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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06/30  햇감자 스프
  2. 2009/06/29  장마철 개시 (5)
  3. 2009/06/18  두부 감자 들깨탕 (2)
  4. 2009/06/15  축축한 유월 밤 (2)
  5. 2009/06/05  봄과 여름 사이의 한때 (4)
  6. 2009/06/01  ▦▦ 잘 가요, 노무현

햇감자 스프

2009/06/30 10:57 생활감상문

어젯밤엔 원래 회사 블로그에 게재할 알바 체험기를 쓸 예정이었다. 책 마감하느라 바빠서 못 썼지만, 몇 주나 구상을 해두었기 때문에 30분이면 다 쓸 줄 알았다. 이건 뭐 거의 일기처럼 쓰면 되지...하고. 그런데 3주간 이탈리아로 연수 갔다가 남자친구네 식구들이 사는 암스테르담까지 찍고 돌아온 Y양과 퇴근 후에 차 한 잔 하면서 여행 이야기 듣다 보니 훌렁 한 시간이 지나갔다. 집에 돌아와 평소보다 늦은 저녁(이라 해봐야 역시 야채와 고구마)을 먹으면서, 낮에 생협에서 도착한 야채들을 냉장고에 넣다 보니 자리가 모자랐다.

회사에서 앞자리에 앉은 J팀장이 요새 주말농장에서 야채를 키우는데(아이가 두 돌 지나니까 뒤늦게 면허를 따서, 새로운 가정교육 프로그램 실행중^ ^) 감자를 캤다며 낮에 한 봉지를 건네 주더라구. 조금 일찍 수확한 것이라 알이 좀 잘다. 쪄 먹기보단 알감자조림 하면 맛있을 사이즈인데... 내가 무언가 간장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려면 앞으로도 한 달은 있어야 하니 그때까지 신선도 보장 못할 터.... 바로 요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큰 건 골라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잔챙이들만 골라 햇감자 스프를 끓였다. 땀 뻘뻘 흘리며, 스프 끓이고, 일주일 동안 하루 세끼 먹었더니 이제는 먹기가 싫어진 오이는 피클 담그며 또 하룻저녁이 훌렁... 알바 체험기는 5줄 쓰다가 졸려서 일찍 취침.

창문 반쯤 닫아 놓는 거 잊어버리고 잤더니 새벽에 추워서 깼다가 창 닫고 다시 잤다가 늦잠에 지각까징.T T 그래도 감자스프는 인기가 좋았다. 역시 요리는 재료가 7할.^ ^

 

재료

  • 잔챙이 감자 10개(큰 감자면 3개쯤?)
  • 양파 1개
  • 대파 뿌리 부분(흰색 부분만) 1대분
  • 올리브유 3큰술
  • 구은 소금 약간
  • 후추 약간
  • 물 2~3컵
  • 우유 1컵

(취향에 따라, 월계수입, 정향, 파슬리가루, 치즈, 생크림 등을 넣을 수 있다)

 

요리법

  1. 양파와 대파는 굵게 채썬다. 감자는 굵직하니 채썰어 찬물에 담근다(감자 표면의 전분을 제거해야 볶을 때 안 탄다).
  2. 우묵한 냄비를 달궈 올리브유를 두르고, 기름이 충분이 뜨거워지면 채썬 양파와 대파를 넣어 볶는다. 이때 소금을 1/2작은술 정도 넣어 밑간을 한다.
  3. 양파가 반쯤 익으면 찬물에 담궜던 감자를 체에 건져서 물기 털어내고 함께 볶는다. 감자는 표면만 약간 익을 정도로 볶으면 된다(양파와 대파가 충분히 익어야 단맛이 깊어진다).
  4. 양파와 감자에 물을 붇는다. 물은 양파와 감자가 잠길 정도면 된다. 센불이 끓이다가 끓기 시작하면 약-약불로 줄여서 30분 이상 익힌다(양파와 감자를 굵게 채썬 이유는 굵게 썰어 한참 끓여야 야채 본연의 깊은 맛이 충분히 우러날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이러면 굳이 고기육수를 쓰지 않아도 된다. 허브는 이때 넣으면 된다).
  5. 감자에 숟가락만 대봐도 뭉그러질 정도로 푹 익으면 불을 끄고, 한김 식힌다.
  6. 식은 양파-대파-감자-국물을 믹서에 넣고 우유를 넣고 간다(취향에 따라 우유를 가감해 농도를 맞추면 된다. 월계수잎을 넣었다면 이때 빼고 간다).
  7. 소금, 후추로 간해서 바로 먹어도 되고, 냉장고에 넣었다가 차갑게 혹은 따뜻하게 먹으면 된다. 냠냠~

 

* 부드러운 걸 좋아하는 잡식자라면, 생크림을 넣어 데워 먹어도 좋고, 짭짤한 맛을 선호한다면 데운 후에 치즈를 올려 녹여 먹어도 된다.

** 브로콜리 삶아 놓은 게 있으면 같이 갈면 브로콜리 감자 스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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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30 10:57 2009/06/30 10:57

장마철 개시

2009/06/29 08:47 생활감상문

Between the Rains, 출처 http://www.rosi-photo.com

 

아직 겨울 코트도 정리해 넣질 않았는데 여름 장마다. 연간으로 시행하는 보름짜리 야채요법1 일주일째. 기운 없고 어질어질하던 것은 덜하다만 계절 바뀌는 기분에 좀 심란하기도.

별다른 일 하나도 없고, 바쁜 가운데 착실히 일도 하고 있고, 누구 나 괴롭하는 사람도 없고, 결정적 순간 같은 건 기다리지도 않은 가운데...... 느는 건 TV 시청시간뿐이고, 누구한테 전화를 하지도 않고, 누가 전화를 하지도 않고, 가방엔 책이 한 권 들어 있고, 운동도 하지 않고, 왜 갑자기 한 달째나 이렇게 철저한 일상 모드인 건지 나도 어리둥절. 뭐 들끓는 게 없을 때 야채요법을 하면 좋겠다 싶어 몇 달간 생각만 하고 미루던 것을 지난 주 불현듯 시작했더니...... 더 기운은 없어졌다만, 몸은 가볍고, 불면증은 없어졌다. 여름엔 이런 게 건전하지.

비가 오는데, 술을 마시러 갈 수도 없으니... 장마철맞이 집안 대청소를 해야겠다. 곰팡이들 쓸어내면서...... 어디까지인지, 좀더 들어가 보자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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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름간 삶은 감자나 고구마, 단호박 등을 주식으로 하고, 부식은 소금간 안 된 각종 야채로 하루 세 끼를 먹는 것. 단식은 아니지만 장청소에 꽤 효과가 있다. 단기간에 불과하지만 얼굴도 핼쓱해지고, 피부도 고와진다. 이것도 끝나면 보름 이상 보식을 해야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009/06/29 08:47 2009/06/29 08:47
─ tag 

두부 감자 들깨탕

2009/06/18 00:08 베껴쓰기

적린님의 [채식 감자탕] 에 트랙백으로 소개하는 "두부 감자 들깨탕"

두부로 담백함을 더하고, 풋고추로 여름 느낌을 살리는 하얀 감자탕이다.

(두부 요리만 모아 놓은 <에브리데이 두부> 책에 나온 걸 좀더 간단하게 만든 버전)

 

재료

두부 반 모, 감자 2개, 동글납작하게 썬 연근 한 주먹, 마른 표고 4개, 풋고추/홍고추 각 1개, 들깨 4큰술, 다시마 가루 1작은술, 국간장 1/2큰술, 들기름, 소금, 물 2와 1/2컵

 

요리하기

1. 감자는 솔로 깨끗이 씻어 껍질 채 한 입 크기로 깍둑썬다.(영 낯설다면 껍질을 벗겨도 좋지만, 껍질에 영양분이 참 많단다) 감자와 연근 썬 것을 물에 담궈 변색을 막는다.

2. 풋고추와 홍고추도 씨를 빼고 1cm 크기로 큼직하게 어슷썬다.

3. 표고는 물 1컵에 살짝 불린 후 건져 2등분한다. 불린 물은 그대로 둔다.

4. 두부는 반 모 크기로 것을 노릇하게 지져서 길개 반으로 자른 후 5mm 두께로 썬다(두부가 일종의 고기처럼 씹는 맛을 주는 요리인 셈)

5. 들깨는 믹서에 물 1컵을 넣어 간 후, 체에 한 번 거른다(겉껍질이 살짝 껄끄럽다). 남은 물 반 컵으로 믹서를 헹궈 들깨즙 낭비를 막는다.

6. 냄비에 들기름을 두르고 손질한 표고, 감자, 연근을 볶는다. 여기에 다시마 가루, 국간장, 표고 불린 물 1/2컵을 넣고 끓인다.

7. 국물이 끓으면 들깨즙과 남은 표고 불린 물을 붓고 두부와 고추도 넣어 한소끔 끓여 낸 후 소금으로 간한다.

 

이런 건 해장국으로도 좋고, 현미밥 말아 먹으면 탱글탱글 밥알과 구수한 국물이 끝내 준다. ^ ^

생들깨가 없으면... 5번 빼고 6번까지 진행한 후, 7번에서 들깨즙 대신 하얀 들깨가루1와 분량을 맞춘 물을 넣어 끓이면 된다.

 

트랙백인 만큼... 채식과 욕망의 자제에 관해서 몇 줄.

한참 채식을 할 때는 많이 먹는다는 게 또한 하나의 문제였다. 야채의 깊은 맛에 눈을 뜨니 자꾸 손이... 당시에 합정동 근처의 어떤 호프집에 갔는데, 특이하게도 야채접시라는 메뉴가 있는 것이다. 값도 불과 5000원, 아주 저렴했다. 시켜 보니... 무, 피망, 배추, 당근, 오이 등이 한 접시 나왔는데... 내가 무와 피망까지 아삭아삭 씹어 먹는 걸 보고 주변 사람들이 좀 질려하더군(이후로 요리하면서 생재료를 잘 집어 먹는 버릇이 생겼다. 생감자, 생양파, 생우엉, 생연근, 생도라지..... 본래 맛을 알아야 요리한 뒤의 맛도 상상할 수 있다).

여하간... 채식이든 잡식이든 덜 먹는다는 건 단순히 욕망을 자제하는 문제와 다르다. 인간 신체는 축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서(고등학교 때 배운 지방간의 원리^ ^)...  적은 양을 먹으면, 그만큼 그 적은 부피의 음식 안에 있는 모든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더 많이 노동을 하게 되면서(이것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게 단식이다. 단식 기간엔 1차적으로 핏속의 불필요한 성분들—콜레스테롤, 혈당 등—이 기초대사를 위한 에너지원으로 활용된다), 신체 전체의 활성화가 이루어진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푹 익은 스파게티보다 오독오독 씹히는 알덴테의 스파게티가 사실 소화가 더 잘되는데, 이유는? 더 잘 씹어서 먹기 때문이다. 오래 씹는 동안 침도 더 많이 나오고, 혀 운동을 많이 하면서 혀와 연동된 식도와 위도 음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충분히 하게 된다.2 비슷한 이유로 통곡물이 더 소화가 잘 될 수도 있다. 보다 많은 무기질과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균형 잡힌 영양 섭취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물론  덜 먹고도 든든하고. 그러니까 채식은 욕망의 자제가 아니라 에너지를 쓰는 방법과 욕망의 출처를 바꾸는 것이다. 많이 먹고, 소화시키는 데 애를 쓰다 보면... 빨리 늙는다(아, 이런 걸 10대에 알았더라면- -;;) 밥 먹고, 소화시키고 내보내는 과정을 간단하면서도 충분하고, 멋지게 만들고... 남은 에너지로, 각자 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나한테는 그런 문제다. 고기를 참는 문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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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얀 들깨가루: 껍질 벗긴 들깨를 가루낸 것을 이른다. 추어탕이나 순대국 먹을 때 나오는 검은색 들깨가루는 껍질 채 간 것임.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여기서 나의 인문서론, "인문서는 알덴테 파스타다"가 나오기도 했지. ^ ^;;텍스트로 돌아가기
2009/06/18 00:08 2009/06/18 00:08

축축한 유월 밤

2009/06/15 00:21 생활감상문

유월 첫주엔.... 그냥 가만히만 있는 주말이 너무 절실했다. 자체 입원 모드를 바랄 만큼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머리를 쉬게 하고 싶었다. 쫓기며 일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난 것도 아닌데... 그냥 마감으로 시작해 어버이날/스승의 날 지내고, 중간중간 사람 만나고 국상 분위기의 한 주간까지 겪으니 너무 많은 일들에 접속한 기분이었다. 그냥 가만가만히 있는, 리셋하는 이틀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지난 주 일요일 밤에 생각하니... 무슨 무기력증이 온 거 같더라. 그러고 월요일을 맞으려니 기분이 또 갑자기 초조해졌다. 출근하자마자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시커멓게 부은 얼굴로 출근했는데, 오백 년 만에 싸이 방명록으로 후배 Yeon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월/화/수 시내에서 연수가 있어, 간만에 칼퇴근을 할 수 있으니 저녁을 먹자고. 화욜은 사내 강의로 MSG샘의 지젝 강의가 있고, 수욜은 불어 수업. 시간은 당일인 월요일밖에 없다. 재작년에 함께 일본 여행 다녀왔다가 가을에 Yeon의 동기인 Soo 결혼할 때 만나고 처음 보는 거라... 제법 수다거리는 많았다. 늘 그렇듯 주로 내가 떠들었지만.

마침 그 전 주일에 T/V 선배인 HJ옹이 뭐 부탁할 거 있다면서 전화하고, 당일에는 權's와 통화한 터라 선배들 흉까지 사알짝~. 후배들 소식도 뒤늦게 입수. 한 학번 아래인 Yeon의 동기들도 유날리 결혼들을 열심히 한 터라... 이제 날만 잡으면 되는 쭌~을 제외하면 Yeon만 솔로[아, 그러고 보면 내 동기들도 결혼들 열심히 했는데... 그나마 우린 나까지 두 명인가 세 명 남았던가? 1월에 L군이 결혼했음에도 결혼에 대한 나의 지지부진한 생각은 별로 변화가 없으니].

적성에 안 맞는 은행에 어쩌다 들어가 초반에는 덤벙대는 성격 때문에 고생하고, 웬만큼 자리를 잡은 지금에는, 그 놈의 책임감 강한 성격 탓에 야근 너무 당연시하고(이게 우리 T/V 출신들의 문제이긴 하지) 그러면서.... 몇 년을 만나도 생활의 변화 없이, 그렇다고 돈 버는 재미가 있다거나 은행 때려치고 뭐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결혼에 대한 의식도 없이, 나이만 먹고 있는 Yeon이다. 바로 전날까지도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주제에... 또 선배랍시고, 변화를 추구하라고... 회사에서 적성에 맞는 부서로 바꿔 보던지... 이래저래 꼬여 못 쓴 논문... 경력에 도움 될 만한 주제로 바꾸어서... 새로 써서, 인사고과라도 높이던지... 어줍잖은 충고를 한다. 이렇게 무기력 혹은 귀차니즘에 빠진 직장인들이랑 얘기하고 있을 땐... 그래도 내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고, 남들에게 도움도 되고, 어쨌든 생계도 해결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는 건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 그러면 열심히 해야 하는데.

가끔은 남들에게 호기심 덩어리, 열정 덩어리라는 얘기도 듣는다(실력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늘 무언가를 배우면서 일할 수 있다는 보람도 크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뭔가를 못 넘어서는 게 있다. 수영도 동작은 다 배웠지만 결국 혼자 하질 못하고, 자전거도 탈 줄 알지만 운동장에서만 맴돌며, 등산도, 인라인도, 요가도, 재즈댄스도 마찬가지. 일도 어떤 면에서 분명 소질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데, 실수가 잦다. 사람도 많이 좋아하지만, 매달리질 못한다. 무엇에도 강박을 갖지 않는 게 내 유일한 강박이란 우스개를 대학 다닐 때 한 적이 있는데, 여전히 그런 거 같다. 아마추어로 살면 안 될까 하는. 팔 만한 능력을 상품으로 갖는다는 게... 지금까지는 꽤 성공적이었는데, 참 갈수록 힘들다. 화요일 지젝 강의에서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선생님께 물어보고 싶었다. 완벽하지 않은 부모의 오류를 덮지도 않고, 부모를 떠나지도 않고 사는 히스테리증은 그럼 어떻게 되냐고. 워워~ 선생님은 지젝 연구자이지, 임상 상담가가 아니라고...- -;;

수욜에 프리랜서로 함께 일하는 북디자이너 O실장님을 만나서... 일 얘기 후에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쨌든 목표는 10년차 편집자 되기. 하지만 독하게는 안 살기가 목표라니깐...... 일에 지면 안 된단다. 이만큼만 하면 되지...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때부터 일이 재미 없어진다는 충고(그 냥반도 이 바닥에서 20년. 보통 선수는 아닌 것이다)

후닥닥 불어 수업 듣고, 나와 퇴근 전에 마무리 안 되었던 일이 어찌 되었나 전화를 해본다. 일단 다시 회사에 들어가진 않아도 되는 상황. 우물쭈물하다 찜찜할 것 같아 시청에 갔다. 그날은 6.10이었던 것이다. 낮에 신간 편집 후기에... 거부의 말을 되찾자. 기막히다고 입도 다물고 살진 말자... 이렇게 썼는데 곧장 귀가하긴 그랬다. 6.10을 의식해서 챙긴 적도 없건만. 그냥 5.29 영결식 이후에 광장에서 모일 수 있을까 없을까가 나한텐 더 중요했다. 전날 밤에 시청광장을 지키니 어쩌니...해서... 이미 광장 뺏기고 상황 종료된 거 아닌가 했더니 9시쯤 도착한 광장은 초만원. H양은 낮부터 사전행사 다니다가 막 귀가하는 길. M선배는 학교 행사 있어서 못 왔다고 상황 어떠냐고 전화만. 나중에야 통화된 M군은 다른 일로 다망하시어 오지도 못하고, 문자에 답도 안 하고. 10시 반에 문화제 막 끝났을 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평일이고,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니까. 사람도 많고, 이거 뭐 너무 분위기 널널한 거 아냐? 한 것은 완전히 나의 착각. 시청에서 광화문 걸어가는 사이에, 2중 3중으로 쫘악 깔린 전경들.... 뭐야 완전히 차벽 안에서 집회한 꼴이잖아? 평화롭게 끝나지는 않겠구나...라는 느낌이 들면서 꼭 먼저 도망가는 기분이 들더군.

기분이 나쁜 것도 기운이 없는 것도 아닌데, 다만 할 말이 없는 상태. 혹은 욕망이 없는 상태. 결핍은 많은데...... 이것저것 모두 우물쭈물하는 상태랄까. 금욜에 엠티 가서도 평소처럼 나서서 요리하고, 재미있게 놀면서도 피곤하고. 술은 맛이 없고. 그래서 일찍 잤다. 그 와중에 집이랑 잠깐 통화. 몇 달 잠잠하시더니, 아버지는 선을 보라 하셨다. 작년 여름부터 선은 안 보고 있는지라... 그냥 안 본다고 했다. 올해로 두번째 거절이던가, 세번째 거절이던가... 아버지도 더는 채근 안 하신다. 뭐지?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보고 싶은 건 아니기도 하고. 혼자 헛웃음. 갈 때도 올 때도, 운전하는 동료들 심심하게 할 말도 없고, 잠은 오는데 잠이 들지는 않고.... 내가 이렇게 말이 없을 수도 있구나 싶어 스스로 낯설었다.

엠티 끝무렵에 양평장이 장날이길래... 장터 구경을 했는데,  갓 농장에서 따온 느타리버섯이랑 빨갛게 무친 무말랭이 한 근을 샀다. 느타리버섯은 양파랑 볶아 주고, 주중에 만든 멸치볶음이랑 김치까지 곁들이니 주말 밥상이 깔끔하니 맛나다. 제철인 오디 한 그릇 사다 잼도 한 병 만들었다. 빨래 세 판 하고, 이탈리아 여행 간 Y양 대신 화분에 물 주고, 그 화분에 자란 로메인이랑 토마토 따먹고, 낮잠자고, 라면 끓여 먹고, TV 보고, 겨우 겨우 집청소를 했다. 10시 반에 H군이 저녁을 못 먹었다고, 집에 밥 없냐고 문자가 왔는데, 딴 때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전화를 걸었더니... 생각해 보니 너무 늦어서 그냥 삼각김밥 사서 집에 들어가겠단다. 담주에 마감이라... 이렇게 늘어질 때가 아닌데..... 갑갑하니까 안온한가 싶기도 하고, 뭔가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게 아닐까?

다들 느끼겠지만, 참 안온하기가 힘든 때여서... 자꾸 주저 앉고 싶은가 보다. 새벽에 소나기가 온단다. 빨래 걷으러 마당에 나가니 흐린 저녁 공기가 축축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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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5 00:21 2009/06/15 00:21

봄과 여름 사이의 한때

2009/06/05 00:02 생활감상문

레슬리 파이스트, 머셔붐, 2004

 

지난 주 중반부터 두통 때문에 잠을 못 자다가 일요일 밤엔 두세 시간이나 눈을 붙였나? 월요일에 헤롱헤롱하다가... 월요일 밤엔 그나마 깊은 잠을 잤다. 봄과 여름 사이 이불 두께를 조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다음주에 드디어 데란다 책(들뢰즈의 자연과학적 재구성)이 끝나는데, 지난 주에 생각 많아 잠 못 잔 만큼 컨디션 관리에도 고민이 많았는데, 어제오늘... 저녁 시간에 좀 여유를 가질 일들(그래 봐야 30분?)이 있어서 그런지 잠을 잘 잤다. 시간적으로는 하루 다섯 시간 자기는 매한가진데, 한결 몸도, 마음도 가볍다. 심지어 오늘은 9시부터 졸리더군(버뜨 너무 일찍 자면 새벽에 깨기 때문에 3시간을 버텼더니 그만 두통이...... 그래도 자야지). 

어제 디자인팀 L팀장님이 아프셔서 이틀째 결근을 하시어... 점심시간에 S과장님과 함께 죽 사들고 문병을 갔다. 어디가 아프신지, 어떻게 아프신지, 식사는 했는지, 아픈 원인이 뭔지 이런저런 얘기 끝에... 단기적으론 마감 후유증, 중기적으론 이직 6개월차 적응으로 인한 체력/정신력 저하증이라는 야매 진단을 내려 드렸다. L팀장님 최근 변화에 대한 내적/외적 요구에... 변하고도 싶고, 지금까지 잘살았는데 변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고민이 많으시다(이직을 했든 안 했든 누군 안 그러겠냐만). 머리가 변하라는 것도 무조건 일을 잘하라는 것도, 부족한 능력을 야근으로 때우라는 것도 아니다. 작년 한 해 메신저 대화명을 "신체의 능력"이라 해두었다(요새는 다른 거다). 변화를 담지할 신체를 갖고 버티는 게 장땡이란 말이다(전부 나 자신에게 하는 얘기다)고, 나는 백지연처럼 나를 경영하는 건 못하지만, 나의 몸은 경영한다고... 뭐 그런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만큼 내가 부실해서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말이다. 태어나기를 약골로 태어나 과민성 대장 증후군과 남달리 밝은 잠귀, 입에 안 맞는 걸 먹느니 굶겠다는 주의지만 배고픔은 못 참는 자기 모순, 제 성질을 못 이기면 속병이 나는 성격까지 어쩜 다 그리 집안 내력 그대로인지... 뭐 여하간, 그래서 이 인구 밀도 높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남달리 노동 강도 높은 직업을 선택한 사람은 나니까, 방법은 하나다.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거다. 물론 나도 놀고먹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만(꼭 그 시절이 다 지나서가 아니라, 시절은 언제든 올 수도 있다. 공간과 배치만 적절하다면. 노는 것도 체력이긴 하지만) 돈을 벌려고만 하는 일이 아닐진데, 하는 일을 잘하는 게 내 삶 자체가 충실한 거 아닌가? 여기보다 어딘가에...에 대한 생각은 가끔씩만 하기로 했으니까.

여하간 어제 죽 안 좋아하신다는 데 억지로 식사하시게 해서 한의원 모셔다 드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교정을 보는데, <차이와 반복>을 인용해 지식과 배움의 차이를 설명해 놓은 부분이 눈이 들어온다. "배움이란 누군가가 문제의 객관성에 직면할 때 수행되는 주관적인 행위에 대한 적절한 명칭이다. (......) 이에 반해 지식은 개념들의 일반성 혹은 해들을 가능하게 하는 규칙의 조용한 소유만을 가리킨다." 이직과 적응과 자기-됨 등에 대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L팀장님께 잘난 척 늘어놓은 장광설은 모두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어제는 오랫만에 파이스트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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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5 00:02 2009/06/05 00:02

▦▦ 잘 가요, 노무현

2009/06/01 00:13 생활감상문

2009년 5월 29일, 오후 1시 10분

노무현의 영결식 뒤에 이어진 노제 행렬 가운데에서.

 

노무현의 장례 행사에 다녀왔다. 사실 누군가 이번 주의 노무현 현상을 파시즘 운운할 때 성질이 좀 났다.  애도하고 싶은 사람들이 마음껏 애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게 남은 한이 없게 해야 차분해진 다음에 죽은 사람 때문에 수면에 가라앉을 이슈도 챙길 수 있는데.... 너무들 조급해하고, 화를 내고, 심지어 "저 세상에 가서는 미안해하라"고? 이래서 좌와 우는 통한단 소리가 나오는 거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일 뿐 아니라 산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는 일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이런 우아한 말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그에 대한 평가든, 이후에 대한 구상이든 말을 아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 봐야 몇 달도 아니고 불과 일주일인데. 상황의 전개를 조심스레 지켜보면서 근심할 수도 있었건만. [그런 가운데 장례란 엄숙히 치뤄져야 한다는 구식 생각을 고집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생각이란 걸 할 만한 시간이라는 것. 예(禮)란 마음에 격을 갖추어 표현하는 것이니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나와 상대와 우리의 관계를 보호하는 껍질 같은 것이라고.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이 일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동안 이래저래 떠드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에 대해서보다, 그 사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나 내 감정을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통이란 미묘한 것이라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 예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성질이 난 것조차 내 마음일 뿐이므로, 아무에게도 별 소리 안 하고 일주일을 보냈다. 다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노무현을 좋아하고, 미안해할 일이 있었던가 놀라울 뿐이었다. 일요일에 덕수궁 분향소에 다녀온 이후 나도 일하기에 바빴고, 몸도 좀 아팠다(아마 그것이 내 나름의 충격표현법이었을 수도). 유년 시절 놀이친구와 다름 없이 허물없던 막내 삼촌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도, 부모님과 함께 우리 자매를 키워 주신 큰이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치매와 노환 끝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우는 법을 몰랐던 내가 어떤 정치가가 비극적으로 죽었다고 울 리도 없었다. 기사들을 찾아 읽고, 블로그들을 돌아다니고, 필자들(주로 철학자들)과 통화할 때 "시국이 흉흉하여~" 정도의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상당히 쿨하고 이성적인 양반들인데도 큰 충격을 감추지 못했고, 중대한 상황국면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위로하면서 원고 일정을 추스리고, 미팅 일정을 잡고 할 일들을 해나갔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장례에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에 광장이 다시 열릴 수 있을까? 나도 물론 근심했고 궁금했다. 광장과 함께 우리가 말을 열 수 있을까? 아니, 말과 함께 광장을 열 수 있을까? 극단적인 거부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숨죽여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어떤 분위기일까? 영결식을 서울에서 하기로 했다고 발표가 난 이후로 신경이 조금씩 더 쓰였다. 난 노무현을 사랑한 적도 없고, 미안할 것도 없다. 그를 신뢰한 적도 없고, 실망한 적은 여러 번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욕한 적도 별로 없다. 그래도 장례식은 가고 싶었다. 이런 게 촛불 중독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뭐랄까, 역사적 순간.... 그렇게 부르기는 닭살스러워도(내가 무슨 자식이 있어 훗날의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역사 의식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적어도 내 삶에서 유일무이한 순간이고, 그냥 흘려보내는 건 꽤 오랫동안 찜찜한 기분이 들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보기엔, 자기 감정이 뭔지 너무들 오래 생각하고, 분향소 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상했다. 가고 싶은지 아닌지, 그건 그 순간의 어떤 맥락에 의해 평가하고, 논리적으로 답이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역사 위에서 갈지, 말지 몸으로 즉각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일이 너무 많았다(그 더위에 아스팔트에서 몇 시간 보낸 댓가로 파김치가 된 여파가 이틀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서... 직장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데미지가 꽤 크다). 2월에 엄마 수술 때문에 연차를 써서, 딱히 뽑아 쓸 연차도 없고 해서... 휴가를 내려면 낼 수도 있었지만, 그 시간에 담담하게 일을 하고, 주말에 어찌 되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러다 갑자기 가게 된 건, 목요일 밤에 걸려온 오클라샘의 전화. 선생님이 먼저 나에게 전화를 하시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밤중의 전화는 정말 뜻밖이었다. "너 혹시 내일 영결식 갈 거니? 나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 만한 사람이 없어서... 너라면 갈 거 같아서 전화를 해봤다." "아아~ 선생님, 저도 가고 싶습니다만, 일이 많아서..." 선생님은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새벽부터라도 가시겠다고 했다. "M선배가 갈지도 모르는데.... 음... 제가 물어봐 드릴까요?" "그, 그럴래?" 선생님은 내년이 환갑이시다. M선배는 이제 40대 중반. 나름 정이 있는 사제지간이긴 하지만 이런 데를 같이 간 적은 없는 상당히 뻘쭘할 조합. M선배 늘 그렇듯 한 번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 혹시나 전화해 본 H언니는 닷새 동안 너무 울어서, 장례식 가면 더 울까 봐 못 가겠단다. 아아... 어쩐다. 사람은 많을 테고, 날은 덥고, 선생님 혼자 가시게 하긴 걱정되고, 난 또 이런 식으로 '갈 것 같은 사람'으로 생각되었다는 데서 아, 이것도 내가 살아온 데 대한 평가인가 하는 생각에... 결국 주간님께 전화를 걸어 출근했다 점심에 다녀오는 것으로 외출 허락을 받았다.

당일 아침 1시간 일찍 출근해서 오후에 예전된 회의 문건 만들고, 급하게 처리할 일 놓친 거 없나 확인하고, 진쿤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해놓을 일 체크하고, 10시 갓 넘어 서둘러 사무실에서 나와 약속장소인 광화문으로 향했다. 시청역에서 약속장소인 광화문사거리까지 걸어가는 좁은 길엔 경찰과 사람들로 넘쳐 10분 거리를 걸어가는 데 30분이 걸렸다.

 

막 영결식이 시작되던 참이었다. 선생님과 아침 무렵에 마음을 바꿔 나온 H언니와 나무그늘 밑 사람들 사이에 털퍼덕 주저 앉아 동아일보 전광판으로 영결식 장면을 지켜봤다.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 학생들, 유모차 끌고 온 새댁, 구성은 분명 다양했다. 문제의 이명박 움찔 장면에선 거리에서도 사람들의 야유가 폭발적이어서, 나조차도 움찔했다.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여기까지 나올 사람들 정도면 벌써 많이도 울었을 텐데...... 한명숙의 조사 때 또 한참을 울더라. (사람들 우는 데 혼자 안 우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딱히 뻘줌할 것도 없었다.)

 

선생님이 시청이 아니라 광화문에 자리를 잡으신 건, 운구 행렬을 바로 뒤따르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영결식이 끝나고 행렬이 광화문 사거리까지 천천히 나오는 데 15분 이상 걸렸다. 미리 노란 종이비행기를 접어 놓은 사람들은 운구차가 지나는 순간 정확하게 던지려고 조바심을 냈다. 드디어 나타난 망자의 사진과 영구차.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들 소리를 쳤다. 이런 경우 이 사람들에게 망자는 죽은 자요, 아직 죽지 않은 자이다. 죽었다는 팩트와 이 사람과 자신이 맺고 있던 관계라는 팩트가 병렬해서 작동한다.

 

노제 행렬 속에서 뒤늦게 M선배가 합류하고, 스승과 제자 네 사람이 정말 살면서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조우한 느낌. 만나자 마자 M선배는 화를 낸다. 전에는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원한을 샀으니 이 죄를 어떻게 할 거냐고. 이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악마라고 불러도 된다고 이젠. 노제가 시작되고, 노란 풍선이 날리고, 울고,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몇 번씩 반복되고, 워낙 기질이 뜨거운 H언니는 그렇다 치고, 냉정하기로 소문난 오클라샘과 M선배마저 운다. 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들 모여, 이렇게나 슬퍼할 만 한 이유.... 정말 노무현이 가지고 있었나? 뒤늦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한편으론 난 "국민의 이름으로 노무현 대통령님을 보내드리려" 오지 않았어요 하는 반항심과 함께. 월드컵 기간에 굳이 파란색 티셔츠를 찾아 입었던 것처럼, 나는 그냥 나라는 개인으로서,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장례식에 오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장례식에서 무슨 구호 외치듯이, 모두가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쳐야 할까? 그보단 <상록수>나 <아침 이슬>을 따라 부르는 게 나았다. 노래 속의 인물들은 홀로 제 갈 길 가고 있으니까. 노무현은 노무현의 길을 간 것이고, 나 또한 내 갈 길을 가는 와중에 그의 장례식이라는 유일무이한 사건을 만났을 뿐이다. 그곳에 가는 것이 '그의 표현대로라면' 나의 운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애도는 좋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평화적으로, 제대로 말도 못할 거면, 뭐하러 서울까지 와서 장례를 치르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통령으로 죽지도, 민간인으로 죽지도 못한 그 어정쩡한 상태는 장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뭐 하나 내 입맛에 맞는 게 없으니 나 역시 [그토록 피하려고 애썼지만] 입만 나불거리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기를 잘했다. 노무현 열풍이라는 파시즘적 현상에 대한 우려...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TV나 인터넷으로 느껴지는 광대한 스펙터클이 파시즘을 만들 것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나는 나 자신이 스펙터클의 일부가 되겠다. 스펙터클의 일부인 채 그 조성(composition)을 바꾸겠다. 그것이 내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국민이라는 호명에 응하지 않은 채, 그 엄청난 인파의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은 채, 나와 죽은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고, 그 현상을 눈으로 보고, 겪었다. 다녀오면서 확실히 생각이 더 많이 정리되었다.

 

23일 밤, 노무현이 죽었다고, 다시 한 번 촛불이 일어난다면, 그건 정말 웃기지 않냐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정말 견디기 힘들 것이라 했을 때, M언니는 대답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현실이고, 정치의식이라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위에서 보자고. 그렇다. 어떤 당위로 재단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현실인지 알기 위해서도 일주일이란 시간은 필요했다.

 

블랑쇼가 말한 대로 정치가 통치가 아니라 소통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죽음을 가는 존재, 유일무이한 존재, 하나의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노무현의 죽음에,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는 인식에, 나는 그 사람이 애도받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가슴속에 노무현이 영원히 살아 있을 필요는 없다. 그가 저승에 가서 누군가에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고, 자기 몫을 했고, 더 내놓을 패가 없을 때 승부를 접었다. 결국 각자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운동을 하고, 정치를 한다. 나 역시 나의 현실 인식 위에서 앞으로의 내 정치를 배치해야 하는 것이다.

 

뭐 두서없지만, 그냥 쿨~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걸까? "잘 가요,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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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00:13 2009/06/01 0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