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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민족주의란 시대적, 상황적, 공간적 맥락에 따라 해방의 동력을 가질 수도 있고 또 수구보수의 논리도 될 수있다고 말입니다. 또 "민족"이란 일종의 초월적 표식으로써 그 표식 안에 여러가지 의미들이 서로 싸우면서 공존하면서, 때로는 한 의미가 다른 의미를 누르고 표식의 모든 영역을을 장악하기도 한다고 말입니다.
또 민족을 국가와 달리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생겨난 "공동체"의 개념으로 끌고 가는 것도 가능하다고도 생각했구요. 이웃으로 태어나 비슷하게 먹고 입고 말하고 사랑하는 자연적 공동체로 말입니다.
그래서 민족을 부정해 버리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어리석은 일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또 민족이 내뿝은 엄청난 아우라와 "대중 동원력"을 생각할 때, 무슨무슨 다른 주의들을 막론하고 운동가들에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개념이기도 했죠.
하지만, 민족 개념 안에 포섭될래야 포섭될 수 없는 성노동자의 관점에 서면, 민족 개념 안에 포섭될래야 될 수 없는 이주 노동자의 관점에 서면, 또 가사라고 불리는 재생산영역에 묶여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버린 우리 할머니, 엄마의 관점에 서면, 남성의 혈통에 근거한 가족을, 그 기본 단위로 삼는 가부장적 민족주의의 건전한 결혼을 거부하는 "히스테릭한" 노처녀의 관점에 서면, 동성연애자들의 관점에 서면, 여러 이러저러한 소수자의 관점에 서면, "대중동원"의 편리한 수사를 포기하고 보다 더 근본적인 해방과 자유의 관점에 서면,
더이상 "민족"이라는 관념에 매달리지 않게 된더군요.
또 민족주의가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적 상황이 우리 삶의 실체이고 현실이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거부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현실론", 혹은 "운명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민족"은 실체가 아닌 관념이며, 더 정확히, 실체와 현실을 조작하고 거기에 힘을 가하려는 권력자들의 관념이라구요. 한마디로 "현실론"을 조작하는 관념이라구요. 더 간단히 이 데 올 로 기 라구요.
현재 이곳 코리아에서 민족 개념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정체를 계속해서 승인하고 합법화하는 허구적 "현실론"을 조장할 뿐입니다. 이제는 길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피부색이 좀 더 검은 사람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편파적 "현실론"의 기반이기도 하구요. 민족의 자랑, 월드컵의 함성 속에 명동 성당 한켠에서 단식 농성을 하던 그들, 이주노동자들을 보이지 않게 만든 것의 주범도 "민족"이라는 관념을 기반으로 민족주의입니다. "국익"이라는 "현실"을 위해서 이라크에 파병을 해야한다는 논리도 "운명공동체"인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와 "저들"에 대한 구분은 원초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태어나며 자라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와 "너" "그들"이라는 개념을 인식의 바탕에 두게 되니까요. 하지만 "현실론"을 조작하는 관념론인 민족주의와 이러저러한 민족중심담론은 단지 상대적 개념일 뿐인 "우리"와 "저들"을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개념으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마술봉을 숨기고 있습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마술봉이죠.
"민족'이라는 관념과 민족주의에 미련을 내비치는 학자, 엘리트, 운동가들은, 제 생각에, 이 마술봉의 힘에 대한 집착을 은연중에 가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봅니다. 그래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재고해야한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민족주의는 나쁘다'고 하면서도 또 계속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뇌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쨋든, 민족의 개념과 민족주의로 이제 더이상 해방과 자유를 추구해야 하는 시기는 지난 것 같다는 게 저의 진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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