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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FocuS]2차 희망버스, 개인과 조직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묻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8/16 16:15
  • 수정일
    2011/08/16 16:1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났다

 

6월11일 1차 희망버스에 참가한 약 700명의 사람들은 한진중공업 사측이 배치한 용역깡패에도 불구하고 공장 앞마당으로 들어가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고 돌아왔다. 1차 희망버스의 성공은 그동안 노동자 투쟁에 연대해왔던 각종 노동·사회단체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노동운동에는 익숙치 않으나 트위터 등 SNS를 통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투쟁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 역시 자극했다. 그 결과 7월9일에 진행된 2차 희망버스에서는 참가자가 1차보다 10배 가까이 늘었다.
희망버스를 기획한 문화연대 활동가 신유아씨에 따르면 1차 희망버스에서는 개별참가자들이 70% 이상의 비율을 보였다고 한다. 기존 노동·사회단체의 참가가 두드러진 2차 희망버스에서도 절반정도의 개별참가자들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개별참가자들 중에는 예전에 노동운동을 접해본 사람들이거나 활동가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오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후기 등을 고려할 때,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시민들이 한진중공업 투쟁을 계기로 노동자의 투쟁에 밀접하게 연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투쟁의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 1만 명이 한 사업장 투쟁에 연대하러 부산까지 내려온다는 것, 이는 매우 새로운 현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혼란스럽고도 관성적인

 

2차 희망버스에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노동자의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부산에 모였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부산역 집회는 폭우 속에서도 진행되었고 집회 이후 영도까지 이어진 행진 역시 다채로운 구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희망버스의 활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찰과의 대치가 길어지면서 2차 희망버스의 집회 진행 및 기타 실무를 담당했던 기획단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부산역 집회 이후 영도대교를 건너 85호 크레인을 향해 행진하는 도중, 봉래사거리에서 경찰의 차벽으로 인해 행진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행진대오 앞의 상황과 뒤의 상황은 잘 소통되지 않았고 행진 대오는 차벽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 학생 대오를 중심으로 차벽을 뚫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있는 85호 크레인으로 진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가운데 이후 대응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논의되지 않고 경찰을 규탄하는 방송차의 선동만이 계속되었다. 1차 희망버스 이후로 경찰의 강경한 대응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의해 행진이 막혔을 때 어떻게 일정을 진행할지에 대한 계획이 부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개별참가자가 배제될 수밖에 없는 관성적인 방식이었다. 대치과정에서 경찰은 집회대오를 향해 최루액을 난사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골목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 상황에서 희망버스 기획단이 중심이 되어 대오를 모아냈고 이는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차벽으로 가로막힌 가운데 이번에도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은 없었다. 이후에는 주로 노동·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개인 참가자의 발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희망버스 참가자의 절반이 개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었던 만큼 단체 활동가뿐 아니라 개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발언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 참가자든, 조직 참가자든 관계없이 자신의 견해와 소감을 밝힐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않았다.
둘째 날, 2차 희망버스 전체의 일정을 조정하는 과정 역시 개인 참가자가 참여하기는 어려운 구조였다. 소위 ‘운동권’들만 참여하는 집회에서 익숙하게 들려오는 “조직 담당자들 나오세요"라는 말만 방송차에서 흘러나왔다. 조직 담당자가 없는 개인의 참여를 고려하지 않은 논의 방식이었다. 이는 기존의 노동운동·사회운동에 익숙한 단체들만이 중심이 되어 전술을 짜고 ‘판’을 운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자발적 연대의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도록

 

2차 희망버스 이후, 개별적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조직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하다는 고민이 생기고 있다. 3차 희망버스를 위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과정에서 많이 제기된 것 중 하나는 ‘어떻게 원활한 소통을 이뤄낼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버스별로 깃발을 만들고 버스별로 소통 구조를 만들자’, ‘게시판을 만들어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온라인상의 게시판에서 소통될 수 있게 하자’ 등등의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노동자 투쟁에 결합하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가 이미 성공적인 희망버스를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차 희망버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노동·사회단체 중심의 구조로는 개별참가자들의 자발적 의견제시를 배제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이는 기존의 노동·사회단체들과 새롭게 노동자투쟁에 연대하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 벽을 쌓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최근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노동자 투쟁에의 연대가 생명력을 잃지 않고 더욱 강화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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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FocuS]희망버스가 드러낸 빛과 그림자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8/16 16:08
  • 수정일
    2011/08/16 16:08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7월30일, 3차 희망버스가 출발했다. 7월9일에 출발했던 2차 희망버스와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함께했다. 처음에는 성사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던 희망버스는 희망자전거, 희망기차, 희망비행기 등으로 변주되면서 벌써 3차까지 진행되었다. 곧 4차 희망버스 일정도 진행될 예정이다.
지금까지 이어진 희망버스는 새롭게 등장한 자발적인 연대를 보여주었다.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기점으로 곳곳에 솟아나오기 시작한 자발적 연대는 85호 크레인을 중심으로 더욱 확대되고 적극적으로 변했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과 동시에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무력함도 재확인되고 있다. 사실상 정리해고 투쟁을 정리해버린 한진중공업 채길용 집행부는 금속노조로부터 어떠한 징계도 받지 않았다. 또한 조직노동운동의 핵심대오라고 여겨졌던 금속노조 현대·기아차지부 정규직 노동자들은 연대투쟁을 조직하기는커녕 희망버스 참여에도 소극적이었다. 한진중공업지회의 노사합의와 이제 4차를 예고하고 있는 희망버스에서 이러한 대비는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노조집행부의 노사합의, 분노를 이끌어내다

 

 

촛불문화제에서 발언하는 송경동시인

2차 희망버스가 한창 준비되고 있던 6월27일,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졌다. 채길용 지회장이 파업을 철회하고 업무를 정상화 하기로 하는 노사협의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한진중공업지회 지도부는 ‘해고자 중 희망자는 희망퇴직자와 동일한 처우를 받을 수 있다’고 협의함으로써 정리해고를 인정해버렸다. 심지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퇴거는 노조에서 책임진다는 내용까지 합의되었다.
한진중공업지회 집행부는 “농성 노조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밑바닥을 드러낸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파업을 철회했다고 밝혔다. 파업을 철회함에 따라 농성을 진행하던 비해고자 역시 7월1일자로 현장에 복귀했다.
사측과 노조집행부가 합의한 27일은 투쟁하던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들에게 강제퇴거조치가 강행된 날이었다. 사측의 침탈로 85호 크레인을 지키고 있던 조합원 대부분은 법원집행관과 용역깡패의 손에 끌려나왔다.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전해진 행정대집행 소식은 사람들의 분노와 연대를 이끌어냈다. 몇몇 시민들은 퇴근 후 부산으로 직접 내려가기도 했다. 직접 가기 어려운 사람들은 트위터를 통해 부산에 가는 사람들에게 교통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행정대집행에 대한 분노가 컸던 만큼, 채길용 한진중공업지회장에 대한 분노도 컸다. ‘채길용 지회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내용은 물론이고, ‘채길용 지회장을 공개수배한다’는 트윗들이 많이 올라왔다. 행정대집행 다음 날 서울 보신각에서 진행된 ‘한진 85호 크레인의 눈물’이라는 이름의 촛불문화제에서도 채길용 지회장에 대한 규탄이 이어졌다.

 

채길용과 거리를 두려는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의 상급단체인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은 합의가 이루어진 바로 다음날 채길용 지회장이 진행한 노사협의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금속노조는 산별노조라서 단체교섭권과 협약권은 금속노조 위원장에게만 있으며 정리해고와 같은 사안에서 금속노조 위원장의 위임이 없는 한 개별 사업장 노조위원장의 협의는 무효라는 것이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은 채길용 지회장을 비판하면서 정리해고 투쟁을 사수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또한 2차 희망버스에 함께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 사수에 대해 얼마나 진정성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6월28일, 한진중공업지회 집행부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애초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전국금속노동조합 부산양산지부, 그리고 한진중공업지회로 꾸린 ‘공동투쟁본부’는 6월30일까지 회사와 합의하는 것으로 정리했다"고 밝혔다. 또한 6월 말에 투쟁을 정리하고 해고자들은 현장 바깥의 투쟁으로 빼낼 계획이 있었으며, 공권력 투입 계획을 앞둔 상황에서 합의를 사흘 앞당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금속노조도, 민주노총 부산본부도 투쟁을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6월27일 한진중공업지회 집행부의 합의가 여론의 뭇매를 맞자 금속노조, 민주노총은 채길용 집행부의 독단적인 행동임을 부각시켰다. 채길용 집행부와 금속노조 사이에 차별성을 부각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속노조는 채길용 집행부에 대해서는 어떠한 제재도 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현재 인터넷 상에서 돌고 있는 채길용 집행부의 탄핵을 요구하는 서명 역시 금속노조 내부 혹은 조합원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노동자·시민’의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금속노조의 현실

 

금속노조가 보이고 있는 태도는 현재 금속노조의 조직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금속노조의 주력대오라고 하는 완성차 정규직노조의 희망버스 참가율에서 잘 드러난다.
금속노조는 6월28일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2차 희망버스에 노조간부 및 조합원까지 최대한 참석케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정작 7월9일 영도에서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은 잘 보이지 않았다. 현대자동차지부는 참여도 하지 않았으며 기아자동차지부는 몇몇 활동가와 노동조합 집행부만 참여했을 뿐이었다. 완성차 정규직노조는 휴가 기간과 겹치는 3차 희망버스에 아예 버스를 대절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상급단위를 대체했던 것은 전국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서울부터 천릿길을 걸어서 부산 영도로 찾아왔다. 희망버스 이전에도 쌍용자동차 가족대책위와 노동자들은 희망열차를 타고 85호 크레인을 방문하였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부산으로 모였다. 1300일 넘게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재능 학습지 노동자들과 사측의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 투쟁하는 유성기업 노동자들도 희망버스에 탑승했다. 이렇듯 매번 연대 선언은 상급단체가 하지만 실제로 연대를 만들어 나간 이들은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집행부의 합의를 넘어서려는 ‘외부세력’

 

 

외부연대가 투쟁을 이어가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투쟁을 정리하려는 집행부와 무기력한 상급단체의 모습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투쟁은 두 가지 지점에서 새로워 보인다. 첫째로 한 사업장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하려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집결 장소는 남쪽 끝 부산이다.
이러한 자발적인 연대는 올해 초 벌어진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 때에도 엿볼 수 있었다.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에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1인 시위를 진행하고, 후원물품을 보내고, 집회에 참여했다. 이제는 그러한 연대가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농성을 중심으로 한진중공업 투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두 번째로 놀라운 점은 외부의 연대가 이어지면서 노동조합 집행부가 사측에 백기투항한 이후에도 투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간 노동조합 집행부의 직권조인이 있었을 때, 이후에 그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있었어도 실질적으로 투쟁이 조직되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노사협상을 하면서 한진중공업 사측과 노동조합 역시 예전과 같은 양상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투쟁은 정리되는 수순을 밟지 않았다. 물론 현장에서의 분위기가 그리 좋지는 않다. 올해 초 투쟁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는 700여명 이었지만 6월 말에는 그 수가 1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투쟁이 장기화되고 노동조합 지도부가 합의함에 따라 투쟁주체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주체가 소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농성이 지속되고 희망버스를 겪으면서 외부의 연대가 확산되었다. 투쟁하는 조합원 수는 많지 않지만 사회적인 지지와 연대가 이 투쟁을 유지하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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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노동] 기로에 선 유성기업 투쟁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8/12 17:20
  • 수정일
    2011/08/16 16:0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5월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파업 소식으로 전국은 떠들썩했다. 유성기업은 엔진용 부품을 제조하여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남한 완성차공장에 납품하는 부품사이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부품업체의 파업으로 남한 완성차 공장들은 조업 중단에 내몰리기도 했다. 유성기업 사측은 임단협 과정에서 조합원에 대한 직장폐쇄를 단행했고, 이에 맞서 조합원들은 공장에 모여 집회를 진행하다가 자연스럽게 점거파업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공장점거투쟁은 용역과 공권력 투입으로 파괴되었고 사측은 회유와 협박을 일삼으며 조합원들을 위축시켰다. 점거투쟁이 정리된 지 두어 달이 지난 현재, 세간의 관심은 줄어들었지만 노조턴압에 맞선 유성기업지회 조합원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사측이 장악한 유성기업 현장은 무자비한 공격으로 초토화되고 있다.

 

기획된 공격 - 교섭해태, 직장폐쇄, 간부체포, 노조탈퇴, 그리고 어용노조 건설까지

 

언론은 2009년 노사가 합의했던 주간연속2교대 시행을 가지고 유성기업 투쟁이 불거졌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제조업 노동자들의 야간노동 실태와 주간연속2교대가 새삼스레 조명받기도 했다.
보수언론에 의한 이데올로기 공세도 몰아쳤다. 파업으로 인해 부품조달에 문제가 생기면서 남한경제를 지탱하는 완성차 조업이 중단될 것을 우려하며, 고임금 노동자의 이기적인 파업이 나라를 망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주간연속2교대와 관련해서는 완성차에서 아직 교대제 변화가 시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품사인 유성기업이 주간연속2교대를 먼저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둥, 부품공급의 다변화가 추구되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성기업 사측에게 주간연속2교대를 둘러싼 노사갈등은 단지 노조를 말살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2011년 임단협이 시작되면서 진행된 수차례의 교섭에서 사측은 불성실한 태도로 임하다가 직장폐쇄를 단행해 점거파업을 유도했다. 그리고는 용역깡패와 공권력을 동원하여 파업을 파괴하고 노조간부를 고소고발하여 구속·수배시켰다.
지도력에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사측은 조합원들을 회유·협박하며 분열시키는 수순을 밟았다. 일부 조합원만 선별복귀시킨 것이다. 현재 복귀자들은 어용노조를 설립하고 현장에서 가입원서를 받으러 돌아다니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사측이 복수노조 본격 시행과 맞물려 기획된 공격을 펼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 아산공장 앞 비닐하우스에 거점을 잡고 투쟁 중인 유성기업 조합원들 (출처 : 미디어충청)

 

현장장악 위해 인권탄압도 서슴지 않아

 

과거에는 임단협을 안정된 노사관계의 결과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측이 일방적으로 단협을 파기하거나 갱신하지 않음으로써 노조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교섭해태에 따른 파업과 파업파괴 이후 어용노조 설립이라는 수순은 최근 몇 년간 자본이 노조를 깨면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양상이다.
대공장인 쌍용자동차나 금호타이어뿐만 아니라 난 해 여름 점거파업을 벌였던 KEC나 그 이전의 대림자동차, 발레오만도와 같이 노조의 조직력이 살아있었던 지역의 중형기업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현재 이들 사업장에서는 어용노조가 득세하고 기존의 노조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밀려나거나 해고되어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실정이다.
현장에서 대의원과 활동가들의 노조활동이 유지되고 있었던 유성기업에서도 힘의 관계를 역전시키기 위해 사측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교섭을 해태하고 직장폐쇄하면서 선제공격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사측이 계약한 용역업체 CJ시큐리티가 경상병원, 국민체육진흥공단, 대우자판, 씨엔앰, 삼성물산 등에서도 활약한 노조파괴전문회사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측은 이에 그치지 않고 복귀한 노동자들에 대한 정신교육과 단속을 실시하고 있다. 사측은 나이가 많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조합원들은 복귀시키지 않았고 복귀하려는 조합원에게는 공장 정문을 지키는 용역 앞에서 ‘나는 개다’라고 외쳐야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모멸적인 짓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복귀자 환영식에서 충성서약서를 쓰게 하고 일하기 전에 컨설팅업체의 교육을 4시간 받게 하는 등 통제를 넘어서 인권탄압 수준에 이르는 노무관리를 벌이고 있다.
이러한 노조탄압에 공권력도 장단을 맞추고 있다. 경찰은 공장점거 당시 사측 용역이 조합원들을 향해 돌진하여 부상을 입힌 뺑소니를 과실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경찰과 충돌한 것과 관련하여 사진채증한 것을 검증하기 위해 조합원의 부모에게 확인하거나, 국과수에 가서 사진을 찍으라고 조합원들을 협박하는 등 강압수사를 벌이고 있다.

 

 

 

 

노조탄압에 맞선 방어 필요해

 

점거파업 이후 유성기업지회는 사측의 선별복귀에 반대하며 일괄복귀를 선언하고 출근투쟁, 노동부 천안지청 점거, 상경투쟁 등을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지도부에 체포영장이 떨어지자 비상대책위를 구성했다. 현재 노동부 주재로 노사교섭이 재개되었지만 사측은 여전히 시간끌기 중이다.
투쟁은 지역으로 퍼져나갔지만 현장 밖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활동하기는 녹록치 않다. 복귀하지 않은 조합원들은 공장 앞 비닐하우스를 거점으로 삼아 숙식을 해결하며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노동부 주재로 노사교섭이 재개되었지만 사측은 여전히 시간끌기 중이다.
김성태 아산공장지회장은 구속되었고 엄기한 아산공장부지회장과 이구영 영동공장지회장은 조계사에서 단식투쟁을 진행하다 건강이 급속히 나빠져 중단했다. 유성기업 아산공장 앞 굴다리 밑에서 단식농성을 진행하던 이재윤 비대위원 역시 단식 28일째인 지난 25일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투쟁이 시작되었던 시점에 받았던 여론의 관심과 달리 상급단체와 조직노동자들의 연대는 미미한 수준이다. 금속노조는 유성기업 사태해결을 위한 6월말 총파업을 결의했지만 이는 하계 임단투 흐름 속에 유실되고 말았다.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완성차지부는 단사 내 성과를 따내기 위해 무쟁의 흐름으로 가면서 부품사인 유성기업 투쟁을 사실상 외면하고 있다. 또한 7월16일에 유성기업 아산공장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결의대회에는 500여명이 참가하는 데 그쳐 상급단체의 조직이나 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사측의 도발에 노조들이 점거투쟁이나 전면파업 등 강력한 투쟁을 결의하며 노조를 사수하기 위해 저항했지만 현장의 권력은 자본에게 넘어가고 있다. 노동자들이 파업권을 거의 보장받지 못하는 현재의 노동탄압 국면에서 용역깡패의 폭력과 공권력의 비호 아래 치고 들어오는 자본의 탄압을 제대로 방어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수노조 시행 이후 어용노조의 난립이 예상되는 가운데 노조가 아직 살아있는 다른 중형사업장에서도 유성기업과 비슷한 양상으로 노조파괴공작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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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FocuS]되살아나는 공안탄압의 망령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8/02 14:20
  • 수정일
    2011/08/02 14:2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1 7월10일 새벽 경찰은 2차 희망버스 집회 현장에서 참가자들에게 최루액을 뿜어대고 방패를 휘둘렀다. 그것도 모자라 무차별 연행을 시도해 50여명을 그 자리에서 끌고 갔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7000여명의 시민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85호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만나 응원의 마음, 공감의 마음을 전하려던 그 소박한 희망은 경찰의 잔인한 폭력에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2 7월10일 오후 국정원 등 공안당국이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아 국내에 ‘지하당’ 형태의 반국가단체를 조직한 혐의로 노동계, 학계, 언론계 인사 10여명을 수사 중이라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수사선상에 오른 이들의 집과 직장은 압수수색 되었고, 그 중 한명은 이미 구속되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뭇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안당국의 언론플레이가 과거 군사정권 시절과 꼭 닮아 있어 시대를 거스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명박이 공안탄압의 칼을 또 다시 빼들었다. 레임덕의 격랑을 맞고 있지만 내년 총선과 대선을 결코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확인되었듯이 대중 스스로 사회적 요구와 불만을 직접 제기하고, 직접 행동에 나서는 움직임이 최근 들어 재현될 조짐을 보이자 내년 선거를 앞두고 사전정비 작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고전적 수법의 공안탄압

올해 들어 정권의 공안수사는 끊이질 않았다. 공안당국은 구시대의 악습인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각계각층을 차례로 탄압했다. 지난 3월 대학생 동아리인 ‘자본주의연구회’를 시작으로 5월에는 청년단체와 노동단체인 ‘6․15 공동선언 실천 청년학생연대’, ‘민주노동자 전국회의’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하며 조직사건 만들기에 나섰다.

현재 공안당국의 탄압양상은 이들 모임이나 단체 모두가 국가권력이 소위 ‘친북세력’이라 규정짓고 단죄하려 했던 통일운동 진영이라는 점에서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기의 조직사건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87년 민주화 투쟁의 수혜를 입은 386 세대들이 집권세력의 일부로 편입된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는 공안사건이 주로 통일운동 진영에 국한되었다. 민주화 시대의 유산자임을 자처한 자유주의 정권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노동운동에 대해 강경탄압을 유지했지만 사회정치적 사안에 대해선 기존의 보수진영과 차별화를 꾀해 이념적 유연성을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을 통해 10년 만에 집권에 성공한 보수진영은 ‘잃어버린 10년’ 청산작업에 나서며 민주주의적 요구와 권리 전반에 대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되돌리려 했다.

때문에 적용 법률도 집시법이나 국가보안법만이 아니라 형법의 각 조항들, 통신비밀보호법, 전기통신사업법, 선거법 등 적용가능한 모든 법률을 찾아내 노동자서민의 반정부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차단하고 억압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운동세력에 대해서도 자유주의 정권 이전처럼 통일운동 진영 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치를 표방한 운동세력까지 국가보안법을 확대․적용하였다. 그 결과 이명박 정권 들어 공안사건은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최근에 공안당국은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다시 통일운동 진영으로 집중하고 있다. 급기야 이들에 대해 북한의 지령으로 지하당을 만들려고 했다는, 과거 70~80년대에서나 있었을법한 조직사건으로 엮어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이러한 양상 변화는 지금 사회전반에 걸친 대중운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최근 대중운동의 양상

작년 지방선거는 민주주의와 복지, 그리고 평화를 바라는 대중의 정치적 열망이 재확인된 자리였다. 천안함 사태로 이명박이 기획한 여론통제나 북풍몰이는 되레 여론의 역풍을 맞은 반면 무상급식을 비롯한 보편적 복지는 사회적 의제로 추인 받았다.

그럼에도 대중이 제기한 사회적 요구와 불만은 거리의 민주주의로 움터 나오진 못했다. 수출 대기업들의 화려한 실적과는 대조적으로 고물가 속에서 전세대란, 등록금 인상 등 서민경제의 주름살이 깊어가고, G20에 반대했다고 처벌당한 ‘쥐벽서’ 사건처럼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지속되었지만 제도정치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대중이 직접 발언하고 직접 행동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찾기란 좀처럼 어려웠다.
 

 

△6월 10일 등록금 촛불집회

하지만 지난 6월의 반값 등록금 운동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50억 원대의 자산가이기도 한 오세훈마저 자녀 등록금 부담으로 허리가 휜다는 마당에 서민가계의 한계치를 넘어선 등록금 인상은 분명 전사회적인 문제였고, 반값 등록금 운동은 그래서 빠르게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물론 정권을 향해 이명박의 대선공약을 이행하라고 청구하는 반값 등록금 운동이 지닌 정치적 한계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주목되는 건 이를 계기로 대중의 잠재력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미 지난 겨울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에서 가능성을 내비친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에 기초한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자발적인 실천은 반값 등록금 운동 과정에서도 그 보폭을 이어갔다.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다양한 요구와 그 표출은 특정 쟁점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되어 재점화된 거리의 민주주의는 6월 반값 등록금 운동에 이어 7월에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로 확산되었다.

한진중공업의 노조 지도부가 지난 6월 말 자본의 정리해고 방침에 사실상 백기투항을 했음에도 85호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 지도위원이 고립되지 않고 오히려 여론의 중심에 선 것은 이렇듯 다시 힘을 얻고 있는 전사회적인 대중운동의 확산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투쟁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무대가 재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물꼬가 터진 계기는 바로 광화문 거리에서 연행을 각오하며 반값 등록금을 외쳤던 통일운동 세력의 한국대학생연합에 의해서였다.

현재 통일운동 진영은 사회적으로 활성화 되고 있는 대중운동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나서고 있다. 때문에 공안당국은 이들을 우선 지목하며, 그동안 대학생모임․청년단체․노동단체 순으로 간헐적으로 수사한 밑그림을 가지고 이제는 본격적인 공안탄압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이명박의 레임덕과 공안탄압

등록금․정리해고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노동자서민의 요구가 전사회적인 지지를 얻어가자 이명박도 처음엔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레임덕으로 인해 여론이 더 악화되는 것을 우려했던 탓이다. 지난 6월10일 1만여 명의 시위대는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처음으로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거리행진을 갖기도 했다.

이렇듯 시간은 이제 이명박의 편이 아니다. 내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양대 선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차기주자들 간에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면 이명박은 자칫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집권 후반기 이명박의 강공은 결국 앞으로 거세질 정치적 불안감에 대한 대비책으로 보인다. 여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이 7월15일 법무부 장관과 검찰 총장 자리에 자신의 측근인사를 내정한 다음 이를 고집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사정라인을 통제해 임기 말 권력누수를 최소화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정권의 기강확립에 나선 이명박이 겨냥하는 탄압방향도 반MB 전선으로 수렴되고 있는 민주대연합에 대한 ‘판 흔들기’로 설정했을 개연성이 높다. 통일운동 세력 중심인 민주노동당이 진보진영을 대표해 야권연대의 한축을 이루고자 하는 상황에서 이명박의 공안탄압은 민주노동당에 타격을 주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현재 대중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통일운동 진영을 향해 색깔론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향후 보수층의 결집을 도모하는 한편 북한의 억압적 체제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민주노동당, 나아가 민주노동당이 참여할 야권연대에 대한 지지이반을 노리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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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전교조에 대한 대규모 탄압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공격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지난 7월21일 검찰은 전교조 교사 200여명을 공무원 신분으로 민주노동당에 한 달에 5천원에서 2만원의 정치후원금을 냈다고 무더기로 기소했다.

이는 전교조에 대한 무력화 공세이자 노조 등 기존 운동세력의 소액기부금이 당 재정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우회적인 공격을 의미한다. 현재 검찰의 내사 대상자는 1500여명이어서 실제 기소자는 1000명 안팎이 될 것으로 예상되며, 그런 만큼 민주노동당의 정치활동 자체를 옥죌 것으로 보인다.

정권의 의도는 국정원이 이례적으로 전면에 나서 압수수색까지 했다는 것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국정원은 국가보안법 관련 수사권을 갖고 있긴 하지만 통상 공개수사 전 정보수집만 담당하고 이후 사법처리 과정은 경찰과 검찰에 넘겨왔다.

하지만 이번에 국정원은 반값 등록금 운동 배후에 북한이 연계되어 있다며 학술단체인 한국대학교육연구소를 직접 압수수색하고 증거물이 없다는 증명서까지 발부했다. 국정원의 이러한 움직임은 무리한 수사를 했다는 점에서 일견 해프닝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국정원이 나설 정도로 정권 내부의 사정이 있음을 오히려 방증하고 있다.

민주주의 탄압에 맞서 투쟁 필요해

국정원까지 동원한 이명박의 공안탄압의 실체는 지난 7월29일 검찰의 발표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과 검찰은 7월 들어 모두 5명을 구속하고 12명을 압수수색한 결과 ‘반국가단체 왕재산’ 사건으로 이름 짓고, 수사대상에 현직 구청장 2명을 포함해 시의원과 구의원 등 민주노동당 당원과 민주당 전 당직자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공개했다.

공안당국의 이러한 수사확대 및 강행방침은 지난 6월 이후 탄력을 받고 있는 대중운동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통일운동 진영을 겨냥해 조직사건을 터트려 분위기를 공안정국으로 몰아가면서, 거리의 민주주의에 동참한 개개인들을 향해서도 법에 따라 엄벌하겠다는 강경자세를 보이고 있다.

경찰은 이미 지난 6월부터 반값 등록금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 시민 중 200여명에게 소환장을 보낸 데 이어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참가자들 가운데에서도 120여명에게 소환통보를 하고 있다. 3차 희망버스가 끝난 직후인 8월1일에는 서울 대한문 앞 ‘희망단식단’ 농성장과 서울 시청광장 부근의 재능교육노조 농성장을 기습적으로 침탈했다. 경찰의 이 같은 탄압은 국정원의 색깔론 공세와 함께 대중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구시대적인 공안탄압으로 지금 전개되고 있는 대중운동을 위축시키고, 사회적 저항의 움직임을 차단하겠다는 정권의 의도부터가 순진하고 단순한 생각이다.

한진중공업을 향한 3차 희망버스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1만여 명의 참가로 대중운동의 물줄기가 정권의 기대처럼 줄어들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이후 4차 희망버스를 8월 하순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로 예고하고 있다. 또한 통일운동 세력과 투쟁거점들에 대한 탄압으로 대중운동의 흐름을 끊어내려는 정권의 의도와 달리 거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중의 집단지성은 그 누구의 뜻도 의지도 아닌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이는 존중받아야 하며, 또한 더욱 더 확대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경찰의 강경대응과 국정원의 공안탄압으로 본격화 하고 있는 정권의 공격에 대해선 민주노동당과 통일운동 진영에 대한 지지여부를 떠나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아내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자서민의 요구를 외면하고, 정치사상의 자유를 억누르는 정권의 탄압이 최소한의 생존권, 최소한의 민주주의마저 짓밟는 데 있음을 함께 인식하고 함께 투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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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독자편지]어느 교생의 이야기...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1/06/27 15:56
  • 수정일
    2011/06/27 15:5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한 독자회원이 교생실습 과정에서 느낀 소감문을 기고해주었다. 교생실습을 하면서 경험한 학내의 비민주성과 권위주의, 그리고 일부 학생들과 소통하려는 교사들과 그들의 좌절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어색한 마주침

지난해 여름, 언제 졸업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한 남자고등학교에 교육실습 신청서를 냈다. 이유야 간단했다. 새벽부터 불편한 정장을 차려 입고 나서기엔 집 근처 학교가 제일이었다. 물론 생판 모르는 학교보다는 졸업한 학교가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신청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저만치 학생들이 보였다. 군인들처럼 머리를 짧게 하고 있었다. 누군가 매 맞는 소리도 귓가에 울렸다. 어쩜 예전과 그리 똑같은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해가 바뀌자 학교는 거짓말처럼 달라져 있었다. 교생 첫날, 일명 ‘스포츠머리’를 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교실 뒤에 걸린 커다란 거울을 보면서 머리 빗는 학생이 여럿 보였다. 어디 그 뿐이랴. 학교의 전통이라던 이른바 ‘떡매’도 볼 수 없었다. 학생들의 엉덩이를 떡을 치듯 때릴 수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떡매. 그 존재만으로도 학생들을 긴장과 공포로 몰아넣던 떡매가 이젠 학교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그래서일까. 학생들은 자유스러워보였다. 수업 시간이 다 돼 종이 울리고 교사들이 교실에 들어가라고 호루라기를 불고 소리를 쳐도 학생들은 느긋하게 걸어가며 재잘거렸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나사가 풀렸다며 성을 냈지만 학생들의 그런 모습이 내 눈에 싫지만은 않았다.
교생은 ‘교육실습생’의 준말이다. 하지만 내게 교생은 교사도 학생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로 느껴졌다. 교사 앞에선 학생보다 더 학생 같이 있다가도 막상 학생 앞에선 교사인 마냥 있어야 했다. 지금에 와서 그런 내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색하기만 했던 교생이라는 자리가 교육 현장을 들여다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교무실과 교실을 두루 둘러볼 수 있었고, 해서 학교라는 공간을 예전과는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반민주적인 너무나도 반민주적인

 

출처: realcsn.tistory.com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흔히 전통이 깃든 도시라고 불린다. 자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되레 고루한 보수적인 분위기를 말하고 싶어서다. 변화에 둔감해서 그런지 옛것을 고집하는 문화가 아직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데, 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중에서도 내가 나온 학교는 시내 학교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곳으로 손꼽혔다. 고교 평준화 지역이지만 학생들을 때려서라도 공부시켜 비평준화 지역만큼 소위 명문대에 보낸다는 것을 자랑이라고 들먹이는 데였다.
수십 년이나 이어졌다는 완고한 전통은 작년 가을 언론의 주목까지 받은 ‘떡매 사건’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한 교사가 예전 방식 그대로 학생을 때린 것이 발단이었다.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 엉덩이와 허벅지를 시퍼렇게 멍들게 한 잔혹한 체벌은 더 이상 암암리에 용납되지 않았다. 이를 고발하는 인터넷 기사가 곧바로 떴고, 결국 교장까지 물갈이 될 정도로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물리적인 체벌만 없어졌다 뿐이지 학생들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교육이 아닌 훈육을 받고 있었다. 체벌의 유무를 떠나 학교를 배회하고 있는 유령은 권위주의와 위계질서였다. 학생들에게 정해진 일과 시간, 즉 등교·수업·청소·야간 자율학습 등의 시간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절대 명제였다. 그 선을 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교사의 제재가 뒤따랐다. 벌점제와 수행평가는 체벌을 대신하는 훌륭한 제재 수단이었다. 학생들은 여전히 교사의 지시에, 학교의 규칙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권위주의로 포장된, 그래서 감히 넘볼 수 없다고 여겼던 학교의 위계질서가 예전만 못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간 학교의 엄격한 통제에 짓눌려 있던 학생들은 더는 웅크리지 않았다. 나름의 일탈을 꿈꾸기 시작했다. 획일성이라는 잣대로 학생들을 성적으로 줄 세우기에 여념이 없던 학교를 상대로 그들은 스스로의 욕구를 표출하고 싶어 했다. 그것의 귀결점은 단 하나, 공부의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었다.
거창한 건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핸드폰 게임하고, 수업 시간에 자고, 청소 시간에 놀고, 그리고 언제나 와글와글 시끌벅적하고, 대충 이런 식이었다. 내가 봐도 참 밋밋했다. 굳이 덧붙이자면 학교 안에서 빈번해진 학생들의 흡연 문제가 있지 싶다. 하지만 교권추락의 사례로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다른 학교들과 견줘보자면 전반적으로 얌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군대는 저리 가라 할 정도 규제가 엄격했던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보인 변화는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다. 교사들은 그러한 균열에 근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교사와 학생이 날마다 대립하고 긴장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사실 교사와 학생이 뺏고 빼앗기는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지 않는가.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이 학교에서도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정이라는 게 있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런 걸 모두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던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학교의 위계질서였다. 교장을 정점으로 수직 체계계화 한 권력 질서는 정작 학교 구성원의 다수이자 흔히 학교의 주인이라 치켜세우는 학생들을 소외와 배제로 내몰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는 중세의 봉건 영지와 다를 바 없었고, 영주와 마찬가지로 교장만이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학교는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보였고, 오직 반민주적인 깃발만이 펄럭여 보였다.

 

교사의 열정, 교사의 좌절

 

사용자 삽입 이미지일부 교사들도 이러한 학교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교사를 조롱하듯, 교사들은 교장을 조롱했다. 실제로 몇몇 교사들은 달라진 학교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이가 20~30대로 젊거나 기간제 교사 ― 해가 갈수록 정교사 자리가 줄어듦에 따라 공립학교임에도 전체 교직원의 40% 정도가 기간제 교사였고, 젊은 교사들의 상당수는 기간제로 근무하고 있었다 ― 일수록 학생들 위에서 군림하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과 협력하는 교사가 되길 원했다.
동아리 활동이나 창의적 체험활동과 같은 시간엔 학생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열심이었고, 수업 시간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과 토론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학생을 마주할 때도 권위주의에 물든 과거의 모습과 달리 편히 대하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런 모습에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곤 했다. ‘그래도 아직은….’
안타까운 건 이러한 노력들이 교사 개인의 문제로 한정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의지나 열정, 이런 걸로 말이다. 하지만 교사도 사람이다. 더구나 온갖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개인적인 의지와 열정이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부장 교사는 교생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담임 10년 하면서 학생들한테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역시나 고고한 이상보다는 당면한 현실이 더 커다랗게 보이는 걸까.
어느 교사든 교직생활 초창기를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 같았다. 누구나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교육에 대한 희망을 가슴 속 깊숙이 품고 있었다. 그러나 교사들은 말한다. ‘현실은 다르다고.’ 그리고 이런 말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결국에는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고.’
교사가 교육 현장에서 부딪치는 가장 커다란 벽은 다름 아닌 이 나라 공교육 체계였다. 좋든 싫든 국가의 방침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다양한 욕구가 국영수를 중심으로 한 국가의 교육과정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학생들에게 교사는 그야말로 공교육의 화신일 수밖에 없다. 교사의 딜레마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하기 싫은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고, 공부 잘하는 애들 들러리 하기 싫다고, 지금 공부보다는 당장 돈 벌어야 한다고.’ 누군가의 인생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어려운 게 또 있을까. 교사는 뭐라고 답해야 하는가. 집중이수제로 한 학기에 교과서 한 권을 다 봐야 할 정도로 진도 나가기에 급급한 교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교육’공무원이 아닌 교육‘공무원’으로 잡다한 교육행정 처리에 정작 자기수업 연구할 시간도 빠듯한 교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공교육 체계에서 겉도는 학생들의 요구와 불만이 무엇인지 최소한 공감이라도 하려면 방법은 한 가지다. 일단 학생들과 직접 대화부터 하는 거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의 밝은 빛뿐 아니라 어두운 그림자에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학생들과 대화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려는 교사에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교사 개인의 의지와 열정이 충만할 때야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러한 시간과 노력은 고스란히 자기 부담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한마디로 피곤하고 귀찮아지는 거다.
더군다나 미래가 보장된 정교사라면 사회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지위에, 교직생활 20년이면 노후가 보장되는 공무원연금에, 사실상 유급휴가인 방학마다 할 수 있는 재충전과 자기계발에, 그대로 안주하고픈 마음이 더 크지 않을까. 가뜩이나 교육 전반에 대한 교사의 재량권이 적은 마당에 꿈쩍도 하지 않는 공교육 체계는 더 거대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그 자리 그대로 순응한 교사는 더는 학생들과 함께 호흡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음을 주고받는 교사가 아닌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교사로 전락하게 되는 거다. 이때 학교의 권력 질서가 안겨주는 권위주의는 외면할 수 없는 강렬하고 달콤한 유혹이지 않을까. 연차가 늘수록 편해지는데, 왜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학생들에게 그러한 교사는 단지 자신들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통제자일 뿐이다. 권위주의로 무장한 학교 질서의 재생산, 학교는 변하지 않는다.

 

위계질서가 아닌 대화와 소통으로

 

내가 겪은 학교에서 현재의 공교육은 학생들에게 희망이 아니었다. 날마다 옥죄는 학교의 통제와 흥미 잃은 수업의 반복에 학생들은 지쳐 있었다. 탈출구를 원하지만 기껏 한다는 게 일순간의 일탈뿐이었다. 공부와 성적으로 채워진 족쇄는 회색 벽돌로 구획된 교실로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교사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의 화살을 직접 맞는 교사들 역시 지쳐 보였다. 그런데도 공교육의 요새로 군림하는 학교는 굳건히 서 있었다.
때문에 한 달 남짓 교생을 하면서 몇 번이고 곱씹어 생각한 건 학교가 바뀌기 위해선 학교의 위계질서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차단하고 교류를 억제하는 지금의 학교 질서에서는 그 무엇도 새롭게 시작할 수 없어 보였다. 수십 년 묵은 권위주의의 낡은 때부터 벗겨내, 우선은 학교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통의 장부터 필요해 보였다.
이를 위해 학교 현장에서 당장 요구되는 것은 그 누가 됐든 자기의 불만과 요구를 말할 수 있고, 또한 이를 집단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일 것이다. 생소하고 어려울 건 없다. 초, 중, 고교 12년간 교과서에 반복해 등장하는 낱말이 바로 민주주의다. 저마다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는 민주주의, 그것도 직접민주주의를 배운 대로 가르친 대로 직접 실행에 옮기면 된다. 최소한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이는 가능하다.
서로 다른 배경과 서로 다른 꿈을 가진 학생들이, 이 나라 정책에 의해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분할된 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학교 안팎에서 제기되는 쟁점을 놓고 서로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은 그러한 민주주의의 첫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이 활발해질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또한 때때로 서로 논쟁하고 서로 설득할수록,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현 교육의 문제를 집단의 고민, 집단의 요구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는 사회 어느 곳보다도 가장 민주적이어야 한다. 학교는 사회 어느 곳보다도 가장 개방적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교생을 하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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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문화][기고]파리꼬뮌, 잊혀진 혹은 지워진 기억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1/06/27 15:44
  • 수정일
    2011/06/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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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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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파리코뮌 140주년이다. 이에 <사노위 정치적 해산자 선언 모임>의 김병효 활동가가 파리꼬뮌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파리 탐방기를 기고해 주었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편집자주]

 

 

이제 막 여름 날씨가 시작되던 5월 중순, 파리코뮌 140주년을 맞아 파리를 찾았다.

밤늦게 출발한 비행기가 자정을 갓 넘길 무렵, 흐린 날씨 탓에 이륙 후 창밖으로 별빛도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하바로프스크 상공에 이르자 비행기 창을 통해 여명이 비추기 시작했다. 여명이라기보다는 아마도 고위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백야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 때부터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창 밖에는 12시간 비행 내내 새벽빛이 비추었고, 저 아래 광활한 툰드라가 끝없이 펼쳐졌다. 5월이지만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채, 원시의 자태를 비추는 동토의 땅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경치구경도 잠시, 비행 기간은 내내 자다 깨다의 반복이었다. 드디어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할 무렵 시간은 시차 때문에 여전히 새벽녘이었고, 벌써 발걸음은 무거웠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숙소까지 이동해 짐을 풀고는 곧바로 첫 목적지로 향했다. 첫 목적지는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여는 빵집. 일단 배고픔을 해결해야 했으므로.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부터 파리코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파리코뮌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빵집 점원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로 그 빵집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수도꼭지가 옛날 파리의 공용 상수도가 있던 곳이란다. 맞은편에 있는 구청사 앞 광장은 파리코뮌 당시 꼬뮤나르드들이 집결했던 장소, 그리고 그 앞길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고가도로가 코뮌 최후의 격전지로서 당시 꼬뮤나르드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끝까지 버티던 지역이었단다. 지금은 그저 파리 외곽의 조용한 고가도로일 뿐이지만.
파리 전역이 코뮌의 현장이었기에 도시 곳곳에 많은 흔적이 남아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또 막상 찾아보면 별다른 특이한 장소를 찾기는 힘들었다. 이 격전지도 코뮌과 관련된 아무런 안내나 표지도 없었다. 파리가 코뮌 이후 1977년까지 불온한 도시로서 100년 넘도록 시장조차 없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럴 만하다 싶기고 했다. 파리코뮌 당시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던 부르주아지에게 있어 파리코뮌은 아마도 기억하기조차 싫은, 일종의 트라우마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지금도 진행형일 것이다. 그래서 파리코뮌과 관련된 역사를 가능하면 모조리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꼬뮌 기간에 희생된 부르주아지와 성직자를 기리기 위한 사크레쾨르 대성당이런 착잡한 마음도 잠시, 다음 일정으로는 파리에서의 다음 목적지인 몽마르트로 향했다. 몽마르트는 화가들의 광장으로도 유명하지만 바로 파리코뮌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몽마르트 가는 길에는 프랑스인 친구 한 명도 동행했다.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서 몽마르트 꼭대기의 사크레쾨르 대성당(Le Sacré-Cœur)을 바라보며 열심히 길을 재촉했다. 몽마르트 가장 높은 곳에 3개의 돔 구조로 이루어진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에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언덕길을 힘든지도 모르고 올랐다.
그런데 성당 앞에 펼쳐진 잔디 언덕에 이르렀을 때, 함께 가던 프랑스 친구가 이 성당의 유래를 아냐고 물었다. 몽마르트가 파리코뮌이 시작된 곳이니 당연히 파리코뮌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한 것 아니냐고 내 말에, 맞긴 맞는 말이란다. 파리코뮌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하여. 그런데 그 희생자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파리를 해방구로 만들었던, 하지만 부르주아지의 폭격으로 몽마르트 언덕에 매장된 수많은 꼬뮤나르드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희생자들은 코뮌 기간에 희생된 일부 부르주아지들과 성직자들이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애초에 코뮤나르드들의 무덤 위에 놓인 부르주아지의 승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순간 80년 광주가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희생자가 폭도가 되고, 가해자가 되었던 역사. 가해자가 오히려 민중의 편이자 희생자 대우를 받던 역사가, 이곳 파리에서도 반복되었구나......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향한 발걸음은 바로 거기서 멈췄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유롭게 앉거나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대화를 나누는 이 언덕이, 그리고 저 아름다운 건물이, 학살을 감추고 오히려 왜곡하는 것이었다니, 더 이상 성당을 구경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피해 화가들의 광장으로 가는 길에는 또 하나의 성당이 있다. 그것은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비하면 오래되고 초라한 성당이지만,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가운데 하나인 생피에르 성당(Église Saint-Pierre de Montmartre)이다. 파리코뮌의 학살 이후에도 파리 시민들은 교회와 부르주아지들이 ‘코뮌의 범죄에 대한 앙갚음’이라는 의미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건축하는데 골몰하는 동안 이를 무시하고 생피에르 성당에 다녔다고 한다. 코뮌의 후예들은 이처럼 괴멸적인 타격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오후에 화가들의 광장과 몽마르트 주변을 더 둘러보긴 했지만, 더 이상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다음 날은 일찍부터 ‘펠라쉐즈 묘역’(Le Cimetière du Père-Lachaise)을 찾았다. 1871년 파리코뮌의 마지막 투사들이 처형된 ‘코뮌 용사들의 담장’(Mur des Fédérés)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찾은 펠라쉐즈는 고즈넉했다. 파리코뮌 희생자들의 묘가 있다고 하는 서북쪽 출구를 통해 펠라쉐즈에 들어섰다. 입구 바로 안쪽의 안내지도에는 전체 묘역의 대략적인 구분과 유명 인사들이 안장된 곳이 표시되어 있었다. 쇼팽, 짐 모리슨, 오스카 와일드, 이사도라 덩컨 등 문화예술계의 거장들과 학자, 정치인, 그리고 잘 모르는 수많은 혁명가들……. 파리 최대 규모의 공원묘지이니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전날 미리 인터넷에서 위치는 확인해뒀지만, 안내지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간혹 펠라쉐즈를 찾는 프랑스인, 외국인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파리코뮌 희생자들이 이곳에 처형당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한 무리 관광객들은 짐 모리슨을 찾아왔다고 했다. 미국에서 온 또 다른 무리 관광객들은 오스카 와일드를 찾았다. 지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파리코뮌에 대해 하냐고 물었고, 대부분은 모른다고 답했다. 간혹 파리코뮌 희생자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아무도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하는 수 없이 외벽을 따라가며 과거의 흔적을 더듬었다. 전체 2킬로미터가 넘는 외벽을 따라 묘비를 하나하나 확인해가기 시작했지만 파리코뮌 희생자들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정문 안내소에서조차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여기서 얻은 팸플릿에도 수십 명의 유명 인사들의 묘역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파리코뮌 희생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파리코뮌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 그리고 그 최후의 희생자들의 역사에 대해 부르주아 정부가 철저히 삭제한 느낌이었다. 마치 절대 기억하지 말아야 할 금기인 것처럼…….
그래도 이왕 온 김에, 묘역을 둘러보기로 했다. 묘역 곳곳에 거리 이름을 붙이고, 마치 산 자들이 사는 것처럼 교회면 광장이며 설치해 둔 것이 이채로웠다. 크고 작은 묘비들이 제각각 망자들의 집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이 호흡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 파리코뮌의 희생자들은 집도, 이름도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일행들과 함께 두 시간 넘게 묘역을 헤맨 끝에 결국 반대편 출구를 향했다. 결국 묘역 탐사를 마치고 동쪽 출구로 빠져나오려는 순간, 그래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출구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 현지인에게 다시 물었다. 스페인 억양의 관리인은 우리가 방금 지나온 서쪽 외벽이 바로 마지막 희생자들이 처형된 곳이며, 처형된 이후 그대로 버려져서 따로 묘역은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어차피 명확한 표시는 없고, 대략 그 즈음이라고만 알고 있다고 했다.
만약 다시 들어가 찾고자 했으면, 묘역 어딘가에 있을 ‘코뮌 용사들의 담장’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덩굴에 가려진 담장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던 여느 묘비 뒤편 어딘가에 초라하게나마 코뮌 용사들을 기억하는 흔적들이 넝쿨에 가려져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허망하고, 안타까웠다. 광주의 원혼처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없이 죽어간 원혼들이여.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도 않는 곳에…….
아마도 한 주만 늦게 이곳을 찾았더라면, 매년 5월 마지막 주에 있는 파리코뮌 희생자 기념행사 대열을 따라 쉽게 그 담장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년에 한 차례 특별한 기념행사 때라야 겨우 흔적이라도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안내지도 및 팸플릿에 명확하게 파리코뮌의 용사들의 자리를 표시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

펠라쉐즈 묘역 밖의 이주노동자 시위대아쉬움을 뒤로 하고 펠라쉐즈를 나서는 순간, 300여 명 가량 되는 이주노동자 시위 행렬과 마주쳤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핸드폰 카메라를 찍으며 대열에 합류하려고 다가가는 순간, 시위에 참가하는 노동자 중 일부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대부분 식민지 출신의 불법 체류자인 이주노동자들이 얼굴을 찍히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인 것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합법적 체류 보장과, 노동자로서의 동등한 대구를 요구하는 이들의 시위에서 펠라쉐즈에서 찾지 못한 코뮌 투사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파리코뮌 만세!! 혁명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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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노동] 야간노동 철폐를 위한 우리의 투쟁 요구_주간연속2교대제 현 논의의 문제점과 08년 우리의 투쟁 요구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6/24 19:02
  • 수정일
    2011/06/27 15:45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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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디어 충청

 

김지현 jihyun@jinbo.net
 

 

최근 유성기업 투쟁을 통해 주간연속2교대제가 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현대자동차 1차 부품업체인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는 최근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을 포함한 임단협 과정에서 파업에 나섰다가 직장폐쇄를 당했다.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의 출발점인 현대자동차 현장조직들은 성명서를 내고 유성기업 투쟁이 주간연속2교대제를 둘러싼 대리전이라고 선언했지만, 완성차대공장에서 주간연속2교대제 투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주간연속2교대제에 대한 완성차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열망이 크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노동조건의 후퇴를 막기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대신 임금을 일정부분 삭감하여 주간연속2교대제를 수용할 것이 예상된다. 애초에 원칙으로 제기되었던 3무원칙(임금삭감, 노동시간 연장, 노동강도 강화 없는 주간연속2교대제)은 이미 교섭의제에서 사라진지 오래이다.

문제는 유성기업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부품사에서 주간연속2교대제는 노조탄압과 구조조정의 빌미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완성차 정규직노동자들을 제외한 자동차산업의 여타노동자들에게 주간연속2교대제는 구조조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특히 주간연속2교대제가 시행될 경우 완성차 대공장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은 대규모 해고와 노동조건 하락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노신은 2008년 발간한 잡지 <사회주의노동자>에서 「야간노동철폐를 위한 우리의 요구」라는 기사를 통해 당시 진행되던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주간연속2교대제 쟁취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열망인 “야간노동 철폐, 구조조정 분쇄, 생활임금 쟁취, 노동유연화 분쇄”를 걸고 전체 노동자의 투쟁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글이 나온지 3년이 지나 그 사이 상황도 변하고 글 속에 제시된 우리의 인식 역시 일부 변화했지만, 주간연속2교대제에서 완성차 노동자만의 요구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기본으로 가져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하여 [The FocuS]에 다시 게재한다. [편집자주]


현대자동차지부는 2005년 단체교섭을 통해 2009년 1월1일부터 주간연속2교대제를 실시하기로 사측과 합의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금속노조는 이 시기를 활용하여 자동차 산업 전체로 주간연속2교대를 정착시키고 노동시간 단축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2008년 중앙협약에 ‘노동시간 단축과 교대제 개선에 대한 항’을 제출하고 6대 요구안 중 하나로 상정하여 집중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가 완성차 대공장노조의 이해를 넘어 전체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의 이해를 담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 글에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전체노동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제시해 보고자 한다.


주간연속2교대제의 현재 논의 내용

주간연속2교대제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일부 부품사에서 2009년 1월1일부터 시행에 합의를 하였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의 여파가 해당 단사뿐만 아니라 관련 하청업체나 동종업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금속노조 전반의 문제로 가져가야 할 사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에서의 노사 논의에 기반하고 있어 논의 자체가 현대자동차지부의 논의 과정에 좌우되고 있으며 자동차, 그 중 대공장에 한해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기에 여기서는 현대자동차에서의 논의를 중심으로 주간연속2교대제의 논의 진행 상황을 살펴보도록 한다.

현대자동차지부는 기업별노조였던 2005년 단체교섭을 통해 09년 1월1일부터 주간연속2교대제 도입에 합의했다. 현대자동차지부는 2005년 단체교섭을 앞두고 2004년 주야맞교대 근무로 인한 건강장해 실태조사를 통해 주야맞교대근무가 건강상 미치는 악영향으로부터 주간연속2교대제 도입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생활임금을 확보 받지 못하고, 노동조건을 개악시키는 현행 시급제의 월급제로의 전환문제 역시 처음 제기되었다.

금속노조에서 연구한 결과를 보더라도 주간연속2교대로의 전환의 주된 이유로 장시간 노동에 따른 건강장해, 중대재해, 사망사고의 빈번 등이 꼽히고 있다. 하지만 보다 실제적인 이유는 조합원들의 고령화에 대한 대비와 자동차산업의 과잉경쟁, 해외공장 증설에 따른 고용불안에 따른 물량 확보와 임금보전에 있다. 생산 물량의 축소에 따른 고용 불안과 임금 삭감이라는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장기적으로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금속노조는 2008년 주간연속2교대제 대응과 관련하여 “▲노동시간 연장 없는 주간연속 2교대제 ▲임금삭감 없는 주간연속2교대제 ▲노동강도 강화 없는 주간연속 2교대제 ▲완성사와 부품사를 포함한 금속노동자 전체의 교대제 변경 ▲주간연속 2교대 실현의 중심과제는 실노동시간 축소다” 등을 대응원칙 및 정책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금속노조에서 내걸고 현대자동차지부 또한 3가지 원칙으로 동감하고 있고 그 방향 하에 추진되고 있는 주간연속2교대제가 이러한 희망을 안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주간연속2교대제, 노동자에게 희망을 안겨줄 것인가?
 

1) 과거 노동시간 단축 경험과 해외 교대제 전환 사례로부터의 교훈, 견지해야 될 자세

해외에서, 특히 유럽에서의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된 협약이 체결된 시기를 보면 자본이 신자유주의 흐름, 유연성의 강화를 도입했던 시기와 맞물리며, 대부분의 노조에서 신자유주의 흐름에 맞서기 위한 전략적 대안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제기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모든 협약이 노동시간단축과 유연화의 교환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시간 단축은 독일의 경우에서처럼 노조가 형상을 통해 타협점을 찾는 방식을 취할 때 그 당시 경제여건에 따라 크게 좌우되며 노동자에게 절대선(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노조는 노동시간을 단축시켰으나 임금인상 자제, 유연화 확대적용 등을 수용하면서 노동시간단축이 목표로 하는 고용유지나 창출의 여력을 축소시키고 임금감축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기업비용의 증가를 상쇄시켜 자본은 어떠한 손해 없이 유연성을 강화를 관철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명목상의 임금은 삭감되지 않았으나 협상임금 인상을 자제하거나 임금협약을 3년 단위로 계약하게 되었고 예상했던 것보다 실제 물가상승률이 높아지면서 실질임금이 삭감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또한 유연화의 확대적용(탄력적노동시간제의 기간 확대)으로 시간외 노동 할증임금 부분이 줄어드는 등 실질소득이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했다.

교대제 변화 과정 또한 노동시간 단축과 맞물리는 것으로 유사한 결과를 낳았다. 90년대 후반 유럽과 일본의 교대제 변화 과정을 보면, 협약노동시간이 단축되는 과정에서 자동차 회사들이 추가적인 설비 투자를 하기보다는 기존 설비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가동시간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교대제 변경을 꾀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주간 2교대제가 생산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3교대제의 도입 추세가 강하게 나타났으며, 98년 현재 유럽에서 자동차 생산량의 절반 정도는 3교대제 공장에서 생산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또한 회사의 입장에서는 추가비용부담을 적게 가져가면서 생산량을 확보하려 하기 때문에 잔업과 특근을 선호한다. 협약노동시간이 줄더라도 가동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확대하는 것은 회사측으로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가동시간의 증가에 따른 비용대비 이익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주간2교대제에서 순환/고정3교대제로 전환한 공장의 경우 대부분 근무형태의 변경이 인원충원과 함께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의 경우 24시간 풀가동하고 있는 조립공장이 그리 많지 않다. 이 보다는 주말 노동을 위해 주말 노동자를 정해진 기간 동안만 계약하거나 대행업체를 통해 고용했다. 일본의 경우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필요 인력을 정규직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드는 비정규직을 투입하여 해소하거나 휴일 근무의 경우 할증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법정외 휴일인 토요일을 활용했다.

또한 회사는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물량생산의 필요에 따라 초과 노동에 따른 금전보상을 하지 않고 생산을 할 수 있는 노동시간계좌제도를 도입하였다. 일본에서는 연차휴가소진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도요타의 경우 2003년 전사적으로 연차휴가소진운동을 벌였고 혼다의 경우엔 휴가를 사용하지 않는 조합원이 있으면 그 사유를 확인하며 대체사용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독일의 노동시간계좌제도와는 다르지만 노동시간 단축과 회사의 비용절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한 전략이다.

해외의 노동시간 단축과 교대제 사례에서 노동시간단축과 유연화 사이의 상관관계를 인식해야 한다. 노동시간이 짧은 곳일수록 교대제가 다양하고 교대제 시스템에 유연성 요소를 포함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즉 노동시간의 단축과 노동시간의 유연성은 서로 관련이 없는 개별적인 흐름이 아니라, 회사와 노동자들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 서로의 요구를 맞교환한 것이다. 결국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을 얻었지만 반대로 자본의 입장에서는 유연화의 실현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2005년 주간연속2교대제에 현대자본이 합의를 하고 2006년 월급제로의 전환을 전제한 것은 자본의 이해가 결합하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령화로 인한 장시간 노동의 비효율성과 생산의 유연화의 필요, 전환배치나 탄력적노동시간제 적용 등의 유연성의 강화 등 자본 스스로 원하는 지점이 있기에 합의에 이르렀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교섭석상에서 유연성의 확대와 연계되는 노동시간 단축 논의는 노동자에게 득보다는 장기적으로 실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우려지점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2) 노사간 협상으로 가져가는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의 우려지점

주간연속2교대제를 이야기하며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장시간 노동 문제 해결과 심야노동에 대한 근절이다. 실제로 2교대를 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심야노동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야간노동 철폐 문제는 현실적으로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노동시간 단축의 문제는 자본의 입장에선 생산량 감소 문제와 연동된다. 또한 생산량 감소는 임금감소와 연동된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생산량이 감소되고 생산량의 감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단위 노동시간동안 생산되는 물량을 증가시키는 것, 노동강도 강화를 통해 유지하고 이를 통해 임금을 유지시켜주는 논리를 펼 것이다. 실제로 현대자동차 자본은 노동시간의 단계적 감축과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UPH 상승과 자유로운 배치전환 등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노동자의 대응은 임금의 문제와 물량의 문제, 고용과 물량의 문제의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임금이라는 것은 물량에 따라 책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활에 필요한 수준을 기준으로 자본과 노동자간의 힘 관계에서 책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물량이 부족한 부분은 생산설비를 증가시키고인원을 증가시키는 것을 통해 문제 해결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원칙적 입장에서 후퇴하게 된다면 금속노조가 추진하는 주간연속2교대제의 경우도 유럽의 경우처럼 노동시간은 부분 축소시킬지라도 야간노동이 일정 유지되고, 노동자들의 휴게시간은 축소되며, 노동 강도는 강화되고 유연화 정책은 도입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과잉 경쟁과 미국발 경기침체의 국면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요구와 그에 따른 근무형태의 전반적 변화 과정은 사회연대전략이 보편적 방향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현실에서 노동자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출처 : 미디어 충청

3) 주간연속2교대제 추진 과정에서의 문제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과 일부 부품사에 한정된 요구이다.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로 받아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논의나 준비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완성차 공장에서의 교대제 변경에 사내외 협력업체들의 경우 직·간접적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완성차와 관련된 협력업체들의 문제까지 종합적으로 사고되고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일부 완성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관철하는 과정에서 사내외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희생이 뒤따를 수도 있다.

현재 현대자동차를 보면 1차 부품협력업체가 대략 440개로 파악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교대제가 변경될 경우 직서열 업체냐 아니냐에 따라 효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우선 생산의 동기화가 필수적인 직서열 업체의 경우 완성차와 근무형태를 동일하게 변경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해당되는 업체는 부품업체 전체의 5% 정도로 완성차에서 주간연속2교대제를 실시할 때 이를 동일하게 적용받을 사업장은 미비하다. 나머지 부품업체들의 경우 완성차에서의 근무제 변경에 맞춰 자신들이 근무형태를 굳이 변경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근무형태 변경에 따른 물량감소부분이 부품업체 노동자들에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금속노련이 조사한 부품사 실태를 보면 부품업체들이 납품거래의 다양화에도 불구하고 실제 최대 납품처는 대부분 완성차그룹업체 혹은 자기사업장 관계사-계열사 등에 한정되어 있고 최대 납품처에 대한 거래의존도가 매우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즉 외관상 납품거래의 다변화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특정 기업(그룹)의 전속도가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이러한 높은 전속도는 기업의 매출과 수익을 제약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부품업체들이 매출액의 상당부분을 완성차에 의존하고 있고 전속성이 심하기 때문에 완성차 주간연속2교대제는 경영상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특히 물량이 감소할 경우 매출액은 감소하는 반면 인건비는 증대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악화될 수 있다. 생존을 위해 생산성을 향상시키려 해도 추가투자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일정한 한계에 봉착할 수도 있다. 특히 현대차 계열사가 아닌 독립적 부품업체의 경우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대제 소요 비용을 CR 등을 통해 부품사들에 전가할 것이라는 우려 또한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다시 비용 절감을 위한 생산의 해외이전, 구조조정과 외주화, 비정규직화를 본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 하에 임금축소와 노동 강도 강화를 거부하기는 더욱 힘든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물량의 축소는 제한된 물량을 둘러싼 부품사간의 경쟁심화를 낳을 가능성이 있어 그 과정에서 개별 부품사들의 도산과 인수합병 등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부품업계 전반의 구조조정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이 또한 현대자본이 원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현재(이 글이 쓰여진 2008년 당시) 현대자동차지부에서 울산과 경주지역 부품사들과 간담회를 진행한 바 있다. 구체적 내용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현대자동차지부와 금속노조에서 언급했던 정도의 약속 정도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1500여개의 부품업체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이로 인한 20여만 명의 부품업체 노동자들의 고용과 전망을 염두에 두고, 완성차 노조로서의 역할과 대안 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는 약속으로 대공장 노동자들의 이해를 위해 부품사, 사내외 하청노동자들의 향후 노동조건의 문제를 좌우할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이 문제는 관련된 주체들의 논의를 통해 공동의 요구안을 형성하고 이를 관철시킬 집단의 계획과 투쟁의 준비를 통해 관철시켜야 한다.

또한 현대자동차지부는 조합원들에게 주간연속2교대제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공개하고 지부의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현재 현장제조직에서는 노사전문위에서 다뤄진 내용이 전혀 공개되지 않고 현장에 배포된 설문조사 내용이 사측의 안에 노동조합 주체인 노동자의 의식을 오히려 유도하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현장에 배포된 설문조사 내용의 의도가 결국 사측의 안에 대한 노동조합의 수용 또는 절충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며, 이를 기초로 주간연속 2교대 실시의 연기나 책임을 현장으로 돌리려 하는 것에 다름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리고 4월 15일 현대자동차지부 정책기획실에서 연 주간연속2교대제 관련 대토론회에서도 “2대 지부가 전문위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조합원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있다”며 공개 비판했다.

주간연속2교대제는 노동자들의 이후 노동조건의 전반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으로 반드시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현재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단체들이 ‘올바른 주간연속2교대제로의 전환’이라며 이런저런 방향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주간연속2교대제로의 전환 그 자체가 투쟁의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주간연속2교대제는 야간노동 철폐라는 요구로부터 대안으로 제시된 근무형태일 뿐이며, 자동차산업 전체를 볼 때 완성차 정규직을 비롯한 일부의 요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가시적 성과를 위해 현실의 투쟁 요구들을 후퇴시키는 협의가 이뤄져서는 안 된다.


 

출처 : 미디어 충청


전체 노동자의 이해로 가져가기 위한 우리의 요구


주간연속2교대제는 수세적 국면에서 정리해고 중심의 구조조정에 피하기 위해 제출하고 있는 요구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공장 정규직의 이해로 제한되고 있는 부분들은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는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 국면에서 노동계급은 다음과 같은 핵심 요구를 가지고 완성차에 제한되지 않는 전체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야간노동 철폐, 생활임금쟁취, 구조조정 저지! 노동유연화 분쇄!
 

1) 전체 노동자의 야간노동 철폐

야간노동철폐는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열망이다. 2003년 현대자동차노조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66.6%의 노동자들이 10년 이상 주야맞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장시간 반복된 주야맞교대 근무는 심각한 수면장해를 일으키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하루 수면시간은 주간근무시 6~7시간이 46.5%로 가장 많았고 야간근무시에는 5~6시간이 26.2%로 가장 많았다. 응답자의 52.2%가 8시간 이상이 필요한 수면시간으로 응답하였으나 실제로 8시간 이상을 자고 있는 노동자들은 주간 근무시 9.1%, 야간근무시 4.8%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질수록 수면길이가 짧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야맞교대 근무를 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전체적으로 수면길이가 짧아지면서 잠을 깨는 현상이 주간근무시에도 나타나 전체적으로 수면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자다 깬 횟수가 1회 이상인 경우가 주간근무시 58%, 야간근무시 79%였고, 야간근무시 38.8% 노동자들이 3회 이상 자다 깨는 것으로 나타나 야간근무시 더 자주 깸으로써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계속 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작업시작시와 작업종료시의 각성도와 심한 졸리움(각성도 7-9)에 대한 결과를 보면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작업시작시 상시주간 근무자의 5.2%만 ‘심한 졸리움’상태라고 했는데, 야간근무자의 경우 22.8%가 ‘심한 졸리움 상태’라고 응답하였다. 작업종료시엔 더 많이 차이가 났는데 상시주간 근무자의 26.9%가 ‘심한 졸리움’을 호소하는 반면 야간근무자는 81.1%가 ‘심한 졸리움’을 호소했다. 그리고 야간근무시 야식시간 이후인 02시부터 피곤한 정도가 점점 증가하여 마지막 타임인 06시부터 08시가 가장 피로도가 높은 시간대로 나왔다. 결국 야간근무자는 심한 졸리움의 상태로 일을 시작하거나 종료하고 있으며 일을 하는 과정에서 피로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체중감소를 제외하고도 상시주간 근무자와 주야맞교대 근무자의 질병유병률의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주야맞교대 근무로 인한 질병 양상 조사에서 위장장해가 51.7%, 심혈관계 질환이 15%, 정신장해가 37.1%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나이가 많아질수록 유병률이 높아지고 있어, 나이가 많아질수록 근속년수가 높아지고 야간노동을 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위장장해, 심혈관계 질환, 정신장해 유병률이 높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노동자들은 장기적인 야간노동에 노출되면서 이로 인한 건강장해들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간노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ILO(국제노동기구)는 40세가 넘는 노동자는 야간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고 독일 수면의학회는 주야맞교대 하는 노동자의 평균수명이 13년 이상 짧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야간노동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모색들이 이뤄지고 있다. 야간노동 금지 문제는 전체 노동자들의 건강한 삶과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이뤄져야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야간노동 철폐의 문제는 한 사업장의 문제 해결로 이뤄질 수 없고 전체 노동자들의 대안을 형성해야 하며 이와 연동된 임금이나 노동 강도 등의 문제들과 함께 종합적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하기에 다음의 두 가지 요구를 함께 외치는 것이 필요하다.
 

2) 법정노동시간에 준한 생활임금 쟁취!

2004년 7월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었지만 실제로 지켜지는 직장은 많지 않다. 노동시간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남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여전히 길다. OECD(경제개발협력기구)자료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남한 노동자들의 연간노동시간은 2354시간으로 비교 대상 나라들 가운데 가장 길었다. 우리나라 제조업 노동시간은 2005년 주당 46.9시간으로 ILO(국제노동기구) 회원국 65개국 가운데 59위로 나타났다. 금속노조 자료에 따르면 금속노조 조합원의 주당 노동시간은 54.17시간, 주당 노동일수는 5.48일로 나타났다. 이 중 주 6일 이상 일하는 노동자가 42%, 주 7일 일하는 노동자도 9%나 됐다.

주5일제가 법적으로 도입되고 확대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이렇게 긴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현대자동차지부에서의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93.7%의 조합원들이 초과노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초과노동 없이는 생활이 힘들어서 미래의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라고 답변했고 79.8%의 노동자들이 생활임금 확보 시 초과노동 여부를 묻는 질문에 “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했다. 40시간 노동제가 법적으로 도입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생활임금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장시간 노동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인해 실제적 노동시간이 줄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귀족노동자라고 하는 현대자동차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19년차 시급이 5322원이다. 40시간 노동을 했을 때 1533만원이 된다. 여기에 상여금이 1011만원, 복지수당이 18만원이고 근속수당이 108만원, 기타 가족수당과 장려금, 휴가비 등이 연간 232만 원 정도 추가된다. 이를 모두 더해도 통상 연봉은 2901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보수·경제지들이 비난하는 귀족노조에 걸맞은 임금을 받으려면 살인적인 잔업과 특근을 해야 한다. 19년차의 경우 잔업 시급이 5322원의 150%, 7983원이 된다. 10시 이후와 휴일에는 야간근로수당 100%를 가산, 시급이 1만 644원이 된다.(참고) 생활임금 확보를 위해 잔업과 특근에 목매는 것이다.

임금 노동자들의 경우 생활임금이 쟁취되지 않는 속에서는 자본이 요구하는 장기간의 노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전체 노동자들의 생활임금이 쟁취될 때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또한 근절될 수 있을 것이다.

3) 구조조정 저지! 노동유연화 저지!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 속에서의 자본의 노림수는 명확하다. 이미 현대자동차 자본은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노조는 “제도변경에 따른 근로시간 감축 분은 회사측이 설비투자를 늘리거나 인력충원을 통해 이뤄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자본은 “주간연속2교대를 시행하면 종전대비 1인당 3~4시간 정도 라인 가동시간이 감소하는데 그만큼 임금감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또한 물량을 보전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9+8, 9+9의 단계적 도입과 오전, 오후반 사이의 잔업시간 확보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UPH UP, 편성효율 증대, 가동률 향상, 차종투입 및 생산일정과 수요에 따른 물량조정, 원가절감, 전환 배치 자유화, 능력에 따른 직무직능급 등등을 제기하고 있다.

주간연속2교대제로의 전환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측은 물량을 볼모로 수많은 요구들을 들이밀고 있다. 하지만 이는 회사측의 논리와 사정일 뿐이다. 자본은 지금까지 최소한의 비용으로 생산량을 늘리는 최선의 대안으로 교대제를 선택했고, 이미 현대자동차 등은 고용인원을 늘리기보다는 노동시간과 노동 강도를 늘리는 것을 통해, 비정규직의 사용을 확대하는 것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해 왔다. 이런 손쉬운 방법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완성차 대공장의 주간연속2교제 시행은 자연스럽게 부품사의 구조조정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완성차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보장을 위해 이러한 부품사 노동자들의 이해가 희생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노동유연화 기제들은 대규모의 구조조정과는 달리 현재의 고용을 보장하기 때문에 노조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고 위기를 넘기려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그리고 몇몇 노조들은 이미 이러한 부분들을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유연화의 수용은 현장에서 그나마 가지고 있는 노동자의 권력을 자본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즘 완성차4사 노조들에서 수용하고 있는 전환배치는 단기적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를 불러오고 있지만 이것으로 감당되지 않을 때, 그 다음 수순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이다. 이러한 전환배치 자유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생사여탈권을 자본에게 쥐어주는 꼴이다. 그리고 UPH UP이나 편성효율 증대 등도 인간능력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는 자동화나 노동시간의 증대를 불러올 것이다.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 과정 속에서 요구하는 자본의 유연화 요구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 구조조정을 저지하기 위해 지금부터 자본의 공격에 날을 세우고 맞서야 한다. 더 이상 현장의 권력을 자본에게 이양해서는 안 된다.
 


[보론] 완성차의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가
부품사와 부품사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금속노조에서 내놓은 자료에 의하면, 2005년 자동차 산업 관련 직간접적인 고용인원은 총 152만 7천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자동차 생산에 직접 관련 있는 완성차 제조에 종사하는 종사자수는 약 10만 6천여 명, 자동차부품 제조에 종사하고 있는 종사자 수는 약 15만 4천여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완성차 제조에 종사하는 노동자보다 1.5배나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완성차 자본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를 전후로 한 자동차산업의 급격한 구조재편에 따라 국내 생산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수요독점적 지위가 강화되면서,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계열사들이 부품산업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새로운 분업 체계, 즉 수직적 계열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현대차는 독립적인 부품기업을 인수하거나 핵심부품을 인수합병하거나 핵심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을 신규설립하고 난 후, 발주물량의 몰아주기와 높은 단가설정을 통해 계열사들의 급성장을 촉진시켰다. 또한 동일부품을 계열회사에도 발주함으로써 독립 업체를 불공정한 경쟁관계에 놓이게 할뿐만 아니라 부당한 단가인하 압력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도록 만들고 있다.

자동차생산방식이 모듈화와 시스템화로 발전하고 있기에 종합모듈업체로서 현대모비스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모듈화와 시스템화를 주도하는 1차 핵심부품업체가 완성차업체의 계열사로 대체되고 있으며 기존의 중소규모 1차 부품업체는 2·3차 부품업체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현대자동차의 계열사 여부와 관계없이 단가인하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부품업체 간 경쟁을 유발하기 위해 동일부품의 경우 계열사에게도 단가인하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계열사의 수익성 보장을 위해 내부거래 등의 방식으로 영업이익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써 장기적으로 중소협력업체들이 부품전문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재벌계열사의 하청업체로 전락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것은 외환위기 전후로 완성차업체의 매출이익은 상승하고 있는 반면, 부품기업은 하락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완성차업체의 매출이익은 매출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조원가의 인하, 즉 부품업체들에 대한 납품단가 인하 압박이 작용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납품단가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부품업체들의 경우 매출이익률이 하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부품업체들은 완성차에 대한 전속성이 심하기에 원청업체에 항의하기 보다는 자신의 하청업체인 영세 2·3차 부품업체에 그 부담을 전가하거나노동자들의 임금 및 각종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게다가 정기적 단가인하 외에 원청의 경영상 사정악화를 빌미로 부정기적으로 임의적 단가인하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행은 주간연속2교대제 실시로부터 오는 원청업체의 손실을 고스란히 부품사에 전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부품사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 내지 노동강도 강화, 고용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

부품사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완성차 사내하청노동자들에게 미칠 영향 또한 클 것이다. 논의 초기 식당 노동자들의 경우 심야 노동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며 주간연속2교대제가 불가능한 업무의 경우 상시야간조 구성이 이야기되었다. 공장 별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메인라인에 투입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경우 비정규직만으로 상시야간조 형성이 가능한 구조이다. 현재도 비정규직만으로 특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규직노동자들의 심야노동 철폐를 위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상시야간조 구성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정규직노조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남아 있는 문제는 많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월급체계를 정규직과 같은 조건의 월급제로 변경하지 않을 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식당노동자들의 경우 심야노동의 불가피함이 이야기되면서 3교대 방안도 나오는데 이와 관련하여 인원과 노동강도 문제 등이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식당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후퇴할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고용이나 근무형태, 출퇴근 문제 등에 미칠 영향은 큰데 1사1조직을 추진하는 완성차 정규직노조의 요구안에는 이러한 내용이 제외되어 있어 완성차 논의 결과에 따른 후속조치들에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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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Focus]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이 시작됐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6/24 17:34
  • 수정일
    2011/06/24 17:3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85크레인과 희망버스가 만나 만들어낸 특이하고 특별한 연대
 


[편집자주]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성웅 (현중사내하청지회 부지회장)
 

 

 

출처 : 울산노동뉴스


미친등록금과 85크레인과 박종길 열사의 절규는 평면 위에 하나로 연결된 사건이자 현시기 계급투쟁의 낡은 것과 생성되고 있는 것의 대립과 투쟁을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정세지도이기도 하다.

한쪽에서는 박종길 열사의 절규를 서둘러 매장하고 산업평화를 선언하는 노동조합관료제의 공고함과 반동성이 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식물성 투쟁의지”로 요약되는 진정성이 있는 다양한 사람들, 조직노동자들과 미조직노동자들의 협력과 직접행동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다.

“해방구에서 느낄 수 있는 감격을 맛봤다”, “그렇다 우리는 아름다운 불법이다”, “사람들이 담을 넘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기죽었던 조합원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 “오늘 투쟁의 역동성을 봤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어울리면서 기쁨을 만끽하고 승리의 환희를 느꼈다”, “진정성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해방공간을 만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이런 세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진조합원들은 가슴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듯 감정이 북받쳤다”, “오늘 85크레인 아래에서의 시공간은 운동의 진정성이 만들어낸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가장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이 한 이야기들이다.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 슬프고 그 끝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탄압의 늪지를 통과하고 있는 동지들이 “해방구에서 느낄 수 있는 감격을 맛봤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원하고 있는 세상”이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확실히 85크레인과 희망버스가 만나 만들어낸 특이하고 특별한 연대는 하나의 사건이었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개화를 예고하고 있다.

 

고립된 섬에서의 구조신호


희망버스의 출발지는 한진중공업 85크레인이었다. “폐절된 공간에서 퇴화를 지연시키는 유일한 도구가 트위터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스마트폰을 붙잡고 나는 세상을 향해 맹렬히 구조신호를 보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난파선의 필사적인 깃발을 용케 알아본 사람이 김여진”이었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였다.

이 땅의 모든 생산지가 내전상태이고 모두가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답답할 정도로, 목숨을 통해 호소해도 연대는 잘 조직되지 않고 노동조합관료제는 현장의 체념과 절망을 토대로 공고화되고 있다.

한진중공업도 마찬가지다. 한진중공업지회는 “쌍용차 꼴 나서는 안된다”는 두려움 앞에 “여론을 잡아야 한다”는 기조 하에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비판과 토론을 억압했다. “분열주의자들을 엄단하겠다”는 쟁대위 지침은 평조합원들의 말문을 막았고 그들을 동원대상, 지침에 단순히 따르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켰다. 지도부의 투쟁의지를 보지 못했던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으로 공장을 떠나가고 살아남은 조합원들도 농성장을 떠나갔다. 떠나는 조합원들의 뒷모습을 훤히 내려다봤던 김진숙 동지의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

고립된 섬, 85크레인 위에서 김진숙 동지는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하고 차갑고 딱딱한 그 강철 위에서 텃밭을 만들고 상추와 치커리와 방울토마토와 딸기의 씨를 뿌렸다. 전망을 찾지 못하고 떠나는 조합원들의 처진 어깨를 보며 눈물 흘리고 그 눈물을 거름 삼아 식물들을 키웠다. 그녀는 종파적인 심리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고 상처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위계 없이 어깨 걸고 자라는 어린뿌리들의 합창에 보폭을 맞췄다. 규정하고 단죄하고 처내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실천을 통해 대화를 생산하고 마음을 두드려 움직이게 하고 반대자들의 칼끝조차 품어 적대를 누그러뜨렸다. 심지어 김진숙 동지는 고립된 섬에서 분열주의자라고 참주선동하는 지회 지도부를 향해 수확한 치커리와 방울토마토와 딸기를 내려보냈다. 김진숙 동지는 비난과 참주선동에 대해 식물성 투쟁의지로 화답했다.

내전의 한복판에서 김진숙 동지가 보낸 구조신호는 새로운 언어였다. 내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소박한 것이었고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필수적인 광합성 작용, 식물성 언어였다. 비난과 분열, 절망과 체념을 넉넉하게 품었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자극하는 따뜻한 언어였다.

“어 내가 보고 싶은 분, 거기 괜찮은가요?” 그렇게 김여진과 첫 접선이 이뤄졌고 희망버스가 기획되기 시작했다.

 

 

츨처 : 울산노동뉴스


진정성이 있는 사람들, 조직노동자와 미조직노동자들의 만남

희망버스는 비정규직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면 누구나 모이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에서 처음 발의됐고 기륭전자, 용산, 쌍용차 투쟁에 함께 했던 문학가, 미술가, 음악가, 판화가들이 결합하고 김진숙을 사랑한 노동자들이 참여함으로써 추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송경동 시인이 ‘희망의 버스’를 타고 가자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고 배우 김여진과 홍세화, 문정현 신부가 함께 가자고 제안하면서 참가자들은 처음 서너대에서 17대의 버스로 늘어나게 됐다.

이 버스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자, 주부, 시인, 소설가, 화가, 판화가, 노령의 운동가, 교수, 전교조 선생님, 작은책 글쓰기 모임 회원들, 날라리 외부세력, 학생, 인터넷 보고 무작정 온 직장인, 영화작가, 고등학생, 대학생, 전문MC, 사진작가, 무엇보다도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탔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한 몸이 됐다.

날라리 외부세력은 말한다 “날라리들은 놀러 갑니다. 심각한 곳도 일단 놀면서 분위기를 살리고 놀면서 진숙 누님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그녀를 지켜주고 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 자기들의 방식대로 마음을 담아 연대를 조직한 것이다. 진숙누님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은 정부와 자본의 무장한 사병들의 폭력을 통과하는 전투 자체였다. 그 전투를 그토록 즐겁게 해치울 수 있다니!

“진정성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은 10%에 속해 있는 조직노동자들이거나 10% 밖에 존재하는 90%의 미조직 노동자들이거나 노동자들의 자식들이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들은 투쟁을 조직하고 확대하기 이전에 먼저 자본의 지불능력을 고려하거나 국회의석 자리를 먼저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오늘도 자본으로부터 억압받고 탄압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분노보다 눈물에 더 익숙하고 소심함에 더욱 가까워서 김진숙 동지처럼 고공농성을 할 자신도 없고 투사가 될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약점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제도화되지 않는 실천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투쟁해왔고 지금도 투쟁하고 있으며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전통을 사수하고 있는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들과 가장 빠르게 손을 잡았다. 참 잘 어울리는 커플들이다.

진정성이 있는 이 다양한 사람들은 민주노총, 혹은 개량정당에 조직당하는 객체가 아니라 새로운 소통 수단을 통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눈물로 빚어진 따뜻한 연대에 참가하고 그 힘으로 무장한 공권력이 생산하는 두려움을 너끈하게 뛰어넘은 사람들이며 85크레인 그 죽음의 시공간에서 집단적인 놀이와 율동을 통해 살림의 시간을 생산해내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다.


적당한 타협과 뒷거래를 뛰어넘는 직접행동과 집회민주주의


희망버스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경찰은 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어왔다. 촛불행진을 불허하고 전원연행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를 통해 행진하는 것은 어떠냐고 회유책을 제안했지만 경찰과 타협할 책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희망버스는 평면 위의 협력이었지 위계를 갖는 수직적 구조가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책임자였다.

정문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민주노총과 민주당, 민주노동당과 경찰은 국회의원들의 항의방문과 정문 앞 촛불문화제의 컨셉을 잡아놓은 상황이었다.

진정성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공장 앞에 도착하자 곧바로 사다리가 내려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촛불을 들고 공장 담벼락을 넘기 시작했다. 칠순의 백기완 선생을 비롯해 10대의 고등학생까지 사다리를 타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허둥지둥 경찰들이 와 사다리를 빼앗으려 했지만 희망버스의 직접행동을 막지는 못했다.

한진중공업 박성호 조합원은 “공장 담을 타고 넘어오는 모습들을 보면서 한진 조합원들은 가슴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듯 감정이 북받쳤다. 기죽었던 조합원들이 그렇게 좋아했다”며 “쌍용차 이후에 공권력이 무서워 대응조차 못하고 비폭력 비무장 속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왔고 위축돼 있었다. 희망버스가 공장을 넘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조합원들은 ‘할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공장에 진입한 촛불은 무장한 용역들의 폭력을 집단적인 협력과 직접행동을 통해 몰아냈다. 이명박 정부와 한진자본은 공권력과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쌍용차의 뼈아픈 기억을 연출하려 했지만 “실천촛불”은 자본가들을 비웃듯 보란 듯이 ‘불법적인’ 직접행동을 통해 공장을 해방구로 만들었다.

공권력과 용역깡패들의 일상적인 폭력을 견디며 투쟁해왔던 재능, 현대차, GM대우, 대우조선,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들, 특히 “쌍용차 꼴 나서는 안된다”는 한진중공업지회 지도부의 통제와 억압에 짓눌려 있었던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해방구에서 느끼는 감격을 안겨주었다.
촛불의 직접행동에 통제선은 없었다. 김진숙을 만나겠다는 충만한 의지, 어떻게든 85크레인 아래로 가서 힘을 주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에겐 무장한 사병들의 폭력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원연행 방침도 그들을 동요시킬 수 없었다. 그들에겐 만남에 대한 설래임, 애뜻함, 열정이 있었고 자본에 대한 분노와 긴장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공동행동에 참가했고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졌다.

 

 

출처 : 울산노동뉴스


촛불의 직접행동은 공장 안에 집회민주주의를 도입했다. 희망버스를 막기 위한 컨테이너는 집회 연단이 됐다. 누구나 연단에 올라 발언할 수 있었고 대화를 생산해냈다. 집회에서의 자발적인 발언은 세대를 넘어, 성별을 넘어, 신분제도의 차이를 넘어 동지적인 일체감을 갖도록 했고 집단적인 협력이 만들어 낸 이 해방구를 사수하겠다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민주노총 집회는 누구도 허락 없이 연단에 올라갈 수 없다. 조합원들은 배제되고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 중앙의 방침은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전투적 행동은 통제된다. 뻔한 연사의 뻔한 이야기는 폴리스라인을 따라 배치된다. 긴장도, 열정도, 분노도 없다.

자본가계급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 선언이 이뤄지는 장소가 민주노총의 집회라면 촛불의 직접행동이 공장에 도입한 것은“계급투쟁”이었다. 바로 계급투쟁을 조직하는 노동자 대중운동의 방식이 집회민주주의, 노동자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공장과 사회가 만나 신분제도의 차이를 뛰어넘는 공동체를 구성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너무 오래동안 공장 안에 갇혀 있었다. 임금과 고용에 매달려 있었고 조합주의적 전망에 갇혀 꿈도 희망도 빼앗겨 버렸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당했다. 100만 촛불을 가로 막고 선 바리케이트가 바로 민주노총이었고 10%의 조직노동자 운동이었다.

그런데 산업평화(?)가 유지되던 공장에 느닷없이 침입자가 들어왔다.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하나의 비판처럼, 대안처럼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쌍용차의 어두운 그늘에서 비무장, 비폭력 무대응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노동자들이 무장을 하지 않고서도 오직 집단적 협력만으로도 무장한 사병들을 공장 밖으로 몰아냈다.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힘이 자신을 드러냈던 순간이었다.

이날은 세상과 담 쌓은 조합주의적 공장 담벼락이 무너진 날이다. 자본의 신분제도를 허용하고 오히려 이 신분제도로 자신을 둘러쌌던 부르주아의 성체, 노동조합관료제의 튼튼한 담벼락이 무너진 날이다.
공장 담벼락이 무너진 자리에는 공장과 사회가 만나 새로운 실천적 감각과 따뜻한 감성으로 무장한 공동체가 세워졌다. 자본가들이 도입한 신분제도의 다양한 위치에 속한 사람들이 그 차이 속에서도 먼저 손을 내밀고 따뜻한 웃음을 소통수단으로 교감하면서 즐거운 대화가 싹트고 집단적인 율동 속에서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건설했다.

공장과 사회가 만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만났다. 남성과 여성이 만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만나고 해고자와 현장노동자가 만나고 노동자와 학생이 만났다. 그들은 가장 깊은 어둠에서 여명까지, 여명에서 정오의 태양까지 발언하고 귀기울이고 노래하고 합창하며 손을 잡고 춤을 추며 하나가 됐다. 수직적 위계와 제도화된 차이와 비판을 억압하는 권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넘어서기 힘들다고 체념했던 자본의 신분제도는 믿지 못할 속도로, 그것도 한꺼번에 허물어져 내렸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 시작되고 있다
 

85크레인 고공농성은 비정규직 우선해고, 사실상의 정리해고인 희망퇴직을 허용하고 상층 밀실교섭과 직권조인으로 마무리하려 했던 한진중공업지회 지도부의 노사협조주의에 맞선 투쟁이었다. “분열주의자들은 엄단하겠다”는 한진중공업지회 쟁대위 방침, 비판과 토론을 억압하는 관료주의에 맞선 투쟁이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지회 지도부도, 금속노조도, 10%의 조직노동자운동은 85크레인의 호소를 배제하고 고립시켰다. 실천적인 계급투쟁을 조직하지 않는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오히려 생산지로부터의 계급투쟁을 통제하고 수습하고 해체하는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이미 부르주아 지배질서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자본의 유연화공세에 맞선 비타협적인 투쟁, 85크레인 고공농성의 호소에 대한 실천적인 화답이 희망버스였고 투쟁사업장 조직노동자들과 조직노동자운동 밖의 미조직노동자들이었다.
 

 

출처 : 울산노동뉴스

민주노총 사업계획 밖에서 공장으로 범람한 촛불의 “역습”은 노동조합관료제(관료화된 민주노총운동과 개량주의 진보정당운동의 결합)에 대한 실천적 비판이었다. 공장과 사회의 경계를 허물어 촛불이 공장에 도입한 것은 바로 노동자민주주의였고 대중파업 속에서 등장했던 민주노조운동의 유년기에 느꼈던 해방구에서의 기쁨과 감동을 표현하고 있었다. 계급투쟁이 해체되고 있는 공장에 계급투쟁을 도입한 것이다.

공장에 도입된 촛불은 무엇보다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분쇄투쟁의 주체적 힘을 회복하도록 자극했다.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은 더 이상 지도부의 지침에 무기력하게 따르는 수동화 된 개인이 아니었다. 지도부의 지침이 없이도 대화와 협력을 생산해내고 규율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직 촛불의 경험이 새로운 지도력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전진하지 못하고 있지만 노동자민주주의의 첫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진중공업에 도입된 촛불은 다른 사업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쌍용차 정문 앞에서 출근 투쟁을 하는 해고자들이 웃기 시작했다. 촛불에 함께 했던 그들, 소풍오듯이 왔다 가지 말고 이틀이고 한달이고 85크레인을 지키자고 호소했던 그들, 죽음을 견뎌낸 사람들의 웃음은 남다른 것이다.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있는 것들이 빚어낸 새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85크레인과 희망버스가 만나 만들어낸 특이하고 특별한 연대, 공장에 도입된 촛불은 부르주아 지배질서의 필수불가결한 구성부분인 노동조합관료제를 그 한 복판에서 파괴할 수 있는 발견된 무기이다. 촛불의 경험은 위계화된 수직적 질서에 맞서 마당처럼 평등한 동지적 관계를, 제도화된 차이에 맞서 수평적 협력을, 관료적 명령에 맞서 집단적 율동이 빚어내는 비판과 토론을 생산해냈다. 공장에 도입된 촛불은 반복되고 확대재생산과정을 거치며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돼야 한다. 촛불이 생산해낸 이 특이하고 특별한 연대야말로 관료화된 10%의 조직노동자운동을 대체하고 뛰어넘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며 이 운동의 거대한 출발이기 때문이다.

촛불은 아직 미약하다. 노동조합관료제를 넘어설 수 있는 전망과 조직적 힘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나 “조직되지 않은 무작위 대중들의 행동”이라고 그 한계를 지적하기 이전에 이들이 생산해내고 있는 혁명적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 운동으로부터 배우며 이 운동을 공장으로 도입해야 한다. 조합주의적 선동의 내용을 재구성하고 공장 담벼락을 허물어 사회적 이슈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도록 이끌고 이 이슈가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중적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공장에 도입된 촛불운동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갖출 수 있는 프로그램, 노동조합관료제를 역류하는 현장으로부터의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는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호소는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고 전체 계급의 공동행동을 조직하는 슬로건이었다.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양재동 노숙농성을 할 때 지나가는 한 늙은 청소노동자가 “당신들이 희망이다”고 지지했고 이 지지는 청소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으로 연결됐다. 바로 이것이다. 촛불을 공장으로 도입해 현장으로부터의 계급투쟁을 조직하고 이 계급투쟁은 촛불을 자극하고 촛불의 지지를 이끌며 촛불에 자극받은 미조직노동자들이 자신의 공장과 직장에서 단결과 투쟁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이 결합되는 우리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다.

비극의 정점에서 이미 이 땅의 다수자들은 새로운 감각과 감성적 연대의 공동체를 구성하며 전진하고 있다 이 걸음에 보폭을 맞추면서 다만 한 걸음 앞서서 있을 수도 있는 약점을 보안하고 운동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갖추게 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지금 혁명적 주체는 새롭게 구성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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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정치][기고] 사노위 실패와 잠정적 교훈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6/24 17:25
  • 수정일
    2011/06/24 17:26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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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궁원 (사노위 정치적 해산자 선언모임)

 

자본주의 위기와 시대정신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를 전복하고자 한다. 사회주의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환경, 계급투쟁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관망하는 태도로 활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 역사적 전개와 주요 국면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프롤레타리아 대중투쟁의 조건과 욕망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몇 해 전부터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위기(국가부도)와 유럽 · 북아프리카, 중국, 인도, 베트남 등지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 상황을 접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동 지역의 혁명적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 상황 전개 속에서, 사회주의자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혁명이란 단어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서구의 유명한 철학자 지젝이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영원히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계급투쟁에 능동적 개입과 ‘혁명적 행동에 나서는 레닌’1)을 우리에게 상기시킨 것은 의미심장하다. 더 나아가 지젝은, ‘다시 공산주의로’ 라는 슬로건으로 자신의 입장을 제출하고 있다.

지젝의 지적처럼, 지금 우리 사회주의자 앞에는, ‘다시 공산주의와 혁명적 행동’으로 표현되는 시대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바야흐로 “혁명이냐 자본의 재구성이냐”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순간이 우리를 행동하게끔 만들고 있다.2)

한편, 우리는 1980년대 이후로 형성된 한국의 민족민주세력과 진보세력의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사실은 자본주의 내 의회 좌파기구로 전락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진보정당- 산별노조 양 날개론). 최근 민족해방파와 구 피디(PD), 새 피디(PD)가 공유하고 있는 ‘통합진보정당론’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여전히 ‘비합법적 낭만주의’ 세력이, 단위사업장에만 갇혀 있는 ‘현장 만능주의’(전투적 조합주의)가 득세하고 있다.3)
 

사노위 출범과 강령, 조직 활동의 쟁점
 

이러한 자본주의 위기 정세와 한국 정치 지형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들은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노동자정당 추진위 건설을 위해 활동했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4) (이하 사노위)가 최종적으로 실패한 지금 시점에, 2009년 <사회주의혁명정당 건설 노동자공동정치투쟁단>, 1년간의 ‘사회주의당 건설 전면화를 위한 전국토론회’, 그리고 그 결실로 2010년 출범한 사노위 활동은 총괄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여기서는 사노위를 중심으로 1차 평가를 진행한다. 필자는 사노위 활동의 실패를 되돌아보는 것이 이후 사회주의 당 건설과 정치활동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 고 믿는다.

사노위는 11개 정치원칙5)을 정하고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추진위를 목표로 1년간의 공동정치활동과 ‘강령상의 통일’을 위해 활동한 사회주의자의 공동실천 조직이다. 이렇게 출발한 사노위의 출범 정신은, “공공연한 사회주의 운동과 당 건설추진위 운동” 전면화로 요약된다. 출범정신에 비추어 볼 때, 사노위 안에서 중요한 과제는 강령과 조직 활동 문제였다.

첫째, 사노위에서 필요한 것은 각각의 이질적인 세력(3주체와 개별 활동가)들이 그간 활동했던 사회주의 이론적 실천과 부문, 영역, 현장 투쟁 (주체) 경험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혁명주의 입장에 선 ‘총체적인 사회주의 강령 노선의 통일’이었다.

이러한 성과 위에서, 공공연한 사회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강령’과 가장 ‘구체적인 정치 투쟁’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1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강령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강조하건데, 강령은 단지 이론의 산물이 아니다. 강령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국제 노동자 계급투쟁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래서 ‘구 사회주의의 몰락’ 원인과 ‘현존하는 가짜 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태도와 입장을 밝히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은 당추진위가 추구할 건설할 사회주의 상이며, 사회주의 정치 선전 선동과 직결된다.

또 다른 측면은 현 시기 자본주의 위기를 둘러싼 시대 규정이다. 시대 규정은 정치조직의 전략과 전술을 규정한다. 필자는 현 자본주의 위기를 단순히 경기순환상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자본주의 체계 자체의 역사적 쇠퇴 경향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제기해야 한다고 본다.

사노위 의견그룹 (초기 5인 연서명) 안은 구소련 사회성격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는데 대체로 동의하며, 중국, 북한 등을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주의로 인식하고 노동자가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반면 3인 (구 사노준 경향)안은 구소련 사회를 “꼬뮤니즘 사회로의 이행에 실패한 국가”로, 중국, 북한 등을 자본주의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단지, 북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주체 형성을 지원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2인 (제4 인터내셔널) 안은 구소련 사회를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중국, 북한 등을 “기형적 노동자 국가”로 각각 규정한다.

특히 현 자본주의 위기와 관련한 정세 인식은, 의견그룹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경향”을 얘기한다면, 3인안은 “세계자본주의의 장기적-구조적 위기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사노위 안에서는 크게 봐서, 혁명주의에 입각한 의견그룹 강령 안과 유럽 코뮤니즘과 유사한 3인안 강령이 주요하게 대립했다.

 

 

 

둘째, 당 추진위 건설과 관련한 사노위 조직 활동 원칙과 운영 문제다. 중앙과 지역, 현장 분회 활동상을 어떻게 잡고 활동할 것인가가 초기에 중요했다. 특히 사노위 안에서 민주노총 현장조직파(?)인 노동전선과 어떻게 조직적 위상과 실천 관계를 맺고 활동할 것인가의 문제는 내부적으로 중요한 사항이었다.

사노위 일부 지역은 거의 노동전선 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사실상 사노위는 당 추진위 기초 조직으로 나가야 할 현장 분회 활동에 대한 자기 규정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사노위가 아무리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화, 대중화’를 소리 높여 내걸고 있음에도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뿐, 실제 각각의 일상 활동영역에서 회원들의 실천은 노동전선이나 단체, 부문운동의 한계 안에 안주하여 그 틀을 넘어서고 있지 못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노위 1차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가입원서 작성을 거부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앙에서 발행한 소책자 내용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한 서평 내용을 문제 삼아, 사노위 다수파가 조직사업을 ‘부정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직 내 ‘비판의 자유’마저 억압하는 행위이며, 서울지역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사회주의자통신>은 2호를 발간하고 종료됐다. 서평 글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 토론의 문제를 행정적인 방식으로 정리시키려고 하는 관료주의는 혁명정당 건설과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사노위 정치적 실패와 단일한 강령의 야합


조직 문제는 추상적인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집중적 표현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당 (혁명당) 추진위 건설 문제는 당면 혁명의 성격(강령)과 조직 활동 노선을 서로 분리하지 않고, 동시에 추구함을 뜻한다. 당 추진위 건설은 사상 · 이론과 실천 · 행동을 접목해야한다. 사노위는 1년간의 활동을 통해 강령과 조직 활동상의 최소한의 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출범 정신에 따라, 사노위 3차 총회는 조직적 해산을 결정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노위 (구사노준 경향이 다수인) 중앙위원회는 “3차 총회에서 강령초안이 채택되지 않을 경우, 차기 총회에서 강령초안을 유보 없이 채택한다.”고 결정하여 다수파 중심의 강령 안을 표결로 밀어붙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단일한 강령을 작성할 것을 전제로 강령기초위원을 선출한다”고 결정했다. 이미 단일안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낸 의견그룹 (5인안)의 강령기초위원들을 배제하고, 의견그룹 이탈 세력들을 새로 구성하는 강령기초위에 포함시켜 사실상 ‘밀실야합’으로 단일안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앙위원회의 결정이 사노위 3차 총회에서 기조로 결정된 것이다.


사노위 활동의 잠정적 교훈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과 실패에 대해,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분열주의자, 서클주의자”로 몰아가는 소위 ‘사노위 대동단결론’과 다른 하나는 “내가 조직 깨질 거라고 했잖아!” 하며 빈정대는 ‘정치적 냉소주의’다.

사노위 실패, 즉 ‘사노위를 통한 당 건설 투쟁’이 실패로 결말났다고 해서 애초 사노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식의 평가에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사노위 실패에도 불구하고 1년여 기간 동안 사노위를 통한 당 건설 투쟁의 잠정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점증하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맞서, 현장 계급투쟁에 대한 능동적 개입과 공공연한 사회주의 선전을 진행한 점이다.

둘째, 현 시기 남한 노동자계급운동 속에서 혁명정당 건설투쟁이 넘어야 할 강령적 과제와 토론, 조직 활동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셋째, 사회주의 (혁명)당 건설 운동을 전면화하는 데서 일정한 진전을 이루어냈다.

넷째, 사노위 강령· 조직 문제를 둘러싼 내부 투쟁에서, 구 서클적 질서와 해체를 통해, 명확한 정치적 지향과 강령적 사고 틀에 입각한 세력이 새롭게 결집됐다.

 

------------------- 각주

1)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원제: 문 앞에 다가온 혁명), 2008, 교양인)
2) 로렌 골드너,『역사적 순간이 우리를 만들고 있다』,
http://home.earthlink.net/~lrgoldner
3) 필자는 사회주의자가 “대중의 파업을 기술적으로 준비하고 지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체 운동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데에 있어야”한다는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의 일갈(一喝)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4) 사노위는 당 추진위 건설을 목표로 3개 조직 (사노준, 사노련 일부, 노투련)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추구하는 개별 활동가들 모여 출범했다.
5) 사노위 정치원칙은 △ 사회주의혁명정당 건설 △ 노동자국제주의 △ 노동자권력(대체권력) 수립 △ 사회주의 현장분회 건설 △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관점에서 여성, 소수자, 생태문제 포괄 등 11개 항목의 정치원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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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경제]자본은 대형투자은행을 원한다_ 메가뱅크 해프닝이 보여주는 남한자본의 금융정책

  • 분류
    경제
  • 등록일
    2011/06/24 17:02
  • 수정일
    2011/06/24 17:2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14일 금융위원회는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산은지주가 우리금융 입찰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지난달 17일 우리금융그룹 민영화 계획 발표 이후 한 달 동안 벌어진 메가뱅크 논란이 끝을 맺었다.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MB맨 강만수를 위해 관련 법령 개정까지 시도하며 우리금융그룹을 산은금융지주에 넘기려던 정부의 시도는 이렇게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다.

 

정말 모두 메가뱅크에 반대하는가

 

지난 3월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이명박의 최측근인 강만수를 삼고초려까지 해가며 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 모셔 왔다. 이명박 정부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는 대표적인 메가뱅크론자로 2008년에 우리은행과 산업은행, 기업은행을 합병하는 계획을 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되자마자 이번에는 우리금융그룹 인수에 욕심을 냈다.
강만수의 메가뱅크 만들기 시도에 노조와 학계는 물론 언론과 정치권까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금융기관 대형화가 가지는 위험성이 드러났는데 메가뱅크를 추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보수 언론에서도 비판적인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민주당은 금융 당국이 함부로 금융지주회사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못하도록 해당 시행령을 법률로 격상하는 개정안을 6월 국회에 상정하겠다고 예고했다.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강만수의 메가뱅크론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런 비판 속에서도 강만수는 꿋꿋이 자신의 지론을 펼쳤다. 외국계 자본의 지분 비율이 높은 다른 금융지주회사에 우리금융그룹을 넘겨줘서는 안 된다며 토종은행론을 들고 나오기도 하고 통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거대 국책은행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까지 내세웠다. 이런 강만수에 대해 정권이 바뀌면 가장 먼저 감옥에 갈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강만수의 메가뱅크론을 모두들 반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금융기관 대형화를 통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드물다. 자본의 입장에서도 금융 산업을 키우기 위해 대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를 통해 관치 금융적 관행이 되살아나고 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화될 것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뿐이다. 남한에서 금융 산업을 키우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진행해온 일이다.

 

금융 자유화와 개방

 

△노무현 정부는 남한 자본시장 발달을 촉진
하기 위해 금융허브전략을 세우고 서울과 부
산에 국제금융센터를 짓고 해외자본을 유치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사진은 여의도에 만들
어질 서울국제금융센터 조감도.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에서 금융의 역할은 제조업 성장을 돕는 보조적인 것이었다. 사적 자본의 축적이 부족한 상황에서 각 기업은 필요한 자금을 은행 대출을 통해 해결했다. 사실상 국유화되어 있던 금융기관들은 정부가 정한 전략 사업부문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했다. 이런 특혜 속에서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 집단이 탄생할 수 있었다.
금융 산업을 기업에 자금 지원을 하는 곳 정도로 인식했기 때문에 기업을 살리기 위해 금융권을 희생하는 일도 많았다. 예를 들어 1965년 금리자유화 조치 이후 중소기업의 자금사정이 악화되며 부도 위기가 오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월, 사채 동결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또 제대로 된 심사 없이 기업 대출을 방만하게 했기 때문에 각 금융기관들은 부실 채권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남한에서는 독립적인 금융자본이 성장하지 못했고, 관치금융 관행으로 인한 정부 관료와 기업 관료 간의 유착과 부패가 항상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은행에 대한 민영화 작업에 들어가긴 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은행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관치금융의 폐해는 근절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금융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금 조달 방식에서 주식이나 채권 등 자본시장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기업간 인수합병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등 투자은행의 비중이 커진 것이다. 남한 역시 이런 영미식 금융시스템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세계화를 모토로 내건 김영삼 정부는 금융 규제 완화와 개방 정책을 펼쳤다. 금융산업을 단지 제조업 성장을 보조하는 자금 중개 기관이 아닌 독자적인 이윤 창출의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금융 자유화 정책은 금융기관들에 단기성 외채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한보, 기아 등 대기업 부도가 잇따르자 부실을 견디지 못하고 금융회사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금융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외환 위기로 남한에는 대규모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막대한 부실 채권을 안고 몰락했던 금융기관들은 퇴출되거나 통폐합되었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여하여 은행들을 일시적으로 다시 국유화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시행했다.
금융기관 통폐합을 통해 부실을 희석시키고 금융기관들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김대중 정부의 정책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구조조정으로 금융기관들의 수는 대폭 줄어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금융시장 개방에도 적극적이었다. 정부는 국유화된 금융부분을 산업자본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해외자본을 끌어 들이는 방식을 채택했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국유화된 제일은행, 서울은행은 구조조정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 이미 해외 매각이 결정되었다. 다른 금융기관들에서 외국계 자본이 차지하는 지분 비율 역시 꾸준히 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금융지주회사를 통한 겸업화가 추진되었다. 하나의 지주회사가 은행, 증권, 보험 등 다양한 업종의 금융회사를 거느릴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은행업에 비해 자본 집중이 부족한 증권, 보험업계의 대형화를 꾀하려 했다. 그러나 금융지주회사들의 중심은 여전히 상업은행이었고 증권업 대형화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예금과 대출금리 차이에서 오는 마진을 주된 수익으로 삼는 은행업만으로는 금융산업을 발달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금융기관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영미식 시스템으로 발전시키려면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고 남한의 증권사들을 미국식 투자은행과 같은 형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제는 노무현 정부 들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2003년 12월 금융허브 전략 발표를 시작으로 노무현 정부는 금융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추진한다.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을 통해 은행, 보험업을 제외한 모든 금융 업무를 하나로 통합해 미국식 투자은행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자본시장의 발달을 위해 파생상품 등 고위험 고수익 상품 개발을 장려했다.

 

정권은 바뀌어도 관료는 그대로

 

△ 금융계를 장악한 MB맨들. 김석동과 강만수가 합심해 우리금융그룹을 산은금융지주에 넘기려 하자 다른 측근들은 강만수를 위해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왼쪽부터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김석동 금융위원장, 이팔성 우리금융회장, 어윤대 KB금융그룹 회장,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

 

1997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손에 넣었지만, 경제 관료들은 바뀌지 않았다. 이는 노무현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는 모피아라 불리는 재무부 출신 경제 관료들의 수장격인 이헌재를 경제 부총리로 삼았다. 그 외에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 정책을 주도하던 관료들이 이명박 정부에서도 중용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이었던 윤증현은 노무현 정부 때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각종 금융 규제 완화를 주도했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기획재정부 장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현 금융위원장인 김석동 역시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외화자금 과장으로 있었으며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1차관을 했던 인물이다. 현 지식경제부 장관인 최중경 역시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으로 있으면서 고환율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지난 20년 동안 남한의 금융 정책은 규제 완화와 금융기관 대형화, 겸업화라는 기조 아래 큰 변화 없이 추진되었다. 강만수의 메가뱅크는 그 연장선일 뿐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금융기관 대형화와 겸업화 허용이 가지는 위험성이 여실히 드러났는데도 관료 집단은 여전히 관성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경제 관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 역시 금융 산업이 영미식으로 재편되기를 바라고 있다. 강만수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그가 추진하는 메가뱅크가 관치금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 대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우리은행과 산업은행을 합쳐 거대한 국책 은행을 만들게 되면 자연스레 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화된다. 또한 이는 우리금융지주와 산업은행, 기업은행을 민영화하겠다는 기존 정부의 정책과도 모순된다.

자본이 원하는 것은 투자은행의 탄생

 

남한에서 은행의 대형화는 이미 될 만큼 됐다. 이미 남한의 대형은행들은 업무 영역이나 지점들이 겹치는 곳이 많기 때문에 합병을 한다고 해도 몸집만 더 커질 뿐 아무런 시너지 효과가 없다. 때문에 부르주아 연구기관들은 남한 은행이 국내 시장에 안주하지 말고 해외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양한 수익 모델을 개발할 필요를 제기한다.
예금 수납과 대출을 주된 업무로 하는 상업은행은 자본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투자은행에 비해 사업의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상업은행은 투자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남한에서 금융 산업을 키워 이윤을 뽑아내려면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고 파생상품처럼 위험하지만 높은 수익을 내는 금융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또 이런 상품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는 투자은행을 만들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 투자은행과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는 증권사들의 경우 아직까지는 규모가 작아 미국 투자은행과 같은 업무를 감당할 수가 없다. 상위 5개 증권사들의 자기자본 규모는 미국 투자은행의 1/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증권사들이 위험 상품에도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 규모가 커져야만 자본시장 활성화도 가능하다. 정부의 규제 완화로 고위험 고수익 상품이 대거 시장에 쏟아져 나와도 이를 사는 사람이 없으면 자본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누군가 위험을 떠안으며 불쏘시개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해외에서는 투자은행이 그 역할을 맡는다.
증권사 대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남한 증권사들은 비슷한 업무 영역에서 저가 출혈 경쟁을 벌이고 있다. M&A와 같은 수익성 높은 사업은 해외 투자은행이 독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증권사에 대한 규제 완화와 헤지펀드 허용 등을 통해 증권사 대형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 부르주아 연구기관들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말해 자본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은행 대형화가 아니라 증권사 대형화이다. 그런데 남한 증권사들은 대부분 대기업 집단의 계열사로 있기 때문에 증권사 간 인수합병을 통한 대형화는 불가능하다. 산은금융지주와 우리금융그룹 민영화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자회사인 대우증권과 우리투자증권 매각을 통해 대형 증권사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데 강만수가 두 금융지주회사를 하나로 합치겠다고 했으니 자본이 좋아할 리가 없다.

 

금융 대형화는 새로운 위기를 준비한다

 

남한에서 제조업을 통한 경제 성장은 한계에 다다랐다. 남한 수출대기업이 우위를 보이고 있는 산업에서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이 매섭게 추격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것이 예상되고 있다. 또 지나친 수출 의존도로 인해 대외적인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남한 경제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산업 구조에 변화를 꾀해야 한다.
경기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 때마다 경기 부양의 버팀목으로 활용했던 부동산 시장 역시 더 성장할 가능성이 없다. 부동산 거품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가계부실도 심각한 상황이기에 부동산 가격 상승은 불가능하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부동산 수요도 전보다 줄어들 전망이다. 장기적으로 부동산 가격은 점진적으로 하락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 관료들과 자본은 금융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금융 산업을 키우려면 자본시장을 활발하게 만들기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금융부문의 문을 활짝 열어 해외 자본을 대거 끌어들여야 한다. 이 일을 강만수가 원하는 바대로 대형 국책은행을 만들어 관료들이 주도하거나 국가 소유의 금융기관 민영화를 통해 민간 자본이 주도권을 쥐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금융 혁신이니 금융 자유화니 하는 치장을 씌워 금융 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어버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융위기가 터지는 일이 빈번했다는 것이다. 초반에는 금융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경기가 좋아지고 이윤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것이 거품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거품이 무너지면서 위기가 오고 다시 금융 규제 완화로 거품을 만드는 반복적인 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80년대 레이건 정부의 규제 완화 조치는 저축대부조합 부도라는 위기를 불러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까지 참여해 최신의 금융 기법을 도입했던 LTCM이라는 헤지펀드는 결국 1000억 달러라는 손실을 기록하며 생을 마감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역시 글래스-스티걸 법1) 폐지로 겸업화와 대형화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일어났다.
세계 금융위기가 터진지 5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위기가 올 때마다 그 피해는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생생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각주

1) 글래스스티걸법 [ Glass-Steagal Act ]
미국에서 1933년에 제정된 상업은행에 관한 법률로서 제안의원의 명칭을 따라 글래스 스티걸법이라고 불리고 있다. 서로 다른 금융업종간에 상호진출을 금했던 것이 요지이다. 1929년의 주가폭락과 그에 이은 경제대공황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상업은행의 방만한 경영과 이에 대한 규제장치가 없었다는 점이 지적됨으로써 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지점망의 재조정, 연방예금보험제도의 창설, 예금금리의 상한설정, 연방준비제도의 강화, 투자은행업무로부터의 완전분리 등 이었는데, 그 결과 기업이 발행하는 유가증권 인수업무는 투자은행에만 한정되고 상업은행에 대해서는 일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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