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회사생활...
- 무나
- 2011
-
- 한 작은 생명이 지다(3)
- 무나
- 2010
-
- 사육과 육식
- 무나
- 2010
-
- 알아차리기와 글쓰기, 크리슈나무르티(1)
- 무나
- 2010
-
- 진보넷 새단장 축하~(1)
- 무나
- 2010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자꾸 눈물이 나.
별 일도 없이 참 이상한 일이지.
만원 전철 속에서
지난 일요일에 산 현악사중주를 엠피쓰리에 담아
들으면서,
회사앞 노점에서 카페라떼를 사들고
출근시간 15분전에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를 켰어
그냥 어제와 같은 풍경, 그것 뿐이었지
이메일을 확인하고 참세상 메일에 진재현의 대추리 글을 읽고
그래서 대추리가 생각났고, 다른 블로그들을 보면서
권정생 선생님의 유서를 읽었고
문정현신부님의 프레시안 기사를 읽었을 뿐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무었이었더라 궁금해하며
인터넷을 찾아보니 어렸을 때 성당에서 곧잘 부르곤 하던 성가 기도였어.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아픔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을을 심게 하소서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요즘 요가를 하면서 자주 눈물이 나곤 해
호흡을 하다가 무언가 가슴에 울컥 치솟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지도 않게 어떤 생각이 가슴에서 정처없이 떠돌기도 해
그게 고통에 대한 상념인지
고통이 아름다운 건지
아름다움이 고통인지
미움이 사랑인지 사랑이 미움인지
마음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다가
참 사람들이 아프구나, 참 슬프구나 하는... 풍경으로 변하면
그 풍경이 나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그 감동에 취해 하염없이 울다보면
죽봉 때리는 소리에 깨어 일어나
눈물을 닦지.
하지만 회사에서 불연듯 이렇게 눈물이 나진 않았었어
다행히 어제 오늘 감기 때문에 콧물이 줄줄 나고
그래서 옆 사람들이 내가 우는 걸 눈치채진 않은 것 같아
그리고 기뻐
마음의 병이 나아가는 것 같아
하지만 너무 낙관하지는 않을래
지나친 낙관은 또한 지나친 비관을 낳을테니
댓글 목록
하루
관리 메뉴
본문
무나의 글을 읽고서 참세상을 찾아봤어요. 저도 눈물이....잊지 말아야할 일들이 늘어나고있네요.부가 정보
돕헤드
관리 메뉴
본문
토닥토닥..부가 정보
불씨
관리 메뉴
본문
신은 죽었다! 짜라투스,아니 짜라투스 신은 죽지 않았어 뭐,신이 죽지않았다구,그래 진실은 죽지 않아!이로부터.........
매화도 목련도 벚꽃도 져 버린 곳에 나무는 푸르름으로 겨우살이를 망각하고 있다.
저기 자유롭게 노닐며 나무에 앉아서 노래를 하는 새의 소리를 신이 만들었단 말인가? 짜라투스는 단연코 신이 죽었다고 했다.
나무의 푸르름도 새의 노래도 맑은공기도 푸른하늘도 그 아래 사람도
이중 어느 것을 신이 만들었단 말인가?
지구와 태양은 우주의 관계에서 그 위치와 시간을 또한 신이 정했단 말인가?
봄은 이중 어느 하나의 존재와 관계에서 오지 않을 것이며 새의 노래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 모든 존재와 관계는 하느님의 종이며 관계는 하느님의 법률이란 말인가?
그럼으로 인간은 신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짜라투스는 내가 없으면 신이 없다는 그럼으로 신은 인간에 의하여 창조되고 창조된 인간에 의하여 신이되며 다시 인간은 종이된다.....그럼으로 이러한 신, 신의 권력을 부정한다."신은 죽었다!"
짜라투스,"신은 죽었다"? 아니 죽지 않았다!
신을 죽인 인간사회가 왜 희망은 더욱 절망으로 바뀌고 있지
비정규직의 차별을 말할수록 비정규직은 넘쳐나고 있는 이러한 사회가 물론 신의 사회라고 말할수 있지,자본가는 모두 신의 아들인가?그렇지 않아 자본가는 더욱 유물론자야,어쩌면 신의 도덕적 권위로써 보호받고 있지만 동시에 신을 부정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얼마든지 잘살고 있다고....
그런데 우리는 신은 죽었다고 하면서 신의 권위를 순종하는 그들보다 더욱 자본가 못지 않은 희망보다 절망을 위해 달려가고는 있지 않는가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아름다운 운문의 표현이라면 그는 신의 종교적 도구가 아니라 어쩌면 진실을 위한 도구가 아닌가?
진실은 운문은 구원을 위한 신에 있는것이 아니라 지금 "어두운 곳에 빛"을 신에게 요구하는 것인가?아니면 도구로써 실천하겠다는 것인가?
잘봐,보시라고요....
도구는 그리스도 안에서가 그리스도 밖에서 더 필요한 도덕적 양심이고 행동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의 도구의 양심은 현실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빛을 잃은 곳에서 자신이 어쩌할수 없을때 그 무엇인간에 메달린다면 그것이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이고 믿음이라면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권위에 대한 사회적 패권의 역사 지배의 역사로써 신은 죽었지,하지만 그들의 인간에 대한 어둠의 빛을 가져오기 위함은 죽지 않았어.......
짜라투스 그래도 신은 죽었는가?
신은 저 나무에 앉아서 제 멋에 겨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창조 할수는 없다고 봐,하지만 인간 역시도 저것의 존재와 관계를 창조할수 없어!없다구
그렇다면 신은 죽지도 않았고 신은 살아 있지도 않아!
인간의 진실이 신이 아닐까? 짜라투스!
진실은 프란치스코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며
프란치스코 역시도 그리스도 밖에서 존중할때 라고 봐
짜라투스 너가 유물론자로 그리스도 밖으로 멀어지면서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비꼬지마
"고통이 아름다운 건지
아름다움이 고통인지"
2."교우세요?"
3. 어부의 노래
다음에........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