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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보다 형량이 강화된 사노련 2심 재판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12/23 13:29
  • 수정일
    2011/12/27 12:1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정치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

 


지난 주 금요일 12월16일 (舊)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 사건에 대한 2심 재판 선고 공판이 열렸다. 올해  2월24일 열린 1심에서 재판부는 사노련을 국가변란 선전·선동 단체라고 규정하고 오세철·양준석·양효식·최영익 등 4명의 활동가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남궁원·박준선·오민규·정원현 등 4명의 활동가들에게는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 집시법 위반을 덧붙여 모두에게 벌금 50만원 형을 부과했다.

1심 재판 이후 피고인 측과 검찰 측은 쌍방 모두 항소를 제기했다. 하지만 이번 2심에서 재판부는 피고인 측의 항소 이유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검찰의 항소 이유만 일방적으로 수용하여 오히려 형량이 더 강화된 판결을 내렸다.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재판부


2심에서 변호인 측은 첫째 검찰이 공소장 일본주의를 위반했다는 점, 둘째 국가변란 선전·선동 단체는 별개의 반국가 단체를 전제한 것이나 사노련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변란 선전·선동 단체로 볼 수 없다는 점, 셋째 사노련이 무장봉기·폭력혁명 등을 언급하긴 했으나 국가 존립과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실질적 위협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넷째 박준선 활동가의 2009년 집시법 위반 판결은 집회만 참가했을 뿐 불법 시위로 보기 어렵다는 점 등 네 가지 이유를 들어 항소를 제기했다. 

공소장 일본주의는 공소를 제기할 때에 법관이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공소장 하나만을 법원에 제출하고 기타의 서류나 증거물을 첨부·제출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검찰은 주로 사노련이 발간한 문서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양의 증거자료들을 공소장과 함께 제출했기 때문에 변호인 측은 1심 때부터 검찰이 공소장 일본주의 원칙을 위반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1심과 동일하게 변호인의 주장에 이유가 없다고 이를 기각했다. 

변호인 측이 무죄의 주요 논리로 제기하여 재판의 가장 큰 쟁점으로 부각된 국가보안법 상 국가변란 선전·선동은 북한이라는 특정한 반국가 단체를 전제한 것이라는 논리에 대해서 재판부는 반국가단체와 국가변란 선전·선동 단체는 별개로 성립될 수 있고 북한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체제를 부정하는 표현물을 제작·반포할 경우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것이라는 1심 판결을 재확인했다. 

사노련이 무장봉기·폭력혁명 등을 언급하긴 했으나 국가 존립과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실질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사노련이 일부 매체를 통해 제기한 무장봉기·폭력혁명 등이 크지는 않아도 사회 체제에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며 변호인 측의 주장을 기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재판부의 주장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는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박준선 활동가의 불법시위 혐의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어디까지가 집회이고 어디까지가 시위인지 애매한 문제에 대해 기준을 정해주기도 했는데 이 역시 굉장히 자의적인 판단 기준이었다. 재판부는 피켓을 들고 같은 구호를 제창한 것은 위세를 보인 것이기 때문에 집회가 아니라 시위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아무 소리 않고 아무 주장 없이 조용히 모여 있는 것만이 집회이고 피켓을 들거나 구호를 외치면 시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예배도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제창해 위세를 떨치는 것이므로 시위로 규정해야 마땅하다.
 

더욱 확대된 국가보안법 적용


변호인 측의 항소이유가 몽땅 기각된 반면 검찰 측의 항소 이유는 대부분 수용되었다. 검찰은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던 여러 문서들에 대해 이것들 역시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내용이라고 주장했는데 재판부는 반드시 무장봉기·폭력혁명·의회주의 반대 등의 단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단체 결성 배경과 전반 맥락을 살펴볼 때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했다고 볼 이유가 충분하다며 항소에 근거가 있다고 인정했다.

또 1심에서 일부 기사만이 이적표현물이라고 규정된 각종 매체(소책자, 신문 등)들에 대해 2심 재판부는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글이 일부라 할지라도 그 글이 담겨있는 매체 전체를 이적 표현물로 규정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의 이러한 태도는 1심의 판결을 더욱 확대 적용한 것이다.

재판부는 형량이 너무 가볍다는 검찰 측 주장도 받아들였다. 단지 사노련 규모가 60여 명에 불과했고 수사과정에서 피고인 다수가 사노련을 탈퇴했으며 그 이후 실질적인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사노련이 직접 불법집회를 조직하고 주최한 일은 없으며 활동이 주로 토론회와 매체 발간에 한정되어 실제로 이들이 체제에 미치는 위험성이 크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여 각기 징역형의 형량을 6개월씩만 늘리겠다고 판결을 내렸다. 

결국 2심에서는 검찰의 주장이 대부분 관철되었고 1심 판결이 그대로 유지된 것은 양효식·양준석·정원현 활동가에 대한 촛불집회 당시 집시법 위반 혐의가 무죄라는 것뿐이었다.
 

국가보안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재판부의 판결은 1심 재판부의 판결을 확인하고 더욱 확대한 것이다. 1심 판결이 조직의 결성이나 정치활동이 아니라 단순한 문필활동만으로 사회주의자들을 처벌할 수 있게 한 판례였다면 이번 2심은 반드시 체제 전복을 표현하는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사회주의 사상과 정치를 담은 모든 문서는 국가보안법 적용을 받을 수 게끔 법 적용을 확대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사노련 재판은 8·90년대와 달리 사회주의 정치활동으로 인신의 구속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사회주의 운동 세력이 미약하기 때문일 뿐 사회주의자들이 실질적인 정치세력이 되는 순간 과거와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송통심위')는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여러 인터넷 사이트들에 올라온 글을 삭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방송통심위는 국가보안법 위반이 명확할 경우 별도의 재판 없이 곧바로 방송과 온라인상의 표현물들을 검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자들의 매체활동은 커다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호인 측이 무죄판결을 위해 여러 논리를 제시했지만 이번 재판 결과는 국가보안법이 존치되는 한 현행 국가보안법 아래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단순한 문필활동 마저도 무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대법원 항소가 남았지만 1·2심 결과와 대법원에서 형량이 아니라 유·무죄만 판단한다는 점을 볼 때 대법원 판결 역시 유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12월15일 1인 시위에 동참하고 있는 박정근 동지

 

 

국가보안법에 맞서는 사회주의자들의 공동행동
 

이번 재판이 있기 전 사노련 공대위는 사노련 사건 무죄판결을 주장하는 공동행동을 조직했다. 사노련 공대위는 2심 재판 전 날인 12월15일을 공동행동의 날로 잡아 국회, 법원, 방송통심위원회 등지에서 1인시위를 조직하고 법원 앞 기자회견과 대한문 앞에서 집회를 개최했으며 선고 공판이 있는 다음 날에는 방청투쟁을 조직했다.  

그러나 1심에서 이미 집행유예를 받는 상황이라 2심에서 법정 구속되거나 할 확률은 낮은 편으로 생각되었는지 공동행동에 대한 참여나 관심은 저조한 편이었다. 실제로 일정에 참여한 것은 직접 피해자가 있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노혁추), 혁명적노동자당건설현장투쟁위원회(노건투) 등 조직의 관계자들과 사회주의노동자신문(사노신), 노동해방실천연대(해방연대) 등 공대위 참여조직에서도 일부뿐이었다. 물론 이런 공동행동을 조직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정치·사회·노동 단체로 확장되지 못하고 공대위 내부 사람들로만 한정된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사노련 공대위 공동행동이 진행되던 날에 최근 트위터 글 때문에 국가보안법 탄압을 받은 박정근 동지가 대한문 앞에서 1인시위 활동에 동참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다른 자발적인 흐름과 연대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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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정치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 사건이 오는 12월16일 재판2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지난 2월24일 1심 재판부는 오세철 활동가 등 4명의 활동가들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나머지 4명의 활동가들에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바 있다. 또한 집시법 위반을 덧붙여 8명의 활동가 모두에게 벌금 50만원 형을 부과했다. 유죄 선고를 받은 8명의 활동가들은 1심 판결에 불복해 곧바로 항소했다.

 

이명박 정권 들어 공안사건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명박은 정권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어김없이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공안탄압을 자행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08년에는 46건이 입건됐지만 2009년 57건, 2010년 97건으로 입건자 수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 대상은 국가권력이 전통적으로 탄압해왔던 통일운동 세력에 제한되지 않았다. 사노련 사건 또한 지난 2008년 촛불투쟁 이후 공안탄압의 일환으로 기획된 사건이었다.

 

2011년 들어 이명박 정권의 공안탄압은 더욱 더 노골화 되었다. 지난 6월 반값 등록금 집회를 시작으로 희망버스, 제주 강정마을, 그리고 최근의 한미FTA 반대투쟁까지 대중의 직접행동이 활성화 되고 2008년 촛불의 기억, 촛불의 투쟁을 떠올릴 때마다 이명박 정권은 거리에 나선 노동자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연행․구속은 물론 추후에 마구잡이식으로 소환장을 발부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공안기관은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사상의 통제를 꾀하며 정권을 향한 비판과 불만의 목소리를 억압하려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구태의연한 탄압 수법에 직접 거리로 나서고 있는 노동자시민들은 더 이상 움츠려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정권의 위협을 조롱하며, 지금의 공권력이 진정 누구를 위한 공권력인지 되묻고 있다. 특히 국가보안법이 사상의 자유를 넘어 사람들의 표현방식 하나하나까지 검열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악용되자, 12월1일 국가보안법 제정일에 맞춰 지난 12월3일에는 ‘2011 뉴타운 간첩파티’와 같은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사상의 자유는 당연한 권리에 속한다. 누구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권리의 문제이기 이전에 상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위 민주공화국이라는 남한에서 국가권력은 이러한 상식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다. 언제나 케케묵은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며 가장 기본적인 정치사상의 자유마저 묵살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적 기본권의 후퇴가 횡행하는 오늘날, 사노련 사건의 재판2심 선고가 지니는 의미는 결코 작을 수 없다. 만일 사노련 사건에 대해 또 한 번의 유죄 판결이 나온다면 그것은 이 사회에서 정치사상의 자유가 결국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가권력 스스로 폭로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노련 사건을 불법의 대상으로 단죄하려는 공권력의 탄압공세에 맞서 사회주의를 내건 정치사상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를 향한 투쟁은 결코 포기될 수 없다.

 

2008년 12월 12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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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닥치고 FTA반대’가 아니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12/02 14:20
  • 수정일
    2011/12/02 14:20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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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 집회가 끝난 후 시위대 내부의 폭행 사건이 주요 언론과 트위터를 통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친노무현 성향의 한 배우가 오마이뉴스의 손병관 기자를 폭행한 사건이었다. 오마이뉴스의 손 기자가 평소에 노무현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것이 폭행의 빌미가 된 것으로 보인다. 폭행사건 자체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폭행을 한 가해자가 상당수의 사람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몇 건의 폭행사건 중 가장 크게 이슈화된 사건은 11월 25일 발생했다. 진보신당 수행비서가 반어법을 사용한 발언을 했는데 그 발언이 FTA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고 오해를 받았다. 발언자는 중년남성으로부터 멱살을 잡힌 채 무대에서 끌어내려졌다. 이에 더해 지잡동(진보적지방잡대동맹)의 한 활동가가 노무현과 나꼼수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연이은 비슷한 내용의 사건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행위나 해프닝으로 여기려고 한다. 하지만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사건 직후 가해자의 행동을 옹호하고 피해자에게는 맞아도 싸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반응은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단순히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점, 그것은 집회참가자 내부에 존재하는 불만이 특정 시점에서 터져 나온 것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닥치고 FTA 반대?

 

현재 FTA 반대 집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다. 심지어 노무현 정권 당시에 한미 FTA를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민주당 혹은 국민참여당부터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FTA에 반대해왔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과 각종 정치단체들도 참가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에서 추진해왔던 FTA에 대한 평가 역시 다르다. 예전부터 한미 FTA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노무현의 FTA나 이명박의 FTA나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면 노무현의 FTA와 이명박의 FTA는 다르고 후자는 망국적 FTA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나는 꼼수다'의 출연진이 주로 이러한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집회 내부에서는 집회 참가자 내부의 차이와 노무현 전 정권에 대해 비판지점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분노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주로 노무현을 비판하는 사람들 혹은 급진적인 활동가들이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분노표출은 주로 '노무현을 비판하다니 한나라당과 다를 바가 없다'거나 '노무현을 비판할 거면 조중동으로 가라'는 내용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는 노무현 편과 이명박 편 혹은 반MB와 MB라는 단순한 이분법에 기초해있다. 이러한 이분법이 등장하게 된 것은 최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정치’의 내용과도 관련이 있다. 특히 ‘가카헌정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그 정치는 대의제 정치에서 훌륭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몇몇 정치인(혹은 몇몇 보수 인사)에 대한 분노와 조롱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몇몇 정치인들과는 반대로 노무현은 이명박과 대비되는 서민적인 이미지와 현 정권의 희생자로서 대중들이 구심점이 되고 있다. 정치의 내용 자체가 개별 정치인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협소화된 상황에서 노무현은 그 자체로 선이고 진보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은 어느새 '맞아도 싼 행위'가 되어버린다.

 

우리 닥치지 말고, 토론을 시작하자!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깰 수 있는 것은 결국 집회 참가자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의견개진에 대해 물리적인 폭력이 가해지는 것을 막고 공개적인 논쟁을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FTA를 추진한 세력에 대한 분노와 비판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에 대한 집단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시위의 시작일 뿐이다. 분노의 표출과 함께 서로의 차이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MB라는 개인에 대한 반정립에서 벗어날 때 새로운 사회와 정치에 대한 전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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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우리의 삶을 저들에게 내맡길 순 없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11/30 00:11
  • 수정일
    2011/12/02 14:22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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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참세상


지난 11월22일 한미FTA 비준안이 결국 국회에서 통과됐다. 모두의 예상대로 한나라당은 어김없이 날치기 수법을 꺼내들었다. 한나라당이 “국가 중대사”라고 그토록 강조해온 국제 통상조약인 한미FTA는 이처럼 ‘그들만의 리그’에서 제멋대로 처리되었다. 지난 2006년 2월 남한과 미국이 FTA 협상에 들어간 지 5년 9개월만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미FTA가 몰고 올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는 철저히 왜곡되거나 탄압당할 뿐이었다.

민주주의는 없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한나라당의 한미FTA 날치기 통과는 기존의 기습처리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한미FTA 비준안 처리에 앞서 ‘본회의 비공개 진행 동의안’부터 통과시켰다. 국회 본회의장의 모든 출입구는 봉쇄되었고, 영상중계를 위한 내부의 CCTV 작동도 멈춰졌다. 그리고 국회 의사봉의 소리가 울리기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집권 여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안건을 비공개 날치기로 처리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여의도 밀실처리의 대표 격으로 회자되는 지난 1996년 12월 노동법 날치기 때보다도 더 퇴행적인 것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성탄절 새벽 노동법을 기습적으로 처리했지만 그 과정을 적어도 언론에 노출시키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에 한나라당은 처음부터 ‘비공개’ 회의를 기획했다. 때문에 민주노동당 일부 당직자들이 본회의장의 유리로 된 출입구를 깨고 들어간 돌발 상황은 한나라당으로선 불시의 일격을 당한 격이었다. 국민의 위에서 군림하며 국민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려던 그들의 완전범죄에 흠집이 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취재진이 본회의장으로 진입하지 못했다면 한미FTA 처리 과정은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끝까지 비밀에 부쳐졌을 것이다.

파행을 겪으며 한미FTA가 국회를 통과했지만 이명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다행”을 외쳤다. “옳은 일에는 반대가 있어도 해야 한다”며 대국민 훈계도 잊지 않았다. 한나라당 대표 홍준표는 “국익을 위한 선택”이라며 합리화했고,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국회를 빠져나오다가 “매국노”라는 고함소리에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며 그들의 거사를 자축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렇듯 그 어디에서도 민주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뜩이나 이명박 정권의 독선과 일방주의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한미FTA 강행처리 소식에 11월22일 저녁 명동에서는 500여명의 시위대가 불과 30여분 만에 5000여명으로 확대됐다. 그만큼 한미FTA 후폭풍은 거셌지만 되돌아오는 것이라곤 공권력의 차디찬 물대포 세례였다.

정권의 위기, 체제의 위기

한미FTA에 항의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이명박 정권은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초겨울의 추위에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무자비하게 퍼부어댔다. 그리고는 집회 참가자들을 한 번에 이십여 명씩 연행해갔다. 사회 여론이 더 악화되자 기껏 한다는 게 물대포 사용을 자제하겠다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종로서장 폭행’을 이유로 언제든 경찰의 물리력을 행사하겠다며 시위대를 위협하고 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집회․시위의 자유와 같은 민주적 기본권은 철저히 묵살당하고 있다.

오히려 이명박은 한미FTA를 왜 반대하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지난 11월15일 국회를 찾은 이명박은 야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내가 나라 망치려고 하는 것은 아니잖으냐”며 구구절절 읊어댔다. 한미FTA 강행처리를 위한 정치적 명분을 쌓으려는 속셈이었지만 이것이 현 집권세력을 대표하는 이명박의 신념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11월29일 한미FTA 이행법안 서명으로 이명박의 신념은 다시 한 번 드러났다.

그런데 한미FTA에 매달린 건 비단 이명박만이 아니다. 한미FTA 반대 여론이 확산되자 여권 관계자들은 공공연히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노무현의 한미FTA’와 ‘이명박의 한미FTA’가 뭐가 다르냐며 되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미FTA 협상안의 내용을 뜯어보면 이명박 정권이 미국에 ‘퍼주기 협상’을 했다는 자동차 분야 재협상을 제외하곤 달라진 게 거의 없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은 재협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미FTA의 최대 수혜자로 거론되고 있다. 자동차의 수출 효과가 크지 않다는 반론 역시 국내 완성차 업체의 미국 현지생산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지 재협상 때문은 아니다. 쟁점으로 부각된 투자자국가소송제(ISD)도 이미 다 나온 이야기다. ISD를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가장 강력하게 옹호한 사람은 바로 노무현이었다.

때문에 민주당은 한미FTA 국회통과 국면에서 이른바 ‘노무현의 원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적전불열의 양상까지 보였다. 민주당 소속의 일부 지자체장들은 한미FTA를 대놓고 지지했고, 민주당 내 소위 협상파는 한나라당에 투항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손학규가 나서서 ‘한미FTA 비준저지’라는 당론을 강하게 밀어붙인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민주당은 한미FTA를 반대하는 제스처를 통해 지지율을 올리려 했을 뿐 적극적인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민주당의 이 같은 태도는 이명박 정권에 한미FTA의 국회비준을 사실상 방조하겠다고 하는 정치적 메시지와 같았고, 결국 한나라당이 11월22일 날치기 결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제도 정치권 전체에 대한 환멸과 민심이반이 분출하고 있다. 한미FTA 정국에서 한나라당은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했고,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더불어 공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도 정치권 세력들이 한미FTA와 같은 첨예한 갈등 사안을 조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졌다. 정권의 주인이 자유주의 세력이든 보수 세력이든 간에 이른바 1%가 아닌 99%에 해당하는 사회구성원 다수의 이해를 포섭하기란 불가능한 까닭이다.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사진출처 : 참세상


세계화의 덫

지난 1970년대 경제위기 이후 세계화가 본격화 되면서 세계시장의 힘은 더욱 커졌다. 전 세계를 무대로 휘젓고 다니는 거대 자본들의 덩치는 웬만한 국민국가의 경제규모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국민국가의 재량권을 뛰어넘는 초국적 자본의 이해와 사회구성원의 이해가 충돌할 경우 자본과 결탁되어 있는 국민국가 내 제도 정치권의 선택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국민국가 차원에서 대의제를 통해 사회경제적 대립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시스템 역시 점차 붕괴되어 왔다.

한미FTA 역시 그 배경에는 이와 같은 세계화된 거대 자본의 이해가 놓여 있으며, 마찬가지로 동일한 한계에 직면해 있다. 한미FTA는 그 본질상 제조업 분야에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남한 자본과 금융․서비스․농업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미국 자본의 이해가 상호 교환되는 것이다. 결국 남한의 어떤 집권세력도 자본의 이해에서 벗어나 한미FTA를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미FTA가 세계화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한미FTA로 인해 초래될 사회적 충격에서도 드러난다. 이명박 정권은 보수언론을 앞세워 “전기, 가스, 지하철, 의료보험료가 급등할 것이다” 하는 이른바 한미FTA ‘괴담’이 근거 없는 낭설이라 일축했다. 가스, 전력, 상수도 등 공공분야는 개방대상이 아니며 민영화는 물론 공공요금 폭등도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남한 내 공공․사회서비스 부문의 대부분은 민영화가 이미 된 상태다. 굳이 한미FTA를 통해 더 개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한의 소위 자발적 민영화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특히 IMF 경제위기를 거치며 김대중 정권 때부터 강하게 추진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한미FTA를 빌미삼아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조건을 완비하는 것이다. 즉, 자본의 이윤추구에 걸림돌이 되는 사회정책과 공공제도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것이다. 한미FTA를 비롯해 FTA의 핵심은 관세뿐 아니라 비관세 무역장벽의 일체를 없애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미 노무현 정권 때부터 FTA 도입을 상정한 사회적 재편은 강화되어 왔고 FTA는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기제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이명박 정권이 동북아 질서 속에서 각각 설정한 정권의 핵심과제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남한이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FTA를 받아들이고 더구나 그 전부터 자발적으로 민영화를 해왔다면 지금에 와서 정권의 명운을 걸고 다른 나라도 아니고 굳이 미국과 FTA를 체결하고자 하는 이유는 남한이 위치한 동북아 지역질서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수면 위로 떠오른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구도의 등장이 그것이다.

중국의 급부상을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한 노무현 정권은 집권 후반기에 들어 미국과의 정치경제적 협력 강화를 모색했다. 2006년 1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와 2월 한미FTA 협상 개시는 이러한 정황을 방증해준다. 현존하는 미국의 힘을 활용하여 대중국 견제에 나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어느 정도 군사적․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미국과 정치경제적인 협력관게를 강화하려 했다면, 이명박 정권의 한미FTA 추진은 친미 행보의 가속화로 볼 수 있다. 오바마 정권이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며 이전의 부시 정권과 마찬가지로 대중국 포위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자 여기에 적극적으로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미FTA에 따른 직접적인 사회적 고통은 당장 눈앞에 나타나진 않는다. 하지만 5년이고 10년이고 지난 다음에는 지금의 자본주의 시장질서가 한미FTA를 내세워 더욱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끔찍한 미래’가 현실로 등장할 수 있다. 또한 미중 간 신냉전 구도의 전개에 따라 사회구성원 전체가 누려야 할 평화와 안전의 요구는 그만큼 위협당할 수 있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미래가 자본의 이해와 이를 반영한 집권세력의 정책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촛불의 저항

실제로 한미FTA 반대집회에 참가한 다양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요구와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저당잡힌 미래’에 대한 분노만큼은 동일하게 표출하고 있다.

IMF 경제위기 이후 양극화의 심화 속에서 각종 사회적 폐해들은 누구라도 이미 생생히 체험해 왔다. 넘쳐나는 비정규직과 절망적인 청년실업, 그리고 치솟는 전세자금과 비싼 대학등록금에 불안한 노후까지.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고 갈수록 악화되기만 하는 상황 앞에서 사람들은 지금 직감적으로 한미FTA가 가중시킬 고통을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공감대는 지난 2008년 촛불투쟁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가장 대규모로 치러진 11월26일 한미FTA 반대집회에서는 세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고등학생의 참가자부터 ‘좋은 어버이들’ 깃발을 든 노년의 참가자까지 그야말로 다양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명박퇴진”, “비준무효”를 끊임없이 외쳤다.

이 같은 체험의 공유는 올해 들어서만 반값등록금 집회, 희망버스, 그리고 제주 강정마을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제는 한미FTA 반대집회에서 대중의 직접 행동이라는 그 힘이 다시금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위계와 경쟁의 질서가 아닌 연대와 상생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광장에서 자유로운 발언과 자유로운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정치,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이 있다. 대안은 대의제를 통해 대중의 여론을 포섭하고 지배분파들 간의 이해를 통합하는 구태의연한 제도 정치권에 있지 않다. 한미FTA 반대집회에 결집한 수많은 사람들의 항의는 이미 이러한 정치질서에 균열이 생겼음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새로운 대안은 능동적인 정치참여와 직접적인 의사표현을 공공연히 펼쳐내며 거리에서 함께 행동하고 함께 투쟁하는 노동자서민 그 자신이다.

물론 거리에서 제기되고 있는 정치적 요구는 아직 반MB 수준을 넘어서진 못하고 있다. 한미FTA 반대집회 역시 자유주의 세력이나 이들에 영합한 민주노동당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기에 앞서 현재 분출하고 있는 대중투쟁에 집중하고 그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미FTA과 같은 사안은 자본주의 세계질서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며 누가 집권하든지 간에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의 후퇴와 사회적 갈등은 더욱 첨예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소위 진보개혁 세력들의 실체와 한계도 명백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중투쟁의 광범위한 확산이며, 그것을 위한 적극적인 지지와 연대 그리고 직접적인 참여와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김성렬 기자 (tjdfuf@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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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의 다음 단계, 건물을 점령하라! 일터를 점령하라!

  • 분류
    국제
  • 등록일
    2011/11/25 13:39
  • 수정일
    2011/11/25 13:4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편집자 주 :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좌파 웹진 <반란자 통신 (Insurgent notes)>이 11월17일 뉴욕 집회에서 점령 운동에 관련해 배포한 유인물을 번역해서 싣는다. 본래 10월에 <반란자 통신>에서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로렌 골드너 동지와 점령운동 관련해서 인터뷰를 진행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게재가 어렵게 되어 이 글을 대신 번역해서 올린다. 번역 글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

 

점령 운동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났다. 포틀랜드 점령 운동에 대한 공격이 행해진 후, 현재 오클랜드와 맨하탄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니언스퀘어에서 열린 학생들의 대규모 집회와 폴리스퀘어에서 열린 노동자들의 집회는 늘어나고 있는 총파업 요구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새로운 국면으로 이행에는 겨울나기를 위해 건물로까지 점거를 확대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 넘어 노동계급이 현재의 체제를 멈출 수 있는 일터까지 점거가 확장되어야 한다. 이는 새로운 기반 위에서 이 사회의 관리를 접수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보다 진일보한 단계가 될 것이다. 오늘(11월17일) 그리고 앞으로의 행동주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지금은 뉴욕과 미국 전역의 점령 운동의 강점과 한계를 평가해 볼 때이다.


이 운동이 지난 40년 동안 미국의 거리에서 벌어진 투쟁 중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들불이 몇 주 만에 1000여 개의 도시로 퍼져나갔다는 것이 그를 증명해준다. 가끔 저항으로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참한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 들여왔다. 그러나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요구들”이 40년간의 사회적 경제적 비참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대중들의 현실로 만들었다. 정치인들, TV 유명인사들, 다양한 전문가들은 이제 갑자기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 자신들의 세상에 들어오기를 거부한 운동에 직면하여 회피할 겨를도 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이 운동의 주장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은 특정한 요구나 이데올로기, 지도자들에 한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며 이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함정에 빠지기에는 지난 수년 동안 벌어진 매일 매일의 사회현실이 이 운동을 위해 사람들을 너무나 잘 교육시켜 왔던 것이다. 이 운동의 기저에는 이 운동이 대표하고 있는 현실이 있다. 그 현실이란 바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쓰레기더미 위로 내몰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거부다. 운동을 요구사항의 긴 목록으로 한정짓는 것은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에 못미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운동참가자들은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으며 예전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이 운동을 교섭테이블로 몰고 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거대한 세력들(민주당과 노동조합 관료들)은 그들이 올해 봄 위스콘신에서 성공적으로 해낸 것처럼 이 운동을 통제하고 진정시키고, 억압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곤란에 빠져 있다.
 


1000개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점령 운동을 일반화시키기는 쉽지 않다. 언론 매체들은 이 운동의 핵심참가자들을 젊고 백인이며 실업상태에 있는 “중간계급”으로 묘사하려고 애써왔다. 가장 마지막의 꼬리표는 노동계급을 중간계급으로 파악한, 실수로 잘못 붙여진 것이었으며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초기의 상태가 어떠했든지 간에 다른 도시들(가장 대표적으로 11월2일의 오클랜드 항구의 대중 행진)에서 상당한 수의 나이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흑인과 라틴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최초의 핵심부위를 넘어서 이 운동을 확장시켜오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수천 개의 슬로건들을 곱씹어보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슬로건들이 제기되는 것은 시위에 처음 참가해본 광범위한 사람들이 만든 초기 운동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1%”와 같은 개념, “부자들이 제몫을 부담하게 하자”, “은행이 부담하게 하자”, “연방준비은행을 없애자”와 같은 생각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과 나란히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은행”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이 널리 퍼진 비참한 현실이 자본주의 체제(임금 노동)의 세계 위기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로 이 운동은 이 위기를 임금 노동 제도를 넘어서는 세계, 소위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비록 이 용어들이 너무 많은 경우에 오‧남용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를 건설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 주목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계급에 대해 공공연히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의 노동계급 다수가 이 운동에 동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 운동에 결합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이 매일의 생존에 매여 있고 일해야 하기 때문이긴 하지만.


점령 운동은 거리 투쟁의 현장에서 한두 블록 정도 떨어져서 평소처럼 일하러 가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서 거리 위에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의 창조적인 투쟁성을 기반으로 건설되어야 한다. (오클랜드, 포틀랜드, 시애틀, 뉴욕과 다른 여러 곳에서 나타난 것처럼)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퇴거조치와 압류에 반대하는 행동들이 투쟁을 확대시켜 왔다. 회의와 꼭 필요한 주거 공간 및 워크샵과 토론회를 위해 건물들을 점거하는 것이 중요한 다음 단계가 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이 운동을 조업 정지와 작업장 점거로 확대시키는 것으로 나아가게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사유재산과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이전보다 날카롭게 제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운송노조(TWU) 로컬100 지부의 임박한 단체협약갱신은 여기 뉴욕에서 분명한 하나의 계기점이 되고 있다. 또 하나의 계기는 대체인력 투입을 이용한 해고를 둘러싸고 계속되고 있는 서해안 항만노조(ILWU)의 로컬21지부와 워싱턴주(州) 롱뷰의 EGT(곡물 수출 터미널) 기업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이다. 오클랜드에서 폐쇄가 예정된 다섯 개 공립학교의 학부모와 학생들은 함께 점거를 벌이기로 했는데 이는 또 다른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우리는 이 운동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미 때때로 투쟁에 결합하고 있는) 일반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조관료들은 이빨 빠진 “지지” 결의안을 연이어 통과시켰을 뿐이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이름뿐인 투쟁조차 조직하지 않았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중 가장 악명 높은 오클랜드 시장 진콴은 그의 목적을 위해 이 운동을 이용하려고 했으나 그 후 전경을 투입하여 탄압했다.


그러나 점령 운동은 단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일 뿐이다. 그것을 넘어 사회의 생산을 우리 스스로가 인수하고 완전히 새로운 기반 위에서 사회를 운영하는 문제가 놓여있다.


가까운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40년간 축적된 비참함 위에 세워진 침묵의 벽에 균열이 생겼다. 세계 자본주의가 통제에서 벗어나 돌아가면서 매일 매일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 소식이 날아들고 있다. 자본가들의 “정상적인 상태”가 체제 유지를 위해 억압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동성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 이보다 더 명확한 때는 없었다. 튀니지와 이집트로부터, 그리스와 스페인을 거쳐, 뉴욕과 오클랜드, 시애틀, 포틀랜드까지, 수동적인 태도는 끝이 났다. 오늘날 우리의 임무는 되돌릴 수 없는 지점까지 나아가는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는 “세상을 바꿀 기회가 왔다. 그 기회를 붙잡자!” 라는 외침이 울려 퍼질 것이다.
 

번역 | 정지원(jeewon@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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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FocuS][기획대담]기아차 해고자를 만나다

 

 

[편집자주] 지난 해 발간된 포커스 5월호에서 소개한 바 있는 <기아자동차 구속·해고·고소고발·손배가압류 분쇄를 위한 현장석방대책위원회(이하 ‘석방대책위’)>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수감되어 있던 김수억, 이동우 조합원이 최근 출소하여 구속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고자 복직문제와 현장에 난무하는 활동가들에 대한 고소고발과 자본의 폭력적인 인력·생산 유연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기존 석방대책위의 방향을 복직투쟁을 중심으로 전환하여 가칭 <기아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이하 ‘기아해복투’)>를 건설할 계획이다.
현재 기아차에는 복직투쟁을 하는 해고자가 4명 있다. 김수억, 윤주형, 이동우, 이상욱 4명은 각기 해고된 시점과 사유가 다르지만 모두 비정규직 투쟁과 조합활동을 하다가 해고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기아해복투를 통해서 복직투쟁과 더불어 현장에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각자의 고민을 풀어놓은 동지들에게 감사드린다.

 

비정규직투쟁과 조합활동으로 당한 해고


해고된 순서대로 각자의 사연(?)을 들어보았다. 짧게는 2년, 길게는 6년이나 지난 해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동우 : 나는 기아차 2·3차 하청노동자이다. 2004년에 입사했고 2005년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이하 ‘비정규직지회’)가 건설되면서 거기에서 여러 노동조합 활동, 선봉대 중대장이나 상집간부 등을 하면서 함께 투쟁했다. 2005년도에 비정규직지회가 단협을 체결했는데 그 과정에서 2·3차 업체 노동자들이 배제되었다. 그래서 2·3차 노동자들의 단협체결과 2006년 비정규직지회 임투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해고되었다.
당시 비정규직지회 상집간부를 하면서 병가신청을 했는데 사측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단협이 체결되지 않아서 취업규칙과 사규에 의거해서 정당하게 병가를 냈는데. (하청 사측은) 말로는 정당하지 않은 절차라고 했지만, 뒤로 돌려서 얘기하는 것은 원청에서 노동조합 열성 간부이기 때문에 병가를 받아주지 말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고 했다. 당시 비정규직지회 집행부는 정당한 절차이기 때문에 우리는 병가 들어간다고 결정해서 병가 들어갔다. 사측은 병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단결근이 계속 쌓임으로 인해서 ‘당연면직’이라고 얘기했다.
사측은 ‘당연면직’, 우리는 ‘부당해고’라고 맞서서 결국에는 2006년도 특별교섭으로 원청과 합의를 했다. 10월 임단투 끝나고 업체에 복직을 권고한다고 합의서를 썼다. 그리고 후속조치로 하청사측과 복직 협의를 했는데 당시 내가 일하던 공간이 원청 사측에 의해서 계약해지되었다며 공장 밖으로의 복직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공장 밖 복직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해서 협의가 결렬되었다.
그리고 나서 사측은 해고수순을 밟았다. 사측은 결국 공장 밖으로 발령을 냈다고 했고 우리는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시간이 지났고 사측은 무단결근, 우리는 합의사항을 깬 부당해고, 그런 형식으로 2006년 10월에 해고되었다.

이상욱 : 해고자를 두 번 죽인 거다.
나는 업체가 기아다.(웃음) 정규직 해고자이다. 해고는 3년이 되어가고 있다. 2008년 12월, 구치소에 있을 때 3차 징계로 최종 해고되었다. 1차, 2차 징계는 현장에 있을 때 날렸는데 그 때에는 우리 완성3반 동지들이 대거 몰려와서 항의집회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동지들과 함께 투쟁했던 때가 그립다. 마지막 3차 징계는 그렇게 대응하지 못해서 좀 아쉽다. 하지만, 감옥에 있을 때 현장조합원들이 대의원 옥중출마를 권유하고 직접 추천 싸인도 받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감옥에 있던 것이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해고 사유는 2007년 화성 조립2부에서 생산되던 카렌스가 단종 되면서 사측은 일자리를 축소시키고 남는 인원을 책정하여 다른 부서로 전환배치 시키려 했다. 현장조합원들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노동조합하고 사측이 현장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 전환배치 합의를 했다. 합의사항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현장의 반발이 극심했는데 당시 조립2부의 천 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수차례 현장공청회, 현장집회, 식당공청회, 노동조합 앞 항의농성을 하는 등 분란이 많았고 그런 힘이 긴급한 대의원대회까지 소집하게 만들었다.
사측은 현장에 주도권을 주지 않겠다는 것으로 일부 대의원들의 동의만 얻어 일방적으로 신차(모하비)를 1라인에 투입해버렸다. 현장을 대표하는 대의원들과 회의록도 쓰지 않은 채 노사합의가 안된 상황에서 차를 라인에 투입한 것을 나를 포함해 2명이 라인 점거를 통해 막았다. 그렇게 해서 징계가 시작됐는데 최종적으로 나는 해고, 또 다른 동지는 3개월 정직이 되었다.
유추해 보건데 당시 내가 재판받으면서 기소되었던 내용을 보면 그 전에 비정규직 연대투쟁이나 현장의 안전사고대응 및 사측현장통제 대응투쟁 등으로 기소된 것들이 쌓여 재판을 받았다. 업무방해부터 비정규직 문제 등으로 해서. 지금 생각해보면 선봉대장하고 징계양정이 틀리잖나, 행위는 동일하지만. 당시에는 이해가 잘 안되었는데 지금 보면 회사로선 당연한 일은 한 거다. 그 때까지 쌓여왔던 것을 털어버린 것이다.

이동우 : 여기 있는 네 동지 모두 다 현장에서 가장 열심히 투쟁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원하청 사측에 의해서 극심한 탄압을 받고 공장에서 축출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사측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누적 과정 속에서 해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김수억 : 나는 2010년 2월에 해고되었다. 2007년도에 비정규직 점거파업이 있었고, 그 전에 이동우 동지와 (비정규직지회) 집행부 했던 시절 한미 FTA총파업 건, 이젠텍 연대투쟁 건이 있었고. 06년 겨울에 민주노총 비정규악법 총파업이 있었는데 그 건까지 해서 2009년 1월 달에 구속이 되었다. 마지막 대법원 상고가 2010년 2월 달에 최종 기각 되었다. 실형 확정이 되니까 바로 회사에서 출근하라는 통지가 왔고 그 뒤에 일정기간이 지난 다음에 ‘출근을 하지 않았으므로 당연면직 되었습니다’라는 해고통지를 구정 직전에 받았다. 그렇게 해고가 되었다.

윤주형 : 나는 사내하청 기현, 현 창명산업에서 일하다가 2010년 4월20일 최종 징계해고 통보를 받았다. 사측의 해고 사유는 쌍방

 

△ 정파갈등으로 인해 해고자 복직투쟁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하는 윤주형 활동가

폭행, 라인을 잡아서 업무방해, 생산지연, 기타 등등이다. 이동우 동지가 해고자들은 현장에서 투쟁을 제일 열심히 한 사람들이다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런 정도는 아니다.
폭행사태가 있었고 시발점이 된 작업거부투쟁이 있었다. 통칭 에어블로우라고 하는 4명이서 일하는 조그마한 작업장이 있다. 거기 작업공정이 수시로 변경되었는데 그게 3년 동안 한 번도 노사협의나 합의, 논의를 거쳐서 된 적이 없다. 예전에 불파문제도 얘기를 했지만 정규직이 와서 업무지시를 항상 했다. 그래서 ‘왜 정규직이 와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고 가냐, 우리는 노동조합, 분회체계에 의해서 공정변경은 반드시 노사합의대로 해야 되고, 정규직의 지시 받지 않겠다’고 했다.
회사에서 처음에는 ‘믿어 달라, 해결하겠다, 약속하겠다’했고 나는 공개적으로 회의록을 남길 것을 계속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결국 야간 근무조 출근하기 직전에 회사 소장과 통화를 해서 정확하게 ‘오늘 야간 라인 개시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무기한으로 작업을 거부하겠다’, 선전포고를 하고 밤새 작업을 하지 않았다.
저녁 9시 반부터 아침 8시까지 밤에 작업을 안 해버린 거다. 라인이 서지는 않았지만 작업 안 된 차들이 정규직 작업장으로 가니까 눈치봐야할 하청사측은 크게 압박된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사측과) 만나서 오후 1시까지 5시간정도 릴레이로 회의를 해서 안을 만들었다.
(사내하청)분회도 그렇고 (정규직)지회도 그렇고 다 ‘적당히 해라’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대의원이 혼자서 난리칠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지 않나. 그럼 작업거부를 더 진행하기 어려운 상태이고 투쟁의 수위를 높여가기 어렵다. 그렇다고 여기서 칼을 이만큼 뽑았는데 다시 접을 수 없었고 결국 회의록을 작성하진 못하고 구두 합의를 했다.
그런데 노사합의내용 알리러 들어간 자리에서 틀어지게 되었다. 그 에어블로우 작업장에서 수시로 공정변경이 일어나고 모든 문제를 만들어왔던 사람이 전직 주임이었다. 전직 주임이란 인물은 당시 작업장 주야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관리자였다. 과정에서 책임소재 얘기가 되어서 ‘도대체 누가 공정변화를 마음대로 했고 노동조합은 왜 여태까지 그걸 얘기 못 했냐’, 이렇게 되니까 ‘그 공정변화 3년 동안 계속했던 사람이 전직 주임이다’라는 얘기가 나왔다.
나는 ‘노동조합의 대의원으로서 개인에게 책임을 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회사가 이런 것을 암묵적으로 도와주고 방관하고 했던 책임이 있으니까 회사하고 싸운 것이다, 내가 나이 많은 사람(주임)하고 멱살 잡고 싸우겠냐 답도 안 나오는 걸’, 이러니까 이 사람(전직 주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나하고 멱살잡이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노동조합은 당시 나와 같은 현장조직 출신인 한규협 분회장이 와서 상황파악하고 사측의 사과, 재발방지, 당사자 징계, 세 가지를 걸고 회사를 만나자고 했는데 회사는 ‘노동조합은 참견하지 마라, 나중에는 윤대의원은 윤대의원 갈 길 가고 우리는 우리 갈 길 가겠다’ 했다.
당시 회사가 정당한 협의를 거부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분회는 잔업거부를 한 차례 했고 잔업거부하고 15분 지나니까 사측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협의하겠다 해서 그 자리에서 세 가지 합의를 했다. 사실관계 조사를 회사가 하겠다, 그리고 징계양정에 따라서 징계하겠다, 현장에서 안전교육 시간에 들어와서 사과하겠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또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차기 만나는 날에 윤주형 대의원도 징계하겠다는 내용으로 15분 만에 결렬이 돼서 2차 잔업거부를 그날 저녁에 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집행부 선거로 사태가 흐지부지 해졌다. 그러니까 잔업거부가 11월9일에 해서 11월 달에 두 번 잔업거부를 하고 (사태가) 흐지부지되고 해가 지나고 4월에 대의원선거 끝나고 직후에 기현사측의 징계가 1차, 2차해서 들어왔다. 집행부가 바뀌고 나서 이상언 분회장이 들어왔고 <금노힘(금속노동자의힘)> 집행부가 들어왔고 회사는 윤주형은 ‘이제 끈 떨어진 영양가 없는, 그래서 이제 징계해도 될 것 같다’, 그래서 징계가 쭉쭉 나갔다.
현장에서 해고된 것은 잔업거부가 직접적인 사유가 되었다. 그러나 사측의 논리는 전직 관리자(주임)이었던 사람과 다투어가지고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윤주형이라는 사람이 대의원이라는 자기 기득권을 이용해서 라인을 잡았다고 주장한다. 지난 수년간의 탄압과 투쟁은 사라지고 말초적인 본질 흐리기만 있다.

김수억 : 노조활동 때문에 해고된 것은 똑같은데 해고투쟁의 원칙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사측 논리대로 이러저러한 과정 또 근거를 대면서, (해고사유의) 본질은 현장투쟁이었고 그것으로 인한 해고투쟁이니까 노동조합과 현장에서 함께 투쟁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회피하고 있다.


정규직 운동질서라는 커다란 벽


기아차 해고자들의 복직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은 단지 사측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공장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노동운동의 상태는 조합주의와 관료주의, 정파논리, 선거주의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한 가운데서 4명의 해고자들은 어쩌면 사측보다 더 힘겨운 내부의 적으로 인해 많은 상처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 운동의 조합주의는 지난 비정규직지회 시절부터 끊임없이 나타났고, 활동가들의 ‘해고’라는 문제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각자의 해고문제에서 어떤 부분이 어려운지, 그리고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물었다.

사회자 : 윤주형 동지의 해고와 관련해서 대의원대회에서 조합활동으로 승인하냐 마냐하는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집행현장조직과 여타 세력 간의 입장이 달라 그 갈등 속에서 아직도 ‘공식적으로’ 조합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조직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윤주형 : 현장에서 윤주형이라는 활동가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 것이냐면 <전국회의(민주노동자전국회의)>, 현장에선 <자주노동자회>라고, 또 조직통합하자고 앞에 나와서 얘기하던 사람. 현장에서 정규직 활동가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기노회(기아자동차 민주노동자회)>하고 친하다, 이런 시선과 캐릭터가 있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런다. ‘윤주형이 <전국회의>, <자주노동자회>, <기노회>와 연관이 있는데 쟤 왜 저렇게 황당하게 그냥 해고되냐’. ‘하청업체에서 1차, 2차까지 징계해고를 하는 동안 무기력하게 구경하고 있다가 그냥 해고가 되었냐’는 말이다.
노동조합에서는 지난 2년 동안 전직 관리자도 다 조합원이다, 등의 사유를 들어서 대의원대회에서 해고철회를 승인하는 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복직투쟁을 위해서 요구되는 기타의 것들에 대해서 미온적이고 어렵다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해왔다.
나는 내 해고에 대해서 정파 간의 갈등과 노동조합의 관료주의, 두 가지가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투쟁을 막 잘하고 이런 게 아니라 온갖 모략과 협작 이런 지저분한 배경이 있다.
심정적으로 많이 힘들다. 예전에는 어디에 딱 속해서 내 위치와 자리가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바쁘고, 야, 고생한다 그런 얘기도 들었는데. 요즘은 외롭게 동떨어져서 혼자 고민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부터 해고투쟁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할 거냐,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하려는 얘기는 처음에 윤주형이 가지고 있던 이런 (정파적인) 캐릭터가 있지만 해고된 이후에 현장에서 같이 투쟁했던 동지들로부터 느꼈던 배신감과 인간적인 서운함 이런 것들 때문에 이후에 해고투쟁이나 이후의 해고투쟁에 대한 전망을 세우고 이런 건 많이 없는 상황이다. 과거에 (현장)조직활동이나 이런 것을 많이 했는데 요즘엔 무용스럽다, 이런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사회자 :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도 불승인을 받았다. 심정이 어떠한가.

윤주형 : 억장이 무너진다. (금속노조) 김현미 부위원장이 신보위(신분보장기금심의위원회) 위원장이다. 신분보장 승인을 요구하는 안건을 화성지회와 지부를 통해서 올렸는데 안건을 올리는 것조차도 굉장히 곡절이 많았다. 왜 올려 주냐, 왜 안 되냐, 지부 운영위에서 해라, 그 과정에서 석방대책위에서 법률원에 공문도 띄웠다가 답변도 받고 굉장히 복잡했는데.
그 때 한마디로 느낀 것은 ‘이게 동네 동사무소보다 더하다, 이게 관료구나, 진짜’. 관료적이라는 말을 실제 나의 경우로 느낀 게 처음이었고. 그 전에는 이런 정도까지는 못 느꼈다.
김현미 부위원장이 계속 (처리를) 연기하니까 한 번은 동지들하고 서울에 올라가서 항의를 하러 갔는데, 시끄러웠다. 그 때 기아차지부 실장도 있었는데 ‘왜 자기한테 허락도 안 받고 여기를 올라 오냐’ 이러고. 한 쪽에서는 ‘아니, 조합원이 억울해서 올라오는데 그것도 허락 받냐’ 이러고. 삿대질하고 난리 났다.
시끄러워지니까 김현미 부위원장이 나를 불러서 하는 말 왈,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봤자 승인 불승인 결정을 못 내리니까 기아차지부하고 사이좋게 정리하고 와라, 그래야 정리된다’, 그렇게 얘기를 딱 하더라. ‘아, 결국엔 대공장 권력이 금속노조 안에서 강하게 움직이는구나’. 그런 상황이 되니까 그렇다고 내가 <전국회의> 안에서 대단한 인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주노동자회> 안에서도 그동안 열심히 조직하고 했는데 문제가 되고 여론이 불리하니까.
여하튼 과정에서 느꼈던 노동조합 권력이라고 하는 게 말하자면 함부로 도전해서도 안 되고 그냥 의지나 운동적인 걸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아주 정확하게 알았다. 예를 들어 지금도 21대 집행부 선거 진행되는 기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한다. 야, 그래도 <기노회> 2번, <자민통>과 친하니까 좀 나을 거야,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답답한 게 뭐냐면 나는 그 권력 안에서 인정에 호소하거나 이게 안 된다는 걸 알았고. 이렇게 관료, 금속노조와 기아차지부 권력에 대한 시선을 바라보는 차이가 확 생겨버리니까 동지들과도 틈이 생기는 거야. 예전에는 웃으면서 만났는데 이제는 웃으면서 안 되는 거지. 윤주형이 그 동안 이 투쟁을 왜 해왔나, 이런 생각이 들고 그야말로 다 무너지는.

사회자 : 자민통 연합이 집행부에 당선되면 윤동지에게 유리한 점은 없나.
윤주형 : 특정후보의 당선이 해고자에게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몇 집행간부의 의지로 되는 일도 아니다. 개별 해고자의 유·불리를 따져 해고투쟁을 각자 할 수도 없다. 활동가들 역시 대화를 해보면 해고와 투쟁의 과정도 잘 모른다. 그러면서 대의원대회에서는 자기 입장 얘기한다. 복직이 정치적 협상으로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노동조합이 민주화되어야 하는데 어렵다.

(윤주형 동지가 속한 기아차 화성지회 의집행부는 자민통 연합이 당선되었다. 대담이 있었던 다음 날 부정투표 문제제기 속에서 치러진 기아차지부 선거에서도 자민통 연합 선본이 지부장으로 당선되었다.)

사회자 : 기아차지부의 관료적인 행태는 예전 이동우 동지 조합원 인정 문제와 2·3차 하청노동자 조합원 인정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최근에도 계약직 노동자들이 가입원서를 냈는데 처리가 되지 않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이동우 : 기본적으로 나는 윤주형 동지를 비롯한 네 명 모두 노동조합 활동으로 인한 해고라고 생각한다. 노동조합활동으로 인한

 

△ 2·3차 하청노동자로 기아차지부 조합원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이동우 전 비정규직지회 부지회장

해고자 복직투쟁의 가장 기본적인 수순이 있다. 그런데 초입에서 막히는 것이 있다. 일단 투쟁은 했는데 조합원이냐 아니냐, 윤주형 동지 같은 경우에는 조합원인 건 맞는데 이 투쟁이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이냐 아니냐, 이 문제가 있다. 거기까지 진행이 되고 나면 이 투쟁을 어떻게 지원하고 함께 할 것인가 문제로 간다. 민주노조라고 하면 이런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노동조합 차원으로 받아 안으면서 해고자들과 함께 투쟁 하는 게 기존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내 문제와 관련해서는 진입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가장 첫 번째로는 내가 조합원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될 것이다. 기아차지부가 조직통합이 되면서 2·3차 하청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 였다.
근데 당시에는 2·3차 문제가 크게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당장 비정규직지회와 기아차지부가 조직통합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더 큰 문제였다. 까놓고 얘기하면 기아차지부가 비정규직지회한테 들어올 것이냐 말 것이냐, 라고 많은 압박과 조직을 해체하고 와해시키면서까지 흡수하려고 했다. 여하튼 이후에 이 문제가 논란이 되고 불거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비정규직지회가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표결 때 나는 끝까지 반대했다. 종국에 가서는 마지막까지 조직통합 가입원서를 쓰지 않았던 동지들이 한꺼번에 가입원서를 썼다. 그것으로서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이었던 동지들이 전부다 정규직 지부 조합원으로 전환하는 과정 속에서 내 가입원서만 반려가 되었다.
즉 그것은 기아차지부가 2·3차 하청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근데 이것은 당시 여러 가지 이슈들과, 나도 대단한 패배감에 있었기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
이제 해고자 복직투쟁을 받을 수 없는 가장 좋은 핑계는 이 사람이 조합원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 말의 의미는 나의 해고자 복직투쟁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와 더불어서 2·3차 하청노동자들을 기아차지부로 받지 않겠다는 의미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기아차지부 집행부나 정규직의 보수적인 정서에는 업체의 문제, 2·3차의 문제 등 많은 논란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비정규직지회에는 2·3차 하청 노동자들이 가입했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탈퇴를 하거나 업체가 계약해지 되어서 해고투쟁을 하다가 포기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대중적으로 비정규직지회는 2·3차 하청노동자, 이주노동자, 즉 기아차에 있는 노동자를 모두 조직대상으로 두겠다고 얘기했다.
사측이나 보수적인 정서를 가진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1차냐 2차냐 3차냐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실질적으로는 글로비스가 끼어있어 2차로 볼 수 있는 PDI가 있고 현대푸드 같은 경우는 업종이 다르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반대하면서 소위 말하는 계급적 입장, 노동자는 하나라는 입장으로 조직했다. 이것이 관철되어야 비정규직 노동자들 내부의 분란, 서열이 없어질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정규직 비정규직의 차별을 없애자, 비정규직을 철폐하자는 주장의 정당성이 생긴다는 가장 기본적인 대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조직했다.
개인적으로는 조합원 인정투쟁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이 대단히 어렵고 지난한 과정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서 기아차 공장에 있는 2·3차 노동자들이 지부 조합원으로 조직될 수 있게 물꼬를 트는 하나의 사업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기아차지부나 대공장에서 말로는 민주노조, 노동해방, 비정규직 철폐라고 얘기하면서 2·3차 하청 노동자들을 배제시키는 것을 문제제기 하고 분란을 일으키고 이슈화시키는 것 속에서 조합원 인정문제를 풀어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는 조합원 인정 문제, 그리고 그렇다면 정당한 조합활동이었나에 대한 문제, 그리고 난 다음에 해고자 복직문제, 3단계이다. 갈 길이 먼거지.

사회자 : 분회조합원들 같은 경우에는 같이 투쟁했던 경험이 있으니 동지가 복직해야 한다는 문제는 당연하게 생각할 것 같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2·3차 하청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하고 있는가.
이동우 : 2005년도에 처음 비정규직지회에 가입했던 동지들이 2·3차 노동자들이 40명 정도 됐었다. 그런데 투쟁과정에서 거의 떨어져 나갔지만, 비정규직 내부에 차별을 두면 정규직한테 정당성 없다는 얘기는 그나마 투쟁 속에서 (조합원들이) 다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말과 직접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입장과 입장의 대결이 되었을 때는 또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2·3차 하청 노동자 중에 계약직 관련해서 조합가입을 집단적으로 열심히 했는데 절차상으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즉 반려도 아니고 진행도 아닌 중간(분회)에서 그냥 정지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조합원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2·3차 조직화에 동의하는 기본적인 인식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대중적이진 않았지만 KD지역의 백상에서 계약직 당사자들이 아니라 백상업체 조합원들이 계약직의 조합원 가입을 요구했다. 오히려 당사자들이 함께 투쟁하면 더 좋은 시너지 효과가 나는 원하청 연대의 또 다른, 비정규직 내의 1차와 2·3차 연대(웃음) 이런 것이 될 수 있었겠지만. 이런 것들을 보면 시혜적 입장이 되었든 아니면 원하청 연대의 비정규직 내의 또 다른 판이 되었든, 가장 기본적인 동의지반은 있지 않나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투쟁으로 전화되거나 실물적인 조직화 과정을 밟지 못하는 것은 그 주체들을 형성시키고 함께 투쟁을 해야 될 사람들이 지금, 소위 말하는 활동가들 그리고 노조집행부가 애써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억 : 계약직과 2·3차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의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2·3차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이중적인 의식과 태도가 있는데. 2005년 비정규직지회 출범식에 이동우 동지가 얘기한 것처럼 조합 가입의 문을 최대한 넓게 열었고 그래서 사내하청이라는 단어를 없애고 비정규직지회라는 했던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2005년 단협 체결이 되면서 2·3차가 단협에서 배제가 되었고 그 평가에 있어서 어쨌든 2차, 3차 적용이 안 되고 1차만 단협 적용이 된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2005년 단체협약 체결이후 06년투쟁을 경과하면서 07년은 기아차비정규직투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첫째로 한계는 있었지만 06년 사내하청노조간의 연대투쟁과 네 시간의 공동파업투쟁의 물꼬를 텄다. 07년에는 보다 확대되고 강화된 사내하청노조간의 공동파업과 공동투쟁을 실현하는 과제가 꿈이 아닌 현실로서 제기되었다.
둘째로 당시 광주, 소하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일이었다. 당시 07년까지는 화성공장에만 비정규직지회가 건설되어 있었고 05년, 06년 투쟁의 경험과 성과들을 기반으로 광주, 소하리의 비정규직을 직접 조직해야하는 과제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주요하게 2,3차 하청노동자에 대한 조직화를 실질적으로 해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다. 이동우 동지가 당시 2,3차 하청노동자로서 부지회장에 있었기 때문에 2,3차하청노동자 조직화특위 형식으로 기구를 구성하고 이를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직접 집행을 맡자마자 부딪힌 1사1조직은 조직파괴 작업이었다. 전투적이었던 비정규직 노동조합 자체를 파괴하고자 했다. 그래서 2·3차 하청 투쟁이 그렇게 한 시대가 가버린 거다.
2·3차에 대한 (조합원의 인식) 부분도 이중적이라고 본다. 이동우 동지는 부지회장이었고 같이 싸웠던 동지란 말이다. 그래서 이동우 동지 복직되어야지, 이런 것에 대해서 감히 누가 앞에서 뭐라고 할 사람 당연히 없다, 그 진심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도 말 못한다. 공인된 것이고 조합원이었고.
그 동안에 물질적인 조건들이 많이 변했잖나, 솔직히. 무쟁의가 4년 동안 진행되면서 조합원 의식 자체도 많이 보수화됐고 안정적인 분위기로 갈려고 하는. 그래서 무투쟁에 플러스알파해서 정규직 정도는 아니지만, 고령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내가 지금 나가면 어디 가서 이정도 받겠어’ 이런 부분이 더 강화됐을 것이다.
투쟁안하고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2·3차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낮다. 05, 06년보다. 그리고 2·3차노동자와 이동우 동지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이중적이다. 이동우 동지 복직은 싸웠던 경험들이 있고 조합원이었으니까 OK이지만 2·3차에 대한 고민은 주장하는 사람도 없고 전무하고 선언적으로만 얘기됐었고, 이동우 동지가 얘기했던 대로 조합원 인정투쟁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감옥에 있을 때에는 (분회 집행부가 정규직) 지부지회에 책임을 넘기는 과정이었다. 지부지회에서 (이동우 동지를 조합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대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근데 이상언 집행부가 공약사항으로 첫 번째로 걸었던 게 이동우, 김수억 해고자복직이었다. 그거 걸었었다. 당연히 조합원이었고.
그러면 지부지회에 그러한 부분이 잘못 됐고, 요구하는 진정성이 있다면 제일 먼저 분회에서 조합원이라고 공표하라 요구했다. 분회에서 이동우 동지는 분회조합원이다 선언하고, 분회에서 조합비 받고. 이것을 왜 홍보물로 내지 않는지 공개화시키지 않는지. 계속 요구했지만 관찰되지 않았다.

이상욱 : 2·3차에 대해서 조금 더 압축적으로 진행된 사건들은 있다. 아까 거론했던 백상 중원에서 계약직 동지들을 위해 1차 하청동지들이 투쟁했던 과정이 있었고. 비슷하게 PDI에서는 이번에 로봇 들어올 때 계약직이 충원되는 과정 속에서 인스테크업체 여성동지들이 마찬가지로 투쟁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조합가입을 권유하는 과정이 있었다. 국지적으로 주목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현장에서 일말의 (투쟁의) 불씨가 존재한다고 보이는데. 조합에서 어떻게 받아 안을 수 있도록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투쟁이 아니라 지금 옆의 동료, 계약직이든 임시직이든 2·3차든. 이런 인식들이 불씨로 남아있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투쟁도 있었고, 인식도 있고. 그런 것들이 계기가 된다면 향후에 진행을 적극적으로 해볼 필요가 있다.

윤주형 : 이동우 동지의 문제가 크게 두 개잖나. 2·3차와 해고자. 나는 이 것을 나누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복직되려면, 어렵겠지만, 노조가 민주적 원리로 돌아가야 가능하다. 민주노조의 원리는 단결, 투쟁, 연대다. 기아차지부에서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더 큰 연대’를 내세웠던 주장에 따라 부지회장을 조합원으로 인정하고 2·3차 하청의 문제는 집행부내 기구를 설치해 장기전망을 볼 수 있다고 본다. ‘더 큰 연대’가 함께 투쟁한 동지를, 그것도 핵심간부를, 힘없는 약자라 하여 쫓아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내하청 조합원들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현실에서, 계약직, 2·3차 하청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기아차지부 민주노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제안이자 의견이기도 한데 우리가 2·3차 하청투쟁을 그렇게 신명을 바쳐 해보진 못했잖나, 2·3차 문제는 열어놓고 관철할 수 있는 방황으로 얘기됐으면 좋겠다.
2·3차 조직화의 핵심은 주체의식보다 노조와 활동가에 대한 불신을 크게 보아야 한다. 노조가 투쟁의 기풍을 상실했기 때문에 1차든 2·3차든 믿고 함께 싸워보자는 생각, 그 자체가 시작도 못한다. 이 지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2·3차 조직화는 불가능하다.

김수억 : 우리 앞에 놓인 것 중 2·3차가 두세 번째가 되다보니 그게 안 된다. 근데 이 문제는 실제적 문제가 되어버렸잖나. 복직요구와 구분이 안 되다보니. 그래서 좀 더 기아해복투에서 그 부분에서 조직적으로 중점을 두고 조직하지 않으면 현장의 상태가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더 어려울 것이다, 열심히 해야 될 것 같다, 이런 얘기였다.

사회자 : 이상욱 동지는 완성차공장에서 정리해고가 아닌 이상 유일한 정규직 해고자인 것 같다. 동지의 해고문제는 왜 해결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어떤 어려움이 있나.

이상욱 : 나는 요즘 맘이 아픈 게 현장의 소문인 소하리 재입사, 이걸 회사에서 소문내고 있는지 아니면 노조 안의 세력이 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소문들 속에서 많은 노조 관료들의 압박이 있다. 소하리공장으로 재입사하는 안을 받아라, 받아서 소하리가서 처우 문제는 계속 싸우는 문제고 전환배치 받아 내려오면 되지 않겠냐는 식으로 얘기하고.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는가. 노조 집행부 세력은 나의 해고문제를 투쟁이 아닌 처우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해고자에게 타협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거다.
마찬가지로 해고자를 처우를 개선해주는 사람으로, 이런 것으로만 바라보면서 해고투쟁 자체를 깔아뭉개는 식의 얘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이건 근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 마찬가지일거다. 해고문제를 투쟁으로 바로보지 않는다는 거다. 아주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처우 개선시켜주는 것으로만 바라보는 것, 활동가들로서는 치욕스러운 거잖나. 이런 것들의 얘기를 듣는 순간 거부감이 일어난다.
그래서 하도 화가 나서 지부로 올라가서 삼자대면하자, 이래가지고 누가 이런 소문을 퍼트리는 거냐 라든지 항의를 몇 차례 했다. 그 답변이 어쨌든 간에 항의하면서 맘이 좀 풀어지기는 했다. 했지만 어쨌든 그런 흐름들이 있다는 사실은 회사의 입장이 소하리 재입사를 툭 던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것도 스스로 발목을 잡는 거잖나.
그래서 앞으로 동지들과 같이 투쟁이 개별화되는 것, 해고자 원직복직투쟁이 개별화되지 않는 기준을 가지고 해 나가면 좋은 성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성과가 나머지 동지들에게 파급과 영항을 미치면 더 좋겠고. 해고투쟁 자체를 통일적으로 바라보고 공장 안팎을 넘나들면서 하는 순간, 과정 속에서 투쟁의 상호 대답이 되고 영항을 받지 않을까 한다.

 

석방대책위 활동을 지나오며......

 

해고자들 중 이상욱 동지는 3개월여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고 김수억 동지와 이동우 동지는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상욱 동지를 대표로 현장탄압으로 발생하는 구속, 징계, 해고 등에 대응하기 위한 석방대책위가 꾸려졌고 윤주형 동지는 해고된 이후 석방대책위에 결합했다. 석방대책위는 기아차에서 발생한 구속자를 중심으로 구속된 노동자들과 소통과 교류를 하며 구속자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활동해왔다.
석방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과 평가, 그리고 석방대책위를 통해서 현장과 소통할 수밖에 없었던 구속자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들어보았다.

이상욱 :두 동지를 감옥에 보내놓고 석방대책위가 뭘 해야하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윤동지는 해고되기 전 상황이었고 석방대책위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느냐에 대해서 고민했고, 예전에 소개해드린 것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몇 명의 동지들과 같

 

△ 석방대책위를 이끌어온 이상욱 활동가

이 얘기를 나누면서 현장에서 해고자들이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거니까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위한 어떤 정기적인 선전과 캠페인을 해야 되겠다 라는 것이 논의가 돼서 많은 동지들이 도움을 주셨다. 퇴근장 선전전 등을 하면서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앞으로 우리 석방대책위가 어떻게 전망을 세울 거냐에 있어서 도움을 주셨던 동지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전망 속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 하나가 있고.
오늘 자리를 빌어서 이동우 동지나 김수억 동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있다. 이런 얘기를 아직 못해봤다. 뭐냐면 석방대책위를 그동안 운영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감옥에 있는 두 명의 동지들이 정말 감옥에 있기 때문에 현장에 있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 현장 돌아가는 것, 혹은 현장에서 여러 가지 복잡미묘한 것들을 최대한 얘기해주고 싶고 그런 분위기를 알려주고 싶었다. 석방대책위를 운영하면서 제 딴에는 그런 것들을 공급해주고 싶었고 공장 얘기들, 가끔 가다 드리는 편지들, 속에서 옆에 있는 것처럼 얘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 정도는 안 되니까 최대한 할려고 했었고.
그리고 여러 가지 공장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하면 애기를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인터넷 출력을 계속 해왔다. 다양한 기사들 여러 정치조직을 떠나서 정파를 막론하고 다양한 조직에서 나오는 애기들 문건들 이런 거. 심도 깊은 내용의 논문들, 등등을 보내주면서 현장에 있는 것만큼은 못되더라도 문제의식이 딱딱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심 그런 것을 석방대책위는 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래서 다른 사업장 다른 동지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는 어떻게 옥바라지를 했을까, 이런 것도 간혹 궁금했다. 사측의 탄압이나 정권의 탄압으로 감옥에 가 있는 동지들, 다른 사업장 동지들이 있으면 우리 얘기륻 듣고 또 해줄 수 있는 일들, 얘기들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김수억 :나는 아주 큰 도움이 됐다. 구속을 시키는 가장 큰 이유가 단절이지 않나. 현장과 단절되고 세상과 단절되고. 시간이 서너 달이면 우리가 보통 휴식기간이라고 하잖나. 2005년 구속되었을 때는 4개월 있다가 나왔는데 그때는 돌아보고 휴식할 수 있는 기간이었는데. 2년6개월이라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현장에 있다가 나와서 갇힌 긴 시간이니까.
단절이 가장 큰 적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인데 석방대책위가 운영되고 2년6개월 동안 현장홍보물, 그리고 인터넷 및 매체에 담긴 여러 기사들 글들 이런 것들이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안정적으로 계속 공급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현장홍보물 들어왔던 것 중에 중요한 현장기사나 관련 한 것들은 그대로 남겨서 갖고 나왔다. 그런 부분들이 제일 크다. 홍보물은 이상욱 동지 외에 다른 분들도 보내주긴 했지만 석방대책위에서 챙겨준 그런 부분들이 가장 컸으니까.
메일이 특히 기다려진다. 홍보물은 내가 보고서 내가 판단을 해야 되는데 메일에 그려지는 내용들은 이상욱 동지가 현장을 전체적으로 판단하면서 보내는 의견이나 종합적인 부분들이 있어서 그런 메일들이 소중했다.
그리고 아주 마음이 급하고 정말 궁금한 부분들이 있었을 때는 아주 간혹이었지만(웃음)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지만 답장 속에 담아서, 어떤 때는 답답할 정도로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하고. 안에 있으니까 전체 상황을 잘 모르니까 ‘이러이러한 고민이 있으니까 동지의 중장기적 전망은 뭡니까’ 이런 답답한 소리를 하면 답장이 안 오는 거야(웃음) 아, 내가 (괜)한 소리를했나 나중에 뒤늦게 깨닫고 내가 먼저 편지를 보냈다, 사과를 하면서(웃음). 내가 과도한 정세파악을 한 것 같습니다(라고).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고.
지속적으로 그런 정보나 현장에 대해서 고민을 끊이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석방대책위 동지들이 전적으로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서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일동 박수)
기본적으로 고민이 드는 건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무력감에 힘들었던 것 같고. 그래서 현장투쟁에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 조건에서 안 되는 구나 이런 부분을 뼈저리게 느꼈다.
결론은 현장에 진행되고 있는 투쟁에 직접 개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좀 감옥에 있다 하더라도 감옥에 있는 동지들이 현장과 소통해서 뭔가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지점이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때. 그 때 가장 느꼈다고보는데 감옥에 있다 하더라도 구속자 동지들이 석방대책위에 적극적으로 요구를 하는만큼 우리 또한 안에서 할 수 있는 투쟁이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투쟁에 대한 연대를 조합원들에게 호소를 담아 편지를 쓸 수도 있고. 구속자들의 조직적인 단식농성이나 그런 것을 하면서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쟁점화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고.

이상욱 :그렇다고 다시 감옥에 들어갈 수 없잖나

김수억 :다시 감옥에 들어간다면 이번을 경험 삼아서 정기적 소통을잘 해야 되겠다.

이상욱 :석방대책위가 지나온 과정 중에서 현장에서 또 구속자가 있었다. 정규직 구속자들. 물어보더라. 그 동지들이 저에게 석방대책위 동지들에게 어떻게 옥바라지를 해야되는가. 그래서 석방대책위 홍보물로 한 번 나간 적 있었다. 석방대책위 활동은 이렇게이렇게 해야 합니다 해서 석방대책위가 해왔던 것과 소통한 것과 어떤 방식으로 편지든 뭐든 그런 것들을 구속자 동지들의 각 반에서 최대한 석방대책위를 조직하고 그 석방대책위들이 나름 활동할 수 있도록 운영할 필요가 있다 해서 나름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
그런 것들이 과정 상에 있어서 남는 거다. 여전히 그 동지들, 감옥에 갔다 온 동지들은 석방대책위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주시고 또 도움을 주시는 동지들이 됐고 그리고 반 석방대책위를 맡았던 몇몇 동지들은 소통하고 있는 좋은 관계로 유지가 되고 있다. 다른 사업장에도 마찬가지고 간간이 구속자들이 발생했을 때 석방대책위의 형태와 감옥에 있는 동지들과 소통하고, 현장에 있는 동지들도 마찬가지로 김수억 동지가 말씀하셨던 대로 감옥에 있는 동지들이 결의를 내어 왔을 때 서로 공감하면서 시너지 작용이 일어나면 좋은 거고. 그런 경험을 했다.

 


기아해복투와 현장활동의 전망


김수억 이동우 두 명의 구속자가 최종적으로 출소하면서 석방대책위 활동의 초점이 구속자 석방투쟁에서 해고자 복직투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석방대책위의 이후 전망과 현장활동에 대해 다소 거친 고민을 나누었다.

이상욱 : 지난 비정규직 노동자대회 때 해고자 동지들이 만나서 앞으로 어떻게 꾸려나갈지 이야기를 했다. 확인한 것은 기존 몇 차례 석방대책위의 현장 대응을 보면서 이 관료적인 노동조합의 상황에서 사측도 마찬가지지만 해고자들의 개별적인 상황을 갈가리 찢어놓으려고 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적절하게 방어하면서 해고자들이 같이 투쟁해 나갈 것인가, 이런 고민 속에서 첫 번째 했던 것은 과거에 몇 차례 경험을 반추해 보건데 향후에 어떻게 전화가 되든 간에 해고자 4인이 공동의 논의와 결정을 통해서 행동을 통일해 나가자는 얘기를 했다. 소중한 경험을 통해서 확인했다.

이동우 : 미리 말해둘 것은 아직 다른 석방대책위 동지들과 얘기해서 결정한 것은 아니다. 이후에 다른 석방대책위 동지들에게 제안을 하고 대중적으로 토론을 거쳐서 정리하고 전화할 계획이다.

이상욱 : 아이디어로 제출되었던 것을 소개해드리고 지지연대했던 동지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그 아이디어가 무엇이냐 하면 석방대책위를 가칭 기아해복투로 전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지지연대를 계속 해주셨던 소중한 동지들을 뿔뿔이 흩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지금 이동우 동지와 윤주형, 김수억동지가 생계비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대의원대회 안건으로 상정이 됐다가 철회가 되거나 거부되거나 노동조합 안에서도 여러 가지 마찰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정당한 조합활동이고 노조를 탄압 과정에서 당한 해고이기 때문에 신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노조 안에서 그것이 승인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생계비를 지급받지 못하는 해고자들의 일정부분 생계비를 지원하기 위해서 후원회원를 조직하는 그런 아이디어가 제출되었다. 해고자 4인의 기아해복투와 지지연대를 해주셨던 동지들 후원모임으로 향후에 전환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라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이것이 골격인데 아직 내용이 없다. 내용과 살을 붙이기 위해서 석방대책위 운영위원들과 운영위원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연대해주신 동지들과 사전공유를 통해서 대중토론회를 할 생각이다. 대중적인 토론회를 통해서 합의를 거쳐서 전환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중지를 모았다.

사회자 : 합의된 원칙이나 기조가 있는가

이상욱 : 향후에 가칭 기아해복투가 어떤 지향을 가지고 어떤 원칙을 가지고 투쟁할 것이냐 라는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을 단순히 해고자 4명이 확정할 수 없다고 공감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석방대책위 운영위원들과 연대해주신 동지들과 토론회를 거쳐 기조와 원칙을 확정할 계획이다.

이동우 : 가칭이지만 기아해복투라는 이름에서 갖는 가장 기본적인 건 해고자라고 하는 건 노동조합 활동하다가 사측의 탄압, 현장탄압에 의해서 해고된 사람을 해고자라고 우리가 얘기하지 않나. 그런 동지들이 복직투쟁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확인하진 않았지만 기저에서 동의했던 것은 해고자 원직복직은 가장 기본적인 거다.

윤주형 : 심각한 건 아닌데 조금 걱정되는 것은 자기 정파조직이 있지 않나. 자기 입장과 노선이 있는데 다른 정파 동지들과 속 얘기를 해보고 그런 적은 없었던 터라 얘기하다보면 의견충돌이 되고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비슷한 그룹들끼리 만나면 의견이 대동소이하게 차이가 있으면 심각하지 않으면 적당히 정리되어서 사업진행이 되는데. 내가 불필요하게 주장을 과도하게 주장하진 않겠지만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생각은 다른 게 없는데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또는 핫이슈가 되는 투쟁을 놓고 마지노선에 대해서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천막에서도 뭔가 제안할 때 저는 어용그룹이라도 다 제안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있고. 그게 좀 걱정이 된다. 이런 낮은 수준의 얘기들은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어느정도 진행이 되고 현장토론이나 대중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여러 이야기가 나올 것인데 의견조율이 될지.

이상욱 : 그건 동지 혼자가 고민할 것이 아니라 나도 고민된다. 많은 토론 속에서 공유지점들이 생길 것이다. 내용의 수준과 수위라는 것이.

사회자 : 기아해복투가 현장에서 다른 조직이나 활동가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이상욱 : 공동의 활동과 공동의 투쟁이 지금의 공장 상황에서 대단히 필요하다는 판단은 개별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 생각한 것이 후원회는 돈만 내는 후원회로는 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럼 후원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음을 스스로 가지면서 후원회 이름은 뭘로 해야 할까, 희망, 요즘 희망이 유행이니까. 해고자 후원회 희망. 그럼 기획사업으로 무엇을 할까, 촛불집회, 희망걷기대회 뭐 이런 것을 후원회원들과 한 달에 한 번 하자, 그래서 참가비 1만원을 다른 사업장 해고투쟁 사업장이나 예를 들어 쌍용 동지들이나 이런 쪽에 의무적으로 그런 행사를 할 때마다 모금을 해서 지원을 하자 이런 식의.
기존 현장 조직의 딱딱한 그런 사업의 방식 보다는 기아 화성에만 해고자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한진중공업을 포함한 해고자 동지들이든 많은 사업장에 해고자들이 있으니까 그런 해고투쟁을 남의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참여하는 후원회원들과 공감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도 해봤다.
그런 사업을 기획적으로 짜서 무겁지 않게. 해고 자체가 사안이 굉장히 무겁지 않나. 어차피 그것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동지들은 그 해고의 사안이 무겁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고 있을 것이다. 드러내지 않더라도 같이 하면서 지지연대하는 실천을 가볍게 해도 상관없다. 해고라는 내용 자체가 무겁기 때문에 실천은 가볍고 발랄하게 할 수 있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개인적인 아이디어가 든다.

김수억 : 기아해복투와 이후 공투체 결합을 고민하는데. 나는 기아 지금 현장투쟁을 복구하지 않는 한은 해고자 투쟁 자체가 제대로 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석방대책위가 대중사업을 해 나가면서 그동안 해고자 복직문제가 대단히 고립 속에서 진행이 되어왔잖나. 고립을 뚫고 여론을 환기시키고 조합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내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우리가 해고자 복직투쟁을 사업으로 해나가겠지만 현장 다른 조직과 활동가 동지들의 연대나 투쟁이 함께 조직되지 못하면 여전히 같이 비슷한 고립으로 갈 거라는 거다.
우리가 제안할 수 있는 동지들은 이미 제한적이다. 앞으로 우리가 사업을 다르게 제안한다고 해서 확 늘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그래서 공투체에 대한 부분들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기아차는 2년 무쟁의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내년에 다시 복구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지금은 우스갯소리가 아니지 않은가 현중 꼴 된다는 그런 말들이. 그래서 이러한 인식을 우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파적인 정치조직도 입장 때문에 그렇든 선거에 대한 또다른 이해 때문에 그렇든 아니면 기존의 현장조직들이 자신의 세 유지를 위해서 정세에 개입을 하든 공투체에 대한 부분들은 각 자기 단위들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서 제안될 수밖에 없는 시기인 것 같다. 여러 단위 동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근데 우리 기아해복투 같은 경우에는 각 제 조직들 혹은 개별들의 이해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투쟁을 왜곡하지 않도록 공투체를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내용을 좀 더 우리가 개입해서 최대한 현장투쟁을 복구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 부분을 어떻게 결합시킬 거냐 하는 것이 고민이다. 현장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는 문제,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공투체에서 어떤 내용을 얘기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 새롭게 현장조직 운동에 대한, 최근 새롭게 건설되기도 했고 그걸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 사이에 입장이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거기에 어떤 내용으로 어느만큼 개입할 건지가 기아해복투에 분명히 큰 영향을 미칠 거라고 본다. 그래서 금방 말씀드린 기아차 현장조직운동에 대한 내년 전망들이 서로 전제되고 그 속에서 기아해복투 투쟁도 별개의 부분이 아니라 같이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해고자 복직투쟁이 우리의 가장 주요한 과제이고 원칙으로 서겠지만 전망논의가 영향을 분명히 미칠 것이기 때문에 11월 달에는 속 깊게 털어놓고 공유할 수 있어야 이후 투쟁에 있어서, 불협화음이나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것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한다.

윤주형 : 나도 옆에서 보니까 세 명의 동지가 사기꾼은 아닌 게 확실하다(웃음). 이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안하는데 우리 안에 그걸 만들어 가는 게 쉽진 않을 것 같다.

김수억 : 출소한지 한 달 반 동안 다른 사내하청동지들 만나면서 제일 많이 들었고 했던 얘기가 “미안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다시

 

△ 2년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김수억 전 비정규직지회장

조직을 해야지요” 이런 얘기였다. 왜냐면 기아차투쟁이 근 4년 동안 전무 했잖나. 동희오토 투쟁, 지난하지만 정말 끈질기게 싸워서 한계가 있지만 단계적인 복직 쟁취를 했고. 기륭투쟁이 있었고, 그 정점에 현자 울산, 아산, 전주동지들의 점거파업투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기아차 현장은 침묵했다는 것이다. 그 동지들이 2005, 2006, 2007년을 바라보면서 기아차 투쟁이 희망이라고 하는 얘기를 4~5년 전에 들었다. 그랬던 기아차 현장은 어떠했는지 투쟁하는 동지들의 엄혹한 평가, 비판과 요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아차 투쟁을 어떻게 다시 세워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정규직 비정규직 현장 구별되지 않는다. 2003~2006년 투쟁하면서 정규직 동지들에게 들었던 따듯한 말은 “비정규직 투쟁하면서 정말 요새 투쟁하는 맛이 난다.” 현장에서 새롭게 파업의 질서를, 예전이 마치 화석화된 파업, 일정파업이었다면, 이건 우리들도 대처하지 못할 정도로 역동적인 상황들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주위 활동가들보다도 계급적으로 각성되는 과정이었다.
그런 기억들이 삭제된 것 아니잖나? 그걸 기억하고 있는 동지들이 여전히 기아 현장에서 개별로 남아 있든, 해고자로 남아있든, 다시 그걸 어떻게 복원시키고 지금 조건에 맞춰 만들건가 고민을 하고 있다.
지난 번 <단노회> 총회를 했는데, 마침 회의 들어가기 직전에 국회진입이 몇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은데, 한미FTA 투쟁하면서 국회 진입했다는 사진, 공권력과 싸움 붙고 있는 사진을 회원동지들과 공유하면서 이야기했다. 기아차 내의 담벼락 안에서만 보면 우리들이 대단히 어둡고 앞으로 어떻게 되겠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지만, 당장 밖에만 눈 돌려봐도, 그리고 사내하청투쟁을 바라보더라도, 한진을 봐도, 벌써 옛날 얘기 같지만 08년 촛불을 봐도 지금 처한 현실 속에서 노동자민중이라는 대중들은 끊임없이 싸움하고 있고 터져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화약고를 여는 투쟁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동지들이.
결정적으로는 한진의 희망이 희망으로 확대 안 되고 촛불이 더 등불로 안 되고 결정적으로 조직노동자들이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했고 집행부를 현장에서 견인해내지 못했고 견제하지 못했고. 그래서 <단노회> 동지들과 올해 말 내년 바라보면서 이미 담벼락 밖은 들끓고 있는데, 현장에서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는 부분들, 기아현장에서 못하는 부분들이 절망이 아니라 담벼락 밖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에 우리는 어떻게 함께하고 조직할 것인지, 희망으로 좀 더 봤으면 좋겠다. 대단히 희망스럽다, 객관적 상황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장의 새로운 지도력을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다시 한 번 해보자!
결론은 초라하지만 우리가 앉아있는 이 기아해복투, 그게 하나의, 11년 12월부터는 현장에서 첫 계기가 될 거라고 본다, 이 활동들이. 집행부도 생각하겠지만 그런 거 말고. 그래서 장황하게 얘기한 전체적인 전망에서 기아해복투 활동부터 하면 내년도 여러 변수들에 부딪히지 않을까, 또 변수들을 기회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이상욱 : 지금 현장의 척박함과 현장조직들의 이전투구, 관료화된 노조의 암울함 이런 것들 속에서, 현장 밑바닥의 그나마 하고자하는 동지들이 해고자 투쟁을 함께 하면서 보내줬던 연대와 지지는 암울하진 않았다. 그것이 현장조직을 뛰어넘고 좌우의 문제를 뛰어넘어서 어쨌든 해고문제가 풀려야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석방대책위가 결국 쭉 해오면서 그런 지지와 연대는 종파적이지도 않았고 현장조직에 가두어지지도 않았다. 노조의 관료적인 체계에 억압받지도 않았다. 단 우리들이 무능력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좁은 공간, 퇴근장이라는 좁은 공간 혹은 천막이라는 좁은 곳에서만 이렇게 얘기되어 졌던 것에 안타까움과 한계가 있던 것 같다.
이제 가칭 기아해복투가 만들어지고 후원회가 만들어졌을 땐 이 공간을 열고 확장시키는 그런 활동을 조금 더 열린 마인드로 해봤으면 좋겠다. 공장 울타리가 아니라 밖의 해고자 동지들과 교류하면서 그런 활동이 그나마 대단히 암울하다고 느끼는 활동가들의 숨통을 좀 틔을수 있지 않을까. 그 속에서 나도 소통 받고 공감을 할 수 있는 활동이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인 거다.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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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FocuS][국제]리비아 민주화 투쟁, 어디로 가는가!

  • 분류
    국제
  • 등록일
    2011/11/18 14:40
  • 수정일
    2011/11/18 14:40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10월20일 카다피가 최후를 맞았다. 반카다피 진영의 공세로 수도 트리폴리를 내주고 자취를 감춘 지 두 달 만이다. 지난 42년간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카다피의 비참한 몰골을 담은 동영상은 곧바로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됐다. 리비아인들은 이제 카다피가 복귀해 압제를 다시 가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는 확실히 벗어나게 되었다.
반카다피 진영이 무장투쟁에 나선지 반년 만에 리비아의 민주화 투쟁은 극적인 전환점을 맞고 있다. ‘카다피 없는 세상’은 더 이상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등장했다. 민주화 시위의 격랑에 맞서다 종말을 자처한 카다피는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에 이어 쫓겨난 ‘세 번째 독재자’이자, 내전 끝에 자국의 시민군에게 붙잡혀 생을 마감한 ‘첫 번째 독재자’로 역사에 남게 됐다.
하지만 ‘카다피 이후’ 리비아의 앞날에 대해선 우려 섞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인구 600만의 리비아에서 반카다피 진영이 지난 6개월간의 내전으로 5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밝힐 정도로 민주화 투쟁은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카다피 정권의 붕괴, 더 나아가 카다피의 죽음이 당장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리비아는 다시금 새로운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카다피의 몰락

튀니지를 시작으로 촉발된 아랍의 민주화 투쟁에서 최근 리비아 사태는 중대한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민주화 시위가 장기화 되고 있는 시리아, 예멘 등에서 리비아의 반카다피 진영이 거둔 승전보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국가권력의 무차별적인 유혈진압으로 수백, 수천 명의 사상자가 연이어 발생함에 따라 평화적 정권교체보다는 리비아식 무장투쟁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카다피 체제의 종식은 ‘아랍의 봄’ 이후 리비아에서 예외적이고 독특한 상황을 창출하고 있다. 물론 시민혁명의 불길이 먼저 타오른 튀니지나 이집트처럼 리비아에서도 지난 수십 년간 지속된 독재체제가 몰락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의 저항은 권위주의 정권의 강경탄압에도 불구하고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으며 되레 광범위한 파급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앞선 사례와 달리 리비아의 민주화 과정은 내전을 통해 달성되었다는 점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인다. 카다피가 거리에서 움터 나온 민주적 요구를 무참히 짓밟고 시위대를 향해 대규모 학살에 나서자, 반카다피 진영으로 결집한 리비아의 수많은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발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이후 내전에는 서방세계의 군사개입까지 이뤄졌다.
결국 내전 6개월 만에 카다피가 트리폴리를 버리고 도주함으로써 철옹성 같았던 카다피의 권력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것은 끝내 카다피의 죽음마저 불러왔다. 그런데 리비아에서 카다피 체제의 종말은 말 그대로 ‘구체제의 몰락’을 의미했다. 기존의 국가권력 그 자체가 증발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카다피 정권의 붕괴에서 정부 인사 몇몇의 교체, 권력기구 일부의 개편 등 체제 개혁조치는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튀니지와 이집트만 해도 민주화 투쟁 이후 기존의 국가기구에는 어떠한 파괴도 없었다. 특히 군대·경찰·정보기관과 같은 핵심적인 권력기관은 해체되지 않았다. 지난 10월23일 첫 민주 선거를 치른 튀니지에서는 온건 이슬람주의와 서구식 의회주의와의 결합을 표방한 엔나흐다당이 승리하며 서방세계를 안심시켰으며, 11월 총선을 앞둔 이집트의 경우에도 군부가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 여태껏 체제의 연속성을 지켜내고 있다.
문제는 ‘공공의 적’ 카다피에 대항한다는 단일한 목표로 묶인 반카다피 진영에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구심점의 해체다. 카다피의 죽음으로 반카다피 진영은 축제 분위기를 맞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새로운 혼란을 예고하고 있다. 게다가 카다피 추종세력의 영향력이 리비아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도 아니다. 카다피가 “최후까지 항전할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긴 순교자로 부상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카다피의 절대 권력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리비아는 지금 거대한 권력공백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혼돈의 기원

리비아에서 나타나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은 지난 42년 동안 지속된 카다피 체제의 권력 시스템을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 카다피 정권의 특성으로 대체로 시민적 권리의 부재, 카다피의 변덕스런 통치 스타일, 카다피 가족 및 친족집단 간의 부패 등이 거론되지만 이러한 점들은 아랍권뿐 아니라 그 밖의 여타 독재정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리비아의 현 국면을 이해하기 위해선 카다피 체제가 지닌 고유한 특징 역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69년 리비아 왕정을 무너뜨리고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는 1977년 ‘인민의 권력’라는 뜻의 ‘자마히리야’(Jamahiriya) 체제를 선포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통치 시스템은 ‘혁명·군대·부족’이라는 세 가지 지렛대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지난 봄 아랍권의 민주화 열풍이 리비아로 전파되기 전까지 심지어 내전의 와중에서도 그 작동을 멈추지 않았다. 카다피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맹신한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 혁명위원회는 국가의 모든 조직과 기업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카다피의 저서『그린북(The Green Book)』(1976)에 기초해 자마히리야 교의를 지키고 민중을 동원하는 보증인 역할을 했다. 기존 회원들의 지명으로 선출되는 3만여 명에 이르는 혁명위원회 회원들은 승진과 물질적 보상의 혜택을 누렸다. 때문에 이들은 체제수호 세력으로서 지난 2월15일 리비아 동부 벵가지에서 최초의 시위가 벌어졌을 때 이를 진압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카다피와 그의 가족 보호를 전담하는 친위부대가 있었다. 친위부대는 1만5천 명의 육·해·공 통합군 형태로, 이 부대의 병사들은 주로 카다피 체제에 충성해온 리비아 중부와 남부의 두 거대 부족 카다파족과 마가리하족에서 충원되었다. 친위부대 역시 카다피 체제가 제공하는 수많은 재정적 혜택을 받았으며, 이들은 민주화 투쟁이 내전으로 격화되자 카다피의 뜻에 따라 반카다피 진영을 향한 무차별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다피는 리비아의 부족사회 전통을 자신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리비아는 사회문화적으로 아직까지도 부족사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이다. 카다피도 집권 이후 줄곧 각 부족들을 상대로 포섭과 배제의 정책을 펼치며 리비아의 부족사회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통제하고자 했다. 그 결과 카다피 시스템에 깊이 연루된 부족들의 구성원이 많이 사는 리비아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는 내전 중에 중립을 지키거나 민주화 투쟁에도 거의 가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카다피라는 한 명의 절대적 통치자와 그 지지자들은 체제의 운명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인민의 권력, 즉 자마히리야를 자임한 카다피 정권의 실체였다. 이런 까닭에 카다피의 실각은 곧 억압적 통치권력 자체의 붕괴로 이어졌고, 친카다피 세력이 카다피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저항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카다피의 권력을 대체할 새로운 권력,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지만 당장 리비아는 전쟁의 내상 치유와 사회통합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군웅할거’의 시대

지난 10월23일 반카다피 진영의 대표를 자임하는 국가과도위원회(이하 ‘과도정부’)는 ‘리비아의 해방’을 공식 선언했다. 현재 과도정부는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을 비롯해 세계 30여국으로부터 리비아의 합법정부로 승인 받으며, 이를 근거 삼아 리비아의 재건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과도정부가 앞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과도정부를 이끄는 잘릴 위원장조차 “새 정부 출범작업이 일정한 계획에 따른 것이라 말할 수 없다”고 실토할 정도다.
오히려 반카다피 진영의 상당수는 과도정부의 노골적인 친서방주의와 권력집중화에 경계하며 이후 정치권력의 분할과 경제적 보상을 놓고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단적으로 수도 트리폴리의 경우 리비아의 무장그룹들이 서로 분점하고 있는 상황이며, 서방의 입장을 대변하는 과도정부의 통제에는 따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리비아의 민주체제를 위한 독자적인 방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과도정부 중심의 권력강화와 이권통제에 반대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트리폴리는 지금까지는 약탈이 거의 없는 등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편이지만 향후 민주화 투쟁의 성공과 실패를 가를 중요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이러한 반카다피 진영의 분열상은 지난 2월 벵가지 도심에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카다피 축출이 머나먼 미래에 지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소통하는 청년세대의 다양한 요구와 불만이 거리에서 막 분출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카다피의 유혈진압으로 사태가 확산되면서 민주화 투쟁은 내전을 거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그동안 카다피 체제로부터 소외되거나 불이익을 받았던 세력들도 하나둘씩 반카다피 기치 아래 결집해 들어갔다.
부족주의 성향이 강한 리비아에서 몇몇 유력 부족들은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고, 카다피 체제에서 불법화된 급진적 이슬람주의 세력들도 무장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에 따라 반카다피 진영에서 나타난 초기의 자연발생적이고 무정형한 무장투쟁 양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재편된 것으로 보인다. 반카다피 진영이 수개월 동안 내전을 치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리비아 사람들의 민주화 열망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총과 차량, 그리고 자금을 댈 수 있었던 부족세력과 과거 게릴라 투쟁의 경험으로 카다피 친위부대와의 교전을 직접 지휘한 급진적 이슬람주의 세력도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지난 8월21일 트리폴리의 해방에서는 리비아 서부의 거대 아랍부족인 진탄족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 이후 트리폴리 서쪽에서 본격화된 진탄족의 공세가 점차 성과를 거두며 카다피를 압박했고, 이에 따라 카다피는 트리폴리를 놓고 동부와 서부의 반군으로부터 협공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8월 들어 전세는 반카다피 진영으로 역전되었다. 8월20일경 트리폴리 진공작전이 결정되자 이를 감지한 트리폴리 시민들도 비로소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었다.
반면, 서방세계는 자국의 경제위기 여파로 내전의 장기화를 부담스러워하며 6월 이후부터 공습은 유지하면서도 카다피와의 정치적 해결을 모색했다. 군사개입에 앞장섰던 프랑스조차 카다피의 해외망명을 추진했고, 미국은 8월 초까지 카다피 측과 비밀협상을 이어갔다. 하지만 협상은 카다피의 최종거부로 결렬되었고, 서방세계는 출구전략 찾기에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리비아 서부 반카다피 진영의 군사적 공세가 뜻밖의 변수로 출현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서방세계는 트리폴리 진공에 동참하며 리비아 내전에서 승자의 자격으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결과 카다피가 사라진 리비아에서는 소위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리비아 사태의 종결에서 그 누구도 압도적인 권위와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한 까닭이다. 여기에 리비아 최대의 국부인 석유와 천연가스를 놓고 서방 국가들의 이권다툼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벌써부터 프랑스가 적극적인 군사개입의 대가로 원유 생산의 35%를 할당받기로 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주도권과 경제적 이권을 놓고 벌어지는 이 같은 쟁탈전이 아니라 애초에 리비아 곳곳에서 터져 나온 민주화 요구의 실현에 있다.

 

 

 

카다피 없는 카다피 체제

현재 리비아 사람들이 카다피 체제를 전복시켰다는 해방감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변화에 대한 갈망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총을 만져보지도 못했던 평범한 사람들을 무장한 전사로 바꾸어 놓았고 결국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들은 민주화를 지지하고 그 투쟁에 직접 참여했다는 자부심 속에서 리비아의 내일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관계는 ‘카다피 없는 세상’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과도정부는 카다피가 제거됨에 따라 지난 10월31일 이후 서방의 군사개입이 종료된 것에 내심 불안해하고 있다. 그만큼 국내 지지기반이 취약한 탓이다. 과도정부는 반카다피 진영 사이의 이해관계 조정에서도 실패를 거듭하며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그럴수록 반카다피 진영의 개별화, 분권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지역과 부족, 그리고 이슬람주의의 내부 갈등에 따라 반카다피 기치를 내세운 민병대만 300여개에 이를 정도다.
과도정부가 사회 질서의 원칙으로 전면에 내건 ‘온건 이슬람주의’ 역시 해결책이 되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과도정부는 튀니지처럼 서구식 의회주의와의 결합 가능성을 열어놔 서방세계에 눈도장을 찍는 한편, 이슬람 율법에 따른 통치도 강조함으로써 부족세력과 급진적 이슬람주의 세력을 순치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온건 이슬람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포섭만으로는 반카다피 진영 내부의 반목을 진정시킬 수 없는데다가 민주화 투쟁으로 상승된 대중의 기대에도 못 미치면서 오히려 새로운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지난 10월23일 과도정부의 잘릴 위원장이 “이슬람 율법과 상충하는 일부다처제의 제한을 폐지해야 한다”고 밝히자, 카다피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선에 함께 섰던 수많은 리비아 여성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카다피 체제조차 ‘예외적’으로만 인정했던 일부다처제의 전면 허용에 새로운 압제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이처럼 과도정부에 대한 좌절과 실망에서 비롯되는 마찰은 단순히 일회적인 충돌로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의 일자리와 교육, 의료, 주택 등에서 다양한 요구가 분출하고 있지만 서방에만 기댄 과도정부의 정치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민주화 투쟁을 전후로 하여 리비아는 분명 바뀌었다. 리비아의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로의 회귀를 원치 않는다. 그 대신 누구나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또한 전쟁의 참상을 치유하고, 서방의 간섭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정부를 수립하길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의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 요구의 목소리는 아직 하나의 대안세력으로 결집하진 못한 실정이다. 반면 리비아의 실질적인 권력은 무장투쟁을 주도한 각 부족과 급진 이슬람주의 집단처럼 기존의 전통적인 세력들과 서방세계가 밀어주는 과도정부로 분산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이들 사이의 정치적 파워게임은 이제 본격화되고 있다.
이처럼 ‘아랍의 봄’ 이후 분출한 리비아의 민주주의는 카다피 정권의 붕괴로 전에 없는 새로운 기회를 맞았지만 반카다피 진영의 분열과 서방의 제국주의적 이권쟁탈 속에서 오히려 후퇴되거나 훼손될 위험에 처해 있다. 때문에 리비아 사태에서 지금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카다피 없는 세상’의 혼란스러움이 결국은 또 다른 지배 권력의 통치에 지나지 않는 ‘카다피 없는 카다피 체제’로 변질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한 잣대나 기준이 아닌 리비아 사람들의 구체적 현실이 고려되어야 하며, 또한 현재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요구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비아의 민주화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향한 그 발걸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중단되어선 안 된다.

 

 

 


‘반제투사’ 카다피와 맹목적인 반제국주의


한때 카다피는 제3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식민의 역사로 점철된 리비아에서 카다피는 서구 제국주의를 몰아낸 최초의 지도자였다. 카다피는 리비아 내 영국과 미국의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을 추방했다. 석유와 도로, 해운, 항만 등의 기반시설에 대한 국유화 조치도 단행했다. 카다피의 반제투쟁은 제3세계에서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국내에서도 1980년대에 카다피의 저서『그린북(The Green Book)』이 민주화 운동진영에서 제법 읽히기도 했다.
카다피는 “리비아는 사람들의 빈곤, 굶주림, 후진성, 무지를 제거하는 길을 따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른다”며 일종의 ‘리비아식’ 사회주의(‘자마히리야’ 체제)를 제창했다. 하지만 카다피는 1970년대 트리폴리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을 탄압하며 이후 노동자의 파업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또한 정당을 건설하거나 참여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령을 공포하기도 했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의 본질, 즉 단지 기업의 국유화나 계획경제의 도입이 아니라 생산수단을 전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며 노동자 대중이 실질적인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강경일변도의 반제투쟁 기치도 사그라졌다. 지난 2003년 카다피는 스스로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공식 선언하며 서방세계와 손을 잡았다. 동시에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가 풀리면서 리비아의 석유 개발도 붐을 이루었다. 대부분의 산업이 국유화된 리비아에서 카다피와 그의 일가는 서방과의 경제개방을 주도하며 막대한 오일머니를 축적했다. 반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지속된 독재체제의 결과로 누적된 대중들의 불만은 국가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자마히리야 교의로 통제당해야 했다.
그런데도 카다피에 대해선 늘 ‘반제투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심지어 아랍의 봄 이후 카다피 체제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에도 이러한 시각은 여전하다. ‘카다피의 친구’를 자처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시종일관 노골적으로 카다피를 찬양하고 나섰다. 지금 이들은 카다피를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된 ‘순교자’로 추앙하고 있다. 여기에 국내외 일부 좌파세력들도 동조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대중의 민주적 권리를 제한하고 대중을 통제하는 한, 그것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든 ‘반제국주의’를 선전하든 그 어떤 사회체제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카다피 체제는 그 몰락을 통해 반제국주의라는 것이 대중의 직접적인 이해에 기반하지 않을 경우 대중 위에 군림하는 지배세력에 의해 악용될 수 있음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카다피 체제를 끝까지 지지했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또는 ‘21세기 사회주의’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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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특집기획2] 복수노조와 주간연속2교대제는 대공장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구조조정 이후 대공장에는 비정규직을 배경으로 정규직노조와 회사 간에 안정적인 노사관계가 구축되었다. 이런 대공장 노사관계에 있어 가장 큰 변수로 꼽히고 있는 것이 완성차 공장에서 주간연속2교대제 도입과 복수노조 허용이다. 과연 이러한 변수들이 고착된 것처럼보이는 대공장 질서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현실은 주간연속2교대제와 복수노조 허용이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종속성을 강화하고 대공장과 여타 부분의 이질성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이 속에서 대공장은 점차 광범위한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의 바다에 떠있는 고립된 섬이 되어가고 있다. [편집자]

 

연재순서

⑴ 대공장 노조운동은 아직도 노동계급운동의 중심인가?
⑵ 복수노조와 주간연속2교대제는 대공장 운동질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⑶ 사회주의자들은 어떠한 방향을 취해야 할 것인가?


90년대 중반 신경영전략과 98년과 99년의 구조조정을 거치며 2000년대 들어 대공장에는 협력적 노사관계와 산업평화가 구축되었다. 대부분의 조선사업장에는 어용노조가 들어섰으며 겉보기에는 여전히 소위 민주노조가 건재하고 있는 완성차 대공장들의 경우도 실제로는 노사협의회에 기초한 일상적 합의구조를 통해 산업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그나마 형식적으로 진행되던 임·단협 투쟁조차 쟁의절차 없이 마무리되는 일이 대세가 되고 있다.

이 속에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비정규직노동자들과 관련 중소업체 노동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높은 임금과 고용안정성을 누리고 있다. 이는 대공장 내부의 고용형태가 나날이 다양화되는 가운데 가장 큰 균질적인 집단으로서 대공장 정규직이 공장 전체의 대표자로 기능하며 공장질서의 통제자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대공장이 다시 노동계급 운동의 전위로 서기 위해서는 이런 체제가 깨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지금의 대공장 질서에, 특히 자동차 대공장에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몇 가지 변수들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복수노조 도입과 주간연속2교대제를 비롯한 근무형태의 변경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변화들이 기존 대공장 질서에 어떤 영향을 불러올 것인가?


제조업의 축소


현대자동차는 곧 주간연속2교대제를 실행 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스코를 중심으로 철강 산업에서는 작년 말 근무형태가 4조 3교대제에서 4조 2교대제로 바뀌었다. 철강 산업의 경우는 8시간 3교대를 12시간 2교대로 변경하는 것이고, 자동차 산업의 경우 10시간(법정노동시간 8시간과 잔업 2시간)+10시간 교대제를 8시간+8시간, 혹은 8시간+9시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출처 : 한겨레신문

출처 : 한겨레신문이렇게 근무형태를 변경하면 법정노동시간은 변동이 없지만 제조업에서 일상화된 잔업이 없어지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실질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노동시간 단축은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을 더욱 안정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제조업에서 노동시간의 단축은 세계적 차원에서 제조업의 축소라는 배경 아래에서 등장하고 있다. 흔히 ‘탈산업화’라고 불리는 제조업의 축소현상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은 대개 이런 양상을 부정하거나 무시해왔다.

앙드레 고르 등에 의해 좌파 내에서 탈산업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이론가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크리스 하먼은 「‘신중간계급’과 사회주의 정치 (1983)」,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투표하는가? (1985)」, 「경기침체 이후의 노동자계급 (1986)」등의 논문을 통해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제조업과 전통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산업 노동자들의 주도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1)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폴 켈록은 이런 논지를 확대시켜 1987년 <국제사회주의 (International Socialism)>에 기고한 「과연 노동자계급에게 안녕을 고할 것인가 (Goodbye to the working class?)」2)라는 논문에서 UN 자료에 근거해 전통적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폴 켈록에 따르면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전통적인 제조업 노동자들이 다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남한, 대만, 싱가폴, 터키, 이란, 아르헨티나, 브라질, 중국,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등 제 3세계 국가들에서 더 큰 규모로 증가되었다. 1971년에서 1982년 사이 북미와 서유럽에서는 6.5%의 산업고용의 감소가 있었지만 세계적인 규모에서는 산업 고용이 14.1%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들도 인정했듯이 1970년대 이후 북미와 서유럽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제조업 비중이 뚜렷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산업 노동자들의 사회적 비중이 줄어듦에 따라 산업 노동자들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고 있던 좌파 정당들도 약화되었다. 사민당과 공산당 등 유럽의 좌파 정당들은 중간계급 동맹노선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선은 대개 이 정당들의 탈계급화와 우익화로 귀결되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이론가들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탈산업화가 아니라 산업의 확대와 이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탈산업화론이 노동당을 비롯한 좌파 정당들의 우경화 경향의 기초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당한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세계적인 차원에서 제조업 비중의 축소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 명확해 지고 있다. 2003년 미국 알리안스 자산관리(Alliance Capital Management LP)의 경제전문가들이 세계 20대 경제국 고용 동향을 분석한 결과 1995~2002년까지 제조업분야에서 줄어든 일자리가 2200만여 개에 달해 11%가 넘는 감소폭을 기록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기간 미국의 제조업 고용은 11.3% 하락했으며 일본은 16.1% 하락했다.

그런데 제조업 고용의 축소는 선진국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신흥공업국이라고 불리는 브라질과 중국 역시 각기 19.9%, 15.3%나 제조업 일자리가 감소했다. 폴 켈록이 산업 노동자 증가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 남한에서 제조업 일자리는 11.6% 감소했다. 예외적으로 멕시코와 같은 경우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과 환율 평가절하 등에 힘입어 같은 기간 제조업 고용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이 역시 2000년대 들어서는 증가율이 크게 둔화되었다고 한다. 이런 결과는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창출의 진원지라고 주장한 신흥 산업국에서도 90년대 이후 제조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제러미 러프킨은 『노동의 종말 (The End of Work, 1995)』이란 책을 통해 생산성의 향상으로 말미암아 제조업 뿐 아니라 모든 산업에서 전통적인 인간 노동이 소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의 옳고 그름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세계적으로 총고용, 특히 제조업 고용이 줄어들고 있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의 주된 원인이 기술혁신으로 말미암은 생산성의 향상에 있음도 분명하다.

현재의 제조업은 산업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농업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회적 생산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농업 생산성의 향상이 산업자본주의가 나타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듯이 제조업 생산성 향상으로부터 생겨난 사회적 여력은 새로운 사회적 필요들을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필요에 대응하는 일자리는 흔히 우리가 서비스 산업이라고 부르는 영역에서 창출되고 있다. 그리고 서비스 산업 부분에서 창출되는 일자리는 대부분 저임금과 불안정 고용에 처해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대량으로 창출되고 있다면 이는 제조업 부분이 아니라 산업구성의 변화와 함께 확대되고 있는 비제조업·서비스 분야에서 등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고통 받고 있으며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강력한 사회 불만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조직된 노동운동이 아니라 급진적인 개인이나 시민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 산업재편에 살아남고 대부분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대공장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조건을 확보하고 점차 보수적인 집단이 되고 있다.
 

남한에서 제조업 고용의 감소


남한 제조업의 비중은 아직 다른 산업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남한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GDP의 27.9%로 미국 12.6%, 일본 20.2%, 독일 22.7%보다 높다. 현재 세계 제조업 생산에서 남한이 차지하는 위치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에 이어 7위에 올라있다. 수치로만 볼 때 남한은 여전히 강력한 산업 국가이며 북미와 서유럽 국가들처럼 탈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남한의 제조업 역시 90년대 중후반을 정점으로 그 비중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1991년에는 500만 명이었던 제조업 취업자 수는 작년 402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16.9%에 불과했다.

서구의 선진자본주의 국가, 특히 유럽에서는 탈산업화의 진행과 함께 안정적인 제조업 일자리가 점차 줄어들면서 8·90년대 들어 노동시간단축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노동시간의 단축은 대개 고용불안의 확대에 따른 일자리 나누기라는 명목으로 제기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직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유연화 도입이 교환되는 양태로 나타났다. 그 결과 안정된 일자리의 창출 효과는 미미했으며 비제조업·서비스 분야에서 고용이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들이 늘어났다.

남한에서도 지난 2002년 주5일제가 도입되며 법정노동시간이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었다. 이 역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일자리 나누기라는 명복으로 추진되었지만 실제로는 중소제조업의 해외이전과 레저·관광 등 서비스 산업으로 국내 산업구조 전환을 유도하고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주5일제를 명분으로 탄력적 노동시간제의 확대와 법정휴무일의 축소, 유급휴가의 무급휴가로의 대체 등 노동유연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근로기준법이 개악되었다.

구조조정과 주5일제 도입을 거치며 남한 제조업은 섬유산업 등 중소제조업이 퇴출되고 자동차·조선·철강·전자 등 소위 수출 대자본의 주력 업종과 그 연관 분야를 중심으로 남게 되었다. 이들 분야에서 남한 자본은 세계적인 초국적 독과점체제의 최상층부에 진입했으며 지난 20년 동안 호황을 누려왔다.

하지만 막대한 이윤창출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남한의 수출대자본은 국내 설비투자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대기업은 설비투자는 대부분 해외에 집중되고 있으며 남아도는 돈은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두고 있다. 현대·기아 자동차의 경우 IMF 이후 국내 생산능력은 확충하지 않고 해외공장 신설에 주력했으며 국내 공장에 대해서는 모듈화·플랫폼 통합 등 합리화 공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해외 생산의 규모는 꾸준히 늘어 2010년을 기점으로 해외생산이 국내생산을 앞지르게 되었다. 반면 국내 공장의 고용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이로 인해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은 거의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으나 90년대 이후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였던 사내하청노동자들의 수가 200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만 명에 육박하던 사내하청노동자 수는 현재 6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울산공장 만큼 폭이 크진 않지만 다른 완성차 사업장에서도 하청노동자들의 수는 조금씩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3)

  

현대차 울산공장 1차 하청 수와 직영대비 비율 추이
(출처 : 금속노조 정책연구보고서, 금속노조 비정규노동자 조직화 전략에 대한 진단과 대안 연구)

대규모 제조업의 해외 진출은 자동차 산업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조선 산업의 경우 한진중공업, STX조선 등 중위권 조선업체들을 중심으로 해외진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수빅에 70만 평 규모의 대규모 조선소를 설립했으며 STX조선은 중국에 100만 평 규모의 조선소를 설립했다. ‘빅3’라는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도 블록공장과 선박수리 조선소를 중국과 베트남 등 해외에 건설했고 상대적으로 해외 투자에 소극적인 현대중공업도 2006년 중국 상하이에 지주회사를 설립했다. 대표적인 철강업체인 포스코 역시 중국, 인도, 브라질에 진출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그 결과 수출제조업의 호황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고용은 답보상태에 있으며 탈산업화와 산업공동화는 남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4) 자동차를 비롯해 제조업에서 근무형태 변경이 논의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간연속 2교대제의 제기 배경


자동차 산업에서 주간연속2교대제는 애초에 정규직노조의 요구였다. 98년 IMF 사태가 나고 구조조정의 위기에 처한 현대자동차 정규직노동자들은 근무형태를 종전의 주야맞교대에서 주간연속교대제로 바꿈으로써 노동시간을 줄이고 고용을 보장받으려 했다.

이에 대해 사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99년 이후 자동차 산업이 다시 호황에 접어들고 비정규직 증가에 기반한 일상적 합의구조가 형성되면서 굳이 근무형태 변경을 논의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에 들어 사측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대차 노사는 2005년 단협을 통해 2009년 1월1일부터 주간연속2교대제를 시행하기로 합의했으며, 2006년에는 교대제 변경과 연계한 월급제 시행을 합의했다. 2008년 단협에서는 ‘8+8시간’ 체제로 가는 과도기로 ‘8+9시간’체제에 합의해 주간연속2교대제가 곧 시행될 것처럼 보였다.

주간연속2교대제에 대한 사측의 태도가 변한 것은 구조조정 이후 형성된 산업평화 체제가 2000년대 중반 들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선 연재에서 지적 했듯이 자동차뿐 아니라 남한의 주요 수출제조업이 갖고 있는 경쟁력의 대부분은 사내하도급과 연관 중소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현대·기아자동차가 정규직의 총고용과 높은 임금을 유지하면서도 세계시장에서 경쟁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은 사내하청 제도와 부품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남한 제조업 특유의 사내하청 제도는 고용유연성 뿐 아니라 커다란 임금 차별을 수반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고용과 노동조건이 상당히 개선되었다고 하는 1차 하청노동자의 경우에도 임금은 여전히 정규직의 60% 수준에 불과하다.

또한 플랫폼 통합·모듈화와 함께 현대모비스처럼 현대자본이 직접 설립한 대형 모듈회사가 등장하면서 종래의 1차 부품업체 상당수가 모듈회사에 부품을 공급하는 2차 업체로 전락했다. 그 결과 부품업체에 대한 완성차 자본의 지배력은 훨씬 강화되었고 부품업체의 저임금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현대모비스는 전국에 산재한 12개의 공장 대부분이 완성차 공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서 직서열 방식(완성차 생산순서에 맞춰 부품을 차례로 공급하는 방식)으로 모듈을 공급하고 있다. 특히 울산·서산·아산·이화공장 등 대다수 공장에서 생산라인 전부 혹은 대부분이 사내하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임금과 높은 노동 강도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대형 모듈업체에 종속되지 않은 소수의 1차 부품업체들은 완성차 노동자들에 육박하는 노동조건을 갖고 있지만 대형 모듈업체에 종속된 2차 부품업체들로 갈수록 노동조건은 급격히 떨어진다. 실제로 자동차 산업의 2차 부품업체들의 경우 완성차 공장의 1차 하청노동자보다도 임금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동차산업 업체별 임금수준
(출처 : 금속노조 정책연구보고서, 금속노조 비정규노동자 조직화 전략에 대한 진단과 대안 연구)

수출 제조업의 대자본들은 이런 체제를 통해 정규직에게는 고용보장과 고임금을 선사하고 산업평화를 유지하면서 높은 이윤을 뽑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와 철강 산업을 중심으로 사내하도급의 불법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되기 시작했다. 근대 노동법에서 일반적으로 순수한 인력파견은 중간업체에 의한 이중착취의 위험성 때문에 최근까지 금지되어 왔다. 90년대 들어와서야 세계적으로 노동유연화가 강제되며 부분적으로 허용되는 추세이다. 남한 역시 98년 노동법 개악으로 파견법이 도입되며 일부 직종에서 인력파견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력파견 역시 엄격한 제한을 두고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제조업의 경우 공장제도의 형성과정 자체가 선대제 같은 전자본주적인 유제들을 정리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공장 생산라인에서 인력파견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최근에야 제조업에서도 인력파견이 조금씩 도입되고 있으나 이 역시 임금조건 등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파견법이 도입되기 전부터, 길게는 70년대 대공장 형성 초기부터 사내하청이라는 이름의 불법 인력파견이 조선·자동차·철강 등 주요 제조업체에 공공연히 존재해 왔다.

본래 하청관계란 어떤 사업자(원청)가 수행해야할 일의 일부를 다른 업자(하청)에게 완성·납품하도록 하는 계약관계를 의미한다. 사내하청이란 이러한 하청관계가 원청 작업장 내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내하청은 사실 인력파견과 구별되지 않는 위장된 인력파견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원칙적으로 하청과 인력파견의 근본적인 차이는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로 판명되기 때문에 사내하청이 불법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하청노동이 원청업체가 빌려주는 설비와 자재를 가지고 수행되는 외양을 띤다.

그래서 사내하청이 불법 파견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원청업체에 의한 근로감독이 명확해야 한다. 하청문제가 가장 심각한 조선 산업의 경우 오히려 하청의 비율이 워낙 높고 하청노동자들이 독립적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파견 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와 철강 등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 원청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작업을 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았기 때문에 불법 판정이 내려질 소지가 많았다.

이로 인해 2003년 자동차와 철강 등 사내하청이 많은 사업장에서 광범위하게 불법파견 진정이 들어갔고 정규직화 쟁취를 위한 하청노조의 건설이 급증했다. 2003~5년 사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졌으며 이는 상당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투쟁이 패배하면서 하청노조들이 거의 유명무실화되었지만 이후 적어도 1차 하청노동자들에 있어서는 고용이 보장되고 노동조건이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수년 동안의 호황으로 정규직의 임금이 상당히 높아졌고 1차 하청 역시 이전처럼 무조건 저임금을 강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착취구조를 재편성할 필요성이 등장했다. 이러한 필요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 주간연속2교대제 통한 노동시간단축이다. 따라서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를 노조가 먼저 제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철저히 자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주간연속 2교대제가 불러올 결과


현재 대공장 임금체제는 노동시간에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현행 임금체계로는 주간연속2교대제를 시행했을 경우 임금이 크게 줄 수밖에 없다. 비록 노조 측에서 “노동시간 연장, 임금삭감, 노동강도 강화 없는 주간연속2교대제”라는 소위 ‘3무원칙’을 내걸긴 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임금보전이었다. 때문에 현대차 노조는 주간연속2교대제와 함께 월급제 전환을 요구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물량이 축소되면서 고환율로 해외생산의 증가도 잠시 답보상태에 놓였다. 여기에 현대차 노조집행부의 사퇴 등 돌발 상황이 불거지면서 현대자본은 노동시간단축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고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은 수년 째 지연되었다. 이 사이 노동조합이 애초에 내세웠던 3무원칙은 사실상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세계 경제위기와 함께 생산 감소가 예상되면서 자동차 산업에서 주간연속2교대제도 빠르게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자동차에서는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기아차 노조선거에서는 모든 후보들이 주간연속2교대제 실시를 주요한 공약으로 제시했지만 이미 3무원칙을 제기하는 후보는 아무도 없었다.

완성차 대공장의 정규직노동자들은 이미 상당한 고령으로 40대 중후반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십여 년 간 호황이 계속되고 임금이 꾸준히 오른 덕분에 이들은 집도 장만하고 자식 교육 문제도 일정정도 해결한 상태이다. 주택 대출금도 대부분 상환했고 회사에서 무상으로 받은 주식은 착실하게 올랐다. 반면 고령화에 따라 야간노동은 더욱 고통스러워지고 있으며 공장을 그만 둘 경우 새로운 일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임금에 대한 욕구보다는 고용안정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

대다수의 정규직노동자들은 임금이 상당히 삭감될지라도 퇴직할 때까지 고용안정을 보장받고 힘든 야간근무를 안 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때문에 정규직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주간연속2교대제를 비롯한 근무형태 변경은 ‘상생(相生)’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웬만큼 임금이 삭감되더라도 정규직노동자들이 주간연속2교대제 사안을 가지고 투쟁에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주간연속2교대제는 대공장 정규직 이외의 부분에서 구조조정의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교대제 형태 변경에 따라 완성차 공장의 생산 시스템이 변하면 당연히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들과 완성차 라인에 직서열된 모듈업체들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곳은 완성차 공장과 모듈화에 종속되지 않은 1차 부품업체들 뿐이다.

주간연속2교대제 문제로 투쟁이 벌어진 유성기업은 자동차엔진의 핵심부품인 피스톤링과 실린더라이너 등을 생산해서 현대·기아, GM대우, 르노삼성 등 완성차 공장에 납품하는 회사이다. 완성차 업체보다 앞서 주간연속 2교대제를 체결해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는 두원정공은 디젤엔진에 장착되는 펌프를 독점적으로 생산하여 완성차 공장에 납품하는 회사이다. 주간연속2교대제가 논의되고 있는 만도, 한라공조, 케피코 등 다른 부품업체들도 대개 마찬가지다. 이런 사업장들은 노동조건이 완성차에 육박하고 노조 조직률도 높은 편이다.

이들 업체들은 모듈업체와 달리 직서열된 업체가 아니기 때문에 완성차공장의 근무형태 변경에 직접 영향을 받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 사업장의 경우, 완성차 공장과 비슷한 노동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조의 요구로 주간연속2교대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성기업의 예에서 보듯이 이들 사업장에서도 주간연속2교대제는 노조탄압의 기제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노조지도부가 강성인 유성기업의 경우 주간연속2교대제 전환 시 노동조건 합의 기준이 높아지는 선례를 막기 위해 완성차 자본이 노조탄압을 직접 지시한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큰 문제는 사내하청을 비롯해서 노조가 없거나 취약한 저임금 업체들이다. 교섭력이 약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임금 및 노동조건은 주간연속 2교대제에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대형 모듈업체에 부품을 납품하고 있는 소규모 부품업체들 역시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주간연속2교대제가 불러온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은 정규직과 일부 1차 부품업체 정규직노동자들에게 고용보장을 대가로 임금에 대한 일정한 양보를 받아내는 한편 이를 기준으로 사내 비정규직과 하위 생산계열에 있는 부품업체 노동자들에 대해 인원정리와 저임금을 강요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주간연속2교대제가 불러올 이러한 결과에 맞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과연 사활을 건 투쟁을 펼칠 것인가? 그럴 가능성은 낮다. 유성기업 투쟁에 대해서도 완성차 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는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다.
 

노동정책의 변화와 복수노조


박정희 군사정권의 등장 이후 남한 노동법은 노동자들의 단결권·단체행동권을 제한하여 노조설립을 어렵게 하는 대신 개별 노동자의 권리를 근로기준법을 통해 비교적 높은 수준으로 보장하는 형태를 취해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투쟁이 가로막혀 있는데 근로기준법이 아무리 잘 만들어졌어도 지켜질 리 없었다. 때문에 남한 노동운동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 열사의 외침에서 시작되었다.

노동법이 가진 반노조적 성격은 유신체제와 신군부 정권을 거치며 산별노조가 법적으로 금지되는 등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약진한 민주노조 운동은 이러한 반노조 입법들을 힘으로 무효화시켰다. 민주노조 진영은 불법화된 민주노조 운동을 합법화시키고 정치활동 금지 등 여러가지 제약을 없앨 것을 요구했다. 그로 인해 민주화 이후 노동법 개정 흐름은 잠시 동안 이미 강력한 현실 세력으로 떠오른 민주노조 운동을 합법화·제도화하는 방향을 취했다.

하지만 정부의 노동정책은 90년대 들어 당시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추어 노동유연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민주노조 운동의 합법화·제도화 요구와 정부의 노동유연화 제도화 요구는 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해 맞바꿔졌다.

2000년대 들어 노동유연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제조업을 축소하고 서비스 산업의 확대를 유도하는 정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서 2010년 사이에 남한의 제조업 고용은 100만 명이 줄고 서비스업 고용은 770만 명이 늘었다. 이는 90년대 이후 새롭게 창출되는 일자리가 대부분 서비스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지적한 대로 노동시간 단축은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주5일제 도입과 비슷한 시기에 논의되기 시작한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은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는 노동정책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은 노동유연화를 더욱 강화하고 새롭게 창출되는 산업에 노조설립을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그 골자는 기존의 노조 중심의 노사관계를 노사협의회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이후 벌어진 노동법 개악과 복수노조 도입 등 노동정책의 기본방향은 정권의 교체와 무관하게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을 따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2009년 12월 민주노총을 배제한 노사정위원회에서 복수노조 허용과 함께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실시가 합의되었고 같은 달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이명박 정권에서 추진된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등 노동법 개악과 복수노조 허용은 모두 노사관계로드맵의 기본 방향에 따라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고 노사협의회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통과되자 민주노총은 부랴부랴 정부가 후속논의를 위해 구성한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이하 ‘근심위')참여했다. 그러나 노동부는 2010년 4월3일 일방적으로 ‘근로시간면제자’라는 개념을 만들어 이들의 활동시간과 내용, 그리고 인원까지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타임오프 매뉴얼을 배포했는데, ‘근로시간면제자’는 기존에 노조가 자율적으로 선출했던 ‘노조전임자’와는 달리 노사 간의 합의를 통해 선정해야 하고 그 이외의 노조전임자를 둘 수 있으나 노조 자체의 재정을 통해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메이데이 새벽 근심위는 타임오프제를 기습적으로 처리했다.
 



이런 변화 역시 대공장과 여타 부분에 다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공장 노조관료들은 애초부터 타임오프제 반대 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자본과의 개별적인 합의를 통해 편법으로 빠져나갈 수단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아차 노조관료들은 처음부터 MB정권의 노동운동 탄압과 타임오프에 반대하는 금속노조 총파업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혀 총파업을 무력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결국 타임오프제 투쟁의 대리전이라던 기아차 임·단협에서 기아차 노조관료들은 수당을 신설하는 편법을 통해 전임자 임금을 보전받기로 사측과 합의하고 투쟁전선에서 빠져나갔다. 이런 예는 대공장에서 자본 역시 노조와 직접적인 충돌보다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소규모 노조들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로 노조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복수노조 역시 마찬가지다. 97년 노사정 합의에 의해 통과된 복수노조 허용은 오랫동안 시행이 미루어져 오다가 올해부터 시행되었다. 본래 복수노조 허용은 민주노조 진영의 오랜 요구였다. 남한에서 복수노조 금지는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독재 정권이 1963년 노동법 개악을 통해 도입한 것으로 그 목적은 어용노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은 어용노조가 이미 존재하는 사업장에서 민주노조 건설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폐지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5)

하지만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대다수 대규모 사업장에서 민주노총 산하 노조가 안착된 지금 복수노조를 둘러싼 노자간의 이해는 뒤바켰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복수노조 허용을 내세워 근기법 개악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복수노조 허용과 함께 제기된 교섭창구 단일화는 자율적으로 교섭창구가 단일화 되지 않거나 과반수 노조가 없을 경우 조합원 수에 비례해서 공동교섭대표단을 꾸리고 조합원 수가 10% 미만인 노조는 공동교섭 대표단에서 제외되게 되어있다. 때문에 소규모 노조는 설립되더라도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보장되기 어렵다.

복수노조 시행은 중소사업장에서 과반수를 조직하지 못한 소수 노조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 분명하다. 반면 대공장의 경우 복수노조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기존 노조가 교섭권을 잃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미 조합원의 대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대공장 노조관료들의 입장에서 교섭창구 단일화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다. 복수노조 허용과 교섭창구 단일화를 통해 장기적으로 대형노조만이 노동3권을 온전히 보장받는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공장에서도 복수노조 허용에 의한 어용노조의 등장 가능성은 자본에 대한 종속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미 대공장에서 실제로 많은 사안이 노사협의회를 통해 처리되고 있다. 지난 연재에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체제는 대공장에서 일상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평화를 유지하는 주요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역으로 노조관료들이 노사협의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경우도 많다. 일례로 지난 6월말 한진중공업 노조가 파업을 접을 때 채길용 집행부는 직권조인 형식을 피하기 위해 노조가 아니라 노사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사측과 합의했다. 노조전임자 문제 역시 노사협의회를 통해 각종 위원을 확대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대공장에서 노사협의회의 역할은 갈수록 강화될 것이다. 6)

문제는 노조가 없는 신규사업장들에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복수노조 허용 이후 새롭게 건설된 노조들은 대부분 어용노조로 나타나고 있다. 복수노조 허용 이후 건설된 신규노조의 70% 정도가 친사용자 성향의 노조로 알려져 있다. 신규사업장에서 노조를 설립한다 해도 여러 노조 중의 하나에 불과할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이런 노조 난립 상황에서 신생노조가 노조로서 제기능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될수록 노조의 필요성은 줄어들고 사측과 교섭은 노사협의회를 통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 질 것이다. 결국 복수노조 허용을 구실로 강행된 노동법 개악은 무노조 사업장에서 노조설립을 원천적으로 가로 막고 노사협의회를 통해 노동자들의 불만을 포섭할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청노동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작년 말 현대차 불법파견 투쟁이 벌어지며 다시 사내하청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자 정부는 올해 7월18일 사내하도급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데 이어 9월9일에는 비정규직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역시 비정규직종합대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사내하청 문제가 중심이 된 대책이었다. 여기서 핵심적인 대목은 불법파견으로 확인될 경우 사용기간과 관계없이 직접접고용하도록 하는 것을 의무화하여 1차 하청에 대한 부분적 정규직화 허용을 암시한 것과 사내하도급 노동자들에 대한 원청 자본의 책임성을 강화하여 그동안 일체 부정해온 원청사용자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울러 원사업주는 사내하도급 근로자의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존중하고 노사협의회 또는 간담회를 통해 하도급 근로자 대표의 의견을 청취하도록 했다”고 못박음으로써 원청 자본과의 교섭창구는 노사협의회를 통할 것을 명확히 했다.

지금처럼 하청노조가 원청과 교섭권을 확보받지 못하고 노조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와중에서 하청노동자들 역시 노조를 설립하거나 노조활동을 하기보다는 노사협의회를 통해 원청과 대화를 시도하려들 것이다.
 

조직 노동운동 중심의 대응이 가진 문제점

 

이러한 노사관계의 변화에 대해 조직노동운동 중심의 대응이 가진 문제점은 작년 전임자 축소를 비롯한 노동법 개악 투쟁의 패배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복수노조 허용과 교섭권 창구단일화,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분리될 수 없이 한 덩어리로 제기된 것이지만, 대공장 정규직노조를 중심으로한 조직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을 뿐 정면으로 투쟁전선을 설치하지 않았다.

복수노조 도입과 교섭창구 단일화, 타임오프제는 힘없는 소규모 노조에 치명적인 것이다. 하지만 금속노조 관료들과 활동가들은 이들 사업장의 투쟁을 조직하려는 시도보다는 대공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노동법 개악 반대 투쟁은 결국 대공장 노조관료들의 임금을 보전하는 투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교섭창구 단일화반대에 대해 대공장 노조의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결합하여 기아차 단협을 노동법 개악에 있어 전국적인 노자 대리전이라고 주장했던 정치세력들은 이런 결과에 대해 침묵했다. 오히려 <노동전선>은 “민주노총 차원의 투쟁전선이 붕괴된 상황에서 기아자동차지부의 타임오프저지 투쟁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기아차노조에 면죄부를 주었다. 심지어 기아차에서 활동하는 다함께 회원은 <레프트21>에 기고한 글에서 “타임오프제를 현장에서 무력화”시켰다고까지 평가했다.

이러한 정규직 중심 노선의 문제는 주간연속2교대제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노동운동의 전투적 분파들이 제기하고 있는 “노동자 살리는 주간연속2교대제”와 같은 슬로건이 그러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노동자 살리는 주간연속2교대제” 따위는 없다. 완성차공장의 주간연속2교대제는 완성차 정규직과 일부 1차 부품업체를 제외한 자동차 산업의 여타 노동자들에게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조직된 완성차 정규직과 1차 납품업체에 대해서는 노동시간 단축과 고용보장이 임금의 하락과 교환될 것이다. 정부의 비정규직종합 대책 등을 볼 때 고용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는 1차 하청 역시 노동조건을 일정 방어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전혀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2·3차 하청과 단기계약직, 모듈공장과 2차 부품업체에 대해 더 큰 폭의 임금하락과 노동강도 강화 뿐 아니라 인원정리가 자행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공장 정규직과 1차 하청은 생산의 필수적인 핵심으로 놓아두고 외부환경 변화에 의한 생산량의 변동에 따라 2·3차 하청노동자, 단기계약직, 훈련생 등으로 인원을 조정하는 체계가 등장할 것이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자동차 대공장에서는 이들을 중심으로 인원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대한 현장조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완성차와 1차 납품업체의 정규직과 1차하청과 나머지 노동자들의 임금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다.

대부분의 노동운동 단체들은 ‘올바른’ 주간연속2교대제의 쟁취를 위해 완성차 노동자들과 하청노동자들과 부품업체 노동자들로 구성된 공동투쟁체를 만들 것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기본적으로 과거 대공장에서 하청노동자들의 원·하청 공동투쟁 요구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과거 비정규직투쟁에서 나타났던 원·하청연대 기구들은 경험적으로 볼 때 거의 예외 없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정규직의 통제기구로 기능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은 망각되고 있다.

하청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는 언제나 항상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에 의해 희생되었다. 만약 완성차, 하청노동자, 부품사 공투체가 성사된다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규직노동자들이 자신의 이해를 버리고 하청노동자와 부품업체 노동자들의 이해를 주장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더 이상 대공장 정규직운동을 전술의 주체로 놓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을뿐더러 설사 실현된다 해도 그다지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 어려우며 정규직 운동질서에 대한 환상만을 불어넣을 뿐이다.

정규직 중심의 공장질서를 해치지 않는한 복수노조 허용과 노사협의회로 유도는 정규직의 이해에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으며, 금속노조와 대공장 노조관료들의 소위 1사1조직 정책은 총자본이 취하는 방향에 사실상 영합하고 있다. 금속노조의 1사1조직은 하청노동자들의 독자적 투쟁역량을 파괴하는 효과를 내고 있을 뿐 아니라 노조로 조직되거나 조직가능성이 높은 어느 정도 고용이 안정된 1차 하청노동자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아자동차 2차 하청노동자로 일하다 해고된 이동우 조합원의 문제(기획 대담 기사 참조)에서도 나타나듯이 금속노조와 정규직 지부는 2·3차 하청노동자들의 문제를 조직적으로 받아 안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노동자들은 공장질서로부터 배제된 채, 금속노조의 개별조합원으로만 인정되고 있다. 때문에 대공장노조는 이들에 대한 아무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현행 금속노조의 1사1조직 방침은 자본의 포섭논리에 곧바로 대응하고 있다.
 




제조업 대공장 운동의 미래


제조업의 축소가 대세라면 이후 제조업 대공장 운동의 전망은 어떠할 것인가? 대부분의 산업 국가에서 대공장 노동자들은 이미 사회적인 다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의 산업 국가들에서 제조업과 공장이 완전히 폐지되거나 이전되는 일도 상상하기는 어렵다.

70년대 이후 가장 극적으로 탈산업화 양상을 보인 곳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이들 나라에서 1970년대 초반 35%정도에 달했던 제조업 고용비중은 현재 10% 남짓한 수준에 불과하다. 80년대 이들 나라에서 진행된 산업 구조조정은 상당히 폭력적인 과정을 수반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대공장 노조들은 격렬한 저항보다는 자본의 공격을 순순히 내면화하고 다수 조합원들의 고용을 보장받는 길을 취했다.

장하준이 지적한 대로 제조업은 생산성이 높고 파생효과가 크기 때문에 제조업이 해외로 완전히 이전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분업에 대한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대부분의 국가에서 농업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과 영국만 해도 모두 여전히 제조업 대국으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일본과 독일 같은 경우는 아직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제조업이 유지되고 있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오히려 제조업의 중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남한 역시 90년대 이후 꾸준히 산업재편에 대한 논의가 되고 있지만 대안은 마땅치 않다. 2000년대 초반에 NT, BT, IT에 대한 말만 무성하다가 결국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했다. 최근 들어 MB정권은 유전, 원전, 시스템 반도체로 중심 산업을 이동할 것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리 현실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결국 내수산업의 부양을 위해 전통적인 토목·건설 사업에 의존하고 있는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아파트, 골프장 건설, 4대강 사업 등 토목·건설 사업의 활성화는 경제적으로 단기적인 부양효과를 낼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인 산업재편의 방향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여전히 수출제조업의 역할은 클 수밖에 없다. 남한에서 대공장 인원은 서서히 축소되며 일정 수준에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중공업처럼 오히려 국내 설비를 늘리고 있는 경우도 있다. 남한 자본은 장기적으로 국내 정규직 고용을 자연 축소하면서 효율화될 가능성이 높다. 기존의 조직된 대공장노조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공격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야금야금 권리를 축소시키며 다수의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과 함께 대공장 핵심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들 국가에서 새롭게 창출되는 비제조업·서비스 분야의 고용은 대부분 저임금·비정규직으로 고착되는 반면 조직되거나 잠재적으로 조직화 가능성이 높은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고용안정과 상대적 고임금으로 포섭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중공업은 어용노조가 들어선지 이미 십 년이 흘렀지만 정규직노동자들이 특별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징후는 포착되지 않는다. 노동강도가 강화되고 산재가 빈발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고임금과 고용보장을 확약 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현대중공업 선거에서 소위 민주노조 연합이 32%밖에 득표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국제적인 경험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80년대 공격에 대해 서구 대공장 노동자들은 수세적인 태도를 취했다. 유럽과 북미에서 대공장에 기반한 전통적인 노동자운동의 보수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는 징표는 무수히 많다. 사민주의 정권의 우경화는 중간계급의 우경화의 결과라기보다는 전통적인 노동계급 자체의 우경화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에서는 90년대 말 노동자본가(worker capitalists)라는 단어가 등장했는데, 이는 주식을 보유하면서 자본가 같은 의식과 정치성향을 갖게 된 노동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계급적으로는 노동자이면서도 분배보다 성장위주의 정책에 관심을 보이며 사회복지예산을 늘리기 보다는 자본이득세 감면이나 노동생산성 향상 등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에 찬성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남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공장노동자들이 주식과 부동산투자로 재테크를 하고 연대투쟁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면서 대공장 노동자들이 소(小)자산가화 되었다는 주장이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고립된 기득권의 섬


지금으로 볼 때 대공장 현장으로부터 그 자체의 고착화된 질서를 깨는 투쟁이 분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주간연속2교대제와 복수노조는 오히려 이를 더욱 강화시킬 기제가 될 것 가능성이 높다. 반면 노조로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기 어려워진 90%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따라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과 나머지 90%의 노동자 간에 이질성과 차이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급속히 사회적 영향력을 잃고 있는 조직 노동운동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90%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에 나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대공장 정규직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 노동운동은 오히려 이런 노동자들의 투쟁에 장애물로 나타나는 일이 더 많았다. 정규직의 이해 혹은 기존 조직의 안정성 문제와 부딪쳤을 때, 조직된 10%의 이해는 나머지 90%의 이해를 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속에서 조선·자동차·철강 등 소수의 대공장 정규직 부분은 광범위한 저임금 비제조업 노동자와 내부의 비정규직 및 중소제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소수의 특권층, 기득권을 가진 고립된 섬으로 남을 것이며 이 양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 <각주>


1) 이 논문들은 1989년 『변화하는 노동계급 (The Changing Working Class)』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남함에서는 같은 책이 갈무리에서 『오늘날의 노동자계급 (1994)』이라는 제목으로, 책갈피에서 『노동자계급에게 안녕을 말할 것인가 (2001)』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다.

2) 이 논문은 『오늘날의 노동자계급(갈무리)』에만 수록되어 있다.

3) 현대차 아산공장과 전주공장은 2000년대 중반 하청노동자들의 수가 각기 1000여 명과 1200여 명으로 추산되었으나 2010년에는 878명과 905명으로 집계되었다.

4)결과적으로 이러한 위기의식은 2000년대 중반 그 동안 미루어져 오던 대공장의 산별노조 전환으로 나타났다. 산별론자들이 주장해온 금속산업 전체노동자들의 단결보다 자본의 해외이전 추진으로 인한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산별전환의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5)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민주노조 운동진영의 복수노조 금지 폐지 요구에 대해 당시 한국노총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복수노조의 허용은 우리와 같은 기업별 체제하에서는 노동조합의 단결력과 교섭력을 더욱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수많은 어용노조를 출현시켜 노동자 상호간의 적대행위와 단체교섭 대표권을 둘러싼 조직분규를 격화시키고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를 합법적으로 가능케 하여 노사관계의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1988)

6) 장기적으로 정부정책은 노사협의회에서 노조의 영향력을 줄이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사관계로드맵은 노사협의회 대표자를 노조가 지정하는 현행 방식에서 직접 선출로 바꿀 것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복수노조나 전임자 금지의 문제처럼 자본과 개별적 합의로 노조의 권리를 보장받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노조와 충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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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국제] 세상의 모든 눈이 오클랜드를 주목하고 있다

  • 분류
    국제
  • 등록일
    2011/11/18 10:12
  • 수정일
    2011/11/18 10:14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점령(Occupy) 운동이 11월2일 오클랜드 도시 총파업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이 글은 총파업 이틀 뒤인 11월4일 영국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활동하고 있는 <더 코뮨> 그룹의 홈페이지(http://thecommune.co.uk)에 올라온 기사로 최근 오틀랜드 투쟁의 전개과정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글이라고 판단되어 번역해 싣는다. 번역 기사는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주]


도나 데이비스(Donagh Davis)가 오클랜드 점령 운동(Occupy Oakland) 현장에서 스캇 올슨(Scott Olsen) 피격사건부터 파업, 항구 봉쇄, 그리고 오늘 아침(11월 4일) 건물 점거를 둘러싼 폭력상황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에 대해 보고한다.

3주 전 텐트가 세워진 이후 오클랜드 점령 운동은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세계 주요 뉴스 기사뿐 아니라 하나의 주요 사회 운동의 현상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다른 많은 '점령 운동'들처럼 오클랜드 점령 운동도 처음에는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을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3주 후에 이 운동은 월스트리트 시위보다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

가장 중요한 분수령은 일주일 전에 일어났다. 일주일 전, 진 콴(Jean Quan) 오클랜드 시장은 오클랜드 점령 운동에 나선 시위대 캠프를 쫓아내겠다던 협박을 실행에 옮겼다. 시청 바로 밖에 있는 프랭크 오가와 광장(Frank Ogawa Plaza)의 점령 캠프가 그녀에게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을 것은 분명하다. 점령에 참가한 시위대들은 프랭크 오가와 광장을 '오스카 그랜트 광장(Oscar Grant Plaza)'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2009년 지하철 승강장에서 경찰 총격으로 사망한 젊은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오클랜드를 점령한 텐트촌을 해산시킨 것은 경찰과 시장에게 전술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전략으로서는 재앙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0월25일 이른 시간, 대규모 전경 부대가 몰려와 최루가스와 섬광탄을 쏘며 캠프를 초토화시고 100여 명의 시위대를 연행해 갔다.

점령대는 오클랜드 시내 중심부의 알짜배기 땅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점령대는 땅을 되찾기로 결의했다. 다음날 저녁, 텐트촌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클랜드 점령에 참가하는 대오의 규모는 더욱 늘어났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오스카 그랜트 광장으로 행진하여 그 곳을 말 그대로 ‘무력 점령’하고 있는 중무장한 경찰과 맞섰다.
 

 


빗발치는 최루가스와 그 보다 ‘덜 치명적인’ 물질들 속에서 점거참가자의 물결은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리를 떠나려하지 않았다. 길었던 그날 밤 경찰은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몇몇 사람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하지만 경찰로서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겠지만 이 ‘폭력’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시위대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욱 당혹스러운 일은 가장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 이라크 전에 두 번이나 참전했던 24세의 청년 스캇 올슨이었다는 것이다. 근거리에서 발사된 경찰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과 뇌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바로 그 때, 이 청년은 해병대 재킷과 평화를 호소하는 참전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오스카 그랜트 광장에서 벌어진 결전은 주요 뉴스기사로 타전되어 전 세계와 미국 전역에서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자신들이 어리석은 판단착오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경찰은 오클랜드 시내에서 철수했다. 콴 시장은 점령대를 달래기 위해서 애도의 뜻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텐트촌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하지만 텐트촌이 철거된 지 이틀 후인 수요일, 오클랜드 점령대는 오스카 그랜트 광장에 다시 등장했다. 주위에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점령대가 개최한 총회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총회에서 15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11월2일 총파업을 개시하자는 안에 투표했다. 반대한 사람들은 2~30명에 불과했다. 소수파는 총파업을 성사시키는데 있어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지적했다. 이러한 장애물로 11월2일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는 점, 오클랜드에서는 1946년 이후로 그런 파업이 일어났던 적이 없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오클랜드 점령대가 노동자 조직이 전혀 아니라는 난감한 현실 역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고양된 자신감, 정부에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예감과 가능성에 비하면 이 모든 문제들은 부차적이고 기술적인 세부사항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놀랍지 않은 일이지만 11월2일에 벌어진 상황은 교과서적 의미의 ‘총파업’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는 일주일 전에 잡힌 계획이 옳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많은 회사들이 정상영업을 계속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출근했다. 하지만 오클랜드 시내는 절대 평상시와 같지 않았다. 주위에 경찰은 보이지 않았고 오스카 그랜트 광장 주위의 도로는 점령대와 파업참가자들로 넘쳐났다. 특히 교사들과 학생,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많이 참가했다. 오클랜드 시는 해방구와 축제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후 늦게 수천 명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5번째로 무역량이 많은 오클랜드 항구를 봉쇄하러 시외로 몰려나가면서 축제의 양상은 빠르게 변모했다. 자전거에 실린 스피커에서는 전성기의 마이클 잭슨 노래들이 울려 퍼졌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점령 시위에서는 오클랜드 레이더스 야구팀이 “렛츠 고, 오클랜드”라는 구호를 연호하는 만큼이나 자주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악단이 그 뒤를 따랐다. 시위대의 목표는 항구의 야간조 교대를 막는 것이었다. 노동자 중에서도 급진적이라고 알려진 항만노동자들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항만노동자들과 노조 간부들이 항구 당국으로 하여금 그날 밤 오클랜드 항구가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물류량이 많은 항구에서 가장 물류량이 적은 항구로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외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도 들렸다. 그 도움은 항구의 모든 출입구를 둘러싼 인간의 물결로 나타났다. 이 물결은 화물트럭의 출입을 마비시켰다.
  


저녁 9시 전에 ‘미션 성공’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하지만 점령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아침조 교대까지 막기 위해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분위기는 활기찼다. 하지만 혁명과 마찬가지로 점령 운동 역시 평화로운 다과회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모험적이고 조숙한 행동의 날에 너절한 후기가 아니 붙을 수 없다. 이는 점령 운동이 갈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일깨워주며, 그 길 곳곳에 존재하는 실제 긴장과 투쟁들을 일깨워준다. 그날 밤 늦게 한 무리의 점령대가 오스카 그랜트 광장에서 한 블럭 떨어져 있는 지금 사용되지 않는 빈 건물을 점거했다. 이 건물은 전에 노숙인 보호소로 사용되다가 정부의 기금 삭감으로 임대료를 낼 수 없게 되면서 비게 된 건물이 되었다.

지난주에 입은 타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경찰은 이날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이 올림픽 숨바꼭질 부문에서 오사마 빈 라덴에게 한 수 가르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시위대가 건물을 점거하자마자 어디선가 마법처럼 전경 부대가 나타나 강력계 형사들처럼 무자비하게 안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건물 점거를 초장에 박살내기 위해 또 다시 ‘치명적이지는 않은’ 최루탄과 섬광탄 및 비살상용탄환을 넣은 산탄총 등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수십 명을 체포했다.

이런 사태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다음날 발표된 성명서에서 건물을 점거하는 데 책임이 있는 사람들 일부는 이런 식의 — 공공 공간에서 빈 건물(사람들이 짐작하는 것처럼 특히 은행에 저당 잡혀 소유권을 빼앗긴 건물들)로 점거를 확대하는 — 다음 단계가 점령 운동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 이래로 “다음 단계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에 관한 논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던 방안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명서는 <비즈니스 인사이더 (Business Insider)> 잡지에 실린 이 사건에 관한 기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The inevitable has happened)”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또 성명서는 경찰의 행동 이면에 깔린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나름의 추측을 내놓았다.

… 경찰은 다른 무엇보다 이 운동이 논리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경찰은 그것이 얼마나 큰 호소력을 가질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겁을 내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로 거리에 나앉거나 실업과 빈약한 임금에도 불구하고 집세를 내려고 애쓰는 사이 점점 깊이 빈곤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국 전역에 수천수만 개의 빈 상가건물과 주택이 방치되어 있다. … [경찰은 말한다.] ‘당신들은 쥐가 들끓는 공원에 살 수 있다. 우리가 허락하는 한 당신들은 여기서 캠프를 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들이 사유재산권을 위협하는 순간 우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당신들에게 덤벼들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도 오클랜드에서는 새로운 상황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시장과 경찰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고 있으며 당국이 점점 늘어나는 불화를 다루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혼선도 수요일 밤 오클랜드의 빈 건물에서 일어난 일처럼 ‘안전선’을 넘는 행동이 발생하는 나오는 순간 경찰이 공격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점령 운동이 나가는 방향에 대한 하나의 풍향계로서 모든 눈은 앞으로 며칠, 몇 주 동안 오클랜드를 주목할 것이다. (2011. 11.4)

번역 : 정지원(jeewon@jinbo.net), 이정인(picollo@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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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Focus] 세계를 점령하라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11/17 20:48
  • 수정일
    2011/11/18 14:20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세계 자본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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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초 미국에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 (Occupy Wall Street)” 운동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십 여 명의 젊은이들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은 불과 몇 주 만에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마침내 지난 달 10월15일에는 이 운동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세계 수십 개 국에서 지지 집회를 벌이며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남한에서도 이날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각종 퍼포먼스와 집회가 개최되어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북미와 유럽에서 참여가 커


국제적인 동조시위를 호소한 15october.net에 따르면 10월15일 하루 82개국 1000개 이상의 도시에서 시위에 동참했다고 한다. 특히 자본주의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북미와 유럽에서 호응도가 높았다.

미국에서는 뉴욕, 워싱턴 보스턴, 필라델피아,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마이애미, 시애틀 등 100여 개 도시에서 동조시위가 벌어졌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5천여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

경제위기가 심각한 유럽에서는 더 큰 규모로 시위가 벌어졌다.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20만 여명이 거리로 나왔다. 독일에서도 베를린에 4만 명, 금융 중심지 프랑크푸르트의 유럽중앙은행 청사 앞에 8천명이 모였다. 영국 런던에서 5천여 명, 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6천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유럽과 북미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대중적인 저항운동은 80년대 침체기에 빠졌다가 90년대 후반 반세계화 투쟁이 활성화되며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99년 시애틀 투쟁으로 절정에 올랐던 반세계화투쟁은 2001년 9·11 사태를 계기로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테러 방지를 명목으로 각국 정부가 취한 여러 조치들은 사실상 반정부 운동을 겨냥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한 이후 경제 불안이 계속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대중투쟁이 세계 곳곳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 프랑스, 영국 등에서 긴축재정의 직격탄을 맞은 공공 노동자 등 전통적인 노동계급도 투쟁에 나섰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미래가 불안해진 젊은 층의 참여였다.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튀니지, 카이로 등 중동 민주화 투쟁 역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일어난 투쟁이었다. 중동 민주화 투쟁에서 나타난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소통, 광장을 점거해서 토론을 통해 투쟁 방향을 결정하는 방식은 유럽으로 번져나갔고, 급기야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부인 미국 월스트리트로, 그리고 월스트리트에서 세계로 다시 퍼져나가고 있다.
 

남한과 아시아는 아직


남한에서도 10월15일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여의도를 점령하라-금융수탈 1%에 저항하는 99%”라는 집회를 개최하여 금융 중심가인 여의도를 점거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미리 불법 집회를 엄단하겠다고 선언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하지만 실제로 15일 여의도 금융위원회 앞에 모인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취재를 위해 온 기자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저녁에 도심에서 열린 “서울을 점거하라 국제 공동 행동의 날” 집회에도 천 여 명이 참석했다고 하나 주로 시민단체들과 운동단체들 중심이었고 북미나 유럽처럼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가 나타났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일본, 대만, 홍콩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시위가 있었으나 남한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이는 남한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아직 북미와 유럽만큼 심각한 위기를 겪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여 년간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로 유럽과 북미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복지축소와 중간층 몰락으로 사회구성원의 다수가 빈곤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위기 이후 불어 닥친 재정위기는 유럽 국가들에게 더 강력한 긴축정책을 강요하여 대중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비싼 돈을 들여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미래는 불투명하고 빚에 허덕이는 20대 청년층은 교육예산의 삭감과 일자리 감소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월스트리트 투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인 8월6일 영국 런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것에 항의하는 지역 주민들은 시위는 약탈과 방화 등 폭력 사태로 변화되어 며칠 동안이나 계속됐다. 유럽 최강국 중의 하나인 영국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은 지금 유럽의 사회적 불만이 얼마나 심각하게 쌓여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예는 지금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나라들에서 대중의 불만이 사소한 계기로도 쉽게 폭발할 수 있는 지경에 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동 민주화 투쟁을 촉발시킨 것도 금융위기로 촉발된 사회경제적 위기 때문이었다. 튀니지와 카이로에서 투쟁의 발발은 잘 알려진 대로 물가폭등, 경기침체로 인한 생존권 하락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러나 남한과 같은 경우는 힘들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살만한 편이다. 미국, 유럽, 일본 등에 비하면 재정도 건전한 편이라 아직은 위기에 대처할 정책 여력이 있다. 당장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유럽 국가들처럼 상황이 절박하지 않다.

남한에서도 지난 2008년에 벌어진 촛불투쟁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내내 계속된 양극화로 쌓여온 사회·경제적 불만의 분출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한에서는 여전히 정치체제의 개선이나 집권세력의 교체를 통해 실질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촛불, 희망버스, 광장 점거


그러나 최근 벌어지고 있는 세계적인 운동과 남한의 운동은 공통점이 분명히 있다. 전통적인 산업 노동자운동의 붕괴 속에서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동안 밀집도와 단결성이 높은 대공장 노동자들에 비해 무력하게 여겨졌던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이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이하 ‘SNS')를 매개로 자발적으로 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는 모습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는 중동 민주화 투쟁을 비롯해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다.

이런 경험은 사실 남한에서 선도적으로 나타났다. 2008년 촛불투쟁은 이러한 새로운 양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최초의 투쟁이었다. SNS는 아니지만 아고라와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이전에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대거 촛불투쟁에 참여했다.

발전된 매체를 통해 투쟁은 즉시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었고 이는 투쟁의 저변을 더욱 확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촛불투쟁이 가라앉은 이후에도 이런 운동의 양상은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거쳐 희망버스 운동으로 진화해 나갔다.

한진중공업 투쟁의 경우 이슈 자체는 정리해고 반대라는 노동자 운동의 이슈였지만 주체는 전혀 다르게 구성되었다. 전통적인 노동자투쟁이라는 의미에서 한진중공업 투쟁은 끝난 투쟁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공장의 내부 동력은 소진 된 상태였으며 노조 스스로도 거의 포기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희망버스를 통한 사회적 연대는 이 투쟁은 계속 이어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주체들의 등장을 통해 전통적인 이슈도 함께 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과 북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은 남한의 촛불투쟁처럼 처음에는 평화적이고 축제적 성격이 컸다. 하지만 이런 집회 문화를 굳이 걱정하지 않더라도 대중의 투쟁이 지속된다면 공권력의 탄압은 강화되고 시위 역시 더욱 급진화되는 패턴을 밟을 수밖에 없다. 2008년 촛불투쟁에서도 초기에 폭력을 반대하던 시위대가 공권력의 탄압이 강화되자 스스로 방어수단을 모색하는 것까지 나아갔던 전례가 있다.

이미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은 오클랜드에서 지역 시민들이 참가하는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투쟁이 확대되면서 공권력의 대응은 더욱 폭력적이 되고 있으며 이에 맞선 시위대의 대항폭력도 거세어지고 있다.

초기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던 부르주아 언론들은 폭력, 성범죄 등 부정적인 양상을 강조한 기사들을 쏟아내며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대해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붓고 있다. 축제는 끝나고 전쟁이 다가오고 있느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운동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비교적 명확하다. 1%를 반대하는 99%라고 하지만 사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아직 고학력 청년층이다. 남한의 소위 ‘무당파’ 시민들처럼 이들의 계급적 성격은 명확하지 않으며 이들이 내걸고 있는 요구들도 정치적으로 불명확하다.

예를 들어 남한에서 국제연대를 조직하고 있는 99% 행동위원회는 “금융통제, 금융정책 실패에 따른 원인규명과 책임자 처벌, 금융피해 보상” 등 자유주의적 요구를 내걸었다. 물론 남한에서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이 시민운동 단체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유럽과 북미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추상적인 구호만 있지 구체적인 요구나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투쟁이 실제로 체제를 극복하는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광범위한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들로 확대되어야 한다. 이들이야 말로 현재 사회 다수를 이루는 가장 큰 불만세력이며 가장 분노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런 계층의 참여가 그렇게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끌어들일 구체적인 요구들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운동세력 자체의 이질성과 구심력 부재로 말미암아 아직 그러한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약점들 때문에 지금 현재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 자체는 촛불투쟁처럼 일정시기가 되면 가라앉거나 얼마 뒤 있을 대통령 선거 캠페인으로 흡수되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운동이 새로운 투쟁의 시대를 여는 역사적 이정표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다. 점점 심화되는 경제위기 상황은 이와 유사한 운동들을 계속 탄생시킬 것이고 더욱 급진화 시켜 나갈 것이다. 이는 남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나 환상, 혹은 이전과 똑같은 요구를 공장점거에서 광장점거로 바꾸어 제기하는 구태의연함을 넘어 이런 투쟁의 시대를 대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태영 (picollo@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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