귀 기울이는 삼배일보처럼

몸을 낮추어 땅과 가까워져야 한다.

그래야 환경과 생태의 의미가 분절된 지식이나 교환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닌

삶이자 저항 그 자체로 다가올 것이다.

유기화씨에게 달거리대를 가르쳐주기보다

내가 그녀로부터 그레질을 배우는 것이 옳다.


(흠... 쓰다 보니 좀 준엄한 어투의 글이 되고 말았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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