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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다니는 윗층 아이들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 실내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행동은 제지해야 할까? 그런 행동은 이웃에게 폐를 끼치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할까?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약해지는 요즘 세태에 남들이야 괴롭든 불쾌하든 내 아이는 자기하고 싶은 대로 키우겠다는 태도도 문제이지만, 아이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윤리 기준 중심으로만 대하는 태도도 큰 문제이다.

 

물론 열 살쯤 먹은 애가 실내에서 쿵쾅 뛰어다니면 잔소리를 해야 한다. 아래층 이웃이 얼마나 괴롭겠냐며, 타인을 위해 너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다섯 살이라면? 애매하긴 한데 살살 타이르면 좋을 듯 싶다. 세 살이라면 집안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를 제지하기보다는 매트 깔아주는 대처가 바람직하다.

 

인간은 지구의 모든 생명 종 중에서 가장 큰 격차로, 성체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불완전한 상태에서 태어난다. 어느 정도냐면 태어난 지 20년이 지나도 뇌가 다 자라지 못한다. 인간의 뇌는 파충류도 갖고 있는 감정뇌는 상당히 자란 채로 태어나지만 사회 생활을 위해 진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고도의 사고와 성찰이 이루어지는 부위는 성인에 비해 작다. 윤리적 성찰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태어나서 서서히 가능해지는 뇌로 성장한다.

 

사회 윤리 의식을 버리고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기는 쉽지 않지만 모든 성인이 해봐야 하는 관찰이다. 이런 관찰을 여러 번, 상당히 긴 시간 해보지 않는다면, 역설적으로 그 태도는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윤리 의식의 결여이다.

 

다섯 살 미만의 아이들은 모여 있어도 각자 논다. 각자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 조정해서 하나의 규칙에 다수가 참여하는 놀이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회성이 취약하다. 사실은 사회성을 지닐 능력이 아직 없는 상태이다. 이런 아이들한테는 성인들이 갖는 윤리 의식이 자리잡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에게 성인들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학대가 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걸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주로 부모와 상호작용하면서 윤리 의식을 기른다. 그런데 어떤 원리를 받아들인 다음에 이 원리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는다. 반복하는 경험으로 행동방식을 결정한다. 행동 원리는 타고난 자질에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어린 아이에게 타인을 배려하라는 말을 백 날 해봐야 자신의 원리로 삼지 못한다. 뛰면 엄마가, 아빠가 싫어하는구나라고 그냥 그렇게 입력될 뿐이다. 생존 자체를 부모에게 의지한 어린 아이는 부모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얌전해지거나, 부모에게 관심을 더 받으려고 더 뛰어다닌다. 어쨌든 부모가 싫어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이것이 윤리의식의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행동의 제재는 타인을 배려하라는 윤리 의식이 아니라, 부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행동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주변의 반응으로 행동 규범을 만든다. 그런데 그 행동 규범에 사회 윤리 의식이 덧붙여지는 시기는 꽤 훗날의 일이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를 대할 때, 특히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 행동 방침을 심을 때 포기하는 무언가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 집안에서 뛰지 말라는 가르침은 번잡한 식당에서 돌아다니지 말라는 가르침과는 아주 다르게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육아 방식이다. 왜냐하면 세 살 언저리의 아이라면 뛰어다니면서 몸을 만들기 때문이다. 근육뿐만 아니라 훗날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도록 하는 신경계를 키우는, 반복적인 일상이다.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에서 아이가 뛰어다니면 아래층은 괴롭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생활 구조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장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다. 아파트 10층에 사는 세 살 짜리 애한테 나가 놀라고 할 수 없다. 양육자가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가 놀 때마다 항상 놀이터에 함께 나갈 수 없다. 저렴하게 지어진 건물들은 층간 소음에 무능하다. 흙마당 단층집에 자기집, 이웃집 아이들이 바글하다면, 뛰어다닐 수 있는 아이는 밖에서 뛰어다니게 내버려두면 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우리 사회, 특히 도시에서는 행운이다.

 

어린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하려면 건물의 구조가 층간 소음을 상당히 줄이고 자동차와 사람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파트 단지든 다세대 주택 단지든 공동체가 자리잡아야 한다. 서로 알고 지내고 돌봐주는 동네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집 안팎을 드나들며 자기들끼리 논다. 이러한 지향을 전제로 우리가 지녀야 할 윤리 규범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윗층에 아이들에게 이웃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라고 요구하는 태도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윤리 의식에 온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며 산다. 대부분의 인간 생활은 개인이나 가정에 한정하기 어렵다. 육아를 온전히 부모, 주양육자에게만 책임지우는 분위기는 공동체주의에 반하는 개인주의에 기인한다. 자기에게 불편을 주는 주변의 행동을 일단 비윤리적이라고 규정한다. 육아에서 부모, 주양육자의 책임이 가장 크다. 하지만 주변 이웃도 육아의 수고를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층간 소음이나 공공장소에서 듣는 아이 울음 소리를 꽤 많이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윗집 아이가 뛰어다니는 소음을 감당하기 힘들 수 있다. 참다가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 동네 아이들이 즐겁고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환경도 갖추지 못했다. 성능 좋게 잘 만든 매트는 진동을 상당히 줄여주지만 한계는 있다. 건물 상태나 예민함에 따라서 괴로움도 다르다. 이런 현실에서는 결국 상호 협상이다. 뛰어다니는 윗집의 어린 아이들에게 이웃을 배려하는 윤리 의식 따위는 기대하지 말고, 감당할 수 있는 시간 대를 정해 보자. 그리고 윗집 부모에게 이 때는 감당하기 힘드니 신경 써 달라고. 당연히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매트를 설치한다거나 늦은 시간에는 뛰어다니지 않게 여러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