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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5/26) 한국의 월드컵 대표팀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대표팀과 평가전을 치렀다. 나도 밥 먹으면서 열심히 봤다. 이번 평가전을 보면서 축구와 월드컵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하는 일 없는 2월부터 밤에 축구 중계 방송 보는 재미로도 살았다. 유럽 챔피언스리그와 유럽 리그,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많이도 구경했다. 처음엔 시간 때우기용에 가까왔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 땜빵용 TV프로그램으로 적당한 게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29인치 TV 화면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쬐금한 공을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졸음도 솔솔 찾아오고 꽤 괜찮은 프로가 축구 중계였다.
이렇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축구 중계가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다. 나는 클럽 축구가 왜 재미있는지 몰랐었다. 그러다가 클럽 축구를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나름대로 '축구의 문법'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경기장의 선수들은 왜 저 자리에서 저러고 있을까? 그들의 의도와 공의 향방은? 분명 여러 가지일 축구의 전략-전술을 제대로 알지는 못해도 '축구의 문리'를 약간 틔였다.
클럽 축구를 보기 시작한 최근을 제외한다면 지난 4년 동안 축구는 내게 그다지 흥미를 주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국가대표 대항전, 즉 월드컵을 포함한 각종 국제 대회나 평가전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국민정서'(이건 우파들이 보통 쓰는 말이고 빨갱이들은 '국가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 따위의 말은 더 좋아한다)와 관련이 깊은 듯하다. 내가 주변 인물 중에서는 상당한 리버럴리스트에다가 아나키스트이기는 해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나의 뇌세포에 쌓여온 '국가와 민족'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한게다. 어쨌든 국가 대항전은 축구의 문법이나 경기의 흐름을 즐기기보다는 결과에 집중하게 하고 무척 자극적이다. 그래서 나도 국가 대항전에 관심을 가졌었고 약간의 흥분도 했었던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어느 팀을 응원할까를 고민했었다. 선전할 만한 팀을 물색했다. 그냥 잼나게 경기할 만한 팀을 찾았다. 그 당시도 각 언론사들은 대회 전에 각 대표팀에 대한 리뷰와 분석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나름대로 괜찮아 보이는 팀이 폴란드팀이었다. 브라질팀 같은 팀은 응원 안해도 잘 할 테니까 오히려 관심을 갖지 않았다. 폴란드팀-한국팀 경기를 당시 이문옥 선본(파견 중) 사무실에서 운동원들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꺼리낌 없이 폴란드를 응원했다. 옆에 있던 이들은 장난인 줄 알았다가 진짜인 줄 알고선, "어? 정말? 그게 돼?" 반응. 결과는 폴란드팀이 한국팀에게 0:2로 패했는데, 한국팀이 경기를 무척 재미있게 하는 거였다. 그래서 그날로 응원팀을 한국팀으로 바꿨다. 8강전까지 잼나게 봤다. 4강전은 결코 4강이 되어서는 안되었을 독일(넘 잼없어)과의 경기라 별로였다. 그리고 터키팀과의 3-4위전은 축구경기라기보다는 '위문공연' 같아서 이전만큼 응원도 안했다.
한국팀-미국팀 경기는 비 오는 날 시청 근처 음식점에서 보게 되었다. 선거운동 하지 말자고 말렸거늘 일단 시청광장으로 나가라고 해서 우르르 나갔다가 분위기 아닌 거 알고 광장 스크린을 잠시 지켜 보다가 음식점에 들어가서 요기하면서 축구를 보았다. 그때 정말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집단 광기'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음식점 홀 가득 빨간티 사람들이 가득했고 방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방에 앉은 우리 일행은 Be The Reds!를 입고 있지 않았는데 그 분위기가 무서워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티셔츠는 일행 중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왕창 얻어온 옷이었다. 얻어오지 않았다면 우린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한편으로 한국팀-스페인팀 경기는 또 다른 경험을 주었다. 친구가 마포 모 호텔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딱 이 경기와 겹친 것이다. 예식장에서 큰 스크린으로 축구 중계를 틀어주었다. 예식이 진행되는 잠깐 동안은 예식을 중계했다. 큰 홀에서 식사를 하면 결혼식과 빅매치 중계를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이었다. 결혼식을 마치면 친구들끼리 모여서 술 한 잔 하기 마련이라 한국팀-스페인팀 전이 끝나고 신촌으로 나왔다. 마포에서 택시 타고 왔는데 신촌로터리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려야만 했다. 어디서 쳐박혀 축구 보던 인간들이 다 뛰쳐 나와 그 넓은 신촌로터리를 다 메워버린 것이다. 예전에 데모대에 끼어 신촌로터리를 가득 메웠던 경험이 떠올랐다. '해방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길거리에 뛰쳐나와 소리지르고 돌아다니는 건 짜릿한 경험일 것이다. '해방감'이란, 다른 데서 먼저 경험을 했었던 나같은 이들나 그런 경험이 없던 그 누구나 필요한 감정이기는 하다.
어쨌든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분위기는 많은 얘깃거리를 남겼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파시즘에 가까운 '광기'와 억압된 몸짓을 풀어준 '해방감'의 이중성이라고나 할까. 이런 저런 분석도 많았지만 가장 황당한 주장은, 한국팀-미국팀 경기에서 한국팀을 응원해야 하는 이유를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이라며 나름대로 진지하게 설파했던 그 누구의 글이었다. 반제국주의 감정에 대한 선동이라고나 할까. 국가 대항전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겠다면, 그리고 축구 매니아로서 팀 구성원들 때문에 특정한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면, 죄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스로 가장 좌파답다고 자신하는 자의 누구보다도 우파적인 주장이었다.
월드컵은 국가 대항전이다. '국가'라는 딱지를 붙이고 경기를 하는 것이다. 국가를 배경으로 한 경쟁이 과연 '국민정서', '국가이데올로기' 따위와 멀어질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자신과 가깝거나 관련 있는 팀의 승리와 쾌거를 간절히 바라는 것도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고 관심을 받아야 하고 그들의 자아실현을 위한 배려도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나'를 제외한 모두를 똑같이 대할 수는 없다. 기대도 다르고 태도도 다르다. '적'은 없더라도 감정이입이 되는 대상은 있기 마련이다. 한국 사람들이 대체로 한국팀을 응원하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와 가깝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축구에 열광하는 한국 사람들이 실제로는 축구를 좋아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야구의 경우는, 기업이 도시를 배경으로 팀을 만들고, 이렇게 만든 팀들이 리그를 구성했다. 성공을 거두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야구장을 메우고 각 팀과 선수들의 기록을 줄줄 외운다. 물론 각자 응원하는 팀이 있다. 축구의 경우는, K-리그는 여전히 썰렁하다. 스타 선수의 반짝으로 어쩌다 매진된 경기가 있기는 하지만 축구경기장을 왠만히 채우지도 못한다. 아마도 각 축구팀의 서포터즈로 자처한 이들이라든가, K-리그의 중계 방송을 즐긴다거나 하는 사람들은 분명 축구의 매력에 홀딱 빠진 사람들이 맞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민들 중에는 소수인 것도 분명하다.
자신이 사는 도시의 축구팀(사실 기업의 축구팀이라 해야겠지)도 응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국적을 부여한 '대한민국'의 태극마크가 붙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는 한국 대표팀을 응원한다는 것은, 축구에 대한 애정/관심 따위보다는 '국가의 부름'에 대한 대답이거나 '국가 간의 대결'을 즐기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옳지 않은가 싶다. 서울 사람들의 대부분은 FC서울의 경기에는 관심도 없지만 한국팀 경기는 꼬박꼬박 놓치지 않고 응원하는 서울시민들은 적지 않다. 축구에서 한국팀은 '자랑스런 나의 팀'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뭔가 자신과 끈으로 이어진 팀. 기업이 만들어 놓은 팀은 고장팀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대한민국축구협회가 구성한 팀에는 감정이입을 한다. 축구는 '국민정서'를 끄집어내는 도구로 변신한다.
'국민정서'를 끄집어내기에, 확 끄집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가 월드컵이 되어버린 것 같다. 독도 문제 따위도 아주 좋은 수단이긴 하지만 국제정치 지형이라는 변수가 많이 작동한다. 이에 비해 월드컵은 정기적이고 체계도 잘 잡힌 국제대회이니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훌륭한 도구가 된다. 그리고 올림픽과 달리 복잡하지도 않다. WBC나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보다 규모도 크다. 확실한 한 판 승이 짜릿하기도 하다.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내는 월드컵은 모든 걸 묻어버릴 만큼의 강한 애국심을 불러낸다. 월드컵에서의 어떠한 결과도 비교될 수 없는 영향력을 한국 사회에 미칠 FTA 따위도 애국심으로 가려진다.
애초에 축구에 관심이 없거나 싫은 사람, 월드컵이 싫거나 국위선양, '국가의 부름'이 싫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사라진다. 그리고 이런 배려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기업과 언론도 비난받지 않는다. 다수와는 다른 감성의 소유자들은 소외되는 월드컵이다.
이번 월드컵은 내게 가장 시큰둥한 축구경기가 될 듯하다. 소외시키는 공모자가 될 것이냐, 괜한 생각에 내심 관심은 있으면서 즐기지도 못하는 소심쟁이가 될 것이냐.
P.S. 그리고, 한 가지 더. 스위스와 코트디부아르의 평가전을 보았는데 수준이 다르더만. 제발 이변은 없어다오. 똑 떨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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