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 간만에 서사 있는 꿈
한동안 신경이 아주 예민해져 못 자거나 아님 피곤해서 정신없이 자다가 새벽에 추워서 잠깐 깨거나 정도의 수면 생활을 보냈는데 오늘은 기억나는 꿈을 두 건이나 꿔서 간만에 꿈 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설 연휴에 하는 일 없이[설연휴에 할머니댁 안 가고 고3이라 공부해야 하는 막냉이 떡국 끓여주러 부모님댁만 1박 2일로 다녀왔다. 금요일엔 몸살기 있는데 강추위라 집회도 못 가고 방바닥에 척 붙어서 보냈고, 토요일엔 눈길 미끄럼 사고 우려해 외출 못하는 H양 탓에 홀로 덕수궁미술관에 잠깐 근대회화전 보러 갔고, 일욜엔 설연휴에 단 둘이 뮤지컬 공연 보러 간 Y군과 M군 러브러브 버디를 집에 행차하게 해서 막냉이 먹이려고 요리하는 잡채와 동태전을 시식시켰다. 그 외의 시간은 지인들에게 새해 인사 날리거나, 자거나, 청소하거나, 빨래하거나, TV리모콘 괴롭히거나, 컴퓨터에 윈도우 새로 깔고 업데이트하거나, 심심하다고 H양에게 짜증내거나, 아주 잠깐씩 책을 읽거나 하면서 지냈다.] 팡팡 노니까 아무래도 꿈꿀 에너지가 조금 남은 거겠지.
첫번째 꿈
_입구 없는 식당, 난쟁이 남자의 고백, 후배 쭌~과의 상봉, 달동네의 인문학 축제
꿈속에서 누군가(필자?)를 며칠 후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주간님이 어떤 식당(레스토랑?)을 추천해 주었다. 아마도 홍대 근처인 듯(느낌은 홍대에서 동교동 3거리쪽으로 뻗친 상가거리의 끝). 가보지 않은 곳이라 추천받은 날 혼자 가봤다. 뭐 맛있는 게 먹고 싶었나 보지. 어떤 건물의 2층에 위치한 식당 앞까지는 잘 찾아갔는데 들어가는 입구를 못 찾겠다. 맞다고 생각한 건물 입구는 옆 건물의 입구였고, 주차장인지 뭔지 이상한 데로 헤매서 나오고... 그 식당 입구를 찾아 헤매다가 지쳐서 아예 조금 큰길로 나와 실의에 빠져 서성였다.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송충이 눈썹에, 강한 성격이 엿보이는 약간 검게 그을린 얼굴, 흰 셔츠를 입은 난쟁이 남자가 지나간다. 흘낏거리지 않으려 노력은 하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눈이 가기 마련이었는지, 그의 눈이 강해서였는지 1초쯤은 시선이 멈추었다가 일단 지나쳤다. 그런데 그 남자가 뒤에서 부른다. 돌아섰더니 3미터? 5미터쯤 떨어져 서 있다. 뭐랬더라? 여하간 너는 내 운명 식의 이야기를 한다.(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인가? 막차 시간의 사람 없는 지하철에서 처음 보는 30대 남자가 이런 고백을 하면서 따라와서 진짜 난처한 적이 있다. 어떻게 잘 설득해서 별 일 없이 끝나기는 했지만). 여하간 나는 깜짝 놀라 혹은 꽤 겁을 먹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답하곤 다급히 뒷걸음질친다. 그러다가 뒤돌아 열심히 달렸다. 그 남자가 따라오나 뒤돌아보면서. 어떻게 따돌렸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고... 여하간 웬만큼 안전해졌다고 생각이 되어 그 정작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 헥헥거리며 전화를 건다. "나 진~짜 큰일날 뻔했다. 무서웠다." 쫌 징징거리며 쫑알거리며 놀란 마음을 진정거리는데... 어느덧 내 발걸음은 어떤 복도식 아파트 건물의 현관을 거쳐 1층 복도를 걷고 있다.
그러다 복도 중간에서 몇 년 전 호주로 이민간 T/V후배 쭌~을 만났다. 통화중인지라 "안녕~ 쭌~" 하고 두 걸음쯤 지나치다가... '아아~ 이건 아니잖아. 이 녀석 진짜 몇 년 만에 만난 데다 또 언제 만날지 모르잖아. 인사를 제대로 해야지' 식의 느낌에... 전화 상대에게 다시 걸겠다고 하곤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쭌~과 인사를 나눈다. 언제나처럼 부리부리한 눈빛, 올려다 봐야 하는 큰 키(쭌~은 JSA에서 MP로 군복무를 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그의 단순하면서도 굳은 심지에 내가 반한 거지, 쭌~은 내게 무심했던지라... 사실 나눌 대화는 별로 없다. 안부 나누고, 잘사는지 확인했고, 한국에 잠시 놀러왔다는 소식 확인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얼굴도 모르는, 한참 어린 T/V후배들이고... 내가 거기 섞여 놀 생각은 없고... 그냥 그 잠깐 동안 내 반가움을 열렬히 표시했으니 나도 충분할 뿐이고... 그래서 곧 헤어졌다.
아파트 복도를 마저 걸어서 복도 끝에 난 계단 쪽으로 빠져나가니 아파트 건물 뒤에 있는 축대가 있고, 그 축대 위 달동네가 내 목적지다. (아까 아파트에서부터 현실의 홍대 비스무리한 공간은 사라지고,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현실 비슷한 공간들이 나타나 뭔가 자연스러운 듯한 사건들이 연속된다.) 그런데 그 축대가 참 위험하다. 시멘트로 마감된 축대가 아니고, 흙이어서 밟으면 살짝 무너진다. 어떻게 낑낑거리며 축대를 넘어갔더니 경사가 70도쯤은 되는 언덕길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언덕길엔 형광연두, 형광핑크 같은 색깔의 전지 크기의 색상지가 깔려 있고, 그 색상지엔 뭐라고 자보 글이 가득하다.
알고 보니 언덕길 위엔 무슨 인문학 축제인지 인문학 주간 같은 걸 하고 있어서 그 관련 글들을 잔뜩 써놓은 색상지가 바닥에 [무슨 분식집에 포스트잇 덕지덕지 붙여 놓은 듯이] 붙어 있어서 완전 미끄럽다. 도저히 서서는 그 언덕길을 올라갈 수가 없다. 아까 축대에서부터, 요새 무슨 인문학을 한다는 건 이렇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인문학 하는 사람들이 다 가난해서 이렇게 달동네에서밖에 못 사는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올라갔는데... 여기서 갑자기 어떤 모르는 남자가 동행으로 등장해서 나와 같이 기어서, 정확히 말하면 그 미끈덩한 색상지에서 아래로 떨어질 듯한데 겨우겨우 서로 잡아주면서 불과 5미터도 안 남은 언덕을 위험스레 올라갔다. 언덕길 정상엔 낡은 연립주택 같은 게 있고, 거기가 내가 사는 집이 있는데.... 연립주택 앞 작은 공터에선 네 명 정도 되는 학자들이 단상에 앉아 있아서 좌담회 중이다. 무슨 잡지인지 TV에선지 나와서 촬영을 하고 있고... 아 이게 무슨 시끄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과 신기하군 하는 생각 등으로 구경을 한다. 이 달동네 인문학 축제, 가난한 인문학도들이 어떻게 공부를 계속할지... 뭐 전망을 내보자... 그런 건데 아는 얼굴로 [왼쪽에서 두번째에] 진경법사가 앉아 계시고, 그 밖에도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맨 왼쪽 남자 선생님과 진경법사 왼쪽의 여자 선생님은 어디서 봤는지 낯이 약간 익다. 뭐 그러고 방금 전 나와 함께 구사일생으로 언덕을 올라온 남자와 이게 뭔 일이래요 식의 대화를 약간 나누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전화를 받아보니 (전에 H출판사에서 함께 일했던) NAM 디자이너(작년 봄에 커리어 중단하고 호주에서 어학연수 중이지만, 이 꿈속에서는 지금도 같이 일하는 사이다). 3월에 전면 도입하기로 한 인디자인을 사장님이 이번 주부터 도입하자고 했다며, 당장 내가 마감 중인 하이데거 책을 인디자인으로 바꾸자 했다며 당황해서 전화를 했다. 이때 시간은 (꿈속 내 감각으론) 밤 10시쯤. 나는 좀 짜증이 난다. "일단 마감이 닥친 책을 프로그램을 바꾸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으니까, 내가 내일 사장님께 말씀드릴께요. 설사 바꿔야 한다 해도 지금 당장 NAM씨가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내일 얘기합시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뭐 그러고 꿈이 조금쯤 계속 이어진 듯은 싶고... 그러고 다시 잠이 이어졌는데... 꿈을 언제 꿨는지 새벽 5시 반에 춥고 배고파 깼을 때 꿨는지, 아니면 6시쯤 다시 잠들어 9시까지 자는 사이에 꿨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9시에 일어나 잠이 안 깬 채 침대에 앉아 있다가... 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게 꿈이었나? 꿈 참 요상타. 오랜만에 꾸는 이상한 꿈이로군... 하고 중간중간 희미하군. 좀더 섬세한 뉘앙스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현상학이라던지, 여기서 가난한 인문학도들은 왜 일케 서울대 출신들이 많아? 뭐 이런 투덜거림 같은 걸 궁시렁거린 기억이 나는데 무슨 맥락인지는 모르겠군. 뭐 이랬다. ㅎㅎ 버라이어티한데 허접하군.
두번째 꿈_
바람 불다 탈진하다.
오후에 영화라도 보려고 나가려 하다가... 내가 보려는 <비카인드 리와인드>가 저녁 6시에나 한다는 걸 알고는 또 TV채널만 무한 돌리다가... 어느 순간 머리가 아파져서 낮잠을 잤다.
두번째 꿈의 서사는 단순하다. 꽤 큰 방에 들어가 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다. 무슨 이유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변신하는 연습을 시킨다. 시키는 주체는 무슨 의사 같기도 하고, 컨설턴트 같기도 하고... 여러 개의 블록이 움직이는 가운데... 그 블록 위마다 사람들이 서 있고, 각자에게 무슨 커다란 큐브 같은 걸 주는데... 그 큐브는 디지털 큐브다. 그 큐브를 안으면.. 내 주변 환경에 필요한 것이 나와 반응해서 그 큐브가 자꾸 변신을 한다. 방 안에서 모든 사람들의 꿈이 펼쳐진다. 그러면서 밑의 블록은 계속 움직이고, 내 큐브와 반응하는 다른 블록으로 계속 움직여 가야 한다. 그러다가 나는 새로 큐브를 하나 받았는데... 갑자기 그 큐브에서 큰 은행나무가 순식간에 자라나서 노랗게 방 안을 물들이더니.... 다음에는 계속 바람이 나온다. 그 방안 전체에 필요한 것은 신선한 공기, 즉 바람이다. 모든 사람들의 큐브가 더이상 반응하기를 멈추고... 어느새 내 손의 큐브는 사라지고, 내 자신의 호흡은 방안의 모든 공기를 순환시키고 블록들을 움직이게 하고, 블록들 위에 놓은 사물들을 컨베이어벨트 위에 놓은 물건들처럼 자리를 배치시키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나는 계속해서 바람을 뱉어낸다. 공기는 시원하고, 사람들은 근심하는 가은데 그 바람에 의지하면서,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블록들을 건너가며 천천히 깊은 숨을 뱉어내는데... 어느 순간 불이 꺼지고 사물들이 희미하게만 보이는 안온한 어둠 가운데... 공기가 점점 나빠지고, 바람을 뱉어내는 내 기운도 점점 소진해 간다. 아아~ 내 불의 사주란 결국 발산, 바람의 사주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천천히 나도 바람을 토해 내기를 멈추고... 멍한 채 잠이 살며시 깨었다.
그러고 10분쯤 꿈과 잠, 현실 사이에 얕게 걸쳐져 있다가... 아이가 아파서 내일 점심 약속을 다음주로 미뤄야겠다는 S언니 전화가 와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참....섬세한 이야기예요.. ^^
전 어릴 적부터 꿈을 이상하고 복잡한 걸 많이 꿔서... 제가 가진 창조성은 꿈으로만 나타나나 싶을 정도에요. 몽상적인 용띠, 천칭자리, B형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꿈에서 있던 일들을 찬찬히 생각해 보면... 재미나요. 주변에 꿈분석가(칼 융 같은 사람 말여요)가 한 명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곤 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