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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25
    <야즈드> 흙집이 예쁜 마을(8)
    제이리
  2. 2006/08/25
    <쉬라즈> 뭐가 뭔지 모르겠다(6)
    제이리
  3. 2006/08/25
    <자헤단> 또 삽질이다(4)
    제이리
  4. 2006/08/12
    <페샤와르> 사흘간 이동만 하다(4)
    제이리
  5. 2006/08/12
    <칼라시밸리> 한국 아저씨들을 만나다(5)
    제이리
  6. 2006/08/12
    <타르싱>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를 가다(3)
    제이리
  7. 2006/08/12
    <훈자> 일행과 헤어지다(3)
    제이리
  8. 2006/08/09
    <이슬라마바드>그래도 한국인 숙소가 좋다
    제이리
  9. 2006/08/09
    <라호르> 첫날부터 삽질이다(2)
    제이리
  10. 2006/08/09
    <암리차르> 그나마 다행이다(6)
    제이리

<야즈드> 흙집이 예쁜 마을

 

버스가 야즈드로 들어서자 마자 아.. 하는 감탄사가 입 밖으로 나온다. 쉬라즈에서 야즈드로 향하는 길 내내 이어지는 황량한 사막이 끝나는가 싶더니 눈앞에 보이는 도시는 온통 황토빛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막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는지 흙벽돌로 담을 세우고 그 위에 흙을 발라 만든 건물들이 도시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어 어디 동화의 나라에라도 온 것 같다. 뭐 동화치고는 톤이 좀 어둡긴 하지만 말이다^^택시를 타고 도착한 호텔역시 이 도시의 오래된 집을 개조해 만든 것으로 바깥은 높은 흙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얼핏보면 호텔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호텔은 그리 가격이 싼 곳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마당 한켠 지하에 도미토리가 있어 도미토리에 묵으면서도 호텔의 정취는 정취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첫날 침대가 여섯개인 도미토리의 손님은 나 혼자뿐이다. 한국 사람은 기대도 안 했지만 다른 여행자도 없다니 조금 실망이긴 하지만 혼자 쓰는 도미토리는 그만큼 편한 것도 사실이다. 호텔 마당에는 자그마한 분수가 있고 그 주변으로는 탁자며 평상이 놓여 있어 음식을 먹거나 차이를 마시며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그도 지겨우면 아예 옥상으로 올라가 별구경이나 하면서 뒹굴 거릴 수도 있다. 다행히 이곳 레스토랑에는 그나마 몇 가지 메뉴가 있어 샌드위치 신세를 면할 수 있다. 이란에 오기 전부터 들었던 말 중 하나는 먹을 게 샌드위치 밖에 없다는 말이었는데-뭐 샌드위치, 햄버거, 케밥 등이 있지만 죄다 빵에다 고기 싸 먹는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이삼일 샌드위치만 먹다보니 이걸 언제까지 먹어야 하나 내심 막막했던 것이다. 간만에 밥까지 먹고 평상에 누워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김치찌개고 뭐고 밥만 먹어도 이리 행복할 수 있다니.. 역시 행복은 먼데 있는 건 아닌가 보다^^


후세이니에서 바라 본 야즈드 전경


내가 묵었던 실크로드 호텔 앞마당

 

다음날 아침 일찍 한국 여행자 하나가 토미토리로 들어온다. 배낭여행 온 남학생인데 터키, 이란을 거쳐 파키스탄, 중국으로 넘어가는 길이란다. 이란에선 처음 보는 한국 사람이다. 야즈드는 이 친구와 같이 돌아다닌다. 사실 야즈드는 볼거리가 많은 도시라기보다는 그저 미로 같은 구시가지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것이 그 묘미인데 마침 일행이 생겨 심심치 않게 하루를 보낸다. 대략 론리 플래닛에 길잃어버리기 투어라고 소개되어 있는 길을 따라간다. 투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볼거리가 나오면 잠시 들어갔다 다시 골목길을 걷는 것이 투어의 전부다.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한 골목이 이어져 길 찾기는 쉽지 않지만 또 그 골목이 다른 곳으로 이어지니 딱히 그 길이 아니어도 목적지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어디를 가나 진흙 벽돌을 쌓아 만든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골목은 아무리 걸어도 지루하지가 않다.


구시가지 골목길


아직도 벽돌을 직접 굽는다


알렉산더 프리즌이라는 데 한때는 감옥으로 쓰기도 했다고 한다.


골목길을 돌아다니기 전에 숙소 앞에 있는 모스크에 들렀다가 첨탑이 보이길래 저기 올라갈 수 없냐고 물으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사무실에 가서 허가증을 받아 오면 된다고 한다. 골목길을 다니다가 마침 사무소가 눈에 띄길래 허가증을 만들어 줄 수 있냐고 했더니 여권만 확인하곤 금세 만들어 준다. 저녁 무렵에 모스크로 가서 허가증을 보여주니 첨탑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아저씨 한 분이 앞장을 서더니 불도 없는 좁은 계단을 끝도 없이 올라간다. 한참을 올라 나가는 문이 보이길래 다 왔나 했더니 웬걸 첨탑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시 다른 문을 열고 첨탑으로 올라가야 한다. 위를 보니 까마득하다. 에구 나는 포기다. 도무지 다리가 후들거려 올라갈 수가 없다. 나는 첨탑 아래 남고 대학생 친구는 아저씨를 따라 계속 올라간다, 첨탑 아래도 제법 높아 마가 해가 진 야즈드 구시가지는 제법 불빛을 밝히고 있는데 높은 건물이 없어서인지 시가지 바깥까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잠시 후 대학생 친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려온다. 저 위는 진짜 무서워요 하는데 역시 안 올라가기를 잘 했다 싶다^^


자메 모스크, 저 첨탑 중간에 있는 난간까지 올라갈 수 있다.


모스크에서 내려다 본 야경


다음날은 버스를 타고 시가지 외곽까지 나가본다. 이곳 야즈드는 조로아스터교의 발생지라는데 이.. 또 조로아스터교는 또 뭐하는 종교란 말인가.. 옛날 세계사 시간에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이름 이외엔 기억나는 게 없다. 대학생 친구에게 물어봐도 조로아스터교가 한국말로 배화교라는 거, 불을 숭상한다는 거 외에는 아는 게 없다며 이 더운 나라에서 불은 왜 숭상했을까요? 하고 진지한 얼굴로 되묻는다^^. 외곽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조로아스터교의 사원인 파이어 템플에 잠깐 들러본다. 정말 불을 숭상하는 종교인지 사원 한가운데는 몇 백년간 꺼뜨리지 않고 이어 왔다는 숯불이 발갛게 타고 있다. 남의 종교를 가지고 이런 생각을 하면 한 되지만 갑자기 불씨 꺼뜨리면 쫓겨나는 며느리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버스를 나고 간 곳은 조로아스터교의 풍장터이다. 원래 조로아스터교는 사람이 죽으면 어떤 인위적인 행위도 하지 않고 그저 시신을 산 위에 던져두었다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고 그 터 아래로 마을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옆에는 묘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1960년대 이후로 풍장을 그만 둔 조로아스터 교인들이 묻혀 있는 곳이라고 한다. 대학생 친구와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땐 이 곳에는 아무도 없고 팔월의 햇살만 따갑게 내리쬐고 있다. 땀을 흘리며 풍장터까지 올라가 봐도 그저 한때는 시신을 던져두었을 구덩이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뿐 그저 아무런 주변은 조용하기만 하다. 오던 길을 되짚어 나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가용 한대가 태워준다고 한다. 혼자라면 타지 않았을 텐데 일행 덕을 본다. 대학생 친구는 친구대로 자기 혼자 있을 땐 차가 절대로 안 선다며 내 덕분이란다. 여튼 한참을 걸어서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온 길을 한 번에 편하게 돌아온다.


풍장터앞 마을에 서 있는 침묵의 탑


풍장터, 자금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날 오후에 대학생 친구는 파키스탄으로 떠난다. 테헤란에서 보조 가방을 도둑맞아 거의 백만원 가까운 돈과 물품을 잃어 버렸다 면서도 씩씩하게 다니던 친구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한국에 돌아가려면 나머지 날들은 거의 이동만 해야 한다며 날짜 계산을 한참이나 하더니 그래도 훈자에서 이삼일은 보낼 수 있겠는데요 하며 좋아한다. 시간만 많은 내 여행이 갑자기 사치스러워 보이는 게 괜시리 민망해진다. 나도 내일이면 에스파한으로 떠난다. 에스파한은 이란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데 글쎄 그곳에서 다시 한국인 여행자를 볼 수 있을지.. 저녁은 어차피 굶게 될 테니.. 하며 샌드위치를 두 개나 먹은 대학생 친구는 밤차를 타러 떠나고 나는 다시 시간의 사치를 누리며 호텔 평상에서 뒹굴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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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라즈>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다행히 쉬라즈의 숙소는 마음에 든다. 인터넷으로 보기에는 이란의 숙소 상태가 별로라고 되어 있는데 그간 개선을 한건지 아님 그 글을 쓰신 분의 안목이 높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파키스탄에 비하면 거의 호텔 수준이다. 게다가 이란은 석유가 나는 나라여서 그런지 에어컨이 방마다 붙어있는 게 아니라 아예 중앙 냉방이다. 즉 내가 방에 없어도 에어컨이 하루 종일 나온다는 건데-근데 이게 석유랑 상관이 있나?- 선풍기는커녕 하루에도 몇 번씩 전기가 나가는 동네에 있다 와서 그런지 오히려 빈방에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아까운 심정이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욕실이랑 화장실이 공용이라는 건데 다른 나라라면 크게 불편한 건 아닌데 여기는 호텔 복도만 나가도 스카프를 써야 하니-옷도 당근 갈아입어야 한다- 그게 조금 불편하기는 하다.

 

길거리에 나가본다. 일단 남자들의 옷차림은 파키스탄과 확연히 달라지는 데 일단 생긴 걸 제외하고는 옷차림이 우리와 별다를 바가 없다. 여자들의 경우도 스카프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화장도 제법 진하고 긴 옷 아래에는 대부분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 세련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다른 점은 대놓고 핼로우를 날리는 파키스타니들에 비해 흘낏흘낏 쳐다보거나 뒤에서 치나치나-중국 사람이라는 뜻이다-하며 지들끼리 낄낄대는 한량들이 많다는 점인데 이게 또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이란의 성희롱에 대해서는 여행자들의 입을 통해 익히 들어온 터라 여행자 지침대로 가벼운 터치에 대해서는 죽지 않을 만큼 패놔야지 하는 대처 방법을 세워 놓았던 바 있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성적 농담이 분명하다고 느껴지는 말이나 슬쩍 스쳐가면서 보이는 음란한 손짓의 경우는 기분은 나쁘지만 별다른 대처 방법이 없다. 그저 이 인간들, 어지간히 궁한가보다 생각하려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인간들을 만나다보면 길거리에 나서는 게 짜증스러워진다.

쉬라즈 시내, 가운데 있는 것이 카림 한 궁전이다


바자르, 건물은 몇백년이 되었다는 데 그냥 시장이다. 여기서 스카프랑 이란옷을 사서 입었다.

 

그래도 길거리에 안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언젠가 이란에서 넘어 온 여행자에게 얻어 둔 가이드북을 뒤적거려 본다. 파키스탄부터는 미리 준비해 둔 정보도 없는데다 중동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사전 지식도 거의 없는 상태이니 그저 가이드북을 뒤적거리는 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전부다. 하지만 알다시피 가이드북은 또 영어판이라 숙소나 레스토랑 혹은 교통편에 대한 정보는 어찌어찌 읽는다 해도 그 외의 정보에 대해서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으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만 믿고 그저 길거리로 나서보는 수밖에 없다. 가이드북에 다르면 쉬라즈는 장미와 와인의 도시라는데 계절상 장미는 물 건너갔고 알코올 들어간 음료라곤 눈씻고 봐도 없는 이란에 와인이 있을 리 만무하니 그저 예전에는 그랬으려니 생각하고 다니는 수밖에 없다. 이란의 관광지들은 대부분은 점심시간-말이 점심시간이지 거의 4시나 되어야 끝난다-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오전에 잠깐 둘러보고 숙소에서 쉬다가 다시 저녁 무렵에야 움직여야 하는 관계로 동선과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한다. 다행히 대부분의 관광지는 숙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오래되었다는 바자르도,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는 모스크도, 한때는 귀족이었거나 상인의 집이었을 잘 치장된 저택들도 그저 그만그만하다.


레젠드 모스크, 스카프도 모자라 차도르를 꼭 입어야 하는 곳이다. 다행히 매표소에서 빌려준다.


 

개인 저택의 내부, 사유 재산이라 입장료 무지 비싸다. 온갖 애교를 다떨어 학생 할인 받았다고 흐믓해 했는데 그래도 엄청 비싼 거였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비싼 건지도^^ 

다음날은 페르세폴리스에 다녀온다. 페르세폴리스는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로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당시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아케미니드 황제가 짓기 시작해 그 후 수백 년간 증축을 거듭했다고 한다. 쉬라즈에서 두 시간쯤 떨어져 있는 이곳은 그냥 반나절 투어로 다녀오기로 한다. 어차피 혼자 버스타고 택시타고 움직여봐야 힘은 힘대로 들고 돈도 투어비나 거의 비슷하게 들지 않을까 싶다. 투어라고는 해도 자가용 한대로 움직이는 것이니 여행자 4명에 기사 겸 가이드까지 다섯 명이 전부다. 아침 일찍 출발한 차는 페르세폴리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낙쉐 로스탐에 먼저 들른다. 낙쉐 로스탐은 페르시아의 황제였던 다리우스1세와 2세 그리고 글자 읽기도 쉽지 않은 아르타세르세스 1세와 그냥 세르세스 1세의 암굴 무덤이 있는 곳이다. 즉 4명의 왕의 무덤이 있는 곳인데 이 무덤은 특이하게도 바위산을 파서 만든 것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사막 한가운데서 이곳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에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도 않고 -영어로 한다니^^- 그저 주변의 부조들을 바라보며 더운데 저거 판 사람은 힘깨나 들었겠다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다.


낙쉐 로스탐, 왕의 무덤 4개가 나란히 있다.


낙쉐 로스탐, 무덤 주변의 바위에 새겨 넣은 부조


다음은 폐르세폴리스로 이동을 한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장대한 기둥들과 부조들이 한때는 이곳이 대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임을 말해주고 있지만 2,500년의 세월 탓인지 그저 흔적에 상상을 더해도 그 규모에 질릴 뿐 별다른 당시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여전히 해는 머리 꼭대기에 있는데 그늘 한 점 없는 유적지를 보는 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현실이 된다. 스카프를 썼으니 그 위에 모자를 쓰는 것도 어째 이상해 그냥 나섰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거의 일사병 증세가 오는 것 같다. 그저 이미 뜨거워져 버린 물병만 손에 쥐고 어디 그늘이 없나 살펴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 하릴없이 가이드를 따라 두어 시간 남짓 유적지를 보고 나니 투어는 끝이 난다. 페르세폴리스는 이때까지 보던 유적지들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모르니 그저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에는 이해되는 것이 없다. 배경 지식 없이 보는 유적지란 그저 돌덩이에 다름 아니니 앞으로 남아있는 나머지 중동의 유적지들을 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싶은 게 새삼스레 막막한 느낌이 든다.


페르세폴리스, 입구 기둥에 세워져 있는 부조


페르세폴리스, 기둥만 남은 궁전터가 쏟아지는 햇빛 속에 서 있다.


쉬라즈에서의 마지막 날에는 시인 하페즈의 묘소를 찾아간다. 하페즈는 이란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라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묘소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묘소는 그저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이란의 어디나 그렇듯이 정원의 입구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사막의 나라 이란에서는 물이 풍요의 상징이었던 듯 하다- 정원 한가운데 하페즈의 석관이 놓여 있다. 이란 사람들은 궁금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의 시집을 들고 이 묘소를 찾는다고 하는데 그의 시집을 들춰 처음 보게 되는 글귀가 그 문제의 해답이 된다고 한다. 뭐 나도 해보고 싶긴 하지만 하페즈의 시는 전부 파르시로 되어 있을 테니 펼쳐봐야 뭔 소리인지도 모를 터 아쉽지만 그냥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하페즈의 시집이나 한권 사올 걸 그랬나 보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에게 무엇을 물어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쉬라즈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시인 하페즈의 묘, 많은 이란사람들을 석관에 손을 얹고 그를 추모한다.


하맘(목욕탕)을 개조한 찻집에서, 저러고 다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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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헤단> 또 삽질이다

 

이란 측 출입국사무소에 들어서니 입국도장을 찍어주는 창구는 이란에 들어가려는 파키스타니들로 거의 아수라장이다. 창구 앞에 거의 이삼십 명이 모여들어 저마다 여권을 들고 이리저리 밀리는 통에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다. 줄을 서 있는 것도 아니니 저기를 통과하려면 같이 몸싸움이라도 벌여야 하는 판인데  배낭은 앞뒤로 메고 게다가 스카프까지 쓰고 할 짓은 아니다 싶다. 그저 대기실 구석에 앉아 잠시 기다려본다. 30분이 지나도 창구 앞의 사람들은 줄어들 줄 모르고 이러고 있다간 도무지 언제 국경을 넘게 될지 모르겠다 싶어 슬며시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보지만 창구 앞의 사람들은 거의 필사적이다. 다시 대기실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으니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사무실로 불러 여권을 먼저 처리해준다. 아마 파키스타니가 아니라 특혜를 주는 것 같은데 고맙기는 하지만 이러느니 창구 앞에 줄서는 칸이나 만들지 싶다. 


출입국 사무소에서 여권을 받아 나오니 어떤 남자가 다가와 너는 외국인이니 여기서 자헤단까지는 반드시 폴리스 보디가드와 함께 가야 한단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어보니 자헤단은 위험한 도시라서 그렇단다. 공짜는 당연 아닐테고 얼마냐고 물어보니 10불이란다. 내가 미리 알고 있는 정보로는 출입국 사무소 앞에서 합승택시를 타면 일인당 2,3불선에 갈 수 있다고 들었거니와 폴리스 보디가드 얘기는 처음이라 이거 신종 사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됐다고 난 그냥 혼자 갈 거라고 뿌리치고 나와 택시를 잡으니 웬걸 택시들마다 모두 같은 소리다.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어 다시 출입국 사무소로 들어가 폴리스 보디가드가 꼭 필요하냐고 물어봐도 확실한 대답은 해주지 않고 폴리스 보디가드가 필요하면 불러 줄테니 기다리라는 소리만 한다. 아무래도 꼭 필요한 건 아니고 니가 원하면 불러주겠다인 거 같은데 그냥 가려 해도 이놈의 택시들이 도무지 태워 주지를 않는 거다.


이란측 출입국 사무소. 이란 혁명지도자 호메이니와 지금의 최고통치권자 하메이니의 초상이 나란히 걸려있다. 이 두 양반은 이란의 다른 도시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하릴없이 국경 앞에서 한 시간 가까이 서서 택시를 타는 사람들마다 같이 가자고 말을 건네본다. 그 중 빈자리가 있어 타려고 하면 꼭 누군가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다. 그러다가 파키스타니 몇몇이 자헤단으로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한다. 결국 택시를 탈 때 잠깐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택시가시가 또 폴리스 어쩌구 하는 걸 파키스탄 아저씨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하네 뭐 이 정도로 무마했다는^^-  결국 그냥 택시를 타고 자헤단까지 온다. 아직도 이게 신종 사기인건지 아님 규정이 그런 건데 내가 무시를 하고 온 건지는 잘 판단이 되질 않는다. 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국경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해 다음 도시로 넘어갈 시간이 부족하지 않나 잠시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도 이란은 파키스탄보다 1시간 30분이 빨라 자헤단에 도착하니 여전히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지헤단 터미널에서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에 빠진다. 해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대략 이란의 고도인 밤이나 그 다음 도시인 케르만까지 가는 것이 가장 좋은데 밤은 몇 년 전 지진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곳으로 파키스탄에서 만났던 여행자 중의 하나가 밤은 지금 인심이 흉흉하니 가급적이면 하루를 묵지 말고 그냥 케르만으로 가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하지만 케르만은 볼거리가 있는 도시도 아닌데 그냥 하루밤 묵어가려고 들린다는 게 별로 내키지를 않는다. 다음 대안은 야즈드라는 도시까지 가는 건데 이 도시는 오후에 차를 타더라도 새벽 한두시쯤 떨어지게 되니 대략 터미널에서 하루밤을 보내야 되는 상황이라 이것도 대안으로는 신통치가 않다. 결국 고민 끝에 그냥 밤으로 가는 표를 끊는다. 부자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아무리 지진으로 무너졌다 해도 고도의 흔적이라도 볼 수 있을 거고 인심이 흉흉하다고 뭐 지나가는 여행자를 납치야 하겠냐 싶은 생각이다. 


두시가 조금 넘어 버스는 자헤단을 벗어난다. 이란의 버스는 거의 볼보 버스로 에어컨은 기본에 좌석도 넓고 깨끗해 아주 쾌적하다. 그간 네팔이랑 인도, 파키스탄의 고물 버스만 타다가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게다가 도로는 거의 우리나라 고속도로처럼 잘 닦여 있어 간만에 편안하게 이동을 한다. 에어콘을 틀어 놓은 탓인지 창문이 전부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데 슬쩍슬쩍 들춰봐도 창밖으로는 그저 황량한 벌판만 이어진다. 가이드북에 밤까지는 다섯시간이 걸린다고 되어 있으니 6시나 7시쯤에 도착하겠다 싶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깨운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니 스카프가 벗겨졌단다. 에구.. 친절도 하셔라 뭐 깨워서까지 지적해 주실거야 있나.. 싶지만 여기는 이란인 것이다. 다시 졸다가 깨어보니 어느새 6시가 가까워 있다. 안내군에게 밤이 아직 멀었냐고 물으니-사실 이란은 영어가 거의 안 통하는 나라라 손짓발짓을 했다는 표현이 더 맞는다- 이게 왠일인가. 밤은 벌써 지났다는 것이다. 이 버스는 밤이 종점이 아니라 밤을 지나 어느 도시인가로 가는 버스였던 것이다. 보통은 미리 버스표룰 보여주기 때문에 대충 알아서 내려주는데.. 방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이란은 도시와 도시를 있는 거의 모든 길이 황량한 사막이다. 누구말대로 그렇게 본다면 이란의 모든 도시는 오아시스인 셈이다.


승객 중에 영어가 좀 되는 사람이 있어 어디까지 가는 버스냐고 물어보니 케르만을 거쳐 쉬라즈까지 가는 버스라고 한다. 쉬라즈는 야즈드 다음으로 가려고 생각했던 도시다. 가이드북을 펼쳐 대충 지도를 보니 어차피 쉬라즈를 거쳐 야즈드를 가더라도 다음 도시인 에스파한 가는 길은 큰 차이가 없다. 케르만에서 내릴까 하는 마음을 바꿔 그냥 쉬라즈까지 가기로 한다. 자헤단에서는 쉬라즈가 조금 더 머니 새벽 한 두시에 터미널에 떨어지진 않겠다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한 삽질은 여행 최대의 삽질이 아닌가 싶다. 결국 사흘간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하루를 더 버스에서 보낸다. 버스는 새벽 3시에 터미널에 도착한다 -파키스탄에서는 매번 두세 시간씩 늦게 도착하던 버스가 여기서는 매번 한두 시간 빨리 도착한다. 우씨- 아직 채 밝지도 않았으니 숙소 문도 안 열었을 거고 어두운데 택시 타는 일도 그리 안전할 것 같지는 않아 그냥 터미널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다행히 터미널에는 사람들이 많아 그리 위험해보이지는 않는다.


날이 밝자마자 택시를 타고 점찍어둔 숙소를 찾아간다. 문을 두드려서야 나온 주인은 방이 모두 찼다며 딴 데로 가보란다. 다음 숙소도 마찬가지다. 이제 가이드북에 나온 숙소를 찾아다닐 여력도 없어 그냥 현지인 숙소로 들어간다. 다행히 방이 있다. 적당히 깨끗한데다 가격도 여행자 숙소보다 저렴하다. 여행자 숙소에 방이 차면 가끔 외국인도 오는지 주인은 생존 영어 정도는 가능하다. 결국 아침 7시가 조금 넘어서야 방에 짐을 풀고 침대에 눕는다. 잠은 오지 않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할 기력도 없다. 도대체 국경 넘을 때 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여튼 이란에 오기는 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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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샤와르> 사흘간 이동만 하다

디르에서 페샤와르 가는 길은 이때까지 보던 길과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북부 지역에서는 내내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왔는데 여기서부터 완연한 평지다. 산은 눈에 보이지 않고 멀리 지평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래서인가 차도 제법 속력을 내서 달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출발이 조금 늦어서인지 차는 어두워진 후에야 페샤와르에 도착한다. 이때까지 낯선 도시에 들어갈 때는 어둡기 전에 도착하는 걸 목표로 삼아왔는데 이번에 도리가 없다. 버스를 내려 릭샤를 탄다. 페샤와르에 있는 투어리스트 인에 가자고 하니 다행히 알아듣는 눈치다. 하지만 이 릭샤가 제대로 가는지야 알 도리가 없으나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불빛 없는 좁은 길로 들어서기라도 하면 공연히 마음이 두근거린다. 다행히 릭샤는 오래 가지 않아 숙소 바로 문 앞에 차를 세워준다.

 

숙소에 들어가 보니 한숨만 나온다. 도미토리밖에 없다는 그 여행자 숙소는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허름하기 그지 없다. 아니 허름한 건 그렇다 치더라고 도무지 나란히 붙어있는 침대를 제외하곤 아무 것도 없는 게 무슨 수용소 같다. 파키스탄은 여행자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훈자 정도를 제외하면 대도시에 있는 도미토리는 거의 시설이 형편없다고 하는데 라호르와 이슬라마바드에서 분에 넘치는 숙소에 묵은 탓인지 이런 도미토리는 또 처음이다. 다행히 숙소에는 한국 여행자가 두 명 있다. 일년 반째 여행 중이라는 남자 여행자와 훈자에서 만난 적이 있는 여행 넉달째의 대학생이다. 파키스탄쯤 오니 대부분이 장기 여행자들이다. 이 친구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든다. 오늘은 늦었으니 하루는 묵는다만 내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숙소를 옮겨야지 다짐한다. -결국 숙소는 못 옮겼다. 딴 데도 그만 그만한데다 또 한국여행자들과 수다를 떨다 보니 그냥 머무르게 되더라는^^-


페샤와르 시내


바라 히사르성, 군인이 주둔하고 잇어 주말 특정시간대를 제외하고는 들어갈 수 없단다.

 

다음날은 만사를 제쳐두고 기차표를 끊으러 간다. 정보북에 따르면 페샤와르에서 끊을 수 있는 기차표가 한정되어 있어 원하는 날짜에 표 끊기가 쉽지 않다고 되어 있다. 페샤와르에서 이삼일 묵을 생각이니 표가 없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역에 나가보니 에어콘 슬리퍼는 이미 매진이고 그 아래 칸인 일반 슬리퍼만 남아 있다. 여기서 퀘타까지는 34시간이 걸리는 거리이고 파키스탄 기차는 학생할인이 되니 이번엔 좀 편안히 가보려고 했는데 별 수 없이 그냥 일반 슬리퍼를 끊는다. 이것도 학생 할인이 되는데 역사무실에 거서 서류를 한 장 작성해야 한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내 가짜 학생증의 나이와 여권 나이가 엄청난 차이가 있어 조마조마 하며 서류를 내미니 다행히 여권은 확인을 하지 않고 학생증만으로 할인을 해준다. 결국 가짜 학생증을 또 한 번 써 먹는다.

 

페샤와르에서는 블랙마켓 한군데만 다녀온다. 블랙마켓은 페샤와르 북쪽에 있는 암시장인데 총기류와 마약류는 물론 위조지폐까지 판매되는 이상한 곳이라고 한다. 아마 국경 근처라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 듯하다. 퍼미션을 받아야 된다는 말도 있지만 그냥 들어갔다 왔다는 친구들도 있어 일단은 그냥 가보기로 한다. 조금 위험한 곳이라 혼자는 가지는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기차표 끊으러 간 날 다른 친구들은 이미 이곳에 다녀왔기 때문에-퍼미션이 없어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별 수 없이 혼자 길을 나선다. 일단 카르카누마켓 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니 거대한 시장이 눈앞에 보인다. 카르카누 마켓까지는 합법적인 시장인데 이곳에도 미군 식량인 씨레이션이며, 담배, 술 등 다양한 물건들이 쌓여 있다. 이곳에서 위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블랙마켓이 나온다고 한다. 가는 길을 물어보니 하나같이 못 들어간다며 가지 말라고 말린다. 게다가 카르카누 마켓의 분위기도 그리 좋지가 않다. 결국 블랙마켓 쪽으로는 가지도 못하고 시장만 둘러보다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카르카누마켓에서1


카르카누마켓에서2

 

나머지 시간은 그저 시내에 있는 바자르를 돌아보거나 숙소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보낸다. 이곳 숙소가 그나마 좋은 점은 프리 키친이 있다는 것이다. 취사도구 뿐 아니라 여행자들이 남기고 간 여러 가지 양념들도 있어 식사는 간단하게 여기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주로 아침은 토스트를 구워서 오믈렛과 커피를 곁들여 먹고 저녁엔 라면을 끓이거나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는다. 식당 시설이 잘 되어 있으면 한식도 아닌데 굳이 번거롭게 이럴 필요는 없지만 사실 파키스탄은 치킨 커리를 제외한 음식은 거의 없다시피 한 편이니 그나마 이렇게라도 먹는 게 다행이다. 이곳에서도 이란으로 넘어가는 한국 여행자는 없다. 일년 반째 여행한다는 친구는 파키스탄의 북쪽을 돌고 한 달 뒤쯤에나 이란으로 넘어갈 예정이고 대학생 친구는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갈 예정이다. 아무래도 이란은 혼자 가야할 팔자인가 보다.

 

페샤와르에서 사흘을 머물고 퀘타로 가는 기차를 탄다. 파키스탄의 기차는 중국이나 인도의 기차와는 달리 컴퍼트먼트 형태인데 4 1실로 되어 있다. 아침에 기차에 타보니 객실에 손님이라고 나밖에 없다. 가만 있자.. 어차피 여기서 자야 하는데 남자 손님 하나만 달랑 타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든다. 다행히 기차가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자 아버지와 딸로 보이는 두 사람이 객실로 들어온다. 다행이다 싶다. 특히 아버지 되시는 분은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시는 대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것저것 챙겨주신다. 에어컨칸의 경우 식사주문이 된다는 말을 들어서 여기도 그렇겠거니 싶어 별 준비 없이 기차를 탔는데 웬걸 일반칸은 기차가 정차 했을 때 뛰어내려 먹을 걸 사와야 한다. 근데 도대체 이 역에 얼마나 정차할지 알 수가 없으니 이래저래 눈치만 보고 있는데 이 분이 끼니때마다 음식을 사오시면서 내 것도 함께 챙겨 주신다. 파키스탄에서 참 사람들에게 신세만 지는 것 같다


퀘타 거리 풍경


구두 수선 아저씨

 

다음날 5시를 훌쩍 넘겨 퀘타에 내려 바로 터미널로 이동한다. 몸은 조금 고되지만 아무 일없이 그저 이 도시에 하루밤을 묵는 것 보단 그냥 밤버스로 국경도시인 타프탄으로 넘어갈 생각이다.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6 10분전이지만 타프탄 가는 6시 버스에는 자리가 없다. 꼭 오늘 가야 된다고 생떼를 썼더니 그럼 통로에 있는 보조 의자에 앉아서라도 가라는 데 그건 또 자신이 없다. 결국 퀘타 시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밤을 묵고 다음날 저녁 타프탄행 버스를 탄다. 버스는 밤새 달려 아침 10시경에 국경 도시인 타프탄에 도착준다. 다시 트럭을 타고 몇 분을 달려 국경에서 내리니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에 출입국사무소만 덩그러니 서 있다. 출국수속은 간단하게 끝이 난다. 드디어 이란이다. 인도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두었던 스카프를 주섬주섬 꺼내 쓰고 조금은 비장한 마음으로 이란으로 가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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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시밸리> 한국 아저씨들을 만나다

칼리시밸리는 파키스탄의 서북쪽에 힌두쿠시 산맥에 위치한 곳으로 파키스탄에서 거의 유일한 비무슬림 지역이다. 그뿐 아니라 칼라시밸리 사람들은 그들만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언어를 가지고 수천년간을 살아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들만의 전통 복장으르 한 채 살아가고 있다. 쉽게 말하면 파키스탄의 고산족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 파키스탄 정부의 이슬람화 정책으로 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으며 지금도 많은 이슬람들이 이주를 하고 있어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들도 태국의 고산족처럼 관광 자원으로나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현재는 약 삼천여명의 사람들이 칼라시밸리에 위치한 봄부레트, 룸부르, 비리르라고 불리는 세 마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확실치는 않지만 알랙산더 대왕의 서아시아 원정 때 돌아가지 않은 병사들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복장 뿐 아니라 생김새도 여느 파키스탄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다.


전통 복장을 한 칼라시 여자 아이들


남자 아이들의 옷차림은 여느 파키스타니와 다르지 않다

 

길깃으로 돌아와 하루를 쉬고 아침 일찍 마스투지로 가는 버스를 타러 나선다. 전날 예매를 하지 못해 혹시나 했는데 다행히 쉽게 표가 끊어진다. 표 파는 아저씨가 이것저것 묻더니 표를 다시 돌려 달란다. 의아한 표정으로 표를 돌려주니 좌석번호를 지우고 VIP라고 써서 돌려준다. VIP하며 웃었더니 운전석 옆의 한자리 좌석인데 정말 좌석에 VIP석이라고 써 있다^^. 덕분에 마스투지까지는 편하게 온다. 아침 8시에 출발한 버스가 마스투지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8시니 꼬박 12시간이 걸린 셈이다. 터미널 근처 숙소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치트랄행 차를 타보니 이번에 버스가 아니라 미니 트럭이다. 그나마 이곳부터 어느 지점까지는 길도 비포장이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다가 여기가 치트랄이라고 해서 내려보니 치트랄은 맞는데 봄부레트까지 가는 버스가 있는 정류장까지는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대략 잘못 내린 것이다.

 

배낭을 메고 땡볕에 땀을 흘리며 길을 묻고 있는데 메이 아이 핼프 유? 마담하는 소리가 들린다. 에구 저 놈의 마담 소리는 좀 빼면 안되나 하면서 쳐다보는데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서 있다. 봄부레트로 가는 버스 타는 곳을 물으니 여기서 제법 멀다며 자기가 지프를 태워 주겠단다. 아싸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따라가니 근처 PTDC호텔로 들어간다.-PTDC호텔은 파키스탄 정부가 운영하는 호텔로 관광지라면 예외없이 한곳씩 있는데 하루 밤에 우리돈으로 삼만원씩이나 하는 비싼 호텔이다- 그러더니 자기는 지금 휴가 중이라며 안 그래도 봄부레트에 가려고 했는데 아예 짐을 챙겨 나올테니 터미널이 아니라 봄부레트까지 그냥 같이 가자고 한다. 갑자기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는데 이거 혹시 사기꾼은 아닌가 의심은 드는 데 지프의 유혹이 또한 만만치 않다. 칼라시밸리까지 다시 비포장도로를 트럭에 실려 갈 생각을 하니 암담한 마음도 들고 뭐 나한테 뭐 사기칠 게 있겠어.. 주는 거나 안 먹으면 되지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하기로 한다.

 

자기 이름이 사이프라고 밝힌 이 남자, 꽤 특이한 구석이 있다. 파키스탄 남자라면 대부분 입고 있는 전통 복장이 아닌 청바지를 입고 있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는 무슬림이 아니란다. 게다가 믿거나 말거나 나랑 동갑인데-물론 내 나이를 밝히진 않았다. 차에서 내리라고 할까 봐^^- 아직 미혼이란다. 그러더니 술도, 담배도, 춤추는 것도 심지어 하시시도 좋아한다는 이 남자 느닷없이 붐부레트에 있는 PTDC 매니저가 자기 친구이니 방을 싸게 줄 수 있을 거라며 거기서 며칠 묵으며 맛있는 거나 먹고 푹 쉬었나 가란다. 뭐 성의는 고마우나 어쩌고 저쩌고 해가며 대충 사양을 해도 차는 이미 PTDC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가운데 푸른 잔디를 중심으로 독립적인 방들이 둘러싸고 있는 이 호텔은 마치 우리나라 중급 리조트같은 느낌이다. 일단 따라왔으니 점심을 같이 먹고 난 뒤 싼방을 찾아보겠다며 배낭을 둘러메고 길을 나서니 이번에는 숙소까지  차를

태워주겠단다.

 

봄부레트의 PTDC호텔

 

대충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숙소를 찾아가니 이미 방은 이미 풀이란다. 길거리에 외국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은데 이상하다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방이 없다는 데야 도리가 있나.. 다른 숙소를 찾아보러 나서니 이 친구 그냥 그 호텔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옮기면 어떻겠냐고 꼬드긴다. 게다가 숙소는 매니저가 이미 무료로 주기로 했다며 정 부담스러우면 100루피만 내란다. -100루피는 우리돈으로 1500원이 조금 넘는다- 점찍어둔 숙소가 만원이라니 다른 숙소찾기도 엄두가 안나 못이기는 척 그냥 호텔에 짐을 푼다. 만약 정 이상하게 굴면 방값을 내고 나오면 그만이다 싶은 생각이다. 여행 다니면서 자본 방들 중에 두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시설은 훌륭하다. 오후에는 사이프의 차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다. 이 친구 여기가 처음은 아닌 듯 이것저것 설명을 해준다. 덕분에 간만에 편하게 이곳저곳을 다닌다.

 

저녁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이 마을에서 만든 밀주나 한잔 하자고 한다. 뭐 말은 칼라시 보드카라는데 별 맛은 없지만 도수는 장난이 아니다. 일단 긴장이 된다. 내가 어쩌자고 여기까지 따라 왔을까 하는 생각부터 괜한 의심을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친다. 일단 만약을 대비해서라더도 술에 취하지는 말자 다짐하며 조금씩 마시지만 술이라는 게 마시는 데야 안 취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잔에 잔을 거듭할수록 약간씩 알딸딸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친구도 취하는지 말이 많아진다. 왜 결혼을 안 했는냐고 물어보니 20대에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 방탕하게도 살아봤지만 그도 별 재미가 없어 이제는 그냥 평범하게 산다며 자기는 이제는 섹스니 하는데 흥미가 없으니 그냥 친구처럼 편안하게 생각하란다. 그제야 맘이 조금 편해진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자기는 내일 치트랄로 돌아가 이삼일 있다가 페샤와르를 거쳐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갈 생각이니 만약에 같이 갈 생각이 있으면 여기에 하루이틀 더 있다가 치트랄에 와서 자기를 찾아오란다. 어차피 지프는 비어 있고 자기 혼자 가기도 심심하니 부담가질 필요는 없다고 덧붙인다.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는 이미 내려갔는지 그의 지프가 보이질 않는다. 왠지 꿈이라도 한바탕 꾸고 난 거 같다.


칼라시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1


칼라시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2

 

다음날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로 숙소를 옮긴다. 마을은 이미 다 둘러보았으니 딱히 할 것도 없긴 하지만 이틀이나 차를 타고 와서 하루 만에 내려갈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저 숙소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으니 이번에 숙소 주인이 같이 놀자고 부른다. 알고 보니 잠셋이라는 이 친구,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아들이다.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아 그냥 아침 일찍 봄부레트에 도착했다고 하니 이 친구가 자기가 마을 안내를 해주겠단다. 됐다고 해도 괜찮다며 부득부득 나서길래 결국 따라나서 갔던 곳을 다시 한 번 둘러본다. 저녁에는 여행 중에 이 마을에 반해 10주나 머물고 있다는 영국인 커플이 찾아와 또다시 술판이 벌어진다. 이번에 음주에 이어 가무도 곁들여진다. 낡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파키스탄 노래에 맞춰 제각기 춤을 추는데 곡 우리네 춤사위랑도 제법 닮아 있는 것 같다.

 


칼라시밸리에 있는 마을, 이곳은 그나마 좀 큰 마을이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풍장을 한다는데 그 터가 마을에 있다

 

다음날이 사이프와 만나기로 한 날이라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숙소에 놀러 온 잠셋의 친구가 PTDC호텔에 한국인들이 다섯명이나 있다며 가보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반가운 마음에 따라나서면서도 그 호텔에 묵을 정도면 배낭여행자는 아닐텐데 누굴까 싶다. 따라가 보니 전형적인 우리나라 아저씨 세명과 우리나라 젊은이 두명이 술을 마시고 있다가 나를 보고 무척 반가와 하신다. 알고 보니 이 이분들 삼부건설이라는 회사분들인데 치트랄에서 페샤와르 사이에 있는 느와리라는 곳에서 터널 공사를 하고 계시는 분들이다. 한달에 한 번 있는 휴무를 이용해 이곳까지 오셨다는데 한국 여자는 거의 팔개월만에 처음 본다며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꼭 휴가 나온 군인 아저씨들 같다. 결국 또 술판이다. 언제 가냐는 말에 내일 내려갈 생각이라고 대답하니 이분들 이틀 뒤에 현장으로 돌아가신다며 내일은 양한마리 잡을 계획인데 먹고 같이 내려가자고 하신다. 안 그래도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복잡한데 차라리 잘됐다 싶어 하루 더 있기로 한다. 사이프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뭐 그려러니 하지 않을까 싶다.

 

다음날 저녁에 PTDC호텔 마당에서 자그마한 파티가 벌어진다. 의사소통이 잘 안된 관계로 양은 못 잡았지만 -이쪽에서 양을 잡아다가 구워달라고 했는데, 호텔 측에서는 잡아오면 구워는 주겠다 뭐 이리 대답한 듯 하다- 한편에서는 닭바베큐가 준비되고 아저씨들이 꽁꽁 챙겨오신 양주도 탁자에 나온다. 마당에서는 누가 불렀는지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숙소에 묵고 있던 파키스타니들과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까지 어울려 춤판이 벌어지고 몇 번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뛰어다니다-이건 춤이 아니라 운동이다- 자리에 돌아온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술을 마셔도, 시간이 조금 늦어져도 마음이 편하다. 결국 칼라시밸리에서 보낸 나흘간 단 하루로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시며 보낸 셈이다. 대체 누가 파키스탄에서 술을 못 먹는다고 했단 말이더냐.. 이제는 속이 쓰릴 지경이다.


호텔 마당에서 열린 댄스 파티


삼부 아저씨들과 함께, 내 상태는 말이 아니다^^

 

다음날 이 분들의 차를 타고 같이 공사현장까지 이동한다. 원래 생각에는 공사현장인 느와리까지 이분들 차를 타고 나가 페샤와르까지 가는 차가 있는 디르까지 이동해 하루밤을 자고 페샤와르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이 말을 들은 삼부아저씨들 디르가 얼마나 위험한 지역인 줄 아냐면서 이구동성 말리신다. 디르가 오사마 빈 라덴이 숨어 있다고 알려진 지역이라며 언젠가 미군이 폭격도 한 곳이라며 겁을 주신다. 그러면서 공사 현장에 게스트들을 위한-회사의 높은 분이나 가족이 오면 쓰는- 숙소가 있으니 하루밤을 묵고 다음날 일찍 디르로 나가 페샤와르로 가는 차를 타라고 권하신다. 저는 여행잔데 일하시는 곳에서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극구 사양은 했지만 사실 디르에서 하루밤을 자는 일은 나로서도 막막한 일이다. 결국 공사 현장에서 도착해 오랜만에 한식으로 된 점심을 먹고 전무님께-이 현장에서 제일 높은 분이란다- 인사를 드리니 전무님도 디르는 위험한 곳이라며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자고 가라고 허락해 주신다. 게다가 필요한 거 있으면 관리부장에게 말해 가지고 가라며 이것저것 챙겨주신다. 참 여행 다니는 게 무슨 벼슬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죄송스러워진다.


느와리 공사 현장


> 이 고개가 느와리패스인데 이 아래로 터널을 뚫는다고 한다

 

결국 게스트하우스에서 짐을 풀고 저녁을 먹는다. 이곳에서 일하시는 한국분들이 한 삼사십명 정도 되어 아예 한국인 주방장을 두고 삼시 세때 한식을 드신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묵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건 사실 낮에 먹은 점심 때문이기도 했는데 간만에 먹은 김치찌개가 너무 아쉬워 한끼만 더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이번엔 휴무를 나오지 않은 아저씨들과 술을 마신다. 두 명이 한 방을 쓰신다는데 이방저방 감춰 두었던 술병들이 나오고 어디선지 나왔는지 대구포까지 안주로 올라와 있다. 나로써는 해외 공사 현장하면 그저 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러 간 아저씨들밖에 떠오르지를 않는데 요즈음도 이렇게 많은 현장에서 일을 하시는구나 생각하니 나는 이 아저씨들이, 이 아저씨들은 일년 가까이 혼자 여행 다니는 내가 새삼스럽다. 파키스탄의 중부와 남부를 가로막고 있는 산에 터널을 뚫어 겨울이면 완전히 두절되는 이곳에 물류를 수송하는 동맥을 만든다는 이 공사는 앞으로도 삼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다들 가족 이야기며, 공사이야기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삭이고 있다.

 

다음날 삼부아저씨들 아침에는 페샤와르 가는 차가 있는 디르까지 차를 태워주신다. 그것도 모자라 표까지 끊어주시는데 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떠나기 전에 몇몇 아저씨들은 약이며 과자 같은 것도 한아름 싸주시더니 김치도 가져가라고 성화다. 그저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호의를 받으니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큰 사고 없이 모두 건강하게 일 마치시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 한국에 가서 연락하라는 메일 주소 몇 개를 쥐고 아쉬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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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싱>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를 가다

길깃으로 내려와 보니 당일 떠나는 버스는 이미 끊어지고 없다. 다음날 떠나도 칼라시 밸리에서 두어시간 떨어진 치트랄까지는 바로 가는 버스도 없어 마스투지까지 가서 하루밤을 자고 다시 치트랄까지 이동을 해야 한단다. 같이 내려 온 일행도 스카루드 가는 차가 당일에는 없다. 결국 길깃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밤을 묵는다. 길깃에 있는 마디나게스트하우스는 그 명성답게 제법 다양한 투어 프로그램을 마련해두고 있는데 그 중에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를 거쳐 스카루드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프로그램이 있다. 자전거팀에서 하차한 산악인 청년이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전세계에 8천미터급 봉우리가 14- 16개라는 말도 있다-있는데 낭가파르밧은 에베레스트, k2 등등에 이은 여덟번째 높은 봉우리라는데 작년에 우리 원정대가 34년 만에 정상에 오른 곳이라고 한다.

 

산악인 청년 왈 베이스캠프 가는 길이 지금 시기에는 온톤 꽃밭이라고 들었다며 지금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고 열의를 보인다. 사실 파키스탄의 트레킹 코스는 다양하긴 하지만 숙소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라 텐트며 취사도구를 대여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가이드와 포터도 써야 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비용이 만만치 않아 여행자가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는데 지금 이 청년은 텐트며 취사도구를 죄다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나도 솔깃해진다. 사실 티벳에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다녀오긴 했지만 거기는 베이스캠프라기보다는 관광지에 더 가까웠으니 진짜 베이스캠프다운 베이스캠프를 보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다른 일행들도 설득에 넘어간다. 결국 스카르두를 가려고 했던 일행들이 일정을 바꿔 베이스캠프를 가기로 한다. 물론 베이스캠프를 거쳐 스카르두를 다녀 올 수도 있지만 일정과 비용 면에서 부담이 되니 베이스캠프 까지만 다녀오기로 한다, 일단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가 있는 타르싱까지 왕복으로 지프를 대절하고 필요한 장비 몇 가지를 대여한다.


 타르싱 가는 길에 만난 살구 파는 아이들

 

다음날 아침 필요한 부식을 사고 장비를 실은 후 타르싱으로 떠난다. 사실 파키스탄의 지프는 말이 지프지 창문도 없는데다 차의 외형이 철제프레임으로 만들어 있어 장난감차 같다. 기사까지 일곱 명이 포개 앉은 차는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 타르싱에 도착한다. 낭가파르밧이 한 눈에 들어오는 타르싱의 호텔에는 작년 등정에 성공했다는 한국팀이 걸어놓은 플래카드가 그대로 걸려 있다. 설산이 가까워서인지 한여름인데도 제법 추위가 느껴진다. 아무리 텐트를 친다지만 설산에서 하루밤을 보낼 생각에 잠시 아득해진다. 게다가 저녁나절부터 추적주적 비까지 내린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안 갈수도 없는 노릇이니 짐을 실을 당나귀와 그 당나귀를 모는 포터 그리고 가이드를 섭외해 두고 호텔에서 하루밤을 지낸다. 침낭을 꺼내고 호텔에서 준 담요까지 덮어도 새벽에는 한기가 느껴진다. 내심 비라도 왕창 내려 안 가게 됐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낭가파르밧 가는 길1


낭가파르밧 가는 길2

 

다음낭 아침 눈을 떠 보니 여전히 비는 조금씩 내리고 있다. 어차피 산에서 하루밤을 자야하니 해지기 전에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터라 시간은 여유가 있다. 12시까지 기다렸다 비가 그치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자고 이야기를 해 두었는데 10시쯤 되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쨍 하고 해가 뜬다. 결국 짐을 챙겨 베이스캠프로 떠난다. 베이스캠프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다. 게다가 주변은 온통 들꽃이 피어 있어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다. 쉬엄쉬엄 걸어갔는데도 베이스캠프까지는 5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바로 눈앞에 낭가파르밧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잠시 설산에 넋을 놓고 있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짓는다. 바깥에는 바람이 제법 찬데 생각보다 텐트 안은 따뜻하다. 이만하면 얼어 죽지는 않겠다 싶다. 저녁을 먹고 모닥불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든다. 텐트에서 마지막으로 자본 게 언제였던가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늘에선 별이 쏟아지고 불빛 한 점 없는 설산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 가이드말로는 설산이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 건 드문 일이라며 우리더러 행운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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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자> 일행과 헤어지다

훈자에 도착하자마자 이번엔 설사가 시작된다. 사실 물갈이성 배앓이 내지는 가벼운 설사 증세야 나라를 바꾸거나 뭐 좀 지저분한 곳에서 음식을 먹었다 싶으면 늘 조금씩은 있어 왔지만 이번엔 제대로다. 인도에서 설사로 고생하는 여행자들을 꽤 여럿 보기는 했지만 그간 큰 증세는 없었기에 이제 만성이 됐나 보다 했더니 그런 게 어디 있나.. 역시 예외는 없는 법이다. 원인은 물인가 싶은데-사실 훈자의 숙소에서는 뿌연 계곡물이 그대로 수도꼭지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여튼 딱히 아픈 것도 아닌데 거의 한시간에 한두번 꼴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니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다 입맛도 없으니 그저 방안에 널부러져 있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혹시나 싶어 한국에서 가지고 온 정로환을 먹어봐도 별로 나아지는 기색이 없다. 그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꼬박 이틀을 앓고 나서야 설사가 멈춘다.

 

훈자는 파키스탄의 다른 지역보다는 한국인 여행자가 많은 편이다. 게다가 내가 묵고 있는숙소의 손님은 거의 일본인과 한국인이다. 이제 막 여름 방학이 시작된 탓인지 이삼일에 한번꼴로 한국 여행객들이 들어온다. 우리 옆방에 묵고 있는 부부는 이전에 묵고 있는 한국인들이 주고 갔다며 가스버너와 냄비, 양념 등을 갖추고 하루에 두 끼는 방에서 식사를 해 먹는다. -나머지 한끼는 숙소와 붙은 식당에서 뷔페 형식으로 차려진 저녁을 먹는다. 일종의 의무방어전 같은 건데 안 먹는다고 뭐라 그러지는 않지만 숙소비가 싼 대신 저녁 정도는 그 숙소에서 먹는 것이 관행인 듯 하다. 게다가 음식도 싸고 맛있다- 덕분에 슬쩍 끼어서 찌개며 밥, 라면 등을 끼니때마다 얻어먹는다. 이곳은 중국 국경과 가까워서 중국 라면이며 통조림 등이 들어와 있어 풀풀 날라가는 밥을 제외하면 제법 그럴 듯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이곳 식당 저녁 뷔페의 경우 한국인들을 위해 김치가 나오는데 이 김치는 주로 식당 주인의 부탁에 의해 묵고 있는 한국 손님들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번에는 이 부부가 김치를 담궈 주고 얻어 온 김치가 있어 심지어 김치찌개를 얻어먹기도 한다.


숙소에서 본 훈자의 전경-


숙소에서 본 훈자의 전경-

 

그렇게 지내다 보니 하는 일 없이 하루가 간다. 옆집 부부가 떠나며 주고 간 식사도구 일체를 넘겨받아 밥 해 먹고 하루는 식당에 김치도 담궈 주고 그도 모자라 사람들과 함께 방에서 따로 김치를 담아 두고 먹는다. 오후에는 따가운 햇빛을 피해 그저 방에서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들으며 뒹굴거리다 저녁에는 누군가가 새로 오거나 떠나거나를 핑계로 맥주나 한잔씩 하며 시간을 보낸다. -원래 파키스탄은 술을 팔지 않는 나라이지만 이곳 훈자에서는 가게에서 손쉽게 중국 맥주를 구할 수 있고 훈자워터라고 불리는 밀주를 숙소 식당에서 살 수도 있다. 값이 비싼 것이 흠이긴 하지만 그도 곧 익숙해진다^^- 마침 부부가 떠난 옆방에는 캄보디아에서 만났던 전직 사회복지과 공무원이었다는 여자 친구가 묵는다. 원월드티켓을 끊어 떠났으니 지금쯤은 남미에 있어야 하는 하는데.. 게다가 그전에는 일행이 같이 떠난 여자 친구였는데 어라 이번에는 남자친구다. 사연을 들어보니 같이 떠난 여자친구, 이집트에서 이집트 남자를 만나 9월에 결혼 예정이란다. 그래서 결국 혼자 여행을 계속하다가 지금의 일행을 만나 이 친구도 일정을 바꾸게 된 것이란다. 캄보디아에서 만났으니 거의 10개월 만에 본 셈인데 그사이 둘 다 제짝을 찾은 셈이다. 부러워라..

 

그러다 어느 날 두달 넘게 같이 다녔던 친구가 중국으로 떠난다. 원래 일정이 그렇기는 했지만 훈자에서 꽤 오래 머물 것처럼 보였는데 좀 갑작스럽다. 그래도 갈 사람은 가야 하는 법... 다음날 한국 친구들 몇 명과 근처에 있는 파수 방면으로 트레킹을 갔다가 친구는 국경 마을인 소스트로 가고 나는 다시 훈자로 돌아오기로 한다. 떠나기 전날 혼자 근처에 있는 울타르 빙하쪽을 다녀 온다길래 그런가보다 했더니 제법 어두워져서야 다리를 절며 나타나서는 길을 좀 헤맸다는데 인대가 상한 것 같다며 파수쪽 트레킹도 힘들겠다고 한다. 섭섭한 마음에서인지 공연히 짜증을 부리다 결국은 싸움이 된다. 떠나는 길에 싸우고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럭저럭 수습은 했지만 개운치 않은 상태로 다음날 같이 버스를 타고 가다 나는 파수에서 내리고 친구는 소스트로 떠난다. 파수에서 후세이니 마을로 이어지는 서너시간의 트레킹 코스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여전히 세 시쯤이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소스트행 버스를 탄다. 결국 소스트에서 한번 더 얼굴을 보고 친구는 중국으로 나는 훈자로 돌아온다.

 


파수트레킹 도중 만난 마을


일명 서스펜션 브릿지, 생각보다 많이 무섭다^^

 

두달만에 혼자가 되어서인지 꼭 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모든 일이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저 옆방의 친구와 수다나 떨며 지내다가 그 친구마저 떠나고 나서는 그저 방안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나마 목도리도 다 뜨고 나니 친구가 주고 간 이북이 유일한 위안이다. 그렇게 이삼일을 보내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또 다른 한국인 여행자들을 따라 라카포시로 트레킹을 다녀온다. 훈자 근처에는 레이디 핑거, 라카포시 등 거의 8천미터에 육박하는 이름난 등정 코스들이 있는데 라카포시 트레킹은 그 라카포시봉의 베이스캠프가지 다녀오는 트레킹 코스로 중간에 설산의 눈이 녹아 만들어진 빙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원래는 제대로 간다면 라카포시봉 아래에 있는 미나핀 마을에서 하루, 중간 지점인 하파쿤에서 하루를 자고 디란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는 2 3일 일정이지만 이 경우 텐트까지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일반적으로는 디란베이스캠프가 아니라 미나핀 마을에서 하루 거리인 라카포시 베이스캠프만 다녀온다고 한다. 그나마 우리는 그냥 지프를 대절해 아침 일찍 미나핀으로 떠나 라카포시 베이스캠프까지 갔다 저녁에 다시 지프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아침 일찍 출발한 지프는 미나핀 마을에 있는 디란게스트하우스에 우리를 내려준다. 거기서 아침을 먹고 간단한 점심거리를 챙겨 출발한다. 라카포시 베이스캠프까지는 왕복 8시간 거리다. 저녁 6시에 다시 지프를 타고 돌아가기로 기사와 약속을 하고 가이드 없이 그냥 게스트북에 그려진 지도만 가지고 길을 떠난다. 계곡을 따라 두어 시간을 올라가니 제법 큰 마을이 보인다. 마을에서 길을 물으니 꼬마 둘이 길안내를 해 준다. 두어 시간을 더 올라가니 멀리 라커포시봉과 그 아래 빙하가 보인다. 이제 한두 시간만 더 가면 되려니 했지만 꼬마 가이드 왈 4시간 남았단다.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그냥 따라가 본다. 어느 지점에서 저 등성이만 넘으면 베이스캠프라고 일러주곤 아이들은 다시 마을로 되돌아간다. 어느새 빙하는 발밑에 보이지만 저 등성이는 아득하기만 하다. 결국 시간이 오후 3시가 되어갈 무렵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온다. 아무리 내리막길이라도 온 시간을 생각하면 더 올라가는 것은 무리다. 결국 마을에 내려오니 저녁 7시가 훌쩍 넘어 있다. 꼬박 11시간 가까이 걷고도 베이스캠프는 구경도 못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꼬마들이 안내한 것은 라카포시 베이스캠프가 아니라 디란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1 2일 걸리는 거리를 당일로 다녀오려 했으니 도착을 못 한 것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가이드해 준 동네 아이들


> 앞에 보이는 것이 라카포시 봉이고 옆에 보이는 것이 미나핀 빙하다.

 

트레킹도 했으니 이제 슬슬 훈자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또다른 일행을 만난다. 한국에서 포르투칼까지 자전거로 횡단하는 팀인데 숙소에서 만난 젊은 친구들이 중국에서 만난 이 팀을 훈자에서 다시 만났다며 같이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해서 만나게 된다. 일행은 모두 4명인데 누가 봐도 자전거 아니라 뭐라도 타게 생긴 두 사람과 자전거라곤 동네 오락실에서 오락으로나 타 봤을 것 같은 두 사람이다. 전자의 두 사람은 사실 자전거가 전공이 아니라 산악인들인데 그 중 한 사람은 어느 등정에선가 크레바스에 빠진 후배의 자일을 차마 끊지 못해 10시간 넘게 잡고 있다가 동상으로 손가락 8개를 자른 분이다. -다행히 그 후배도 죽지 않고 살아났단다- 같이 숙소마당에서 백숙을 끓여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아쉽게도 그분은 원래 중국까지만 같이 하기로 한터라 그날이 마지막 날이었고 또다른 산악인 청년은 허리디스크 때문에 훈자에서 중도 하차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동네 오락실 청년 둘이 이 여정을 이어가게 된 모양이다. 여튼 이 친구들이 며칠 훈자에서 쉰다며 잡는 바람에-게다가 훈자에 무슨 페스티발도 한다나- 내친김에 이삼일을 훈자에 더 머무른다. 사실 페스티발은 예상했던 대로 안 보는 게 나을 뻔 하긴 했다.


훈자페스티벌, 사람은 많이 모였는데 별 재미는 없었다는^^

 

결국 엉성한 동네 페스티발이 끝난 다음날 아침 일찍 두 사람이 자전거로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로 길깃으로 떠난다. 길깃까지 가서 나는 칼라시 밸리가 있는 치트랄로, 나머지 친구들은 스카루드로 떠날 예정이다. 자전거팀에서 하차한 친구의 자전거며 짐이 많아서 길깃까지는 지프를 대절해 함께 내려온다. 결국 거의 삼주를 훈자에서 뒹굴거리다 내려오는 셈이다. 아마 이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훈자에서 한달을 머물렀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부터는 다시 혼자 움직여야 한다. 사실 여행 전체를 통틀어 보자면 혼자 움직인 기간이 훨씬 더 긴데도 어째 쉽사리 적응될 것 같지가 않다. 뭐 딱히 외로운 것도, 무서운 것도 아닌데 이 막막함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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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마바드>그래도 한국인 숙소가 좋다

아침에 호텔을 나와 미리 예약해 놓은 대우 버스를 탄다. 아니 이제 삼미 버스인가.. 여튼 간만에 타보는 안락쾌적한 버스다. 에어콘은 기본에 비디오 청취용 핸드폰을 일일이 나눠주는 안내양 언니가 있는 전형적인 우리에 80년대 버스다. 게다가 샌드위치며 음료수까지 나눠 준다. 차이가 있다면 안내양 언니가 검은 머리 수건을 쓰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인도에서 찢어지는 스피커 소리에 아랑곳없이 틀어대던 음악과 사람들의 소음 속에 버스를 타다가 간만에 조용한 버스를 조금 이상한 느낌마저 든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도 우리네 고속도로 비슷하다. 거의 8차선은 되어 보이는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있어 차가 도착하는 라왈핀디까지는 300km 정도가 된다는데 시간은 5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다만 창밖으로는 가끔 집들이 두어 채 보일 뿐 끝없는 황토빛 벌판만 계속된다.

 

차는 라왈핀디에 우리를 내려준다. 이슬라마바드에 간다더니 웬 라왈핀디냐고? 그게 말이지 파키스탄 정부가 카라치에서 이슬라마바드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슬라마바드를 우리에 창원이나 분당처럼 계획도시로 만든 모양이다. 그래서 주소도 F구역 15번 거리 홈넘버 39 정도만 가지고 거의 모든 곳을 찾아갈 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그전부터 제법 큰 도시였던 이슬라마바드 바로 옆의 도시인 라왈핀디는 그냥 교통의 요지로 두고 이슬라마바드는 행정과 주거를 담당하는 정도로 역할 분담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뭐 말은 다른 도시지만 이 두 도시는 차로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니 대략 같은 도시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여튼 라왈핀디에 내려 또다른 대우버스를 갈아타고 이슬라마바드로 향한다.


라왈핀디의 대우버스터미널

 

이슬라마바드에도 한국인 숙소가 하나 있는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배낭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곳이 아니라 파키스탄에 잇는 한국인 회사나 비즈니스맨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숙소도 이슬라마바드의 고급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고 식당도 거의 호텔 수준이다. 물론 방값도 거의 한국 수준이다. 인터넷 어디선가 배낭 여행자에게는 약간의 할인이 된다고 해 미리 메일을 보내두었는데 답장을 받아보나 할인이 되기는 해도 그 역시 만만한 가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호르에서의 출혈이 채 가시지도 전에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놈의 월드컵 때문이다. 예선전 3경기 중 마지막 경기인 스위스전을 보기 위해 굳이 한국 숙소를 찾아 온 것이다. 하지만 고급 주택가에 자리잡은 이 쾌적한 숙소에는 같이 월드컵을 볼만한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결국 달랑 둘이서 경기를 본다.

 

숙소 주인은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분인데 우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앉아 있으니 밥한공기를 들고 와 같이 먹으며 두런두런 말을 건넨다. 파키스탄에 오자마자 그냥 시작한 숙소라고.. 이제 5년쯤 되었다고.. 아들이 친구처럼 키가 크다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친구가 숙소가 참 편하다고 했더니 그말이 가장 듣기 좋다며 진짜냐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알다시피 고급주택가에 있다보니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아 배낭여행객들에게는 할인을 해 준다 해도 비싼 걸 안다며 미안하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편해서 좋다며 장기여행자들 중에 며칠씩 묵어가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그냥 집같이 편하게 있다 가라신다. 아닌게 아니라 책장엔 한국책도 가득하고, 한국 음식에, TV, 에어컨에 며칠 확 묵고 가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만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다. 쉬는 건 훈자에 가서 하기로 하고 결국 다음날 다시 길을 나선다.


파키스탄의 버스들, 심하게 화려하다.

 

다시 라왈핀디로 나가 길깃행 버스를 탄다. 길깃은 훈자에서 세시간 가량 떨어져 있는 도시로 훈자로 가려면 이곳에서 내려 다시 미니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대우버스는 대도시들 사이에서만 다니는 모양이다. 버스는 다시 인도 버스 비스름해져 있다. 3시에 출발한다던 차는 4시가 다 되도록 지붕위에 짐을 싣더니 4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출발한다. 게다가 에어컨 틀어 놨다고 커튼도 못 열게 한다. 살짝 커튼을 젖혀 창밖을 본다. 이 길이 그 유명한 카라코람 하이웨이다. 사실 리왈핀디에서 길깃까지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반이상을 달리게 되는 셈인데 버스가 주로 밤에 달리니 경치를 감상하기는 쉽지 않다. 저녁을 먹으라고 내려 준 식당에도 아침을 먹으라고 내려준 식당에도 도무지 먹을 만한 음식이 없다. 저녁은 빵으로, 아침은 그냥 음료수 한잔으로 때운다. 14시간 걸린다던 버스는 거의 20시간을 달려 다음날 정오쯤에 길깃에 도착한다. 상태가 말이 아니지만 바로 미니버스-말이 미니버스지 우리네 8인승 봉고를 20인승으로 개조한 거다-를 갈아타고 훈자 밸리의 한 마을인 카리마바드로 향한다.


훈자가는 길

 

훈자가 제법 유명한 여행자이니 거리만 봐도 내릴 수 있겠거니 여유를 부리고 있다가 친구가 내리라고 하는 소리에 정신이 든다. 그냥 마을 어귀인 거 같은데 여기가 우리가 갈려고 숙소인 올드 훈자인이 있는 곳이란다. .. 여기는 아닌거 같은데 하며 부랴부랴 따라내리니 올드 훈자인 간판이 보인다. 간판을 따라 들어가니 웬 할아버지한 분이 이리로 오란다. 올드 훈자인이냐니까 그렇단다. 따라가 보니 옆방에 한국인 부부도 묵고 있고 방도 나쁘지 않아 그냥 묵기로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는 올드 훈자인이 아니라 할아버지 집으로 유명한 하이데르인이다. 할아버지, 버스에서 내리는 모든 여행객들이 말하는 숙소는 죄 여기다 하며 데리고 오신단다^^ 결국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숙소에 도착한다.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한지 꼬박 하루만에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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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첫날부터 삽질이다

암리차르에서 하루를 묵고 나서 곧장 인도 국경으로 향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에서는 날마다 국기 하강식때 일종의 이벤트가 벌어진다고 하는데 이름하여 군사 연극이 그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한때는 한나라였지만 국민감정은 그리 좋지 않다. 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두나라 사이에 유일하게 열려 있는 이 국경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경비대들이 일종의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다. 힘겨루기라고 해 직접 몸싸움을 하는 건 아니고 과장된 몸짓과 동작으로 국기 하강을 위해 움직이면 이를 보고 있는 관중들도 질세라 큰 소리로 함성을 질러 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이걸 보기 위해 날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양쪽 국경으로 모여든다고 한다. 이 이벤트를 보기 위해 국경을 넘지 않는 외국관광객들도 찾아와 이 행사만 보고 돌아가기도 한다니 꽤나 유명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가 국경에 도착한 시간은 낮 2. 국기하강식을 보기 위해선 서너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다 무엇보다 그걸 보고 나면 이미 국경이 닫혀버려 국경마을에서 하루를 자던지 다시 암리차르로 돌아가야 한다. 뭐 그렇게 까지 해서 보고 싶은 건 아니니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국경에 도착해 음료수나 한잔 마시려고 가게에 앉으니 가게 주인이 맥주가 있단다.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가면 당분간 못 마실테니.. 해가며 남은 인도 루피를 털어 맥주를 마신다. -오마니 죄송합니다. 그렇게 술 조금만 마시라고 이르셨거늘.. 마침내 낮술까지^^-  마침 가게에서 군사 연극을 찍은 VCD를 보여 준다. 닭벼슬같은 모자를 쓴 인도 군인이 쿵쿵거리며 국기 근처로 가는 모습이 코메디를 연상시킨다. 아마 판매를 위해 틀어 놓은 모양이다. 친구가 그걸 하나 산다. 나한테도 하나 구워 주겠다는 데 내 노트북엔 CD롬이 없다. 결국 한국에 가서 받기로 하고 군사 연극을 못 보는 아쉬움을 달랜다. 이제 파키스탄으로 넘어갈 시간이다. 해는 여전히 머리 꼭대기에 있고 낮술에 정신은 해롱거리는데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은 뭐가 이리 긴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몇 번인가 여권 검사를 하고 두어장의 종이를 쓰고 나서 결국 낮술이 깰 때쯤에야 라호르행 버스를 탄다

 

라호르에 도착해선 삽질이 시작된다. 라호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게스트하우스인 리갈 인터넷인으로 가기로 하고 릭샤를 잡아탄 것 까지는 좋았는데 릭샤 아저씨 왈 그곳은 호텔이 아니란다. 그러고보니 론리에 있는 리갈 인터넷인이 숙소 편에 있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게 극장이었던가.. 마구 헷갈린다. 파키스탄부터는 사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어온 데다 가이드북이라곤 <이스탄불 투 터키> 즉 별로 두껍지도 않은 책에 네팔, 인도, 파키스탄, 이란, 터키까지 다섯 나라나 들어있으나 정보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영어로 되어 있으니 눈에 쏙쏙 들어오지도 않고 하는 이유로 대충 도착한 게 화근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하루만 묵고 이슬라마바드 거쳐 훈자로 쏠려고 했으니 그냥 대우터미널로 방향을 돌린다. 어차피 터미널 근처면 숙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곳 파키스탄엔 대우버스가 있는데 가장 시설도 좋고 독자적인 터미널까지 있는 고급 버스이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터미널 근처엔 터미널 이층에 있는 비싼 호텔 달랑 한 개뿐이다. 그나마 ATM도 국내 카드밖에 되질 않아 한참을 은행을 찾아다니다 결국 포기하고 그냥 환전을 하고 만다. 친구와 터미널에 앉아 그냥 밤차로 이슬라마바드로 갈지, 좀 비싸지만 터미널 호텔에 그냥 묵을지 아니면 다시 싼 여행자 숙소를 찾아 다시 돌아갈지 의논을 해 본다. 이슬라마바드로 바로 가기엔 너무 피곤한데다 시간이 고작 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니 늦은 시간에 버스를 탄다 해도 새벽에 도착하게 되니 이동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고 호텔은 아무래도 너무 비싸고-둘이 삼만원 돈인데 이 나라에선 그게 왜 그리 비싸게 느껴지는지- 여행자 숙소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다. 게다가 어차피 내일 아침에 다시 이곳으로 와야 하는데 차비도 만만치 않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터미널 의자에 널부러져 있다가 내가 결단을 내린다. 근처의 싼 숙소를 찾아보자.

 

론리를 뒤지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스호스텔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으니 거기로 가기로 한다. 릭샤를 잡아타고 지도를 보여 주니 안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애매한 표정이다. 일단 숙소가 있다는 거리인 후세인 쪼크까지 가기로 한다. 거기서부터 지도에 있는 길이라 추정되는 길을 아무리 헤매도 숙소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릭샤에서 내려 가방을 메고 이리저리 길을 묻는다. 삼십분 남짓 헤매다 결국 찾긴 했는데 이 숙소 없어진지 오래란다. 벌써 연립 주택 같은 것이 들어서 있다. 내가 가자고 했으니 화도 못 내겠고 그저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다. 나는 하릴없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친구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근처에 호텔이 있는지 묻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친절한 파키스타니들은 인사에 여념이 없다. 하우 아 유? 표정 보면 모르겠냐.. 나 지금 심히 안 좋거든 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도 파인, 오케이 해가며 지들이 대답까지 한다. 몬살아^^그 와중에 한둘은 메이 아이 헬프 유? 하고 다가오긴 하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 결국 이러고 있어 봐야 시간만 흐르니 그냥 비싸더라도 터미널의 호텔에 가기로 하고 다시 릭샤를 탄다.

 

호텔에 짐을 푸니 날이 벌써 어두워져 있다. 거의 서너 시간을 숙소 잡으려고 삽질을 한 셈이다. 간신히 씻고 터미널 매점에서 파키스탄판 KFC를 사다가 숙소에서 대충 저녁을 때운다. 뭐 이런 날도 있지.. 하고 생각하려고 해도 괜히 친구보기도 미안하고 몸도 피곤하고 그러다보니 마음도 우울해져 괜히 파키스탄이 싫어질려고 한다. 게다가 파키스타니들.. 참 사람들에게 관심도 많다. 보는 사람마다. 핼로우에 하우 아 유인데 생각해 보라 하우 아 유에 대답이 얼마나 기냐 말이다. 파인 땡큐에 앤드 유까지 하면 이미 인사한 사람은 지나가고 없다 말이다^^. 게다가 결정적일 때 도움은 전혀 안된다니.. 군시렁군시렁.. 공연한 짜증이 결국 파키스탄을 지나 파키스타니들에게 까지 이어진다.

 

** 뭐 딩연하게도 사진찍을 여력은 전혀 없었으며 고로 사진도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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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차르> 그나마 다행이다

암리차르로 가는 버스에서 결국 문제가 생긴다. 다람살라에서 암리차르로 가기 위해선 중간도시인 빠탄곳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버스 지붕에 올려 둔 가방을 꺼내보니 친구의 배낭 어깨끈 부분이 예리한 칼로 반쯤 찢겨져 있고 허리벨트 부분이 전부 망가져 있다. 누군가가 중간에 버스 위로 올라 가 가방을 가져가려 한 모양인데 첨엔 다른 짐들 사이에 있으니 있는 힘껏 당겼을 테고 -허리벨트는 이때 망가진 게 아닌가 싶다. 다행히 허리벨트 부분은 버스 프레임에 묶여있었다- 그게 여의치 않자 어깨끈 부분을 잘라내려 한 모양이다. 여행 떠나기 전 간혹 가방이 통째로 없어지는 경우가 있으니 트렁크에 넣든지 지붕 위에 올리든지 할 때는 버스 정차 시간에 꼭 가방의 이상 유무를 살피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거의 10개월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누가 인도 아니랄까봐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지 않던 일이 일어난다. 친구의 가방에는 카메라가 무려 세대나 들어 있었는데-그나마 한대는 들고 있었다는^^- 아마 가져갔다면 누군가는 팔자를 고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한 건 그 옆에 내 배낭도 있었는데 그건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거다. 도둑들한테는 배낭속이 들여다보이는 모양이다^^

 

거의 40도가 남는 더위에 에어콘도 없는 만원버스를 타고 게다가 난도질 된 가방을 들고 암리차르에 들어서니 녹초가 된다. 황금사원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숙소와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 있다. 사실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 순례객들을 위한 시설인데 이 한켠에 여행자를 위한 시설도 함께 마련해 둔 것이다. 하지만 무료 시설이라는 게 보지 않아도 뻔하지 싶어 그냥 일반 숙소를 찾아간다. 론리 첫 줄을 장식하고 있는 숙소임에도 시설이 열악하기 그지 없다. 열악하면 가격이라도 싸면 좋으련만 심지어 가격까지 만만치 않다. 별 수 없이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간 식당은 게다가 채식 식당이다. 씨크교도들은 거의 채식주의자라 도시 전체에서 고기를 찾아보기가 싶지 않다고 한다. 에구 오래 머물 곳은 아니다 싶다. 다행히 식당은 에어컨도 나오는 것이 제법 깨끗하다.


황금사원 입구, 건물이 흰색이어서 누구는 데려다 준 릭샤왈라에게 여기가 아니라고 박박 우겼다는데.. 들어가면 황금색 사원이 있다.


이거다.

 

씨크교는 약 500년 전 구루 나닥이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에 불만을 품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을 모아 만들었다는 종교인데 그러다 보니 이슬람과 힌두교 양쪽으로부터 받은 박해의 역사도 만만치 않다. 특히 1980년대에는 이곳 암리차르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인도 정부는 황금 사원까지 탱크를 몰고 들어와 피의 진압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인도 전역에서 수천명의 시크교도들이 힌두교도들에게 테러를 당해 사망하기도 했다는데 어디서나 민족 문제와 종교 갈등은 분쟁의 씨앗인 모양이다. 씨크교도 남자는 머리에 터번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기 때문에 외면적으로도 다른 힌두교도들과는 확 구별이 된다. 아니게 아니라 이 도시에는 거의 모든 남자들이 터번을 두르고 있다. 반면에 여자들의 복장은 다른 인도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씨크교도들만 물안에 들어갈 수 있다.

 

저녁을 먹고 황금 사원을 들러본다. 이곳은 씨크교도의 성지라 그런지 거의 새벽의 두어시간을 제외하고는 문을 닫지 않는다. 게다가 입장료도 없다^^제약이 있다면 반드시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들어가야 하는 건데 별 수 없이 친구와 사원 앞에서 싸구려 손수건을 하나씩 사서 쓴다. 70년대 장보러 나온 가정부 같은 모습이다. 사원 입구에 신발을 맡기고 흐르는 물에 발을 씻고서야 사원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이 황금사원이라 불리는 이유는 중앙에 있는 사원의 지붕이 750kg이나 되는 금박으로 입혀져 있기 때문이라는데 그 주변이 물로 둘러싸여 있어 저녁 무렵에는 제법 선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사원 안은 성지를 찾은 씨크교도들과 그저 관광하러 온 인도 여행객들로 부산하다. 천천히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본다. 한켠에는 예의 무료급식소가 보이고 조금 더 들어가니 무료 숙소도 보인다. 게다가 사원 코너에서는 순례객과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마실 것을 나눠 주기도 한다. 씨크교도들이 인도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더니 이를 통해 종교 확장과 사회 환원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황금사원의 야경


사원에서 만난 인도소녀와 함께 

 

결국 암리차르에서 하루를 머물고 인도의 국경 마을인 와가로 가는 버스를 탄다. 인도에서 한달을 머물렀지만 간 곳이라고 바라나시, 델리, 다람살라가 고작이다. 뭐 다른 사람들처럼 인도에 대한 이런저런 환상을 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여행 끝 무렵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님 나중에 다른 기회가 닿으면 천천히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싶다. 인도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넓으니까.. 못 가본 곳이 많으니까.. 그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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