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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편집자의창]노동귀족과 프롤레타리아트

 

노동귀족과 프롤레타리아트

4월 재보선은 예상대로 소위 ‘민주대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MB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조직노동운동은 상설연대체 건설논란에서 나타났듯이 민주대연합 꽁무니를 쫓고 있을 뿐, 한때 노동운동의 중심 화두였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슬로건은 이미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상황은 정치운동의 기반이 되어야 할 조직노동운동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다. 재보선에서 현대중공업노조와 미포조선노조는 한나라당 후보 지지를 표명했다. 메이데이를 며칠 앞두고 서울지하철노조는 민주노총에서 탈퇴했다. 이 노조들이 밞아온 행적을 보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이는 민주노총의 양축을 이루어온 금속대공장과 공공부문 노조운동이 붕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귀족 노조들

 

최근 현대차지부 이경훈 집행부가 단협에서 정규직노동자 자녀 우선채용을 요구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 연대하지 않는 현대차지부가 이러한 요구를 했다는 것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듯하다. 현대차 정규직노조는 이제 진보진영에서도 지위를 세습시키려는 노동귀족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다.

노동귀족이라는 말은 엥겔스가 1880년대 영국 노동운동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당시 그는 영국에서 사회주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를 노동귀족의 등장으로 설명했다. 엥겔스는 노동귀족으로 두 개의 집단을 지적했는데, 하나는 직업별 노조로 조직되어 있는 숙련공과 다른 하나는 대공장 노동자였다. 엥겔스는 이들의 노동조건이 20년 동안 중단 없이 개선되어 왔으며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영국 산업의 독점적 위치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남한에서 대공장 정규직의 노동조건 역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997~1999년 사이 구조조정 시기를 제외하고 최근 20여 년 동안 후퇴한 적이 없다. 현재 자동차와 조선소 등 대공장 정규직의 연평균 임금은 6천만 원 정도이다. 물론 법정 노동시간에 기초한 기본급 수준은 130~150만 원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대와 기아 등 완성차 공장을 기준으로 하면 평일 8시간에 2시간 잔업, 주말 특근 14시간을 해야 이 ‘평균적인’ 임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감안한다 해도 연봉 6천만 원은 남한사회에서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사실 장시간노동이 일반화되어 있는 남한에서 주 64시간의 장시간노동은 그다지 특수한 현상도 아니다. 이런 고임금이 가능한 기반은 남한의 자동차와 조선산업이 세계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독과점적 위치와 광범위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존재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정규직은 점점 보수화되고 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면에 해고대상이 아니었던 다수의 노동자들과 다른 대공장 노동자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 동료였던 해고자들의 투쟁에 거의 연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되고 있다. 이 정도 쯤 되면 엥겔스의 기준으로 볼 때 남한의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을 노동귀족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좌절한 비정규직노조운동

 

대공장 정규직이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정규직이라는 지위를 빼앗기게 되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과 박탈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때문에 해고대상자들은 격렬히 투쟁하지만 해고를 모면한 노동자들은 심각한 보신주의에 빠지는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이런 양상은 비정규직에 대한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신들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오로지 고용형태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규직은 비정규직문제에 대해 더욱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
실제로 인원 구조조정이 현장에 들어올 때, 정규직은 대의원 체계를 중심으로 한 상시적 합의구조를 통해 고용을 전환배치 정도로 보장 받는 대신 비정규직을 자르는 데 동의한다. 이 체계 속에서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의 이해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2003년 이후 대공장에서 건설되었던 비정규직노조들은 대부분 대중적 노조로 발전하는데 실패한 것은 무엇보다 조직노동운동의 벽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노조가 건설되어 투쟁에 나섰을 때, 대공장 정규직노조는 오히려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속에서 자본의 탄압을 정면으로 맞은 비정규직노조는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대중적 기반을 갖췄다고 평가받았던 기아차비정규직지회는 금속노조와 정규직노조의 1사1조직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독자성을 박탈당한 채 정규직노조에 종속되었다. 그 결과 현재 기아차사내하청분회는 독자적인 투쟁을 하지 못하는 식물노조가 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은 비정규직투쟁과 같이 대공장에서 안정적인 교섭구조를 흔드는 불안요소가 발생했을 때, 자본과 정규직노조가 함께 그 요소의 발전을 원천봉쇄하고 필요한 때는 멀쩡한 노조를 깨면서까지 통제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조합운동으로서 비정규직운동은 실패했으며, 당분간 회생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현재 대공장 정규직노조는 높은 노동조건과 고용을 보장하는 합의구조를 통해 사측에 포섭되어 현장을 통제하는 사측의 대리자가 되어있다. 이러한 양상은 복수노조 시대가 되면서 더욱 강화될 것이며, 더 큰 문제는 정규직노조의 이런 노선이 정규직조합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성과급에 기반을 둔 임금체계와 상당한 양의 회사 주식을 보유함으로써 자본의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많은 사안에서 자본의 이해와 자신의 이해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사회주의자들이 이제 대공장 정규직, 조직노동운동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90년대 후반 남한 사회주의자들은 조직·전술·강령적으로 대공장을 중심지로 설정해 왔다. 하지만 대공장노동자들의 조합적 이해를 급진화시키고 이를 통해 정치의식으로 나아간다는 전술은 사실상 실패했다. 대공장에서 해고자 투쟁을 제외하고 전투적 투쟁은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그 투쟁을 통해 정치의식의 고양으로 나아간다는 구상은 관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현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의 10%도 되지 않으며, 거의 대규모 작업장 노동자들과 일치하고 있다. 문제는 80%에 달하는 미조직노동자들, 조직노동운동의 저변에 깔려 사회 하층을 이루고 있는 미조직 노동자들이다. 촛불투쟁과 같이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운동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는 이들이야 말로 생산수단이 박탈당하고 자본의 이해를 공유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성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전술·강령은 소수의 조직노동자가 아니라 이러한 다수 노동자들,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에 맞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 있어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은 여전히 조직노동자에 맞추어져 있으며, 이런 모습은 아직도 조합주의와 단절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에, 1사1조직과 같이 비정규직운동의 독자성을 파괴하는 관료적 통합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안녕을 고할 것인가? 물론 아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가 누구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2011년 4월30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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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노동]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재능불매운동 - 재능지부 오수영 사무국장 인터뷰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5/05 15:14
  • 수정일
    2011/05/05 15:1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의 투쟁이 1,227일(4월30일 기준)을 맞이했다. 재능교육의 수수료 제도 개악에 맞서 시작된 투쟁은 사측의 단체협약파기와 노조 전임자 해고로 인해 장기화되었다. 단체협약 원상회복과 해고자 원직복직을 위한 투쟁은 작년 말 사측이 노조 조합원을 전원 해고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사측의 노조말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재능지부 조합원들은 지금도 시청 앞 재능교육 사옥 앞에서 농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삭발투쟁에 이어 얼마 전에는 유명자 지부장이 21일 동안 단식을 진행했으며, 뒤이어 유득규 사무처장이 4월22일까지 단식농성을 이어갔다. 현재 재능지부는 <재능교육 OUT 국민운동본부>를 꾸려서 대중적인 불매운동을 만들어 나가려고 하고 있다. 재능지부 오수영 사무국장을 만나 그간의 투쟁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단협파기 이후에 싸움을 이어나가다가 중간에 국면이 바뀐 것 같다. 노조탄압이 더욱 극렬해졌는데 그 상황이 어떻게 전개 되었나
(대표이사가 바뀌면서) 현장에 있는 조합원들 ‘걔 아직도 해고 안 시켰냐, 걔 대상자다’, (그 대상자가) 유득규 사무처장이었던 것 같다. 간부들 중에서 현장에 살아있는 그 사람이 사무처장 그리고 강영식 조합원 그리고 박경선 조합원 이렇게 세 사람이었는데, 간부들 중에서 이 사람들 아직도 해고 안 시켰냐라고 얘기를 했고.
불매는 그 이전부터 진행이 되긴 했지만 실제로 힘을 받지 않았다. 우리가 돌아다니면서 상황 알리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유인물 꽂고 이러긴 했지만 대중적인 힘으로 불매가 진행된 상황은 아니었는데. 사측에서는 특히 유득규 사무처장을 불매를 주동하는, 이러면서 해고를 시켰는데, 그 때 분위기가 현장에다가 ‘노동조합, 불법단체의 불매활동’ 이러면서 현장에 일괄적으로 교육을 다 시켰다. 8월에 유득규 사무처장 해고되던 그 시점에 다 시키면서 조합원 일대일 면담이 쫙 들어갔다. 불법임의단체인 노동조합이 재능교육 불매를 선동하면서 우리 현장을 다 망가뜨린다는 교육이 전면적으로 진행이 되면서 조합원들 면담 들어가고. 3차례, 교육국장이 설득 못시키면 사업국장이, 사업국장이 설득 못시키면 총국장이 이렇게 면담 들어가면서 재계약 시점에 노조탈퇴하지 않으면 다 해고다, 그러면서 유득규 사무처장 해고되고 최민정, 이현숙 이 사람들은 계약일이 좀 빨라서 해고시키고, 연말에 가서 전원 다 해고시켰다. 연말에 해고된 조합원들이 여기 와서 같이 투쟁하지 않았는데도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회사가 밝혔고 그리고 해고가 됐다.
그 때 같이 왔던 게 압류, 살림살이, 자동차, 사무실 집기 압류 그런 국면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조합원 전원해고가 우리한테는 플러스가 됐던 것 같다. 그 때까지 (이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국면이었는데. 일단 조합원들이 전원 해고가 되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간부들 집에다 손배압류하고 이런 거야 뭐, 다른 회사들은 압류까진 안하지만, 어쨌든 활동하는 조합원들에 대한 징계성 (조치) 이런 것들은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이 많이 동하지 않았다.
처음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그러다가 좀 지나니까 손배 150억, 자동차 압류 그런 얘기 막 하면 그러려니 했는데. ‘그냥 현장에서 일했는데 조합원이라고 재계약을 안했대’ 라고 하는 게 사람들 마음을 많이 움직였던 것 같다. 정말 나쁜 회사구나, 이런 이미지가 확산됐고 한편으로 노동조합 입장에서는 서울에 고립되어 있었는데 지역에 해고자들이 발생하면서 지역에서 공분이 일어나고 국지적인 움직임이 만들어지고. 그리고 작년에 해고문제, 압류문제 터지면서 공대위가 구성이 돼서 대중적인 사업(이 되었다).
그 전에는 대중적인 사업이 사실 없었다. 집회 맨날 하는 거, 그리고 연대단위 조금씩 붙어서 플래카드 조직하고 가가호호 방문해서 재능교육 나빠요, 하고 유인물 뿌리고. 그게 대중사업은 아니다. 그냥 우리가 너무 절박하니까 알리려고 막 한 거지 대중적으로 뭘 할 수 있는 동력이 사실 없었다. 동력이라 해봤자 옛날 지대위에 우리하고 학생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는데 일단 연맹, 정당이 딱 붙고 본부가 붙고 이러면서 대중적인 캠페인을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했던 게 성화봉송 대회, 해고노동자 대회, 전국적인 1인시위 조직 이런 공동행동을 벌여나갈 수 있는 대중적인 힘이 됐다.

 

최근 사측이 제시한 안의 내용은 무엇인가
대중적으로 재능교육 문제가 확산되고. 향린교회에서 종각역에서 1인 시위 진행하고 트위터 상에서 재능교육 불매, 문제들이 떠돌아 다니면서 회사가 많이 압박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제기한 게 자기네들 나름대로는 최후의 안이다라고 얘기하면서 안을 하나 던졌다 사측이. 3주인가 2주 전에 안을 하나 던졌는데 내용이 뭐냐면 ‘단체협상 원상회복 없다, 단체협약 없다’, 지금 해고된 조합원 12명 중에 한 명은 해고되자마자 바로 정리했고 남은 11명 그리고 2001년 파업으로 해고된 황창훈 동지까지 12명인데 황창훈은 이번 건은 아니라고 그러면서 제외. 그리고 그 11명에 대해서 처음에는 오수영(사무국장), 유명자(지부장) 복귀 안된다라고 했는데 두 번째 단식투쟁도 하고 머리깍고 그러면서 오수영, 유명자까지 현장복귀해주겠다. 최근에 해고된 6명에 대해서는 6개월 후에, 그리고 중간에 해고된 3명에 대해서는 18개월 후에 그리고 유명자, 오수영은 36개월 후에 복귀. 단 월 50만원씩 생계를 지원해주고 민형사상의 소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손배압류나 이런 것들은 어차피 끝나면 해결되는 거니까 해주겠다 뭐 이런 안을 갖고 나왔다.

 

 

사측안에 대해 조합원들이나 연대단위의 반응은 어땠나

연맹이나 사실 연맹뿐 아니라 (연대단위들이) 우리들 앞에서 얘기를 잘 못하긴 하는데, 연맹위원장님은 솔직하게 얘기를 한 거다. ‘지금 이거 받아야 된다, 아니면 너네 다 망가진다. 어쨌든 회사가 의지를 표명했으니까’ 이런 입장을 보였고 우리들한테 말은 못했어도 아마 다 저걸 좀 받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을 거다. 그래서 4월10일 날 공대위 대표자들하고 집행단위하고 우리 조합원들까지 다 올라와서 전체회의를 했다.
사실 최근에 해고된 조합원들 일부는 그런 생각도 했다, 다들 그런 생각 할 거다, 이 투쟁이 얼마나 길게 갈지도 모르고 언제 해결될 지도 모르고 이런데 그런 마음이 들 거다. 그리고 현장에 선생님들도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이렇게 투쟁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의심을 아마 다 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현재 노조지도부가 더 가야된다라고 결의를 밝히고 한다면 같이 하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쭉 발언을 하고 ‘지금 현재 지도부는 당연히 받을 수 없는 안이다라고 얘기를 했다’, ‘단체협약 아니면 안 되고’, ‘우리는 순차복직 안되고 황창훈 동지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한 복직 안 된다’. 어차피 사측이 노동조합의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끔 하는 안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연대단위 동지들 중 일부는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왜 못 받냐, 받아야지. 그리고 사실 내가 생각할 때에도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그 분들을 설득하기로 한 거고. 그리고 나머지들은 투쟁사업장 연대를 할 때는 항상 그렇지 않나, 주체가 싸운다면 같이 가야되는 거 아니냐. 그런 입장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면서 투쟁을 쭉 가자고 얘기를 했고 우리 내부적으로 얘기를 한 건, 회사가 우리한테 최후의 안이다라고 던졌고 이것을 받지 않으면 그 동안 미뤄졌던 법률적인 압류, 손해배상, 그냥 하겠다고 광고를 했는데, 우리가 생각하기엔 이건 최후의 안이 아니다, 처음 자기들이 안을 던진 거고다시 한 번 우리한테 협박을 하는 건 지들이 똥줄이 타니까 협박을 하는 거 아니냐 받으라고. 그리고 불매를 대중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국면이기도 하고 이러면서 단식투쟁을 통해 조직하는 것을 계속해 나가자고 얘기를 했다.
 

최근 자본가들이 순차적 복직안을 많이 던진다. 이에 대한 고민은 어떠한가
나는 순차복직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한다. 위원장은 뭐 이렇게 3시간, 6시간 같으면 받는다고 장난하는데. 근데 만약에 기륭처럼 한 라인을 타는 노동자들이 순차적으로 복직이 되면 그런 안은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왜냐면 어쨌든 처음에 혼자 들어가는 거 아니고 둘이 들어가는 거고 순차적으로 같은 공장 안에 사람들이 들어오는 거지 않나. 그러면 이거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전국사업장에다가 지국도 다 다르다. 우리 조합원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재능조합원들은 아마 끝까지 남아있을 것 같긴 한데. 그렇게 사업장도 다 다르고 있는 곳도 다르고 너무나 멀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소통하고 조합원으로 내가 남아있는 것이 현장에서 고통스럽더라도 이것을 같이 교류하고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만약에 지금 그런 식의 순차복직안을 받게 되면 나는 우리 조합원들이 못 견딘다고 생각한다.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나도 못 견딜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아, 나는 여기 왜 있지, 나이도 이렇게 들어서, 차라리 딴 거 하지. 아마 이런 생각 들 거다.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뭔가 할 수 있어야 남아있는 거지.
사실 노동조합도 없는데 혼자 이 부정영업 천국에 들어와 가지고 몇 개월씩 (유령회원 만들고). 그렇게 들어가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단협이라는, 그리고 들어갔을 때 뭔가 승리감? 이런 게 있어야 하잖나. 어, 쟤네들 돈 받고 들어왔네? 쟤네 단체협약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6개월 해봤자 300밖에 안되는데 어, 300 받고 들어와, 이런 얘기할 거 아닌가. 내가 6개월 후에 복직하지만 실제로 복직될 때까지 내가 제기하고 거리에서 투쟁했던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300만원을 받고 6개월 복직 받았다는 그런 얘기 분명히 할 거다.그러면 나 역시 우리 조합원 역시 자기 자존감도 빼앗겨 버리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받을 수 없는 안이라는 걸 아마 알았을 거다.

 

현재 수도권 지역의 투쟁 사업장 간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
서울지역에 모여져 있는 장기투쟁사업장들을 묶어서 뭔가 함께 하는 것을 기획해야 한다고 우리도 고민은 늘 한다. 지금 민주노총 서울본부도 힘이 좀 빠져 있고 이러면서 그런 사업이 없지 않나. 옛날 강남성모병원 투쟁하고 이런 때와 달리. 그런 사업을 원래 서울본부에서 해야 되는데 못하고 있고. 담당자도 없어졌다가 최근에 생겼고. 근데 우리가 워낙 오래됐으니까 그리고 여성사업장이다보니까 금속남성 동지들이나 새롭게 투쟁을 시작하는 사업장에 계신 분들이 우리한테 연대를 꼭 해야 된다는 그런... 우리를 도와주고 연대를 꼭 해야된다는 그런 마음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번에 PD수첩 보면서 좀 많이 놀랐는데 PD수첩에 나왔던 울부짖던 그 남성 노동자들이 다 우리 농성장에 오시는 동지들이다. 맨날 오면 그런다, 우리보다 당신들이 더 불쌍하고 안됐다고 막 그러면서 자기네 신경쓸 거 하나도 없고, 자기네들이 도와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고 함께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걱정하고 안쓰러워한다.
근데 PD수첩 봤더니 막 ‘어~ 저거 뭐야~’ 했다. 서로 가지고 있는 상처를 아니까 더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겠나. 사람이 앞만 보고 이렇게 가다가, 이제 사람을 둘러보고 자기 안에 상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상처에 대해서 너그러워지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 같다. 지금 투쟁사업장 간의 연대는 그런 식으로 되고 있다. 나는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당연한 거고 이것을 묶어서 뭔가 사업을 투쟁을 만들어나가야 하는데 아직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연대 정도인 것 같다.

 

발레오 노동자들과 재능의 연대도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서울본부에서 한 거다. 발레오는 진짜 고맙다. 만약 발레오 없었으면 농성장 유지 못했을 거다. 아마 싸우다가 말았을 거다. 우리 농성장 여기(시청)로 이사 오면서 (이 지역에) 발레오가 있었다. 우리도 말로는 마이크 잡으면 시청광장을 중심으로 발레오, 재능, 그 때 인권위에 장애인들도 있었고 시청 앞에 도시철도 해고자들도 있었고. 이렇게 있으니까 우리 이것들을 하나로 모아서 뭔가 해봤으면 좋겠다, 생각은 있지만 이게 잘 안 된다. 서로 바쁘고 일정 맞추기가 힘들고.
처음 연대는 술로 시작됐다. 발레오 동지들이 공장농성자들이 있고 여기 서울농성자들이 있으면서 여기 지부장님이 사업을 잘 한다, 그 공장이 분위기가 좋은 것 같다. 자기 내부적인 연대의식 이런 게 많아서 서울 올라오면 항상 안주를 준비해가지고 농성장에서 술을 먹는, 너무 과하게 먹으면 안 되기는 하는데, 술 먹고 조합원들끼리 서로 얘기하고 속내를 털 수 있는 자리를 의도적으로 만드신다. 그러면서 발레오 동지들이 술 먹고 잠잘 데 없고 이리로 넘어와서 우리 조합원들이랑 같이 술먹고.
처음에는 발레오 남성 동지들이 재능에 여자들이 많으니까 온다, 이런 소문이 났다. 그래서 나와 사무처장이 재능에 여자가 어딨냐, 제일 나이 어린 애는 아줌마고, 나머지는 40대에다가 성격도 지랄같고. 우리가 여자가 어딨냐. 사실 그 사람들은 연배도 어리고 비슷하거나 애아빠들이고 그런데 여자로 보냐고. 어쨌든 발레오 동지들이 술자리에서 연대를 하고 그게 서로의 투쟁에 대한 공감대 이런 게 진행되면서 농성장에 이제 무슨 일이 생겼다, 구청에서 철거한다 그러면 무조건 오는 거야 막. 그래서 우리는 농성은 낮에 한두명 있을지언정 주변에 동지들이 늘 있으니까.

 

지역에서도 조합원들이 해고되면서 연대가 되고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
예를 들면 춘천에 박경선 조합원 있는 지역에서는 지난번에 유인물을 5천부를 찍었다, 그 좁은 강원도에 유인물을 뿌리려고. 이걸 어디 갖다가 뿌리려고 강원도 사람 5천명도 안될 것 같은데 이러면서. 어쨌든 민주노총 강원본부에서 월 1회 집중선전전의 날, 이렇게 해서 유인물을 뿌리고 강원지역에서 CMS 조직을 엄청 많이 했다.
회사측 안 나오고 나서 강원도에 비정규직센터 하는 동지가 전화가 왔다. 나도 잘 모르고 얼굴도 한 번도 못 봤다. 그런데 그 동지가 그 전에도 우리 투쟁 지원한다고 해서 CMS를 강원지역에서 20~30개를 조직해서 보내줬는데.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이런 말해도 되는지 정말 모르겠는데 나는 그 안 안 받고 꼭 끝까지 싸워서 단체협약 쟁취했으면 좋겠다, 자기가 강원도에서 200을 조직해서 보내겠다고 CMS를. 이렇게 호언장담하고 끊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부천 지역 같은 경우에도 부천촛불이 아직 남아있으면서 매주 목요일 선전전 진행하는데 마지막 주 목요일 날은 재능문제를 가지고 부천역에서 송내역에서 선전전 진행하는 거 이런 식으로 조직이 되고.
부산은 조합원들이 자체적으로,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부산이나 울산은 조합원들이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열심히 하고 1인시위도 열심히 하시긴 하는데 이쪽하고는 좀 분위기가 다른 것 같다. 대중적으로 이것을 알리고 조직하고 이런 것들이 부족하다. 부족하긴 한데 월 1회 부산 전 지역 지국 선전전 울산 전지역 지국 선전전 이런 식으로 박아서 당원들하고 본부하고 해서 같이.

 

 

△ 지난 3월25일 재능지부 조합원 5명이 삭발하고 위원장 단식에 돌입했다. 오른쪽부터 오수영사무국장, 유명자 지부장, 이현숙 조합원

 

단식투쟁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처음에는 단식을 가자고 생각을 했는데 좀 흔들렸다, 기한도 없는데 단식해서 사람 몸 버리고 일도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많이 했다. 결과적으로 단식은 우리한테 완전히 플러스가 됐다. 릴레이 동조단식하고 1000인 동조단식하면서 정말 대중적인 기반이 생겼다. 이 투쟁을 알리는 기반이 생겼고 결과적으로 투쟁이 확대되는 국면, 오늘 보셔서 알겠지만 기독단위, 향린교회가 1인시위한 것에 대해서 사측이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는 공문을 3차례나 보냈다, 내용증명을.
근데 사측이 잘못한 거다. 정당이나 이런 것과 다르게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존감이 굉장히 강한 집단이다. 어떻게 감히 우리한테. 촛불집회하면 이렇게 많이 안 왔는데 이걸 보고 (사측이) 정말 나쁜 놈들이구나, 그냥 지지하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우리한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 그러고 협박공문을 보내고. 전해듣기만 했는데 그 분 성함이 생각이 안 나는데, 보통 다 목사님이라고 그러지 않나, 감정이 나쁘고 거슬린 목사들한테 목사라고, 누구누구 ‘목사’ 이렇게 보낸 거다. 어떻게 감히 지네가. 그러면서 향린교회 내부에서도 공분이 일어났고 향린교회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 단위들이 이번에 기독교 단위들이 이번에 ‘재능사태 해결 기독교대책위’를 꾸릴 수 있을만큼 공분이 일어났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한테 불리하지 않다. 언론도 조명하고 있고 오늘도 기자회견 하는데 사실 불매 기자회견하면 그동안 (연대가) 잘 안 붙었다. 항상 우리 꺼(기사) 실어주는 정도만, 항상 매일노동뉴스하고 참세상, 딱 두 군데만 왔다, 다른 데는 전화해서 오라고 하면 온다고 해놓고 안 왔다. 그런데 민중의소리가 오늘 사람을 보냈다. 민감한 단위다, 지금 선거국면인데 우리한테 사람을 보냈다 취재하러. 그리고 한겨레에서도 취재를 왔고. 전반적인 국면은 우리한테 유리하고 자본한테 불리하게 가고 있다.

 

말한 것처럼 연대가 시민사회로 확산되면서 <재능OUT국민운동본부>가 출범했다. 관련하여 앞으로 투쟁 방향을 어떻게 잡고 있나
사측한테 겁 좀 주려고 좀 대중적인 이름을 만들자고 얘기했다. ‘따뜻한 밥한끼의 권리’, ‘진짜 사장이 고용해’, 이런 것처럼 뭔가 대중적인 것을 만들자고 말로는 해놓고 없으니까 이걸로 간 거다. 어쨌든 전에는 상급단위에서 정당이나 노조나, 불매하자 아래로 내리꽂는 방식으로 조직하는데 조직이 잘 안되잖나. 노동조합이나 정당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유지는 하되 아까 말했던 종교나 인권단체, 교육단체, 학부모단체들이 들어오면서 이 단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명확한 데잖나. 그 성격을 가지고 지원할 수 있는 사업을 벌여나갈 거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어차피 이름만 올리고 말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실제로 단체가 가지고 성격으로 투쟁을 조직하겠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핵심은 불매를 조직하는 것. 사실 이름만 올리려고 하는 데도 있다. 그리고 이름만 올리려고 하지 않더라도 (기존 연대단위에는 불매할) 재능회원이 사실 없다.
이번에 천주교 노동사목전국연합 이쪽에서 우리 단위에 들어오게 되면서 부천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무국장이 애가 넷인데 첫째가 재능한 지 6년이 됐단다. 6년, 5년, 3년, 애들이. 막내도 원래 시키려고 했단다. 재능매니아인거야, 엄마가. 근데 끊었다. 그 전에 이 사람이 우리 투쟁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고 봤더니 이 사람이 강종숙 위원장 대학 친구더라. 보통 활동하는 사람들이 집에서 경제권도 없고 그러니까 발언력이 없잖나. 그런데 기자회견문 써주신 걸 보면, 재능 끊자 그랬단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소집했다고 한다, 자료를 쭉 뽑아가지고. 애들하고 엄마하고 여섯이서 둘러앉아서. 이런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하겠나. 당연히 토론을 하면 재능교육을 끊자고 하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나쁘잖아.
그래서 끊는 이런 일들이 (생긴다). 기존에 우리가 접했던 곳에서는 재능을 다 끊었고 노조간부들도.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도 재능했던 사람들이 작년 연말 올해 넘어가면서 다 끊었다고 한다. 안 끊던 사람들까지도 해고자 발생하고 나서 끊었고. 그래서 이제 어디를 끊으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는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말을 하고 끊어야 하는데 조용히. 나 끊어요, 하고 광고하고 끊어야 하는데. 그래서 없었는데 시민단체나 종교단체들은 그동안 우리하고 만난 적이 없는 상태잖나. 젊은 신자들이 많고, 그러니까 여기서 재능불매 조직을 확실하게 해보려고 하고.
향린교회에서는 종각역에 원래 재능광고판이 있는데 거기서 1인시위하니까 사측이 광고판을 없앴다. 그러면서 향린교회하고 트위터에서 ‘재능광고판을 찾습니다’ 했다. 그것도 조직하고 재능이 올해 전국시낭송회 행사를 본사에서 한다. 교인들이 같이 1인시위를 하겠다고 했다.

 

기존에 노동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들 사이에서 연대가 확산되고 있는데 새로운 현상인 것 같다
동희오토 투쟁 이후에 뿔난 시민들이 촛불 이후에 풀 데가 없잖나. 그러니까 끊임없이 투쟁을 만드는 노동자, 노동운동에 자발적으로. 여기 아니면 붙을 데가 없다 사실. 노동운동 사업장이나 장기투쟁사업장이 늘 있으니까. 그래서 여기서 각각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좋은 것 같다.
나는 이 투쟁 하면서 자신감은 아닌데 치유되는 그런 게 있었다. 맨날 우리끼리 머리박고 우리끼리 죽어나가는 이런 투쟁, 항상 그래왔는데. 천막농성장 이쪽으로 옮기고 그러면서 진보신당이나 교인분들하고 같이 사업을 하면서 우리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철저하게 머리박고 싸우는 건 우리가 해야되지만 그 외의 것들을 어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해서 해주는 것. 밤에 와서 술 마시고 놀아주기, 1인시위 가서 하기 이런 것을 자발적으로 하고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대중에 대한 불신, ‘해도 안될 거야’, 이런 생각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나 스스로 치유가 많이 됐다.

 

 

지금까지 투쟁을 해오면서 어떤 것을 느꼈나

사람들은 끝까지 투쟁해서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 이렇게 구호를 외치지 않나. 나는 나를 의심한다. 끝까지 투쟁해서 반드시 쟁취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나는 이 투쟁하다 죽고 싶진 않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근데 어쨌든 이 투쟁은 마침표가 있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그래서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면 현장에 계속 남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의심도 한다, 이렇게 장기투쟁으로 가서 나중에 몸도 망가지고 마음도 망가지고 우리는 도대체 뭘 할까. 설사 우리가 현장에 들어간다고 해서 이 더러운 재능교육이 우리 예전에 노동조합 조합원들 3,800에서 천 명 정도 떨어졌을 때 이미 현장은 지금 같진 않았지만 망가졌었다. 천 명가지고도 그게 잘 안됐는데 우리 12명이 들어가서 얼마나 바뀔까, 그런 두려움도 있다. 다시 또 쓰레기 같은 인간들하고 사무실에서 부딪히면서 맨날 싸워야할 생각하니까 끔찍하고.
그렇긴 한데,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요구하는 단체협약과 원직복직이라는 문제가 나 개인의 아니고 지금 계속해서 뒷걸음치는 노동운동, 노동조합운동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노동자들이 승리했다는 이런 경험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승리했다. 자존감도 회복이 되는 거고 이런 것들을 만들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 남아있는 거고.
투쟁은 어제도 너~무 일하기 싫은 거야. 왜 나 혼자 여기 앉아서 이걸 하고 있어야 돼,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뛰겠고, 도망갈 수도 없고. ‘나는 내일 기자회견만 끝나면 소주 한 병을 먹고 잠 잘거야’ 그랬는데 아직 소주 한 병을 못 먹었다. 내가 좀 힘들 때 옆에 좀 덜 힘든 사람이 다독여주고 상대방이 힘들면 내가 또 다독여주고. 발레오 동지들이 쌍용차 동지들이 우리한테 힘줬던 것처럼 그렇게 천천히 가면, 싸울 때 빡세게 싸워야겠지만, 단 두 사람만 남아도 아마 끝까지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가 없다. 이 1000이라는 상식적인 숫자가 넘어가면서 도망갈 수 없게 됐다, 너무 유명해서. 예전에는 1000이 넘어가기 전에는 나는 도망간다, 나는 이 겨울에 이 추운 천막에 나는 안 보낼 거다, 이 추운 겨울에 길바닥에서 잠 안 잔다, 나는 얼어죽지 않기 위해서 정리하고 갈 거다 이런 말도 했다. 근데 이 1000이라는 기점을 딱 넘어가면서부터 이런 말 안한다, 못한다. 너무 유명해져서. 한겨레21 이런 데도 나오고. 아까 목사님도 그런 말 하셨잖나. 바닥을 치는 게 아니라 그냥 바닥에서 살고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연대의 힘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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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여성][인터뷰]꾸준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하다-사내하청분회 최경옥 PDI 부서 조합원

  • 분류
    여성
  • 등록일
    2011/04/08 23:08
  • 수정일
    2011/04/08 23:08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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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은 어떤 것이 있나
일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들어와서 보니까 여자들이 일하는 환경 같은 것부터 차별이 있더라. 하다못해 퇴근을 하더라도 남자들은 다 퇴근을 시켜놓고 여자들은 잡아놓는 거다. 야간하고 빨리 가서는 애기 학교도 보내야 하고 막 그러는데.
남자들은 다 옷을 갈아입고 가는데 여자들은 못 가는 거다. 하다못해 그런 데서부터 차별을 하더라. 아 더럽고 치사해서. 항의를 하다하다 안되니까 아,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남아있지. 그리고 가끔씩 못할 때는 도망도 가고 그런다. 이상하게 남자들은 단속 안하는데 여자들만 단속한다. 차별을 하는 거 같다.
예전에는 더 심했는데 (비정규직)노동조합, (사내하청)분회가 생기면서 지금은 좀 없어지긴 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얘기도 많이 하고 그런다. 뭐냐면 누가 불량을 (못 발견하고) 놓쳤다거나 잘못을 했으면 ‘내가 OO는 예쁘니까 좀 봐주지’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다른 사람이 놓쳤으면 ‘와서 이거 확인 좀 하고 가라 그래라’ 이런 식으로 짜증을 내고.
그러니까 여자분들을 같은 일하는 동료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되게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똑같이 일을 해도 분명히 품질(검사)에는 기준이 다 있어서 이 공장이 돌아갈 텐데. 일은 우리가 남자들 못지않게 한다. 일하는 것도 우리가 되게 힘들게 한다. 라인을 타는데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여자들이 힘들게 하고, 일 강도를 되게 높여서 한다.

 

임산부와 관련된 사안이 있다고 들었는데
임산부들이 생기면 대체 인력이 들어와야 하는데 안 들어오는 거다. 처음에는 그것부터 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을 집어넣으니까 임산부들이 조금 더 당당하게 다녔다. 자기가 나가더라도 사람을 대주니까 남들에게 피해주는 게 아니니까 당당하게 다니면서 임산부 분들이 한두 명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임신을 하면 쉬운 일로 보내주고 그랬고.
그런데 작년부터 공장에서 UPH UP이라고 작업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도 임산부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우리도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사람을 달라고 싸웠었는데 TO를 못 받았다. 그러면서 TO를 못 받고 키퍼(누가 월차를 쓰거나 화장실을 갈 때에 대비하여 라인 가동의 절대 필요인원에 준비된 추가인원)가 돌아가면서 (보충)해주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그 (임산부의) 일을 충당해서 해주는 거다.
여성의 날 때문에 생각하게 되었는데 임산부인 분들도 힘들다고 그런 얘기를 하더라. 왜냐하면 전처럼 쉬운 데로 보내줬지만 시간이 빨라졌기 때문에 움직이는 횟수가 늘어나고. 예전에는 700대를 했으면 지금은 1,000대를 하는 거다. 하다못해 어떤 달은 1,200대까지 했다는고 한다. 그 정도면 우리가 옛날에 비해서 (라인을) 되게 많이 돌렸다는 거다. 아무리 공정을 뺐다고 해도 내가 움직여야 하는 횟수 그런 게 늘어났기 때문에.
그렇다보니까 우리 작업자들도 힘들고. 주간에는 5시 반까지 (임산부가 일하는 시간이) 되는데 야간 TO도 그 사람이 같이 하는 걸로 되어 있는데 임산부가 야간은 못 들어온다. 주간에 5시 반에 가기 때문에 5시 반부터 잔업에도 항상 사람이 모자라고. 야간에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임산부의 그 TO를 우리가 충당하다 보니까 임산부도 부담스럽고 우리도 힘들고.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왜 나라에서는 임산부에 대한 혜택을 돈으로는 해결을 하면서 왜 이런 거는 생각을 못할까. 왜 여성의 그런 문제를 국회나 이런 데서는 왜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치나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나도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이의만 제기하고 그거에 대해서 싸우진 못했다. 어떤 일까지 있었냐면 임산부가 (조금 더 노동강도가 낮은) 비검사 파트로 가야 되서 검사라인의 분들이 짜증이 났다. 주간 잔업이랑 야간에 일손이 부족한 그런 것은 어느 정도 설득을 해서 검사분들도 참는다.
그런데 (임산부가 비검사 파트로 가면) 비검사 분들이 자기 자리를 빼앗기기 때문에 그분들이 노는 거다. 자리가 없으니까. 비검사 분들은 검사하는 작업은 (잘) 못한다. 그러다 보니까 검사 분들은 막 째려보고 싫어하고.
그런 분위기가 생기면서 한 번은 애기가 만삭이 다 되었는데도 감추고 복대를 차고 검사에서 일을 한 애도 있다. 내가 “그거는 싸워야 된다 노동조합에서 같이 싸워야 된다.”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그 임산부 분이 싫다고 거절을 하더라. 자기는 너무 자존심 상해서 하고 싶지 않다고. 그 분이 (문제제기를) 안하니까 넘어갔다. 하다못해 그런 일들이 또 있고.
지금도 야간은 우리가 하니까 임산부가 생기면 “아, 누가 또 생긴 거야?” 그렇게 하면서 그 분을 말로는 ‘축하해’ 이렇게 하지만 속으로는, 그거를 우리가 다 충당을 하니까, 진심으로 밝은 미소로 축하하기 어렵다. 같은 여성으로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분회나 정규직지회가 임산부 TO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응하나
대응도 대응이지만 아예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 임신부가 일을 한다는 자체도 모르고 있다. 여성분들이 여기 기아 내에 워낙 인원이 적다보니까 그런 문제로 싸우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다.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소수의 힘든 사람들을 위해 많이 일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성과나 자기네들의 문제를 더 가져가지 그런 (여성) 문제로 싸우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이 그런 문제가 있다고 분명히 얘기를 했으면, 하다못해 여성 조합원이 물어본 건데 이런 문제를 노동조합에서 앞으로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꾸 와서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기보다는 그냥 전화통화가 땡이었다.
남성분들도 분명히 여기 지금 맞벌이 하시는 분들도 많을 텐데. 자기 와이프도 그렇게 다니는 사람들 많을 텐데. 남성 우월, 1차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와이프한테까지 미칠 것을 생각 못하고 내 자식한테까지는 생각을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 딸까지 이렇게 그런 대우를 받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고. 노동조합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내하청분회로 재편되기 이전 비정규직지회 시절에 여성위원회가 있었다 알고 있다. 그 때에 여성조합원들은 여성 문제에 관심이 높았나
전에 여성위원회가 있을 때에는 기아 내 비정규직 노동조합 자체가 불이 붙었다 그래야 하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많이 뭉쳤다. 노동조합에서 하는 일들은 조합원들이 딱딱딱 해줬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지금은 노동조합 생기면서 차별이 많이 없어졌다. 정규직 분들이 대놓고 와가지고 일하는데 올라와서 함부로 농담 던지고 가고 그런 것도 많이 없어졌다. 여성위원회라는 그런 게 있다는 것 자체는 정규직 분들도 알고는 있는데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건지. 그런 것을 좀 덜 하더라. 좀 무서워한다고 그래야 하나.
말 잘못했다 잘못 걸리면 큰일 나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그런 문제가 많이 없어졌던 것 같다. 노조가 활발하기 전에는 우리가 일하는 장소에 와가지고 음료수 빼다가 아가씨들 주고가고 그랬었다.
그리고 노조 자체에 여성이 내 말을 주장하고 내 말을 한다는 걸 보고 남자 분들이 조금 겁을 먹었다 그래야 하나? 그렇게 돼서 지금은 그런 문제가 많이 없다. 함부로 와서 농담하는 사람이 없다. 사람 봐가면서 던지고 뒤에서 살살하고 함부로 와서 말은 안 붙이는 것 같다.

 

한국 리테크(PDI 하청업체) 사장은 남성노동자를 늘린다던데
여자들은 생리휴가가 있다. 임산부 분들은 1년 휴직계도 내고 5시 반에 퇴근하면 TO도 없고. 내가 생각해도 사장 입장에서는 골이 아플테니까 사장이 자꾸 남성을 쓰는 거다. 젊은 남성분들을 자꾸 쓰는 거다. 예전에 여성 사업장은 남성이 일하지 않게끔 여성만 들어와서 일을 하게끔 보장하는 그런 단협을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거를 (추진) 하다 못했다. 그게 아쉽더라.

 

3·8 기획주간 하면서 사진전도 하고 걸개도 걸었는데 주위 여성조합원들의 반응은 어떤가
거의 반응이 없다. 없는데 이게 처음 한 거다. 그런 생각도 했는데 오죽했으면 3·8여성의 날을 만들었을까. 이게 처음 계기가 돼서 우리 여성조합원이 있다는 걸 남성조합원들한테도 많이 알리고 이런 문제를 노동조합 차원에서도 같이 싸울 수 있는 문제로, 사업 같은 걸 가져가는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걸 보고 지나치면서 여성조합원들이 자기가 힘들었던 부분을, 예전에는 꾹꾹 눌렀던 여성조합원들이 좀 그런 게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해서 노동조합에 와서 얘기하는 그런 조합원도 생기지 않을까.
한꺼번에 그것들이 될 거라는 기대는 안한다. 오늘도 다들 안 나올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꾸준하게 하는 게 그게 중요한 거 같다.

 

이번 기획주간이 어떤 의미가 있었나
이렇게 했다는 것 자체에서 의미를 둔다. 이렇게 행사를 대공장에서 남성들의 분위기 속에서 했다는 것 자체가 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분들이 많이 같이 하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처음엔 그런 거 아닌가. 노동조합이라는 것도 처음에 “왜 저래?” 하고 욕하고 그러다가 지나가다 보다가 이렇게 믿게 되지 않나. 다들 처음이라서 그런 거지 계기를 만들어서 가져가는 게 중요한 거 같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부탁드린다
나도 예전에는 집에서 살림만 할 거라고 생각했다. 막상 나와서 내가 일을 하다보니까 여성이니까 되게 힘든 게 많더라. 회사에서도 발바닥이 아픈데 집에 가서도 발바닥이 아프다. 집에 가서도 앉을 틈이 없다. 이렇게 얘기하면 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애기 때부터 한국에서는 남자분들이 가사일을 아예 안하는 걸로 알고 있다. 우리 남편도 굳이 시켜야 하지 가만히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내가 이 정도 해줬으면 됐지, 내가 오늘은 안 도와주는데 다음에 도와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 우리는 진짜 발바닥이 아프다. 언니들 다 그렇게 얘기한다. “나는 내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이렇게 얘기를 한다.
그런 문제를 많이 풀어가야 되는데 여자분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참을 건가), 예전처럼 여자분들이 직장을 안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봤을 때는 직장생활을 하는 여자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이 거의 그럴 거 아닌가. 집에서 살림하고 막 눈치보고 그런 것을 이 사회가 바뀌어 가는 방향으로 해야 되는데 . 가끔가다 그냥 ‘이런 걸 바꿔야 하는데 어떻게 바꿔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리│정지원 (jiwon@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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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여성][인터뷰]똑같은 조합원인데 우리는 너무 힘들다-정복희 사내하청분회 여성부장 / 현대푸드 조합원

  • 분류
    여성
  • 등록일
    2011/04/08 23:05
  • 수정일
    2011/04/08 23:0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이번 3.8 여성의 날 기획주간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
기아자동차 내에 여성조합원들은 많지만 여태까지 이런 행사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올해 한 정규직 활동가와 (사내하청)분회에서 추진을 해서 이렇게 하게 되었다.

 

현대푸드에서 일한다고 하셨는데 노동강도나 노동환경은 어떤가
여기 메인(조립라인) 식당에서 식사인원만 2천3~4백 된다. (주야) A, B조로 나뉘어 있고 식사인원은 똑같다. 일단 일하는 강도가 엄청 힘들고 40kg, 20kg 그런 걸 막 들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또 일을 많이 하다보면 다치기도 하고 허리 같은 데 고통도 많이 따른다.
그런데 분회차원이 아닌 화성지회 총무실 복지담당이 라인 조합원들(정규직 생산직)이 원한다고 식사 인원과 메뉴를 늘렸다. 그 과정에서 인원은 더 충원 안 해주면서 공정이 자꾸 늘어나니까 엄마들이 그게 너무 힘들다.
그래서 그런 것을 분회차원에서도 “어떻게 줄일 수 없냐”, “똑같은 조합원인데 왜 이렇게 (일방적으로) 하냐”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서비스업이니까 해야 된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는 안 되는 게 있고, 되는 게 있어야 하는데. 아니면 조합에서 인원충원을 같이 요구를 하든가.
근데 우리 대의원이 그러는데 정규직 노조에서는 ‘그런 것까지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 신경을 쓸 수 없다’는 식으로 정규직들이 말을 했다고 한다. 똑같은 조합원인데 우리는 너무 힘들고. 메뉴가 5~6가지 늘어났다.


일이 힘들고 산업재해가 많을 것 같다. 노동강도나 산업재해와 관련해서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었나
우리가 대의원들한테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요구를 올리면 이 사람들은 뭐 해준다고는 하지만 그게 계속 지금까지 안 되고 있다. 우리 현대푸드는 식당이 5개 업장이다. 그런데 휴게실이나 샤워실이 기존에 없는 데도 있다.
엄마들이 일을 하다보면 쑤시고 아프니까 우리가 찜질팩 같은 것도 요구했다. 찜질팩을 금방 주지도 않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주긴 했는데 그게 얼마 안 가서 못쓰게 되었다. 벌써 그거 교체해 준다고 한 지가 2달, 3달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엄마들이 산재도 나지만 관절 같은 데 무리가 오고 그런다. 현재 나도 지금 허리가 안 좋아가지고 그게 다리로 왔다. 2월15일부터 신경주사 맞으면서 이 달(3월) 15일까지 쉬고 있는 상태다. 산재도 힘들다고 봐야 하지만 회사 측에서 그거를 지금 자기네가 인정해 줄지 인정해 주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걸 병가로 해줄 것인지도 모르겠다. 얘네들(사측이) 하는 말은 ‘산재 떨어지기 힘들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노동강도나 산업재해와 관련하여 노조에서 항의나 투쟁을 조직하는지, 그렇다면 현대푸드 노동자들의 요구가 주요 사안으로 다뤄지는가
이번에 3·8 여성의 날 때문에 우리가 업체마다 요구사항이랑 다 적은 플랜카드를 지금 북문에 걸어 놓았다. 하지만 맨날 사측이 하는 소리가 ‘결재만 떨어지면 해준다’, ‘원청에서 승낙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해준다’는 것이다. 3라인 식당 같은 경우는 우리가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샤워장을 요구했었다. 그게 벌써 6년이 넘어 7년째가 된 거다. 그런데 여태껏 안 되고 있다.


사측이 요구를 이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항의는 되고 있나
항의를 해도 잘 안 된다. 이번에 대의원들이 그걸(샤워실 설치) 안건에 올렸더니 ‘(사측) 총무과에서 결재 떨어지면, 자리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해준다’고 말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는 거다.
한마디로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것 같다. 진짜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못해주겠나? 정규직들은 샤워장이 엄청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고서 얘네들이 하는 말이 ‘자리가 없어서 그렇다’는 거다. 그건 하나의 핑계다. 여성 있는 라인 쪽들만 샤워장이 없다. 없는 데가 많다. 정규직들은 그래도, 구석구석에 해놓는 거지.

 

사내하청분회 여성부장은 어떻게 맡게 되었나
내가 처음에 05년도부터 06년도에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활동을 계속해왔다. 여태 해오다가 이번에 (사내하청분회에서 나보고) 여성부장을 맡으라고 하는데 노조 활동은 했지만 또 (여성 관련) 범위 내에서 크게 아는 것도 없어서 내가 처음에 안 한다고 막 그러다가, 한번 해보자 그래갖고 여성부장을 맡았다.
솔직히 부족한 것도 많고 해서 나름대로 하고 싶은 욕구는 있지만 내가 현재 몸도 그렇고 하니까. 그것도 조금 부담이 되었지만 또 3·8여성의 날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올해 이게 추진이 되면 이거는 꼭 앞으로라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어느 누가 같이 했으면 하는 마음에 같이 활동하는 여성동지들하고 분회하고 하게 되었다.

 

여성노동자라서 차별받는다고 느낄 때가 있나
있다. 아무래도 남성들 위주로 많다보니까 특히 우리 식당 엄마들이 남성 직원들한테 무시를 받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정규직이든 아니든 남자분들한테. 왜냐하면 기존에 있던 엄마들은 좀 오래되고 해서 나이가 있고. 그리고 또 식당이라는 개념을 어딘가 모르게 안 좋게 생각하는 기분도 들어서 엄마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서비스라는 게 고객들이 원하는 거 해주고, 그 (노동자들) 위에 조리사들 있고 하니까 그것만 따라서 하면 되는 건데. 한마디로 좀 무시한다든가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좀 있다. 그런 건 고쳐야 할 것 같다.
옛날에는 바깥에서 식당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식 갖고 있는 게 그렇다지만 지금은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이것도 서비스(노동), 하나의 대식당이고 엄마들도 진짜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다.

 

현장에서 성희롱이 많이 발생하는가
아마 나름대로 그게 있을 거다. 그게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정규직 여성위원회가 있다. 분회 자체에는 아직 없다. 정규직 여성위원회가 딱히 활동하는 것도 없는 것 같고. 나름대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만 있을 거다.
여성분들 있는 데는, 우리 식당 같은 경우는 엄마 같은 분들이고 또 조리사들은 나이가 20대, 30대이다 보니까 그러다 보니까 아들 같고 (해서) 그런 저기(성희롱)는 없다. 또 엄마들이 그런 걸 또 참지 않고.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노동조합 만들면서 문제 있는 조리사를 쫓아낸 적이 있다고 들었다
우리가 처음에 노조 만들면서 점장도 하나 쫓겨나가지고 지금 소하리에 있다. 처음에 노조 만들 때 그 점장이 노동자를 탄압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조리사들 몇 명이 엄마들을 탄압해서 그 때 당시 대의원들이 분회에다 지적하고 요구해서 그 이후로 5~6명 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조리사들이 엄마들한테 함부로 할 수가 없고. 함부로 하면 현장마다 반 대표나 (그런 사람들이) 그래도 지금은 많이 깨우쳐서 대응하니까. 처음에는 노동조합이란 걸 잘 몰랐지만. (지금은) 엄마들이 그렇게 당하고 있지는 않고 또 당한다 할지라도 활동했던 가닥이 있으니까 옆에서 누군가가 못하게 하고 지적을 한다.
자기네, 조리사 말로는 그러더라고. 여기 기아 안이 월급이 가장 세다고. 그래서 바깥에 조리사들이 다 여기 오길 희망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 노동조합이 생겨가지고 오히려 싫어한다는 거다. 골치 아프다고. 왜 그러냐면 조금만 함부로 하면 항의하고 그렇지 않으면 분회에서 전화질 해가지고 그러니까.
그런 건 많이 개선이 되었고. 예전에는 조리사들도 엄마들 무시하고. 조리사들이 엄마들한테 볼펜 탁탁 던지고 막 그랬었다. 그런 것들도 없어졌고. 그렇게 했던 조리사들은 다 쫓겨나 버렸다.

 

이번 <기획주간> 활동을 한 소감은 어떠한가
3월2일부터 3월8일까지 일주일이 기획주간이었는데 돌아보자면 현장에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그것을 한 정규직 활동가 동지가 프로그램 맡아서 사진 확대를 했다. 라인도 마찬가지고, 미비한 점이나 이렇게 여성들이 우리는 이렇게 일하고 있다는 거, 샤워실도 없고 했다는 것을 알리는 사진 전시회를 2일부터 8일까지 오늘까지 이렇게 쭉 했다.
호응이 좋은 식당도 있지만 또 오늘 같은 날은 좀 별로. A조는 호응이 좋았었던 것 같은데 B조는 조금 호응이 적었다. 그래도 하나하나 다 알리는 거니까 누군가는 다 보고 평가를 했을 거라 생각을 한다. 그게 좀 좋은 면이었던 것 같다.
오늘 저녁에 3·8여성의 날을 위해서 준비해 온, 북문에서 이제 촛불집회를 진행할 거다. 날이 추워가지고 걱정이 되고. 물론 조합원들이 많이 모이다가도 너무 춥고 그러면 좀 그게 잘 안될 것 같아 걱정스럽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부탁드린다
촛불집회가 오늘 하루로 해서 끝나는 게 아니고 내년, 내후년 여성조합원들이 있는 그날까지 쭉 이렇게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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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여성]일회적인 사업을 넘어 여성노동자의 주체화로!- 기아차 화성공장 103주년 3·8 여성의 날 기획주간 사업

  • 분류
    여성
  • 등록일
    2011/04/08 23:03
  • 수정일
    2011/04/08 23:0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3월8일 저녁,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북문 앞에서 촛불집회가 열렸다. 촛불집회에는 기아자동차 노동자들과 사회단체 활동가, 지역 노동자 등 50여명이 참가했다. 이 곳에서 여성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여성노동자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촛불집회는 <103주년 3·8 여성의 날 기획주간(이하 ‘기획주간’)>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기획주간> 사업에는 <기아자동차지부 화성지회 사내하청분회>와 <붉은몫소리>, <사노신 기아 독자모임>과 여성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함께했다. 이들은 3월2일부터 8일 <기획주간> 동안 현장에서 여성노동자가 겪는 어려움을 공유하고 알려나가는 활동을 진행했다.
중식시간에는 화성공장 내 여성노동자들의 노동환경과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리는 사진전이 식당에서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진행된 업체별 간담회에서는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현장에서의 불만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간담회에는 생산직 여성노동자뿐 아니라 공장을 청소하는 청소노동자, 식당노동자들도 함께 참여했다.

 

여성을 위한 공간은 없다

올해 진행된 <기획주간>의 활동을 통해 현장 안팎에서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고통과 차별은 여전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선 여성들이 쓸 수 있는 샤워실과 휴게실, 화장실 등의 공간이 매우 부족했다. 간담회에 참여한 여성조합원의 말에 의하면 품질동 건물에는 여성 휴게실이 없어서 화장실 한 칸을 휴게실로 쓰고 있다고 한다. 여성노동자들은 ‘냄새도 심한 그 곳에서 먹기도 하고 쉬기도 한다’며 불만을 표출했다.
공장 내 식당에서 일하는 현대푸드업체 노동자들은 비정규직노조가 처음 생길 때부터 샤워실을 요구했다. 하루 종일 음식을 다루고 일하면 땀과 음식냄새가 배게 마련이라 퇴근 전에 샤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요구가 제기된 지 햇수로 벌써 7년째가 되었지만 하청업체는 ‘자리만 생기면 해주겠다’는 말로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동안 정규직 남성노동자의 샤워시설은 더 늘어났다. 이는 ‘자리가 없다’는 업체사장들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공간이 노조의 의제에서도 끊임없이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내에서 정규직 노조는 사측과 시설물 사용 등에 대한 협의를 통해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의 샤워실, 헬스장을 늘렸다고 한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조직통합이 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역시 같은 노조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샤워시설은 단 하나도 설치되지 않았다.

 

남성 중심적인 작업장 분위기

남성 중심적인 작업장 분위기도 여전했다. 남성 관리자가 여성노동자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명확히 성희롱이나 성폭력이라고 규정되지는 않더라도 남성과 여성, 관리자와 노동자 사이에 권력관계에 의해 폭력적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기획주간> 행사에 참여한 한 여성조합원은 현대푸드에서 남성조리사가 여성조리원에게 “OO아”라는 비속어를 써서 여성조합원이 언어폭력이라며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성폭력 문제는 관리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함께 일하는 정규직 남성노동자들도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다. 비정규직여성노동자들은 업체 사장이 함부로 했을 때에는 노조를 통해 해결하였지만 정규직 남성노동자의 행동에는 참는 경우도 있었다.
업체별 간담회 중에 PDI 부서에서 벌어지는 성희롱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자동차 검사를 담당하는 PDI 부서에서는 정규직 남성노동자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게 성적으로 모욕감을 줄 수 있는 말을 던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 여성노동자가 정규직 남성노동자에게 항의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은 라인에서 검사한 차량의 마지막 통과여부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데, 그들에게 성폭력이라고 항의를 했을 때에 이미 검사한 차량을 제대로 검사하지 않았다며 다시 돌려보내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주체로 나서자

지금까지 여성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끊임없이 노조에 요청해왔다. 그러나 이는 임금이나 전환배치 등의 소위 ‘주요’ 사안에 비해 덜 시급하다며 계속 후순위로 밀렸다. 그 결과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1/3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들이 샤워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은 생기지 않고 있다. 노조 역시 그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여성노동자가 직면한 문제에는 사측이나 관리자에 의한 성폭력과 차별도 있지만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에 의한 성폭력도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정규직 남성 노동자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때 정규직 노조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침묵하거나 반발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결국 현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문제의 해결은 여성노동자들의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가부장적인 현장 문화를 바꾸어 나가는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번 <기획주간>활동이 일회적인 활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주체가 될 여성 활동가들의 결집으로 이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정지원 (jiwon@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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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노동] 현대차비정규직, 다시 문제는 지도력이다-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성웅 부지회장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4/08 22:59
  • 수정일
    2011/04/08 23:04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을 통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불어나기 시작한 조합원 수는 그 속도만큼이나 큰 파괴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 자본은 계속 법을 지키지 않았고 복직도 정규직화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투쟁은 길어졌다. 공장점거파업 이후 정규직노조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은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이하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에게 대량징계와 해고폭풍이 휩쓸었다.
이러한 가운데 사측과 유착한 한 집행부 임원이 간부들의 조합비 유용 등 비리사건을 ‘적절한’ 시점에 폭로하면서 비정규직지회의 조직력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집행부 사퇴 이후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했으나 지도력의 공백이 좀처럼 메워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현재 각 공장별·사업부별로 선전전 및 집회 등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하나로 모이지 못한 채 각자 분투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속노조는 여전히 현대자동차지부 눈치를 보며 방관하고 현대자동차지부(이하 ‘현대차지부’)는 자기 말에 따르라며 협박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관리자들이 노조를 탈퇴하라며 회유하거나 탄압하는 부당노동행위가 만연하다. 물량싸움도 여전해 보수적인 정규직 대의원들이 자기 선거구의 조합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은 나몰라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대량징계는 아산공장으로 확산되었고 전주공장에도 징계가 예고되어 있다.
그러나 조직력의 붕괴는 단순히 ‘징계’와 ‘비리사건’ 때문이 아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현대차비정규직 투쟁에 함께해 온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성웅 부지회장이 기로에 서 있는 이 투쟁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기고해 주셨다.
첫 번째 글은 1공장점거투쟁을 중심으로 현대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두 번째 글에서는 집행부 선거를 앞둔 현 시점에서 현대차비정규직 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한 방향과 제언이 담겨있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주]

 

 

노동자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고 그들의 창조적 열정과 계급적 태도, 단호한 직접행동을 담는 노동자계급의 대중운동이며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활력을 대의기구로 제도화하지 않는 노동자계급의 영속적인 자기결정운동이다.
풍부한 대화와 토론, 비판적 활력 속에서만 노동자민주주의는 생존할 수 있고 노동자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자본의 유연화 공세에 맞설 수 있는 창조적 열정과 직접행동이 성장할 수 있다. 이는 좀더 인간적이고 보다 민주적이며 더욱 문화적인 지도력의 구성,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지도력의 구성을 의미한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지도력의 구성은 곧 혁명정당 건설로 요약된다.
차이 속에서 소통을 확장하고 협력을 생산하는 힘을 성장시키는 비판적이고 문화적인 노동자계급의 역량만이 관료주의를 넘어설 수 있고 이경훈 집행부의 파업파괴행위에 맞서 싸울 수 있다. 비판적이고 문화적인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구성하는 힘이 바로 노동자민주주의이며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투쟁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이미 “새로운 사람”들이다. 생존을 위해 정규직과 경쟁하고 동료와 경쟁하고 심지어 동지와 경쟁했던 과거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아니다. 현대차비정규직 조합원들은 자본의 탄압 속에서 태어났고 성장한, 이제는 자본이 두려워하는 새로운 사람들이다.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치떨리는 경쟁의 시간과 단절했고 비정규직노동자들도 단결할 수 있고 공장을 멈출 수 있으며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가졌던 그 감동의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현대차비정규직노동자들은 1공장점거파업을 사수하고 2공장, 3공장으로 파업을 확대하기 위해 맞아도 맞아도 투쟁의 현장으로 돌아왔으며 병원에 누워서라도 투쟁하겠다고 결의했던 위대한 용기와 직접행동의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동지들의 따뜻한 손을 기억해야 한다. 마주 잡은 따뜻한 손으로 함께 꿈꿨던 희망을,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족들까지 “동지라는 말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고 하지 않았는가? 동지들은 모든 것들을 변화시켰다. 동지라는 말이 포괄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은 지금 이 곳에 존재했던 “우리들의 꼬뮨”이었다.
문제는 이 꼬뮨의 생존기간이 대단히 짧았다는데 있다. 다시 문제는 지도력의 문제다. 개량주의로는 개량주의를 비판할 수 없고 조합주의로는 조합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 평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와 쟁대위의 조합주의적 지도력은 공장점거파업 기간 내내 불안정한 동거를 유지했고 공장점거파업의 해제와 현대차비정규직 특별교섭으로의 퇴행은 조합주의적 지도력이 평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를 배제시킨 결과물이었다.
현대차 자본은 공장점거파업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평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는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핵심적인 무기를 결여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투쟁하는 지도부를 건설하지 못했다.

 

 

△ 출처 : 참세상

 

평가토론의 부재와 평조합원 배제

특별교섭과 평화교섭 기간은 지회 내부의 동요와 분열을 조직하고 두려움을 생산하는 자본의 시간이었다. 현대차는 농성장을 해제하자마자 3공장 57명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체포영장 발부자들을 확대했으며 징계위를 소집했다. 손배가압류를 자행했다. 비정규직 특별교섭은 조직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자본의 무기였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쟁대위는 투쟁을 지속하고 유지하기 위한 체력이 고갈됐고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쟁대위는 백기투항 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평조합원들의 정규직화 투쟁에 대한 열망과 직접행동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조합원들은 화·수·목 출근투쟁, 중·야식선전전, 수요본관집회, 조합원 교육에 60%이상이 참여하고 있었고 정규직화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조직했다.
그러나 평조합원들에게도 약점은 존재했다. 조합주의적 지도력을 대체하지 못하고 여전히 조합주의적 지도력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상수 지회장을 넘어설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평조합원들은 자신들이 건설한 노동자민주주의의 힘을 확신하지 못했고 자신의 무기로 사용하는 법을 모르고 있었다.
지도력은 하나의 명령이 아니다. 지도력은 조합원들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풍부한 비판과 토론을 조직함으로써 협력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평조합원들의 계급적 활력과 노동자민주주의를 보존하고 그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워내는 것은 흔들리는 지도부를 쑤신다고 해서, 상황과 전술로 강제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을 통해 배웠듯이 집단적으로 모이고 비판과 토론을 조직하고 문제점을 진단하면서 오류를 극복하는 방법을 정식화하고 함께 결정하고 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이 집단적인 토론과 결정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투쟁의 주체가 성장하는 것이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쟁대위는 집단적인 토론을 조직할 의지가 없었다. 오히려 집단적인 토론이 생산적인 토론과 결의보다는 서로를 비난하고 물어뜯는 난장판이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이것은 지도부 스스로의 동요를 조합원들에게 손쉽게 전가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집단적인 투쟁 평가 작업은 삭제됐고 2차전술의 D-DAY를 잡고 참가인원을 소집해 상황과 전술일정을 잡는 것으로 대체됐다.
D-DAY는 평조합원들의 집단적인 토론과 공동결정으로부터 분리돼 있었다. 지도부가 수배상태이고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점을 고려할 수 있고 또한 D-DAY가 현대차자본이 설치한 평화교섭 기간이라는 통제장치를 파괴하고 평조합원들의 활력을 소집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D-DAY의 오류는 평조합원들이 건설한 노동자민주주의를 배제시켰다는 점이다. 조합원들을 D-DAY의 주체로 세우는 것은 자신들의 25일 동안의 파업투쟁에 대한 집단적인 평가작업과 결합해야 하고 노동자민주주의를 회복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는 8대요구안을 4대의제로 축소한 문제, 직접교섭이 아니라 지회의 독자성을 훼손하면서 3주체 논의에 참가한 교섭문제, 연대동지들에 대한 태도와 외부세력이데올로기, 쟁대위원들과 현장간부들의 동요를 강제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 이 전체 과정에서 등장했던 평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에 대한 평가와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들과 수단들을 구체화하는 집단적인 노력이야말로 평조합원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 방법이었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지도부는 평조합원들의 집단적인 힘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즉 집단적인 힘을 배제하고 소수의 결의결사한 동지들을 소집하는데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하락하는 투쟁동력을 방어하지 못했다.
소수의 결의한 동지들도 평조합원들의 집단적인 힘으로 지지되지 않으면 쉽게 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D-DAY는 집행될 수 없었고 오히려 지회 임원들의 자본과의 유착관계가 폭로됐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지도부는 설 휴가 전부터 회자됐던 자본과의 유착관계와 조합비 유용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D-DAY를 조직하는 것에 집착하고 이 투쟁으로 상황을 돌파하려 했다. 하지만 내부의 약점이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설령 투쟁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내부의 약점을 치유하지 않는 한 투쟁은 단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충분히 평가할 수 있다.

 

 

△ 출처 : 울산노동뉴스


비정규직 독자성 상실, 조합주의로의 경도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쟁대위는 지난 1월 평화교섭 기간에 갇혀 투쟁으로 전진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백기투항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동요했다. 이 동요를 끊어낸 것은 스스로의 결단이 아니라 1월25일 제출된 현대차노사합의안이었다. 현대차노사합의안은 지도부 30여명의 해고를 포함하고 있었고 집단소송 포기와 공정별·직무별 대표소송을 제기했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너무나 정당하게 “현대차노사합의안은 비정규직 조합원 다 죽이는 안”이라고 규정하고 2월7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소집해 “8대요구안 쟁취 2차파업”을 결의했다. 이상수 지회장은 조계사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전 임원들은 현대기아차본사 광고탑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2월14일 쟁대위를 소집해 "4대의제와 관련된 교섭에 더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2월17일 500여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한 파업출정식을 통해 8대요구안 쟁취 2차 파업을 공식화했다. 21일에는 부당징계에 맞선 4시간 부분파업도 조직했다.
그러나 2월21일 4시간 부분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대차는 지회 임원들의 조합비 유용 사실을 담은 유인물을 현장에 배포하고 곧바로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이와 동시에 현대차는 파업에 참가한 평조합원들까지 포함하는 무차별 대량징계를 자행했다. 각 공장 대표들, 대의원들, 현장위원들은 해고되거나 정직자로 현장 밖으로 내쫓기고 현장간부들이 없는 상황에서 현대차는 평조합원들에게 조끼를 벗도록 협박하고 “쓸래, 나갈래”라는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노조활동포기각서와 노조탈퇴를 강요했다.
현장은 가장 기본적인 노조활동조차 보장되지 않는 병영과 같은 통제가 강화됐고 평조합원들과 노조간부들의 분리가 완성됐다. 현대차는 내부 흔들기와 폭력적인 장계탄압을 효과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불법파견철폐 정규직화 투쟁의 동력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임원들의 조합비 유용건은 임원 각 개인들의 실수가 아니라 현대차지부의 대리교섭에 의해 훈육된 조합주의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노동조합의 현장활동은 부재했고 지회 임원들은 조합원들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조합비에 대해 너무나 손쉽게 손을 댔던 것이다.
지회 독자성의 유실과 대리교섭에의 거주, 현장활동의 부재는 부패하고 타락한 대공장 정규직 조합주의를 너무나 빠르게 배우는 늪지였다. 술과 사행성 오락, 도박과 성매매는 부패하고 타락한 대공장 조합주의적 활동의 형식이었고 자본의 매수의 방식이었다. 자본은 밥 한 끼에 정보를 수집하고 술 한 잔에 회유하며 도박과 성매매를 통해 영혼을 타락시킨다. 그리고 투쟁의 결정적 국면마다 도덕적 문제, 비리문제를 폭로하면서 투쟁을 파괴해왔다.
수많은 끈으로 연결된 자본과의 유착관계를 끊어내고 “노조의 독자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투쟁의 전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임원들의 조합비 유용 사건은 가르쳐주고 있다.

 

공개적·집단적 토론 통해 지도력 구성해야

그렇기 때문에 불법파견철폐, 정규직화 투쟁의 새로운 지도력을 구성하는 것은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임원 몇 명 뽑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회복하는 문제, “모든 시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는 8대요구안을 사수하는 문제, 현대차지부에 의한 대리교섭이 아니라 현대차와의 직접교섭을 쟁취하는 문제, 평조합원들의 직접민주주의를 건설하는 문제는 한 명의 뛰어난 지도자의 잘 짜여진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징계자들과 평조합원들이 참여하는 집단적인 토론과 논쟁의 결과이어야 하고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불법파견철폐, 정규직화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정치환경은 대단히 반동적이고 폭력적이다. 현대차는 징계탄압과 무력으로 투쟁동력을 진압하고 있고 현대차지부는 4월 가이드라인(정규직 임단협 전에 비정규직 특별교섭 마무리)을 제출하고 비정규직지회를 무장해제하려 하고 있다.
이미 대규모 징계가 강행됐기 때문에 4대의제 관련 교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남아 있는 문제는 해고의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만 남아 있다. 교섭에 들어가는 순간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임원들은 가장 앞장 서 투쟁했던 해고자들을 청산하도록 강요받게 될 것이고 지회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폭력적으로 진압될 수밖에 없는 힘의 관계 속에 있다.
누가 임원으로 선출되더라도 현대차와 현대차지부의 폭력적인 진압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객관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는 것은 징계자들 전체의 치열한 집단적인 토론과 논쟁을 통해 집행부의 임무와 역할에 대해 공동결정하고 임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집단적인 힘(공동책임)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의 집행부 선거과정은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는 투쟁의 목표를 분명하게 결정하고 “4대의제와 관련된 교섭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기존 쟁대위 방침을 재확인하며 현대차지부의 대리교섭이 아니라 8대요구안 쟁취를 위한 현대차와의 직접교섭 방침을 결정하는 집단적인 토론과 논쟁의 과정이어야 한다.
이 집단적인 토론과 논쟁 과정은 2차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집행부의 임무와 역할에 적합한 주체를 구성하는 수단이며 공동결정과 책임 속에서 지도력의 안정성을 갖추는 방법이기도 하다.

 

 

△ 현대차비정규직 조합원총회 (출처 : 울산노동뉴스)


2차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지도력을 건설하는 과정은 자본의 탄압을 견뎌야 할 뿐만 아니라 개량주의자들 노사협조주의자들 조합주의자들과의 투쟁일 수밖에 없다. 공장점거파업 과정과 점거해제 이후에 지회 내부의 경향들은 분화되고 있다. 불법파견철폐, 정규직화 투쟁의 지도력을 건설하는 문제, 임원선거는 이 경향과 경향의 투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경향과 경향의 대립이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어 있고 후보군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층중심의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선거준비는 임원후보군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평조합원들의 집단적인 힘을 구성하는 것을 배제한다.
따라서 임원 선거는 징계자 전체와 평조합원들이 참여하는 집단적인 토론을 조직하는 방식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 집단적인 토론을 통해 현시기 지도력의 성격, 임무와 역할에 대해 견해를 제출하고 공개적으로 논쟁을 조직해야 한다. 집행부의 성격과 임무와 역할을 둘러싼 경향과 경향의 공개적인 논쟁은 평조합원들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고 계급적 태도를 수립하도록 도울 수 있다. 평조합원들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능력이 있다.
평조합원들은 자본의 폭력적인 탄압을 견디면서도 4대의제를 쓰레기 안이라고 규정하며 계급적 태도를 수립했고 1공장점거파업을 사수하기 위해 폭력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생산타격투쟁을 제안하고 결정하고 집행했다. 그리고 지금 평조합원들은 지도력의 공백을 최소화하고 다시 한 번 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평조합원은 비록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내 곁에 현장간부들이 없는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조끼를 벗었지만 노조탈퇴를 거부하고 있고 벗은 조끼를 잘 개어 사물함에 보관하고 있다. 언제든지 다시 투쟁조끼를 입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평조합원들이 다시 투쟁조끼를 입는 날은 고통 없이 오지 않을 것이다. 내부혼란을 견디며 논쟁의 시간을 거쳐가야 한다. 충분히 고통스러워야 하고 구체적으로 사유해야 하며 자신의 계급적 태도를 취하고 결단해야 한다. 체념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불신과 분열을 넘어 그들이 다시 잡은 깃발은 조합주의도 아니고 개량주의도 아니며 평조합원들이 건설했던 노동자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혁명적 사회주의일 것이다. 지금 계급투쟁은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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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노동]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과 노동자민주주의-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성웅 부지회장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4/08 22:31
  • 수정일
    2011/04/08 22:54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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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을 통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불어나기 시작한 조합원 수는 그 속도만큼이나 큰 파괴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 자본은 계속 법을 지키지 않았고 복직도 정규직화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투쟁은 길어졌다. 공장점거파업 이후 정규직노조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은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이하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에게 대량징계와 해고폭풍이 휩쓸었다.
이러한 가운데 사측과 유착한 한 집행부 임원이 간부들의 조합비 유용 등 비리사건을 ‘적절한’ 시점에 폭로하면서 비정규직지회의 조직력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집행부 사퇴 이후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했으나 지도력의 공백이 좀처럼 메워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현재 각 공장별·사업부별로 선전전 및 집회 등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하나로 모이지 못한 채 각자 분투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속노조는 여전히 현대자동차지부 눈치를 보며 방관하고 현대자동차지부(이하 ‘현대차지부’)는 자기 말에 따르라며 협박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관리자들이 노조를 탈퇴하라며 회유하거나 탄압하는 부당노동행위가 만연하다. 물량싸움도 여전해 보수적인 정규직 대의원들이 자기 선거구의 조합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은 나몰라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대량징계는 아산공장으로 확산되었고 전주공장에도 징계가 예고되어 있다.
그러나 조직력의 붕괴는 단순히 ‘징계’와 ‘비리사건’ 때문이 아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현대차비정규직 투쟁에 함께해 온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성웅 부지회장이 기로에 서 있는 이 투쟁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기고해 주셨다.
첫 번째 글은 1공장점거투쟁을 중심으로 현대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두 번째 글에서는 집행부 선거를 앞둔 현 시점에서 현대차비정규직 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한 방향과 제언이 담겨있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주]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현대차자본이 설치해 놓은 ‘현대차비정규직 특별교섭’이라는 덫에 걸려 동요하면서 공장점거파업을 통해 솟구쳤던 계급적 활력을 유실하기 시작했고, 현대차의 잘 기획된 작품인 지회 임원들의 조합비 유용과 횡령 사건으로 조직력의 대부분을 유실했다. 불법파견철폐, 정규직화 투쟁은 투쟁이 시작되기 전으로 뒷걸음질 치는 듯이 보인다.
불법파견철폐, 정규직화 투쟁은 적이 강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적에 맞서 계급투쟁을 지속하고 유지하기 위한 지도력이 취약했기 때문에 퇴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평조합원들이 스스로 투쟁하는 지도력을 건설하지 않는 한, 공장점거파업에서 등장했던 오류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도력은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류로부터 배우고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정식화하기 위한 집단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비로소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평조합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공장점거파업을 통해 배워야 한다.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은 모든 정치세력들의 말과 행동이 투명하게 드러남으로써 평조합원들이 자신의 부족했던 경험을 보충하고 학습했을 뿐만 아니라 투쟁을 지속하고 유지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배우는 교육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평조합원들은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투쟁의 출발점을 스스로 새롭게 창출해야 하며 불법파견철폐, 정규직화 투쟁이 다시 현장을 조직하고 자본의 유연화 공세에 맞서 계급투쟁의 신호탄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자신의 집단적인 협력을 통해 조성해야 한다.

 

공장점거파업 해체한 3주체회의

3주체회의(금속노조,현대차지부, 현대차비정규직3지회)는 공장점거파업을 무장해제하기 위한 자본의 바리케이트였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평조합원들은 공장점거파업의 마지막 날에 이르러 “이경훈을 넘어야 현대자본과 맞짱 뜰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른다. 이러한 자각은 공장점거파업의 운명을 요약하고 있다. 이경훈을 의식적으로 넘어서려 하지 않고 어쨌든 이경훈을 불파투쟁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이경훈 활용론”은 좀더 노골적이거나 보다 은폐된 형태로 존재했지만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지도부와 평조합원들, 개량주의 정치와 중도주의 정치까지 공유하고 있었던 남한 노동운동의 정치적 현주소였다. 이경훈 활용론의 구체적인 수단은 3주체회의였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현대차비정규직3지회가 참여하는 일명 “3주체회의”는 현대차자본의 무자비한 폭력과 탄압이 정점에 달하고 이에 황인화 조합원이 분신으로 항거했던 투쟁 직후에 태어났다.

 

 

△ 공장점거파업을 해체시칸 3주체회의 (출처 : 울산노동뉴스))

황인화 동지는 “비정규직 철폐, 무슨 일이 있어도 싸우자, 노동자는 하나다 투쟁!” 의식이 남아있는 그 순간조차도 조합원들에게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는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을 호소하고 정규직 조합원들과 전국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연대를 호소했다.
황인화 동지의 분신 직후에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민주노총 울산본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대표자들이 참여한 대책회의의 결론은 “흥분하는 조합원들을 자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대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지도부의 방침을 기다렸지만 지도부의 방침은 투쟁이 아니라 투쟁의 자제, 조용한 촛불문화제가 다였다. 1공장점거파업을 사수하기 위한 직접행동은 등장하지 않았다.
흥분하는 조합원들을 유능하게 자제시킨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노동조합 관료들은 투쟁을 수습하고 공장점거파업을 해제시키기 위한 계획에 착수한다. 11월22일 울산에서 열린 금속노조 대의원대회는 즉각적인 전면총파업이 아니라 “구사대와 공권력 진압시”라는 단서조항을 달아 전면총파업을 결정하고 이조차 12월1일까지 유보시킨다.
금속노조 박유기 집행부가 12월1일까지 총파업을 유보한 것은 현대차지부 이경훈 지부장의 노골적인 파업파괴선동 ― “총파업 때리면 이 싸움 3일 안에 박살난다...조합원총회 통해 분명히 물어야 한다” ― 에 대한 화답이자 굴종이었고 12월1일까지 현대차와의 교섭국면을 여는 일에 집중하고 공장점거파업을 수습하기 위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황인화 동지의 분신 이전까지 현대차지부는 금속노조와 현대차비정규직 3지회가 요구했던 공동투쟁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제3자였을 뿐이다. 현대차 이경훈 집행부는 2010년 11월18일 공문을 통해 “비정규직 불법파견 문제는...현대차지부와 진행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불법파견철폐 정규직화 투쟁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이경훈 지부장은 황인화 동지의 분신 이후에야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경훈 지부장은 11월22일 금속노조 대의원대회에 참가해 파업파괴행위를 노골적으로 선동했고 23일 기자회견을 통해 중재안을 던지고 24일 3주체회의를 소집한다. 그리고 24일 3주체회의 결과는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는 8대요구안을 폐기시키고 손배가압류 최소화 등 ‘현안문제’ 해결로 후퇴시킨 것이었다.
현대차지부 이경훈 지부장이 소집한 3주체회의는 황인화 조합원의 분신 이후 흥분하는 조합원들을 자제시키고 공장점거파업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성격을 갖는다. 12월9일 농성이 해제되기 전까지 3주체회의가 한 역할은 “공장점거파업의 통제와 해체”였고 그 결과는 현대차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이었다.
현대차와 현대차지부는 하나로 통합됐다. 현대차지부는 현대차를 대신해 외부세력이데올로기를 선동하며 해고자는 조합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농성장에서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권우상 전 연대노조 사무국장을 강금해 폭행했다. 현대차지부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농성장을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여 농성장을 통제하고 고립시켰다.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던 조합원들에게 농성장해제를 김밥 한 줄로 협박했고 밖에서는 아름다운 연대로 포장했다. 이경훈 집행부는 공장점거파업을 해체하기 위해 대단히 ‘계급적’으로 투쟁했고 마침내 노사평화를 이끌어냈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 울산본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1공장거점파업장으로부터 투쟁을 확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협하고 중재하고 조정하고 수습해 투쟁을 마무리하는 데 적극적인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공황기, 개량주의자들과 노동조합관료들의 역할은 생존권적 요구에 나서는 현장조합원들의 투쟁을 통제하고 파괴함으로써 자본가계급에게 협력하는 일이었다.
공장점거파업 속에서 어용과 민주의 경계는 사라졌고 노동조합관료제(개량정당과 관료적 산별노조의 결합)로 통합됐다. 노동조합관료제는 현 시기 “반혁명이자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이고 자본가계급이 지배자로 존재하는 수단”이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현대차와 한 몸이 돼 노골적으로 파업파괴행위를 조직했던 이경훈 집행부와 이에 굴종하고 타협하고 중재하고 조정하고 수습해 투쟁을 해체시키려 했던 개량주의자들과 노동조합관료들을 폭로하고 이에 맞서 투쟁해야 했다.
하지만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쟁대위는 평조합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장점거파업을 통제하고 해체하려 했던 3주체회의에 참가했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쟁대위가 3주체회의에 참가한 것은 11월17일 쟁대위 회의를 통해 결정한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현대차가 조건 없이 교섭에 임할 것을 요구한다”는 “직접교섭” 방침을 스스로 폐기한 것이었고 공장점거투쟁을 파괴하기 위한 이경훈 집행부의 협박 앞에 굴종한 것이었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쟁대위가 3주체회의에 참가한 것은 공장점거파업을 무장해제하는 첫걸음이었다.
개량주의자들, 노사협조주의자들, 조합주의자들은 “지금 당장 모든 사내하청의 정규직화는 불가능하다. 교섭을 통해 현안문제부터 풀어가면서 정규직화는 장기적 과제로 가져가자”고 선동했다. 교섭을 미끼로 농성장을 해제하려 했다. 현대차자본이 노동운동 내부로 파견한 이경훈 집행부의 파업파괴 프로그램에 금속노조, 민주노총울산본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은 손을 들어 중재자로 참여했고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쟁대위는 수줍게 끌려갔다.
“이경훈 활용론”의 결과는 무엇인가? 농성장의 강제해산이었다. 파업의 무기가 사라지자 3공장 비정규직노동자들은 해고됐고 체포영장발부자는 늘어났으며 징계위가 소집되고 손배가압류가 집행됐다. 공장점거파업의 파괴였고 노사평화였다. “이경훈 활용론”은 공장점거파업을 해체시키기 위한 개량주의자, 조합주의자들의 슬로건이었다.

 

 

△ 출처 : 울산노동뉴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평조합원들이 건설한 노동자민주주의

이경훈을 넘는 것은 관료주의를 넘는 것이고 관료주의를 넘는 것은 부르주아 정치를 넘는 것이다. 관료주의는 부르주아의 정치이다. 부르주아 정치는 비판과 토론이 억압된 명령의 질서이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하고 철저하게 배제된다. 비판과 토론이 억압될수록 정치적 수동성이 강화되고 위계적 질서와 관료적인 명령이 결합한다. 차이는 제도화되어 억압은 강화된다. 대화가 죽은 자리에 조합주의(노사협조주의)와 관료주의가 굳건하게 자리 잡는다. 명령과 통제가 모두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의 관료적 명령과 통제를 뚫고 일어선 대중적 파업투쟁이 현대차비정규직 평조합원들의 공장점거파업이고 그들이 이룬 정치적 이름이 노동자민주주의였다.
현대차비정규직노동자들은 신차가 나올 때마다 해고됐다. “자른다 자른다는 이야기만 듣고 살아왔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로 헐뜯고 근속(입사역순)을 가지고 서로 싸웠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현대차의 해고방침을 “입사역순, 조합원 우선 고용보장” 방침으로 받아들였고 조합원들조차 누가 피켓을 많이 들었고 집회에 많이 참석했는가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됐다.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의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치떨리는 경쟁”과 단절하고 싶다는 절박한 요구,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박하지만 절박한 요구였다.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은 하나의 계획에 의한 일의 순서와 절차를 뛰어넘는 대단히 특이한 활력으로 구성됐다.
현대차비정규직노동자들의 25일간의 공장점거파업은 절차와 과정으로 굳어진 정규직 교섭질서를 한꺼번에 뛰어넘었다. 현대차비정규직노동자들은 자본의 지불능력이나 교섭절차와 기술이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생활 그 자체의 고통”이었으며 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 불법파견철폐 정규직화 투쟁이었다. 당연히 자본의 지불능력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고 지금 이 곳에서 실현돼야 했으며 이를 위해 머리로 생각하고 고민했던 모든 투쟁의 수단들을 한꺼번에 집행해버린 것이다. 현대차와 노동조합관료들이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과감하게 그리고 대단히 빠른 속도로 투쟁을 조직했던 것이다.
현대차비정규직 평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는 어떻게 구성됐는가? 그것은 관료적 명령과 통제를 아래로부터의 비판과 토론으로 대체했고 비판과 토론을 도입하는 수단이 바로 1공장거점파업 농성장총회, 비거점파업 조합원총회, 각 공장별 조합원총회, 공장별 분임조회의였다.
현대차비정규직 평조합원들은 비판과 토론의 민주적인 기구를 통해 쟁점에 대해서, 요구안에 대해서, 전술에 대해서 자기 손을 들어 발언했고 견해를 제출했으며 때로는 논쟁하고 때로는 설득하면서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와 전투적 전술을 유지하고 사수하려 했다.
평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는 자신의 권리를 위임하지 않는 자기결정과 직접행동을 발전시켰다. 평조합원들의 자기결정과 직접행동은 대의제 속에 뿌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관료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의기구로 우회하지 않고 토론과 결정과 집행의 연속적인 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비판과 토론, 결정과 집행에 따른 직접행동(행동통일과 규율)이 평조합원들이 이룬 노동자민주주의의 구체적 형상이었다.
현대차비정규직 평조합원들은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는 자신들의 절박한 생활적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자본의 이윤을 뿌리로부터 파괴하는 공장점거파업을 머뭇거림도 없이 과감하게 단행했고 공장점거파업을 해체시키기 위한 개량주의자들, 노사협조주의자들, 조합주의자들과 계급투쟁을 조직했다. 평조합원들의 투쟁은 책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절박한 생활상의 요구는 계급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평조합원들은 자신의 민주적 기관을 통해 현대자본과 개량주의 조합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지금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는 요구는 불가능하다. 단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에 맞서 “이 안은 쓰레기 안”이라고 찢어버리면서 투쟁했고 이경훈 지부장이 밥 가지고 장난칠 때 “차라리 굶자”고 결의하며 농성장을 사수하려 했다.
또 평조합원들은 1공장점거파업을 사수하기 위해 “1공장 동지들에게 한 끼 밥보다도 오늘이든 내일이든 라인을 끊어주는 것이 더욱 힘나게 하는 것이다. 2공장, 3공장 생산타격 주게 되면 1공장 거점파업 동지들이 힘이 날 것”이라며 파업의 확대를 제기하고 생산타격투쟁을 결의하고 집행했다.
이것은 불법파견 철폐, 정규직화 투쟁의 요구와 전술문제를 둘러싼 계급투쟁이었다. 평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는 계급적 태도를 취하고 전투적 행동을 이끌어내는 협력의 공간이었다.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는 평조합원들의 요구는 850만 전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고 법률적 가이드라인 안에서 단계적 정규직화론을 제기했던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현대차비정규직회 지도부, 이 개량주의자들, 노사협조주의자들, 조합주의자들의 요구는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평조합원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통해서 계급투쟁을 조직했고 가장 계급적인 요구가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이끌어낸 다는 것을, 가장 계급적인 요구만이 노동자계급의 공동행동을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자본의 공세와 노조관료들의 파업파괴 행위에 맞서 계급적인 요구를 정식화하고 노동계급의 공동행동, 계급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 노동자민주주의다. 노동자민주주의는 절차적이고 형식적이며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노동조합의 운영이나 국가의 운영에 “직접적이고 더욱 결정적으로 참여하고 통제권을 행사하는 평등”을 의미한다.
현대차비정규직 평조합원들은 비판과 토론을 통해 지도부의 방침을 결정하는데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흔들리는 지도부를 강제했고 투쟁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했다. 노동자민주주의 속에서 평조합원들의 대중지성이 성장했고 자발성과 결단력, 창조력이 솟구쳐 올랐다. 이것이 25일 동안 공장점거파업이 유지될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이었다.

 

 

△ 공장점거파업이 한창이던 지난 11월22일 울산에서 열린 금속노조 대의원대회. 총파업은 통과되었지만 각종 단서와 현대차지부의 협박 속에 총파업은 실행되지 않았다. (출처 : 울산노동뉴스)

 

자발성과 의식성의 결합 - 지도력의 문제

 

투쟁의 실마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 투쟁의 모든 국면과 모든 순간에 이미 풀려나 움직이는 노동계급의 모든 힘을 당의 투쟁대오 속에서 실현되도록 정치투쟁전술을 계획하는 것, 사회민주당의 전술이 단호함과 예리함에 바탕을 두고 결정되고 그 단호함과 예리함이 실제 세력관계의 수준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며 오히려 그 세력관계에 앞서도록 하는 것, 이것이 대중파업 시기에 지도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도는 어느 정도 저절로 기술적인 지도로 바뀐다. 사회민주당의 일관되고 단호하며 선진적인 전술은 대중들 속에 안정감과 자기확신, 투쟁의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과소평가한 것에 뿌리를 둔 유약하고 머뭇거리는 전술은 대중에게 해롭고 혼란스러운 결과를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로자의 <대중파업론> 중에서)

 

자발성은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지만 또한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 과정에서 확인한 것은 완전한 자발성이란 없었다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자발성조차 의식성과의 결합 속에서만 구현되었다.
평조합원들의 민주적 기관은 아래로부터의 자연발생적인 요구와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지도부에 결합하고 있었던 한 사회주의자의 계획에 의해 대단히 의식적으로 조직됐다.
평조합원들은 자신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자 가슴 속에 담아준 자신의 이야기, 분노와 희망, 투쟁과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평조합원들의 발언은 대단히 짧았지만 명쾌했다. 군더더기 없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었고 투쟁의 요구와 전술방향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평조합원들의 발언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선동이었다. 계획 속에서 평조합원들의 자발성이 성장했으며 이 자발적 활력이 흔들리는 지도부를 강제하는 의식성을 구현했다.
동성기업 투쟁은 평조합원들의 자발성과 지도부의 의식성이 조화롭게 결합된 투쟁이었다. “시트조합원은 신규업체와의 근로계약을 거부한다. 사측이 시트조합원을 공격(해고)할 시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즉각 쟁의행위에 돌입한다”는 현대차비정규직지회의 단호한 방침은 동성기업조합원들에게 두려움을 넘어 안정감을 갖도록 했고 동성기업 조합원들에게 놀라울 정도의 투쟁 결의를 불러일으켰다.
동성기업 조합원들은 11월15일 머뭇거림 없이 담벼락을 넘어 라인점거투쟁을 조직했다. 동성기업 조합원들의 라인점거투쟁은 직선으로 1공장점거투쟁까지 이어졌고 이 직선 위에는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평조합원들의 열정과 창조적인 직접행동이 있었다.
11월15일 현대비정규직지회 1,100여명의 평조합원들은 1공장 CTS공정에 모였다. 전면파업을 통해 만난 1,100여명의 평조합원들, 가슴 벅찬 감동이 그들을 휘감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치떨리는 경쟁”과 단절했다. 집단적인 힘 속에서 그들은 미래를 꿈꿨다. 현대차자본의 목젖을 힘껏 움켜쥐었다.
공장이 멈췄다. 정규직화 투쟁에 대한 자기확신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들을 휘감고 있었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지도부도 전혀 예상치 못한 평조합원들의 놀랍고 경이로운 자발성은 바로 지도부의 과감한 전술방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조합원들의 ‘자발적 의식성’은 조직운동으로 구현되지 못했다. 평조합원들은 “우리는 싸울 준비가 돼 있다. 지도부는 흔들리지 마라”고 호소했지 자기 스스로 흔들리는 지도부를 대신해 현장투쟁지도부로 뛰어오르기 위한 용기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평조합원들의 민주주의는 흔들리는 지도부를 대신해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이것이 평조합원들의 자발성의 약점이었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2차파업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과제다.

 

 

△ 출처 : 울산노동뉴스

평조합원들의 자발성의 최대치는 흔들리는 지도부가 올바른 방침을 내리도록 하고 지침이 결정되면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따르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지도부가 흔들릴 때 평조합원들도 흔들렸고 나의 동지들이 현대차지부 상집간부들에게 폭행당하면서 끌려나갈 때 지도부가 침묵하자 평조합원들도 침묵했다.
평조합원들의 거듭된 호소와 비판에도 지도부가 반복적으로 흔들리고 오늘 지침이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바뀌고 평조합원들의 통제를 벗어나자 평조합원들의 계급적 활력은 불균등해지기 시작했고 이탈자가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현대자본의 폭력은 하나의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동자민주주의는 자발성과 의식성의 결합, 평조합원들의 계급적 태도와 전투적 행동을 조직하는 투쟁하는 지도부의 결합이라는 것을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은 가르쳐주고 있다. 이는 곧 평조합원들의 대중지성의 발전, 자발성과 창조력의 성장은 의식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자신의 투쟁하는 지도부를 건설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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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FocuS]원자력의 값싼 전기에 언제까지 취해 있을 것인가?-_원자력 르네상스에 대한 성찰과 대안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4/08 22:29
  • 수정일
    2011/04/08 22:50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진과 해일로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면서 노출된 방사능에 전세계가 벌벌 떨고 있다. 최근 한반도의 공기와 비에서도 제논과 세슘, 방사능요오드 등의 방사능물질이 연이어 검출되었다. 편서풍의 영향으로 한반도는 방사능으로부터 절대 안전하다고 호언장담하던 남한정부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이번에 측정된 방사능 수치가 연간 방사선량 한도의 몇만분의 일이라며 혼란을 수습하기에 급급하다.
어느 에너지보다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선전되었던 원자력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 핵을 ‘통제’할 수 있다던 지배계급의 주장은 악명높은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비롯하여 끊이지 않고 또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통해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해 고도로 발전한 산업시설을 가동시키고 밤낮없이 풍요로운 전기를 제공하는 원자력의 생산력을 당장에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운동세력 역시 원자력의 편의와 재앙의 잠재력을 양날의 칼처럼 여기면서 ‘잘’ 통제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통제를 해야한다 등의 주장을 펼쳐왔다.
그러나 원자력강국을 자임하던 일본도 예기치 않은 상황에 굴복했고 결국 수조 원의 비용과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한다는 최후의 방법을 택했다. 대중들은 지배계급의 정보 비공개에 대해 점점 불만이 커지고 있으며 그들의 위기대처능력을 의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 정치단체를 포함한 대부분의 진보진영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기존의 애매모호한 입장들을 뒤집고 핵발전 완전폐기로 입장을 선회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환경운동을 하는 문주란 동지가 최근 불거지고 있는 원자력발전의 실태와 위험성을 은폐하려는 지배계급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글을 기고해 주셨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주]

 

 3월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는 2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15미터의 쓰나미는 사람들의 목숨과 함께 집, 경작지와 공장. 도로 등 모든 것을 순식간에 삼켜버렸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갈 곳을 잃은 채 추위와 배고픔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자가 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일본인들 그리고 세계인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원전폭발이다. 후쿠시마 원전의 1~4호기가 모두 폭발하고 방사성물질이 유출됐다. 사람들이 피폭됐고 우유와 시금치 등 식료품과 수돗물에서 방사능이 검출됐으며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방사능 수치가 올라가기도 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그 피해가 어디에까지 얼마나 미칠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는 “현 상황은 6등급에 가깝지만, 불행하게도 7등급까지 갈 것이다”라며 체르노빌의 악몽을 되살렸다.

 

말로만 “안전한” 원자력

원자력이 안전하고 깨끗하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이 있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티비 광고 속 원자력은 시청자의 마음까지 맑게 할 정도다. 정부 당국자나 핵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그려지는 원자력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안전 그 자체다. 그러나 이들 원자력마피아의 주옥같은 거짓말 뒤에 감춰진 진실은 다름 아닌 원자력사고와 은폐, 그리고 그로 인한 끔찍한 고통의 역사다.
원전선진국이라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일본의 사건과 사고만으로도 그 참혹함은 끝을 알 수 없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원전에서 노심이 공기 중에 노출됐고 연료봉의 50%가 바닥에 녹아 흘러내렸다. 미국 전체 유아 평균사망률은 감소하고 있었던 시기였지만 사고 발생 후 4개월 동안 펜실베이니아 주 전체 유아 사망률은 16% 정도, 메릴랜드는 41%, 뉴욕은 16% 상승했다. 캘리포니아 랜초세코 원전 역시 가동 후 지역에 선천성 기형으로 인한 사망률이 크게 증가했다.

 

 

원전사고의 대표적 사례인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를 자랑스러워”하던 주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을 가져다 줬다. 「유엔보고서를 반박하다」라는 보고서는 방사능에 의한 암 사망자가 6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그리고 러시아 3개국에서만 약 840만 명의 사람들이 방사선에 피폭됐고 영유아의 3분의 1 이상이 갑상선암 징후를 보였으며 남한 면적의 1.5배가 넘는 155,000㎢의 지역이 오염됐다. 벨라루스는 오염에서 자유로운 곳이 국토의 1%밖에 되지 않고, 경작지의 25%가 작물 생산이 영영 불가능해졌으며 갑상선암으로 사망하는 어린이의 수가 매년 1,000명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 예산의 25%를 체르노빌 재앙으로 인한 후유증을 완화하는 데 써야 할 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2008년 우라늄 용액이 강과 지하수로 흘러들어갔고 2009년 예상치 않은 곳에서 플루토늄이 발견되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장정욱 마쓰야마대 교수는 “일본에서 도쿄전력이 도요타와 함께 엄청난 정치적 힘, 막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 9개 전력이 힘을 합해도 도쿄전력에 대항하지 못할 정도의 파워”라면서 “그동안 사고 정보를 많이 감추고 있었다. 상습범이다. 1987년부터 15년 동안 중요한 사고를 감춘 것이 2002년 들통나서 한꺼번에 재점검을 하느라 총 17개의 원전발전소가 몽땅 멈춘 일도 있었다”고 했다.
남한의 원전운영은 더 형편없다. 지난 1978년 고리 1호기가 가동된 이후 2009년까지 고장으로 인해 원자력발전소 가동이 정지된 건수가 423건이나 되고 고장 외의 이유로 원자로가 멈춘 것도 2000년 이래 140회에 이른다. 발전 중단으로 인한 손실은 1999년까지 총 982억 원 이상이다. 2002년 울진 원전의 증기발생기관이 절단돼 냉각수가 45톤 이상 누출됐고 스리마일 사고처럼 큰 사고가 터질 뻔 했지만 월드컵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은폐되기도 했다. 2003년 영광 원전의 방사능 누출사고 실태조사에서는 근무자들이 방사능 오염 사실도 모른 채 오염된 물을 마셨는가 하면 방사선 감지기가 경보를 울렸는데도 5일간 오염된 물 3,500톤을 그대로 바다에 흘려보낸 사실이 확인됐다.

 

원자력, 과연 구원의 메시아인가

이번 일본 원전폭발 직전까지 체르노빌 원전사고 후 주춤했던 원자력은 다시 부흥기를 맞고 있는 듯했다. 화석연료의 고갈과 기후변화의 대안은 원자력 밖에 없다는 신화가 연출됐다. 만화영화 속의 원자력에너지로 힘이 솟는 메칸더V가 지구의 평화를 지켜줄 것이란 믿음이, 원자력에 대한 우상화가, 깨끗하고 안전하며 지속적이고 무한한 에너지의 신화가 시대를 지배했다.
원자력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청정에너지, 녹색에너지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원자력이 기후변화에 대한 대안이라고 한다. 물론 원전 가동에 따른 전기 생산 시 온실가스 배출은 없으나 우라늄의 채굴, 정련, 농축, 핵연료성형가공, 운반, 원전 건설 및 폐로, 해체, 핵폐기물의 처리 및 운송과 저장 등의 과정에서 화석연료가 쓰이고 있다. 독일 환경연구소가 원자력발전의 전 과정 중 현재 계산 가능한 부분만 고려한 것에 따르더라도, 전기 1kWh 생산 시 33g, 연간 250,000톤의 온실가스를 간접적으로 배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07년 기준, 전 세계 전체 소비에너지의 2.3%, 전력생산의 13.7%의 비중을 갖고 있는 원자력이 기후변화를 막는 수단이 되려면 전 세계 소비에너지의 11.6%, 전력생산의 76.8%를 차지하는 화석연료를 최소한 50년 안에 대체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50년간 1주일에 하나씩 원전을 짓고 자동차와 비행기, 난방 등을 전면적으로 전기에너지 시스템으로 바꿔야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원자력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원전 건설은 화석연료를 대체하거나 그 사용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 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라늄 매장량의 한계로 원자력도 점차 비싼 에너지가 될 수밖에 없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종착역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원자력발전의 결과로 생성되는 핵폐기물의 존재는 결코 원자력이 청정에너지, 안전한 에너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에 대해 아직까지 그 어느 나라도, 그 누구도 확실한 처리방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처리방식이 없다는 것은 그 비용 역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으로 원자력에 대한 연구에서 원전건설, 해체 및 핵폐기물 처리와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원전사고에 따른 피해까지 더한다면 결국 경제적으로도 원자력은 그 대가를 얼마나 치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재앙일 뿐이다.

 

 

원자력마피아의 독점과 비밀주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때도 그렇고 이번 일본 원전사고 역시 마찬가지로 원자력에 대한 독점과 비밀주의가 더 큰 피해를 가져왔다. 방사능 유출은 절대 없을 것이란 일본 정부의 말은 사흘도 되지 않아 거짓말이 돼버렸다. 사고 초기 원전을 잃지 않기 위해 해수 냉각을 회피했고 결국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는 비난이 도쿄전력에게 쏟아지고 있다. 소수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되면서도 사고에 의한 피해는 다수의 시민이 고스란히 감수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은 연구에서 건설과 운영, 폐기의 전 과정을 볼 때 막대한 위험과 책임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지고 안정성 문제로 사회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항상 테러의 대상의 된다. 뿐만 아니라 우라늄 농축과 폐연료 재처리과정에서 핵무기원료 생산가능성이 있어 국가차원의 직간접적 지원과 특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업, 국가관료, 학자 등으로 형성된 원자력마피아가 원자력운영을 독점해 왔다.
원자력마피아는 언제나 원자력이 깨끗하고 안전하며 쉽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인 듯 말한다. 일본 원전폭발로 유럽에서는 반핵 시위가 번지고 독일 정부 등이 원자력 조기폐기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작 일본의 이웃 나라인 남한에서는 “우리는 절대 안전하다”는 말만 난무하고 있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프랑스원자력산업회의와 협정을 통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민이해 증진과 원자력안전 홍보협력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러시아 정부, 일본 정부, 도쿄전력이 해왔던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남한정부는 편서풍 때문에 남한은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재 13기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고 동안지역에 50기의 원전을 추가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원전에 대해 얼마나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고 안전을 장담할 수 있을까? 이번 일본 원전폭발 사고에서 알 수 있듯 원자력은 개인, 집단, 국가 심지어 세계인 모두가 운영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하며 통제를 벗어난 순간 그 피해는 국경과 세대를 넘어 수천 킬로미터, 수백 년에 걸쳐 지속될 수밖에 없다. 21기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는 남한은 고리, 월성에서 원전 수명연장, 신규 건설을 진행하고 있는데 실제 그 안정성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고 있지 않다. 정부는 남한의 원전은 일본의 것과 방식이 다르고 보다 안전하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장정욱 교수는 “이번 사고의 경우 문제는 비상 상황에서 전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기종이나 저 기종이나 파이프가 끊어지면 똑같다. 이번 같은 사고라면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기종마다 다 장단점이 있다. 일본도 예전엔 절대 사고 안 일어난다고 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3월 프레스센타에서 있었던 토론회에서 핵전문가라는 사람이  “신규원전은 진도 7.5의 내진설계를 하고 있어 괜찮다”고 했다가 그럼 기존 원전은 대책이 있냐는 질문에 “진도 6.5 이상 지진이 오지 않길 기도하자”고 해 참석자들을 어이 없게 하기도 했다.
현재 남한에서 원자력 연구개발에 투자되는 정부투자금은 2007년 기준으로 2731억원에 이르고 이외에도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전기요금 중 일부로 조성된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원자력 홍보비 명목으로 매년 110억 원 정도의 금액을 티비 등의 광고를 통해 원자력의 이미지를 재고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원자력에 대한 이 같은 특혜로 결국 재생에너지에 대한 연구는 싹을 틔우기가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 출처 : 환경운동연합

 

핵 없는 세상으로

 지난 1월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이 최근 전력수요 급증으로 인한 대책의 일환으로 전기난방 자제를 당부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한파가 계속 되면서 연일 최대전력수요를 갱신하게 됐고 예비전력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시민들의 실천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지식경제부는 이를 발표하면서 2009년 한파로 전기소비가 급증해 프랑스가 취한 전력공급 차단을 예로 들어 국민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남한의 전력난은 모두, 전력정책의 방향을 수요관리를 통한 효율증대보다 과도한 수요예측을 통해 일단 대규모 대용량 원자력과 화력발전소를 짓고 보자는 식의 무책임한 전력 정책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일단 가동하면 1년 이상 멈추기 힘든 원자력발전소의 특성과 저장하기 어려운 교류전기의 특성상 생산된 전기는 최대한 소비를 해야 했으므로 80년대에 10년간 9차례에 걸쳐 전기요금을 계속 인하함으로써 전력낭비를 유도해 온 결과다. 원자력은 전력 정책을 과잉공급이 수요를 창출하고, 증가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다시 공급설비를 증가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트린다.
OECD의 30개 회원국 가운데 처음부터 전력생산에 원자력을 이용하지 않은 국가는 오스트레일리아, 덴마크, 그리스,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뉴질랜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터키, 폴란드 등 총 11개 국가이고 국민투표나 의회를 통해 원자력을 단계적으로 폐쇄하기로 결정한 국가는 오스트리아(1978년), 스웨덴(1980년), 이탈리아(1980년), 네덜란드(1994년), 벨기에(1999), 독일(2000년), 스페인(2004년) 등 총 7개국이 있다.
남한처럼 에너지 해외의존도가 74.5%로 높고 에너지를 많이 쓰는 제조업이 경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 2002년 원자력법을 통해 신규 원전건설을 불허했다. 2009년 들어선 보수정권이 원전수명을 늘리기는 했지만 원전폐쇄의 기본 방향은 변하지 않았으며 이번 일본 원전폭발 사건 이후 원자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시점을 2017년으로 앞당기겠다고 발표했다. 1차 에너지 중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을 2030년 30%, 2050년 60%로 끌어올리고 전력 중 재생에너지 비중을 2020년 35%, 2030년 50%, 2050년 80%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또 재생에너지 확대와 동시에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작업을 추진한다. 1차 에너지 소비는 2008년에 견줘 2020년까지 20% 줄이고 2050년엔 50% 줄일 계획이다. 전력 소비도 2050년까지 20% 줄인다. 에너지 효율은 주택의 개량을 늘려나가는 것을 포함해 에너지 생산성을 해마다 2.1% 높여 나간다. 주마다 도입연도가 다르지만 프랑크푸르트 주의 경우 2009년 3월부터 모든 신축 공공건물은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단위면적당 연간 냉난방에너지가 15kWh 이하)로 건설하는 것을 의무화했고 2015년까지 독일 내 모든 신축건물은 패시브 하우스로 지어야 한다. 그리고 기존 건물은 저에너지 건물로 개선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 기준은 40~70kWh/㎡다.
남한의 경우 작년에 도입하기로 돼있던 건물의 에너지소비총량제도가 올 7월에 연면적 1만㎡(약 3천평)이상의 건물에 한해서 시행하는 것으로 미뤄졌다. 한편, 2010년부터 공공기관에서 건설하는 공동주택, 즉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짓는 아파트는 에너지효율등급 2등급을 의무화하도록 했고 공공기관에서 건설하는 신축 업무용 건물은 에너지효율등급 1등급을 의무화하도록 했는데 2등급은 연간 사용하는 에너지가 단위 면적당 300~350kWh, 1등급은 300kWh 미만으로 패시브 하우스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원자력의 값싼 전기에 취해 프랑스와 같은 전력난이나 일본과 같은 방사선 누출의 위험을 지고 갈 것인가, 위험한 원자력을 폐기하고 건강한 에너지로 전환할 것인가는 행동의 문제다. 원자력마피아는 스스로 지금껏 누렸던 특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원전폭발 이후 10만 명이 반핵시위에 나섰던 독일인들의 의식적인 노력과 저항 없었다면 독일은 아직도 원자력의 환영을 뒤쫓고 있을 것이다.
남한정부는 일본 원전폭발에서 아무것도 배우려하지 않고 원전확대에 더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폐연료 재처리에 대한 욕심때문에 더 위험한 늪 속으로 한반도를 밀어 넣고 있다. 지반 침하로 해수에 의한 침수와 방사능 누출이 뻔히 예측되고 있는 가운데 경주의 방폐장 건설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원자력마피아의 살 길일 수는 있어도 지구 위 생명체들을 위태롭게 할 뿐이다.
수명이 다 된 원전의 연장운행과 신규 원전건설 그리고 원전수출을 중단 시키고 가동 중인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기해야 한다. 원자력에 대한 거짓된 환상을 유포하고 있는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 대한 정부의 모든 지원과 특혜를 중단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에너지 효율을 떨어뜨리는 원자력이 아니라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하며 안전하고 분산적인, 지역별 · 건물별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면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한 재생에너지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무한 에너지라는 헛된 욕심을 버리고 과도한 에너지 소비를 줄이며 패시브 하우스와 같이 에너지 사용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

 

 

△ 출처 : 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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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국가의 탄압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4/08 19:59
  • 수정일
    2011/04/08 19:5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5~6년 동안 사회주의 운동이 공개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과거 공유되었던 수사에 대한 원칙이나 경찰탄압에 대한 방어원칙이 많은 부분 망각되었다. 하지만 <사노련>을 “국가변란 선전·선동 단체”로 규정한 이번 유죄 판결은 실제로 단순한 문필과 선전활동에 대한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적용의 선례가 될 소지가 농후해 이후 유사 사건들이 발생할 우려를 낳고 있다.
<사노련> 유죄판결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국가권력의 탄압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방식을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관용의 자유

군사독재 시절 남한의 반정부세력은 공권력의 가혹한 탄압 때문에 대개 비밀스럽게 활동해야 했다.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에 기원을 둔 국보법은 이러한 탄압의 가장 유력한 무기로 기능했다.
이런 상황은 87년 민주화 투쟁 이후에도 별반 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90년부터 92년 사이 세 차례나 공권력의 침탈을 받은 끝에 백태웅, 박노해, 남진현 등 체포된 지도부가 국보법에 의해 최고 형량인 무기징역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 받았다.
이런 엄혹한 탄압과 더불어, 동구권의 붕괴로 인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환멸, 김영삼 정권의 등장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확대 등은 많은 급진적 정치단체들을 합법정당 운동이나 공개단체와 같은 제도권으로 들어서게 했다.
하지만 국보법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반체제적 성격을 띤 운동에 대해서는 정파를 막론하고 국보법에 의한 탄압이 가해졌다. 혁명적 사회주의를 걸고 비공개·비합법 활동을 하던 단체들에 대한 국보법 탄압 역시 9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93년과 94년 <혁명적국제사회주의노동자동맹(‘혁사노’)>와 <노동자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노해투사’)> 등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단체들이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받았다. 95년과 96년에는 <학생사회주의자 기간대오>, <사회주의학생연맹> 사건 등이 벌어졌고, 97년과 98년에도 <전국학생연대>, <북부노동자회>, <관악노동청년회> 등 많은 단체들이 국보법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통일운동세력과는 무관한 단체들이었다. 심지어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국제사회주의자(IS)> 역시 90년대 내내 주기적인 탄압에 시달렸다.
때문에 제도적 틀 안에서, 공개적인 운동에서 사회주의는 공공연하게 선동될 수 없었다. 사실상 2000년대 초까지 운동진영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은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들의 불법 출판물 외에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2003년 노무현 정권의 등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1년 내부문건과 교육자료가 문제가 되어 기소된 좌파 성향의 의료운동 단체 <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연합(진보의련)> 사건같은 예외가 있긴 했지만 친북단체가 아니면 탄압 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점차 공유되기 시작했다. (<진보의련> 사건도 결국 2007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와 함께 비합법 사회주의 그룹들이 합법주의 세력이라고 비판하던 정치단체들 역시 점차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혁명적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비공개활동을 하던 활동가 단체들도 공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대중의 지지로부터 생겨나는 자유가 아닌 자유주의자들의 관용에 의한 불안정한 자유였다. 정치적 자유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은 갈수록 왜소해졌다. 과거 십여 년 간 지배계급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암묵적인 관용을 베풀어온 것은 사실 사회주의 운동이 현실에 영향을 줄 만한 세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용에 의한 자유조차도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함께 박탈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동시에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계속 축소되고 있던 일선 공안기관들이 일제히 활발한 활동에 나섰다. 운동단체들이 자주 이용하는 인쇄소와 대학교 주변 사회과학 서점에 대한 사찰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어진 촛불투쟁 국면에서 공권력의 전방위적인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결국 촛불투쟁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지난 2008년 8월 <사노련> 사건이 벌어졌다.


탄압에 대한 대응원칙의 재확인 필요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간 비교적 자유로웠던 활동은 활동가들로 하여금 공개 활동의 자유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도록 만든 듯하다. 필자가 만난 모 활동가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과거 비공개 활동 시절의 원칙들이 이제는 아무 소용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공개성이라는 미명아래 기본적인 자기방어를 포기하는 것이다.
정보기술이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때문에 생기는 빈틈도 있다. 과거 사건들의 경우 공안기관들은 미행과 도감청 등 물리적인 감시행위를 주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최근 몇몇 사건에서 드러나는 현상은 공안기관의 감시 방식이 미행, 도감청 등 직접 발품을 파는 방식에서 휴대폰, 인터넷 감시 등으로 무게중심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공안기관이 그것만으로 충분히 필요한 신상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정보를 주의해서 관리한다면 공안기관에 의해 불시에 체포·연행되는 일은 어느 정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미행과 도·감청은 충분히 주의할 경우 사전에 감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권력의 추적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다면 침탈로 인한 타격을 축소하고 사건에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된다. 물론 국가권력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공권력의 수사를 보다 힘들게 만드는 것은 운동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운동진영은 공권력의 탄압에 대한 자기 방어와 수사에 대한 대응을 위헤 많은 원칙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이 지나치게 경직되고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다. 오히려 일부 단체의 지도부는 조직원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공개활동 영역의 폭이 크게 늘어나면서 보안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 예를 들어 가명 사용, 미행에 대한 체크 등을 쓸모없는 일이라고 노골적으로 비웃고, 공권력의 수사를 먼 나라 이야기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만연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공권력의 탄압에 대한 올바른 대응으로 보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벌어졌지만 이런 문제가 공개적으로 평가가 되는 자리는 없었다.
또한 경찰이나 검찰 등 수사기관과 사상·이론 논쟁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오래 전에 합의된 지점이다. 그러나 근래들어 사건의 쟁점을 가지고 경찰이나 검사와 논쟁이나 토론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활동가들도 간혹 눈에 띤다. 이것이 그저 풍문일 뿐이라면 다행이지만 사실이라면 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사에 대한 대응문제를 두고 2009년 <사노련>과 <다함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이러한 이유로 반드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정치적 문제를 경찰 수사에 대한 대처와 함께 묶어서 제기한 <다함께>의 제기 방식은 오히려 논점을 흐린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당시 <다함께>가 수사 대응에 대해서 문제제기한 원칙은 그 맥락과 상관없이 모두 옳은 말이었고 여전히 다시 확인되어야할 지점들이다.
당시 <다함께>가 주요하게 제기한 문제는 수사에 대한 협조 거부와 묵비 문제였다. 수사에 대한 협조 거부란 경찰의 출두요구와 수사과정에 협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노련> 사건에서 갑작스러운 체포·연행으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 경찰의 압수물품 봉인해제 요구에 응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고 당사자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경찰의 압수물품 봉인해제 요구에 거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태도이다. 하지만 경찰의 출두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 같다. 노동현장의 활동가들은 경찰의 소환요구에 대해 최대한 거부하다가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치·시민단체에 활동가들이 오히려 별 생각없이 그냥 출두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물론 무조건 경찰의 소환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운동적인 판단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사회주의 운동을 한다는 활동가들이 별 고민 없이 자의적인 판단으로 경찰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출두 문제에 대한 대응은 운동단체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직업적인 운동가들,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구속·수배·체포·연행을 일상적으로 각오하고 활동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최근 들어 경찰은 ‘피내사자’라는 법에도 없는 이상한 말을 만들어서 출두요구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형사법상 ‘피의자’가 아닌 이상 경찰의 출두요구에 응할 법적 의무가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운동진영에서 원칙을 세우고 단호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시민으로서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또 하나 주요하게 제기된 논점 중 하나는 ‘묵비’에 대한 문제였다. 수사기관의 소환요구에 불가피하게 응할 경우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바로 묵비의 원칙이다.
<다함께>는 묵비를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사노련>은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묵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운동사회에서 묵비란 <다함께>의 주장처럼 적당히 둘러대거나 핵심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진술을 거부하는 것, 묵비권의 사용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즉, 묵비란 현재 남한과 같이 진술거부권이 법제도적으로 보장된 국가에서는 수사기관의 모든 질문에 대해 진술거부권을 사용하는 것이다.
현재 남한보타 훨씬 엄혹한 상황이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묵비를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1903년 2차 당대회에서 경찰의 심문에 대해 어떤 증언도 거부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다함께>의 지적대로 이런 원칙은 러시아 반정부 운동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둘러대는 행위, 수사관과의 대화는 오히려 더 큰 해악을 낳았다는 점을 반정부 투쟁과정에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남한의 운동경험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비합법 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은 조직을 지키려는 의지가 과도한 나머지, 오히려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를 행사하는데 소홀했다. 하지만 진술거부권을 사용하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더 사건이 커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대충 둘러대는 것은 오히려 항상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대공분실 등 수사기관에 끌려가 수사를 받는 사람은 외부와 소통이 끊어진 고립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 속에서 여러 가지 편의적인 판단을 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장 수사관의 추궁을 모면해보려고 이것저것 둘러대다 보면 말꼬리를 잡혀 더욱 집요한 추궁을 당하게 될 뿐이다.
더욱이 여러 명이 함께 체포되어 조사를 받을 경우 누가 잡혔는지도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격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진술한 말이 꼬투리가 되어 결국 더 많은 것을 진술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므로 한번 말문을 떼기 시작하면 더 큰 곤란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가 제정 러시아나 군사독재 시절에나 유효한 낡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한 공권력 종사자가 했던 충고를 되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직검사로 재직하며 “수사 받는 법”이란 칼럼을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다 옷을 벗게 된 금태섭 씨는 “유리한 주장 하려 하다보면 자칫 함정에 빠진다”며 “피의자에게 아무 것도 하지마라”고 권고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억울함을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설사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유리한 점을 찾아내서 수사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파멸로 이끄는 길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 공개가 원칙인 재판과는 달리 수사를 받는 피의자는 충분한 정보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야 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하면 상처를 입는다. 가만히 있으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다. 더구나 수사기관에는 피의자에게 유리한 사실까지 찾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는 것만은 피하라. 상황을 파악한 이후에도 수사에 대응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다. … 수사란 다른 사람이 과거에 저지른 행동을 밝혀내는 것이다. 신이 아닌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협조 없이 범죄를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검사나 경찰관은 피의자로부터 어떤 반응이라도 끌어내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한다. 여기에 반응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어떤 문명국에서도 피의자에게 수사에 협조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수사기관의 행동에 섣불리 대응하지 않고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피의자의 권리이며 이러한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현명하게 수사를 받는 제1의 원칙이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수사관과는 어떤 토론도, 어떤 대화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사상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수사과정이 아니라 법정에서 투쟁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수사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법적으로 보장된 진술거부권에 기초하여 오로지 묵비로 대응하는 것뿐이다.


활동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사회주의 운동의 본질은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다. 그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아무리 확장된다고 할지라도 사회주의 운동은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남한의 국보법은 그러한 점에서 가장 기형적이고 악랄한 형태의 제도일 뿐이다.
국보법과 같은 형태만 아닐 뿐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 역시 법제도적으로 반체제적 사상과 운동을 탄압을 할 수 있게끔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그래서 소위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조직에서도 가명을 사용하는 활동가들이 많다. 미국에서도 9·11 사태 이후 국토안보법이 통과되면서 반정부 활동의 여지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이번 <사노련> 유죄판결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국가기관의 무죄판결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 물론 무죄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구성이 폭로될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법정투쟁에서 무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운동이 실제로 체제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때, 국가기구는 이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그람시는 현직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즘 집권 이후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수감되었다.
지금 비록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 없음으로 인해 어느 정도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지만 과연 혁명적 시기, 사회적 불안과 혼란의 시기에도 그럴 것인가? 혁명적인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쉽게 연행되거나 체포된다면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그러한 시기에도 경찰의 소환요구에 응할 것인가?
촛불투쟁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적극적으로 결합하던 시민 중에도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국가기구의 탄압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방어수단이다.
하지만 오히려 소위 운동진영에서 수사에 대비하는 활동방식을 비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운동진영 내부의 이런 경향은 위험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과신으로 보인다. 이런 태도는 실제로 공권력의 탄압이 본격화되었을 때 지레 놀라 되려 활동이 크게 위축되는 역편향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자본의 세계화로 국민국가 내에서 정치적 합의 정도가 날로 떨어지고 있고, 점차 전쟁과 혁명의 시기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오늘날 민주주의적 자유는 갈수록 제약될 가능성이 높다. 활동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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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기획][인터뷰]사노련 탄압에 맞서 국제연대 조직한 로렌 골드너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4/08 19:57
  • 수정일
    2011/04/08 19:57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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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점점 위험해지고 있다

 

어떤 계기로 이번 국제연대 활동을 조직하게 되었나

집회를 해보자는 생각은 원래 <혁명정당을 향한 동맹 (LRP, League for the Revolutionary Party)> 동지들이 낸 것이었다. 나는 <사노련> 활동가 8인을 위한 인터넷 캠페인을 조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회 조직은 <혁명정당을 향한 동맹>과 내가 공동 편집자로 참여하고 있는 온라인 저널 <반란자 통신 (Insurgent Notes)>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했다. 우리는 주로 인터넷으로 뉴욕의 활동가들에게 집회 계획을 널리 알렸다.

국제연대에 참여해서 직접 활동한 동지들은 어떤 동지들인가

뉴욕에서 1월24일은 기온이 영하 10도에 이르는 몹시 추운 날이었다. 바람도 불었다. 집회는 오후 5시 반부터 7시까지 진행되었고, 우리는 브로드웨이 32번가에 있는 “코리안타운”에서 유인물을 돌렸다. 하지만 코리안타운에 있는 한국인들은 대개 부르주아들이라 우리가 한국어로 피켓과 유인물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집회의 참여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나 좌익공산주의 조직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최대 20여명 정도가 참여했다. 하지만 분명 추위 때문에 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도 사회주의자에 대한 법적 탄압이 있나

유럽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은 9/11 사태 이후 국토보안법(Homeland Security Law)이 의회를 통과했다. “테러리즘”에 대한 규정이 계속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미국 제 3세계주의자들(맑스-레닌주의 그룹)>의 회원 몇 명이 작년 9월 이란 대통령 아흐마디네자드가 UN 연설을 하러 뉴욕에 왔을 때 그를 만났다. 그 직후 그들 중 일부가 “테러리즘 지원” 혐의로 체포되었다. 상황은 점점 더 위험해 지고 있다.


사노련 재판은 2심이 진행될 예정이다. 모금활동 등을 계획한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활동계획은 어떠한가

<혁명정당을 향한 동맹>과 <반란자 통신>을 대표해서 내가 주로 인터넷을 통해 모금을 했다. 세계 곳곳에서 기부금이 들어왔다. 지금은 딱히 다른 계획이 없다.

남한에서 그동안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적인 연대가 거의 없었다. 이번에 나타난 <사노련> 탄압에 대한 연대는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연대의 실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남한 사회주의자들과 해외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연대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불행하게도 지금 중동의 위기와 일본 핵발전소의 원자로 용해가 미국과 한국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덮고 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연대는 대개 국제적인 관심을 끄는 구체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사안에 쏠리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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