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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만날 수 있을까?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2/05/11 11:36
  • 수정일
    2012/05/11 11:3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민주노총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만날 수 있을까?

_2012년 메이데이가 드러낸 것

 

122주년 메이데이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집회에서 ‘총파업’을 함께하자는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노총과 스스로를 ‘프레카리아트’로 정체화한 사람들의 총파업 행진. 이렇게 두 개의 행사가 동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민주노총의 이번 집회는 8월에 있을 총파업의 사전결의대회였다. 김영훈 위원장은 시청광장에 모인 1만 5천명의 조합원을 향해 “오늘을 시작으로 5월 한 달을 연대를 복원하고, 6,7,8월을 대투쟁의 시동을 거는 날들로 이어 나가자”고 말했다. 프레카리아트 총파업에 모인 500여명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여러 강요들을 모두 ‘노동’이라고 표현하며 이러한 강요를 거부하는 총파업을 하자는 각자의 목소리를 냈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집회에서 ‘총파업을 하자’는 말이 계속 나왔다는 정도다.

 

작년까지만 해도 민주노총이 주최하는 집회야말로 메이데이를 대표하는 행사로 여겨졌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아니더라도 각종 진보적 단체들은 민주노총 메이데이 집회에 참가하고 부스를 차려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인권연대와 같은 경우 최근 몇 년간 메이데이, 노동자대회 집회에 활발히 참여하고 활동해왔다.

하지만 이번 메이데이 집회에서는 민주노총 주최의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노동운동에서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안과 요구를 가지고 집회와 행진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민주노총이 주최하는 집회만이 운동을 대표한다는 암묵적 분위기에 균열이 가시화된 것이다.

 

민주노총과 투쟁사업장의 괴리

 

민주노총이 더 이상 운동을 대표하지 못하는 분위기는 민주노총 소속 조합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희망버스 이후에 이슈가 되기 시작한 ‘희망뚜벅이’, ‘희망광장’ 운동은 그 자체로 민주노총, 각 산별연맹(노조)을 통하지 않고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꾸린 운동이었고 여기에 정당과 정치․사회단체들이 함께 했다.

소속 단위 사업장의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결합을 하지 못하는 것이 반복되면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은 스스로 희망 운동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과 함께 민주노총 상층부와 투쟁사업장 노동자들 사이의 괴리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4월 20일에 있었던 희망광장 평가 토론회는 이러한 괴리가 분명히 드러나는 자리였다.

희망광장의 주체가 되었던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은 앞으로 이러한 공동투쟁을 어떻게 진행해 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길 원했다. 그러나 토론회에서 두 시간 반 넘게 이루어진 발제는 민주노총의 총파업 계획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민주노총 정의헌 수석부위원장의 발제는 각 연맹별로 언제 몇 명이나 총파업에 동원할 수 있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 참가한 연맹 위원장들에게도 대표자라는 이유로 발제가 요구되었는데 그 대답에도 실질적인 내용은 없었다. 그 자리에 참가한 모 연맹 위원장은 “지도부도 아직 (총파업) 준비는 안 되어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긴장감을 가지고 해보자”는 말만 했을 뿐이다.

이러한 발제가 2시간 가량 이어진 후 투쟁사업장의 노동자들은 겨우 발언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미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민주노총이 이야기하는 총파업이 뻥파업이 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지속해서 상층에서 지침을 내려서 오는 파업이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었다.

사측의 노조말살에 맞서 싸우고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는 “왜 총파업을 선거에 맞춰서 하려고 하냐”며 현실적으로 노조가 다 깨져나가는 상황은 외면하고 선거에만 맞춰서 진행되고 있는 총파업 안에 대해 비판했다. 콜텍 노동자는 과연 총파업한다고 해서 정리해고․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될 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1600일 넘게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권과 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유명자 재능 지부장 동지는 “이 자리에 와서야 (특수고용 노동자들인 화물과 건설노동자들의) 공동투쟁본부가 꾸려져 있는지 알았다”며 왜 재능에는 제안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이어 “재능투쟁이 단사투쟁에 매몰되어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아니면 조직이 작아서 제안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 4년 넘게 투쟁하고 있는 재능 노동자들을 배제한 공투본 구성과 계획은 현재 민주노총이 실제로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양한 목소리로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들

 

이번 프레카리아트 총파업에 모여든 사람들도 민주노총과 대공장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주류 노동운동에서 배제된 채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은행 앞에 모여서 각자의 상황과 투쟁을 공유하고 원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명동을 거쳐 시청광장까지 행진했다. 명동 중심부에서는 각종 퍼포먼스와 구호를 통해 각자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는 장이 만들어졌다. 이는 서울시장이나 각 ‘위원장’들의 발언이 압도적으로 많은 민주노총의 집회와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두물머리 밭전(田) 위원회가 발언하고 있다

 

4년째 4대강 토건 개발에 반대하며 싸우고 있는 두물머리의 농민들, ‘밭전(田) 위원회’가 있었다. 이들은 정부의 강제적인 토지 수용시도에 맞서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한국은행 앞에서 각종 씨앗과 모종을 나누어주었다. 국가의 생태계 파괴에 맞서 자연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두물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구럼비를 계속해서 폭파하고 있다. 정부의 갖은 폭력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구럼비를 지키려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도 한국은행 앞으로 모여들었다. 녹색당 사람들은 탈핵을 외치며 함께 행진했다.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도 함께 행진했다. 명동에서 열린 중간집회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상임 공동대표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자본의 효율이라는 이유로 수십 년 동안 시설에 갇히거나 방구석에 처박혀야 했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파업’ 상태였다”라면서 “장애인들도 여러분과 함께 거리의 파업을 통해 자본의 속도에 맞서고 체제를 바꾸는 투쟁에 함께할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장애인 활동보조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봉사가 아니라 노동임을 주장하는 피켓을 들었다.

슬럿워크 코리아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잡년행동의 성원들은 명동 한복판에서 하이힐을 벗고, 메이크업을 지우고, 브라를 벗어 브라를 이어 줄넘기를 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는 여성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브라, 하이힐, 메이크업을 ‘강요된 꾸미기 노동’을 거부한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또한 “성적 지향, 성정체성을 존중”하라며 이성애중심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터져나왔다.

청소년들의 발언도 있었다. 이들은 몇 주, 몇 일 전에 부당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청소년에게 온전한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 현실에서 청소년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를 더욱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폭로했다. 청소년이라는 차별당하고, 인격적인 무시도 당해야 했으며 심지어 임금체불에 부당해고까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삼성범죄지도’를 만들어 행진하며 삼성이 전국에서 벌이고 있는 토건개발과 산업재해 방조 등을 규탄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너의 사랑 나의 사랑 기본소득”을 외치며 사회구성원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도 함께 했다.

이들의 다양한 요구와 투쟁은 기존의 주류 노동운동 내에서는 이슈화되지 못했던 사안들이었다. 또한 단순히 지침을 통해 동원된 사람들이 아닌,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기에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민주노총의 메이데이 집회가 아닌 자신들의 요구를 외칠 수 있는 집회를 선택했다.

 

지침을 내리는 사람이 아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만나야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민주노총은 반MB를 이유로 각종 선거의 야권연대에 함께 하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 전부터 존재했던 민주노총 상층과 투쟁사업장의 괴리는 야권연대를 경과하면서 더욱 더 격화되었다. 그리고 재능교육, 쌍용자동차, 3M, 유성기업 등 투쟁사업장은 더 이상 민주노총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 연대사업을 꾸려왔다.

민주노총이 상층의 야권연대에 집중하는 동안, 각종 투쟁들이 생겨났다. 4대강에 반대하는 투쟁이 생겨났고 구럼비 파괴에 반대하는 투쟁이 생겨났다. 촛불투쟁, 두리반, 마리 등의 철거투쟁을 겪으면서 새롭게 투쟁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번 메이데이 전후로 분명해진 것은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이들은 힘겹게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장기투쟁사업장의 노동자들과 이번 프레카리아트 총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들과 민주노총의 괴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사실 투쟁사업장 노동자들과 프레카리아트들은 이미 여러 차례 함께 행동해 온 경험이 있다. 희망버스가 내려간 부산 영도에서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성폭력 사건에 맞선 투쟁에서도 함께 했었다. 이번 메이데이에도 프레카리아트 총파업 대오는 형식적인 ‘총파업’ 발언이 남발되는 시청광장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맞은편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분향소에는 방문하여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이러한 더 의식적으로 함께 하는 활동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기대를 거는 것보다는 실제로 움직이고 자신들의 투쟁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함께 하며 서로의 문제의식과 투쟁 사안을 공유하는 것이야 말로 더욱 폭넓은 지지와 연대의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희망’의 싹은 거대한 주류 노동운동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연대로부터 돋아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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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동조합을 만든 사람이 조합원이 아니라고? - 기아차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이동우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2/05/04 13:09
  • 수정일
    2012/05/04 14:16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4월 열린 기아차지부 임시대대에서는 올해 임금요구안과 특별요구안 결의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중 불법파견 정규직화 안건은 상정되지 못했고, 기아차 해고자 4인의 복직은 일괄적으로 요구안으로 상정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처리되었다. 특히 2·3차 하청노동자로 해고되었던 기아차비정규직지회 이동우 전 부지회장은 조합원 인정에 대한 논란으로 복직은 커녕 조합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어이없는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결국 조합원 인정은 보수적인 대의원들의 훼방과 집행부의 날치기 처리 속에 흐지부지되었다. 이동우 동지에게 이번 임시대대 투쟁과정과 그 속에서 느낀 심경을 들어보았다.

 

 

지난 기아차지부 대대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관련한 안건은 어떻게 처리되었나

기아차지부 집행부가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를 임금요구안이나 별도요구안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아차의 비정규직 동지들과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적이었던 정규직동지들이 현장발의로 불법파견 정규직화 안건을 특별요구안으로 확정할 것을 주문했다. 그렇지만 집행부는 공동요구안이 있기에 그렇게 처리하면 된다는 버티며 압박했고 다수 대의원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장시간 대대가 공전되면서 안건 상정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결국 “기아/현대 공투본의 사내하청 정규직화 요구안 쟁취를 목표로 사내하청 단위가 참여하는 특별교섭을 진행한다”로 결정사항을 남겼다.
올해 기아-현대 공동투쟁을 기획하면서 기아-현대 공동요구안으로 주간연속2교대제/비정규직 정규직화/재벌의 사회적 책임강화를 요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집행부는 공동요구안을 기아차지부의 임금 별도요구안으로 못박고 가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특히 비정규직 정규직화 건에 대해서는 현대와의 공동요구, 공동투쟁 과정에서 풀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주간연속2교대에 관련해서는 현대차지부와 기아차지부 모두 임금 별도요구안으로 동일하게 확정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통상적으로 지부의 요구안으로 결정되고 이것이 대대에서 확정되면 잠정합의하기까지, 마지막으로는 조합원총회에 부쳐질 때까지 지부 집행부는 대단한 규정력을 받으면서 투쟁의 과제로 받아 안아야 한다. 그런데 집행부는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관해서는 이러한 규정력과 투쟁의 과제를 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동요구안에서 현대차지부가 줄기차게 ‘모든’이란 문구를 뺄 것을 요구했지만 그나마 비정규직3지회가 원하청연대회의에서 강력하게 요구해서 ‘모든’이란 문구를 누락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현대차지부 요구안 발송이 끝난 후에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 보면 기아-현대 공동요구안이 가지는 의미, 특히나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가 가지는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일단 공동의 요구로 가져가지만 기아, 현대 각 지부에서는 별도요구안으로 가져갈 만큼의 규정력이 떨어진다는 것, 나쁘게 말하면 일단 요구는 하지만, 되면 좋고 부분적으로 되면 체면치레를 하는 것이고 안되도 나쁠 것 없다는 것!
기아-현대 공동투쟁의 역사와 경험상 투쟁의 고비에서 각자의 노조일정과 조합원정서를 핑계로 대면서 각각의 결정으로 돌아서거나 공동요구 자체가 공문구로 전락해버린 경험이 많았다. 그렇기에 각각의 지부 별도요구안으로 공동으로 결정하고 책임도 함께 지는 모습으로 앞서의 투쟁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했었는데. 의지를 의심하지 말라는 지부장의 말, 지부 집행부의 선의는 주간연속2교대와 달리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가 이렇게 밀리는 현실 속에서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별도로 사내하청 정규직화 요구안 논쟁 과정에서 ‘모든’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치열하게 논의된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차지부나 기아차지부가 ‘모든’이라는 문구를 뺄 것을 요구한 것은 요구안의 기대치를 낮추고 투쟁의 정리 과정에서 큰 논란을 피하기 위한 꼼수였다. 이에 비한다면 ‘모든’을 문구상으로 남긴 것이 의미가 있겠으나, 이 또한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관료들과 조합주의자들이 구상하는 ‘모든’의 의미와 2,3차 하청/청소/경비/식당 비정규직 노동자를 모두 포괄한다는 의미의 ‘모든’은 분명 다르며 투쟁과 정리과정에서 치열하게 대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예 ‘2,3차 하청/청소/경비/식당’을 명시하면서 조합원대중에게 우리의 요구를 명확히 하고 갈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다.

 

동지의 조합원 인정 및 해고자 복직 안건은 어떻게 처리되었나

해복투는 임대 이전에 집행부의 해고자 요구건에 대해 비정규직투쟁에 헌신적으로 연대했던 정규직해고자인 이상욱 동지와 기아차비정규직지회 건설의 주역이었던 김수억 동지, 현장투쟁의 과정에서 부당징계로 해고된 윤주형 동지와 나까지 4인 모두 전원 복직을 요구하는 것으로 가져가자고 확인했다. 나에 대해서는 일단 지속적으로 집행부가 조합원 신분 논란 때문에 어렵다는 이야기를 해왔기에 이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행부를 압박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무산된 지부장과의 면담을 줄기차게 요구했고, 분회 대의원회의에 참가해 분회 전체의 요구로 한 사람도 누락 없는 복직요구안을 가져갈 것을 주장했다. 또한 지속적인 선전전과 홍보물을 발행했고 지부 임시대대 전에는 매일 중식선전전과 조합원인정/모든 해고자 요구안 상정을 위한 조합원 서명과 뺏지달기 사업을 조직했다. 또한 임시대대장에서 참관투쟁과 선전전, 대의원의 지지서명과 연대단위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집행부는 철저하게 저는 기아차지부 조합원이 아니니 논의 자체를 하지 말 것을 주문하면서 나를 제외한 3인의 복직만 요구안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이미 예상했던 집행부의 반응에 해복투의 현장발의 안건 상정을 지지하는 대의원과 김수억동지(지부 대의원)의 대응이 이어졌다. 지부 조합원이 아니라는 집행부의 근거가 무엇인지 따져 묻기도 하고 지금까지 투쟁과정을 이야기하며 대의원들의 만장일치로 처리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집행부는 이러한 정당한 주장과 반박에는 제대로된 답을 하지 않고 말을 돌리거나 그렇게 결정한 근거를 요구하면 침묵하는 등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비정규직투쟁에 보수적인 대의원들의 끼어들기식, 논점일탈식 발언들이 속출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지어내며 갈등이라 표현되는 예전 비정규직지회 투쟁에 대한 증오를 공공연히 조장했다. 소위 말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으로 수백의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밟혔던 당사자가 갈등을 초래한 사람으로 둔갑했다. 조직통합에 끝까지 반대했지만 당시 조합원 총회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공식적인 유인물로 선언했던 것은 이야기되지 않은 채 이제는 왜 비굴하게 조합원으로 인정하라고 하냐는 식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여기에 현장투쟁을 하다가 징계해고된 윤주형 동지에 대한 비토까지 섞이면서 논쟁은 정리되지 못하고 계속적인 공방으로만 일관되었다. 보수적인 대의원들은 집행부가 윤주형 동지까지 끌어안고 가는 것을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는 식으로 호도하면서 지속적으로 해고자들에게 상처를 줬다. 대대장은 해고자들이 불쌍한 존재이며 다시금 전향적으로 집행부가 고민해야하는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결국 금요일과 다음 주 월요일까지 이어지는 논쟁과정 속에서 집행부는 “이상욱/김수억은 요구안으로, 윤주형/이동우는 집행부사업으로” 하는 수정안을 던졌고 계속되는 반대발언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날치기 통과시켜버렸다. 지속적인 해복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금번 대대는 해고자들을 가르고, 해고자들이 지부 요구와 투쟁에 걸림돌이 되는 불쌍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조합원 인정 안건이 제대로 논의도 되지 않은 채 넘어갔는데 심정이 어떠한가

 

 

현장발의로 4명의 해고자 요구안 확정을 요구하면서 집행부의 입장이 완강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직접 지부장의 입으로 “이동우동지는 우리 조합원이 아니기에 대대에서 논의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절망적이었다. 아니, 절망감을 넘어 오물을 뒤집어쓰는 듯한 치욕감을 느꼈다.
집행부의 논리는 조직통합당시 2,3차 하청해고자였고 업체가 공장 밖으로 나갔었기에 지부 조합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당시 기아차지부의 조직통합 사업은 금속노조 규약에 부합하는 1사1조직사업이 아닌 규약을 위반하는 직가입 형식의 조합원 빼내기였다. 그렇기에 집행부와 일부 보수적인 대의원들이 말하는 금속과 기아차지부 규약, 규정에 따른 이야기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상태에서 논쟁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논의는 치밀하게 따져지지 못했다.
백번 양보해서 집행부의 주장만을 따져 봐도 이 또한 기만일 뿐이다. 당시 나에 대한 징계해고는 원청이 비정규직지회를 깨기 위한 수많은 노조와해전략 중 하나였다. 조합원들이 있는 하청업체를 폐업시키고 열성조합원만 배제하고 다른 바지사장과의 재계약을 통해 노조를 와해시키는 방식! 2006년 비정규직지회 투쟁에서 2,3차 하청의 단협체결을 위해 우리 업체공정에서 라인을 끊는 투쟁을 전개하니 징계해고하고 그 부분만 다른 업체로 이관시켰던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비정규직지회는 노동조합 활동으로 인한 해고로 규정했고 원청과의 합의과정에서 회의록을 써서 해고를 철회시켰다. 그런데 다시금 원하청 사측은 공장 밖으로 복직을 주장하며 회의록을 파기했고 그렇게 노동조합의 공식 요구로 해고투쟁을 지속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직통합을 한 비정규직지회의 요구안으로까지 상정되었던 2,3차 하청 해고자에 대해서는 승계하는 것이 타당함에도 다른 핑계를 대왔다. 업체가 공장 밖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지만 조직통합 당시에도 비정규직지회에는 전년도 분사저지투쟁의 결과로 공장 밖에 100여명의 물류 조합원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기아차지부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래저래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조합원 인정이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조직통합 당시 기아차지부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던 이들이 현 통합집행부의 일원이다. 표면적으로는 조직통합에 끝까지 반대했던 경험 속에서 ‘감정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조합원인정을 거부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는 그야말로 표면적인 것이다. 더 큰, 아니 더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집행부의 말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2·3차 하청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인정하면 이들을 조직하고 요구를 관철시키는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직까지도 1차 하청 계약직 노동자들의 조합원 가입을 반려하는 사례를 봐도 여실히 확인된다. 안타깝지만 투쟁으로 조직하고 투쟁으로 승리하는 민주노조의 원칙, 계급적 원칙이 실종된 것이다.

 

금속노조에서는 동지의 조합원 인정과 관련하여 어떤 입장을 표명하고 있나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입장인 것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미 조직통합 당시 금속노조의 입장이 대단히 기만적이고 절충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직통합 당시 기아차지부의 직가입 추진에 대해 금속 중집회의에서 중단을 결정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기아차지부의 규약위반에 대해 말로는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질적인 제재가 뒤따르지 않았다. 우리가 각급의 회의에 참관투쟁을 전개하면서 항의하고 비판하면 겨우겨우 입장이라도 내는 모양새였을 뿐이다.
1350여명의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중 유일하게 내가 조직통합에서 빠졌던 2008년에 금속노조에 항의하면서 입장을 촉구했을 때에도 부당하고 규약에 어긋난 처사지만 지금 당장에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히려 당시 기아차지부 집행부가 감정적으로 대단히 민감하니 시간을 두고 처리하자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렇기에 이번 싸움에서 선전물을 통한 비판, 금속노조의 개입을 통한 올바른 처리를 촉구하는 수준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항상적이고 지속적인 비판을 수행했어야 됨에도 지레 짐작해서 주요한 투쟁지점을 놓치고 간 것은 아닌가싶다.

 

대대 결과에 대해 조합원들이나 활동가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당연히 분노하고 안타까워들 한다. 이미 대대결정 전부터 현장조합원들은 당연히 조합원인데 왜 집행부와 일부 대의원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다. 그렇기에 대대결정 이후 다시금 지부 집행부에 대한 비판과 불신이 쌓이고 있다. 조직통합 이후 비정규직의 요구와 투쟁이 축소되거나 거부당하면서 가지는 실망과 자조, 정당한 요구이기에 비판과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해도 안되는구나”라는 좌절이 생기는 것 아닌가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래도 조합원 인정 관련해서 집행부사업으로 풀겠다는 대대결정이 투쟁의 여지는 있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일부 있다. 물론 집행부사업은 그야말로 집행부의 의지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기에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렇지만 여지를 이야기하는 동지들이 지금까지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기에 앞으로 계속 2,3차 하청 해고자의 조합원 인정과 복직, 나아가 2,3차 하청 노동자의 조직화까지 함께 할 의지로 이러한 평가와 이야기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번 대대에 조합원 인정과 복직을 위한 희망광장 및 투쟁사업장 동지들의 연서명이 조직되었다. 어떻게 조직되었나. 대대에서 어떤 영향이 있었나

 

 

비정규직지회 투쟁하면서 연대활동이 부족하지 않았던가하는 반성적 평가와 더불어 지부 내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리기 위한 흑심(?)을 가지고 희망뚜벅이 때부터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이 속에서 투쟁사업장 동지들에게 내가 조합원 인정이 되지 않는 상황을 알렸다. 처음 얘기를 했을 때는 많은 동지들이 이해 자체를 못했다.
한 동지의 말을 빌리면 “노동조합을 만든 사람이 그 노동조합과 통합한 노동조합에서 조합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웃기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후맥락을 이야기해야만 이해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투쟁사업장 동지들도 각급의 단위에서 민주노총, 금속노조 관료들과 크고 작은 투쟁을 했던 동지들이기에 깊은 공감을 보여줬다.
이런 것들이 대대에서 희망광장 성명서, 지지 현수막, 임대생방송 지켜보면서 SNS에 퍼나르고 비판하기 등으로 나타났고, 그 동지들의 투쟁에 해복투는 큰 힘을 받았다. 대대에서 어이없는 발언이 터져 나올때마다 SNS와 카카오톡에서 더 많이 흥분하고 비판하는 동지들의 글이 주루룩 올라왔고 그것들을 보면서 대대장에서 절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이러한 연대조직은 사실 집행부 압박보다는 집행부에 대한 폭로를 통해 대중적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1사1조직의 본질을 다시금 재조명해내면서 무조건 1사1조직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대중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던가?
또한 공장 안팍을 오가는 연대와 공감은 우리 기아차 공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연행되었던 쌍용차 동지의 석방 탄원서를 조직했는데 단 서너 시간 만에 800여명을 조직할 수 있었다. 물론 대대가 진행 중이어서 조직이 용이한 측면도 있었지만 2/3 이상은 현장조합원들의 서명이었다. 활동가들이 발로 뛴 성과지만 그 활동가들을 발로 뛰게 만들고, 조합원들이 선뜻 서명하게 만든 원동력 또한 희망광장과 투쟁사업장동지들과의 연대가 꾸준히 진행됐고 알려졌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해복투에서는 이번 대대 대응 평가를 어떻게 하고 이후 계획을 어떻게 잡고 있나

아직 해고자들 간의, 해복투를 함께 하는 동지들과의 평가가 진행되지는 못했다. 당장 함께 했던 동지들과 평가를 조직하는 것이 계획일 수 있겠다. 이 속에서 조금은 변화된 “조합원 인정과 해고자 전원 복직”투쟁의 계획을 내실 있게 짜야 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진행했던 연대활동을 확대해야겠고.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무엇보다 공장 안팎 투쟁 과정 속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동지들에 대한 접근과 투쟁이라는 기조를 살려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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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잡년행동 랜디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2/05/04 12:51
  • 수정일
    2012/05/04 12:51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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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번 총선에는 유달리 후보의 성폭력 전력이나 여성비하적 발언 등과 관련한 논란이 많았다. 이는 새누리당 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통진당이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을 비례대표 4번으로 공천한 것을 규탄하는 1인 시위와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정진후 의원은 2008년 말에 발생한 민주노총 김OO 성폭력 사건의 처리과정 당시 전교조 위원장이었다. 그는 전교조 대의원 대회를 앞두고 가진 피해생존자와의 독대자리에서는 ‘전교조 내 2차 가해자 3인의 자숙 기간 3년과 공개 사과’라는 피해생존자의 요구대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가 대의원 대회에서 내놓은 안은 위의 내용과 전혀 다른 2차 가해자의 징계 감경을 추인하는 내용이었다. 위원장의 안에 반대하는 대의원들이 많았음에도 그러한 의견들은 묵살되었다. 이번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정진후 의원은 피해생존자가 직접 후보사퇴를 요구하러 찾아갔지만 피해생존자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정진후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민주노총 김OO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전교조 서울지부 초등관동지회’, ‘잡년행동’ 및 여러 단체와 개인들은 3월 초부터 성명서를 내고 1인 시위를 하였다. 또한 3월 16일부터 매주 금요일에는 관악구 이정희(후에는 이상규) 사무소 앞에서 촛불집회를 진행했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에서는 이번 투쟁과정에 적극적으로 함께한 ‘전교조 서울지부 초등관동지회’와 ‘잡년행동’ 활동가를 만나 이번 투쟁에 결합하게 된 배경과 심경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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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년행동 이외에 이러한 활동에 함께 한 적이 있는가
 
삼성 모바일에서 기획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삼성 홈페이지에 보이지도 않는 페이지에다가 웹진을 하나 만들어 놓고서 인디밴드들을 취재해 오라고 하더라. 내가 처음에 두리반에 갔을 때가 아마 그것 때문에 갔을 거다. 두리반은 좀 말기에 갔었고.
이후에 결합한 마리에서는 거의 상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근 씨는 아마 아실텐데 그분하고 같이 사진전도 했고. 8월 3,4일 경에 대규모 침탈이 일어났다. 그 때 찍은 사진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고.
 
그 전부터 마리, 두리반과 같은 투쟁에 관심이 있었나
 
대학 때. 난 대학 때 사진전공을 하지 않았다. 성공회대학교에 전산정보학과라고 거기 처음 입학했었다. 그 학과의 처음 학번은 아니었고. 98학번이니까. 사진이랑 별 상관없는 전공을 하고 군대 갔다 와서 바로 사진 일을 시작했다. 
알다시피 98학번쯤 되면 그 땐 운동권에는 NL밖에 없었을 때다. 나도 처음했던 게 고등학교 때부터 97년 연세대 투쟁할 때, 밖에 나가서 맞고 들어오는 게 내가 처음 했던 거였다. 그 때 학교 땐 그게 다 하는 일인 줄 알았고. 저도 어렸으니까 다른 걸 몰랐다.
대학을 갔다 오고 나서 웨딩스튜디오 할 때, 한 동안 현장에 못나갔다.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스튜디오 이런 일이 보통 거의 휴일이 없다. 내가 스튜디오 일을 하기 전에는 현상소 일을 했다. 현상소 일은 하루 12시간 일한다. 거긴 진짜 휴일이 없다. 비유적 표현으로 휴일이 없다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휴일이 없다. 월화수목금토일 전체 나가야 되고 당연히 야근수당 없고, 그 때 한 100만원 받았나? 배운다는 명목으로 일을 하는 거다. 도제였다.
그래서 웨딩스튜디오 일을 하다가 제가 일을 그만두었다. 일을 배운 건 있었는데 옛날부터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그거 그만두고 나서) 처음 시작했던 게 인디밴드 인터뷰였다.
삼성모바일에 제일 처음 이야기했던 건 사진은 무조건 흑백으로 하겠다는 거였다. 흑백으로 찍는 것은 내가 객관성을 포기하고 내가 무엇인가를 지향하겠다는 거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객관성을 뭐 하러 유지하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두리반과 마리 갔을 때부터 그랬다. 보통 사진가들은 프레스 완장을 두르고 “아 나는 사진 찍는 기자니까 절 때리지 마세요”라는 어필을 한다. 그런데 난 그거 대신 채증방지 스카프를 둘렀고. 그 입장으로 들어가면 절대 보호받을 수가 없다. 나는 옛날부터 공감하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작년 잡년행동 때 그것을 알게 되었다. 7월16일에 첫 잡년행동이 있었는데 그 당일에 포토라인이 아주 자연스럽게 생겼다. 그리고 우리가 사전 준비를 그 전날부터 그 저번 주부터 열심히 했었는데 아무도 취재오지 않았다. 사진 취재 온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하다못해 기자들 중에 저희랑 인터뷰한 사람도 없었다. 그냥 와가지고 포토라인 앞에서 열심히 사진 찍고 이제 필요한 사진 건졌으니까 그냥 갔다. 그 행사가 끝나고서도 그 뒤로 많은 행사, 행진 말고도 굉장히 많은 행사들이 있었는데 기자들은 필요한 사진 찍고 나니까, 행진 끝나고 나니까 그냥 다 가버리더라. 그리고 나하고 또 다른 사람 말고는 그 뒤에 행사 사진은 아무도 찍은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온 사진들은 다 뻔했다. 그게 이제 우리가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잡년행동 사진들이다. 사진들이 전부 다 똑같고.
내가 사진 전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제가 많이 본, 유서깊은 사진들을 보면 사진 캡션에 제일 많이 써 있었던 말이 “나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 사람하고 며칠을 같이 보냈다.” 이런 말이 제일 많이 적혀있었다. 나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아무도 안 그런다.
 
잡년행동에는 어떻게 같이 하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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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처음엔 다 그렇듯이 트위터 보고 같이 하게 되었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잡년행동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여기서 시작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여성들이 자유롭게 입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나는, 꼭 나만이 아니라 (잡년행동 내)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실제 잡년행동에는 여성들만 온 게 아니라 성소수자들도 많이 왔고, 남자들도 많이 왔고. 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왔었다.
잡년행동의 기본정신은 그거다. 여성들이 자유롭게 입을 수 있다는 권리에서 시작을 했지만 근본적으로 얘기를 더 하고 싶은 것은 인간에게는 신체의 자유가 있다는 거다. 여성에게는 당연히 자유롭게 입을 권리가 있고 남자나 성소수자나 혹은 다른 사람들도 자유롭게 자신의 신체에 대해 표현할 권리가 있다는 거다. 그게 잡년행동의 주요 정신이라고 생각을 했다. 나는 첫 행사 하기 전부터 트위터에서 그 얘길 많이 했었고 많이 공감받았다.
또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아, 야하게 입고 오는 퍼포먼스다’ 이렇게 이야길 하지 않나. 그런데 난 그 때 정장을 차려입고 갔다. 왜냐면 그게 남자를 표현할 수 있는 되게 멋진 옷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저는 헤테로 섹슈얼 남자로서 정장을 하고 갔다. 아직도 나를 표현하는 것 중에 제일 좋은 의상이라고 생각을 한다.
 
 
 
 
 
다른 외국의 상황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잡년행동, 잡년행동에서는 다른 사안에 대해서 연대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잡년행동 한 당일도 여성가족부 앞 현대차 성희롱 피해자 농성장에 갔다고 알고 있고, 지금 정진후 후보 사퇴 관련해서 같이 투쟁하는 것도 그렇고.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했나
 
일단 처음에 말했던 최초의 잡년행동 때부터 이야기를 해보자면, 토론토에서 처음 시작이 되었지 않나. 그게 미국으로 확대가 되었고. 미국 잡년행동은 이후에 어떻게 활동하게 되었냐면, 월가에 집중했다. 거기도 마찬가지로 그래요. 그게(월가 점령)가 모든 이슈를 흡수했다. 월가 이후에 더 이상의 잡년행동은 거기서도 없는 상황이고. 우리는 이제 2011년 7월에 처음 했었고 그 다음에 잡년 난장이 또 한 번 있었다. 현대차 성희롱 피해자 농성장에서 시위가 있었고.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행사를 많이 못했다.
우리가 첫 행동 이후 너무 오랫동안 뻗어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올 해 여성의 날 행사가 계기가 되었다. 이제 우리가 다른 행사를 해야 하는데 그 때 우리가 제일 핵심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나꼼수 비키니 사건이었다. 나꼼수 비키니 사건이 현안이었고 그런데 그게 우리가 행사를 하던 당시로 봤을 때는 약간 유행이 지난 이슈였다. 그 때 우리가 뭐에 주목을 할까 생각을 해봤을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었었던 게 정진후 사태였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연대한 적이 없었다보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었고. 이게 선거법에 걸리는 행위일까 우리도 잘 모르는 상태였어요. 4월 4일 국회의사당에 잡년행동에서 1인 시위 하러 갔을 때에도 스케치북에 정진후 후보 이름을 대놓고 써놨더라. 선거법 위반으로 걸리면 벌금이 거의 300만원이 넘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원래 잡년행동 내부에서도 집회에 나오자는 얘기는 여성의 날 행사 때부터 했었다. 왜냐하면 이 사안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촛불집회가 있다는 얘기는 이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대리인 분한테 들었고 이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전부터 느끼고 있기는 했지만 3월 10일 여성의 날 행사를 하고나서 우리 행사도 나름대로 계속 해야겠지만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여성의 날 행사에서 제일 많이 그런 페이소스를 느낀 게 요양보호사분들이었다. 요양보호사 분들이 100만 요양보호사 권리 쟁취를 위해 올라오셨다. 전국의 70% 이상의 요양보호사들이 100만원 이하의 임금을 받고 있고, 그래서 그것 가지고 싸우고 있다. 실재로 요양보호를 하는데 자신들이 요양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여러 가지 직업병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더라. 어머니도 요양보호사를 하고 계시고. 그래서 그런 페이소스를 많이 느꼈고. 우리가 여성이란 이름으로 연대를 하고 있는데 여성은 세상의 반의 이슈를 포괄할 수 있는 그런 문제지 않나.
그래서 나는 그 때 거기 있던 사람들과 같이 하면 거기서 만났던 단체 분들이 우리에게 많은 힘을 실어 줄 수가 있고 또 우리도 그 분들에게 많은 힘을 실어 줄 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저희 말고도 그 날 행진했던 단체들 모두가 느끼지 않았을까?
 
연대하는 것에 대해 내부에서 불만이나 부담스럽다는 사람은 없는가
 
우리는 개인참여다. 우리가 하자센터에 입주하고 조직화를 하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할 때 조직화를 하는 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어떤 당이나 강령 이런 걸 내세울 수 있는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선언문이나 어떤 텍스트를 작성을 하더라고 강령을 내세우진 않을 것 같다. 강령이 있다는 건 당원들이 약간의 이견이 있더라도 여기에 따라달라는 뜻이지 않은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나가도 좋습니다’ 이런 거 아닌가.
 
잡년행동에는 기본적으로 그런 건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딜 가는데 못 나가면 인간으로 누구나 미안함 같은 건 있다. 그런데 그거 가지고 멘붕(멘탈붕괴,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나오지 않았다고 매일 미안해하다 보면...우리같이 특히 강령으로 묶이지 않은 사람들은 계속 미안해하다보면 자책감에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같이 연대를 못하니까 그거가지고 계속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러한 분위기부터 일단 없애고 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진후 사태에 대한 투쟁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꼰대 같은 얘기지만 옛날 얘기를 한 번 해보겠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내가 운동권을 할 때에는 다들 알고 있는 NL밖에 없었고 그런 활동을 했었다. 그 때에는 누구나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내가 그곳을 나오면서 대자보에 ‘고립을 구하여 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써놓고 나왔다. 그 말은 지금 생각해도 잘 쓴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때 그 말을 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었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굉장히 유의미하고 앞으로도 유의미할 거다. 그런데 나는 그 때 느꼈다. 지금 운동권에서도 옛날에 있었던 일이 똑같이 반복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같은 운동권 내에서도 성폭력이 있고 내부분열이 있고. 어제까지 연대했던 사람들이 오늘은 또 적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럴 때 연대 자체에만 매몰되어가지고 아, 이게 아니면 나는 죽어, 이게 아니면 난 사는 의미조차 없어 라는 동지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얘기를 해줬다. 난 고립을 구했기 때문에 연대를 오히려 구할 수 있었던 거라고. 연대가 나를 떠나더라도 실존적인 내가 존재하고 있지 않나. 나는 그래서 실존적 개인들이 자신이 실존하고 있는 개인이라는 걸 먼저 알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래서 매번 사회 이야길 하는 건 좋은데 거기서 왜 항상 실존하고 있는 개인의 말은 없는가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사회에 대한 문제를 생각을 하는 건 좋은데 왜 자신에 대한 문제는 잊혀지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우리가 투쟁을 하는 것도 만약 지금 이 투쟁으로 인해서 승리를 반드시 해야 되고 뭔가를 꼭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거라면 아마 그 사람은 절대 활동을 지속하진 못할 거다. 그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지칠 것이고, 자신이 믿고 있던 연대에 의해 버림받을 거다. 자신이 고립을 구하지 못한다면 승리는 드물고 패배는 판을 치는 이 바닥에서 아마 오랫동안 버티진 못할 거고 끝내는 자신들이 경멸했던 사람들의 길을 걸어가게 될 거다. 나는 그것을 10년, 15년 전의 선배들의 모습에서 보고 있다. 지금도 아마 똑같이 갈 것이라고 생각되는 걸 보면 저는 사람들이 개개인의 자신의 모습을 찾았으면 좋겠다. 이 투쟁은 그것에 대한 투쟁이라고 생각을 한다.
잡년행동 친구들이 이번 사건의 피해자 지지모임과 같이 연대하는 것도 솔직히 올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지금, 개인적인 사정들이 다 있기 때문에. 아마 거의 칠월하고 나만 계속 오고 있을 거다. 잡년행동이란 이름을 걸고, 아 저희가 잡년행동 공식계정에서 “잡년행동 여기 지지 연대했습니다” 하고 내보내는 것보다 잡년행동 안에 있는 랜디와 칠월이라는 개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거다. 한국의 잡년행동을 모이게 한 점도 그 점이 아닐까 한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권리가 있고, 우리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개인의 신체적 기본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거다.
 
앞으로 잡년행동의 활동방향은?
 
잡년행동은 아마 방금 말씀드렸듯이 계속 연대할 것 같다. 잡년행동이라는 내가 여기에 있고 많은 연대들이 있다. 그쪽과 손을 잡자라는 것, 그게 저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손을 맞잡았으면 좋겠다. 그게 잡년행동의 나아갈 방향인 것 같고.
그리고 더 많은 말을 할 것 같다. 3월 10일 행사 때 이런 일도 있었다. 나도 사진가를 담당하고 있지만 잡년행동 잡년행진의 멤버다. 같이 연대도 하고 있고. 그런데 내가 그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디 신문사에서 나오진 않았는데 뉴시스 같은 그런데 사진을 판매하는 프리랜서들이 사진을 많이 찍어가더라. 그 때 어떤 사진가들이 포즈를 취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포즈를 취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거기 남자분은 좀 비켜달라는 거다. 그날 되게 어이없었다. (그 사람들은) 여자를 찍어가고 싶었던 거다. 나는 그 때 우리가 더 많은 말을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잡년행동는 기본적으로 위악적인 집단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듣기 싫으면 꺼져라라는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그런 래디컬하고 위악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게 우리 정체성이다. 그건 우리 정체성이기 때문에 아마 그걸 포기할 수는 없을 거다. 그걸 포기하면 잡년이 아니니까. 이 위악적인 정체성 자체에 대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버리고 한 번 참년으로 한 번 나가볼까 하는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흐지부지 되었다. 아마 계속 이렇게 나갈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 대해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는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사진가니까 많은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동안 우리가 트위터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앞으로는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서도 공식적인 말을 더 많이 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여성은 그리고 인간은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고, 앞으로 더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잡년행동도 잡년도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오해를 받을 것이고 그리고 그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더 많은 말들과 더 많은 행동을 해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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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전교조 서울지부 초등관동지회 강민주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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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04 12:46
  • 수정일
    2012/05/04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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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번 총선에는 유달리 후보의 성폭력 전력이나 여성비하적 발언 등과 관련한 논란이 많았다. 이는 새누리당 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통진당이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을 비례대표 4번으로 공천한 것을 규탄하는 1인 시위와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정진후 의원은 2008년 말에 발생한 민주노총 김OO 성폭력 사건의 처리과정 당시 전교조 위원장이었다. 그는 전교조 대의원 대회를 앞두고 가진 피해생존자와의 독대자리에서는 ‘전교조 내 2차 가해자 3인의 자숙 기간 3년과 공개 사과’라는 피해생존자의 요구대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가 대의원 대회에서 내놓은 안은 위의 내용과 전혀 다른 2차 가해자의 징계 감경을 추인하는 내용이었다. 위원장의 안에 반대하는 대의원들이 많았음에도 그러한 의견들은 묵살되었다. 이번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정진후 의원은 피해생존자가 직접 후보사퇴를 요구하러 찾아갔지만 피해생존자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정진후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민주노총 김OO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전교조 서울지부 초등관동지회’, ‘잡년행동’ 및 여러 단체와 개인들은 3월 초부터 성명서를 내고 1인 시위를 하였다. 또한 3월 16일부터 매주 금요일에는 관악구 이정희(후에는 이상규) 사무소 앞에서 촛불집회를 진행했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에서는 이번 투쟁과정에 적극적으로 함께한 ‘전교조 서울지부 초등관동지회’와 ‘잡년행동’ 활동가를 만나 이번 투쟁에 결합하게 된 배경과 심경을 들어보았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쳐왔다. 개인적이든 초등관동지회에서든 그 간 이와 관련하여 활동하신 것이 있다면 어떤 활동들을 함께했나
 
개인적으로는 후원금을 낸 것 이외에 특별히 한 것은 없다. 초등관동지회 집행부들이 움직인 것은 이번 4.11 총선을 앞두고 정진후가 비례대표로 추천되면서부터다. 정진후가 사퇴할 때까지 그리고 피해자 동지가 치유될 때까지 피해자 동지와 끝까지 함께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번에 정진후 공천과 관련하여 문제가 불거졌다. 정진후가 공천된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시기에 정진후는 전교조의 핵심에 있었고, 그 핵심 권력을 휘두르며 피해자 동지에게 거짓과 기만으로 일관했다.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채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만이다’라는 글귀가 생각난다. 조직 보위라는 미명하에 조합원을 소모품 취급하며 철저히 저버리는 사람이 노동자 민중을 위한 교육개혁을 말한다는 것은 사기다. 그래서 사기꾼 정진후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총선 전까지 매일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이정희(후에는 이상규)후보의 사무실 앞에서 1인 시위와 촛불집회를 진행했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3월6일 초등관동지회 집행부 회의를 했다. 그 자리에서 정진후가 통진당 비례대표로 추천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 지회 조직부장인 조영원 선생님이 1인시위라도 하겠다고 말씀하셨고 나머지 집행부들도 시간나는 대로 결합하기로 했다. 1인시위라도 몇 명이 함께 할 거라면 집회 신고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조영원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집회신고를 한 달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주위에 알려나가면서 금요일은 촛불집회 형식으로 진행하여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집회는 3월 9일부터 4월 10일까지 진행하였고 매주 금요일과 마지막 날인 4월 10일은 촛불집회로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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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진행한 1인시위와 촛불집회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아래는 개인적인 평가다. 집행부 회의에서 처음에 1인시위 이야기가 나온 후 집회신고를 하고 한 달간 집회를 하자고 결의를 모았을 때만해도 이 집회의 의미는 단순한 문제 제기 수준이었던 것 같다. 이정희 사무실 앞에서 매일 집회를 한다고 해도 정진후가 사퇴를 하거나 통진당이 눈이라도 한번 껌벅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의 행동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쓸 사람들 같았으면 정진후를 후보로 추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전교조라는 조직에서 그리고 ‘통합진보당’이라는 ‘소위’ 진보당에서 일어나고 있었기에 우리의 분노를 어떻게라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정희 사무실 앞 집회를 하면서 이 투쟁이 정당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피해자 동지의 편에 서서 집회를 할 수 있었던 점, 피해자 동지가 금요일마다 진행된 촛불집회에 함께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선거기간 동안 피해자 동지에게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관동지회에서 한 달간 진행한 집회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피해자 동지가 관동지회에 보내온 편지를 읽고 한참을 울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관동지회 선생님들도 피해자 동지의 편지를 받고 함께 울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 집회가 있었던 4월10일에 함께 결의했다. 이 집회는 선거를 앞 둔 마지막 집회이지만 우리는 피해자 동지와 끝까지 함께 투쟁할 것임을. 피해자 동지가 다시 전교조 조합원으로 우리와 함께 투쟁할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피해자 동지와 함께 할 것임을 다짐했다.
 
4월21일 전교조 집회에서 심상정 의원이 발언하는 것을 제지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말씀해 달라. 그리고 그때의 심경은 어떠했나
 
4월21일 집회에 관련된 전교조 위원장 서신을 메일로 받았다. 집회 일정도 나와있더라. 통진당 대표와 전교조 출신 국회의원 2명의 발언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메일을 읽고 바로 아래와 같은 글을 써서 전교조 홈페이지 조합원마당에 올렸다. 발언을 제지한 이유는 아래의 글로 대신하겠다.
 
4월 21일 집회 웹자보와 함께 온 위원장 서신을 읽었습니다.
일정 중에 연대사1 : 통합진보당 당대표, 국회의원 당선자2인 이라 되어있더군요.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성폭력피해자에게 거짓와 위선으로 일관한 국회의원 정진후를 전교조 집회에 세울수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당하게 정진후를 비례대표로 만들고 국회의원까지 만든 통진당 대표의 발언도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성폭력피해자 외면하는 사람과 정당은 진보를 대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보위라는 미명하에 개인을 소모품 취급하여 철저히 저버리는 사람과 조직은 교육개혁을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21일, 그 날!
단상을 점거해서라도  두 사람의 발언을 꼭 막겠습니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피해자의 치유를 진정으로 바라는 동지들!
더이상 전교조가 피해자에게 조직적 가해를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동지들!
21일, 그 날, 함께 해 주십시오
전교조 서울지부 초등관동지회 사무국장 강민주 드립니다.
<추신>
앞으로 서울지부 모든 행사에 국회의원 정진후가  나타난다면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이 투쟁은 피해자 동지가  치유되고 다시 전교조 조합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 때 현수막을 들고 집회가 끝날 때까지 단상에 있었다. 심상정이 가고 집회는 계속 진행되었다. 현수막을 들고 있는 우리 앞에서 웃고 떠들며 손뼉치며 전교조는 12월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통해 법을 개정해서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자고 했다. 중간 중간 저희들을 보고 ‘내려와, 그만해...’라는 발언들이 있었지만, 힘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약자들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행동인 ‘무시’로 일관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느꼈느냐면,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다. 학교 교무회의 시간에 일어나 학교의 비민주적인 행태나 전교조 관련 일에 대해 발언을 할 때면 교무, 연구, 신우회 소속의 선생님들, 즉 교장 교감의 마름들이 일어나 교장, 교감 편을 들며 저를 공격한다. 하지만, 아무도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교무회의 자리에서도 나는 외롭거나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다. 내 뒤에는 전교조라는 든든한 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일 그날 단상에서는...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처음으로 절망을 느꼈다. 내가 의지했던 든든한 전교조가 아무리 소리치고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벽’이었음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제가 이렇게 답답하고 절망스러운데 피해자 동지는 4년 동안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래서 집회 내내 흐느끼면서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전교조라는 조직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피해자 동지가 어떤 마음으로 민주노총 이석행 전 위원장의 도피처를 흔쾌히 제공해 주었는지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도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발전노조 파업당시 전 조합원 산개투쟁을 전개했다. 그 때 나는 동해화학 동지들이 우리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열쇠를 건네 준적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아는 선배 집에서 지내며 너무나 뿌듯했다. 역사적인 발전노조의 파업투쟁, 산개투쟁에 나도 아주 조금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투쟁이 정리되고 집으로 가보니 동해화학 동지들이 써 놓은 메모가 있었다. 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6줄 정도 되는 글이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메모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조직일로 힘들고 지칠 때,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하는 생각에 빠질 때, 그 메모를 보면서 힘을 받곤 한다. 이렇듯, 투쟁하는 동지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흔쾌히 내어주는 마음을, 이석행 전 위원장의 도피처를 제공해 준 피해자 동지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동지들이 배신을 하다니... 그렇게 믿었던 동지들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들을 버젓이 저지르다니...
이 사건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조합원들 중에서도 그렇다. 앞으로 이 사건의 진실을 계속 알려나가고 피해자 동지와 함께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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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9일, 시청광장에서 벌어진 폭력사태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2/05/04 12:36
  • 수정일
    2012/05/04 12:36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4월9일, 시청광장에서 벌어진 폭력사태
 
4월9일, 저녁 7시를 조금 넘긴 시간부터 나와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의 유현경 동지는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민주노총 김OO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의 성원으로서 그 집회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정진후가 공천된 것이 문제가 있음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유현경 동지와 나는 2미터 정도 떨어져서 각자 피켓을 들고 있었고, 잡년행동의 랜디님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1인 시위를 시작한지 30분 정도 지났을 때 한 군복을 입은 4-50대 남성(이하 ‘군복남’)이 나에게 다가와서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나는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의 뜻을 무시한 사람이 이번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후보로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군복남은 그게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통합진보당 4번 정진후 후보라고 답했다. 
처음에 ‘김OO’이라는 원가해자와 정진후는 다른 사람이며 우리가 지금 문제제기하고 있는 사람은 정진후임을 여러 번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복남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는 여성가족부 앞에서 항의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집회에 참가한 사람과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서 왔다. 진보진영 내에서 이런 문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군복남이 사법부에 해결을 요청해야지라고 했다. 그래서 원가해자는 사법부에서 재판받고 감옥에 갔다가 얼마 전에 출소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정진후가 원 가해자는 아니지만 피해자의 의견을 묵살하고 2차 가해자들을 옹호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군복남은 계속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는 말만 계속했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물었더니 군복남은 이렇게 답했다. “여기 조선일보 기자가 와서 당신들 사진 찍어가면 당신은 스타 되고 여기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바보 되는 거야”라면서 “누구 좋으라고 이러는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군복남은 처음 보는 나에게 계속 반말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스타 되려고 하는 거 아니고 그럴 일도 없다”고 했고 피켓 시위에 합류한 잡년행동의 칠월님도 “그럴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복남이 피켓 시위를 중단하라는 말을 계속하자 칠월님은 “불법 사찰 반대하는 피켓을 정진후 공천에 항의하는 피켓이랑 같이 들고 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군복남은 “아, 그게 아니지”라며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결국 군복남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나와 칠월님 그리고 랜디에게 “(집회장에서)나가라면 나가”라는 말까지 했다. 
언쟁이 계속되자 집회대오 뒤쪽에 앉아있던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로 5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성이 많았으나 여성들도 상당수 있었다. 2-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와 칠월님, 그리고 계속 사진을 찍고 있던 랜디님을 둘러쌌다. 그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쟤네 한나라당 알바 아니야?”, “조중동에서 나온 애들 아니야?”라는 고함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에 호응하는 목소리들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재네, 한나라당 알바네.” 아무리 우리가 여기서 피켓 시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에게 우리는 조중동이 부리는 알바일 뿐이었고, 따라서 집회장에서 내쫓아야 할 적이 되었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한 중년 여성과 남성, 그리고 군복남이  “여긴 당신 같은 사람들 올 곳이 아니야”라면서 우리에게 나갈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그 중년 여성은 “당신들, 지금 상갓집에 와서 깔깔대고 있는 거야”라며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중년 남성은 “쟤네들은 인간 쓰레기야”라면서 소리 지르고 삿대질을 했다. 나와 칠월님은 계속 “우리도 사찰 반대 손피켓 들 수 있고, 우리도 엠비 싫어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분들과 공유하려고’라는 표현이 나왔고 앞에도 등장한 그 중년여성은 ‘여러분’이라는 말에 갑자기 흥분했다. “여러분? 넌 애미 애비도 없냐?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라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이에 랜디님이 반말하지 말라고 항의했지만 그들은 계속 애미 애비도 없냐며 윽박질렀다. ‘여러분’이라는 말이 왜 예의에 벗어났는지도 모르겠고,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는 무조건 반말을 써도 된다는 사고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랜디님이 ‘이렇게 하는 거 부끄럽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한나라당 알바네’, ‘인간 쓰레기네’라는 말이 오고갔다. 고성이 오고가니까 집회 대오에서 몇몇 사람들이 뒤돌아보기 시작했지만 무대에서는 어떠한 상황정리 발언도 없이 집회를 진행했다. 언론노조 상근자 분이 와서 우리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을 말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언론노조 상근자 역시 ‘새누리당 알바’로 몰렸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피켓의 문구를 가리기 위해 피켓에 붙어서 섰다. 그래서 우리는 피켓 문구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피켓을 머리 위로 들고 서있었다. 그러자 또 다시 욕설들이 쏟아졌다. 한 중년 여성은 “너 같은 년들 앞길 뻔하다. 너 같은 딸년 셋 낳아서 갈보년 만들 년들”이라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앞에서 한 할아버지는 “너희가 박정희 시대를 아냐”며 호통을 쳤다. 1인 시위마저 억압하는 것이 더 박정희 독재시절의 모습에 가까운 것 아니냐며 항의하고 싶었으나 이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분노했기에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군복남도 계속 협박을 해댔고, 우리를 협박하는 모습을 랜디님이 사진으로 찍자 군복남은 사진 찍지 말라고 지우라고 막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 중 한 할아버지는 우리 뒤에 서서 귀에다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독립군 잡아서 일본군한테 넘기는 년들이 딱 너희 같은 년들이야”라면서 귓속말을 해댔다. 너무 불쾌했다. 그래서 ‘불쾌하니까 그만하시라’고 하자 옆에 있던 칠월님에게 귓속말을 하면서 “너한테 하는 거 아니고 얘한테 하는 건데”라며 말도 안 되는 답변을 하며 조롱했다. 주위에서는 “나가라면 나가” “말로 할 때 나가”등 반말과 협박이 난무했다. “우리가 왜 나가야 하냐”, “1인 시위는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거”라고 대응했으나 협박은 계속되었다. 한 중년 남성이 신문지 말은 것을 봉처럼 만들어서 머리 위로 들고 있는 피켓을 툭툭 쳤고 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 갑자기 피켓이 부서졌다. 우리는 뒤에 설치되어 있던 빨랫줄에 걸려서 넘어질 뻔 하고 우리가 들고 있던 피켓은 박살이 났다.
너무 억울해서 울면서 남은 피켓을 들고 서있는데 빨간 바람막이를 입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성이 왔다. 그리고 여기서 이러지 말라고 빨리 나가라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면서 바로 반말로 “나가라고 할 때 나가라”고 우리를 밀어냈고 우리는 힘없이 밀려났다. 마찰이 계속되자 경찰이 왔다. 경찰은 ‘우리 쪽이 집회신고가 되어 있지 않으니 이렇게 마찰이 생기면 우리가 나가야 된다’고 했고 우리는 피켓을 주섬주섬 모아서 쌍용차 분향소가 있는 곳으로 대피했다. 하지만 군복남은 쌍용차 분향소까지 쫓아와서 비아냥거리고 랜디님을 협박했다. 
이 전 과정을 겪으면서 그들이 분노를 표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피켓을 부수고 사진을 찍는 랜디님에 대한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의 전부는 아니었다. 계속되는 폭언은 ‘나이 어린 여성’에 대한 자신들의 권력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과정이었다. “~년들”이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어서 놀랍지도 않았다.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예의 없이 군다’는 논리로 묵살되었다. ‘딸을 갈보로 만든다’는 욕설, 끊임없이 굳이 귓속말로 모욕감을 주는 할아버지 역시 여성임을 이용해서 모욕감을 주는 방식이었고 이는 온 몸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4월9일, 시청광장에서 벌어진 폭력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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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9일, 저녁 7시를 조금 넘긴 시간부터 나와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의 유현경 동지는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민주노총 김OO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의 성원으로서 그 집회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정진후가 공천된 것이 문제가 있음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유현경 동지와 나는 2미터 정도 떨어져서 각자 피켓을 들고 있었고, 잡년행동의 랜디님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1인 시위를 시작한지 30분 정도 지났을 때 한 군복을 입은 4-50대 남성(이하 ‘군복남’)이 나에게 다가와서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나는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의 뜻을 무시한 사람이 이번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후보로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군복남은 그게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통합진보당 4번 정진후 후보라고 답했다. 
 
처음에 ‘김OO’이라는 원가해자와 정진후는 다른 사람이며 우리가 지금 문제제기하고 있는 사람은 정진후임을 여러 번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복남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는 여성가족부 앞에서 항의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집회에 참가한 사람과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서 왔다. 진보진영 내에서 이런 문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군복남이 사법부에 해결을 요청해야지라고 했다. 그래서 원가해자는 사법부에서 재판받고 감옥에 갔다가 얼마 전에 출소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정진후가 원 가해자는 아니지만 피해자의 의견을 묵살하고 2차 가해자들을 옹호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군복남은 계속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는 말만 계속했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물었더니 군복남은 이렇게 답했다. “여기 조선일보 기자가 와서 당신들 사진 찍어가면 당신은 스타 되고 여기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바보 되는 거야”라면서 “누구 좋으라고 이러는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군복남은 처음 보는 나에게 계속 반말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스타 되려고 하는 거 아니고 그럴 일도 없다”고 했고 피켓 시위에 합류한 잡년행동의 칠월님도 “그럴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복남이 피켓 시위를 중단하라는 말을 계속하자 칠월님은 “불법 사찰 반대하는 피켓을 정진후 공천에 항의하는 피켓이랑 같이 들고 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군복남은 “아, 그게 아니지”라며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결국 군복남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나와 칠월님 그리고 랜디에게 “(집회장에서)나가라면 나가”라는 말까지 했다. 
 
언쟁이 계속되자 집회대오 뒤쪽에 앉아있던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로 5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성이 많았으나 여성들도 상당수 있었다. 2-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와 칠월님, 그리고 계속 사진을 찍고 있던 랜디님을 둘러쌌다. 그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쟤네 한나라당 알바 아니야?”, “조중동에서 나온 애들 아니야?”라는 고함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에 호응하는 목소리들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재네, 한나라당 알바네.” 아무리 우리가 여기서 피켓 시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에게 우리는 조중동이 부리는 알바일 뿐이었고, 따라서 집회장에서 내쫓아야 할 적이 되었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한 중년 여성과 남성, 그리고 군복남이  “여긴 당신 같은 사람들 올 곳이 아니야”라면서 우리에게 나갈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그 중년 여성은 “당신들, 지금 상갓집에 와서 깔깔대고 있는 거야”라며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중년 남성은 “쟤네들은 인간 쓰레기야”라면서 소리 지르고 삿대질을 했다. 나와 칠월님은 계속 “우리도 사찰 반대 손피켓 들 수 있고, 우리도 엠비 싫어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분들과 공유하려고’라는 표현이 나왔고 앞에도 등장한 그 중년여성은 ‘여러분’이라는 말에 갑자기 흥분했다. “여러분? 넌 애미 애비도 없냐?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라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이에 랜디님이 반말하지 말라고 항의했지만 그들은 계속 애미 애비도 없냐며 윽박질렀다. ‘여러분’이라는 말이 왜 예의에 벗어났는지도 모르겠고,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는 무조건 반말을 써도 된다는 사고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랜디님이 ‘이렇게 하는 거 부끄럽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한나라당 알바네’, ‘인간 쓰레기네’라는 말이 오고갔다. 고성이 오고가니까 집회 대오에서 몇몇 사람들이 뒤돌아보기 시작했지만 무대에서는 어떠한 상황정리 발언도 없이 집회를 진행했다. 언론노조 상근자 분이 와서 우리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을 말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언론노조 상근자 역시 ‘새누리당 알바’로 몰렸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피켓의 문구를 가리기 위해 피켓에 붙어서 섰다. 그래서 우리는 피켓 문구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피켓을 머리 위로 들고 서있었다. 그러자 또 다시 욕설들이 쏟아졌다. 한 중년 여성은 “너 같은 년들 앞길 뻔하다. 너 같은 딸년 셋 낳아서 갈보년 만들 년들”이라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앞에서 한 할아버지는 “너희가 박정희 시대를 아냐”며 호통을 쳤다. 1인 시위마저 억압하는 것이 더 박정희 독재시절의 모습에 가까운 것 아니냐며 항의하고 싶었으나 이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분노했기에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군복남도 계속 협박을 해댔고, 우리를 협박하는 모습을 랜디님이 사진으로 찍자 군복남은 사진 찍지 말라고 지우라고 막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 중 한 할아버지는 우리 뒤에 서서 귀에다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독립군 잡아서 일본군한테 넘기는 년들이 딱 너희 같은 년들이야”라면서 귓속말을 해댔다. 너무 불쾌했다. 그래서 ‘불쾌하니까 그만하시라’고 하자 옆에 있던 칠월님에게 귓속말을 하면서 “너한테 하는 거 아니고 얘한테 하는 건데”라며 말도 안 되는 답변을 하며 조롱했다. 주위에서는 “나가라면 나가” “말로 할 때 나가”등 반말과 협박이 난무했다. “우리가 왜 나가야 하냐”, “1인 시위는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거”라고 대응했으나 협박은 계속되었다. 한 중년 남성이 신문지 말은 것을 봉처럼 만들어서 머리 위로 들고 있는 피켓을 툭툭 쳤고 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 갑자기 피켓이 부서졌다. 우리는 뒤에 설치되어 있던 빨랫줄에 걸려서 넘어질 뻔 하고 우리가 들고 있던 피켓은 박살이 났다.
 
너무 억울해서 울면서 남은 피켓을 들고 서있는데 빨간 바람막이를 입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성이 왔다. 그리고 여기서 이러지 말라고 빨리 나가라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면서 바로 반말로 “나가라고 할 때 나가라”고 우리를 밀어냈고 우리는 힘없이 밀려났다. 마찰이 계속되자 경찰이 왔다. 경찰은 ‘우리 쪽이 집회신고가 되어 있지 않으니 이렇게 마찰이 생기면 우리가 나가야 된다’고 했고 우리는 피켓을 주섬주섬 모아서 쌍용차 분향소가 있는 곳으로 대피했다. 하지만 군복남은 쌍용차 분향소까지 쫓아와서 비아냥거리고 랜디님을 협박했다. 
 
이 전 과정을 겪으면서 그들이 분노를 표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피켓을 부수고 사진을 찍는 랜디님에 대한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의 전부는 아니었다. 계속되는 폭언은 ‘나이 어린 여성’에 대한 자신들의 권력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과정이었다. “~년들”이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어서 놀랍지도 않았다.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예의 없이 군다’는 논리로 묵살되었다. ‘딸을 갈보로 만든다’는 욕설, 끊임없이 굳이 귓속말로 모욕감을 주는 할아버지 역시 여성임을 이용해서 모욕감을 주는 방식이었고 이는 온 몸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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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우리는 MB심판을 위해 입을 닫아야 하는가?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2/05/04 11:48
  • 수정일
    2012/05/04 11:48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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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9일 집단 폭력을 가능하게 한 진영논리
 
4월9일 저녁, 시청 광장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불법 사찰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 날 민주노총 김OO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과 잡년 행동의 성원 4인은 시청광장에서 통합진보당 정진후 비례대표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시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피켓 시위가 시작된 지 30분 남짓 흘렀을까. 집회 참가자들 일부(200명 가운데 20명 정도)는 이들의 피켓 시위에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피켓을 부수고 피켓 시위 하는 사람들을 폭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진영논리, 그 단순한 이분법 
 
피켓 시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집단린치를 가한 사람들의 논리는 단순명쾌했다. ‘조중동이 이러한 시위를 찍어가면 MB심판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피켓 시위에 처음으로 시비를 걸었던 군복을 입은 중년 남성은 “여기 조선일보 기자가 와서 당신들 사진 찍어가면 당신은 스타 되고 여기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바보 되는 거야”라면서 “누구 좋으라고 이러는 거야”라고 하기도 했다. 
 
이는 최근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진영논리를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반MB 정서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나는 꼼수다>는 촛불집회 이후 직접행동의 양상으로 터져나오지 못한 반MB 정서를 속 시원히 긁어주는 역할을 했다. <나꼼수>는 의혹투성이였던 이명박 대통령을 둘러싼 사안들에 대해 일종의 설명의 틀을 제공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이 ‘가카의 꼼수’란 것이었다. 
 
<나꼼수>의 이러한 접근은 사람들의 불만을 표출하는 부분에서는 도움이 되었으나 반MB와 다른 모든 것을 MB를 지지하는 쪽(대표적으로 조중동)의 음모나 꼼수로 이해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말은 최근 사용되는 ‘알바’라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거나 대세와 다른 의견을 가지는 댓글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알바’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 되고 있다. 특히 반MB에 동조하지 않는 의견, 새누리당에 대한 비판에 동조하지 않는 의견은 손쉽게 ‘알바’라는 이름으로 무시되었다. 4월 9일 시청광장에서 집단 린치를 가한 사람들 역시 피켓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새누리당 알바’, ‘한나라당 알바’라고 부르면서 피켓 시위를 저지했다.
 
진영논리, 내부의 문제제기를 묵살하다
 
이러한 진영논리의 문제점은 자신이 속한 진영에 유리한지 불리한지 여부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진영논리는 진영 내·외의 문제제기를 자신이 속한 진영을 해치는 것으로만 여기게 만든다. 그에 따라 문제제기에 대한 묵살과 폭력적인 대응이 나타나는 경우도 상당수다. 
 
최근의 여러 사건들은 진영논리가 어떻게 문제제기를 묵살하는지 잘 보여준다. 백분토론에서 시민논객이 유시민에게 던진 질문을 둘러싸고 상당수의 네티즌들이 보여준 태도 역시 그런 사건 중 하나다. 백분토론에서 한 시민논객이 성폭력 가해자를 옹호한 사람들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한 통합진보당에 문제제기 하는 일이 있었다. 백분토론이 끝나고 네티즌들은 이 시민논객이 새누리당 비대위 회의 사진에 찍힌 남성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백분토론에서 그 남성이 제기한 문제는 ‘새누리당의 꼼수’로 여겨졌고 남은 것은 ‘유시민, 시민논객 완벽제압’ 정도였다. 그 이후 새누리당 비대위 회의 사진의 남성은 백분토론의 시민 논객과 다른 사람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제기는 이미 묵살되고 난 이후였다. 문제제기에 대한 내용이 논쟁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제기한 사람의 ‘알바’ 여부만이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
 
4월 9일, 집회에서의 피켓 시위에 대한 폭력 사태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집단린치를 가한 사람들은 피켓 시위를 통해 알리려는 내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사태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심지어 잡년행동과 피해자지지모임의 성원들이 계속적으로 피켓시위의 이유를 설명했음에도 문제제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이름도 ‘정진수’라고 잘못 알 정도였다. 결국 집단린치를 자행한 사람들에게는 이 피켓 시위가 반MB에 도움이 될지 안 될 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적으로 몰리는 여성주의적 문제제기
 
진영논리에 의해 묵살되는 문제제기가 많은 만큼, 진영논리에 대한 비판과 갈등 역시 많았다. 특히 2012년에는 여성주의적인 문제제기가 진영논리에 의해 묵살되는 모습을 보였다. 올 해 가장 처음으로 진영논리가 이슈화된 것은 비키니 시위와 <나꼼수>가 보인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경향신문이 <나꼼수>의 관련 발언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하자 SNS에서는 경향신문에 대한 비난과 절독을 하겠다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주요한 논리는 왜 조선일보와 같은 논리를 들이대냐는 것이었다. 한 사안에 대한 입장이 그 입장 자체로 평가되지 못하고 누구와 같은 논리인지 여부가 판단기준이 되는 진영논리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후, 총선 즈음에 이슈가 되었던 것은 김용민의 막말 파문이었다. 여기서 진영논리를 잘 보여주는 것은 김용민을 지지하고 야권연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탁현민씨는 “오늘까지 이어지는 새대가리당의 찬란한 성희롱의 역사에 비하면 김용민의 발언은 집회하다 교통신호 어긴 것 쯤 된다. 낮에 본 트윗처럼 그가 한 말이 성희롱이라면 전두환을 살인마라고 하면 노인학대고 이명박을 쥐새끼라고 하면 동물학대다”라는 트윗을 날리기도 했다. 이들에게 성희롱 문제는 더 큰 대의인 MB심판을 위해서는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단순한 김용민 막말에 대한 포용을 넘어 “김용민을 끌어 내리려는 정치 알바들의 공세”라는 트윗들이 보이기도 했다.
 
4월9일 시청광장에서 진행한 1인 시위 역시 피해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조직 내에서 성폭력 가해자를 옹호한 정진후 후보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이 피켓 시위는 MB 심판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폭력적으로 철거되었다. 이들에게 성폭력 문제, 여성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우리 진영’을 위기에 빠뜨리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우리 진영이 아닌 적일뿐이었다. 
 
성폭력에 대한 도덕주의적 접근, 진영논리로 수렴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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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는 불특정 다수의 집회참가자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 조직들의 조직보위논리 역시 진영논리와 유사하다. 4월 9일의 피켓 시위는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제대로 된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집단린치를 가능하게 했던 논리는 역설적이게도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부딪혔던 조직보위논리와 매우 닮아있었다. 2차 가해자 중 1인인 정OO은 이 사건이 알려지면 민주노총 및 피해자 소속 연맹에 대한 음해와 부당한 공격이 가해질 것이며 악의적인 언론보도로 피해자도 힘들어질 것이라는 말로 피해생존자의 고소입장을 바꾸기 위해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사건의 제대로 된 해결보다는 피해생존자의 침묵과 희생을 요구하던 조직은 4년 째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사과는 커녕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가면서 가해자들의 징계를 감경시킨 정진후 당시 전교조 위원장은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후보가 되었고, 이제는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정OO가 한 발언은 여성주의적 문제제기가 상대 진영에게 도덕적 타격의 빌미를 준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4월9일 집단린치를 했던 사람들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소위 ‘진보’와 ‘민주’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역시 성폭력의 문제를 가해자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로 여긴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이 있다는 것 자체를 숨겨야 할 것으로만 생각한다. 집단 전체의 도덕적 이미지를 갉아먹고 그것은 전체 ‘진영’에, 전체 공동체에 악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주의적 문제제기는 불편한 진실로 여겨지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묵살된다. 
 
이 때 진영논리가 등장한다.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는 상대 진영에게 비난의 근거를 준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꼼수로 왜곡된다. 피해자의 문제제기는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어떤 꼼수와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닌지 의심을 받는다. 결국 공동체의 성원들이 피해자의 행동을 ‘우리 집단, 조직’을 해치려는 과도한 행동으로 여기게 된다. 여성주의적 문제제기를 도덕주의적으로, 집단의 이미지 유지를 위한 수단적인 것으로 접근하는 한 성폭력/성희롱 문제는 진영논리에 의해 왜곡되고 피해자의 문제제기는 묵살되는 악순환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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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성균관의 시끄러운 나날들-3월, 성균관대학의 학생자치활동 탄압

  • 분류
    교육
  • 등록일
    2012/04/20 12:24
  • 수정일
    2012/04/20 12:2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기고글의 입장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균관대의 봄은 시끄럽게 찾아왔다. 우선 개강하자마자 성대신문이 나오지 않았다. 성대신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성대신문의 결호를 알리는 대자보가 붙어있을 뿐이었다. 성대신문 기자들은 신문의 제목이 없는 무제로 호외호를 배포했다. 호외호에는 신문이 나오지 못했던 이유였던 류승완 박사 폭행 논란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3월 중순, 중앙운영위원회(이하 ‘중운위’) 명의로 캠퍼스 출입금지 및 불법게시물 철거 공고가 붙었다. 중운위는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학내의 선거운동을 금지하겠으며 학내에 붙는 대자보들에 대해 사실관계를 따져서 여론 조장 및 선동의 위험이 있는 대자보들은 철거하겠다고 했다. 이 공고는 곧 논란에 휩싸였고 이 공고에 반박하는 대자보들이 학교에 붙었다.

3월21일, 몇몇 학생들은 기만적인 2% 등록금 인하, 기숙사 식권강매, 언론탄압과 대자보검열에 반대하는 Occupy성균관대를 하기 위해 도서관 앞을 점령했다. 그러나 학교와 총학생회의 반대로 텐트는 치지 못하였고 이마저도 비 오는 날 교직원과 용역의 손에 철거되고 말았다. Occupy성균관대에 참가한 학생들에 대한 징계와 동아리 제명위협이 있었다. 인문계 캠퍼스에서 진행된 토크콘서트에 대해서는 허가받지 않은 행사라며 대표 학생에게 징계가 떨어졌다.

3월 한 달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성균관대의 시끄러웠던 2012년 3월을 되돌아보면서 성균관대의 학생자치의 현실을 짚어보고자 한다. 과연 학내 민주주의는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학생들은 학교의 주인일까?

 

 

1) 학교의 류승완 박사에 대한 강의 박탈과 1인 시위

 

지난해 8월11일, 성균관대에서 강의하던 류승완 박사는 2학기 강의를 박탈당한 것에 항의하여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류승완 박사는 23년간 성균관대에 있으면서 박사학위를 땄고 '동양사상입문' 강의를 맡아서 강의를 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1월22일, 대학본부는 동양철학과가 류승완 박사에게 이미 요청해 놓은 강의를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렸다. 류승완 박사가 강의 박탈 이유를 소명할 것을 공문으로 요구했지만 대학본부는 이 조차도 거부했다. 류승완 박사는 한국과 중국의 사회주의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으며 학계의 친일유학인 황도유학을 비판해왔다. 또한 재단과 학교의 비리와 비민주적인 행태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이번 일은 대학과 재단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온 사람을 대학본부에서 개입해 강의를 하지 못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는 생존권을 박탈하는 동시에 그 사람과 대학 내의 학문과 비판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기도 하다.

흔히들 대학이 학문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에서 시간강사들은 열악한 처우와 불안정한 일자리에 놓여있고 대학은 이사장과 재단의 손에 독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 대학이 마땅히 갖추어야 한다는 학문과 비판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이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학문의 자유는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 류승완 박사는 강의박탈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200일 넘게 지속하고 있지만 대학본부는 이 사건 자체를 은폐하려 하고 있다.

 

 

2) 성대신문 파업

 

 

 

류승완 박사의 사건을 보도하려고 하는 학생 자치언론과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학교 당국은 충돌하게 되고 결국 성대신문 결호 사태로 치닫게 된다.

 

기자들과 주간교수의 갈등은 3월3일 류승완 박사 폭행 관련 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2월25일 졸업식 때 류승완 박사는 1인 시위를 하다가 이를 막으려는 교직원에게 폭행을 당했다. 성대신문 기자들은 이 사건을 취재하고 1인 시위 사진과 함께 기사로 다루려고 했지만 주간교수는 이 사건을 지금 신문에 실기는 부적절하다며 기사를 광고로 대체하고 기사 게재를 한 달 뒤로 미루라고 했다. 기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주간교수와의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자 주간교수는 3월5일 발간 예정이었던 성대신문 1520호에 대해 결호선언을 했다. 성대신문 기자들은 주간교수 해임을 요구하며 신문 발행을 중단했다.

성대신문 기자들은 학내 성대신문 가판마다 성대신문 결호 상황을 알리는 대자보를 붙이고 기자들의 사비를 모아서 신문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호외호를 발간했다. 호외호에는 성대신문 결호 상황에 대한 전말과 논란이 되었던 류승완 박사 폭행사건에 대한 기사, 그리고 성균관대 당국의 편집권 침해를 비판하고 성대신문을 지지하는 여러 학보사들의 논평들이 실려 있었다.

성대신문의 호외호를 통해서 학교가 이 사건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입맛에 맞지 않는 수많은 기사들을 광고로 대체하거나 수정하라고 지시해왔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동안 △반값등록금 기사 △비정규교수노조 분회장 인터뷰 △류승완 박사 강의 배정 문제 관련 기사 △대학원 총학 선거 관련 독자투고와 같은 기사들에 대해서도 주간교수는 기자단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대면서 기사를 자르거나 광고로 대체해왔다.

이사진과 재단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대학은 대학 내 구성원들의 비판적인 목소리와 움직임들을 통제하고 차단하려 한다. 대학의 언론통제는 학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학교는 청소, 경비 노동자를 시켜서 학내에 붙는 대자보에 대해 대대적으로 감시하고 있으며 비판적인 대자보는 떼어내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3) 유학대 학생회장 징계

 

 

출처 : 한국대학신문

학교는 류승완 박사에 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성대신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류박사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만 학교는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학대가 600주년 기념관 앞에서 류승완 박사를 초청해서 토크콘서트를 진행했다. 학교당국은 이 행사를 주도한 유학대 학생회장에게 학칙을 근거로 보복성 징계를 내리려고 하고 있고 유학대 학생회장과 해당 학생회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유학대 학생회장과 유학대 학생회는 사과문을 쓰지 않을 방침이며 징계를 내릴 시 집단행동에 나서겠다고 하고 있다.

 

학교가 이번 징계의 근거로 삼고 있는 학칙은 57조와 58조이다. 학칙 57조에 따르면 학생단체 또는 학생이 학내에서 행사를 하려고 하면 사전에 해당 기관장의 승인을 얻어야 하며, 학칙 58조에 따르면 학생은 수업, 연구 등 학교의 기본 기능 수행을 방해하는 개인 또는 단체의 행위와 교육목적에 위배되는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리고 학교에서 펴낸 요람에 따르면 정치적인 동아리는 허용될 수 없으며 대자보 붙이는 것, 간행물 붙이는 것, 학내에서 확성기를 사용하는 것, 집회를 하는 것 모두 학교의 허가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학생인권조례에서도 허용이 되는 학생들의 정치적 발언과 집회의 자유가 대학에서는 학칙에 의해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탄압하는 것은 학칙을 통해 정당화되고 있다. 대학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곳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학칙을 통한 정치활동 탄압의 근거가 되고 있다.

물론 많은 학생들이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 한 비민주적인 학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학칙을 통해 학내 정치활동이 탄압받는 지금 시점에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다른 대학들도 성균관대와 비슷하게 정치활동들과 집회 및 표현의 자유에 제약을 거는 학칙들이 있고 여러 학교에서도 이런 학칙을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탄압하는데 이용했다. 이미 숙명여대, 이화여대, 중앙대를 포함한 서울 내 7개 대학에서는 구시대적인 학칙을 개정하자는 학칙개정운동도 있었다.

 

 

4) 중앙운영위원회의 캠퍼스출입제한 및 불법게시물 철거 공고

 

① 학생들의 대자보를 검열하겠다는 총학생회

 

 

총학생회가 붙인 공고문

성균관대는 대학당국만 언론탄압을 하는 것이 아니다. 총학생회와 중운위도 학생들의 대자보를 검열하겠다고 하고 있다. 3월14일, 성균관대에 중운위 명의로 '캠퍼스 출입제한 및 불법게시물 철거 공고'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이 대자보에는 정당관계자의 학내 출입을 제한한다는 내용과 대자보를 총학생회가 검열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에 대해 총학생회의 해명을 들어보고자 총학생회장을 찾았다.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인 대자보 검열에 대해서 총학생회장은 ‘학우들의 의견을 담은 대자보를 마구잡이로 검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논란이 되는 대자보를 우선 회수하고 정확한 사실자료에 근거하여 사실관계를 판단해서 게재, 폐기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에 맞지 않는 대자보의 예로 등록금 2% 인하가 부당하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들었다. 총학생회장은 감사원이 제시한 전국대학이 평균적으로 15%의 등록금 인하가 가능하다는 자료를 근거로 성균관대 등록금 2% 인하는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관계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감사원의 자료는 전국 대학의 평균을 낸 것이며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학의 상황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총학생회의 대자보 검열은 경향신문이 이야기한 것처럼 유신시대 긴급조치 9호를 연상하게 한다. 총학생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사실관계'라는 것이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이명박의 BBK사건의 내막이 누가 보아도 의혹이 짙고 그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지만 권력자들은 해명은 커녕 그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오히려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을 구속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신문마다 사실을 다룬다고 하지만 중점에 두는 사실이 다른 것이고 그에 따라 논조도 달라진다. '사실관계'란 명확하기보다는 항상 논란 속에 있었다. 이런 '사실관계'를 따져서 대자보를 검열하겠다는 것은 학우들의 자유로운 의견표출을 위축시키고 검열하겠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총학생회는 대자보에 의한 여론조장 및 선동에 대해 우려한다고 말했다. 자기들을 뽑아준 학생 대중에 대해 그들이 선동될까 염려한다는 것은 학생들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론 선동과 불법게시물 여부를 총학생회가 판단하고 그에 따라 학우들의 알 권리를 차단하겠다는 것은 총학생회의 오만과 독선이다.

만약 거짓사실이 퍼지고 학우들이 이에 설득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이는 학우들의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형식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반박대자보를 붙이는 형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총학생회가 하려고 하는 대자보 검열은 총학생회의 권한 밖이며 누구도 그들에게 그런 권한을 준 적이 없다. 총학생회와 중앙운영위원회는 사실관계를 엄격하게 따진다며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②당원은 대학에 들어올 수 없나? - 황당한 정당관계자 출입 제한

 

총학생회와 중운위가 공고한 대자보에 게시된 내용 중 또 다른 이야기는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당관계자가 학내에 출입하고 선거활동을 벌이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대자보 검열 내용이 큰 논란이 되었기 때문에 학내에 총선과 대선의 선거운동을 막겠다는 부분은 비교적 이슈화가 덜 되었다. 총학생회장은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될 수 있으며 청소노동자들도 선거운동 때문에 부담 받을 수 있고 또 무엇보다 대학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며 학우들이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성균관대 학생들은 학생이기 이전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유권자이기도 하다. 선거운동을 통해 후보에 대해 알고 선거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유권자의 권리다. 이런 권리를 중앙운영위원회에서 학내에서 선거운동 금지로 아예 차단시켜 버릴 수는 없다. 민주주의라는 것 그리고 선거라는 것이 여러 불편들을 감수하고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실시하는 것이다. 오히려 총학생회는 수업권과 청소노동자들의 불편을 핑계 삼아 기본적 권리인 유권자의 알 권리와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더 중요하게 반박할 지점은 바로 대학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총학생회장은 학생회와 중앙동아리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면서 성균관대학교 요람에도 특정 정당의 당원은 중앙동아리원이 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학교의 요람 자체가 문제투성이다. 요람을 찾아보면 더 가관인 조항들이 눈에 띈다. 학생자치단체, 체육, 종교, 그 외 순수한 목적의 학술, 예술, 취미 활동 부서 단체들을 빼고는 동아리로 인정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과연 정치적 중립이 무엇이기에 학생들의 정치활동과 표현, 결사의 자유를 막는 이유로 제시되는 것인가.

총학생회장이 말한 정치적 중립이란 정치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중립은 학생들의 정치활동과 표현,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감옥처럼 작용하고 있다. 엄밀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정치라고 할 수 있으며 정치가 아닌 것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생의 문제라고 일컬어지는 등록금, 기숙사비, 그리고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의견을 모아내는 활동들도 당연히 다 정치이다. ‘대학교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는 총학생회와 대학본부의 논리는 등록금이 비싸도, 식권 강매 60매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도, 청년실업을 양산하는 사회구조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 복종할 자유만 주어져 있다는 말이랑 다르지 않다. 또한 정치에 무관심하고 수업에만 충실한 것, 즉 우리가 정치적 중립이라고 생각한 것조차도 기존 질서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다른 내용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5) Occupy 성대 텐트 철거

 

①학교의 허락을 받지 않아 점령할 수 없다? - 학교 감시․감독 하의 캠퍼스

 

 

Occupy 성균관대 점령지의 모습

Occupy성균관대가 학교 안의 한 뼘도 안 되는 공간에 기만적인 등록금 2%인하, 그리고 기숙사 식권강매 문제를 걸고 텐트를 치겠다고 했을 때 참가자들은 학교의 침탈 뿐 아니라 총학생회의 압박도 이겨내야 했다. 총학생회는 ‘강의실을 빌릴 때도 학교의 허락을 받는데 왜 학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이 공간을 무단으로 점령하냐’라며 점령자들을 압박했다. 학생들에게 조차 학교 공간이 학생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학교의 허락을 받아야 쓸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의실, 족구장, 소강당을 포함한 학내 공간들이 점점 더 학생들의 것이라기보다는 학교의 통제 아래에 있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의 허락을 받아야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미 강의실이나 행사장소를 빌려줄 때 학교가 행사 내용에 대해 검열하고 학교의 입맛에 맞지 않는 행사이면 장소를 대여해 주지 않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2012년 4월4일, 생활도서관에서 류승완 박사를 초청해서 대학의 시간강사 문제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려고 하자 학교는 이미 빌려주었던 강의실마저 당일 날 취소하고 모든 행정실에 그 시간의 강의실 대여를 불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생활도서관은 자연과학부, 생명공학부, 공대 행정실을 모두 찾아갔지만 행정실들은 갖은 이유를 대면서 대여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학생들의 자치 공간이 줄어들고 학교의 공간들이 학교의 관리 대상이 된 역사는 학생들의 공동체와 정치적 힘이 약해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자연과학캠퍼스의 과학도서관 뒤의 ‘민주십자로’였던 넓은 공간이 2009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금의 삼성학술정보관이 생기면서 성균관대 이공계 캠퍼스 학생들에게 '광장'이라는 공간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학생들의 '광장' 그리고 학생 자치라는 개념이 점점 생소해지는 오늘날, 학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친 텐트가 어색한 것도, 학교의 허가를 받아야 빌릴 수 있는 강의실이 익숙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②농성장 철거, 징계와 동아리 제명 협박

 

3월23일, 학교는 비가 오는 가운데 Occupy성균관대 농성장 철거를 강행했다. 농성을 하는 텐트는 경찰도 법원의 철거계고장이 나오지 않는 이상 철거할 수 없다. 물론 법원이 텐트에 대해 철거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부당한 경우가 많지만 학교는 법에 보장된 최소한의 절차마저 지키지 않고 비 오는 날 교직원들과 용역을 동원해서 학생들이 농성하고 있는 농성장을 물리력을 사용하여 철거해버렸다. 점령자들과 이를 지켜보았던 학생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고 학교 내에서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깡패와 같은 행동이었다. 학생들의 권익을 대변한다는 총학생회장은 이 때 자리를 비우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점령자들은 침탈에 굴하지 않고 3월27일 다시 농성장을 쳤다. 그러자 학교당국은 정해진 기한까지 농성장을 철거하지 않으면 학칙에 의거해 관련자들을 징계하겠고 관련 동아리를 영구 제명시키겠다고 협박했다. 학교는 이미 관련자들의 신상정보를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채증과 사찰을 통해 학교가 학생들의 신상정보를 캐낸 것도 학생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한 것이며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번 징계협박에서 드러난 것처럼 학교당국은 학칙을 근거로 헌법에 보장된 학생들의 집회, 결사의 자유마저 억압하려고 들고 있다. 학교가 원하지 않는 이야기와 활동을 하는 학생들에게 시대착오적인 교칙을 들이대면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③청소, 경비노동자를 시켜 대자보를 떼다

 

Occupy성균관대를 하면서 점령자들은 활발하게 Occupy성균관대 그 자체와 내걸고 있는 사안, 그리고 학교의 강압적인 철거에 대해 알리는 노력을 해왔다. 수많은 대자보를 출력해서 학내 게시판에 부착했으나 어느새 대자보들은 사라지기 일쑤였다. 알고 보니 청소, 경비노동자들에게 학교 비판적인 대자보는 바로 신고하고 떼어내라는 지침이 내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비노동자들에게는 무전기를 통해서 학교가 불법이라고 지정한 게시물을 떼어내라는 지시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분노한 한 학생은 ‘죄 없는 경비 아저씨를 괴롭히지 말고 대자보를 떼지 말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는 계속해서 몰래 대자보를 감시하고 떼어내고 있다. 학교당국은 Occupy 성대와 관련된 사안이 학내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대자보부터 훼손하기 시작했으며 학내의 정치활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시끄러웠던 3월, 한 가닥 희망을 가지며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학내 청소노동자들은 노동 3권도 요구하지 못하고 있고 비정규직 강사는 불안정한 지위에 학자로서 학문의 자유를 누리기는커녕 생존권조차 위태롭다. 학생들은 비싼 등록금에, 불합리한 식권 강매에 경제적으로 극심한 부담을 느끼고 있지만 학내에서 이에 대해 공론화하고 정치활동을 할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른 갈등도 계속되고 있다. 성균관대에서는 부당한 강의박탈에 항의하는 류승완 박사의 1인 시위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대신문은 계속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앙운영위원회는 여러 학생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대자보를 검열하겠다는 공고를 철회하지 않고 있으며 유학대 학생회장에게는 징계가 내려질 예정이다.

조용하기만 했던 학내에서 학교당국과 총학생회의 비민주적인 행태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와 투쟁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에 따라 학교는 이 목소리들을 아예 차단하고 투쟁을 탄압하기에 바쁘다. 시끄러웠던 3월의 사건들은 대학의 현실이 어떻고 학교는 어떤 곳인지에 대해 제대로 보여주었다. 조용히 다닐 때는 알지 못했던 학교의 본 모습들이 여러 사건들을 통해 속속들이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야만적인 사회에서 대학도 한 발짝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여실히 깨닫는 3월이었다.

그래도 2012년도 3월이 시끄러웠다는 점에 희망을 갖는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문제들은 곪아서 터져 나오고 있고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목소리들은 공감을 얻고 있다. 성균관대의 학생자치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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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Occupy 성균관대에 대한 학교당국과 총학생회장의 탄압

  • 분류
    교육
  • 등록일
    2012/04/20 12:21
  • 수정일
    2012/04/20 12:26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기고글의 입장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3월21일 오전 10시30분, 율전 성균관대 대학생사람연대 회원들은 △기만적인 등록금 2% 인하 반대, △기숙사 식권강매 60매 폐지, △학내 언론 탄압과 대자보 검열 반대를 요구하며 학생회관 앞에서 ‘Occupy성균관대’ 선포식을 가졌다. 그리고 뒤이어 학생회관과 삼성학술정보관 사이의 공간에 텐트를 치고 점령하려고 했으나 교직원과 총학생회의 저지로 텐트를 치지는 못했다. 결국 돗자리만 펴놓고 ‘Occupy성균관대’ 이름으로 노숙에 돌입하게 되었다. 첫날밤에 4명 가량 되는 학생들이 말 그대로 노숙하였지만 밤 사이의 빗방울과 경비업체의 채증으로 제대로 잠이 들지는 못하였다. 둘째 날이 되자 총학생회장이 핫팩과 음료수를 들고 농성을 그만할 것을 종용하며 찾아왔다.

총학생회장은 ‘Occupy성균관대’를 신고도 하지 않은 외부단체의 정치활동으로 규정지었다. 그리고 ‘등록금과 식권강매와 같은 학내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싶다면 학생회를 통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 먼저라고 하면서 이렇게 다짜고짜 거리에 나앉는 것은 학생들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주며 행동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행동’이라고 했다. 점령자들은 총학생회장에게 ‘대학이 홀로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는 고고한 탑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대학은 사회와 교류하면서 발전한다고 하면서 내부와 외부 활동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학우들의 반감 그 자체로 ‘Occupy성균관대’는 이 활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총학생회장과의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틀째 밤은 비가 예고되어서 당장 방수 대책이 시급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텐트와 천막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사용할 시 당장 철거하겠다고 했다. 결국 비닐과 몇몇 구조물을 사용해서 비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취재를 온 기자와 몇몇 학생들의 손에 의해 비닐과 있는 구조물로 비를 충분히 막을 천막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틀째 밤은 비가 오는 가운데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까지 비는 계속 내렸고 학교는 비닐로 비를 막은 것을 보고 비닐을 철거하라고 했다. 점령자들은 비닐을 철거하라는 학교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학교는 교직원들과 용역을 동원해서 비가 오는 가운데 점령지를 야만적으로 철거했다. 그리고 ‘Occupy성균관대와 관계한 학생들의 신상을 모두 알고 있으며 정해진 시점까지 철거하지 않을 시 징계하겠고 관련 동아리들을 영구 제명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점령자들은 비를 맞으면서 점령지를 철거했다. 철거하면서 우리에게 허용된 자유는 복종할 자유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철거했지만 점령자들은 학교의 위협에 Occupy 자체를 접을 생각은 없었다. 주말에 준비를 거쳐서 3월27일에 다시 삼성학술정보관 앞을 점령했다. 관련자 징계를 걱정해서 이번에는 박유호 점령자 홀로 노숙을 강행했다. 식권 60매 강매에 반대하는 ‘과수원(과일 음료수 이름) 탑 쌓기’를 중점으로 Occupy운동을 진행했다. (성균관대 기숙사에서는 잉여식권 두 장에 과수원 음료 3개를 교환해주고 잉여식권 다섯 장을 라면과 떡볶이 한 그릇으로 교환해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또한 학교의 철거와 징계위협에 대해 상세히 알리는 대자보도 부착했다. 학교가 청소, 경비노동자를 시켜서 대자보를 계속 떼어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대자보를 매일 아침 계속 붙이며 사안을 알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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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정당한 노조활동 폭력으로 가로막는 현대자동차 규탄한다!

정당한 노조활동 폭력으로 가로막는 현대자동차 규탄한다!

 

 

4월4일 드디어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가 새로운 임원을 선출했다. 박현제 지회장과 강성용 수석부지회장, 천의봉 사무장은 현장과의 소통을 최우선 과제로 뽑고 공장에서 생활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9일 희망찬 첫 출투 후 지회 사무실로 출입하기 위해 본관 정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사측 경비대와 관리자들에 의해 출입이 막혔다.

 

현대자동차 사측은 고용노동부울산지청이 해고 조합원들의 노조 사무실 출입을 허용하라는 행정지도 공문에도 불구하고 지부 상집과 함께 출입하는 것조차 가로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3일 폭행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박현제 지회장 등 조합원들이 공장 문을 들어가는 과정에서 물리적 저지가 있었고 이 때 넘어진 박 지회장을 경비들이 밟는 등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현재 노조는 노조활동 자유 쟁취를 위해 정문 앞에서 일주일째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사측은 무엇이 두려워 행정지도도 무시하며 지회 지도부의 공장 내 출입을 막는가. 이유는 단 하나, 최병승 동지의 대법 승소 판결 이후 꿈틀대는 현장의 분위기를 통제하기 위해 이들을 조직할 비정규직지회 지도부들의 출입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는 것이다. 최병승 동지의 대법 판결을 일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법적 위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공정의 외주화와 2년 미만자들에 대한 해고를 내부 반발 없이 진행시키기 위해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현대자동차지부는 노보를 통해 이러한 사태를 사측의 책임으로 규탄할 뿐 적극적으로 물리력을 동원해 사측의 행태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있다. 10일에 예정되었던 원하청연대회의도 비정규직지회 지도부의 출입이 어렵다는 이유로 연기하는 등 투쟁을 시작도 하기 전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정규직지회 지도부가 선출되고 나서 처음으로 사측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정규직지부는 원하청공동투쟁을 통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하려고 한다면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비정규직지회 지도부의 공장 내 진입 투쟁에 적극 결합해야 한다.

 

 

정당한 노조활동 탄압 즉각 중단하라!

비정규직지회 지도부를 공장 내로 진입시키자!

 

 

2012년 4월 16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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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롱뷰의 승리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행동이 필요하다 - 기포드 하트먼

 

[편집자주]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Occupy 운동이 한 순환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뉴욕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으로부터 시작된 Occupy 운동은 미국과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1월2일에는 미국 오클랜드 도시 총파업으로 번져나가 새로운 국면을 맞는 듯했다. 그러나 오클랜드 투쟁 이후 Occupy 운동은 차츰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사노신은 지난 1월 Occupy 운동이 미국 서해안의 항만노동자들에게 전파되고 있으며 워싱턴 주 롱뷰에서 벌어질 하역작업 중단 투쟁이 이 투쟁의 중요한 계기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란자 노트>의 유인물을 번역해서 게재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 내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12월 이후 벌어진 항구 봉쇄 투쟁들이 몇몇 정치단체들이 장악한 Occupy 운동에 의한 대리주의적인 행동이었으며 <반란자 노트> 등의 주장은 과장된 평가라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12월12일 항구 봉쇄 투쟁은 실패했던 것으로 보이며 Occupy 운동이 조직노동자운동으로 전파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이글을 쓴 하트만은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이쯤 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활동가로 알려져 있다. 사노신은 이 기사의 정치적 내용에 동의하진 않지만 롱뷰 투쟁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관계들과 Occupy 운동그룹의 상황을 잘 알려주는 기사라고 판단하여 번역 게재한다. 사노신은 Occupy 운동의 전개양상이 이후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이 투쟁에 직접 참가한 좌익 계열의 활동가들의 평가서들을 계속 번역할 계획이다. 이 글의 제목과 소제목 및 각주는 편집자가 임의로 붙인 것임을 밝힌다.

 

<반란자 노트>가 롱뷰 투쟁에 관련해서 낸 유인물을 읽고 이런 문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인류의 역사적 위기는 혁명적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 4인터내셔널의 임무, 레온 트로츠키 [1938])

 

이유는 간단하다. 오클랜드의 한 전위집단이 워싱턴 주 롱뷰 EGT 곡물 부두의 하역작업을 중지시키려는 투쟁 계획1)을 완벽하게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반란자 노트>가 지도적 역할을 하려고 애쓰고 있는 뉴욕 시와 시애틀에 있는 그들의 인민전선 동맹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시애틀 소동의 본질

 

△ 1월6일 집회 도중 난동을 부리는 국제항만노조 간부들 (출처 : The Internationalist Newspaper)

시애틀에도 <국제주의자 토론 네트워크 (Internationalists Discussion Network)>2)에 참여하는 동지들이 몇 명 있다. 그래서 여러 동지들의 견해를 들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요즘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않고 있는 <국제주의자 토론 네트워크>의 한 동지가 포틀랜드에 살고 있다. 그는 지난주 롱뷰에 있었다. 이 동지는 시내의 모든 술집에 부두노동자들을 지지하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고 했다.
그는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부두노동자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슬프게도 그런 목소리들은 묻히고 있다. 우리가 듣는 소식이라고는 다른 곳의 레닌주의 동맹자들과 함께 반동적인 백인 노조관료들이나 파업회피주의적인 관료주의3)가 오클랜드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이 너무나 해악적이 되었기 때문에 시애틀의 제19지부 소속 평조합원들은 Occupy 시애틀 사람들에게 항구에서 떠나달라고 요청하기 이르렀다. 처음에는 나도 이것이 국제항만노조(ILWU)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발생한 노조 내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월6일4)에 벌어진 소동 당시 국제항만노조 회의장에 있었던 제19지부의 한 동지에게 생각을 물어보았다. 이 동지는 국제산업노동자동맹5)의 전통(Wobbly tradition)을 계승하며 종종 제 2의 간부진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현장조직(a caucus of rank-and-filer)에 속해 있었다.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노동계급의 자기행동을 옹호하고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투사임이 틀림없는 동지였다. 다음은 그날 일어난 혼란에 대한 그 동지의 생각이다.
<흑란단(黑蘭團)>6)(무정부의주의적 공산주의자로 자칭하는 무정부주의적 레닌주의자들), 혁명적 공산당(RCP)7)이 지배하고 있는 민중조직위원회(POC, People's Organizing Committee) 그룹, 그렉 루이스 선생(Sensei Greg Lewis) 주변의 핵심그룹(모택동주의 경향을 가진 레닌주의자들), 문 닫은 옛날 자율주의 공간(Autonomia space) 주위의 사람들(인셔렉셔니스트 아니키스트8), Pugetsoundanarchists.org를 보라) 같은 세력들이 Occupy 시애틀을 장악했다. 그들은 FRSP9)나 그 만큼은 아니더라도 ISO(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10) 등과 마찬가지로 Occupy 운동을 통째로 국제항만노조에게 갖다 바치려고 애쓰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이 모든 것을 오클랜드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1월6일의 ‘집회’에서 나타난 적대감의 원인이었다. 제19지부 소속 평조합원들은 지난 주 Occupy 운동과 모든 연계를 단절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 결의는 Occupy 사람들과 대화하고 설득하려고 수도 없이 시도해 본 뒤에 나온 것이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은 1910년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미국 최초의 산업별 노동조합 연합체이다. 영문 약칭은 IWW이며 흔히 워블리스(Wobblies)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05년 미국 시카고에서 D. 드 레온(Daniel De Leon)과 윌리엄 헤이우드(William Haywood) 등이 주도해 만들어졌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결성은 당시 주도적인 노동단체인 미국노동총연맹(AFL)의 보수성에 불만을 품은 데 따른 것이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는 전 노동자를 산업별로 조직화하고 자본주의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서부의 일용 노동자, 가출 노동자 등 미숙련 노동자를 중심으로 격렬한 스트라이크와 사보타지를 지도하였다. 이 같은 투쟁 방식으로 점차 세를 넓혀 전성기인 1912년에는 조합원 수가 10만 명을 넘었다. 헬렌 켈러가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 단체를 더욱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분열과 정부의 탄압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은 급속히 쇠퇴했다.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반전운동을 편 것은 특히 정부의 거센 탄압을 불러왔다. 윌리엄 헤이우드 등 많은 지도자가 처형을 당했고 한편으로 강경파가 공산당으로 이적하는 등 조직 분열이 가속화하면서 그 세력이 급격히 퇴조했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내세운 혁명적 조합주의(생디칼리즘)는 의회주의를 부정하고 노동조합을 혁명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으로 스트라이크(동맹파업) 등의 직접행동으로 혁명을 달성하고 자본주의 타도가 성취된다고 주장했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미숙련 노동자나 흑인 노동자의 조직화를 시도하고 산업별 조합주의를 도입한 것 등은 미국 노동조합운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조합원들의 중복가입을 인정하고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작업장 민주주의의 모델인 워블리 샵(Wobbly Shop)을 제시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 때 조합원이 2천여 명까지 줄어들어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으나 최근 다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조합원 수가 증가하고 있다. 현재는 Occupy이 운동과 메이데이 총파업 선전 활동과 조직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12월12일 투쟁은 과연 승리인가

내가 1월10일에 올린 글에서 지적한 대로 IBU(국제항만노조 해양분과(maritime division)) 조합원 사만다 레벤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예정된 항구에서의 행동(12월12일)을 위한 조직화가 어떻게 해서 실패했는지에 대해서 내가 실망한 점은 봉쇄가 대중총회에 안건으로 제안되기 전에 국제항만노조 내부에서 동맹자들 사이에 수행된 활동이나 조직화 작업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연대행동을 조직하는 활동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녔지만 그럼에도 노조에게서 집회에 오라는 말이나 다른 연락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또 국제항만노조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연대하고 있는 다른 좌파와 급진파들이 항구 봉쇄 제안이 처음 기획될 때 아무 얘기를 듣지 못하거나 계획을 준비하는 회의에도 참가제안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그래서 일반 부두노동자들 사이에서 아무런 집단적 과정도 거치지 않고 이들 전위주의자들은 그냥 도로에서 쇼를 벌인 다음 북서태평양 연안 전체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말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다른 보고들에 따르면 오클랜드 사람들이 “스타”처럼 우쭐대며 “오클랜드 항구 봉쇄” 투쟁의 무용담을 떠벌였다 한다. 골드너가 쓴 유인물에 나오는 “오클랜드와 포틀랜드 그리고 시애틀에서 국제항만노조 평조합원들이 점령운동의 피켓라인을 지키고 12월12일의 서부해안 항구 봉쇄투쟁을 위한 행동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었다”11)는 문구는 거짓말이다.
대다수 국제항만노조의 일반 조합원들은 아예 나오지 않았고, 12월12일 오클랜드의 2터미널(<한진>과 )에 있던 사람들도 노사중재자(arbitrators)12)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중재관들은 결국 “건강과 안전상의 이유”로 하루일당의 반을 지급하고 조합원들을 오전 중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조합원들은 노사중재자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몸으로 보여주는” 행위는 전혀 없었다. 전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항구 경영진은 오후와 오전 3시에 있는 다음 날 조간근무 교대를 취소했다. 즉, 노동자들은 일하러 나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고, 이는 무급이었다. 항구는 사실상 폐쇄되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기꺼이 인정하겠다. 하지만 나는 노사중재자들이 터미널 두 개를 폐쇄한 포틀랜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애틀은 달랐다. 항구로 가는 길목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시위자들이 터미널 하나를 막았고 다시 “지역시민으로 이루어진 시위자들(community pickets)”이 교대 근무하러 나온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경영진은 임금지급을 거부함으로써 부두노동자들을 징계했다. 우리는 이미 전에도 이런 일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 중 어떤 것도 해당 항구에서 일하는 부두·해양·운송노동자들이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모두 외부에서 시작된 행동이었다.
우리는 이미 이 행위의 성격에 대해 토론했고 나는 그것을 진정한 파업을 위한 시동행위로 생각하는 일부 젊은 공산주의 투사들(communization militants)의 생각에 동의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적어도 오클랜드에서는) 트럭운전사들(troqueros)이 대부분 항구에 나오지 않음으로써 수동적으로 파업행위를 했다.

 

△ 지난해 12월12일 시위대에 의해 봉쇄된 오클랜드 항구

 

항만노동자 투쟁의 성격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지적하는 게 필요하리라. 이 투쟁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생존권 악화(austerity)에 맞선 투쟁이었고 실제로는 1934년 해양분과가 파업으로 쟁취한 성과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해안전체에서 벌어진 이 파업투쟁은 항만노동자들에서 시작되어 즉시 해안에서 일하는 선원들로 파급되었고 83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두 사람이 살해된 7월5일의 “피의 목요일”에 전미트럭운전자노조 노동자들(teamster)은 1901년 자기들이 해안지역에서 파업투쟁을 했을 당시 부두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을 해준 것에 대한 보답에 나서 다른 부문 노동자들 중 처음으로 4일간 총파업에 동참했다. 이는 1886년, 1893년, 1916년 부두에서 일하는 모든 분야의 노동자들을 거의 총파업에 가까운 수준으로 단결시켰던 연대파업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1934년의 총파업으로 쟁취해서 연방중재관(federal moderator)이 승인한 요구들은 ⑴ 클로즈드숍 ⑵ 해안 전 지역의 일괄 계약 ⑶ 노조에 의한 고용알선이었다. 이 요구조건들은 1934년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샌 페드로(LA), 포틀랜드, 시애들 등 서해안의 모든 주요 항구에 적용되었다. 부두노동자들은 1937년 동해안에 주로 기반 한 부패한 국제항만노동자협회(ILA, 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를 버리고 국제항만노조를 건설하여 결국 서해안의 크고 작은 (현재 모두 29개에 이르는) 모든 항구를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경영진 측이 빨갱이라는 색깔 공세를 펼치며 협약을 파기하고 성과물들을 되돌리려고 하기 시작했을 때 부두노동자들은 신속하게 파업투쟁에 나서 자신들의 현장권력을 방어했다. 1934년과, 다시 한 번 큰 승리를 거두어 이전에 쟁취한 성과들을 확고하게 굳힌 1948년 사이에 부두노동자들은 도합 1399번이나 합법 또는 불법으로 조업을 중단했다. 이는 성과물을 얻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키기 위해 파업을 수행하는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의 전통이었다.
필라델피아를 거점으로 했던 세계산업노동자동맹 산하 해양운송노동자산별노조 제 8지부의 활동은 확실히 국제항만노조의 현재를 연상시킨다. 제 8지부는 1913년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부둣가에서 수행한 설탕파업(sugar strike)을 통해 생겨났으며 부두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한 이후 9년 동안 잇따라 파업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은 놀랄 만큼 다인종적인 노조로서 항구들을 지배했다. 제 8지부는 1934년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의 국제항만노조처럼 클로즈드숍이었고 노조가 고용을 알선했으며 파업투쟁으로 성과물을 방어했다. 노조의 운영도 독특하여 책임 있는 자리를 흑인과 백인이 번갈아 맡는 등 모든 회의나 모임에 흑백이 공평하게 섞여 있었다. 매년 피의 목요일을 기념하여 일을 하지 않는 국제항만노조의 전통처럼 제 8지부도 1913년 노조를 출범할 수 있게 한 그들의 첫 번째 승리를 기리기 위해 매년 5월16일 작업을 중단했다. 그들의 지배의 종말은 좌파의 볼셰비키화에 더해 세계산업노동자동맹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1922년 직장폐쇄에서 그들의 패배와 동시에 일어났다.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이 부족

EGT 투쟁은 국제항만노조에 동일한 일을 하려는 경영진의 시도이다. 국제항만노조는 이 노조가 적게 잡아도 지난 40년 동안 파업이라는 무기를 버리고 교섭을 통해 성과물을 보호하고 합법적으로 협약을 방어하는데 목을 매어왔기 때문에 훨씬 더 약화된 상태에 있다. 투쟁 없이는 1934년 이래 국제항만노조가 지켜온 세 가지 성과물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클로즈드숍과 노조의 고용알선은 다른 분야에서는 태프트-하틀리법13)에 의해 불법화되었지만 건축업에서 노조의 고용알선(그것은 대개 아주 눈물겹게 유지되고 있다)과 마찬가지로 국제항만노조에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노동과정에 대한 국제항만노조의 지속적인 통제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지역시민들의 시위”와 노사중재자들이 일반 부두노동자들 스스로의 행동을 대리할 수 없다. 그것을 가지고도 계급에 기반 한 전략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컬럼비아강수로안내인협회, 예인선 노동자들, 열차 기관사·승무원 조합, 롱뷰 근교의 트럭운전사들, 곡물의 산지인 워싱턴·몬태나·남북 다코타·미네소타 주의 농장노동자들과 곡물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접근하려는 노력은 전혀 이루어지 않았다. 곡물공급 연쇄를 이루고 있는 일본·한국·중국 등 아시아의 부두·선박 노동자들과 곡물을 가공·제분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려는 시도도 (일본의 작은 노조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을 빼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클랜드·시애틀·뉴욕에 있는 레닌주의자들 중 어느 누구도 진부하고 패배주의적인 행동주의 이상의 뭔가를 제안하지 못하고 있다. 듣자하니 ANSWER 뒤에 숨어 있는 스탈린주의자들의 그룹14)이 이 운동에 개입하여 조종하고 있다고 한다. 어디서 그런 소릴 들었냐고? 좋다. 뉴욕 시에 있는 또 다른 전위주의자들의 무리인데, 여기 그들의 광고가 있다. http://www.bailoutpeople.org/jan2012longview.shtml
국제항만노조가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투쟁은 노동계급의 일부가 이전에 획득한 성과를 지키려는 투쟁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투쟁을 다른 부분의 노동자들로 확대하려기 위한 계급적인 호소들은 전혀 없다. 참혹한 대우를 받는 트럭운전사들이 독립사업자로 잘못 분류되고 있으며 부두에서 일하는 국제항만노조 조합원의 반에 반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클랜드 지도부의 핵심은 스파르타쿠스 동맹(Spartacist League)15)에서 분리돼 나오거나16) 국제주의자신문(The Internationalist newspaper)17) 주위에 있는 그룹들로 판명된다. 이들에게 이 투쟁은 엄청나게 중대한 투쟁일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건 자신들이 활동하는 노조에서 평조합원들과 시간을 보내기보다 카메라 앞과 전위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에게 알랑거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자아도취에 빠진 몇몇 레닌주의자들의 허풍에 더 가깝다. 만일 ANSWER가 시애틀,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만안지역에서 온 코치들을 지원한다면 그들의 일종의 카메라에 찍힐 준비가 된 과시적인 정치의 일부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 것을 예상해야 하리라.

 

 

 

노동자들의 자기행동이 필요하다

슬프게도 롱뷰에서 노동자 계급의 자기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는 단지 1999년 시애틀에서 벌어진 WTO반대 운동의 축소판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당시 시애틀 거리에서 거둔 놀라운 성공에 대해 알렉산더 코번(Alexander Cockburn)18)이 지적한 대로 사람들은 단지 한 세대에 한 순간 불현듯 체제를 이해할 뿐이다. 그 한 순간이 나타났고 롱뷰 노동자들은 오로지 계급투쟁의 물결을 불러일으킴에서 의해서 승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투쟁은 국제항만노조와 정면으로 맞부딪쳐 계급적 연대를 이 노조 ― 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 의 외부에서 얻어야만 할 것이다. 범계급적 대리주의(Cross-class subsitutionism)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런 레닌주의적 환상을 흉내 내며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고 당신들이 전혀 모르는 대륙 반대편의 한 정파에 간섭하고 있는 골드너에 대해 부끄럽다고 말해야 하겠다. 당신들의 ― 그리고 <반란자노트>의 개입은 무용한 것보다 더 나쁘다. 그것은 자유주의자, 레닌주의자, 네오마르쿠제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전선 운동의 파산을 폭로한다. 그것은 그들의 전위주의적 지도력과 당신들이 새롭게 모집한 신참들의 정체성정치(identity politics)19)(그들이 “특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오클랜드와 달리 그들이 어떻게 기꺼이 “점령하라”라는 구호를 “탈식민지화하라”는 구호로 바꿔치기하고 있는지를 보라.)를 은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영감을 얻고 싶다면 더 나은 예들이 있다. 바로 지금 파나마 운하에서 파업이 벌어지고 있으며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도 항만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고 있다.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나이지리아의 총파업 역시 조만간 정리될 수도 있지만 다시 불붙을 수도 있다.20) 특히 나이지리아 총파업 파업참여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Occupy 나이지리아”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투쟁에서 계급적 이슈들은 롱뷰에 있는 항만노동자들과 동일하다. 우리는 그 투쟁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행성을 가로질러 일반화될 수 있을지 상상해야만 한다.

 

 

역주---------

1)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684 참조, 이 투쟁계획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2) 2001년에 만들어진 미국 내 국제주의·혁명적 경향의 활동가들의 토론 네트워크이다. 현재는 미국 뿐 아니라 유럽, 아시아 까지 포함하는 200여 명이 넘는 토론그룹으로 발전했고 이 네트워크의 기준(체제 변혁을 지향하고, 국제주의자여야 하며, 소련·중국·쿠바 등 가짜 공산주의에 명확히 반대하는 것 등)에 동의하고 신원이 확인되어야 가입이 가능하다.
3) 원문은 “the alternative strike solidarity bureaucracy”로 여기서 “파업 대체 (alternative strike)” 전략이란 단체교섭 등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파업이 아니라 여론이나 언론에 호소해서 성과를 내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4) 1월6일 국제항만노조 회의실에서 열린 점령운동 집회에서 국제항만노조 소속의 퇴직한 조합원 잭 헤이먼이 Occupy 운동에 의한 항구 봉쇄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는 도중 몇몇 국제항만노조 조합원들이 고성을 지르고 단상으로 뛰어가는 등 발언을 방해하는 행동을 한 사건을 가리킨다. <국제주의자신문>에 따르면 헤이먼이 시애틀, 롱뷰, 포틀랜드, 오클랜드의 항만노동자들이 12월12일 Occupy 운동이 만든 봉쇄라인을 존중했다고 말하는 순간, 국제항만노조의 몇몇 간부들(기사에서는 관료주의적 폭력배bureaucratic thugs로 표현)이 소리를 지르며 단상을 향해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5) 국제산업노동자동맹(IWW)에 대해서는 박스기사 참조
6) <흑란단 (Black Orchid Collective)>은 시애틀 등지를 중심으로 비교적 근래에 결성된 그룹으로 자본주의와 백인중심주의·가부장제·이성애중심주의·제국주의·장애인 차별·국가 등에 맞서, 직접 민주주의와 이윤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구를 위해 노동자들이 창조적으로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투쟁하며, 맑스주의를 통해 페미니즘·반식민주의·무정부주의·생태주의·반인종주의·동성애 해방의 가장 훌륭한 요소들을 결합시키고자 한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http://blackorchidcollective.wordpress.com 참조)
7) 혁명적 공산당(Revolutionary Communist Party)은 미국에서 1975년 설립된 모택동주의 조직이다.
8) 폭동의 역할을 강조하는 무정부주의 운동의 한 계열이다. (insurrectionist anarchists)
9)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정당 사회주의노동자당(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경향이 다름)의 시애틀지부를 중심으로 1966년 여성주의와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하며 그 당에서 분리해 설립된 자유사회주의당(Freedom Socialist Party)을 가리키는 듯하다.
10) 70년대 중반 국제사회주의자(International socialists) 계열의 북미 지역 활동가들이 분파로 조직한 그룹으로 2001년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주의경향(IST)에서 축출되었다. 정치는 IS와 대동소이하다.
11) <반란자 노트>의 유인물에서 잭 헤이먼의 발언을 인용한 부분이다.
12) 미국 노사관계에서는 노사협의가 잘 안 될 때 미국중재협회(American Arbitration Association)와 같은 제 3의 기관에서 파견된 중재자가 개입하여 결정하게 되어 있다. 13) 1947년에 제정된 미국의 노사관계법, 법의 제안자의 이름을 따서 태프트-하틀리법이라고 통칭되고 있다. 1930년대 이후 활성화된 노동운동을 탄압하기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제한하는 규정을 담았다. 주요 내용은 ① 노조의 부당노동행위 금지 규정 ② 클로즈드 숍 금지(유니온 숍만 인정) ③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쟁의에 대한 긴급조정제도의 도입 ④ 각 주에 대한 노동입법권의 부여 ⑤ 연방공무원과 정부기업 종업원의 파업 금지 ⑥ 노동조합 간부가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선서서의 제출의 의무화 등이다.
14) ANSWER를 주도하고 있는 세력 중의 하나로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그룹인 노동자세계당(Workers World Party)이 꼽히고 있다. 1958년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분리된 이 조직은 다른 사회주의조직들과 달리 60, 70년대 흑인운동과 동성애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진보성을 보였으나, 50년대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분리할 때부터 소련의 헝가리 침공, 밀로셰비치, 사담 후세인, 김정일, 중국의 천안문 진압을 지지하는 등 스탈린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어왔다. 최근에는 금융기관이 아니라 민중을 구제하자는 “Bail out the People movement”를 전개하고 있다. 15) 미국의 젊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중심으로 1960년대 만들어진 그룹으로 70년대 이후 다양하게 분열되었다.
16) <국제볼셰비키경향(IBT)>(http://www.bolshevik.org/)을 가리킴
17) 미국 스파르타쿠스 동맹에서 파생한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국제주의자 그룹(Internationalist Group)>이라는 조직이 발행하는 신문이다. 이 조직은 제 4인터내셔널의 부활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다. (http://www.internationalist.org/longshoreworkersshutusports1112.html)
18) 미국의 정치평론가(1941∼)
19) 개인의 주요한 관심과 협력 관계는 인종·민족·종교·성에 기초하여 만들어진다는 관점을 말한다. 필자는 이를 계급정치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20) 나이지리아 노동계는 정부의 유가인상 조치에 항의하여 1월9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했다. http://www.washingtonpost.com/world/americas/workers-go-on-strike-at-panama-canal-expansion-project-for-back-pay-safety/2012/01/17/gIQAj2uA6P_story.html

번역│이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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