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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리 호들갑인가 싶지만

  • 등록일
    2007/08/01 19:55
  • 수정일
    2007/08/01 19:55

돕헤드님의 [민중은 여성이다] 에 관련된 글.

 

돕의 연작에 대해 뭐 그리 호들갑인가 싶지만,

그의 글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전유와 전복을 시도할 때에는 여러가지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때론 전유와 전복은 유쾌하다. 특히 억압된 자가 억압한자가 만든 가치와 기호를 전유해서 유희할 때는 더욱. 하지만 그 와중에 전유하고 전복하려는 대상의 다양성과 그들이 위치해 있는 미세한 맥락, 변화, 역동성은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정치화되며 화석화되고, 과장되어 일반화되기도한다. 돕이 클리토리스에 빗댄 여성은 그런 맥락속에서 정치적으로 "신비화"되어 있다고 본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서양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재현체계를 만들어내고 신비화했듯, 그리고 대항세력이 오리엔탈리즘을 다시 신비화하는 것을 경계했듯.) 돕의 글에 나타나는 화자는 클리토리스의 쾌감이라는 생물학적 여성들의 경험적 사실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려는 어떤 생물학적인 남자이다.

그것이 그의 말대로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반성에서 기인되었다고 하자.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전복하고 해체시키는 방법으로 “여성”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마치 여성이 된 듯, 그는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가져다 쓴다. 여기에 함정. 그의 “여성”이란 “내가 지향하는 새로운 주체성”, “ 내가 만들고 싶은 나 자신의 모습” 이라는 말에서 암시되듯, 그 속에서 현실의 여성은 사라진다. 여기서 “현실의 여성”이라 함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든,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든, 구성되면서 변해가든, 이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실체적 존재. 이들이 클리토리스에서 느끼는 것은 그 수만큼 다양할 것이고, 클리토리스를 미워하거나 예뻐하는 방법도 무수하게 존재할 터. 또 클리토리스에 대한 감정도 매우 복잡할 것.

다양성으로의 열림으로 향해가야 할 전유와 전복의 방식이 현실의 여성을 내쫓고 안에서 문을 닫는다. 여성의 신비화로 인한 소외는 계속된다. 그가 생물학적 남자라는 사실은 확실히 이러한 혐의를 가중시키기는 하나, 결정적이지는 않다. 만약 어떤 생물학적 여성이 칼럼에 여성에게 강요되는 질 삽입 오르가즘을 비판하고 클리토리스 자극을 통한 쾌감을 자기 경험에 비춰 옹호하는 글을 썼다고 하자. 물론 그 여자의 글쓰기 방식에 따라 읽히는 방식도 달라지겠지만, 클리토리스 쾌감을 느끼지 않는 여성들은 소외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것이다. (모든 글에는 분명 소외가 존재한다. 소외 없는 글은 없지 않을까!)

그 여성 글쓴이가 오히려 친구들이나 주변 지인들과 수다를 떨 때에 무의식적으로 “글은 그렇게 썼지만 삽입 섹스를 할 때의 오르가즘도 정말 좋아”라고 말을 한다면, 나는 오히려 그 여자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의사소통이 된다고 느낄 것 같다. 그 여성은 이데올로기적 규정이든, 전복적 의도이든, 자기의 외부 또는 내부에서 자기를 규정하려는 것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현실적인 존재로서 여자로 느껴질 테니까. 그러한 여유, 삶 속에서 자기를 규정하지 않는 풀어헤침, 전복한 것을 또 뒤집어보기, 반성한 것을 반성하기, 의식한 것을 의식하기, 자신의 모순을 바라보기가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정치적 글은 이렇지 못하고, 문학적 글은 이게 가능하다. 그래서 문학이 좋다!)

헤드윅이 성기를 절제하면서까지 여성의 몸이 되기를 갈망한 것은, 그의 섹슈얼리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현실적 섹슈얼리티에 충실한 현실적 인물로 보인다. 영화가 갖는 정치성은 재현된 사회와 그를 둘러싼 맥락이 그의 존재의 전복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글쓴이 돕헤드는 자신에게 스스로에게 없는 쾌감의 이름을 붙이려한다. 그래서 결과는, 물신적이며 정치적이고,  돕에겐 미안하지만  상투적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 돕의 글에 여성을 전유하려는 남성의 시선을 발견하고 불편한 소외감을 느꼈다면, 그건 그 글의 상투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의 후속 글은, 여성을 자신이 바라는 민중상을 구축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충분하기 때문.

물론 여기서 정치적인 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다 정치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 방법이다. 자신의 지금의 남성을 해체하려 한다면, 여성까지 해체해야 한다. (어떤 이는 섹슈얼리티까지 해체해야한다고 할 거다. 그러면 얘기가 넘 복잡해지고...)  그 둘은 서로를 구성하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마친가지로 여성성을 이용해 민중성을 그리려면 자기가 빗대려는 여성성이 무엇인지 부단히 스스로 물어보고 점검해야 하지 않은가. "삶은 여자다"라고 선언한 니체가 왜 개마초인지..., 역대의 훌륭하다던 남성 철학자, 사상가, 운동가들이 무수히 여자를 삶아먹은 그 역사를 생각하면 돕의 글에 대한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을까. 돕의 의도가 진정 그렇지 않았을지언정, 사회와 역사적 맥락에서 그나 나나 자유롭지 않으니...

 


개인적으로 돕 개인을 비판할 생각은 추어도 없다.

그가 솔직하든, 덜하든, 잘 드러내든, 숨기든, 의사 소통이 되든, 안 되든, 어쨌든 그는 그다. 보여지는 그이고, 그를 잘 못보는 사람은 잘 안 보이는 그이고, 더 잘 보는 사람은 더 잘 보이는 그일 뿐이다.

문제는 진정성이 아닌 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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