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사노신

[11월호][Focus]무당파의 결집과 선택, 무엇을 향한 것인가?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10/31 13:33
  • 수정일
    2011/10/31 13:5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10월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었다.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의 득표율은 53.6%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가 얻은 46.2%의 득표율보다 7% 이상 앞선 것이었다. 이날 선거에서는 서울시장뿐만 아니라 부산 동구청장, 강원 인제군수 등 11곳에서 기초단체장을 뽑는 선거도 함께 진행되었다. 한나라당은 서울시장을 제외한 8곳의 선거에서, 민주당은 2곳의 선거에서 각각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결과 전체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것은 사실상 서울시장 선거였다. 그리고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아닌, 하다못해 진보정당 후보도 아니었던 무소속의 후보가 당선이 됐다는 것은 정치사적으로 간단히 넘어갈 수만은 없는 중요하고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처럼 무소속의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무당파’라고 불리는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의 전초전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던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것은 바로 ‘박근혜 대세론’을 깨면서 등장한, 향후 대선구도를 바꿔놓은 무당파의 힘이었다.
해가 갈수록 떨어지는 투표율과 기존의 정치인들에 대한 대중들의 누적된 불신으로 정당정치에 위기가 오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이른바 ‘안철수 현상’으로 드러난 무당파의 결집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고, 영향력 또한 강력했다.
무당파 시민들의 결집은 무엇보다 ‘반 MB' 정서에 기초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반 MB' 정서의 이면엔 단순히 이명박이 싫다는 메시지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후퇴로 인해 먹고 살기 힘들다는 대중들의 불만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을 싫어하는 대중들이 민주당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연한 계기로 제도 정치권 영역의 전면에 등장한 시민운동진영은 과연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박원순은 어떻게 서울시장 후보가 되었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주민투표 직후의 판세는 민주당에게 유리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당적이 없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이 전체 유권자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부동층’ 혹은 ‘무당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갑작스레 등장하면서 민주당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안철수 교수는 ‘아름다운 재단’을 운영하던 시민운동가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넘기면서 단일화를 이루어냈고, 박원순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5%대에서 40%대로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서울시장 후보군에 대한 뜨거운 외부의 관심들을 당 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박영선, 천정배, 추미애, 신계륜 의원을 내세워 경선을 치렀고, 이 중 박영선 의원이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지난 10월3일 무소속 박원순 후보와 맞붙게 된 국민참여경선에서 박영선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득표율이 45.57%에 그치면서 결국 야권의 서울시장 후보는 박원순으로 단일화되었다. (박원순 후보의 득표율은 52.15%였다.)
안철수 교수로부터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넘겨받으며 등장하게 된 박원순으로 인해 민주당은 어떤 면에서는 한나라당보다 더 큰 타격을 입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기존의 정당 정치인이 아닌 참신한 인물을 열망하는 대중들의 여론에 못 이겨 당의 이름을 건 후보를 내보내지 못하게 되면서 졸지에 존립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OLD한 민주당

 

현실 정치 영역에서 부르주아 정당의 존재의 의미는 각종 선거에 자기 후보를 내보내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10월3일 진행된 국민참여경선에서 민주당의 조직력과 동원력은 민주당의 후보를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지 않으려는 일반 시민들의 의지 앞에 무너졌다. 야권을 대표하던 정당으로써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국민참여경선에는 1만7878명의 시민이 참여했는데, 여기에는 민주당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함께 참여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젊은 층의 투표율이 높지 않기를 내심 바라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민주당의 주요 지지층이 중장년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2, 30대 젊은 층이 투표장에 몰리면서 투표율은 59.6%를 기록했고, 이는 박원순 후보가 승리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이날 투표장의 분위기와 젋젊은 층의 시민들이 보여준 열기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표현했다. 국민참여경선 이후에도 박원순은 여론을 의식하여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서울신문과 여의도리서치가 10월 4~5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박원순 후보가 민주당에 입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자가 58.3%로 '입당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불과 27.5%인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처럼 민주당이 무당파 시민들, 그리고 젊은 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민주당이 기반하고 있는 가치가 지금의 현실에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당은 어떤 점에서 한나라당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중들에게 민주당은 어떤 의미인가?
일단 민주당은 197~80년대에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과거의 전력으로 인해 한나라당과 같은 기존의 전통적인 보수 엘리트 세력들과는 다르게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세력으로 대표되던 김대중과 노무현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집권하는 내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경제적 조치들을 도입·확대했고, 이로 인해 ‘사회양극화’라는 단어가 새로운 이슈로 떠오를 만큼 대중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지금의 민주당은 과거 민주화운동세력이라는 이미지를 연막 삼아 대중들의 반 한나라당 정서에 호소하며 자신들이 다시 새로운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대중들에게 각인된 민주당의 이미지는 지금의 한나라당만큼이나 낡아보이는게 사실이다. 현재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인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한나라당과 이명박에 반대하는 대중들이 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중들의 반 한나라당 정서는 사실상 양극화 문제에 대한 규탄에서 비롯된 것인데, 과거 민주화운동의 후광으로 얻은 이미지만이 전부인 민주당이 새로운 대안이 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시민운동 1세대의 정책은?

 

그렇다면 사실상 안철수에 대한 지지를 등에 업고 야권통합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박원순의 대안은 무엇이었나? 박원순 당선자는 이른바 ‘시민운동 1세대’로 불린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에도 일부 시민운동 세력들이 제도 정치권의 영역과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이번처럼 시민운동의 정체성을 정면에 걸고 직접 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것은 처음이다.
박원순 당선자는 선거 유세 기간 동안 가장 먼저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공임대주택 8만호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별로 2개 이상의 국공립 보육시설을 확충하고,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 산하기관 680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청년벤처기업 1만개를 육성하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공약들을 발표했다.
여러 가지 공약들 중 눈에 띄는 것은 서울시의 공간들을 모든 시민에게 개방하겠다는 것이다. 박원순 당선자는 서울시내 모든 광장 및 거리를 표현과 ‘평화로운’ 집회 결사의 자유를 위해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서울시민에 대한 서울시의 공간 개방은 당연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할 권리이지만,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단체들에게만 서울시청광장을 개방해 문제가 됐던 선례들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선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또한 서울시 운영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여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의지도 내보이고 있다. 지난 10월19일 발표한 ‘서울시민 권리선언’에서 박원순 후보는 시민들과 서울시의회의 동의를 얻어 ‘서울시민 권리헌장’과 ‘서울시 권리증진 조례’를 제정하여 서울시정에 대한 시민의 의견 표명 및 참여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서울시의 정책과 집행을 평가, 감시하는 ‘시민권리증진위원회’를 설치하고 ‘서울시민 권리 옴부즈만’도 임명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구조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한계적 정책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처럼 박원순 당선자가 서울시 운영에 있어서 서울시민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제시한 주택, 보육, 일자리 등의 정책들에는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한계지점이 존재한다.
우선 서울시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 시절에 추진되었던 여러 가지 토목공사들 때문에 이미 25조원의 빚더미에 올라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원순 후보의 정책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으로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용을 어디서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서울시민의 복지를 위해 앞장서겠다고 하면서도 저소득층이나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대안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미 몇몇 언론에서도 지적했듯이 박원순 후보의 공약은 중산층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양극화나 빈곤층의 문제는 단순히 공공임대주택을 조금 더 늘린다고 해서, 혹은 몇몇 비정규직 일자리를 정규직으로 전환하거나 ‘벤처기업’을 위시한 자영업자들을 양산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좀 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공공임대주택 같은 경우, 주변 집값에 비해 2~30% 더 싸다고는 하지만 대신 매달 수십 만원의 월세를 내야 한다는 점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는 이마저도 큰 부담이 되는 게 현실이다. 청년 실업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남한의 자영업자 규모도 만만치 않은데다 장기적인 경기침체의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겉으로 보기엔 그럴 듯 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이 불명확한 ‘벤처기업’ 같은 방식으로 얼만큼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주택 문제나 일자리 문제 등이 부분적으로 공급량을 늘린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박원순 후보는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 서울시 행정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안까지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참신하지 않은 박원순

 

박원순 당선자는 안철수 교수의 지지를 등에 업고 출발했음에도 예상외로 본격적 선거기간에 들어서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박원순의 지지율이 더 이상 오르지 않았던 이유는 한나라당과 나경원 후보의 네거티브 전략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박원순 후보의 병역 문제나 학력 문제에 대한 한나라당의 비방 내용이 어떠했는가, 얼마나 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문제제기였는가 혹은 높은 수준의 문제제기였는가가 아니라 ‘왜’ 대중들에게 이러한 네거티브 전략이 먹혔는지에 대한 원인분석일 것이다.
박원순과 안철수를 지지했던 대중들은 이들이 기존 정당 정치인들이 보여줬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리라고 기대했다. 대중들이 이들을 지지했던 첫 번째 이유는 ‘참신성’이었다. 하지만 선거기간 동안 박원순 후보는 이러한 시민들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이것은 정치 신인으로서의 미숙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운동’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이미지, 누구보다 청렴할 것 같고, 신선할 것 같은 이미지에 대해 크게 기대했던 일반 대중들은 네거티브 공세 속에서 자기 방어적이기만 했던 박원순 후보의 해명을, 박원순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미지뿐만 아니라 정책적인 측면에서도 그다지 참신함이 두드러진다고 말하기는 힘든 게 사실이었다. 이는 그동안 시민운동진영이 갖고 있던 정책적 전문성으로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박원순 후보의 정책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 뿐만 아니라 나경원 후보의 정책과 비교했을 때에도 큰 틀에서 그렇게 크게 다르다고 말하기는 힘든 면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주택문제에 대해서 박원순 후보가 공공임대주택을 8만호 공급하겠다고 한 반면, 나경원 후보 또한 5만호의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국공립 어린이집에 대해서도 나경원 후보 역시 서울시 전역에 100곳을 더 확충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박원순 후보와 나경원 후보의 정책에선 공급물량에 있어서의 차이만 날 뿐, 전체적인 틀에 있어서 결정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경원 후보가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지지를 얻기 위해 기존의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보편적 복지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2012년 대선에서 격돌하게 될 한나라당과 범야권의 복지 정책이 사실상 별 차이가 나지 않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무원칙한 야권통합 속에서 대안은 실종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이번 선거에서 대중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기득권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하고 지배계급의 배만 계속해서 불려주려 했던 한나라당과 이명박을 심판하기 위한 무기로서 ‘민주당’이라는 낡은 무기를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중들은 이들 대신에 안철수를 선택했고, 안철수는 시민운동진영을 정치무대의 한복판으로 건져 올렸다.
시민운동진영은 박원순을 계기로 정치권에서 대중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안철수가 없는 상태에서 박원순만으로는 대중들을 이끌어오기가 버거웠던 게 사실이다. 이것은 시민운동의 정치가 우연한 계기로 안철수의 간택을 받고 등장하게되면서 아직까지 대중에게 온전히 검증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가 진보 대 보수의 총결집을 야기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던 것은 지금의 대중들이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불만을 정치시스템의 변화로 해결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결집이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주화 세력의 대표 정당인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까지 영향력이 컸다는 데에서 기존 정당에 대한 이들의 불신이 엄청나게 누적되어있다는 것, 기존 정당들이 해결하지 못한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불만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드러난 무당파 시민들의 행보는 이전에 비해 좀 더 명확한 색깔과 자기 의지를 드러내보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단순한 ‘부동층’의 개념에서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야권통합세력은 사실 ‘반 MB’, ‘반 한나라당’이라는 기준 이외엔 아무런 대안이 없는 무원칙한 상태로 결집돼있다. 이 속에서 시민운동세력은 어떤 위치에 서게 될 것인가?
시민운동세력과 문재인이 함께 하고 있는 ‘혁신과 통합’, 그리고 손학규를 유력한 대선주자로 밀고 있는 민주당, 마지막으로 내년 봄 신당을 창당할 것이라는 안철수 교수의 멘토들까지 야권 내에서는 이들 세 세력이 주축이 되어 내년 총선을 거쳐 대선까지 계속해서 각축을 벌여나갈 것이다. 이들의 각축은 서울시장 선거 이후 오는 12월 열릴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서로가 야권통합을 주도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더욱 가시화될 것이다.
시민운동세력은 과연 ‘반 MB'를 넘어선 명확한 대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이야 박원순을 필두로 안철수의 지지를 등에 업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자신만의 대안 없이 무원칙한 야권통합만으로는 무당파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다. 서울시 행정의 범위를 넘어서는 부분까지 대응할 수는 없다는 박원순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이들 또한 지금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몇 가지 시혜적인 대응책 마련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말이다. 대중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일시적인 인기에 안이하게 영합하려 한다면, 이들은 결국 기존 정당정치제도의 혁신은커녕 무당파 시민들의 시야에서도 멀어지게 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여성][인터뷰]일회적 징계보다 공동체 의식의 변화를 위하여-고려대 반성폭력 연대회의 김푸른솔

  • 분류
    여성
  • 등록일
    2011/10/07 18:32
  • 수정일
    2011/10/07 18:36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편집자주] 지난 5월 발생한 ‘고려대 의대 성폭력 사건’이 일단락났다. 가해자들은 학교에서 출교당했고, 법원에서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파렴치한 가해자들에 대한 형식적인 조치가 이루어졌으나 피해자의 깊은 상처는 여전하고 학교로 쉽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반성폭력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학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성폭력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공동체 문화와 반성폭력 교육의 부재로 짚고 구성원들의 근본적인 의식변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는 법원 1심판결이 선고되기 전에 이루어졌음을 미리 밝힌다.

 

반성폭력 연대회의에 대해서

 

연대회의를 어떻게 꾸리게 되었나

6월 초 사건이 언론에 공개가 되고 나서 인터넷 커뮤니티와 학내에서 소위 ‘명문’인 고려대학교 의대라고 하면서 여론이 급격하게 형성되었다. 그 때 가장 주된 담론은 가해자들을 추방시켜라, 가해자 3인은 고려대학교 명예를 실추시켰고, 그러므로 그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사실 의과대학은 그 자체로서 좀 문제가 있었다’라는 것도 있었다. 2006년에 병합된 보건과학대와 비슷하게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나중에 병합된 형태이다. 때문에 ‘고려대학교라는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이 있는데 의대가 사실은 원래 고려대와는 좀 다르지 않았냐’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 때 뜨악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피해자도 고대 의대생인데 의대 자체를 분리시키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 같은 경우는, 개인적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문제라고만은 할 수 없는데 어쨌거나 출교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있었고, 그런데 출교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말하는 게 불편했다.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사건과 관련한 대자보들이 붙기 시작했는데, 출교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대자보가 붙은 것을 보고 ‘아, 이대로 담론이 흘러가고 끝나버리면 좀 문제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6월 초만 하더라도 금방 출교가 될 줄 알았다. 너무 당연하게 출교를 얘기하고 학교 측도 딱히 거기에 대해서 언급이 없으니까. 이렇게 사건이 종결되면 안 되겠다 해서 학내에 여성주의 문제의식이 있는 <여학생위원회>’, 여성주의 교지 <석순>, 나는 <생활도서관> 측으로 모여가지고 ‘우리가 이걸 단순히 가해자 징계문제로 볼 수 없는 거 아니냐’, ‘사실은 고려대학교 내에서 성폭력이라는 것이 계속 있어왔는데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징계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을 본다면 징계만으로 볼 문제가 아니다’라면서 처음에 얘기를 했다.

지금 학내 조직, 내지는 어떤 여성주의 문제의식이 있는 기구들이 고려대학교 같은 경우에는 많이 부진한 상태다. 학내 학생운동 자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여러 단위가 같이 모이면 낫지 않겠냐 해서 연대회의 형식으로 해서 꾸리게 되었다. 사람들을 모으고 이야기를 하면서 (사건에 대한 시야를) 좀 더 크게 보자해서 나왔던 게 토론회를 하자는 것이고, 한번쯤은 설문조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해서 학생들이 무엇을 성폭력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실제로 어떤 유형의 성폭력이 발생하고 있는지 총괄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사업을 하려면 아무래도 더더욱 사람들이 모여야 하니까 좀 더 연대회의체 형식을 가지는 모임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나

참여단위는 <생활도서관>, <석순>, <여학생위원회>, <대학원총학생회>, <고대문화>, <전국학생행진>, <한국사 대동반>, <과학과 실천>해서 8개 단위가 참여하고 있고. 개인으로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 정기적으로 회의에 나오는 사람은 6~8명 정도 되고 설문조사에 참여하는 인원은 우리가 좀 더 모아서 한 20명 정도이다.

연대회의가 벌이는 사업과 활동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나

기본적으로,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방향성은 고려대학교의 남성지배적 문화 자체를 바꾸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고 그럴 때 사건이 해결된다, 성폭력이 해결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때 가서도 성폭력이 아예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지금 벌어지는 양상을 보면 지속적이고 일상적으로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나의 문제의식이다. 실제로 피해자 분도 보면 (가해자들에 대한) 징계와 무관하게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고 있냐고 한다면 그게 순조롭지만은 않다는 그런 생각도 있어서 (공동체 문화의) 변화 자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어떤 사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냐가 문제의식이 되었다.

그럴 때 설문조사를 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담론 내지는 이슈를 만들어내자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 예컨대 가해자가 설문지를 돌렸잖나. 그 설문지 내용을 보면 여성이 평소 문란했다 안했다 이런 질문이 있는데 학생들 반응은 마치 ‘아, 정말 가해자가 망나니다’ 내지는 ‘인간말종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럼 당신은 거기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당신이야말로 평소에 여성의 행실하고 성폭력 피해 책임을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을 밝혀보고자 하는 거다 설문지를 통해서.

설문지 코딩 작업을 하고 있는데 아직 공개되기 전이라서 확정짓기는 뭐한데 실제로 그런 대답들이 나온다. 노출이 심한 여성은 책임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답변이 나오는 걸 볼 때는 (성폭력과 남성지배적 공동체가) 연관성이 있고 그 연관성을 밝힐 때 여성주의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지 않을까.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리 대자보를 통해서 가해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가 변해야 한다고 해도 꿈쩍도 안하더라. 그랬을 때 압박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뭘까, 바꿔 말하면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 뭘까라고 할 때 간접적인 수단으로써 설문지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고. 나 같은 경우는 설문지를 전제로 생각을 한다. 근데 설문지 이것 자체로 힘이 많이 드는 거라서 이걸 하다보면 다른 것에 집중을 덜 하게 되지 않냐는 비판이 있다면 그 부분은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딜레마라고 표현하게 되던데 단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우리 역량이 있는가라고 한다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무리 시위를 하고 해도 지형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지형을 움직일 만한 힘이 필요하고 그것 자체를 만드는 것을 장기적인 사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이 있지 않나하는 것이 약간 있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체적 사건은 분명히 있으니까 우리가 했던 것이 신속하고 단호한 징계에 대한 촉구를 말할 수밖에 없긴 하더라 중간에. 그래서 관련된 대자보를 부착했고 지금은 징계가 일단락이 났다. 지금 하고 있는 피해자 지지엽서 같은 경우에도 사건의 구체성을 놓치지 말자는 그런 의미이다. 그리고 장기적 사업이 가지고 있는 단점이라면 어쨌거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니까. 그런 사업을 벌이려고 했고.

다시 큰 맥락에서 볼 때 여성주의 문화제나 토론회 간담회 내지는 공동공약 같은 경우는 여성주의를 환기시키는 하나의 작용으로써 하는 것이고. 반성폭력 자치규약을 말할 때에는 그것을 명문화된 하나의, 나 같은 경우는 그것을 헌장으로 바라보려고 했다. 헌장을 마련해가지고 고려대가 이런 것을 지향하려고 한다,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좀 밝혀보자고 생각하고 있었고.

올해 안에 이것을 다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시작하면서 많이 벤치마킹했던 게 연세대학교 쪽에서 했던 ‘여성문제를 고민하는 연세대 자치연대’라는 게 있더라. 여기 활동을 보면 학교 측의 구체적인 제도 변화까지 이끌어내고 있는 것 같아서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2차가해 방지라거나 최선의 경우 반성폭력 교육의 의무화, 다른 단위에서 대자보에 썼던 의견인데 지금은 영어수업이 의무화되어 있듯이, 다른 학교에서 채플을 의무화하듯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성평등 교육 또는 여성주의 교육을 학사과정에서 의무화, 제도화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굉장히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걸 하기 위해서 다른 대학 사례를 참조해야 하고 장기적으로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여태까지 봐온, 학교 측의 제도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입장에서 굉장히 구체적인 수준에까지 이것을 들이밀어야지 그때서야 학교가 이것을 검토해보겠다고 나오니까, 추상적으로 해라라고 해선 절대 안 되는 것 같아서 좀 길게 보려고 한다.

연세대 ‘여연자연’ 활동을 통해 반성폭력 자치규약이 학교 제도화 된 것인가

내가 알기로는 여연자연에서 마련한성평등 자치규약이 전체 학생자치차원에서 제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의 용어를 ‘표준 반성폭력 자치규약’ 정도로 잡는다면 고려대에는 그런 게 부재하다는 거다. 각 과반 단위 내지는 학회단위에는 존재할 지라도 표준을 삼을만한 건 지금 없다. 물론 하나의 표준을 제정하다보면 단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법대는 없어지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경영대나 국제학부, 이공계 쪽은 여성주의 쪽의 자치규약을 만들 수 있는 역량도 없고 의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과반 자체에 맡겨둔다면 그것을 방기, 방치하는 게 되지 않을까. 언제든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표본을 만들어놔서 그것을 확립 내지는 성립시킬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것을 여연자연에서는 어느 정도 달성을 했다.

여연자연에서 하던 다른 활동을 보면 반성폭력 학칙을 제정 혹은 개정하려고 할 때 연세대학교 측의 성폭력 상담센터하고 여연자연하고 학교가 삼자대면을 해가면서 조율을 하더라. 그런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구체적인 성과까지는 내가 잘은 모르는데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었다는 자체, 구체적인 제정안, 개정안을 마련해서 들이밀었다, 제시했다는 자체가 괜찮은 것 같더라.

설문조사 사업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처음 설문지할 때 문제의식은 고려대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여성하고 남성이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이는지 그것을 목표로 했다. 여성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할 때 이것을 여성과 남성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학내 문화, 응원이라든지 FM, 과연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차이가 있지 않겠냐 해서 그걸 드러내는 게 목표인데 여태까지 걷힌 걸 보면 학내문화 인식에서는 좀 실패한 것 같다. 다들 좋다고 해서. 그런데 인식부분에서는 (성별로 차이가 드러나서) 개인적으로 놀랐다.

질문의 편향성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거다. 순수하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기 위해 삼천 부씩 돌리는 건 하고 싶지 않다. 실제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답변 자체를 우리가 미리 선정해 놓은 경우가 있기 한데 예컨대 주가 되는 질문들은, 정도를 물어보거나 그렇다 아니다를 물어보는 질문들이 거의 다수여서 문항 자체에 그렇게까지 소위 편향성이라는 것은 거의 없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고. 다만 처리과정 규정에 관련해서는 우리가 새로 만든 건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장담을 못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중립적이다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좀 생각해봐야할 것 같고.

문항 뽑는 게 진짜 힘들었을 것 같다. 여성단체들과 연계해서 잘 하신 듯하다

설문지할 때는 여기저기 많이 물어봤는데 역설적이게도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여성가족부였다. 과거 석순을 검토하면서 언제 성폭력 실태조사가 있었는지 조사해봤는데 94년하고 97년 두 차례 있었는데 과거에 막 반성폭력 운동이 있었을 때. 그 때 이런 식으로 했구나 이런 문항들을 물어봤구나, 검토를 해서 참조했다. 여성가족부, 그리고 맥락적으로 물어보자 해서 개별적으로 만든 거다. 실제경험, 처리규정, 등 (설문조사를) 한 번할 때마다 문항을 굉장히 많이 물어보더라, 과거 설문지를 보더라도.

 

 

 

△ 반성폭력 연대회의가 기획한 피해자 지지엽서 (출처 : 반성폭력 연대회의)

 

학내 여론과 활동

 

사건 경과하면서 학내 학생들의 반응은 어떻게 변화하였나

초기에는 말씀드렸다시피 출교해라, 그리고 학교 명예를 더렵혔다, 명예 얘기가 굉장히 많이 나왔다. 아까 빼먹었는데 명예를 더럽혔다, 그래서 회복해야 한다라는 그것이 정말 문제다라고 생각했다. 내 문제의식은 과거 성폭력을 가족의 명예로 보았던 것과 지금 학교 명예 문제로 보는 게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나, 내지는 분명히 유사하다라는 게 문제의식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학교명예로 보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피해자 치유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학교 명예를 회복한다는 관점 하나만 놓고 본다면 피해자도 같이 없어지는 게 가장 좋다, 내가 보기에는. 아예 사건이 없었다라고 보는 것이. 실제로 그래서 의대 자체를 고려대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정확하게 그 맥락과 일치하는 것이고. 그래서 명예를 중심으로 잡는 건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런데 어쨌거나 지금까지도 그렇고 학내 여론은 명예문제로 많이 보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과 내가 같은 학교라는 게 부끄럽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렇지 않다라는 암묵적 전제를 깔고 있는 그런 반응이 굉장히 주가 되었고, 초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것은 일관된 하나의 큰 반응이고. 또 학생들 반응은 언론에 보도된 것과 굉장히 일치했는데 보도 되면 확 하고 잠잠하면 잠잠해지고 보도되면 또 하다가 그러다가 방학이 되면서 다 묻혔고. 내가 보기에는. 그러다가 퇴학이 될지도 모른다고 할 때 다시 달궈져가지고 출교되야 하지 않느냐라고 다시 출교문제로 대두가 됐다, 2학기 초에는. 한 3천 명 정도가 출교촉구서명에 찬성을 하신 걸로 알고 있다.

출교촉구서명운동은 어디서 주도한 것인가

표면적으로는 문과대에서 했고 실질적으로는 다함께 분들이 주도를 해서 출교촉구서명운동을 벌이셨고. 문과대에서 벌여서 문과대 과반 단위에서는 거의 다 참여를 했고 굉장히 많은 외부 단체에서도 지지서명을 해주셨다. 그건 어떻게 보면 학내 전체적으로 출교라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공유가 부족해서 그렇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조금은 있고, 폭넓은 지지가 가능했던 게. 한편으로는 그만큼 성폭력을 거부해야 한다는 게 분명하지 않았나하고 생각한다.

학교 측의 반응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

굉장히 적었다. 언론에서 과장한 건 분명히 있는데 공식 반응이라고 할 때는 일단 ‘신중을 가한다, 적법절차에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게 전부였다. 퇴학조치 그런 건 다 새어나온 거고. 그러고 나서 ‘출교를 한다’, 딱 그 두 가지밖에 없었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한편으로는 늦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분명히 피해자가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결정을 내렸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한편으로는 분명히 중징계를 내림에 있어서 충분한 절차를 거친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비난하는 것은 좀 어렵다는 생각은 있다.

다만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은 개개 교수의 발언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들, 예를 들어서 ‘가해자들이 곧 돌아올 테니 잘 해줘라’라고 한다거나,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교수들이 ‘이거 사실 별거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학교 측에서 단속을 해야 했고 미연에 방지를 했어야 되는데 그런 것에 대해 거의 터치를 하지 않았다. 가해자가 설문지를 돌린다고 했을 때 강력히 제재를 했어야 되는데 방치한 부분은 분명히 학교 측이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지속적인 의견표명,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물론 징계절차는 비공개가 원칙인 게 맞을 텐데 이왕 공론화된 사건에 대해서 비공개를 한다는 것도 좀 어색한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마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에 대해서 (헌법재판소)가 비공개로 진행한다고 할 때 그것이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듯이 공론화가 된 과정에서 이것을 비공개로 한다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한테, 그리고 다른 학생들한테 소외감 내지는 경계 짓기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그런 건 좀 학교 측에서 실수를 한 게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든다.

양성평등센터의 역할과 관련해 가지고는 이번 사건에 한정짓는다면 양성평등센터에서 일을 못한 편은 아니다. (사건 직후) 필요한 조치를 하려고 노력했고 (절차대로) 60일 내에 결론냈고 가해자가 재심 신청했을 때 그것을 거부했고 피해자 신상보호를 굉장히 잘한 편이고. 의대에서는 이게 어쩔 수 없이 알려지더라도 일반 학생들은 피해여성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는 일을 잘한 편인데, 그럼 사건이 왜 공론화가 됐느냐 할 때는 가해자가 설레발을 치다가 공론화된 적이 있는데 그것까지 다 양성평등센터가 막을 수 있느냐고 할 때는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느냐. 상식적으로 볼 때 가해자 측은 공론화를 두려워하고 피해자는 공론화를 할까 말까를 망설이는 게 일반적인 양상인데 오히려 가해자가 공론화를 시켜버렸다고 했을 때는 그것까지 다 양성평등센터에 책임을 묻긴 어려운데, 그렇다고 양성평등센터가 여태까지 해온 활동양상을 볼 때 다 잘 해왔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최소한 원칙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크게 문제는 없었다, 라고 개인적인 생각은 들더라.

의대 말고 다른 단과대 교수들 중에 피해자를 지지하는 움직임은 없었나

설문조사를 하면서 좋았던 게 그런 어떤 학내에서 이걸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좀 포괄적으로 볼 수는 있었다. 문대 쪽에서는 좋은 반응이 있었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교수들이 아예 이 설문지는 필요한 거니까 좀 하고 수업을 하자 내지는 끝나고 이 설문지 작성을 하자 이런 식으로, (그 교수들께) 아 정말 감사드린다. 글쓰기 수업 같은 경우에 이번 사건과 관련해가지고 한 번 토론을 해 보자, 글을 써보자고 해가지고 이 사건의 중요성을 많이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반면에는 대체로는 무관심하다. 일단은 일단락된 사건이기도 하고, 방학이라는 기간이 아무래도 좀 텀이 있었으니까. 대놓고 이 설문지를 못하게 하는 분은 한 분도 없었다. 직접 허락을 받고 하는 건 아니지만 항상 보면 수거는 되긴 한다. 그리고 수거가 된다는 건, 체크가 되어 있다는 건 적어도 교수차원에서 하지 말라고 말리지는 않았다는 거니까.

아, 학생들 반응하고 같이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인데, 의외로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열심히 체크를 해주신다, 라는 생각이 있었다. 반대하더라도, 가끔 설문지에 그런 문구가 있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한다, 라는 그런 밑글이 적혀있다. 그런 걸 볼 때는 관심들을 다 정말 많이 가지고 있구나 생각이 들더라.

총학생회나 자치단위, 운동단체들의 반응이나 활동 중에 소개할만한 것이 있나

좀 가벼운 것부터 말하자면, 가볍지 않기도 하지만 의대학생회가 이제 거의 처음으로 학내 전체에 대자보를 붙였다, 이 사건에 관련해가지고. 그러니까 의대 학생회 같은 경우 거의 활동을 안 하는 곳이긴 한데, 거의 서비스, 학생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거의 그런 식으로, 그만큼 무너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거기서 입장발표를 할 때, 인정한 가해자 두 명 출교시키고 인정하지 않는 한 명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 했다. 그런데 학교 측에서 출교조치를 해버려 가지고 좀 민망해진 것 같다. 특이할만한 건 그 쪽이 하나가 있고.

그건 가해자가 부정하니까 이 사람은 혹시 덜 잘못했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인가

그런 거다. (법원판결) 나와봐야 아는 거 아니냐. 사실 초기엔 세 명 다 인정을 했다. 했는데 나중에 가서 부인을 하는 게 분명히 있었다.

학생정치조직을 본다면 고려대에는 <한대련>하고 <다함께> <학생행진>이 있고. 한대련은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관심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학내 여론이 워낙 드세니까 발언을 안 하는 것도 좀 웃기다 내지는 부적절하다 느껴서 출교를 말했는데 말하자마자 출교조치가 되버려가지고 결국엔 아주 잠깐 동안 활동한 게 됐고. 다함께 같은 경우는 아시다시피 8월 중순 말부터 출교촉구를 요청했고 학생행진 같은 경우는 반성폭력 연대회의에 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편이다. 나는 회원은 아니지만 같이 활동하는 입장에서는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행진이 반성폭력을 말하는 편이고.

뻔한 얘긴데 단과대들도 행진계열이나 다함께계열이냐에 따라서 같이 논평을 내더라. 다함께 쪽이 잡은 데는 개별논평을 내기보다 연서 형식으로 하는 게 좀 더 많고 학생행진 쪽에서는 같이도 하고 따로 또 내고 그러는 것 같았다.

인상적이었던 건 개인자보도 몇 개 붙긴 했다. 개인자보들은 주로 출교처분을 말하는 거긴 했는데 정대 후문 쪽에 몇 개 붙었다.

연대회의가 총학의 특별회의 기구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은 어떠했나

처음에 연대회의를 만들면서 느꼈던 문제의식이 어떤 대표성이 필요하다, 공인을 받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총학생회 산하 특별회의로 인준을 받아보자, 대표성, 정당성을 얻자 해가지고 6월 말에 중앙운영위원회에 들어가서 인준을 받으려고 했는데 안 열려가지고 계속 안 열렸다가 9월달에 열린 첫 중앙운영위원회에 들어가서 그 땐 아직 출교처분이 내려지기 전이었는데 사실 이 문제는 출교처분에서 그칠 일이 다니다, 징계에서 그칠 일이 아니고 포괄적인 사업이 필요한데 지금 학생사회에서 도맡아 할 수 있는 기구라던가 모임이 있느냐고 한다면 지금 부재한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가 중심이 되어가지고 맡아보려고 한다, 그래가지고 그 때 특별회의로써 연대회의를 승인 받았다.

인준 받는 과정이 어렵지 않았지 않았나. 총학 또는 중운위에서 떠맡으라고 했으면 어려웠을 듯 우리가 맡아서 하겠다 해서 마찰이 없지 않았을까

회의가 열리지 않아서 그렇지 열리고 나선 어렵지 않았다. 그걸 약간 어필하긴 했다. 이 문제에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기에는 모두 다 일이 많고 그러니까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라고 하니까 설득이 수월하게 되더라. 사실 반대할 명분은 딱히 없지 않나 이 회의에 대해서. 그래서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기한이 정해져 있는 기구인가

총학이 바뀔 때마다 들어가서 재인준을 받으면 된다. 광의총학생회 산하인 거지 지금의 집행부 산하는 아닌 거다.

 

 

△ 지난 9월18일 여성가족부 앞에서 발언하는 반성폭력 연대회의 김푸른솔. 반성폭력 연대회의는 10월12일 현대자동차 성희롱 피해자가 농성하고 있는 여성가족부 앞에서 문화제를 연다.

 

쟁점들 - 출교, 반성폭력 운동

 

파렴치한 가해자들이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출교’가 적극적으로 제기되었고 이루어졌다. 그러나 학생들이 스스로 반교육적인 ‘출교’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모순적이다라는 논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출교라는 쟁점에 대해 이어지는데 학내 구체적인 당사자로서 구성원으로서는 출교를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라고 해서 우리는 유보를 했다. 입장 차이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첫째로는 출교라는 것이 분명히 학교 명예회복이라는 차원과 굉장히 강하게 맞물리는, 쟁점이 있었고. 또 하나는 문과대에서 주도한 출교운동은 2006년 당시에 학생탄압으로써 출교를 사용했는데 왜 이들은 출교시키지 않느냐, 형평성 문제로 나온 거다. 두 가지가 가장 주된 쟁점이었다. 명예회복 그리고 형평성 문제.

정작 소외된 것은 이것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라는 그 쟁점은 소실되었다, 출교에 대한 요구에서. 그걸 너무 당연한 전제로 깔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왜 출교시켜야 하느냐, 반드시 왜 출교라는 최고 수위여야 하느냐라고 할 때는 그나마 그 쟁점은 있었다. 출교만이 가해자가 이 공동체로 돌아올 수 없도록 한다, 그래서 그걸 통해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마주치지 못하게 만든다라는 피해자 보호라는 관점도 있긴 있었는데 이 쟁점이 확 부각될 때에는 적어도 이 관점은 부각이 안 됐었고. 그래서 피해자 보호를 위해서는 출교가 필요하다, 피해자 분께서도 말하신 거였고, 몇몇 여성주의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출교를 요구하신 분들께서 말하신 쟁점이 피해자 보호라는 쟁점이었다.

근데 내가 보기에는 피해자 보호라고 말할 때 포괄적으로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주칠 가능성을 차단해야하는 것과 동시에 2차 가해도 같이 방지하는 것이 포괄적인 피해자 보호라고 해야 할 것인데. 출교처분이 그 모든 것을 다 보장해주지는 못하는 건 분명하다. 오히려 출교처분을 시킴으로 해가지고 후속조치에 대해서는 제도적인 보완 같은 것을 완전히, 출교처분이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쟁점을 다 빨아들여가지고 다른 것을 쟁점화시키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는 측면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 하나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구체적인 징계수위를 정할 수 있느냐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약간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정말 솔직하게 말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이론적 실천적 무력감이 있는 것 같다. 구체적 징계에 있어서 뭘 말할 것이냐라고 한다면 출교는 곤란하다라고까지만 말하게 되고 구체적으로는 무엇이 정답이냐라고 말하는 데 있어서는 약간 무력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말하기도 좀 애매한 것도 있고.

다만 문제의식이 있다면 출교처분이라는 것이 분명히 고려대학교 구성원의 자격요건을 부여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분명한 전제 내지는 담론이 있는 것인데 그것이 여태까지 여성을 배제시켜온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군국주의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일등시민이란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군대 갔다 오고 건장한 남성이 일등시민이고 거기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여성은 그러므로 동등한 시민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우리가 나와 같은 지위에 있는 인격체로 다룰 필요가 없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성폭력 사건이라고 보는데.

6년 동안 동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적으로 대상화가 되고 함부로 만질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시피 출교라는 것은 같은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성원이라 함은 이러이러한 자격요건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이 여성을 배제하는 그 논리하고 같이 갈 수밖에 없다는 차원으로 간다는 것인데. 내가 보기엔 이런 유사성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학생사회에 설득을 하느냐 문제에 있어서는 설득이 잘 안되는 게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보에서 그것을 전면화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약간 피해가려고 했던 게 있고. 어쨌거나 나는 출교를 유보가 아니라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인데 그런 하나의 쟁점이 분명히 있고.

또 하나는 출교처분이라는 것은 학생의 입학기록을 말소시킨다고 할 때 그것은 분명히 거짓이고 사실왜곡이다라는 생각이 있다. 이 사람이 공동체에 들어온 적이 있다는 것은 이 사람도 공동체의 일부였고, 그러므로 이 사람이 잘못, 특히 구조적 성격을 지닌 잘못, 성폭력이라는 것은 개인이 변태성욕자라거나 내지는 주체하는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의 소유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1차적으로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폭력 교육의 부재가 있는 것인데. 그 개인이 공동체에서 속했던 적이 없다, 입학기록을 말소시키겠다는 상징적인 의사표시로서 출교를 한다는 것은 찬성하기 어렵다는 게 적어도 내 입장이다.

다른 입장에서는 아까 말씀드린 학교 명예문제, 학교 명예문제는 문과대 측의 논리는 아니었고 일반적인 학생의 여론 내지는 외부 여론은 고려대학교 명예를 위해서는 출교시켜라하는 게 분명하게 있었고 형평성 문제가 있었고 피해자 보호 문제가 있었는데. 반드시 응답해야 할 부분은 피해자 보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명예문제는 충분히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고 형평성 문제는 좀 과하게 말하자면 말이 안 되는 것인데. 출교생 본인들도 2007년 당시에는 출교조치 자체를 학칙에서 삭제시키자고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4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출교를 시키자고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내재된 모순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 경우는 그분들도 논리적 허점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엔 피해자 문제가 필요한 것인데 정말 구체적인 처벌문제로 들어갈 때에는 언제나 피해자 보호는 필요할 것인데 모든 성폭력에 있어서 출교를 할 수는 없는 거잖나. 이 경우는 소위 중대한, 성 폭력에 있어서 단계가 있다고 말하기는 우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단계를 구분 짓는 게 있을 때 예를 들어서 통상적인 표현을 빌자면 단순 추행이라든가 성희롱 같은 경우도 분명히 피해자 보호가 필요한데 그걸 다 출교시키자고 할 때는 안 될 부분이 분명히 있으니까.

피해자 보호라고 할 때는 오히려 제도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예를 들어서 같은 수업을 듣지 않도록 피해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한다거나 가해자에 대한 필수적인 반성폭력 교육 이수과정을 신설하는 게 피해자 보호에서 실질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고 대신 사건이 중대하다고 한다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학교를 다니는 시기를 분리시키는, 그러니까 5년 동안은 가해자가 학교를 못 다닌다거나 그런 측면을 집어넣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은가. 무조건 출교만을 말하는 것이 이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분명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 같지만 많은 스펙트럼 상의 사건을 본다면 오히려 한계적이다라는 것이 하나가 있고.

이건 정말 개인적인 의견인데 나 같은 경우는 사회변혁이라는 것을 말할 때는 개인의 변화가능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할 때는 가해자들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 그러니까 (가해자를) 반성의 주체로 봐야지 여성주의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확보를 포함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성주체의 반성도 포함해야지 그래야지 관계맺음이 성립된다고 할 것인데 남성주체의 반성을 출교조치는 완전 차단을 하는 거다. 너는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으니까 이제 일말의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표현이라고 본다. 그래서 물론 반성이라고 할 때 저는 반성합니다라는 한 마디를 하면 바로 복귀시킨다 그런 게 아니라 충분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이 사람이 정말 변화가 있다고 한다면, 변화가 없으면 그냥 다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데. 변화를 보이려고 할 때는 좀 더 적극적으로 끌여들여주는, 가능성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영구적으로 공동체에서 배제시키는 그런 조치는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한다, 이것이 정말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약간 하게 된다.

많은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 교육을 강제할 때 단위가 그것을 얼마나 강제할 수 있느냐 문제도 많이 있었고, 그것을 설사 가해자가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에도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 진짜 반성이나 변화가 있는지 굉장히 의문스럽다

나도 좀 구체적인 사건들을 접하면서 정말 안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거기서 느낀 건 교육이라는 것은 개개인에 대한 교육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결국에는, 너무 궁극적이고 추상적인 목표들만 말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사회전체에 대한 어떤 재교육 내지는 재구성이 있어야지, 그래야지 재교육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가해자 한 둘 데리고서 이렇다 이렇라다고 설명을 해봤자 그들이 사회에 돌아왔을 때 다시 어떤 성폭력적이고 여성억압적인 분위기가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실제로도 가해자가 잠시 반성의 뜻에서 조용히 지낸다거나 하고나서 다시 공동체 복귀나 발언을 하려고 할 때 무리 없이 그걸 사회에서 받아들이니까 오히려 가해자 입장에서도 다시 (성폭력적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진보넷 블로그 상에서도 이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쟁점으로 논쟁이 된 바 있는데 그 중에서 운동권이 의미있는 활동을 하지 않았다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학내 지형이나 구도를 유의미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그런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비판하시는 분은 출교처분을 사건 종결로 보시는 것 같다 사실. 그리고 이후의 활동은 다 무의미하다라고가 보시는 건데. 입장 차이라는 게 분명히 있다. 출교처분 나올 때 까지 유의미한 결과를 못 이끌어 냈다, 그건 맞는 것 같다. 출교처분에 대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반성폭력이라는 추상적인 내지는 멀 수도 있는 목표를 제시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학교 측에다가 이런 걸 해라, 또는 학생사회에다가 이렇게 이렇게 해야한다고 해서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한 건 맞다. 시도를 하기는 했는데 안 움직인 건 맞으니까 못했다라고 평가를 하면 맞으니까 그 비판은 맞는데. 앞으로도 무의미할 거다라고 말하는 것은 해봐야 안다고 생각하는데, 해봐야 안다라는 대답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더라.

과거 대학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성폭력 사건 ‘대책위’를 꾸려 활동한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연대회의는 이러한 활동방식과는 어떤 점이 같고 다른가

우리 같은 경우는 대책위원회나 특별위원회라고 이름을 짓지 않고 연대회의라고 이름을 지은 데서는 그렇게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처리하는 것보다는 좀 더 거시적으로 보자라는 게 하나 있었고. 현실적으로 보자면 학생사회에서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그 피해자가 여학생위원회로 가져오지 않는 다는 거다. 오히려 양성평등센터에 가거나 과반에서 처리를 하거나. 그럴 때 우리가 도맡아서 하는 게 가능하지 않고 연계가 잘 안되는 게 있고. 실제로 한분한분이 오신다고 할 때 솔직히 말씀드리면 업무과중이 될 거 같고. 그래서 그건 오히려 양성평등센터나 과반 단위에서 그걸 해결해나가는 게 더 맞지 않는가 한다. 특히 연대회의라고 한다면 학생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거라서 구체적인 과반, 가해자와 피해자가 맞닿아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오히려 과반에서 좀 더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대책위라는 것을 결성해서 활동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분명히 필요한 부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게 지금 잘 되고 있느냐라고 한다면 약간 구분하자면 개인들이 못했다기 보다는 그만큼 지금 학생사회에서 자체적으로 무언가를 해내기가 어려운 상황인 것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 의과대에서 자체적으로 한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의대생들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맡아줄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안타까운 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 같은 경우는 넓게 길게 봐서 궁극적으로는 대학생 자치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데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금보다는 나을 수 있다. 노동운동 부분에 대해서 학생들이 공감대를 결여하고 있으면 여성주의로 강하게 밀고 나아가가지고 다시 그걸 연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인 입장이 될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여성주의하고 노동운동은 뗄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한 쪽에 관심사가 일어나면 다른 쪽도 같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 대두되고 있는 이슈들을 볼 때 학생사회 내에서는 노동분야가 관심을 잃고 있다는 게 긍정적인 가치 평가를 하는 게 아니고 아쉬움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러고 있다는 것은 인정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계속 학생사회에서 여성 남성 관계에서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으니까 여기를 오히려 파고 들어갈 수 있지 않은가라는. 특히 학생사회 내에서는 반성폭력 기구 내지는 활동을 통해서 포괄적인 학생사회의 재구성을 도모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한다면 대책위라는 것도 좀 더 활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정말 긴 얘긴 것 같긴하다.

과거 97년 <안암성폭력 근절하기 연대회의>가 있었는데 아쉬운 점은 활동하셨던 분들하고 우리하고 하나의 단절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활동을 하셨는지 기록을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간신히 찾은 것을 보면 그 분들이 하신 게 반성폭력 학칙, 자치규약이 아니라 학칙을 마련하는 운동을 하셨는데 그 당시로는 그게 최선이었다는 생각은 든다. 성과를 남겼기 때문에 <양성펑등센터>가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도 이 사건이 피해자 보호라는 것이 최소한이라고 이루어졌다고 생각을 해서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는데 사실 그 때 활동하셨던 분들의 개인적인 한계라기보다는 그 이후에 지속되지 않은 한계에 대해서는 궁금하다 왜 지속되지 않았는지. 자료가 부족하다.

최근 가해자 처벌 중심에 대한 비판 등을 반성폭력 대책위 운동의 한계로 들며 대책위 활동을 하지 않는 경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원칙적으로는 동의를 하는데 이론적 실천적 무력감이 분명히 있다 구체적 사건에서. 그것을 다른 단어로 ‘그게 중요하지 않다 내지는 핵심적이지 않다’라는 표현으로 피해가는 것은 오히려 부정직한 것 같고 무력한 부분이 있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사실 대책위 활동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어떻게 평가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히 필요한데 한편으로는 분명히 대책위를 하다보면 징계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는 것이 있지 않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것 같은데 확실한 해결책이 있는가라고 하면 아직 없다라고 인정하고 들어가고.

근데 우리는 알리바이가 있는 게 학생사회에는 너무 많은 게 무너져가지고 ‘실질’적으로 뭔가를 못한다고 변명이 가능하다 뿐이지 실제로 이게 활발하게 잘 되가지고 대책위가 여기저기 형성되어 있다고 할 때 연대회의란 게 따로 있을 때, 일단 따로 있는 게 과연 맞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고. 연대회의가 과반과 적극적으로 연계해서 과반에 여성부가 있다고 한다면 여성부가 모인 게 연대회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회복이 된다고 할 때 오히려 그렇게 가져가는 게 맞는 것 같긴 하다. 대책위들의 모임이 연대회의가 되는 그런. 1차적으로 가해자가 대가를 치르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피해자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도 필요한 부분인데 좀 고민을 해봐야 하겠다.

 

 

△ 반성폭력 연대회의에서 기획한 피해자 지지엽서

 

고민과 이후 활동계획

 

앞으로 연대회의에서 교육도 할 생각이 있나

지금도 여학생위원회에서는 주체학교라고 해서 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정말 넓게 잡으면 (교육을) 제도화하는 걸 목표로 잡는 건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검토 내지는 분석이 들어가야 한다. 지금 현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고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교육을 굳이 연대회의에서 하기보다는 다른 단위에서 할 수 있게 한다든지 제도를 만든다든지 이런 게 더 목표가 될 수 있겠다

과반단위에 그 과제를 부과하는 거다. 이런 걸 보장해라. 내가 생각하는 건 영상제작 같은 걸 고려하고 있다. 이걸 올해 내에 다 하겠다는 건 아니고. 로드맵이 좀 필요한 것 같더라. 영상이라는 건 어떤 측면이 있냐면 예컨대 단과대에서 이걸 설명할 수 있는 아무도 능력이 없다는 가정 하에서 대신 설명해야 한다, 그땐 영상을 틀어야 한다는 게 있다. 내 딴에는 구체적으로 실질적으로 들어가는 건데 일이 많아지기는 하고. 우리가 다 해야 하냐라고 했을 때는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실질적인 고민이고. 진보넷 논쟁에서 끊임없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학생운동의 역량이 생각보다 훨씬 적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많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어떻게 공동체로 안전하게 복귀할 것인가, 치유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사건처리 과정과 함께 고민되어야 하는데 부족했다. 현재 그런 고민은 어떤 차원에서 되고 있나

치유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치유한다고 할 때 개인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 자체의 변화 없이는 치유와 과정 역시 완결됐다라고 말하는 것이 기만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길게 보면 이 모든 활동이 필요한 건데.

그럼에도 구체적인 사건에 있어서 어떻게 할 거냐고 했을 때 어려움에 대한 토로일 수도 있는데. 의과대학 쪽은 사실상 학생자치가 다 무너졌다고 해도 될 텐데, 그쪽하고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는 그래서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 피해자 지지엽서이고, 대자보를 붙이거나 설문조사를 할 때도 반드시 의대를 포함시키는 거다. 평소에 학내 자보를 붙일 때는 1개나 2개 를 붙인다면 별거 아닌 걸 수도 있는데 의대 쪽에 필요 이상으로 우리가 붙이고 신경을 쓸려고 노력하는 건 있는데 그것 이상으로 뭘 했냐고 한다면 우리도 부족한 게 있었던 것 같고 워낙 상황자체가 어려운 것도 있었던 것 같고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미흡한 점도 있었던 것도 있다.

피해자 지지엽서는 어떻게 받고 있나

강의실 가서 수거하는 것도 있고. 행사 참여해서, 얼마 전에 여성가족부 앞에서 현대차 아산 성폭력 피해자 투쟁하는 곳에 가서 문화제 같은 거 있을 때 가서 지지엽서를 받기도 하고 부스 차려서 학교 교양관 앞에서 받기도 하고 해가지고 100~200부 정도 받아가지고 전달해드리려는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활동계획과 고민을 말씀해 달라

10월12일에 여성가족부 앞에서 전국학생행진하고 같이 문화제를 하려고 한다. 굉장히 구체적으로는 그게 있고. 설문지는 계속되고 있다. 자랑이긴 한데 74%정도 끝나가지고 5천부 중에 3천부 수거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2천2백부 정도 수거가 되가지고 서로 좋아하고 있다. 열심히 하고 있다. 중간고사 끝나고 나서 설문조사 결과 발표, 할 때 문제되는 지점들 부각해서 그 결과를 토대로 해서 성폭력 간담회나 토론회를 10월 말에 한 번 열어보자고 단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구체적 사건에서는 환기되는 효과들을 담을 필요가 있다고 해서 관련될 수 있는 활동을 짜고 있다면, 이번 학기가 지나면 이렇게 빽빽하게 활동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고.

여태까지 무슨 활동을 해왔는지 검토가 많이 필요할 것 같다. 여학생위원회가 어떻게 활동해왔고, 왜 총여학생회에서 여학생위원회로 넘어갔는가, 여태까지 있어왔던 반성폭력 활동은 어떻게 해서 시작이 되었고 끝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를 해가지고 방학이나 그럴 때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9·10월호][여성]여성노동자 단체활동의 현주소-지역 여성노동운동 단체의 활동 경험을 중심으로

  • 분류
    여성
  • 등록일
    2011/10/07 14:12
  • 수정일
    2011/10/07 18:3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이 글은 사노신 독자회원이 여성단체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여러가지 문제의식을 담아 보내주신 글이다.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주)

 

‘개인의 역사가 곧 운동의 역사’라고 생각해오던 차에 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1) 국제적인 노동자 운동이 필요하다며 짧게나마 헌신했던 이주노동자 운동단체의 활동가, 나름 운동하면서 느꼈던 가부장성에 치를 떠는 20대 후반의 기혼여성, 나를 설명할 사회적 지위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활동가’라는 타이틀을 지운다면 말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을 하더라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내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성적(젠더/섹슈얼리티) 정체성, 그것이 놓인 위치와 조건들을 생각해봤을 때 ‘가부장제’나 ‘여성억압’이라는 말들이 멀리 있지 않았다. ‘여성노동자’라는 정체성은 자연스럽게 내게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 속에서 여성노동자들과 호흡하고 싶었다. 하여 그간 하던 단체 활동을 중단하고, 지난 1년간 지역 생협(생활협동조합) 사무실에서 조합원 상담 일을 한 후 5개월은 모 여성노동자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생협에서는 전형적인 콜센터 노동을 했다. 상대방이 하는 모든 말들을 다 받아들이면서 자기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노동을 하루 8~10시간씩 쉼 없이 했다. 정신과 육체적 에너지 모두를 쏟아 붓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동료들 간에는 노동 조건에 대한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대부분 관리자의 통제에 대한 것이었는데 “콜센터 일인데 갓 대학 나온 젊은 친구가 버틸 수 있는 일인가?”라는 통념들을 내게 질문하기도 했고, 감정노동의 괴로움과 고질적인 저임금 문제를 꼬집으며 “어떤 회사에서는 감정 노동에 대한 수당까지 준다던데 운동단체라는 생협은 왜 그게 없느냐? 왜 우리는 몸을 쓰는 일도 아닌데 일이 이토록 힘든가?”라는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여성노동의 핵심적 이슈 중 하나인 감정 노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부족하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노동의 성격과 내용, 노동하는 주체와 조건, 적절한 보상, 자발적 결사체 - 노동조합 - 의 조직 등 노동자라면 흔히 생각하게 되는 주제들을 여성 동료들과 논의할 기회들이 많았던 것은 좋은 경험이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들과 일을 해보면서 감정노동의 영역 같은 여성노동의 특수한 성격을 이해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운동들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 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을까, 현재 여성노동자 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답답했던 차에 수도권 지역에 있는 모 여성노동자 단체에 들어갔다.

 

전투적, 비타협적 운동에서 출발한 여성노동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이후 남한 사회의 자본주의를 지탱해오던 것은 봉제나 전자 같은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이 집약된 산업이었다. 산업 양태가 변화한 현재 여성노동자들은 공공, 서비스 산업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로하거나 돌봄, 가사 노동 등 소위 ‘비시장’영역의 노동에 많은 수가 종사하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거나 전반적인 노동자 권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해왔다. 과거 제조업 중심의 선도적인 투쟁의 모습들이 그러했고 현재의 이랜드나 기륭, 청소노동자 투쟁 등의 모습에서도 투쟁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여성노동자 단체에 오면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긴장 관계를 건드릴 수 있는 사업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자본가들과 가부장적 남성들에 맞서 싸우는 여성노동자를 조직하자’는 것, 너무 거창한 기대인가.
막상 단체에 들어가 했던 활동들은 ‘거창함’보다는 내가 가졌던 기대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입증시켜주었다. 이미 이 주제는 내가 들어간 여성노동자 단체에서는 꺼낼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단체에서 펼쳤던 여성노동운동의 주된 의제는 젠더중심의 차별에 대한 이슈도 아니었다. ‘경력단절 여성의 재고용’, ‘일·가정 양립’ 등 여성노동운동의 의제라고 보기에 애매한 것들이었다. 여성단체들은 정부와 파트너쉽을 맺기 위해 이 의제를 선택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애써 이 주제에 불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첫 번째로 깨진 환상, 노동조합에 대한 무시

 

처음 단체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몇 해 전 빈곤층 가구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의 보육시설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는데 잡음이 많았다고 했다. 이야기인즉 지역 내 유일한 국공립 보육시설에 수요가 몰려들자, 한정된 인원에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하던 보육교사들은 노동조합을 필요로 했다.
헌데 보육시설 노조의 설립과 추진 과정에 제동을 거는 세력이 바로 지역 여성단체들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보살핌 노동은 희생이나 헌신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많고 교사들 역시 그런 마음가짐으로 내면화되어 있어 노동자로서의 단결권을 주장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어렵게 조직된 노동조합인 만큼 사용주 측과의 마찰도 불가피했다.
그런데 명색이 여성운동을 한다는 지역의 여성단체들은 저소득층들이 아이 맡길 곳이 없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보육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요구했다. 보육 노동자들의 요구가 과도한 것이라는 성명을 내고, 파업을 깨며, 보육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무시했다. 여기에 내가 들어가 있던 여성노동자 단체 역시 큰 몫을 했다. 보육교사들은 양질의 보육을 위해서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반드시 개선되어야 함을 주장했지만 학부모나 여성단체들은 이를 철저히 묵과했고 결국 노동조합은 해체되었다.
물론 보육 자체가 완벽하게 사회화되기 이전에는 개별 부모들이 겪는 양육에 대한 고충은 엄청나다. 이러한 보육의 문제는 통념상 여성만의 영역으로 남겨지는데 보육이 왜 여성의 일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여기서는 등장할 여유가 없다. 누구의 희생으로 어떻게 그 관계가 유지되든 상관없이 이성애 중심 가족제도는 이 대립구도에 전제된 철옹성 같은 담론이었기 때문이다. 여성단체들은 이 문제를 보육원에 보내는 엄마와 여성 보육교사 사이의 대립으로 만들었다. 보육 노동자들이 어떤 노동을 하는가보다 자신의 아이를 마음 놓고 맡길 곳이 없는 가족들을 우선적으로 걱정하는 여성단체들의 수준은 암담했다. 나는 여기서 보다 원론적인 질문을 되새겨야 했다.
여성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권리’란 무엇인가? 대체 ‘어떤’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가? 보다 나은 조건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여성들과 그것조차 '사치'라고 말하는 여성들, 이 사이의 ‘분열’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활동들을 해나가면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했지만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경력단절 여성지원? 방과 후 학습지도사 양성사업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은 보통 노동부 산하 고용지원센터 같은 재취업센터에서 관할한다. 헌데 지금은 노동부가 그런 일조차 하기 싫어서 시민단체나 여성단체들에게 예산을 넘겨주어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내가 있던 단체에서는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방과 후 학습지도사 양성 교육을 진행했다.
경력단절이라는 말 자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여기서의 ‘경력’은 임노동자로서의 경력일 뿐이지 가내에서 가사, 양육, 온갖 돌봄과 감정 노동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여성들의 경력은 배제된다. 무급 봉사로 취급되는 여성들의 재생산 노동은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여성들은 사회에서 경력이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경력단절’이라는 슬로건 자체는 임노동 생산 중심의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허구적인 개념일 뿐이다.
아이들의 방과 후 학습을 지도하는 것은 양육의 연장선에 있으므로 전형적인 돌봄 노동의 범주에 속한다. 현 방과 후 학습지도사들은 정교사들에 비해 훨씬 낮은 임금과 처우를 받지만 노동 자체가 연속적이지 않아서 가내 노동을 하는 기혼 여성들에게는 맞춤 직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쯤 되면 방과 후 지도사들의 노동 권리에 대한 쟁점들을 기본적으로 다루면서, 여성인권이나 여성노동 쟁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제기해주는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실제 사업을 해보니 그렇게까지 다룰 여력이 없었다. 방과 후 지도사의 노동권보다는 수학, 과학, 국어 등 실무적으로 배워야 할 것들을 가르치기에도 시간이 빠듯했다.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 대부분은 ‘공부가 매우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성별로 편중된 돌봄 노동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여성들이 일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또 공부를 가르치라는 것은 끊임없는 피교육 노동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전제하지 않은 사악한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차라리 커피 수요가 많은 요즘, 바리스타를 교육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러한 재취업 양성과정을 여성단체에서 시행하는 것은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엄마들을 타겟으로 적당히 구미 당기는 사업을 시행하면서 물적 기반을 만드는 전략이다. 단체들은 재정 불안 때문에 이러한 프로젝트를 받아 회의비나 강사료 등의 비용을 높게 책정해 송금해주고 다시 돌려받는 형태로 사업을 진행한다. 후원조직만으로 생존이 어려운 단체에서는 이런 사업이 효율적인 운영 방법이다. 다른 지역 여성노동자 단체에서도 정부 프로젝트 사업들을 펼치면서 재정적, 대중적 기반을 쌓고 있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운동은 대중들이 정말 원하는 주제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차별’ 이야기하며 운동만 할 수 있겠는가?”라는 대답이 날아온다.
대중화, 실질적으로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사업, 그 속에서 녹여내야 하는 우리의 정치, 고민은 확장되어야 하나 양날의 칼을 다 쥐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기층 여성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사업이 무엇인지를 함부로 예단한 것은 아닌지, 문화센터 트렌드에 맞춰 대중화를 꾀한 것은 아닌지, 돈에 연연해 단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과 정체성을 너무 놓치고 가는 것은 아닌지, 이 사업을 수긍하기 위해서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도통 긍정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주체적으로 사업을 해나갈 수도 없었다.

 

가사노동자 파견기업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있던 단체 사업 중 유명한 것이 가정관리사 협회 사업이었다. 가사노동에 대한 시장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다만 이것이 여성노동단체들에 의해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가 했던 가사노동자 파견사업은 말 그대로 수수료를 받지 않는 착한 파견기업의 역할을 했다. 가정관리사협회는 고령의 여성노동자들을 가정관리사로 조직하여 노동력 파견과 더불어 가정관리사의 노동자성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는 일회성 캠페인으로 권리 선언 운동을 진행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고령의 여성노동자들이 캠페인을 하고 여성노동이나 다른 사회적, 정치적 사안에 관심을 갖게 되는 조직화의 흐름은 반길만한 일이다. 그러나 가사노동을 포함한 돌봄노동을 나이든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처럼 고정화하는 이데올로기에서는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가정관리사를 고용하지 못하는 빈곤층 가구에서 가사노동 등의 각종 돌봄노동을 여전히 여성들이 담당하는 현실은 변화하지 않았다. 가사노동 파견 사업이 인기를 끌면 단가를 낮추어 경쟁을 하게 될 테고 싼 값에 가사노동을 하려는 여성들이 더더욱 극렬한 착취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사업이 ‘전 여성들의 가사노동자’화를 도모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까 두렵다.
성별로 편중된 가사노동에 대해서 포착하고, 이에 대한 재평가나 사회적 가치화 등을 통해 결국 가사노동이 성별로 균질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요구하는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빈곤층의 여성들이 이중삼중의 가사노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사노동의 완벽한 사회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물적 토대와 사회적 기반, 사상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여성친화기업과 여성친화도시

 

소위 ‘젠더 레짐’이라 하여 각 지방정부에서 밀고 있는 정책 중의 하나가 ‘여성친화**’이다. 여성 고용이 많은 기업을 여성친화기업이라 선정하는 것은 발상 자체가 틀렸다. 이는 굳이 많은 설명을 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여성친화는 임노동 시장에 많은 여성들이 진출하면 ‘여성친화’적인 것이다. 임노동 구조 속에서 어떤 착취관계를 맺는지,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어떤 차별을 받는지, 어떤 가부장적/관료적 체계 속에서 일을 하게 되는지 등의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내가 있던 단체의 다른 지역 단체들에서는 지역 정부와 손잡고 여성친화도시나 여성친화기업을 선정해 상을 주는 프로젝트를 타진하고 있었다.
박근혜나 전여옥 같은 이가 여성정치인이라 하여 여성들을 위한 정치를 잘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성별로 위계화 되어 있는 노동 구조 속에서 관리자는 남성이고, 관리자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 다수가 여성이라면, ‘그래도 여성들이 많으므로 여성친화기업’이라 불러도 된다는 말인가?
아무리 주류 여성계라 하더라도 박근혜나 전여옥, 나경원 같은 이들에게 어떤 기대를 건다고 한다면 말 다한 것이다. 하물며 내가 있던 여성노동자 단체는 주류여성계에 끼지도 못하는 수준인데 실제 여성들과 친한지 따져보지도 않으면서 ‘여성친화’ 들이대는 것은 그저 무식의 발로로 밖에는 안 읽힌다. 말하기에도 민망한 ‘여성친화’ 선전으로 기업이나 정부에 굽실거리면서 구색맞추기식 사업을 하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은 ‘공적 가부장제’를 몸소 실천하는 기관이 되고 있다.
이래서 보다 ‘여성주의적이고 계급적’인 관점이 여성노동운동에도 필요한 것이다. 나는 정부와 국가, 혹은 자본가에 대한 태도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하는 기나긴 논쟁 과정이 여성노동운동에 꼭 필요하다고 본다. 여성 단체 스스로 기생하고 있는 권력 역시 자본가적/가부장적인 권력임을 인지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일·가정 양립의 허구

 

현재 여성노동운동 단체의 활동은 주되게 ‘모성보호’에 치중해있다. 이는 노동력의 원활한 수급을 원하는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여성단체들은 각종 ‘저출산’ 토론회에 참여하고 있다. 정부는 그들이 고심하고 있는 ‘저출산’ 문제를 여성 단체들이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임신, 출산, 양육으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생애 주기를 고려하는 정책은 물론 필요하다. 출산휴가를 늘리고,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동등하게 쓸 수 있도록 강제한 조치는 환영할만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임신, 출산, 육아와 각종 가사노동이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여성 본연의 노동이라는 점으로 강제되는 것에는 침묵한다. 여성들은 그러한 과정들 속에서 가부장적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실천해야 한다.
일·가정 양립은 가정 내에 일어나는 모든 노동을 여성이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성들은 노동력 수급을 위한 인간생산노동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노동에 대한 제반 권한을 행사할 수가 없다. 아이를 생산하면서 남성 가문을 잇고 사회에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이성애 중심의 가족 관계는 여성에게는 또 다른 착취 관계이다.
현 사회에서 여성의 인간생산노동은 단순히 생산 행위 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 돌봄, 무한한 가사노동으로 이어진다. 가족관계는 이러한 여성의 무급 노동에 기대어 유지되어 왔다. 이 구조 속에서 정부가 ‘일·가정’ 양립 정책을 추진한다기에, 몇몇 여성주의자들이 문제 제기를 하였다. 내가 있던 단체에서는 ‘일·가정 양립’을 ‘일·생활 균형’이라 바꾸었다. 하지만 그릇만 바꾼다고 해서 훌륭한 요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왜 가정의 일을 여성이 담당해야 하는가라는 중대한 물음에 소위 여성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여러 근시안적인 대책들을 내놓았다. 물론 성별분업을 해체할 수 없다면, 가부장적인 가족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런 대책 없이 당하는 것보다 이 사이의 긴장을 조금 줄일 수 있는 개선책들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이 개선책들이 근거해야 하는 내용, 여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설정 자체가 너무도 쉽게 간과되고 있었다. 아무리 여성단체들이 이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일·가정 양립은 어머니와 노동자로서의 여성, 이 이중역할을 제도화하는 정책이다. 게다가 현장의 여성단체들은 이름만 교묘하게 바꾸어 이 정책의 수행자가 되고 있다. 여성의 권리보다 여성의 가사 노예화를 추동하며 ‘수퍼우먼화’를 도모하는 정부 정책의 하수인으로서 여성단체들은 스스로의 존립 근거 자체에 반하는 활동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관료주의화, 관변단체화

 

내가 있던 단체는 조금 더 특별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단체를 운영하는 방식 자체가 로비 정치였다. 새마을 부녀회 등 여성단체협의회 행사들을 쫓아다니며 대표가 얼굴을 알리면서 단체를 홍보하고, 지역을 빛낸 여성상 같은 것을 받기 위해 도나 시의 관계자를 만나고 다니는 게 대표의 주된 일이었다. 비단 일부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본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듯 여성단체도 예외 없이 관변단체가 되어 가고 있다.
몇 십년간 단체 대표를 맡던 사람들은 이미 지독한 관료성에 찌들어있다. 그들은 그간 운동 사회에 있으면서 남성들에게 받았던 상처들을 후배 활동가들에게 호소하며 숨통을 죄고 있다. 이것은 거의 질식할만한 수준으로 지역여성운동이 발전하지 못하는, 나아가 새롭고 젊은 층의 활동가들이 조직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국가와 자본의 권력에 기생하는 것, 상명하달의 운영 방식, 비판과 토론을 압제하는 문화 등 여성 단체 내에서도 이러한 관료주의가 잠식해 있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비판하던 이데올로그들은 여성단체의 관료성에는 함부로 날을 세우지 못하는 것 같다. 여성단체들의 관료성은 더 잘 은폐된다. 노동조합이 형제애라면 여성단체는 자매애로 똘똘 뭉쳐 있다. ‘언니’라는 말 속에 숨겨진 권력, 가족주의에 기대어 차이의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 남성들과 동등해지기 위해 밖에서는 분투하고 안으로는 억압을 강화하는 운영 방식. 내가 있던 단체에서 쟁점에 대한 논의는 가부장적 방식으로 재단되기 일쑤였으며, 대표 등의 나이든 활동가들이 장장하게 헤게모니를 쥐고 있어 반기를 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제는 여성단체들 속에서 부당함을 느껴온 활동가들이 결집해야 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 속에 등장한 여성운동단체들이 ‘남성과의 평등’이라는 미명 하에 일상 속 권력 관계를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가를 어렵더라도 말해야 한다.

 

‘국가페미니즘’의 실체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가페미니즘이나 페모크라시 같은 용어들이 등장할 때면, 나는 그러한 규정은 좀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과 국가라는 말 자체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규정했기 때문에 여성운동이 제도화되는 것에 대해서도 특별히 민감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현재 여성단체들이 국가 기구들과 맺고 있는 관계, 이것이 사회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력 등을 살펴봤을 때 국가페미니즘이라는 규정은 결코 과도하지 않다. 2007년, 여연은 출범 이후 20년간 여성운동을 비롯한 사회변혁운동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정부와의 대립적 관계도 청산하고 참여로 노선을 바꾼다고 천명했다.
남한 뿐 아니라 국제기구가 주도하는 여성관련 정책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기보다 관련 여성단체나 조직과 연계하여 추진되었다. 여성단체들은 여성부의 정책 수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성폭력/가정폭력 상담 활동을 하는 여성 단체들은 정부의 예산을 받아 상담활동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 여성노동단체도 프로젝트 사업을 받거나 노동 상담에 대한 활동들 역시 정부 예산을 받아 하고 있다. 하여 내가 노동 상담을 맡아 활동할 때에도 내가 운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정부 기관의 지도, 감독을 받는 인턴사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공적 가부장제로서 국가는 남성의 이익에 부응하는 정치적 상부구조로서 여성에 대한 억압을 유지한다2)는 견해에 적극 동의하며, 김대중-노무현 등 소위 ‘개혁정권’이라 불리는 시기 속에서 여성부가 등장하게 된 배경 역시 다르게 보면 공적 가부장제가 공식적으로 관철되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지점을 보고자 한다. 국가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적 용어이기도 하지만 관료사회로 진출한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스스로 규정한 언어이기도 하다는 것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국가페미니즘을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국가페미니즘이 “여성의 권익 보호를 위해 국가의 폭력성은 순치시키고 보호기능은 확대하는 것으로서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들 사이의 갈등을 ‘젠더’ 관점에서 중재하고 보호하여 국가가 복지국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독려하는 일”3)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성의 권익 보호를 위해 국가의 폭력성은 순치되었는가? 보호기능은 확대되고 있는가?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여성들, 보호가 요구되는 여성들, 범죄의 피해자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여성들, 반대로 기업이나 국가에 의해 여전히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 이른바 국가페미니즘을 주장한 이들은 여성들의 범주를 제각각 갈라놓고, 정작 그녀들이 어떠한 조건과 맥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지 않는다. 순치된 폭력성 속에서 숱한 여성노동자들은 절규했고, 성매매 여성들을 보호한다면서 그 여성들을 불법적 존재로 만들고 생존의 방식으로 선택했던 직업 자체를 푼돈 몇 십만원에 앗아가 버렸다. 결국 국가와 자본, 남성지배자들의 영향력 속에 페미니즘은 은폐된다. 여성들을 분열 획책하면서 갈등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이득을 보는 세력은 따로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 자체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완전한 해체가 필요하다

 

사회변혁의 운동이 제도화되는 맥락에서 그 맥락을 여전히 따를 것인가, 다른 한편으로 운동의 제도화를 비판하며 새롭게 저항적인 진보를 만들어가는 맥락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이 모두의 가부장적 특성들을 비판하고 그야말로 해방을 이루기 위해 완전히 다른 판을 그릴 것인가. 나는 여성 단체들이 설정하고 있는 문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의 이십여년간 활동해온 것 자체가 이 수준이면 운동 자체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여성운동이 근거하고 있는 개념, 의제, 활동 방향과 방식 등 모든 것들의 기반 자체를 해체하고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력단절, 여성친화, 일·가정 양립 등 현재 여성노동운동이 토대로 하고 있는 개념 자체가 허구이거나 성차별, 착취의 문제를 은폐하는 것이다. 더불어 국가 자체가 성, 계급 중립적이라는 편견 자체를 버려야 한다. 가부장제를 재생산하는 가족, 국가 질서 자체를 흔들지 않고 정부가 하는 일을 대신해준다면 여성 운동은 ‘운동’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렇기에 사회적 역학 관계에 대한 세심한 분석과 태도 정립이 필요하다. 소멸 시효를 다했다는 위기감을 갖고 새로운 운동으로 변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성노동자 운동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희망버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다. 대중들은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쫓겨난 중공업 노동자들의 절규와 이것이 자본가들의 방만한 경영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김진숙의 고공농성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 명의 여성노동자가 다수의 남성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들을 대변하며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임금노동자들이 집단적인 물리력으로 자본의 힘에 대항하는 것이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방식이었다면 한진중공업 사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운동의 양태가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 이상 공장에서 일하는 남성노동자들의 힘이 노동운동의 추진력을 형성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여기 또 다른 투쟁이 있다. 여성가족부 앞에서 관리자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문제제기하자 해고당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농성이 그것이다. 이 투쟁은 여러 쟁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성희롱을 한 가해자가 징계위원회를 열어 피해자에게 ‘풍기 문란’의 죄목으로 징계를 내린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자 피해자는 해고되고 가해자는 고용 승계되어 일하고 있다. 피해자가 일하던 업체는 폐업되어 누구에게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결국 공장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다 쫓겨나 현대차 본사 앞을 압박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현대차는 용역을 고용해 집회 신고를 막았고 피해자와 대리인은 끝내 여성가족부 앞으로 오게 된다. 여성가족부는 용역을 동원해 이 농성을 깡그리 짓밟았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던 걸까. 성매매 로비 정치가 만연한 공간에서 남성들의 성희롱은 시답잖은 것이다. 가해자는 재미로 성희롱을 했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는데 문제제기 하자 업체 사장에게 살려달라고 줄을 섰을 것이고, 업체 사장은 현대차 본사에게 시끄러운 문제 하나 덮자고 로비하며 줄을 섰을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적 관행은 조직적으로 구조화되어 노동 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있던 여성노동자 단체는 여성가족부의 지침에 따라 성희롱 예방 교육은 나가는데, 현재 일어난 사태조차 방관하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보통 성희롱이 발생하면 노동부 등 기관에서 합의를 종용하거나 중재의 역할을 한다. 가해자에 대한 제재 조치도 행정적으로 이뤄질 뿐이지 형사처벌을 강제 하지는 못한다. 성희롱은 문화적인 문제이기에 개도의 대상이지 척결할 대상은 아니라는 담론, 남성 중심의 계급 역관계가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는 공장 내 구조, 결국 여성가족부나 여성노동단체의 개도 활동으로는 이 썩어빠진 공장 내 구조에 조금의 균열도 내지 못하고 있다.
자본가들의 착취에 대항하여, 남성들의 폭력 - 소외, 배제, 희롱 등 - 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하는 여성들은 널려 있다. 이는 현장의 규모나 직급을 막론하고 일어난다. 고로 여성노동자 단체에서 해야 할 활동의 주된 의제는 여성가족부와 단절하고 이들을 결집시켜 내는 것이다. 다양한 여성들이 가부장적 관행과 폐해에 맞서 이 뿌리 깊은 성차별 구조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운동, 이미 시작되고 있는 이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조직하는 것에서 여성노동자 단체는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1) 이 글은 여성노동자 운동 단체에서의 활동 경험을 중심으로 풀어 쓴 짧은 소회에 불과하다. 필자는 여성노동운동 전반에 대해 진단할 실력도 안 되고 그만한 노력도 투여하지 않았다. 미천하게 겪은 개인적 경험들을 정리해서라도 꼭 밝히고 싶었던 것은 현 여성노동자 운동 단체들의 정책과 운동 경향에 간과해서는 안 될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어서이다.
2) 드루드 달럽, ‘개념의 혼돈-현실의 혼돈:가부장제 국가에 대한 이론적 고찰’(1989)
3) 임옥희, ‘국가페미니즘화와 개혁의 딜레마’, 당대비평 27 가을호(200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9·10월호][국제] 분노한 사람들, 광장으로 나오다

  • 분류
    국제
  • 등록일
    2011/10/07 13:41
  • 수정일
    2011/10/07 13:5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시위 텐트’라는 새로운 현상이 등장했다. 정부의 긴축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텐트를 가지고 하나둘씩 광장으로 모여들어 텐트촌을 형성했다. 이러한 흐름의 시작은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이었다. 2011년 초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했던 이집트인들은 타흐리르 광장을 중심으로 텐트를 치고 격렬한 거리시위를 이어나갔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이러한 형태의 투쟁은 독재 국가가 아닌 소위 ‘민주’적인 국가들까지 확산되고 있다. 스페인, 이스라엘, 그리스 심지어 미국의 맨해튼에서도 이러한 시위텐트가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스페인과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시위가 가장 대중적으로 벌어졌다. 이들 투쟁은 아랍의 봄 이후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대중투쟁의 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광장, 새로운 정치의 장이 되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대중시위가 매우 드문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드문 일이 이스라엘의 최대도시이자 경제 중심지인 텔아비브에서 벌어졌다. 지난 8월6일에는 이스라엘 인구의 4%인 33만여 명이 물가와 집값인상에 항의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시위를 진행한 것이다. 시위대는 “정권 퇴진, 이집트가 여기 있다”, “이집트인처럼 걷자”는 문구가 쓰여진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또한 텔아비브 로스차일드 거리를 중심으로 100여개의 시위텐트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는 이집트에서의 대중투쟁이 이스라엘에 미친 영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시위는 스페인에서도 벌어졌다. 타흐리르 광장을 모델로 한 스페인의 시위는 광장을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 만들면서 대중들의 정치적 급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지난 5월15일의 대규모 집회를 계기로 터지기 시작한 대중들의 시위는 도시 중심광장을 점거하고 해방구로 만드는 데까지 나아갔다. 마드리드에서는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이, 스페인 제1의 산업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는 카탈로니아 광장이 해방구가 되었다.
이들 광장은 정치적 토론과 참여, 그리고 실천의 장이 되었다. 광장 곳곳에서는 아이디어 상자들이 마련되어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적어서 표현할 수 있었다. 모든 종류의 문제들에 대해 자치적인 위원회들이 만들어졌다. “혁명은 곤드레 만드레 취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기치 하에 금주에 관한 자치규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투쟁의 향방은 참가자들의 총회를 통해 결정되었다. 이는 마드리드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스페인의 산업중심지인 바르셀로나 카탈로니아 광장에서는 시위가 시작된 지 이틀 후인 5월19일부터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총회가 즉석에서 만들어졌고 마드리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총회에 참가했다.
집권당인 사회당에 큰 타격을 준 지방선거 이후에도 광장점거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도, 6월12일에 광장점거를 해산하기로 한 결정도 참여한 사람들의 토론과 총회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총회와 각종 위원회에서 벌어진 투쟁의 성격과 지향점에 대한 다양한 토론은 집회참가자들의 정치적인 급진화를 낳았다. 광장 곳곳의 플래카드에서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분노한 사람들과 새로운 이스라엘인

 

이렇게 광장에 모이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분노한 사람들’, ‘새로운 이스라엘인’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 집단에는 상당히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스페인과 이스라엘에서의 시위 양쪽 모두에서 청년층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청년실업자들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스페인의 청년실업의 심각한 상황을 반영한다. 스페인의 청년실업률은 45.7%로 15세에서 24세 사이의 청년 두 명 중 한 명이 실업상태에 있다. 일자리를 구했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고 있으며 한 달에 600유로(약 96만원)로 살아야 한다. 남한의 88만원 세대와 같은 꼴이다. 광장점거의 현장에는 “직업도 집도 연금도 없다, 대신 두려움도 없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리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하이파 지역에서 벌어진 시위

 

이스라엘에서 높은 물가와 집값에 항의하면서 벌어진 시위 역시 200여 명의 청년들이 청년층을 위한 임대주택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시위참가자 중 젊은 층의 비중 역시 높다. 그러나 청년들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도 함께 하고 있다. “세 가지 일을 해도 먹고 살기 어렵다”는 구호를 통해 이 시위에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는 노동자도 함께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여러 언론매체에서 서술한 것처럼 중산층의 참가 역시 두드러진다. 의사와 같이 전통적으로 중간계급이라고 여겨졌던 사람들도 현실적인 임금과 적절한 휴식보장을 요구하며 시위에 함께하고 있다.
2008년부터 이어진 긴축조치 반대운동과 달리 스페인과 이스라엘의 시위가 기존의 노동운동과 결합하는 모습은 아직 찾기 어렵다.
2008년부터 유럽 곳곳에서는 정부의 복지재정 삭감과 긴축조치에 반대하는 여러 투쟁들이 있어왔다. 이러한 투쟁들은 상당 수 노동조합을 통해서 조직되었고, 총파업과 같은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드러났다.
가장 대표적으로 2010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연금법 개악 반대 시위에서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노동자 모두가 참여하는 총파업이 벌어졌고 정유노동자들의 공장점거도 이루어졌다. 또한 영국에서도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조직한 투쟁과 파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들 나라에서 노동조합연맹체들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확대시키기보다는 몇번의 보여주기식 시위로 마무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반면 스페인과 이스라엘의 시위는 노동조합 조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개인들이 조직되는 이러한 시위에서 노동현장을 기반으로 한 행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은 스스로를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라기보다는 ‘분노한 자들’이나 ‘새로운 이스라엘인’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들 시위의 집회가 생산현장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조직되는 것과 관련있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요구가 현장을 중심으로 한 요구를 거치지 않고 국가 자체에 대한 요구로 표출된 것과 연관이 있다.

 

SNS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잇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이하 SNS)는 사람들을 광장으로 이끌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SNS의 대표주자인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이미 튀니지 혁명과 이집트 혁명에서 발빠른 전령사 역할을 해냈다.
예전에는 공동의 공간(생활공간인 지역이든 생산의 공간인 현장이든)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를 뛰어넘어 개인들이 직접 소통하며 시위에 참가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SNS의 발달은 개개인이 직접 다른 개인들과 투쟁 소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물론 온라인에서의 행동들이 현실의 시위와 투쟁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SNS가 현재 상황에 불만을 가진 개인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있어 공간의 장벽을 낮추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페인에서 '분노한 사람들'이 모이게 된 최초의 시위인 지난 5월15일의 시위에서도 <미래 없는 젊은이들(호베네스 신 푸투로)>이라는 조직이 온라인상에서 시위를 조직한 것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SNS는 쌍방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공권력의 혹독한 탄압이 있었던 5월15일 저녁, 트위터에서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점거를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오갔고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시위텐트촌에는 그러한 아이디어들이 반영되었다. 온라인에서 시작하여 오프라인에서 만난 사람들은 총회를 통해 새로운 정치의 장을 만들어냈다.
이스라엘의 '사회정의를 위한 시위' 역시 SNS를 통해 조직되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중운동이 벌어지기 한 달 전, 이스라엘에서는 커티지 치즈 불매운동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김치처럼 매일 먹는 커티지 치즈 가격 급등에 항의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치즈불매운동을 시작했다. 이 시위에는 2주 만에 10만여 명이 참가했고 이 불매운동의 성과로 치즈의 소매가가 250g당 0.6달러 하락했다. 이러한 치즈 불매 운동이 확산된 것은 바로 페이스북을 통해서였다.
그 뒤에 이어진 사회정의를 위한 대중시위 역시 페이스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년 간 살던 건물에서 쫓겨나게 된 25세 청년 다프네 리프는 텔아비브의 엄청난 집값으로 인해 살 곳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하비마 광장에서 소규모 텐트농성을 시작했고, 집값 상승에 항의하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다. 이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온라인상의 사람들의 호응이 이어졌고 텔아비브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텐트 시위가 벌어졌다.
이처럼 SNS가 대중운동에 활용되는 양상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SNS는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어 참가자들이 직접 다양한 사안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를 통해 투쟁이 조직되고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의 요구 - 진정한 민주주의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이나 ‘새로운 이스라엘인’들은 모두 현 집권세력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서 국가적 차원의 대안을 요구하고 있다. 두 시위에 참가하는 대중들은 공통적으로 긴축조치, 복지삭감에 반대하고 복지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구체적인 요구는 복지의 확대로 드러나고 있으나 시위대의 플래카드나 피켓, 발표되는 선언문을 보면 복지 요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스페인의 시위참가자들이 담벼락에 붙은 글들을 유심히 보고 있다

 

대중들의 불만은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현재 구조 자체가 형식상 민주주의적일지라도 본질적으로 소수 정치엘리트와 자본을 위한 과두제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넘어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스라엘 시위보다는 스페인의 시위에서 잘 드러난다.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라는 단체는 스페인의 5월15일 시위를 조직하는데 큰 역할을 한 시민단체들의 연합체로 이들의 선언문에서 현재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만과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엿볼 수 있다.
이 선언문에서 시민들은 소수의 부를 축적시키기 위한 기계의 부품역할을 하고 있을 뿐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선언문은 정치인 ‘계급’ 역시 대중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시키기 보다는 소수의 경제적인 힘이 있는 사람들의 이해만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대중을 외면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소수만을 대변하는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사회노동당과 인민당의 양당제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스페인 시위의 핵심쟁점 중 하나인 선거제도 개정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은 사민주의적인 사회노동당과 우익인 인민당으로 이루어진 양당제가 형성되어 있으며 현재 집권당은 사회노동당이다. 하지만 사회노동당 역시 긴축조치를 밀어붙이면서 복지를 축소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은 사회노동당이든 인민당이든 대중들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현재 존재하는 양당제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러한 대중의 불만은 시위뿐만 아니라 선거에 무효표를 던지는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특히 시위가 한창이던 5월22일 치뤄진 지방선거에서는 야당인 인민당이 승리하기는 했으나 이와 동시에 역대최대의 무효표가 나오기도 했다.

 

분노의 세계화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과 ‘새로운 이스라엘인’들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즉각적인 복지의 확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유럽의 경제가 휘청이고 있는 상태에서 국가재정의 확충을 통해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대중의 불만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자본의 이해가 아닌 사회구성원들의 이해가 반영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지만 이에 대한 대안은 아직 불분명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비록 대안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있지는 못하지만 대중의 분노와 직접적인 행동은 온라인을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이 최근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중적인 투쟁의 흐름을 ‘분노의 세계화’라는 말로 표현했을 정도다. 다른 나라의 투쟁에 대한 동조시위 역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아랍의 봄은 이후에 벌어지는 시위에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다. 스페인의 시위가 한창일 때, 프랑스 곳곳에서는 동조시위가 벌어졌으며 이집트 혁명에서 보여준 광장점거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 월스트리트 시위의 모델이 되었다. 최근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투쟁들은 ‘아랍의 봄’ 이후 일련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9,10월호][경제]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경제 위기

  • 분류
    경제
  • 등록일
    2011/10/07 13:15
  • 수정일
    2011/10/07 13:5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장기침체와 위기의 시대가 도래하다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저항운동이 늘어나고 있다. 사진은 월스트리트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

 

지난 9월23일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8개 그리스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두 단계 강등했다. 이틀 전인 21일에는 미국 최대 상업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신용등급이 한 단계 강등됐고 프랑스 은행들 역시 얼마 전 신용등급 강등을 겪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재정위기를 거쳐 다시 금융위기로 돌아오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한발 한발 위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각국 정부는 이렇다 할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위기에서 재정위기로


2007년 말 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서브프라임 사태)에서 시작한 금융위기는 베어스턴스와 리먼브러더스, AIG 라는 거대 금융기관까지 무너트렸고, 이후 세계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침체에 빠졌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국 정부는 재정 지출을 늘리고 돈을 마구 찍어냈다. 한두 국가만의 정책으로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각국 정부들의 협조 체계 구축이 논의되기도 했다.

한편 학계와 언론에서는 금융위기의 주범인 금융기관에 거센 비판이 쏟아지고 지나치게 비대해진 금융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후 주류에서 밀려났던 케인즈주의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금융에 대한 통제와 국가 개입을 강화하여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각국 정부가 쏟아낸 경기부양책으로 금융위기는 어느 정도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산업 생산과 경제 성장률이 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는 등 세계 경제는 차츰 위기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는 위기를 지연시키는 것이었을 뿐 해결한 것이 아니었다.

부도 위기에 빠진 금융기관을 구제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재정을 쏟아 부었고 이는 국가 부채의 증가와 국가부도 사태로 이어졌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유럽 국가에서 연이어 재정위기가 터져 나왔고 IMF와 유로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위기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로존의 핵심국가들로 번져나가고 있으며,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인 미국이 신용등급 하락이라는 치욕을 겪는 등 선진국에서 국가 부채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재정위기가 다시 금융위기로


최근에는 국가 재정위기가 다시 금융기관의 위기로 전이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9월14일 무디스는 프랑스 2, 3위 은행인 소시에테 제네랄과 크레디 아그리콜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강등한데 이어 21일에는 미국 최대 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3, 4위 은행인 웰스파고 및 시티그룹의 신용등급을 강등했다. 같은 날 스탠다드앤푸어스(S&P)는 이탈리아 7개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강등했다.

프랑스 은행들은 그리스 국채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 이탈리아 은행들은 자국 국채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 신용등급 강등의 주된 원인이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재정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이 나라 국채를 소유하고 있는 은행들의 자산 가치 하락이 우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미국 정부가 금융기관에 대한 지원을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신용등급 강등의 이유로 뽑히고 있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금융기관들은 자금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들의 신용등급이 강등되면 이들 국가의 국채 가격은 하락하고 이는 그 채권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 금융기관의 자산 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정위기로 인해 각국 정부의 재정 상황도 좋지 않아 지원을 바랄 수도 없는 형편이다. 한편 독일 최대 전자기업인 지멘스가 프랑스 은행에서 5억 유로를 인출해 유럽중앙은행에 예치하는 등 대량 인출사태의 징조마저 보이는 상황이다.

미국이 두 차례에 걸쳐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달러를 풀어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선진국 은행들은 달러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만약 선진국 금융기관들이 자금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신흥국에 풀어놓은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한다면 선진국의 재정, 금융위기는 순식간에 신흥국으로 번질 것이다. 세계 경제가 다시 3년 전의 악몽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재정위기가 갈수록 심각해직 있지만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왼쪽부터 오바마 미국 대통령, 버냉키 연준 의장,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메르켈 독일 총리


미봉책만 내놓는 각국 정부


이번 재정위기를 3년 전의 금융위기와 비교하는 기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파생상품 손실이 어디까지 번져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던 3년 전과 달리 각국 부채 규모는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충분히 대응 가능하다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다. 하지만 위기가 눈에 보이게 착착 진행되고 있지만 각국 정부는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정부나 중앙은행이 내놓는 해법들은 단기적인 미봉책에 그치고 있다.

유럽에서는 재정위기 해결 방안을 놓고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신용등급 강등으로 위기를 맞은 국가들의 채권 가치가 곤두박질 치자 유로존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해 유로존 국가가 공동으로 채권(유로본드)을 발행하자는 대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신용등급이 좋은 이들 나라들로서는 현재보다 더 높은 금리로 채권을 발행해서 부담을 떠안는 것이 달가울 리 없다. 유로존 내 1, 2위 경제국인 독일과 프랑스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이지만 두 나라 모두 자국 국민들의 여론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남유럽 국가들에 대한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가 유로존을 이탈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그리스는 통화 가치가 절상되는 효과를 보았다. 이 때문에 수출 상품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국제수지 적자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9월 중순에는 독일에서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을 묵인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유럽 증시가 일제히 폭락하는 일도 벌어졌다.

지난 9월21일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단기 국채를 팔고 그 돈으로 장기 국채를 사는 이른바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기준금리가 사실상 제로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금리인하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기 국채 매입을 통해 장기 금리 하락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연준이 그 정도의 부양책을 쓸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이다. 그 이상의 부양책을 바라고 있는 시장의 기대를 연준의 대책이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뉴욕 증시는 실망감으로 크게 하락했다.

24일에는 미국 상원이 연방정부의 임시 예산안을 부결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미 지난 정부 부채 증액 협상에서 오바마 정부는 공화당의 강한 반대를 뚫지 못하면서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 이번 예산안 부결로 연방정부 일부가 폐쇄될 가능성이 발생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리더십은 더욱 큰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케인즈주의의 붕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시도들이 전혀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세계 증시는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각국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정책수단은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세계경제는 장기적인 침체 국면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이런 양상은 그동안 2차 대전 이후 세계경제 질서의 기초였던 케인즈주의와 브레튼우즈 체제의 수명이 완전히 다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각국 정부는 케인즈주의 정책을 통해 위기를 관리해 왔다. 1929년의 대공황이 전형적인 과잉생산 위기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소비를 자극해서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케인즈주의 방책이 환영받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를 위한 주요 정책 수단은 각국 정부의 재정정책과 통화량 조절이었다.

70년대 중반 세계경제가 이윤율 위기를 맞자 신자유주의가 주류 이데올로기로 떠오르고 케인즈주의는 흘러간 노래처럼 취급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위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케인즈주의적인 재정·통화정책은 여전히 정부가 경제를 관리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최근 상황은 이런 정책들의 약발이 다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정부 지출 증가는 재정 적자 증가를 불러와 국가부도 상황을 낳고 있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풀어놓은 화폐는 물가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애초에 위기의 시발점을 제공했던 미국경제의 불안은 세계경제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기본질서는 브레튼우즈 체제에 의해 규정되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미국 달러화를 자본주의 경제의 기축통화로 결정함으로써 미국정부와 중앙은행에 국제경제의 최종 조정자, 정부 위의 정부의 위치를 부여했다.

문제는 이런 체제가 미국의 무역수지 흑자와 재정 건전성이 유지될 때만 제대로 작동하는 체제라는 데 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무역수지가 적자로 바뀌고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군비지출로 재정지출이 급증하자 미국정부는 형식적으로나마 유지해오던 금과 달러의 태환을 중지시키고 금보유량의 속박에서 벗어나 달러화를 마음대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세계경제가 침체할 때마다 미국이 발행하는 막대한 달러화는 세계경제에 마약 같은 자극제가 되었지만 그 결과 미국의 재정적자와 무역수지 적자는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증가하여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90년대 이후 미국이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거품에 의해서였다. 부동산과 주식 등 미국의 자산가치가 막대했기 때문에 미국을 빠져나간 달러는 다시 미국으로 투자되었다. 2001년 신경제가 창출한 주식 버블이 터지자 부동산 버블이 이를 대신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사태로 부동산 버블마저 터지자 세계경제는 본격적으로 혼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달러 홍수 속에 숨겨져 왔던 각국의 재정적자가 순식간에 실체를 드러냈다.

  

브레튼우즈 체제 (Bretton Woods system)
 

2차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44개 연합국의 대표들이 모여 전후 경제 질서에 대해 논의했고, 이후 이 합의에 기초한 경제 질서를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미국은 영국 대표로 참여한 케인즈 등의 반대를 뚫고 자국 통화를 세계경제의 기본통화로 하는 방안을 관철시켰다. 대신 미국 중앙은행이 금 1온스 당 35달러의 비율로 달러와 금의 태환을 보장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통화가치를 달러를 기준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이를 관장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을 설립했다.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50년에서 70년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이 체제는 달러라는 일국의 화폐를 세계경제의 기축통화로 정함(케인즈는 금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공용의 국제화폐를 창설하자고 주장)으로써 미국의 무역수지와 재정 상태에 따라 불안정해 질 수 있는 약점을 내재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이 60년대 후반 이후 무역적자와 재정적자 상태에 빠지게 되자 71년 미국정부가 달러와 금의 태환을 정지시키면서 금본위제가 와해되고 브레튼우즈 체제는 부분적으로 붕괴되었다.


보이지 않는 대책


이윤율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8·90년대 이후 진행된 세계화의 흐름 또한 본질적으로 일국적인 경제관리 체제인 케인즈주의 정책을 무력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각국의 금융시스템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국민경제 내에서의 정책수단으로는 세계적 차원의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하지만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에서 만들어진 IMF나 세계은행 같은 기구도 현재의 혼란에 대해서는 무능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국민국가들은 거대화된 자본의 힘을 통제할 방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방출한 막대한 달러는 초국적인 금융자본으로 둔갑하여 세계경제를 더욱 교란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고 하지만 각 국가들 간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예를 들어 EU의 등장은 자본의 세계화 흐름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 단일화폐의 설립이 오히려 국민국가의 경제통제 수단인 통화관리 권한을 박탈해서 위기를 더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반면 EU 전체 차원의 통일된 재정정책은 각국 정부가 처한 상황과 이해의 차이로 말미암아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 같은 유로존의 경제대국들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 급급할 뿐이다.

2차 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제체와 같은 국제적인 합의체제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 블록의 위협 속에 미국이 정치·군사·경제 모든 분야에서 슈퍼파워로 떠오르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의 경제적 파워가 급속히 하락하고 있고 이를 보장해주고 있던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대체할 힘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지난 십년 동안 중국이 미국의 라이벌로 떠오르고 있지만 중국이 미국과 같은 위치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다. 새로운 국제적 경제 질서를 추동할만한 중심축이 없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위기에 대한 대응은 계속 상황에 따른 단기적인 대응책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각국 정부는 과다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긴축재정과 복지삭감에 나서는 한편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물가관리를 포기하고 통화량을 늘리는 모순적인 미봉책들에 매달리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만은 최근 현재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장기침체와 위기의 시대


정부가 아무런 미래의 전망도 보여주지 못한 채, 사회구성원들의 희생과 고통분담만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2001년 9·11 사태 이후 잠시 주춤했던 각국의 반정부 운동들이 급증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남부유럽 국가들이나 중동 국가들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도 대중운동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여전히 케인즈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앞서 보았듯이 케인즈주의의 시효는 이미 끝난 것이 명확하다. 흔히 케인즈주의가 대공황의 늪에서 세계 경제를 구해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공황을 끝낸 것은 뉴딜이라기보다는 전쟁이었다.

대공황에서 세계경제를 구한 것이 뉴딜이 아니라 2차 대전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최근 미국이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쟁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반쯤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현재 세계경제가 맞고 있는 위기는 이처럼 심각하다. 자본주의는 다시 20세기 전반기와 같은 장기적인 위기와 갈등의 시대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9,10월호][한반도] 제주 강정마을의 갈림길 : 국가안보와 민주주의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9/23 11:13
  • 수정일
    2011/10/07 13:4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제주 강정마을에 공안당국의 칼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8월26일 대검찰청은 2009년 쌍용차 사태 이후 2년여 만에 경찰청, 국방부, 국군기무사령부 등과 함께 ‘공안대책협의회’를 열었다. 곧이어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공사를 막거나 공권력 행사를 방해할 경우 중대한 공안사건으로 규정, 엄단하겠다는 방침이 발표되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8월 이후 육지에서 파견된 600여명의 경찰병력은 9월2일 새벽 강정마을을 기습봉쇄하고 토끼몰이식 검거작전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3명이 체포되고 35명이 연행되었다. 경찰의 비호 아래 해군은 철제 펜스를 설치해 주민들의 공사현장 진입을 완전히 차단했다.

육지에서 공수된 공권력에 의한 탄압은 1948년 4.3사건 이후 63년 만에 처음이다. 제주에서는 지금 현대사의 비극이 재현되고 있다.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들과 평화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빨갱이’로 매도되고 있다. 국가권력의 탄압과 보수진영의 색깔론 공세는 강정마을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실종된 민주주의

집권 후반기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공안탄압 속에서 이명박은 제주 해군기지 공사재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9월2일의 전격적인 공권력 침탈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는 9월3일 강정마을 평화문화제에 대비한 사전작업 뿐 아니라 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이겠다는 정권의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해군기지 건설공사는 그동안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해군기지에 대한 제주지역의 여론악화와 강정마을 주민들의 반대운동으로 지난 2월에 가진 착공식조차 비공식적으로 치러졌다. 그러자 해군은 6월 들어 돌연 강정포구 일대에서 바지선을 이용한 해상 준설작업을 시도했다. 이후 이명박 정권의 일방통행은 해군기지 반대운동에 대한 전방위적인 탄압공세 속에서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지난 9월2일의 공권력 침탈 (사진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7월 조현오의 제주방문을 계기로 경찰청은 강정마을 인근에 경찰병력을 배치하며 강경대응을 예고했다. 8월 중순부터는 수도권의 경찰병력과 물대포, 진압장비 차량 등을 제주로 보내며 압박수위를 높였다. 경찰의 이러한 행보는 6월 이후 반값 등록금 운동과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로 활성화 되었던 대중운동의 흐름을 공안정국 조성으로 차단하려 한 정권의 노림수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공사재개를 위한 여론조작과 해군기지 반대운동에 대한 탄압명분을 위해선 조금 더 자극적인 공안몰이가 필요했다. 경찰청과 국방부는 ‘작품’ 만들기에 들어갔고, 그 결과물이 지난 8월24일 강정마을 주민들과 경찰 사이에서 유도된 충돌사태였다.

이날 해군은 국방부 출입기자단의 강정마을 방문에 맞춰 몇 달째 방치되어 있던 공사설비를 갑자기 가동했다. 곧바로 주민들의 ‘거친 항의’가 이어졌고, 여기에 현지 경찰의 ‘무기력한 대응’이 한데 뒤엉키게 되었다.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강정 해군기지에서 본 비굴한 공권력”(조선일보), “김밥 맞고 쫓겨난 초라한 공권력”(중앙일보)이라고 보도하며 강력한 공권력 행사를 주문했다.

더구나 8월29일 법원이 공사방해금지 가처분결정을 내림에 따라 마을주민들은 해군기지 공사장에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위반 시 1인당 1회 200만원의 벌금까지 내야하는 실정이다. 때문에 9월3일 2,000여명이 운집한 평화문화제는 당초 예정된 해군기지 사업부지내 구럼비 바위 일대가 아닌 공사장 밖 강정마을에서 진행되었다.

현재 강정마을에서는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공권력의 무력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은 집회결사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와 같은 민주적 권리마저 무력화시키고 있다. 국가안보라는 잣대 앞에서 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상식적인 비판과 합당한 문제제기 모두가 가로막히고 있다.

이명박과 노무현의 마주침

국가안보를 앞세운 일방주의 앞에선 처음부터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지난 2007년 노무현 정권은 해군기지 입지를 강정포구 일대로 선정하면서 정작 강정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견수렴에 대해선 철저히 외면했다.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마저 지켜지지 않았고, 오로지 ‘절차적 폭력’만이 난무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졌다. 2007년 4월26일, 해군기지에 대한 정보공개는 물론 토론회, 설명회조차 부재한 상황에서 강정마을 전체주민 1,900여명 가운데 불과 80여명만이 마을임시총회를 급하게 소집해 해군기지 유치를 만장일치 박수로 결정했다. 당시 정부와 해군에 의해 회유·매수된 단 5%에 해당하는 찬성주민들의 독단적인 결정은 이후 해군기지 건설의 가장 주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이 때문에 2007년 8월10일 다시 열린 마을임시총회에서 기지유치 결의를 주도한 마을이장이 해임되었고, 8월20일 ‘해군기지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에선 1,100여명의 유권자 중 725명이 참가해 유효투표수의 94%인 680명이 반대의사를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을주민 대다수의 반대의견은 끝내 반영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민주적 합의과정은 없었다.
 

 

2007년 9월 제주도청 앞 해군기지 반대집회

(사진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국가안보와 직결된다는 국책사업의 강압적 집행에선 노무현 정권이든 이명박 정권이든 다를 바 없었다. 이는 국가권력을 움켜쥔 집권세력 모두의 공통된 속성임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집권 이후 ‘노무현 지우기’에 나섰던 이명박은 한미FTA에 이어 제주 해군기지에서 또 다시 노무현과 마주치고 있다.

노무현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보수세력은 아예 반노에서 친노로 ‘화려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종북좌파 세력”의 소행으로 낙인찍으며 강경 여론몰이를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때 아닌 ‘노무현 정신계승’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는 국가안보를 위한 필수요소”라는 집권시절 노무현의 어록을 뒤적이며 해군기지 건설의 필요성을 노무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고 있다.

더 나아가 조선일보는 사설과 칼럼을 동원해 “요즘 야당가엔 한때 내로라하던 정치인들이 골수좌파들의 뒤꽁무니를 쫓는 풍경만 보인다”며 자유주의 세력들의 말 바꾸기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노무현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 정작 해군기지 건설에서 제동을 걸자, 과거 이들이 기지건설에 적극 찬성했던 이력을 낱낱이 공개하며 시류에 편승해 노무현의 정책을 훼손하고 있다고 일갈한 것이다.

이처럼 자유주의 진영의 경우 그 대다수가 ‘반MB’ 차원에서 현 정권의 해군기지 건설에 부정적인 데 반해, 노골적인 찬성의 목소리는 지금은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문정인 정도가 유일하다. 노무현 정권 때 동북아시대위원장으로 재직한 대표적 친노인사 문정인은 노무현의 자주국방 정책을 되풀이하며 제주 해군기지를 옹호하고 있다. 도리어 “해군기지가 우리의 국익을 위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면 누가 감히 반대하겠는가” 하면서 큰소리치고 있다.

문제는 노무현과 이명박으로 각각 대표되는 양대 진영이 집권세력으로서는 그토록 신성시 하는 국가안보의 실상이다. 개혁과 보수를 각각 외치는 세력들 사이의 해묵은 이념적 갈등을 떼어놓고 보면 이들은 결국 하나같이 국가안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속에서 남한의 군비팽창을 꾀하고 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논란은 멈출 줄 모르고 팽창하고 있는 남한의 군비증강에서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남한의 군비증강과 신냉전의 섬

보수진영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집권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이 기간 동안 남한의 국방비는 대폭 증가했다. 특히 노무현 정권은 자주국방의 깃발을 펄럭이며 국방비를 해마다 9% 안팎으로 늘렸다. 오히려 국방비 증액은 이명박 정권 들어 감소세를 보였다. 천안함 침몰 이전만 해도 이명박은 특유의 경제논리를 앞세워 국방비 증가율을 3%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친미국가인 남한에서 노무현의 자주국방 정책은 남한의 보수세력은 물론 미국과도 일정한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은 노무현이 대선후보 시절부터 “반미면 어떠냐”며 밝힌 자주적이고 수평적인 한미동맹관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고, 남한의 보수세력은 이런 미국과의 불협화음과 대북 안보불안을 내세우며 노무현과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각을 세웠다.

게다가 노무현 정권은 2002년 제2차 북핵위기의 후폭풍과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등으로 주도적으로 개입한 대북관계마저 스텝이 꼬이면서 애초에 구상했던 ‘동북아 경제중심국가’를 이끌어 나갈 동력 또한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무현은 현존하는 미국의 힘을 반영한 ‘선진형 개방통상국가’로 방향을 선회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 결과 자주국방 정책 앞에도 ‘협력적’이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붙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기조의 변경에는 남한 내 보수세력과 미국이라는 기존의 갈등요인 외에도 급부상 중인 중국의 ‘잠재적 위협’ 역시 비중 있게 고려되었다. 중국이 매년 10%를 넘나드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국과 대등한 국력을 갖기에는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판단과 그럼에도 중국의 국력확장이 동북아의 지역질서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는 견제심리가 복합적으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노무현의 ‘협력적 자주국방’은 당시 부시 행정부의 동북아 패권유지 전략을 역이용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명명하고 대중국 포위에 적극적이었던 부시 행정부가 동맹국의 군사력 강화 및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체계 구축에 나서자, 노무현 정권은 당장은 미국의 우산 아래에서 한국군의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대신, 남한이 먼저 중국을 직접 자극시킬 수 있는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한미 양국의 절충된 이해관계에 따라 ‘대양해군’, ‘우주공군’으로 집약되는 한국군의 전력증강과 ‘전략적 유연성’으로 표현되는 주한미군의 재편은 동시에 나타나게 되었다. 제주 해군기지 프로젝트는 이러한 배경에서 추진됐다. 이후 동북아의 한복판에 자리 잡게 될 해군기지의 위상은 더 커졌다.

 

 

제주 해군기지 조감도 (사진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당초 기대와 달리 오바마 행정부는 이전 부시 행정부의 대중(對中) 봉쇄전략을 강하게 고수했다. 물론 2008년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선 중국의 경제적 위상을 고려해 중국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지만, 경제위기의 급한 고비를 넘긴 2010년부터는 이전의 태도로 되돌아갔다. 현재 압도적 우위를 점한 미국의 군사력으로 중국의 기세를 누르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러나 뼛속까지 친미라는 이명박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해군기지 건설은 한동안 지지부진했다.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를 미루는 등 국방역량에서 대미의존성을 강화한 이명박은 천안함 사건 이전만 해도 한국군의 전력강화를 위한 국방비 증액에는 소극적이었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군사비 지출을 대폭 늘리긴 했지만, 그것 역시 육군을 강화하고 해군과 공군은 미국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보수세력의 입장에 따른 것이었다. 더구나 천안함 침몰이 연안해역에 대한 방비소홀 탓이라는 보수진영의 비판에 이명박은 대양해군 정책을 폐기했고, 해군기지 사업도 우선과제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때문에 이명박이 그것도 집권 후반기에 갑자기 해군기지 공사강행을 서두르자 그 배경에 의구심이 일었다. 하지만 이명박의 해군기지 카드는 노무현 식의 대양해군으로 회귀보다는 올해 들어 더욱 노골화 되고 있는 한미 간 MD협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특히 ‘핵무기 없는 세상’을 표방하는 오바마 행정부는 핵무기 의존도를 줄이는 대신 MD구축에 공을 들이며, 해상에서도 미사일 요격을 위해 이지스함을 MD용으로 대폭 개량하고 있다. 동북아에서 미국의 MD전략의 거점기지로 제주 해군기지가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부각됨에 따라 이명박 또한 해군기지 건설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개혁과 보수를 막론하고 결과적으로 남한에서 확장일변도를 걷고 있는 군비증강은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남한을 ‘새로운 냉전’ 속으로 끌고 가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수면 위로 떠오른 미국과 중국 간의 신냉전 구도에서 남한은 어느새 동북아 군비경쟁 국가의 일원으로 나서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절대시 되는 국가안보 속에서 사회구성원 전체가 누려야 할 평화와 안전에 대한 요구는 매몰차게 묵살되고 있으며, ‘신냉전의 섬’으로 변모하고 있는 제주에서는 이미 현실로 등장했다.

직접행동과 평화

오늘날 남한은 이미 군사대국의 반열에 올라 있다. 2011년 현재 남한의 국방예산은 32조원대로 군비지출 규모만 세계 7~8위 수준이다. 2006~2010년의 5년 동안에는 세계 2위의 무기수입 국가로 등재되기도 했다. 동북아 주변국의 경계를 불러올 만큼, 세계적인 경제력에 걸맞은 세계적인 군사력 보유라는 군사대국화의 욕망은 남한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국방부 관료와 군부 엘리트, 그리고 군수자본 사이의 상호의존적인 결탁체제를 이르는 군산복합체는 남한에서도 발전단계에 이르고 있다. 한번 증액되면 결코 줄지 않는 화수분 같은 국방비의 지원을 바탕으로 몸집을 불린 방위산업체는 이제 세계 무기시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제조업과 연관된 방위산업의 핵심기업들은 그 자체로 남한의 수출 대자본이거나 그 일부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군용차는 기아자동차가, 함정은 현대중공업이, 자주포는 삼성테크윈이, 장갑차는 두산인프라코어가 맡고 있는 식이다.

이렇게 국가권력과 자본, 국가안보와 경제논리가 결탁한 ‘그들만의 리그’는 안보지상주의를 내세워 ‘그들만의 철옹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동안 사회구성원의 어떠한 비판이나 문제제기도 용납하지 않았다. 때로는 ‘북한위협론’을 내세우고, 때로는 ‘자주국방론’을 고취시켰던 안보이데올로기는 남한의 국가주의를 유지․강화시켜주는 버팀목으로 기능했다. 그 결과 남한의 국방정책과 군수산업은 사회적 감시와 통제의 무풍지대로 성역화 되었다.

 

 

지난 9월3일 강정마을 평화문화제 (사진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그러나 제주 강정마을에서 일고 있는 해군기지 반대운동은 ‘안보국가’로 군림한 남한의 금기를 깨고 있다. 무기를 생산하며 분쟁으로 먹고사는 군수자본과 이러한 방위산업의 이윤창출에 협력하며 국가안보를 체제질서의 한축으로 삼고자 하는 국가권력의 이해에 더 이상 순종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농어민의 생존권과 타협할 수 없는 가치인 평화를 지키기 위해 지난 2007년 이래 무려 4년 동안을 싸워 왔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권은 여전히 해군기지 공사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9월7일 공사장 안에서 건설업체들은 ‘강정의 상징’인 구럼비 바위를 깨기 시작했다. 그러나 둘레 1km에 이르는 용암 덩어리인 구럼비 바위 해안에서 울려 퍼지는 굴삭기의 참혹한 굉음소리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진정 누구를 위한 ‘국가안보’인지 따져 묻고 있다.

강정마을 주민들의 외침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공통된 이해이자 권리라는 것은 ‘평화의 비행기’, ‘평화의 버스’ 발걸음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9월3일의 강정마을 평화문화제는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결코 고립된 소수가 아님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위험천만한 군비증강과 이를 떠받드는 안보지상주의에 맞서 생존권과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는 공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움츠려들지 않고 있다. 지난 4년간 계속된 해군기지 반대운동에서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자발적인 연대와 지지, 직접적인 소통이며 그것의 확대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9·10월호][Focus]주민투표와 보이콧, 그리고 민주주의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9/21 13:58
  • 수정일
    2011/10/07 17:16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8월24일,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무상급식 지원범위에 대한 의견을 묻는 주민투표(이하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진행되었다. 이번 주민투표는 ‘소득 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 무상급식’을 실시하자는 안과 ‘소득 구분 없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는 2011년부터, 중학교는 2012년부터 무상급식’을 실시하자는 두 가지 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25.7%의 투표율을 기록하며 개표 유효 기준인 33.3%에 미치지 못해 투표함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로 마무리되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시장직까지 걸겠다던 오세훈은 결국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났고, 이로 인해 10월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갑작스럽게 치러지게 되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발생한 돌발변수로 정국은 또다시 술렁이고 있다.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서울시에서 처음 치러진 주민투표였다. 주민투표란 ‘주민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거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방자치단체의 주요결정사항에 관해 주민의 직접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로 투표권이 있는 주민 총수의 20분의 1이상 5분의 1이하의 범위 안에서 각 지자체 조례로 정해놓은 인원 이상의 서명을 받아올 경우, 주민투표의 실시를 청구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이번 주민투표가 민주주의와 지방자치 확대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서울시민의 손으로 서울시의 정책을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과연 단지 ‘무상급식’ 정책을 위한 투표였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주민투표 기간 내내 ‘무상급식’이나 ‘주민투표’가 가지는 의미들이 핵심적, 정치적 쟁점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거나 부각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번 주민투표에서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누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직접민주주의의 파괴를 걱정한 한나라당?

 

 

 

△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무상급식 주민투표 패배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당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주민투표를 처음 발의했을 때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해왔다. 투표율이 33.3%에 미치지 못할 것을 염두에 두고 주민투표에서 패배할 경우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불어 닥칠 수 있는 역풍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및 소장파 일부 의원들 역시 전면적 무상급식에 반대하지만 주민투표는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거리를 두면서도 전면적 무상급식에는 반대하다던 한나라당은 투표일이 점점 가까워오자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민주당의 전술에 대해 ‘투표장에 가지 말라는 것은 직접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시도’라며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대한 한나라당의 이 같은 주장은 사실상 아전인수 격 해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한나라당 역시 이미 지난 2007년 김황식 하남시 시장에 대한 주민소환, 2008년 김태환 제주도지사 주민소환투표에서 보이콧을 주장한 바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2007년 당시 김황식 하남시장과 2008년 당시 김태환 제주도지사는 모두 한나라당 소속으로 김황식 하남시장은 광역화장장 유치 문제로, 김태환 제주도지사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추진 문제로 각각 주민소환투표가 실시되었으나 이 역시 투표율 미달로 무산되었다. 


민주당은 왜?

 

무상급식 주민투표 보이콧이 직접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이라는 한나라당의 걱정(?)과는 다르게 보이콧이라는 말은 원래 1880년 영국의 한 귀족영지 관리인인 C. C. 보이콧이 소작료를 체납한 소작인들을 그 토지에서 추방하려다가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C. S. 파넬의 지도 아래 단합한 전체 소작인들의 배척을 받고 물러난 데서 생긴 말이다. 현재 보이콧이라는 말은 어떤 상품을 집단적으로 구매하지 않는 행위, 국제적으로 어떤 나라의 정책이나 행동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행위 등 사회적으로 폭넓은 분야에서 ‘조직적 거부’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왜 이번 주민투표에서 보이콧 전술을 택한 것일까? 민주당의 보이콧 전술은 어떻게 가능했으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민주당은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나쁜 투표’라고 규정하고, ‘나쁜 투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만약 이번 주민투표가 민주당 말대로 그저 ‘나쁜 투표’였다면, 민주당은 왜 투표장에 가서 전면적 무상급식을 선택하라는 말 대신 보이콧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민주당이 보이콧 전술을 선택한 이유에는 사실상 전반적으로 투표율이 낮아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민주당의 보이콧 전술은 대통령 선거 투표율도 50%를 밑도는 상황에서 무상급식 주민투표의 투표율이 33.3%를 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주민투표라는 형식의 ‘선거’에서 손쉽게 이기기 위한, 민주당 자신의 이해관계와 잘 맞아떨어지는 전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민주당은 주민투표 기간 동안 소극적인 행보만을 거듭했다. 민주당이 2012년 차기 대선 전략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보편적 복지와 무상급식의 연관성이라든가 정당성에 대해서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호소하지 않았다. 어차피 투표율이 높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민주당은 서울 시내 300여 곳에 플래카드만 걸었을 뿐 거리유세는 하지 않았다. 서울시가 8월 초, 중순에 걸쳐 수해복구 작업으로 주민투표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자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투표율이 33.3%에 미치지 못한 이유

 

 

 

△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에서는 투표율이 33.3%를 넘지 못한 것을 두고 전면적 무상급식과 보편적 복지에 대한 지지가 반영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럼 과연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야권의 해석대로 민주당의 보이콧 전술의 정당성에 대해 동의했기 때문에, 혹은 전면적 무상급식이나 보편적 복지에 찬성하기 때문에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일까?
몇몇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해보면 전면적 무상급식이나 보편적 복지에 대한 선호도와 주민투표와의 상관관계가 야권의 해석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8월 23일 미디어리서치에 의해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무상급식 방식에 대해선 단계적 무상급식에 대한 지지도가 58.8%, 전면적 무상급식에 대한 지지도가 39.1%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주민투표 이후 (같은 기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주민투표 결과는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 것'(48.4%)이란 응답이 '투표율이 유효 기준인 33.3%에 못 미친 것은 전면적 무상급식 실시를 서울 시민이 동의해준 것'(32.0%)이라고 응답한 비율에 비해 다소 높게 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편적 복지에 대한 지지도와 무상급식에 대한 지지도 역시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겨레>가 여론조사기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의뢰해 지난 8월 22~23일, 19살 이상 전국 성인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소득계층에 상관없는 '보편적 복지'에 대해서는 30.3%만이 동의한 반면, '선별적 복지론'에는 68.8%가 동의했다. 그럼에도 초중고 전면무상급식에 대해선 찬성(55.9%)이 반대(43.6%로)보다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즉, 대중들이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 투표율이 33.3%에 미치지 못한 이유는 전면적 무상급식이나 보편적 복지에 대한 선호도와 특별히 밀접한 연관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주민투표가 넘지 못한 벽, ‘정치적 무관심’

 

그렇다면 왜 서울시민들은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것인가? 서울시민들이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일단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사실상 ‘주민’에 의해 기획된 것이 아니라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 의해 기획되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이해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번 투표를 총지휘했으며 무상급식 주민투표 패배에도 불구하고 2017년 차차기 대선 후보 지지율에서 1위를 기록하기까지 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흥행하지 못한 이유에는 이외에도 무상급식이라는 이슈 자체의 한계, 즉 무상급식이 전체 대중들의 정치적 참여를 이끌어내기엔 다소 뒷심이 부족한 이슈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주민투표가 성사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단계적 무상급식에 대한 지지율이 전면적 무상급식에 대한 지지율보다 더 높았음에도 투표율이 33.3%를 넘지 못했던 것은 대중들이 이번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중들이 무상급식이라는 이슈에 대해 관심은 많았으나 자신의 의견을 정치적 행동으로 관철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직접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준 것은 한나라당이 비판했던 민주당의 보이콧이 아니라 정치적 무관심이었다. 오히려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주민투표를 무상급식이라는 이슈와 복지정책에 대한 논의가 확대되는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반한나라당 정서와 무관심에 영합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야권의 보이콧이 왜 정치적으로 초라해보였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들의 보이콧은 전사회적인 대중의 동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점차 심해지고 있는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에 그저 손쉽게 올라탄, 아무런 정치적 대안이 없는 소극적 보이콧이었기 때문이다.

 

제한된 권리로서의 주민투표

 

주민투표가 지방자치와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 고안된 제도임에도 대중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정치적 무관심을 넘어설 수 없었던 이유는 대중들이 ‘선거’나 ‘투표’라는 시스템에 참여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질서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투표가 비록 지방자치의 원리를 실현할 수 있는 기제라고는 하지만, 지방자치의 전권을 주민이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정책의 가부만을 결정할 수 있게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제한된, 불완전한 권리일 뿐이다.
제한된 권리로서의 주민투표나 주민소환제 같은 몇몇 제도들은 법제도적으로 허용된 범위 내에서의 정치참여만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의 전면적인 정치참여를 이끌어내기엔 역부족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영향력도 미미하다. 그렇기에 정치적 무관심이나 참여율이 낮아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한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과천시와 제주도에서는 각각 과천시장에 대한 주민소환투표, 제주도 해군기지 문제 해결을 위한 주민투표가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과천시에서는 주변 부동산 가격 하락을 불러올 수 있는 보금자리주택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과천시장에 대한 주민소환투표를 요구하고 있고, 제주도에서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추진되고 있는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을 막기 위해 제주도의회가 주민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주민소환제나 주민투표가 실제 지방정책의 집행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그리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정책집행에 대해 제동을 걸 수 있는 특별한 수단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의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포함하여 이제까지 시도되었던 모든 다른 주민투표 역시 참여율이 높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의 주민투표나 주민소환제 역시 얼마나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실제 정책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가속화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

 

 

 

△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그렇다면 ‘대체 누가 투표에 참여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주민투표 이후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주민투표 결과에 대해 ‘이만하면 선전했다’고 평가했다. 홍준표의 자가당착적인 논평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번 주민투표에서 한나라당에 대한 고정적인 지지층이 얼마나 되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확인된 25.7%라는 투표율은 어떤 상황에서도 늘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숫자이며, 이들이 항상 적극적으로 ‘선거’라는 시스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여러 언론에서 투표율과 각종 통계수치 등을 통해 이들이 주로 ‘강남3구’라 불리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에 거주하는 부유층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부유층의 투표 참여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과 대조적으로 부유층을 제외한 대중들의 선거 참여 비율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을 대변해주는 정당이 없다고 느끼는, 이른바 ‘부동층’ 혹은 ‘무당파’라 불리는 대중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무상급식 주민투표 이후 민주당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음에도 반(反)한나라당 지지 세력의 정치적 선택이 민주당 지지로 이어지지 않고 대신 안철수나 박원순에게로 쏠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안철수 현상’이 단순히 서울시장 보궐선거만이 아니라 2012년 대선 판도까지 쥐락펴락하며 정치판을 흔들고 있는 이유는 선거를 통한 정당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도가 급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선거’와 ‘정당’이라는 제도정치는 민주주의 확대를 통한 대중들의 정치참여 확대에 일조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배계급의 이해만을 위해 일하는 정치엘리트들에 의해 장악되어있다. 이처럼 제도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민주주의적 원리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대중들의 삶과 괴리 될수록 정치적 무관심은 증대하고 전사회적 민주주의의 위기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8월호][특집기획] 대공장 노조운동은 아직도 노동계급 운동의 중심인가

 

 

올해 금속 대공장의 임단협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무쟁의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완성차 공장들과 더불어 민주노조 운동의 주축을 이루던 공기업노조와 조선소노조들은 이미 오래 전에 어용이 장악했다. 현재 대규모 작업장들 중 민주노조 진명, 정확하게 말해 민주노총 소속으로 남아있는 것은 완성차공장 노조들 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민주노조라는 완성차 대공장노조들이 해고자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보이고 있는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런 현실 때문에 수 년 전부터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노동귀족이라는 질타가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장 운동의 모습은 전혀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있다.
[The Focus]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대공장 노동운동을 진단해보는 기획을 준비했다. [편집자]

연재순서
⑴ 대공장 노조운동은 아직도 노동계급 운동의 중심인가?
⑵ 복수노조와 주간연속2교대제는 대공장 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⑶ 사회주의자들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대공장 운동의 보수화라는 문제는 꽤 오래된 얘기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보여준 대공장 노동자들의 높은 단결력과 투쟁력은 다른 부분들에 비해 노동조건의 급속한 개선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전노협 투쟁에 대한 대기업 노조협의회들의 방관 등을 지적하며 대공장 노동자들의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90년대 후반까지는 금속대공장 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의 중심이자 전 사회적 투쟁의 전위부대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98·99년 대공장 노동자들은 비록 많은 한계를 보이긴 했으나 전 사회적인 구조조정에 맞서 가장 선두에 나서서 투쟁했다.
그러나 IMF 사태와 구조조정 이후 소위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대공장 정규직과 나머지 노동자들의 이해 차이는 매우 커졌다. 사회전반에 고용불안과 저임금 노동이 확산된 반면 자동차·조선·전자·철강 등 수출산업의 대자본들은 호황을 누렸고, 이에 따라 대공장 노동자들의 임금도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거의 사라진 대신 비정규직·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투쟁과 촛불투쟁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건 투쟁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이런 투쟁들을 방관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노동귀족이라는 비판이 보수언론 뿐 아니라 진보진영에서조차 쏟아져 나오는 형편이다.


노동귀족?


하지만 노동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그래도 여전히 노동귀족이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노동귀족이라는 말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독일의 사회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1885년 영국 노동운동의 보수화를 설명하기 위해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영국 노동운동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공장 노동자들과 대형노동조합에 소속된 숙련공들은 “15년 이상이나 고용주들이 그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도 고용주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 중 귀족을 이루고 있다” 는 것이었다.
엥겔스 식으로 말하면 남한의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 역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98·99년 사이 구조조정 시기를 제외하면 20여 년 동안 노동조건이 후퇴한 적이 거의 없다. 자동차·조선 등 민주노조운동의 주축을 이루는 금속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은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며, 이들 산업에서 정규직노동자들의 평균적인 임금은 6~7천만 원에 이른다.
물론 법정노동시간에 기초한 기본급은 130~150만 원 정도에 불과하므로 6~7천의 연봉을 받기 위해서는 주 40시간의 법정노동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 현대·기아 등 완성차 공장을 기준으로 할 때 대공장 노동자들이 그런 고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평일 8시간에 2시간 잔업을 하고 주말 특근 14시간을 해야 한다. 그 결과 금속대공장 노동자들의 평균노동시간은 현재 주당 60시간 이상에 이른다.
그런데 이런 장시간 노동은 대공장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공무원과 교사 등 일부 직종을 제외하면 모든 산업에서 남한 노동자들 대다수는 여전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OECD의 2010년도 통계연감에 따르면 남한 노동자들의 연간 평균노동시간은 2256시간(주당 약 45시간)으로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다. 작년 2월 통계청은 주당 54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가 674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2351만 명)의 28.7%를 차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평균 노동시간을 줄여주고 있는 것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저임금 단시간 노동자들로 보인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주당 26시간 이하로 일하는 단시간 노동자들이 220만 명이나 되고, 그 중 주당 17시간 이하로 일하는 노동자도 96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단시간 노동자들은 대부분 저임금 노동자들로 더 많은 시간 일하더라도 안정된 직장에서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싶어 한다. 물론 주당 50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150만 원 정도 밖에 못받는 노동자들도 대단히 많다. 이에 비하면 연봉 6~7천만 원은 장시간 노동을 감안한다 해도 대졸 정규직 초봉이 2600만 원 정도 되는 남한 사회에서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이 걸개그림처럼 강건한 남성노동자로 표상된 대공장 노동투사들이 억압
받는 모든 계층들의 투쟁을 이끌며 선두에 선다는 것이 90년대 운동의 일반
적인 인식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인식이 지금도 유효할까?

법제도적인 보장이 아니라 개별자본과 협약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금속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관계에 있으며, 비정규직노동자들의 4대 보험 가입률이 절반도 안될 정도로 낮은 남한의 복지수준에서 병원비· 학자금 지원, 명절휴가비, 주택융자 등 교사·공무원에 버금가는 수준의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다.
전반적인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시대에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누리는 이러한 지위가 특권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규직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우선채용할 것을 단협 요구에 넣은 현대차 노조의 예에서 드러난 것처럼 자신의 지위를 대물림하고자 하는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욕구는 이를 반영하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은 이제 벗어나고 싶은 계급적 굴레가 아니라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특권적인 지위인 것이다.
물질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사회적·정치적 의식도 중산층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사회· 노동· 정치 문제보다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재테크와 노후 전망에 더 관심이 많다.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기관이 아니라 안정된 생활을 지켜주는 울타리로 여겨지고 있다.
촛불투쟁 때처럼 사회적 동요가 확산되고 있는 시기에도 투쟁의 기운은 대공장의 벽을 넘지 못했다. 대개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대공장 노동자들은 촛불투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공장 내부 운동질서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소위 현장사안이 아닌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노조체계로 움직이는 데 익숙한 활동가들은 노조가 대여한 버스를 타고 오는 형식적 참여 이외에 자기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과거 투쟁에 있어 일반 조합원들을 동원하는 중추이자 노조 집행부가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일 때 아래로부터 비판자로 기능하던 대공장 현장조직들은 점차 대중투쟁의 구심이라기보다 공장 내부에 형성된 내부 정치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런 내부 정치시스템은 사측과의 관계에서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을 누가 많이 가져오는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 시스템에서 유사정당적인 역할을 하게 된 대공장 현장조직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노조 집행부에 올라가기 위해 조합원들의 실리적 욕구와 충돌하는 활동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실리주의를 표방하든 전투파를 표방하든 그 차이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가장 전투적인 활동가들은 해고와 구속으로 공장 밖으로 밀려나고 있지만 대공장 운동질서는 이를 방어하거나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2002년에 현대중공업 노조의 어용 집행부는 해고된 조합원들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했다. 해고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제 모든 대공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외관상 가장 전투적인 외피를 쓰고 있는 현장조직들과 집행부마저 투쟁과정에서 해고된 활동가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투파라는 <금속노동자의 힘>이 집권한 기아자동차노조는 이번 단협에서도 해고자 문제 해결에 전혀 의지를 보이고 있지 않다.


비정규직 노동자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보수성이 가장 극심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무엇보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문제이다. 금속대공장에서 비정규직은 주로 사내하도급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에서 근대적 산업화의 진척과 대공장 생산이 정착되며 사멸한 사내하도급이라는 고용형태는 남한에서 70년대 대공장 건설 시기부터 주요한 고용형태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87년 이전에는 정규직이나 하청이나 노동조건에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정규직과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본격적으로 차이가 나기 시작한 것은 소위 신경영전략이 도입된 90년대 이후부터로 보인다.
남한 자본이 2000년대 들어 세계시장에서 초국적 독과점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정규직노동자들과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 정규직 임금의 60~70%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있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확대에 기반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공장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정규직노동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차별적인 노동조건과 고용 불안정성을 감수하고 있다. 실제로 스스로를 비정규직노동자로 가장 먼저 자각하기 시작한 부위가 대공장 사내하청노동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대공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산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정규직에 대비해 자신들을 비정규직노동자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공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대중적인 투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03년부터였다. 2003년에서 2005년 사이 현대자동차 아산과 울산, 현대중공업, 금호타이어, 기아자동차 등 금속대공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조가 동시다발적으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2004년 금호타이어와 완성차 공장의 비정규직노조들이 잇따라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내면서 비정규직노조 건설은 철강과 전자 등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공장에서 건설되었던 비정규직노조들은 결국 노조로 안정화하는데 실패했다. 2005년 불법파견 투쟁이 사실상 패배로 돌아가면서 제조업의 비정규직노조는 대부분 식물노조가 되었으며, 어느 정도 노조로서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현대차의 세 개 비정규직노조(울산·아산·전주)는 모두 조직대상의 과반을 넘지 못하는 소수노조로 존재하고 있다. 조직대상 대부분을 조직하고 있는 유일한 하청노조인 기아차사내하청분회는 독자적인 교섭권과 쟁의권을 갖고 있지 못하다.

 

2008년 조직통합으로 해산된 기아비정규직지회의 파업투쟁 모습

 

 

 

 

 

 

 

 

 

 

 

 

 





남한에서 비정규직노조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보다 정규직노조의 벽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공장 정규직노조들은 예외 없이 사측의 탄압에 노출된 비정규직노조들을 외면했다. 그러나 기아자동차와 현대자동차 등지에서 비정규직노조가 탄압을 뚫고 현장세력으로 생존에 성공하자 정규직노조는 원하청연대회의와 같은 기구를 만들어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원하청연대회의는 그 이름과 달리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의 공동투쟁기구가 아니라 정규직노조가 자신의 교섭권을 이용하여 비정규직노조에 대해 간섭과 통제를 행하는 관리 기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직력이 취약하고 극심한 탄압에 노출된 비정규직노조들은 정규직노조의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규직노조가 중재한 사측과 정규직, 비정규직의 3자 합의구조는 비정규직노조에게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 정규직 주도의 대리교섭기구일 뿐이었다. 정규직노조는 사측과 비정규직노조 사이에서 브로커 역할을 하며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확대되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기아차비정규직지회의 사례는 이러한 통제의 극단적인 예이다. 화성공장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한 기아차비정규직지회는 당시 조직대상의 과반 이상을 조직하고 있는 유일한 대공장 비정규직노조였다. 2005년 봄부터 정규직노조는 기아차비정규직지회의 의사를 무시하고 정규직노조로의 직가입 캠페인을 시작해 결국 기아차비정규직지회를 붕괴시켰다. 하지만 기아차비정규직지회가 스스로 해산하고 통합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규직노조는 지회자체가 분회로 전환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개별 가입원서를 쓰도록 요구했다.
기존 비정규직지회의 정통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비정규직지회의 조합원으로 인정되었던 2·3차 하청업체 출신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문제가 수년째 해결되지 않는 것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1사1조직 관철 이후 사내하청분회로 이름이 바뀐 기아차비정규직지회는 쟁의권과 교섭권을 가지지 못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상급단체 금속노조의 방침인 1사1조직이 실현된 곳은 몇 군데 있지만 기존에 비정규직노조가 존재하고 있던 사업장 중에서 “조직통합”이 된 곳은 기아차 뿐이다. 이는 다른 대공장에서는 비정규직노조가 현장의 불안요소가 될 만큼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아차를 제외한 다른 사업장에서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노조에 대해 여전히 무시와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불법파견정규직화 투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경우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이 확대되던 시기에는 정규직 활동가들로부터 1사1조직 얘기가 살살 흘러나왔지만 점거투쟁이 접히고 노조의 조직력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1사1조직 논의는 다시 쑥 들어간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공장에서 안정적인 교섭구조를 흔드는 불안요소가 발생했을 때, 자본과 정규직노조가 함께 그 요소의 발전을 원천봉쇄하고 필요한 때는 노조를 깨면서 까지 통제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공장 정규직노조가 자본의 대리자로 기능하며 현장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대공장 투쟁의 부상과 신경영전략

남한에서 대공장 운동의 보수화는 크게 두 번의 계기를 거치며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90년대 초중반 신경영전략에 대한 대응에 실패하면사, 그리고 두 번째로는 98·99년 구조조정 분쇄투쟁이 패배한 영향이 크다.
우리가 흔히 대공장이라고 부르는 대규모 금속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 노동운동의 중심은 수도권에 소재한 중소영세사업장이었다. 몇 차례 폭동에 가까운 소요들을 제외하면 조직적인 대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85년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이 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방에 있는 대공장의 경우 80년대 노동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학생출신 활동가들의 현장이전이 상대적으로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80년대 많은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현장으로 계급적 이전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구로나 인천 등 수도권 사업장에 집중되었다. 지방에 있는 금속대공장으로 현장이전은 거리와 취업절차 등 여러 장벽으로 안해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87년 이전에도 몇몇 대공장에서 노조 건설을 염두에 둔 소모임 활동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나 구로·인천 등지의 활동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70년대 국가정책에 의해 추진되어 수출과 자재 수입이 용이한 남부 해안도시에 주로 건설된 금속대공장 노동자들은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억압적 보나파르티즘 체제 하에서 소위 병영통제를 통한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시달렸다. 가혹한 착취에 맞선 노동자들의 집단적 반발이 소요 형태로 터져 나오는 경우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이럴 경우 공권력이 직접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했다.
하지만 87년 노동자대투쟁과 함께 대공장 노동운동은 남한 노동운동의 전면에 극적으로 등장했다. 새로운 대공장 운동을 이끈 것은 무엇보다 조선과 자동차공장들이었다. 87년 투쟁을 통해 이들 대공장에서 형성된 공장 질서는 전투적이고 적대적인 투쟁의 장이었다.
산별노조 설립을 금지하는 노동악법으로 말미암아 대공장의 민주노조 운동은 불가피하게 기업별노조의 형태를 띠었다. 이는 이후 지속적으로 대공장 운동의 약점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대공장의 기업별 노조는 총회민주주의라는 직접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에 기초한 아래로부터 전투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초기 대공장 기업별 노조의 역동적인 힘은 서구에서 관료적 산별체계를 뚫고 현장의 계급적대성에 직접 기초한 투쟁성을 보여주었던 샵 스튜어트 운동이나 공장평의회 운동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2010년 현대중공업 임단협 조인식. 95년부터 무쟁의 사업장이었던 현대중공업은
2002년 이후 어용세력이 계속 집권해 오면서 2002년 해고자 청산, 2009년 임금교섭권

회사 위임 등 파격적인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출처 : 연합뉴스)


이 시기 대공장노조는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 속에서 자본과 단체협약 체결을 강제하며 노동조건의 폭발적 개선을 이루어냈다. 3저 호황으로 생산이 확대되고 있던 대자본들은 새롭게 조직된 노동자들의 요구에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불과 3~4년 사이에 대공장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두 배 이상 올랐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기에 노동자들의 요구에 하청의 직영화가 들어 있었고, 실제로 그 결과 대공장에서 사내하청이 없어지거나 감소했다는 점이다.
90년대 초반까지 조선과 자동차 산업에서 자본은 민주노조에 현장의 주도력을 빼앗겼다. 조선과 자동차 사업장들은 몇 년 사이에 남한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대공장 노동운동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본은 90년대 중반부터 소위 신경영전략을 통해 대공장 현장권력의 재탈환을 시도했다. 이는 90년대 초반 3저 호황이 끝나는 국면과 맞물려 있었다. 신경영전략은 종래의 노조에 대한 탄압 일변도 노선에서 벗어나 노조활동을 인정하는 대신 현장조합원들을 인적으로 포섭하고 인사고과와 성과급적 임금체계를 통해 개별적 경쟁체제로 유도하려 했다.
예를 들어 단체교섭이 제도화되는 대신 인사·노무 가능을 확충하고 인사고과권을 반장 등 현장관리자에서 부여햐여 이들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기업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한편 고충처리 등 현장관리자들의 활동을 통해 조합원들을 인간적으로 포섭하고 활동가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 시도했다. 이와 함께 설비투자를 확대하여 자동화를 도입하고 사내하청을 늘려 나갔다.
신경영전략에 대응하여 전투적 활동가들은 현장중심 노선으로 대응했다. 대공장에서 민주노조 건설 시기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등으로 결집되어 있던 현장 활동가 조직들이 현장조직으로 재편되어 '현장권력 쟁취'라는 구호 아래 현장투쟁을 강화하려 하였다. 하지만 현장투쟁이 모든 활동의 기초라는 것은 분명했으나 그 자체로는 조합원들의 실리주의적 이해를 전투적으로 관철시킨다는 것 이상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강력한 조직력을 가진 대공장 노조는 초기부터 다른 사업장과의 연대에 소극적이었고, 자신의 문제는 자신의 투쟁으로 해결한다는 전투적 실리주의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90년대 초반 전노협이 붕괴할 당시, 현총련, 대노협 등 대기업 노조협의회로 조직되어 있던 대공장 노조는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서 선진노동자들의 현장중심 노선은 조합원들의 실리주의에 일정정도 영합하는 측면이 있었고, 정치운동과 결합하지 못하면서 실제적 이해 이상의 이념적 과제를 설정하거나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측은 투쟁에 피로감을 느낀 정규직노동자들에게 실리적 보상으로 파고 들어갔으며 활동가들은 점차 조합원들과 유리되기 시작했다. 현장조직 운동은 특히 자동차 사업장에서 자본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일시적인 효과를 보았지만 구조조정 분쇄 투쟁의 패배 이후 점차 현장조합원들의 보수적인 정서에 물들어갔다. 그 결과 이념과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한 현장조직 운동은 점차 정규직노조 중심으로 형성된 생산의 정치 시스템에 포섭되었다.
신경영 전략의 결과로 사내하청제도가 대공장에 다시 도입되거나 확대되기 시작했지만 현장 조합원 중심의 대응은 이런 사내하도급의 확대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기본급-수당-상여금을 기본으로 하는 성과급적인 임금구조가 확립되었지만 임금인상과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조합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90년대 중반부터 정규직 고용의 확대는 사실상 중단되었으나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용이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에 정규직 고용의 확대를 요구하기 보다는 비정규직 충원을 용인했다.
신경영전략은 특히 조선사업장의 노조 운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라인작업을 하는 자동차 노동자들과 달리 팀 작업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사업장은 현장관리자들의 발언력이 상대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현장관리자들의 포섭에 쉽게 넘어갔다. 또한 수주량에 따라 물량 증감의 폭이 크고 고립적인 작업형태상 비정규직 증가가 눈에 잘 띠지 않기 때문에 물량증감에 따라 하도급의 고용 확대가 자동차에 비해 수월하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조선사업장에서 사내하도급은 신경영전략 시기를 거치며 급격하게 증가했다.
구조조정 분쇄투쟁 이전에도 조선소에서는 이미 비정규직 비율이 40%를 육박하고 있었다. 현대 중공업을 비롯하여 민주노조가 있던 조선사업장은 대략 신경영전략 시기 이후 무쟁의 사업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결국 2000년대 들어 어용세력의 득세로 귀결되었다. 조선소에서 어용노조의 지배는 수년 째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것이 변화할 가능성도 낮다. 어용 집행부들은 노조민주주의를 파괴하며 영구집권을 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저항은 크지 않다.


자본의 구조조정과 대공장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출처 : 울산노동자배움터)


조선소에서 현장권력 파과와 민주노조 붕괴는 신경영전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어용노조가 들어서기 훨씬 전인 90년대 초중반 부터 조선사업장은 이미 무쟁의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에도 신경영전략의 결과 90년대 초반부터 사내하청과 용역노동자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조선산업처럼 광범위한 비정규직화가 진행되지 않았으며 어용세력이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하지도 못했다. 자동차 공장 역시 실리주의적 경향이 득세하긴 했지만 노골적으로 회사의 지원을 받는 세력은 집권하기 어려웠다.
이는 라인작업을 하는 완성차의 경우 평조합원의 발언력이 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경영전략이 추진한 팀제 등을 통한 인적 포섭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경영전략은 결국 노동유연화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90년대 들어 소위 신자유주의 담론이 득세하면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코포라티즘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협력적인 노사관계의 틀을 깨고 노동유연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자본의 신경영전략은 이러한 세계적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남한정부 역시 이에 발맞추어 90년대 초부터 노동유연화를 법제화하려는 시도에 나섰다. 이는 YS 정권 아래에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통한 노동법 개악으로 나타났다. 조직노동운동은 이러한 노동법 개악시도를 97년 총파업으로 저지했으나 IMF 이후 사회적 압력 속에서 결국 노동법 개악에 합의하고 말았다.
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한 노동법 개악의 성격은 근로기준법등 개별적 노사관계 법률조항의 개악과 집단적 노사관계 법률조항의 개선을 맞바꾸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현실로 등장한 조직노동운동의 존재를 법제도적으로 인정하고 근로기준법 개악을 통해 노동유연화를 제도화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결과 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변형근로제 등 노동유연화 악법이 도입되는 대신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노조의 정치참여 허용·복수노조·근로자 참여제 등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98년 노사정 합의는 조직노동운동의 안정과 노동유연화를 맞바꾸었다는 면에서 90년대 이후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공급측면) 코포라티즘의 변형된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코포라티즘 체계는 민주노총 관료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제도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는 순전히 정부와 자본이 요구하는 합의의 수준이 민주노총에서 가장 우익적인 국민파 관료들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을 배제한 합의구조는 코포라티즘 체제의 실제적인 형성과 무관하게 구조조정 투쟁을 거치며 대공장을 중심으로 현장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98년 이후 대공장에 밀려들어온 구조조정 공세는 노동법 개악으로 도입된 유연화 제도들을 다시 현장에 밀어붙이는 과정이었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서기 위해 전투적 집행부를 선출하고 투쟁에 나섰지만 별 성과 없이 패배했다. 구조조정 이후 조선과 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수출제조업에서 사내하청이 크게 늘었다.
하지만 소위 “빅딜” 등 구조조정의 결과로 자동차·조선·철강·전자 등 주요 수출제조업에서 선택과 집중을 이룬 남한의 대자본은 세계시장에서 초국적 독과점체제에 성공적으로 편입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해양조선 등 남한의 조선소들은 세계 조선 산업의 1위에서 7위까지를 독점했다. 현대·기아로 재편된 자동차 자본은 현대와 기아 통합으로 세계 10위권 안으로 들어선 뒤 현재는 5위권 업체로 안착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계시장에서 남한 수출대자본의 승승장구는 정규직을 제외한 다수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기초하고 있다. 구조조정 이후 대공장 노동자들과 부품사 등 다른 분야의 제조업 노동자들 간의 임금 격차는 더욱 커졌다. 특히 자동차산업에서는 플랫폼 통합·모듈화와 함께 현대모비스와 같은 대형 모듈업체가 등장하면서 완성차 공장-대형 모듈업체-부품업체로 이어지는 위계화·중층화가 한층 강화되고 이로 인해 완성차 자본의 부품업체에 대한 통제력이 강해지면서 부품업체 노동자들과 완성차 정규직노동자들 간의 임금 격차는 크게 차이가 나고 있다.
더욱이 현대모비스는 생산직 전원을 사내하청으로 채우고 있으며 이곳의 노동강도와 저임금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아차의 경우는 아에 특정 차종의 생산을 100% 비정규직공장인 동희오토에 위탁하고 있기도 하다.
제조업에서 전반적인 사내하도급 제도의 확대가 이들 산업에서 이윤의 보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정규직노동자들과 완전히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은 구조조정 이후 이들 산업에서 전체 노동자의 10~50% 정도로 늘어났으나 임금은 정규직의 50~70% 수준에 불과하다.
남한 제조업의 주요 경쟁국들인 미국, 유럽, 일본, 대만, 중국 등에서는 사내하청과 유사한 간접고용을 도입하고 있다하더라도 노동조건의 차이가 남한만큼 크지 않다. 이들의 경우 비정규직 도입은 거의 고용유연화만을 위한 것으로 보이나 남한의 사내하도급은 실제 노동조건의 격차를 강제하고 있다. 남한 수출제조업의 눈부신 성공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주요 제조업에서 하청고용비율 (출처 : 한겨레신문)


대공장 노동자 집단의 균질성의 파괴


사내하청을 비롯한 비정규직의 증가는 대공장노동자들의 균질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위 대공장의 전략적 중심성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산에서 위치와 사회적 파급력 뿐 아니라, 균질적인 노동자 집단의 밀집을 통해 계급의식과 집단적 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는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공장은 더 이상 노동자집단의 균질성을 보장하는 공간이 아니다.
자동화의 진전은 대공업에서 비정규직이 확대될 수 있는 기술적 기초가 되고 있다. 현재 대공업에서 숙련노동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숙련의 정도에 따라서 임금이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임금이 숙련기술에 바탕하고 있다는 모든 주장은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신경영전략 시기에 자본은 노동집약적인 체제에서 대대적인 설비투자를 통해 노동자들로부터 숙련을 통한 현장통제력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대공장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숙련도는 떨어졌으며 비정규직 고용이 확대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구조조정 이후 플랫폼 통합과 모듈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완성차공장에서는 특히 이런 경향이 강화되었다.
조선산업의 경우 자동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숙련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숙련이 필요한 파워그라인더 같은 직종이 오히려 비정규직인 경우도 있다. 조선소에서도 일반 생산직 노동자가 노동에 필요한 기술을 능숙하게 체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1~2년에 불과하다. 물론 조선소에서도 모듈화, 블록대형화 등 자동화가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현재 대공장에서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숙련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작업공정이 단순화되고 동질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장에서 노동자들의 균질성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사내하청 뿐 아니라 다양한 고용형태들의 증가로 인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조선사업장의 경우 하청노동자들과 정규직의 비율의 최대 8대 2까지 육박하고, 평균적으로는 6대 4 정도 된다. 그렇다면 사내하청노동자들의 구성은 균질적인가?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조선사업장인 현대중공업의 경우, 공장을 구성하고 있는 고용형태는 아주 복잡하다. 사내하청의 경우에도 일당제와 시급제로 나뉘어 있다. 여기에 이주노동자와 직업훈련원을 나와서 저임금으로 일하고 있는 훈련생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최근에는 과거 고숙련자 중심으로 긴급한 돌발 상황 때 투입되던 물량도급 인원도 크게 늘어나 노동조건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하락한 채 일반 생산 업무에 투입되고 있다. 사내하청을 제외하고도 이주노동자, 훈련생, 물량도급 인원들이 현재 현대중공업에서 각기 수천 명 단위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정규직 비율이 20% 정도로 조선소에 비해 노동자들의 균질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자동차 사업장의 경우에도 비정규직노조 결성과 불법파견 판정 이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이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고용형태의 다양화가 추진되고 있다.
자동차 공장에서는 일반적인 사내하청 외에도 외부 납품업체에 계약직으로 고용되어 사내하청 업무에 파견된 경우나 납품업체가 별도의 하청업체를 통해 공장 내에서 작업하는 조건으로 고용하는 2·3차 하청노동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1차와 2·3차 하청노동자의 업무의 차이는 크지 않으며, 보통 업체 사무실이 공장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
업체들이 영세하고 1차 하청업체의 형태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집계가 잘 되지 않지만 2·3차 하청노동자들은 1차 하청노동자보다 성과급이 적거나 임단협 적용에서 배제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시하청 또는 단기계약직이라고 불리는 아르바이트생들은 본래 정규직 노동자의 산재 대체나 신규사원 채용 전에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아르바이트 자리에 가까웠으나, 현재는 정규직을 아예 뽑지 않고 라인을 단기계약직 노동자들로 채운 후 물량이나 공정이 축소·폐쇄되면 해고하는 양태를 취하고 있다.
단기계약직 노동자들과 2·3차 하청노동자들은 1차 하청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비해 임금 및 복지에서 차별받는 것처럼 1차 하청노동자에 비해 차별을 당하고 있으며, 이런 격차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비정규직 중에서도 1차 하청노동자와 그보다 더 취약한 노동자들이 중층적으로 생겨나면서 노동자 내부에 계층이 형성되고 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들어 대공장의 기업별 노조는 전체 공장 노동자들을 모두 포괄하는 공장위원회적인 성격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는 총회민주주의의 기반이었던 대공장 노동자들의 균질성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오로지 고용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배타적이 되고 있다.


계속되는 호황과 물질적 포섭


99년 이후 자동차, 조선·전자·철강 등 수출제조업의 대자본은 2008년 금융위기 때문에 발생한 짧은 불황기를 제외하면 지속적인 호황을 누려왔다. 2008년 위기는 오히려 세계시장에서 이들 수출대자본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기아는 미국자동차 산업의 몰락과 도요타의 부진을 틈타 6~8위권에서 5위권으로 도약했으며 최근에는 도요타를 제치고 세계 4위 업체로 올라섰다. 남한자본이 초국적 독과점 체계의 최상위에 있는 조선과 전자에서는 금융위기를 계기로 중간 순위의 추격자들과 격차를 더욱 늘렸다.
이러한 호황을 통해 이들 산업의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호황으로 얻은 이윤의 분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정규직노동자들 뿐이다. 사내하청노동자들과 대공장에 종속된 부품사 노동자들은 호황에 대한 이윤 분배에 거의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
구조조정 이후 대공장과 중소기업 노동자들 뿐아니라 대공장 내부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계속 커지고 있다. 2003~2005년 대공장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조설립과 불법파견 판정, 이어진 정규직화 투쟁을 거친 이후 자동차 대공장의 1차 하청노동자들은 고용이 안정되고 임금 등 노동조건이 지속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럼에도 1차하청과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격차는 이전에 비해 거의 줄어들지 않고 있다.
자동차에서 1차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은 여전히 정규직노동자들의 60%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청노동자들이 배제되고 있는 복지혜택, 주식 배당 등을 합치면 실제 격차는 더욱 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1차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는 이상으로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내하청에 비해 더욱 열악할 것으로 예상되는 2·3차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파악도 되지 않고 있으며 단기계약직, 훈련생, 이주노동자 등의 노동조건은 완전한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형편이다.
정규직노동자들은 높은 노동조건과 고용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배제한 합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이는 2000년 완전고용합의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조직노동운동의 이해와 노동유연화의 교환은 단위 공장에서 2000년 이후 대부분의 자동차 대공장에서 체결된 완전고용합의로 완성되었다.
완전고용합의는 정규직노조가 생산라인에 하청노동자의 도입을 용인하는 대신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현대차 정갑득 집행부는 하청도입 비율을 16.9%까지 허용하겠다고 했으나 이는 물론 지켜지지 않을 것이 뻔한 ‘눈가리고 아웅’식의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정리해고제 도입 이후 고용불안을 느낀 정규직조합원들은 완전고용합의에 지지를 보냈다. 이는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하청노동자들의 직영화를 요구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태도이다.
구조조정을 겪은 이후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의 이해와 회사의 이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크게 강화되었다. 신경영전략 시기에 정착된 기본급-수당-상여금이라는 성과급적 임금체계는 이러한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자본은 기본급은 인상하지 않으면서 잔업·특근 수당과 기업 수익에 따른 상여금으로 임금을 인상했다. 현재 대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에서 기본급이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 자본은 사실상 호황기에는 정규직노동자들에게 성과급으로 임금을 올리고 불황기에는 물량이 줄었다는 이유로 잔업·특근을 없애 자연스럽게 임금을 줄이는 양상을 취하고 있다.
이는 자발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정규직노동자들 사이에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현대차 정규직노동자들은 임금이 잔업·특근이 없어지면서 임금이 3분의 1로 줄어들어 큰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존권의 하락은 사측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사내 타공장보다 많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귀결되었다. 때문에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의 투쟁력으로 임금을 올리는 것보다는 회사의 이익에 민감하며 현재의 평화적인 노사관계가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임금의 형태로 사측이 지급하는 무상주 역시 이런 의식을 강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대공장 자본은 우리사주를 통해 매년 급여의 일부를 30주에서 100여 주씩 자사 주식으로 지불하고 있다. 올해 기아자동차 임금협상 잠정합의안은 무쟁의 타결 시 조합원 1인당 80주를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대공장 노동자들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대에 이르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이익 분배에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무상주 배당을 받지 못함으로써 동일 비율로 임금이 인상된다하더라도 실제로는 벌써 여기서부터 정규직과 수백만 원의 실질적인 임금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작년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출처 : 참세상)


일상적 합의 메커니즘의 완성


신경영전략과 구조조정을 거치며 자동차와 조선 등 대공장에서는 정규직노동자들을 고임금을 통해 물질적으로 포섭하여 노사평화를 추구하면서도 광범위한 사내하도급의 확대를 통해 이윤을 보전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속에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대공장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노동자 집단 중 가장 크고 단일한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노사교섭에서 대표권을 행사하며 정규직 외의 노동자 집단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관철시키고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일상적 합의구조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대표하고 있다. 87년 이후 90년대까지 대공장의 노사관계는 단체협약 중심이었다. 노조와 합의되지 않은 노동강도 강화 등에 대해 노동자들은 작업중지권, 즉 부분적인 파업권을 행사하여 철회시키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에서 플랫폼·모듈화 등 자동화는 생산물량에 따라 상시적인 작업장 재편을 요구했으며 이에 따라 일상적인 구조조정을 강제했다. 대략 2000년을 고비로 하여 일상적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형태로 기존 단협 중심의 노사관계를 대체하는 일상적 합의구조가 제도화되었다. 이를 통해 자동차 공장에서는 조선소처럼 무노조거나 어용노조가 아니라하더라도 외부적으로 보이는 노사 대립구도와 달리 일상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98년 노사정 합의가 2000년 완전고용합의를 통해 기업단위로 내려왔다면, 이러한 일상적 합의구조는 그것을 단위 사업장의 라인과 부서까지 침투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 합의구조가 98년 노동법 개정으로 통과된 “근로자의 참여 및 협력증진에 대한 법률(근로자참가제)”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98년 노동법 개정은 기존의 노사협의회법을 근로자참가제로 개정하면서 30인 이상 사업장에 노사협의회 설치를 의무화하고 여기에 협의권을 부여해 주었다.
현재 자동차 대공장에서의 단협은 신기술 도입, 신차종 개발, 작업공정 개선, 사업의 확장, 합병, 공장이전 등을 노사공동위원회(현자) 혹은 고용안정위원회(기아)처럼 노사동수로 이루어진 노사공동결정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하도록 규정하고 이 결정에 단협과 동일한 효력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협의기구들은 모두 근로자참가제를 법적 기초로 99년 이후에 설치된 것들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대공장에서는 작업할당과 노동강도, 배치전환 등의 문제에서 현장의 집단적인 저항을 바탕으로 한 현장활동가의 비공식적인 교섭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 왔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양상은 이러한 비공식적인 교섭이 근로자참가제를 법적 기반으로 하여 제도화되고 현장에서 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포섭과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배제가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절차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사공동위원회나 고용안정위원회와 같은 노사협의회에 기초한 합의체계는 단협과 단협 사이에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며 기각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합의의 최종 결정은 노조의 골간체계라고 할 수 있는 대의원 체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사측이 신차투입이나 공장이전 등 생산체계의 변동을 결정할 경우, 먼저 전체 회사 차원의 노사공동위원회(고용안정위원회)에서 큰 틀에서의 대략적인 합의를 이루어 낸다.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 지면 단위 공장의 노사공동소위원회나 고용안정소위원회에 보다 세부적인 의제들이 논의사안으로 내려오고 마지막에는 작업장 대의원들이 생산체계 변동에 따른 노동강도, 인원배치등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노사협의를 하게 된다.
이러한 일상적 합의구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를 갈라 놓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 체계에서 사내하청노동자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정규직 고용보장의 희생양이 되어 있다. 일례로 하나의 라인이 다른 공장으로 이관될 때 자기 선거구 조합원의 고용을 최우선으로 놓을 수밖에 없는 정규직 대의원들은 정규직노동자의 전환배치를 받아들이는 대신 하청노동자를 해고하는데 합의하는 관행이 구조화되어 있다. 때문에 일상화된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공장에서 정규직은 전혀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
이미 비정규직 비중이 50%를 넘나드는 조선사업장의 경우에는 물량 증감에 따라 하청업체를 폐지버리는 방식으로 상시적인 인원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자동차와 같은 정규직의 상시적인 전환배치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또한 노조가 무력화되어 있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배치가 일어난다 해도 합의를 거치지 않은 개별 통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금융위기의 여파로 물량이 급감하던 2009년 현대중공업은 최초로 정규직 400여 명에 대한 전환배치를 단행했지만 이를 합의가 아닌 개별 통보 형태로 단행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노사협의회가 정례화되어 있고 처우개선 등이 실제로 여기서 논의되고 있다. 노조가 무력한 만큼 조선소에서도 노사협의회를 통한 일상적 합의의 역할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대공장에서 노사협의회에 기초한 이러한 합의구조들은 대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적 의식을 물질적·의식적으로 포섭하는 중요한 제도적 기제가 되고 있다.


대공장노조 중심의 전략은 여전히 유효한가?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활동가들은 정규직노동자들의 보수화 문제에 직면하면서 이를 노조관료의 문제나 고용불안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포섭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현실은 현재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자본에 포섭되어 있으며, 자신의 물질적 이해를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 문제 등에 대해 대단히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적대적인 합의에 수동적인 방관자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대공장 노조는 조합원들의 실리를 위해서 자본과 표면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고용형태의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통해 자본에 대표권을 인정받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여타 투쟁에 연대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정을 지키는 것을 선택한다.
자동차에서 일상적 합의구조는 자동차사업장이 여전히 민주노조의 외피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면적 메커니즘을 통해 자본의 이해에 깊이 포섭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더 이상 대공장의 보수화를 집권세력이 어용라거나 실리주의 세력이기 때문으로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2003년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 투쟁 당시 정규직조합원들이 보여준 태도와 2008년 기아차에서 정규직조합원들이 보여준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단지 어용의 준동 만으로 이해가기는 어렵다. 오히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과 여타 노동자들과 공통의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이러한 상황은 과연 여전히 대공장 운동이 노동계급 운동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던지게 한다. 한때 노동운동의 전위로 불리었던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이러한 변질과 대공장 운동질서의 몰락은 자본의 분할포섭 전략에 계급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노조를 통해 자신들의 실리적 이해만을 배타적으로 관철시키려 하는 공장 내부정치, 소위 “생산의 정치”로의 함몰이 가져온 필연적 비극일 수도 있다.
전투적 사회주의자들은 현장사안이 보다 계급적인 사안이라는 사고에 사로잡혀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부추겨 왔다. 정치와 경제의 이분화를 극복하지 못하는 소위 현장 중심의 “생산의 정치”에 대한 집착은 사회적 고립과 노동자들의 사회적 보수화 성향을 강화시켜왔을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8월호][정치]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의 목표와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회원 양효식 활동가와의 인터뷰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이하 사노위) 는 지난 5월28일 3차 총회를 개최했다. 3차 총회를 앞두고 사노위 의견그룹 소속 활동가들은 사노위 해산에 관한 안건을 제출했다. 사노위가 출범한 지난해 5월 이후로 1년이 지났지만 강령 상의 통일을 이루지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3차 총회에서 이들이 제기한 사노위 해산안은 부결되었다. 사노위 해산을 주장했던 이들 중 일부는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자 모임>을 거쳐 <(가칭)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을 꾸려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사노신은 양효식 활동가를 만나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이 만들어진 배경과 향후 계획에 대해 들어보았다.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회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자 모임’에 속했던 동지들이다. (물론 그 이후 새롭게 결합한 소수의 동지들이 있다. 따라서 ‘해산 선언자 모임’과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을 곧바로 등치시킬 수는 없다.)
지난 5월28일 사노위 3차 총회에서 우리는 ‘강령 통일 실패에 따른 조직 해산의 건’을 총회 안건으로 상정하여 사노위 조직 해산을 요구했다. 애초 사노위는 3조직 및 개별 활동가들의 ‘공동실천위원회’로 출발했고, 1년 안에 강령, 전술, 조직상의 통일을 이뤄 단일 조직(사회주의노동자당 추진위원회)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는 역으로 1년 안에 통일을 이뤄내지 못하면 강령에 따라 각자의 길로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만큼 강령과 노선이 조직규모나 쪽수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1년이 되었는데 강령 상의 차이가 해소 불가능한 차이로 판명 난 상황에서 애초 설정한 1년을 넘어 계속 간다는 것은 무원칙한 동거가 되는 것이므로 1년이 된 3차 총회에서 조직 해산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사노위 내 ‘다수파’(2011년 1월 2차 총회 당시 ‘가입원서’ 건 표결을 계기로 형성된 다수파를 말함)는 조직보존주의 논리를 들어 해산을 끝내 거부했다. 이에 우리는 ‘사노위의 정치적 해산’을 선언하고 ‘선언자 모임’ 명의로 사노위 평가서(1차 보고서)를 냈다. 비록 사노위를 통한 당 건설은 실패했지만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의 목표와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며, 사노위 1년의 투쟁과 경험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코 헛된 노력이 아니라고 보아 당 건설 투쟁을 새롭게 다시 추진하는 것으로 동지들의 뜻을 모았다. 이것이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으로 표현된 것이다. 10월에 “가칭” 딱지를 떼어버리는 정식 출범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사노련, 사노위를 거치면서 지난 수 년 동안 추진되어 온 써클들의 통합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일부 음해성 평가들과 달리 당 건설이라는 대의 아래 써클들을 모아내려 했던 동지들의 의도는 분명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름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하고 있겠지만 통합운동은 오히려 각 써클들의 정치적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는 결과를 보여준 것 같다. 통합 운동을 가로막은 주요한 정치적, 조직적 차이는 무엇이라고 평가하는지?

 

써클 통합이라기보다 당 건설로의 결집인데, 어쨌든 통합을 가로막은 핵심 요인은 결국 강령 문제와 당 건설투쟁 노선(경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노련의 경우 강령 상에서는 대체로 일치를 이루어냈지만, 사노위 건설과정에서 나타났듯 당 건설투쟁 노선 문제에서 결국 차이를 해소하지 못하고 갈라졌다. 사노위는 ‘공동실천위원회’ 위상으로서 그 자체가 당 건설 경로이니까 당 건설 노선 문제보다는 결정적으로 강령 상의 화해할 수 없는 차이를 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해산’이 선언된 것이다.
차이의 구체적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사노련의 경우 사노위 건설에 합류한 동지들과 사노련에 잔류한 동지들 사이의 차이는, 한 마디로 전자가 당 건설을 정세적 과제로, 당면 정치투쟁의 과제로 접근했다면 후자는 현장 기반을 꾸준히 확대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근본적 차이가 깔려 있었다고 본다. 설사 사노위 문제로 갈라지지 않고 모두가 사노련으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모두가 사노위로 합류했다 하더라도 그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다면 최종 당 건설 과정에서 다시 불거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는 당 건설이 ‘주체들 사이에서 강령, 전술, 조직 문제를 둘러싼 투쟁을 통한 당 건설’이라는 정치투쟁의 기획 없이는 가능하지도, 옳지도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계획으로서의 전술’ 없이 막연히 ‘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만들어나가자는 것으로는 자기 써클의 확대는 될지언정 계급의 전위로서의 당은 되지 못할 것이다.
사노위는 그 자체가 이런 당 건설 계획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노위 주체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일치를 보고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를 공유한 위에서 강령, 전술, 조직상의 통일을 이루어내기 위한 투쟁을 ‘공동실천위’라는 위상 속에서 1년간 전개한 것이다, 결국 최종 통합, 즉 추진위로의 전환에 실패하고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을 하게 된 정치적, 조직적 차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해산 선언자들이 지난 6월말에 제출한 ‘사노위 1년, 그 당 건설 투쟁에 대한 평가 (1차 보고서)’ 가운데 결론 부분인데 이것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사노위 내 소수파와 다수파의 투쟁은 그것이 비록 노동자계급운동에 당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영향과 파장을 미치고 있지 않은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투쟁의 계급적 의미와 성격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그 투쟁은 노동자계급 속에서 어떤 당을 건설하고, 어떤 정치활동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혁명정당인가, 개량주의에 뒷문을 열어놓는 중도주의 정당인가? 연방주의에 바탕한 꽁무니주의 정당인가, 민주집중제에 기초한 전위당인가? 강령에 입각하여 노동자투쟁을 조직하는 사회주의 정치활동인가, “강령 따로, 실천 따로” 식의 추수주의 · 경제주의 활동인가? 사노위 투쟁의 이 본질적인 주제는 이후 그 어떤 당 건설 투쟁에서도 결코 비껴갈 수 없는 과제로 사회주의자들 앞에 가로놓여 있을 것이다. 사노위 투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성과와 유산이 있다면 바로 이 투쟁의 의미와 교훈을 당 건설 운동의 새로운 지형 위에서 정확히 되새기는 데서 나올 것이다.”

 

양효식 동지는 당 건설 운동이 정파들의 단순한 통합을 넘어 선진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한 바가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사노련, 사노위 운동은 기대했던 만큼 대중적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밖에서 보기에는 정파 상층 논의, 혹은 주요 활동가들 간의 논의를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평가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먼저 당 건설 운동과 투쟁을 해 나감에 있어, 그 주체가 노동자계급, 특히 그 중에서 가장 앞선 부위가 먼저 결합하는 경로와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정언 명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러나 당 건설은 진공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결부되어서만 그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랬을 때 한국의 경우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짧게는 10여 년 길게는 현재까지도 강도와 양상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계급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 속에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전국에서 수많은 노동자투사들을 배출해 냈다. 그들은 정말 자본과 정권에 맞서 온몸을 던져 비타협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들은 최종적으로 사회주의 당 건설의 주체로까지 성장하지 못했다. 자본과 정권의 탄압과 분열, 분화 책동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개량주의와 관료주의 세력에 맞선 투쟁지도력, 정치지도력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사회주의 세력 역시 이들과 정치적, 조직적으로 결합하는 데 실패를 거듭해왔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시점과 현실에서 볼 때 당 건설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선진노동자의 층은 매우 얇으며 어슴푸레 하게만 존재한다.
바로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 돌파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서 인식과 실천에서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으며 나타나고 있다. 그 차이 중 핵심적인 쟁점은 지금 바로 당 건설 운동을 시작하는 것을 통해서만 다시 계급의 앞선 부위를 되살리거나 새롭게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과 반대로 계급의 선진 부위가 다시 형성되는 정세를 경유할 때만이 비로소 당 건설 운동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선(先) 당 건설론’과 ‘토대구축론’이 바로 그것이다. ‘선 당 건설론’은 다시 ‘사노위’와 같은 경로를 주장하는 입장과 그에 반대하거나 회의하는 복수의 입장이 존재한다. ‘토대구축론’은 나의 입장에서 보면 백년하청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 한국 계급투쟁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 세계정세에 대한 추상적 이해에 머무르고 있는 것 외에 그 무엇도 아니라는 판단이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노선을 분명하고 명료한 형태로 제출하고 있는 가시적인 세력은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토대구축론’이 결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소수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심지어 ‘선 당 건설론’을 지지하는 세력 내에서도 실질적, 심리적 ‘토대구축론’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보아라! 기껏해야 정파 상층 차원의 논의, 주요 활동가들 사이의 논의 이상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크고 작게, 들리게 들리지 않게 주변을 맴돌고 있다. 답은 간단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조금 친절하게 답하면 이렇다. 당 건설 운동과 투쟁이 동력과 탄력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정파 상층 차원에서만 논의해서도, 주요 활동가들끼리만 논의해서가 아니라 정파 상층 차원의 논의가, 주요 활동가들 사이의 논의가 ‘제대로’ 안 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정파 상층, 주요 활동가들이 선진노동자 부위에게 정치사상적, 조직적 신뢰를 획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벌어진 균열과 틈새가 선진 부위에게 낱낱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노위’는 비록 현재로서는 성공에 이르지 못했지만 바로 그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극복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의 연속 위에서 당 건설 운동은 지속되어야 한다. 선진노동자가 당 건설의 주체로 나서게 해야 한다는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비록 ‘사노위’의 실패가 일시적, 부분적으로 선진노동자 층에게 실망과 좌절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측면을 부정하지 않지만 잔류 ‘사노위’든, 우리든, 그 어떤 사회주의 세력이든 각자의 노선과 정치를 선진노동자들에게 가감 없이 밝히는 것을 통해 그들과 소통하고 접점을 형성하려는 시도를 더욱 밀고 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진노동자를 당 건설 주체로 세우거나 나서게 하는 하나의 경로이다. 이러한 과정 없이 어느 순간 정파 사이의 결집이 이루어질 수 있다거나, 선진노동자 부위가 대거 당 건설의 주체로 나설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이 계속 당 건설의 고민을 이어나간다고 한다면 사노련, 사노위의 경험 이후 당 건설의 주체와 정치적 바운더리를 어떻게 보고 계신 것인가

 

너무나 명료한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당 건설의 주체는 당 건설을 자임하는 세력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세력도 현재로서는 선진노동자 층으로부터 정치적, 조직적 권위를 인정받거나 부여받은 바 없다. 누구(어떤 세력)에게나 기회는 열려 있다. 앞으로 어떤 상황, 어떤 조건이 형성되느냐, 혹은 스스로 그런 상황과 조건을 창출해 낼 수 있느냐에 따라 당 건설 자임 세력 사이의 논의는 또 다시 어떤 형태로든 다시 시도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최종적으로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신뢰와 지도력을 획득함으로써 비로소 당 건설 자임 주체를 넘어 객관적인 당 건설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적, 일반적 차원을 넘어 구체적으로 우리는 ‘당 건설 추진체’로서의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최우선적 과제로 삼고 있다. 어떤 조직이든 그것이 존재하는 한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과 시도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복제를 통해 당 건설을 하겠다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 마리 미꾸라지가 온 방죽을 흐린다는 말은 뒤집어서 말하면 한 마리 미꾸라지가 방죽 전체의 긴장과 역동성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노선과 정치를 가감 없이 밝히는 것을 통해 한편으로는 대적 전선을 형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세력에게도 자신의 노선과 정치를 밝힐 것을 강제해 나가고자 한다. ‘비판의 무기’를 넘어 ‘무기로서의 비판’을 실행해 나갈 것이다.
여기에 미리부터 특정한 바운더리(경계)를 두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미 큰 틀에서 우리의 정치적 입장과 노선은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미 말이 아닌 직접적인 행동으로 ‘무원칙한 통합’에 반대한다는 것을 실행했다. 그렇다고 우리만의 경계를 내부적으로 쌓고 있지 않다. 우리만의 성을 쌓거나 울타리를 세우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오히려 기꺼이 우리를 던져 정세가 요구하는 정치활동을 펼쳐 나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과정을 통해 정파 사이의 정치적 거리는 자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공동활동, 공동투쟁, 공동전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당 건설 문제에 있어서는 현재로서는 조금 단호한 입장을 취할 것이다. 단호하다는 것이 곧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원칙을 지키고, 원칙을 공유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가

 

출범 일정을 최근 10월 15일로 ‘잠정’ 결정했다. 그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들을 최대한 넓히려는 노력과 시도를 다하겠지만 그 결과 때문에 출범 일정 자체를 늦추지는 않을 것이다.
출범을 하게 되면 당연히 강령(초안)을 제출할 것이다. 이제까지 대개의 경우 ‘정치원칙’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조직을 형성·출범했지만, 우리의 경우는 이미 지난 1년여에 걸친 ‘사노위’ 활동을 통해 그 과정을 넘어섰다. 그러나 강령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공개 토론은 출범 이후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분명히 세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7월26일 월간정세지 <혁명(준비 1호)>를 발간했다. 출범 때까지 3호를 발간할 계획이다. <혁명>은 이미 밝혔듯이 이론지가 아니라 정세지이다. <혁명>에서 정세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밝히고 그에 입각해 우리의 정치활동을 펼쳐 나갈 것이다. 이제까지 대개의 경우 자신이 발행하는 기관지에서의 주장과 실제로 자신의 조직 활동을 직접적으로 일치시키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우리는 이 점을 극복하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출범 이후로는 정세지의 발간 주기를 단축시켜 나갈 것이다.
우리는 현실 정세와 투쟁에 대해서도 최대한 개입할 것이다. 아직은 크지 않은 조직이라서 물리적 결합력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해당 시기, 해당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지키고 나아가야 할 원칙과 방향에 대해서는 물론 보다 더 구체적인 방침과 지침을 제시하는 데 힘을 기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세지나 투쟁유인물을 발간하는 외에 이론적 해명이 필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당분간 비정기 정치 팜플렛을 통해 우리의 입장을 알리고 선진노동자들과 심도 깊은 토론을 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출범 때까지 우리는 조직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확정하고, 당 건설 노선과 경로에 대한 입장 표명, 사회주의 정치활동과 조직화 방안 수립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펼쳐나갈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8월호][FocuS]"사측의 술수에 춤을 춘 채길용 집행부" 하지만 투쟁은 계속된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8/16 16:21
  • 수정일
    2011/08/16 16:2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7월7일 서울 갈월동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서 ‘한진중공업 투쟁 강제진압 규탄! 정리해고 반대! 대학생공동행동’이 진행되었다. 폭우 속에 진행된 이 집회에서는 대학생 뿐만 아니라 현재 투쟁하고 있는 한진중공업 조합원도 발언했다. 한진중공업지회 이용대 조합원의 발언을 통해 사측과 공권력의 탄압, 노조지도부의 기만적인 합의, 그리고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조합원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사노신은 이용대 조합원의 발언내용을 옮겨 싣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탤런트 김여진 님이 김진숙 지도위원을 살아서 걸어 내려올 수 있게만 해준다면 조남호 회장에게 백 번이 아니라 천 번이라도 큰절을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지난 6월26일 마지막 조합원 간담회가 식당에서 있던 날 저는 채길용 지회장에게 현장 복귀 기자회견을 거두어만 준다면 나는 지회장 당신에게 무릎이라도 꿇겠다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정리해고라는 무차별적인 살인행위를 막기 위해 수백일에 걸쳐 피눈물 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혹한에도 그리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한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와대로 국회로, 과천으로, 한나라당사로, 시청 앞으로, 노동부로, 심지어 지하철이며 조남호 회장의 집으로까지 노동조합에서 지침만 떨어지면 정년을 바로 코앞에 둔 나이 많으신 형님들이나 나이는 어리지만 형님들 힘들어 할까 싶어 자청해서 가겠다며 안전화 끈을 동여매고 군소리 하나 없이 뛰어나가는 동생들의 고생하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두의 노력 덕에 영도구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부산시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전국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정치권을 움직였고, 전국의 네티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동부장관 인사청문회를 시작으로 영수회담, 조남호 회장 청문회, 그리고 1차에 이어 2차 희망버스가 7월9일 여기 영도 땅 한진중공업으로 온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부당해고 무효소송 건에서 회사의 물을 먹고 사주를 받은 심판장들에 의해 지노위에서 기각을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노위가 남아 있고, 행정소송 절차로는 고법, 대법까지의 법적 절차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보다 더 열악하고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진방스틸 노동조합이 대법까지 가는 힘든 산고를 겪으면서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그 판결을 받은 선례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싸움이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되고 승리가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장복귀라는 말도 안 되는 실언과 더불어 총구를 180도 선회하여 우리 해고자 동지들을 무차별 난사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근데 몇몇 상집 간부에게 노무부의 문자가 직접 하달이 되어 무조건 현장복귀 기자회견을 종용하고 빠져나가라는 지침까지 내려졌다는데 대해서는 살이 떨리고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다보니 6월29일 열렸던 청문회마저 한나라당과 조남호 회장이 불참하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동지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조남호 회장은 우리들을 죽이려고 하는 절차를 밟았지만 채길용 집행부는 그 절차에 따라 확인사살까지 하는 반노동자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민주노조와 동지들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서는 현장복귀가 되면 비해고자들이 현장에 파고들어 현장조직을 강화하고 다시금 노동조합 깃발을 세워보자고 소도 웃고 개도 웃을 얘기를 뻔뻔스럽게 하는 것이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동지 여러분, 회사는 정리해고된 파업대오가 저들의 생각대로만 되지 않자 흔들리고 일관성이 없는 노동조합을 이용한 것이 적중했던 것입니다. 사측의 계산된 술수에 채길용 집행부는 춤을 추고 말았던 것입니다.
85크레인 사수조가 행정대집행을 막기 위하여 85크레인 밑에서 연좌농성을 하면서 있다가 집행관들과 같이 따라붙은 용역들에 의해 개돼지처럼 끌려 나가는 수모를 겪고 있을 때 채길용 집행부는 이재용 사장과 만면의 웃음을 띤 악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지 여러분, 지금껏 너무나도 많은 어려움 속에서 싸워왔지 않습니까. 이 싸움이 얼마나 더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어떨 땐 포기도 하고 싶고 가정적으로도 어려움은 있겠으나 절대로 물러설 수가 없는 싸움이기에 이겨내야만 합니다.
토끼 같은 우리 새끼들과 여태껏 죽어라 고생만 시킨 집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번 정리해고 싸움을 이겨야만 합니다.
앞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암초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쳐 나갑시다. 아니, 꼭 헤쳐 나가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승리하는 그날 가족들과 함께 동지들과 함께 삼겹살에 소주 한잔 했으면 좋겠습니다.
동지들, 우리 동지들이 85호에 머물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김진숙 지도위원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살아서 같이 내려오기 위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동지들, 우리 모두 힘냅시다. 그 길에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