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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매연대(
http://bloodsisters.gg.gg)의 느림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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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뉴스를 보니, 20대 여성들이 카드빚으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어간다고 나온다.
대학생들의 신용카드 발급을 제한하고 있지만, 그들의 소비습관까지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돈이 필요할 때면 고민을 하든, 하지 않든 카드를 긁는다.
가슴에 아무리 번민이 가득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이것이다.
소비를 피하지는 않는다는 것. 어느새 소비 그 자체가 우리들 삶의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반 자본주의 어쩌고 하면서 제아무리 자본주의와 상업주의를 욕하면서, 청렴결백을 떠는 듯해도,
나 자신조차 이 소비습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필요한 것을 사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건 필요하지 않건
돈을 지불하고 무언가를 사야만, 그것이 가치있는 재화로 내게 다가오고, 또 나는 돈을 지불하는
그 관계 자체에서 행복을 찾는 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슬슬 옥죄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나 역시, 인사동 등지에 가면 잠잠했던 소비병이 도진다. 우습게도,
가장 기품있고 우아해보이고, 삶의 질과 연관되는 이른바 웰빙의 골목에서
나는 엄청나게 소비를 조장받는다. 이것도 사고싶고, 저것도 사고 싶고.
저 예쁜 한지 편지지를 써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사람도 떠오를 정도이니까.
나는 나의 욕망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누르고 한지가게에 들어갔다.
창호지 두 장을 2천원 주고 둘둘 말아 손에 드니, 왠지 아직도 손이 비어있는 느낌이다.
거리를 배회하며, 각종 귀걸이, 목걸이, 반지, 인도 옷들, 희안한 장신구들을 바라본다. 원래 인사동 그런 곳 아니었냐고?
인사동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난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이 골목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그 때, 인사동 골목의 80%는 화랑이었다.
화랑은 언제나 공짜로 들어가 걸려있는 그림을 구경하고 나오면 되는 그런 공간이었고,
나에게는 신기하고 고마운 곳이었다. 지금은 찻집인지 밥집인지 술집인지 하는 곳으로 변한 건물에, 예전에는 ‘그림마당 민’이라는 화랑도 있었고, 지금 단성갤러리만 살아남은 그 주변도 온통 조그만한 화랑들이어서, 들어가서 쓱 한번 보면 그집 그림을 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뻘쭘함을 무릅쓰며 그런 곳에 들어가는 일을 무척 즐겼던 것 같다.
돈이 좀 되면, 화랑을 나오면서 팜플렛 하나 천원 주고 사서 집에 들고오는 마음이 행복했었다.
그런 행위들은 소비가 줄 수 없는 어떤 뿌듯함을 나에게 주었고,
나는 조금은 엄숙하기도 한 그러한 의식을 치르면서 성장해왔다.
한 두 시간 정도 걸으면 서른 군데가 조금 넘는 화랑들을 둘러볼 수 있었고,
골목 골목에도 작은 화랑들로 아기자기했다. 내 기억에 90년대 중반 이후,
급작스럽게 ‘오, 자네왔는가!’ 따위의 인위적이기 그지없는 전통업소들이 들어왔고,
스타벅스가 들어왔을 땐, 인사동이 변해간다는 것에 대한 회의도 흐지부지해졌던 것 같다.
요즘엔 인사동에 한지를 사러 가거나, 구경거리가 없나 둘러보긴 하지만,
그림을 보러 들어가는 일은 드물다. 한 2년동안, 중심가에 있는 단성에도 한 번 안들어간 것 같으니까.
이제 인사동은 웰빙족들의 호사스런 소비공간이 되었고,
그 부유한 자들의 틈에는 나같은 가난뱅이들의 허영심을 채워줄 싸구려 물건들도
곳곳에 진열되어있고, 몇 천원짜리 쪼만한 장식들이 돈으로 값을 따질 수 없는
좋은 그림들의 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래도 인사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만.
우리 시대에, 웰빙이란, 건강식품, 다이어트상품, 유기농채소와 면생리대로 대표된다.
공통점은, 정신의 풍요를 강조하면서 하나같이 비싸다는 것인데, 원래 몸에 좋은 것은 비싸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그만인 것이 우리시대의 웰빙이다. 우리 시대의 웰빙상품 소비는,
그 물건들이 왜 비싼지, 생산과정이 어떠하기 때문에 몸에 좋은지도 별로 필요가 없다.
우리의 몸과 영혼과 행복은 서로 분리되어있고, 이 모두를 소비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먹어왔던 것, 입어왔던 것, 생활 속에서 노동을 통해 얻고 누리며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것이,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비싸고 몸에 좋은 것으로 둔갑을 하는 것을 보면
소비병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소비병에 걸린 사람들은 아직도 풍요(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차원에서)가 노동과 생산과
생활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모른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자신의 몸에서 소비의 병을 치유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인데,
몸을 쓰지 않고, 무조건 간단하고 편리하게 살려고 하는 것을 보면, 불쌍하고 가련할 따름이다.
몸을 쓰긴 쓰되, 몸짱이 되기 위해서 헬쓰클럽에 나가는 것을 보면,
자본주의가 우리의 육체를 관리하고 감독하고 다스리는 힘의 위력을 새삼 깨닫는다.
영혼과 대화를 하긴 하되, 요가 비디오 빌려서 따라하고 곧 잊어버리는 기억 상실증에
또 한번 그 위력을 깨닫는다.
일러주지 않으면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현대인들의 정신구조 또한 참 아슬아슬하다.
모두가 병들고 모두가 치유하고 싶어하지만, 모두가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편리하고 쉽게만 하려 한다.
홈쇼핑도 생기고 인터넷 쇼핑몰도 마구마구 생기니, 돈만 있으면, 필요한 것을 모두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유기농 채소를 기르려고 생각하지 않고, 아무도 생리대를 만들어서 쓰려고 생각하지 않으면 웰빙은 무슨. 자신의 병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계속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토마토와 고추, 쑥갓 등 묘목을 심어놓고 보는데, 날마다 쳐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그 초록 잎사귀들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들과 마주하는 시간은 고요하고도 활기차다.
뒷산에서 흙을 퍼오고, 화분을 정리하고, 옥상에 낑낑대며 화분을 날라놓고, 날마다 계단을 올라
그네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잎사귀를 만지고,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의 날씨를 예감하는 일은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소비의 병이 이렇게 고쳐지는 것임을 안다.
나는 요즘 물도 적게 쓰기 위해 오줌을 눌 때는 좌변기에 앉지 않는다.
물론 밖에 나가면 어쩔 수 없지만, 집에서는 화장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시원하게 일을 보고
한 바가지 물로 씻어낸다. 처음엔 나도 모르게 좌변기에 앉기도 했는데, 점점 바지 내리고
엉덩이를 깐 상태에서 다시 화장실 바닥으로 엉금엉금 걸어와 소변을 보는 일이 잦아졌고
이젠 조금씩 정착이 되가는 추세이다. 그러자, 습관적으로 휴지로 밑을 닦았던 것도 한 두 번씩
물로 처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찬물로 씻는 것은 두렵고도 생경해서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
최근, 피자매연대 사람들이 휴지 쓰지 말고 손수건 가지고 다니자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러고 나서 내가 얼마나 많은 휴지들을 쓰는 지 알게 되었다. 아직도 휴지를 들고 다니지만,
곧 가제 손수건을 들고 다닐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손수건 빠는 재미도 느낄 것이고,
손수건 빨아 너는 재미도 느낄 것이고, 손수건 마르기를 확인하면서 아직 눅눅한 손수건을
만지작 거리며 명상도 할 것이다. 진짜 좋은 삶(well-being)이란 무릇 이런 것이리라.
요즘 피자매 달거리대가 확 뜨긴 떴는지, 주문도 많이 들어오고, 웰빙 쇼핑몰에서 같이
하자고도 연락오고 아주 난리인데, 좋은 현상이면서도 조만간에 판매가 확 줄었으면 싶은 마음도 있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읽어온 사람들이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감을 잡을 것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면생리대 만들기 워크샾을 여러 번 해나가면서, 매번 놀라운 체험하게된다.
처음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나와같이 소비의 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참 씁쓸하기도 한데, 더 무서운 것은 나이가 어릴 수록 그 증세가 심하다는 것이다.
달거리대를 전시해놓으면, 일단 와서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확인하고 바로 하는 말이
“와, 예쁘다. 근데 얼마에요?”인데, 왜 좋은지, 왜 써야하는지,
어떻게 만드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든 별로 없다.
우리가 막 설명을 하면, 나이드신 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으시고,
아주머니들은 쑥스럽게 웃으시면서 꼬치꼬치 물으시고,
젊은이들은 관심있게 살펴보고, 잘 들으며,
십대 중에서도 중고딩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또래 애들과 수다떨기에 정신이 없으며,
초딩쯤 되는 애들은 그저 살지 말지를 고민한다. 참나, 이래서야 되겠느냐 싶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바느질을 시작하면 그토록 고요하고도 활기차게 변한다는 것은
보지 않으면 믿기도 어렵다. 그들은 집중을 해서 바느질을 하고, 또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도 잘 떠들고 논다.
손이 천을 만지는 감촉에도 몰입하고, 바늘의 단단하고도 부드러움에 몰입하고,
길다란 실과 좁은 구멍과 나풀거리는 먼지들까지 몰입을 하고,
그들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머리카락도 그 순간 고요하다.
난 이런 순간에 어떤 기운들을 느끼는데, 그래서 나도 가만 있지 못하고 결국엔 바느질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서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나는 또 한 번 놀라는데,
모두들 훨씬 예뻐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얼굴에선 빛이 오르고, 어떤 사람들의 얼굴에선
쫒기는 사람의 뭔가 흐트러진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 곳에서 각자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자본주의의 두꺼운 가면이 금가고 녹아드는 모습을 본다.
소비병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고 그래서 밝게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아무리 피곤하고
목이 쉬어도, 워크샾을 하고 나면 기분이 아주 상쾌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최근, 면생리대를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들이 막 생기고 있다.
뭐, 자신들은 좋은 일을 한다고들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웰빙에, 좋은 물건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고 현실적인 일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런 업체들도 필요하긴 할 것이다.
아직 이 땅에는 소비병에 물든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당신들은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으니,
우리에게 대량생산을 좀 맡겨주시오.’하는 부탁 아닌 부탁은 좀 안해줬으면 싶다.
피자매연대가 나날이 발전하고, 여기 저기 알게 모르게 워크샾이 퍼져나가면서 달거리대 작업팀도 늘고, 튼실해져 대량생산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좀 잘 알아줬으면 한다.
대량생산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고, 우리의 운동은 사람들에게
클릭 한 번에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의 패러다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자신의 물건을 직접 만들면서 명상도 하고, 삶의 여유도 느끼고,
소비의 병을 치유하고, 조금씩 소량생산, 자급자족의 패러다임을 확산시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러한 수고로움을 통해 서로 연대하고 작지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제발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다.
나는 피자매연대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을 즐겁게 느끼고,
그래서 삶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피자매연대에서도 아직 만들기가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게 면생리대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의미에서 판매를 하고는 있지만, 그리고 이주노동자의 천막농성단을 지원하기 위한 행동에 돈이 필요하고,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에도, 풍동 철거민들의 투쟁에도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도
판매를 하고 있지만, 그렇게 한 걸음씩 일회용 안쓰기로 가길 바라고
사회에서 소외되는 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길로 가길 바라고 결국에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소비는 줄 수 없는 수고로움의 행복을 체득하기를 바라며,
결국에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시스템을 부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피자매연대 활동은 여성의 생리라는 작은 영역(물론 아주 작은 영역이라고 보기도 힘들지만서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진실되고 거대한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피자매연대가 ‘피자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자매연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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