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2008/01/18 01:11 편집자–되기
“일과표대로 계획하고 논리학대로 말하고 윤리학대로 행동하며 견고한 질서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근엄한 부르주아의 삶의 끝에 무엇이 있는가. 검은 나비넥타이를 맨 채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얌전하게 서 있는 장의사 주인 말고 또 누가 있다는 것인가.”
자본주의는 노동을 견디어야 하는 것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노동을 소외시킨다. 우리가 삶을 견디어야 하는 것으로 인지할 때 우리 스스로 삶에서 우리를 소외시키고 있지 않을까.
때는 황금돼지 해가 시작하던 1년 전. 그 전해인 쌍춘년 효과로, 남들은 결혼도 하고 쑥쑥 애들도 낳는데(IMF 세대가 30대 중반에야 생활의 안정을 찾아 결혼하고 출산을 시작했다는 분석도 있다만), 나는 불모의 기분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2006년의 마지막 토요일에 찾아간 탕약 전문 한의원에선 여기저기를 눌러보더니 “‘하고 싶은 일’은 안 하고 ‘해야 할 일’만 해서”(헉, 아니 선생님께서 그걸 어떻게~~~) 위장부터 시작해 내장이 다 딱딱하게 굳었다며 보약도 지어주겠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일’도 좀 해보라 권했다.

쾌락은 유죄인가. 저자 이왕주는 답 대신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한다. “가장 지혜로운 생의 목표는 진정한 쾌락주의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는 이 진정한 쾌락을 복잡하게 정의내리고 논리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쾌락 자체는 결코 복잡한 의미로 파악되는 그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핸드밀을 돌려 커피를 갈고, 커피 한 모금 한 모금을 깊숙이 음미하려 하고, 어떠한 순간에도 인간답게 숨을 쉬기 위해 숨쉬기 연습을 하고, 누군가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하고, 아침마다 이용하는 출근길을 일곱 가지 경로로 개발하고, 아침마다 만년필로 또박또박 일기를 쓰는 등 자신의 감각망으로 포착할 수 있는 온갖 쾌락들을 건져 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서문에서 밝히듯, 살과 뼈의 육체를 지니고 있는 동안 그것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들을 철저히 누리려 할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했다던가. 삶을 무슨 해치워야 할 과정이기나 하듯이 여기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부어넣거나 음미하며 마시거나 커피는 위장으로 내려가서는 성분에 따라서만 흡수 분해되는 것같이, 스쳐 지나듯 해치우듯 살아가거나 완상하고 음미하며 살아가거나 어차피 무덤 안에서 한 줌의 흙이 되기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흙으로 되기도 전에 벌써 흙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살아 있는 모든 날을 기뻐하라”고 충고한다.
첫 문단에서 말한 한의원을 다녀오고 1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내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고, 쾌락을 음미할 육체를 되찾으려 깊은 산속에서, 여행지에서, 병원에서, 그리고 나만의 공간 안에서 충분히 쉬었다. 그리고 새로운 일터도 만났다.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 나는 드디어 이런 일기를 썼다.
“인생은 설렘이다. 세상엔 보고 싶은 영화도, 읽고 싶은 책도, 오르고 싶은 산도, 가고 싶은 도시도… 보고 싶은 친구도… 사랑하고픈 남자도… 참 많기도 하다. 문득 인생 참 살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게 많은데… 역시 이승이 최고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족한 시간과 의지를 생각하니… 속이 탄다.”
속이 타는 만큼, 더없이 삶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음미하며 에너지를 얻는 것, 소비하는 쾌락이 아니라 삶을 사는 쾌락만이 나를 생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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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아 2008/01/19 0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아랫 파란볼드처리 글이 절 살렸어요. (넘오번가? 여튼) 고맙다고요. -
강이 2008/01/19 1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책 때문에 제가 살았는데, 슈아 님까지 살렸더니 기쁘네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