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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코뮤날레 제2차 쟁점토론회
<계급 그리고 시민, 민중, 다중>
참관기
-깨철이
1. 계급
맑스코뮤날레 토론회에 다녀왔다. 토론회의 취지는 계급적 관점에서 시민, 다중, 민중을 어떻게 볼 것이고 변혁의 새로운 주체성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론회의 기본 발제문도 그렇고, 발제자도 그렇고 그런 토론회의 취지에 정확히 부합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시민’에 대해 발제문을 작성한 신광영만이 취지에 부합했고, 김세균의 ‘민중’은 ‘다중’에 대한 비판과 비교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토론회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문제의식은 ‘계급’에 관한 것이었다. 시민, 민중, 다중에 대한 개념적 규정은 서로 이야기되었지만 계급에 대한 개념규정은 사전에 이미 전제되고 합의되었다는 듯이 진행되었다. 맑스레닌주의의 계급개념은 크게 세 가지 기준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것을 정리하면, ‘①착취의 정도 ②생산수단의 유무 ③생산관계에서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요소 중 계급을 가르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는 ②이며, 나머지는 보조적 기준이다.
맑스레닌주의의 계급개념에서 생산수단의 유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생산관계에서 착취가 생겨나고 지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관계’라고 하는 영역이다. ‘생산관계’를 공장이라고 하는 협소한 틀로 한정지어 생각하면, 가치와 잉여가치는 공장에서만 생산되며 잉여가치의 착취 또한 공장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 된다. 그 외의 영역에서는 생산도 착취도 없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 기존의 전통적 맑스레닌주의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내에서는 크게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만이 있으며, 자본주의의 발전정도에 따라 그 사이에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나 쁘띠부르주아와 같은 중간계급이 있을 수 있으나 자본주의의 발전 경향은 중간계급이 소멸될 수밖에 없고 주요한 두 계급으로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설명을 보태자면 여기서 중간계급은 그 불안정성으로 인해 계급으로서의 동일한 이해를 가질 수 없고 그래서 자기계급으로 조직되기도 힘들다. 따라서 중간계급은 고유한 자기계급으로 형성되지 못하고 자본가계급이나 노동자계급에 흡수된다.
생산수단이 없지만 생산관계에서 주도적 역할이 없는 실업자, 학생, 여성 등은 ①과③의 기준에 의해 실업자, 학생, 여성 등은 산업예비군이나 룸펜프롤레타리아 등으로 불렸으며, 이들 또한 독자적인 이해를 지닌 계급으로 조직될 수 없고 노동자계급에 흡수된다. 기존에 우리가 불렀던 ‘민중’이라는 것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착취의 정도와 생산관계에서의 역할 등에 의해 노동자계급과 가까운 피지배자 일반을 통칭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계급구분에 대해 다음의 의문을 가진다.
첫째, 계급을 가르는 기준인 생산관계의 ‘영역’에 대한 의문이다. 과연 생산은 공장에서만 진행되고, 착취는 공장안에서만 발생하는가? 이것은 자본주의의 생산의 발달과 생산지형의 변화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둘째, 자본주의 발달은 과연 전통적인 계급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가속화되고 중간계급은 소멸하고 있는가? 즉, 전통적인 계급구분의 기준에 의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두 개의 계급으로 경향적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셋째, 과연 정치경제학적 이해관계의 측면에서 실업자, 학생, 여성 등등은 자기를 변혁이라는 사회적 전망을 지닌 고유한 계급으로 조직될 수 없는가? 가령, 실업자는 노동자가 되어야만 그리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어야만 계급으로 조직될 수 있는 것인가?
각각의 의문들은 계급구분에 대해 서로 다른 층위를 지니는 의문들이다. 이 세 가지 의문 속에서 나는 전통적인 계급개념에 반대한다.
첫째, 현재의 생산은 공장이라는 틀을 뛰어넘어 생산의 사회화가 삶 전반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그녀가 공장에 있던 오피스텔에 있던 가정에 있든 학교에 있든 거리에 있던 생산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실업자, 학생, 여성 등등이 생산에 참여하고 있으며 착취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즉, 그런 의미에서라면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라는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눠지는 것이 경향적으로 가속화된다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말로 ‘사회적 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을 발견할 수 있을 때 이 명제는 타당할 수 있다.
셋째, 현실에서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정규직의 이해와 비정규직의 이해가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일한 이해로 자기를 조직하는 계급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다고 해야 하거나,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동일성의 이미지가 종말을 맞았다고 해야 한다. 반대로 실업자나 여성 등등은 공통의 이해를 통해 자기를 조직할 수 없다는 가정은 점점 현실과 맞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현상을 통해 변혁의 주체인 계급개념으로 분석해내고 조직해내야 한다면 우리는 계급에서 동일성의 이미지나 단일성의 이미지를 지워내야 한다. 다양한 자기조직화를 통해 공통의 이해를 향해 나가는 주체성으로서의 계급이라는 재정의가 필요하다.
2. 다중과 민중, 시민
민중과 시민은 주권 속에서 표현해낸 주체 개념이다. 우선 민중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계급적 구분 속에서는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피착취 대중들을 가리킨다. 이때 노동자계급과 일반대중을 나누는 기준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에서의 분석, 그리고 생산관계에서 각 역할에 대해 전통적인 분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계급적 민중이 주권적 주체로 설정된다.
시민개념은 민중과 다르게 계급적 표현이 아니다. 시민은 기본적으로 생산관계와 독립적으로 설정된 생활영역 속에서 주권적 주체를 설정한 것이다. 이것은 민중이 그렇듯이-생산관계를 공장으로 한정하고 그 외의 영역(생활영역)을 생산영역으로 포함하지 않으며 구분하듯이-시민개념 또한 그러한 영역의 구분(생산영역과 그 외의 영역)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중이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본 주권주체라면, 시민은 생활영역에서 본 주권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중과 시민의 구분법은 ‘사회적 노동자’라는 주체성의 출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된다.
김세균씨는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된 민중’을 그대로 고수하며, 민중권력의 국가를 달성해야한다는 것을 고수한다. 신광영씨는 계급운동으로부터 자신을 나누었던 기존의 시민운동과는 다르게 그 둘의 결합을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광영씨 자신이 철저하게 의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존의 노동운동과 기존의 시민운동이라는 영역의 구분이 점점 좁혀지고 있으며, 통합된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을 신광영씨는 계급불평등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계급정치가 탈구된다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세계화는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빈곤층의 증가와 부의 불평등 심화, 실업자 증가, 환경파괴 심화 등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대응은 생산현장에 중심을 둔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세계화의 피해자들이 생산현장 뿐만 아니라 외부에 더 많이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신광영씨는 현실의 변화에 대해 나름대로 인정하고 적절하게 지적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생산영역과 사회영역(생활영역)을 여전히 구분하면서 ‘세계화가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분석하는 것은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사회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빈곤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세계화가 기존의 한정된 생산영역을 스스로 파괴하고(넘어서서) 사회 전체로 이미 생산영역을 확대한 체계를 바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이 시민운동의 요구를 포함하고, 시민운동이 노동운동의 요구를 포함하는 식의 방법으로는 자본의 착취에 저항하는 현실 주체성의 변화를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신광영씨가 “실업, 비정규고용, 저임금 등으로 인한 빈곤층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이 국민국가 내적인 요인보다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이출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전통적으로 계급관계가 국민국가 틀 내에서 형성, 발전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국민국가 외부에 존재하는 지구적 금융자본이 계급성원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국민국가의 주권적 주체인 ‘시민’이 변혁의 주체가 되기 위해 어떤 변화를 수반해야 하는지 언급할 수 없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적어도 나는 신광영씨의 지적으로부터 변혁의 주체를 국민국가적 틀을 넘어서는 주체성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나아갈 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국민국가적 틀을 넘어서는, 주권적 주체성을 넘어서는 것에서 우리는 변혁의 주체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민중은 말할 것도 없고 신광영씨에 의해 제기된 시민은 다음의 한계를 지닌다.
첫째, 생산영역과 사회영역을 구분하고 있음으로 인해 생산의 사회화, 그리고 지구화 수준에서의 변화와 새로운 주체성의 등장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여전히 국민국가의 주권적 주체를 변혁의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제대로 저항할 수 없다.
이러한 한계들은 현실투쟁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전통적인 노동운동인가, 아니면 시민운동인가? 전통적인 노동운동을 고수하는 입장은 그들이 구분한 전통적인 사회영역이라 불려지는 곳에서의 이주노동자들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 무능하다. 전통적인 시민운동은 인권의 문제로 이주노동자 문제에 접근하고 있으나 ‘비시민’인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이주노동자 문제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것은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구분하는 것처럼 사회적 생산과 착취의 심각성에 있어 생산영역과 사회영역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금 신랄하게 말하자면,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이주노동자 투쟁을 사업장 내의 문제로 축소시키며 이주노동자들을 한국의 파업현장과 투쟁현장 즉, 사업장으로 끌고 다니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런 투쟁에도 불구하고 상호연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주노동자투쟁을 노동운동의 강화라는 노선에 맞춘 이러한 투쟁들은 전체 이주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무엇보다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고 유리한 정국으로 이끌어나가는데 실패한 것이다. 또한 특징적인 것은 전통적으로 노동운동이 아닌 새로운 주체들이 이 투쟁에 결합했는데 그것을 조직하는 것을 방기하거나 회피했으며 단순동원체계로 전락시키려함으로써 연대에 있어 완전한 실패를 맛보았다. 이것은 계급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법을 고수한 결과이며 투쟁에 있어 새로운 주체성들의 등장에 대해 둔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예로 반전투쟁을 들 수 있다. 민주노총에서 반전투쟁에 나서겠다고 선언했지만 노동조합을 비롯한 기층의 노동자조직은 반전투쟁에 무관심하다. 노동운동진영의 많은 좌파 활동가들이 ‘반전투쟁의 우경화’를 지적하고 있지만, 이 지적의 타당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진영의 무관심에 대한 변명처럼 들린다. 이것은 지금까지 ‘반세계화 투쟁’이라 불려 졌던 많은 의제들에 대해 조직된 노동자들의 냉담한 반응에 대한 후퇴적 변명의 반복이며, 그 투쟁을 전통적인 노동운동이 주도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 투쟁의 새로운 주체성들을 의심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는 징후를 보이는 것이다.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에서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과 같은 개량화된 노선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바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결합이라는 관점이 지닌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시민운동의 문제의식을 받고, 시민운동이 노동운동의 문제의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변혁의 주체성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사회적 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성과 더불어 새로운 조직형태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중’은 공장을 뛰어넘는 사회적 노동자를 가리키면서 국민국가적 틀을 뛰어넘는 비주권적 주체성을 가리킨다. 여기에 전통적인 노동운동, 사회운동의 이분법적 도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코뮤날레의 이번 토론회는 그 주제의 현실밀착성에도 불구하고 발제자들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전에 토론회 주제와 의도에 대한 충분한 사전토론과 숙지, 그리고 합의가 있어야 하리라 본다. 그냥 대충 주제만 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편의대로 주제에 대해 써와서는 토론이 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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