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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통합진보당 사태의 교훈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2/06/29 19:22
  • 수정일
    2012/06/29 19:41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정치비판을 넘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 통합진보당 로고가 확정된 뒤, 공동대표들의 사이좋던 한 때 (사진출처 : 뉴시스)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 대표 경선이 온라 인 투표에 대한 관리부실로 투표가 중단되면서 다시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이달 초 통진당 당기위원회는 이석기·김재연을 비롯하여 자진사퇴를 거부하는 비례대표 국회의원과 후보의 제명을 결정한 바 있다. 하지만 최종 확정은 결국 이번 경선에서 당권을 누가 잡느냐에 달려있다고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와 무관하게 사실상 NL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비화하고 있는 선거구도와 끊임없는 잡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관심에서 이미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사태를 키운 통합진보당 주류의 착각


지난 5월2일 통진당 진상조사위가 당내 비례대표 선출 과정에서 총체적인 부정투표가 있었다고 발표한 뒤, 통진당은 연일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와 신문지상의 1면을 오르내리며 광우병·FTA·노무현·천안함 등 굵직굵직한 이슈들을 모두 묻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가히 5월은 가정의 달이 아니라 통진당의 달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통진당 사태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산 것은 부정선거 자체의 문제보다는 그에 대응하는 당 주류세력*의 태도 때문이었다. 

부정선거 혹은 부실선거가 벌어진 사실 자체는 명백했다. 온라인투표에서 같은 IP로 집단투표가 벌어졌다는 것, 현장투표에서 묶음 투표가 있었다는 것, 선거인 명부에서 부정 의혹이 있다는 것 등은 통합진보당 주류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선출된 비례대표들이 사퇴하는 게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진당 주류세력은 진상조사위의 조사결과에 ‘정치적 의도’가 있으며 믿을 수 없다고 하며 갖가지 핑계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5월4일 진상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 첫 번째 통진당 전국운영위원회는 밤새 인터넷으로 회의 를 지켜 본 사람들을 커다란 충격에 빠뜨렸다. 어느 정도 중재안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이정희는 시간 끌기와 관료적 진행으로 일관하다가 사회권을 유시민에게 넘겨주고 퇴장해버렸다. 

이정희가 퇴장하고 나자 주류세력은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회의를 방해했고, 그 때문에 나머지 운영위원들은 회의를 전자투표로 속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운영위원 50명 중 28명이 ‘조속한 사태수습 후 5월12일 중앙위원회 이후 공동대표단 총사퇴, 순위 경쟁 명부상 비례대표 당선자 및 후보자 총사퇴, 선거관리 관련자 전원 당기위원회 회부, 혁신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그러나 파행적인 운영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책임임에도 불구하고 통진당 주류는 전자투표라는 의사결정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결정사안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5월10일 열린 전국운영위원회에선 그 전 회의에서 퇴장했던 이정희가 자기 정파에 유리한 회의 진행을 위해 자신은 사회권을 양도했을 뿐 전국운영위원회 의장직을 사퇴한 것은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말을 바꾸었다. 

이정희는 진상조사위 결과가 발표된 직후에도 “4·11 총선 비례대표 온라인 투표 관리 부실, 현장투표 관리 부실과 부정 투표는 심각한 잘못으로 국민 여러분과 당원 여러분께 사죄드린다”고 말했다가 불과 하루 만에 조사결과를 전혀 수용할 수 없다고 말을 뒤집은 바 있었다. 이런 말 바꾸기는 이정희가 단지 당 주류세력의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했으며, 한때 가장 촉망받던 진보정치인이라던 그녀의 정치생명은 이로 인해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다. 

전국운영위원회에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이틀 후의 중앙위원회로 모든 것이 미루어졌다. 하지만 결국 12일 중앙위원회에서 폭력사태라는 최악의 사태가 터지며 통진당 사태는 막장의 끝을 보여주었다. 

주류는 자신들도 구성에 동의한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가 근거가 없고 과장되고 부풀려졌다고만 얘기했을 뿐 그 자신이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한 반박 근거를 내놓은 적이 없이 의혹만 제기했을 뿐이었다. 주류세력은 5월8일에 자신들이 주장하던 공청회를 개최했으나 “마녀사냥”, “당과 동지에 대한 무고”, “집권 가능성 소멸”, “당원들의 고통” 등 감정적인 호소를 늘어놓는 것 이외에 아무런 반증도 제시하지 못하고 질문조차 일절 받지 않는 쇼를 연출했다. 

통진당 주류가 보인 이런 식의 태도들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기에 운동사회 내에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통진당이 총선 이후 원내 제 3당으로 약진하면서 그들을 지켜보는 눈은 훨씬 늘어났고, 사태의 출발부터 폭력사태에 이르기까지 관심 있게 지켜보던 대중의 비난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5월12일 통진당 중앙위원회에서 벌어진 폭력사태 (사진출처 : 노동과세계) 


본질을 비껴난 비판들


사태의 본질은 애초부터 명확했다. 통진당에 대한 비난 여론은 비상식적이고 절차를 무시하는 주류세력의 행태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뻔뻔스러운 언사들이 불러온 것이었다. 

정치적 의도가 있든, 부풀리기가 있든 선출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경선으로 선출된 비례대표가 모두 사퇴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럼에도 통진당 주류는 트집 잡기와 시간 끌기로 무작정 버티며 자기정당화를 위한 궤변을 일삼기 시작했다. “유죄의 증거가 없다면 무죄”라는 이정희나, “선거부정이 70%, 50%는 돼야 총체적 부실”이라 할 수 있다는 이석기, 묶음투표에 대해 “풀이 다시 살아나서 다시 붙은 경우”가 있다는 김선동 등의 말은 하면 할수록 사람들의 비웃음과 공분을 샀을 뿐이었다. 

5·12 폭력 사태 이후 극우에서 극좌까지 모든 정치세력은 이 사태에 대해 강박관념처럼 논평을 쏟아냈다. 

<뉴데일리> 같은 극우 언론들은 처음부터 색깔론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몇 차례 역(逆)북풍을 경험한 조·중·동 등 메이저 보수언론들도 5월 4~5일 전국운영위원회 이후 비난 여론이 격화되자 앞 다투어 색깔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폭력사태가 벌어진 뒤, 통진당 문제에 대해 전사회적으로 뭇매가 쏟아지자 운동사회도 비판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5월14일 비례대표가 총사퇴하지 않으면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정치적으로 왼쪽에 속하는 정치단체들은 대동소이한 입장을 내놓았다. 사태의 본질은 단순히 민주주의 문제가 아니라 통합진보당의 사상과 정치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즉 이번 사태의 본질은 주체사상, 의회주의, 혹은 스탈린주의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이런 비판들이 정말 본질적인 것인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통합진보당의 사상이나 의회주의 문제를 억지로 연관 짓자면 아예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굳이 새삼스러운 문제도 아니고 이 사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의 분노도 통합진보당의 주류세력이 주사파라서, 의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노골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가 원인이었다. 보수진영의 이념 공세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통합진보당 주류가 갖고 있는 사상문제는 사상의 자유·표현의 자유문제로 방어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천편일률적인 주체사상, 의회주의 비판보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진보진영 또한 더러운 부정과 만날 수 있는 0.1%의 가능성을 염두하고 매사 스스로를 돌아보겠다”는 진보신당의 논평이 차라리 돋보였다. 



그들만의 문제인가

 

△ 자진사퇴를 거부해 논란의 중심에 선 이석기
(사진출처 : 경향신문)

5월21일 설마 했던 검찰의 압수수색이 실시되고 보수언론과 이명박, 새누리당이 혼연일체가 되어 대대적인 이념공세에 나서자 운동사회 일각에서는 통진당 사태가 조·중·동의 여론조작 때문이라는 해괴한 방어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이 일방적으로 조·중·동의 여론조작에 호도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대중을 조작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뿌리 깊은 엘리트주의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 

운동사회의 대다수는 통진당 노선 비판을 통해 사태를 “그들만”의 문제로 몰아가려고 애썼다. 주체사상, 의회주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신들의 정치적 포지션에 따라 통진당 문제를 자신들로부터 분리시키고 나름의 정치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논리였다. 요약하면 통진당 주류는 운동사회 내에서 특이한, 질 나쁜 종자들이라는 주장들이었다. 통진당 주류세력이 이번에 저지른 범죄적인 행태의 양과 질을 보았을 때 아주 설득력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과연 그런 비판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유시민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며 동시에 폐쇄적인 운동사회의 문화전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유시민이 제기한 것처럼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이런 비판은 사실 정치공세에 가까운 것이며 국회의원의 국가관을 검증하겠다는 우파들의 논리와 합치되는 면이 있다. 통진당 뿐 아니라 운동사회 전반이 소위 국가와 국기를 존중하지 않고 민중의례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역사적·정치적 근거가 있다. 국민의 정서라는 문제로 가볍게 부정할 문제가 아니고 진지한 논쟁이 필요한 문제인 것이다. (박스기사 참조) 

그렇지만 한편으로 통진당 문제가 기존 운동사회 문화의 문제이기도 한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통진당 사태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은 그들의 정치와 무관하게 운동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파적 이해에 따른 절차 무시, 상식의 무시, 민주주의의 훼손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대공장 대의원 대회 등에서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 통합진보당을 비판한 민주노총의 현 지도부나 과거 지도부였던 심상정, 조준호도 이런 행태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심상정과 노회찬만 해도 불과 얼마 전 그들이 추진하는 3자 통합을 진보신당 당원 다수가 반대하자 수백 명의 추종자를 데리고 자기들이 만든 진보신당을 버리고 통합진보당에 넘어간 이력이 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심상정은 소속 당에서 결정한 경기도 지사 후보직을 선거일 직전에 일방적으로 사퇴하고도 당에서 어떠한 징계를 받지 않고 넘어간 전적이 있다. 이런 일들은 사실 이번 통진당 주류세력의 행각과 본질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은 행위들이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을 의회주의라고 비판하는 소위 좌파 정치단체들 사이에서도 지난 몇 년 간 이합집산 과정에서 통합진보당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한 문제들이 무수하게 발생했다. 정당한 문제제기에 대해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정치적 주도권 싸움으로 문제를 왜곡하며, 자기 정파 사람을 무조건 감싸 안고 타 세력을 헐뜯는 것은 좌우를 막론하고 소위 “운동판”에서 매우 낯익은 풍경이다. 

특히 이런 행태들은 성폭력 같은 문제에서 고질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예를 들어 2008년에 벌어진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그 당시에만 반짝 이슈가 되었을 뿐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있다. 

통진당 문제가 터지기 전에 비례대표로 선출된 정진후 후보가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2차 가해자들을 옹호한 전력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지지모임 등은 정진후 후보 사퇴를 요구했지만 통진당은 주류든 비주류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운동사회의 많은 조직에서도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문제가 된 주요한 활동가나 조직을 방어하기 위해 책임회피와 궤변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번 사태에 충격을 받은 것은 통합진보당 주류세력이 보이는 “자기들만이 옳다”고 믿는 폐쇄성과 맹목성, 반성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비난만 난무하며 결과에 대해 평가나 반성은 없이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를 끝없이 합리화하는 태도는 통합진보당 뿐 아니라 운동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따라서 이번과 같은 사태가 통합진보당 만의 문제이고 우리는 무관하다는 태도보다는 오히려 기존 운동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부족한 민주주의와 폐쇄적 문화


남한의 운동문화는 주로 80년대와 90년대 초에 형성되었다. 현재 운동의 지도적인 활동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활동가로 성장했다. 군사독재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운동사회에는 군사규율과 복종의 내면화에 기반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긴박한 투쟁 속에서 민주주의 의식이나 자발성이 함양될 여유는 없었다. 혼란을 불러오는 민주주의 보다 규율과 헌신, 일사불란한 행동이 강조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의 욕구가 소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매도되는 개인의 자율성이 들어설 틈이 없는 문화였다. 

90년대 들어서 운동사회의 갑작스러운 붕괴와 흔히 후일담 문화로 표상되는 집단적인 피해자 경험은 그런 문화가 얼마나 취약한 것이었던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런 군사규율적인 집단주의는 당시의 시대분위기에서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며, 운동사회가 이 나라의 민주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성과로 지난 20여 년 동안 사회전반의 민주의식은 크게 높아졌으며 민주주의를 몸으로 체득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운동사회의 문화가 오히려 소위 일반 대중의 상식과 의식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제기하는 대중의 의식은 현재 사회의 상식이자 선진적인 의식이며, 여기에서 촛불투쟁이나 희망운동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 등장하고 있다. 기존의 운동문화와 다른 자발적인 개인들의 연대가 나타나고 있지만, 운동사회의 폐쇄성과 비민주성은 이런 새로운 운동과 기존의 운동사회의 결합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조건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냥 부정하고 멸시하다보니 운동사회 내부의 민주주의는 스스로 경멸해마지 않는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보다 못한 것이 되고 있다. 

충분한 토론을 거치지 않고 다수를 믿고 자신의 입장을 밀어붙이거나 비밀투표의 원리가 보장되지 않는 거수투표로 정파적인 집단투표를 따르도록 분위기를 몰아가는 관행은 운동사회 내에서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이렇게 개인의 최소한의 형식적 권리조차 지키지 않는 운동사회 의 조야한 민주주의가 민주적 의식에 눈뜬 세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번 통진당 사태에서 주류든 비주류든 공히 당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운동가의 헌신과 희생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봉건적 집단주의와 온정주의를 조장하는 것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자기의 이해를 위해 묻고 따지는 것이다. 계급투쟁이라는 것도 자기 이해를 지키기 위한 개인들의 투쟁이 동질적 이해 조건에 있는 집단의 투쟁으로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맑스도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의 성격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고 불렀다. 헌신이니 희생이니 하는 전근대적 가치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가치인 것이다.

물론 군사독재 하의 엄혹한 현실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헌신과 희생이 필요했고 적들의 탄압을 이겨내기 위해 규율에 대한 엄수가 필요했다. 반체제적인 운동을 하는 세력들은 언제든지 엄혹한 탄압을 당할 위험이 있으며 운동이라는 것의 성격상 이타적 헌신과 희생, 규율적인 측면을 결코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비민주적인 조직문화를 가리는 가리개로 이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봉건적 집단주의와 맞물려 민주적 의사결정의 부재로 만들어진 활동가 중심의 폐쇄적인 문화는 외부의 눈에 의해 견제 받지 않는, 비상식적인 조직논리와 정치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많은 활동가들이 입만 벌리면 대중, 대중하면서도 정작 대중의 생각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대중의 눈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통합진보당 주류세력의 비상식적인 행태는 이러한 운동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몇 년 간 주사파라는 낡은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가장 열심히 노력해 온 것은 통진당 주류세력이었다. 이정희처럼 대중적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을 키우고 전통적인 통일운동에만 국한되지 않고 반값 등록금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등, 주사파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나름 노력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노력들이 이번 사태로 몽땅 물거품이 되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대중과 만나고자 하는 시도를 표면적인 이미지 문제로만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민주통합당 등은 혁신비상대책위원회를 대표하는 강기갑이 통진당 대표로 당선되지 않으면 야권연대도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선거는 NL(인천) 대 NL(울산)의 대결로 사실상 NL 세력 내부의 권력투쟁이 되고 있다. 

통진당의 가치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대선을 앞두고 통진당을 야권연대에서 내치기 어렵고, 내부에서도 분당을 고려하는 세력은 없기 때문에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통진당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통진당 사태는 상처만을 남긴 채 노동자와 일반 서민들에게 정치 일반에 대한 불신만을 남겨놓을 공산이 크다. 

통진당 사태의 교훈에 대한 논의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런 논의들은 대개 통진당에 대한 비판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노동자정당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운동이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위기는 보다 근본적인 데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들은 일면적으로 보인다.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기존 운동의 재편성이 아니라 최근 뚜렷하게 싹이 보이고 있는 새로운 주체들의 운동이 어떻게 발전하느냐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운동사회의 조직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없이는 새로운 대중운동과 접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운동사회에서는 통진당 주류세력이 보여준 맹목적인 규율과 복종의 문화를 여전히 부러워하는 활동가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사고와 태도를 계속 가져가서는 통진당 사태가 보여주듯이 이른바 “진보”에도 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태영 picollo@jinbo.net


* 주) 이정희, 이석기, 김재연 등이 속한 정파를 언론에서는 보통 당권파나 경기동부연합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당권은 이미 빼앗긴 상태이며, 경기동부연합은 편의적으로 그렇게 부를 수는 있겠으나 그들 주장대로 이미 없어진 조직이고 지금의 주류 세력과 꼭 일치하지도 않기 때문에 적절치 않은 명칭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기사에서는 그들을 통진당 주류세력으로 통칭한다.

  

애국가를 안 부르면 아니 되오?

통진당이 자체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문제제기는 5월 통진당의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쏟아질 때 유시민이 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상규가 애국가를 부를 수도 있다고 답해서 가라앉았다가, 얼마 전 이석기가 기자회견에서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라는 발언을 하면서 다시 불거져 나왔다. 

이에 대해 심상정은 6월18일 이석기가 “딴 세상에 사는 것 같다”며 “헌법을 뒷받침하는 국회의원이 국가를 부정하면 공인 자격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으며 통진당 현 지도부는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자신들은 “애국가를 대한민국 국가로 받아들이는 대다수 국민들의 견해와 정서를 존중하고 이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심상정의 발언은 이 사람이 과연 오랫동안 민주노총 지도부를 역임한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 진영도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운동사회가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은 소위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 맞다. 혹자들에게는 대한민국 정부가 친일, 친미 정권이기 때문에, 혹자들에게는 지배계급의 정부일 뿐이기 때문에 운동사회는 정파를 막론하고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태극기를 무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면 안 되는가? 지배계급의 국가와 국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국민들의 대표로 선출 되서는 안 되는가? 민주주의의 기본은 정치사상의 자유이며 이는 그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이나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애국가 문제는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진지하게 논의해야할 문제이며, 그냥 분위기에 따라 영합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정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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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번역]선거로는 긴축조치와 싸울 수 없다!

  • 분류
    국제
  • 등록일
    2012/06/26 15:08
  • 수정일
    2012/06/26 15:24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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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과 6월에 걸쳐 열린 그리스 1,2차 총선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차 총선에서 긴축조치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제시한 SYRIZA(급진좌파연합)가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고, 2차 총선에서도 원내 제 1당(신민당, 29.66%의 지지율)은 아니지만 26.89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했다. 이 즈음, 프랑스에서도 우파 사르코지 정권이 사회당의 올랑드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각종 언론들은 이러한 선거 결과가 대중들의 급진화를 보여주는 결과라고 보도했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의 극우정당인 국민전선과 그리스의 극우 정당인 황금새벽당 역시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유럽 각국에서 있었던 선거결과의 맥락 속에서 그리스와 프랑스 총/대선 결과를 살펴보는 것 역시 의미 있는 내용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ICC(국제공산주의흐름)의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이 기사의 입장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사르코지 정권이 올랑드 정권으로 교체되고, 그리스에서 기존에 정권을 잡았던 정당들이 선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긴축에 대한 반란이 유럽을 휩쓸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은 가디언지(2012.5.8)의 시사평론가뿐만이 아니다. 좌파들은 “유럽 전역에서 긴축에 대한 반감이 점증”(socialist worker, 2012.5.12)하고 “긴축조치에 대한 대중적이고도 뿌리 깊은 적대감”(wsws.org 2012.5.12)을 목격하였다. 심지어는 “유럽이 좌선회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workers' power, 2012년 5월호)

 

그러나 선거기간에 어떠한 수준의 불만이 체감되었든 간에 현실적으로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는 긴축정책을 계속해서 부과하고 심지어 심화시킬 것이다. 정권에 대한 반대투표 현상은 뿌리 깊은 불만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을 위한 어떠한 성과도 노동자 투쟁을 대중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선거는 전적으로 부르주아지에게 유리한 조건 하에서 진행되는 게임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아직도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할지라도) 투표소에만 모여 있다. 이는 그들에게 선거를 통해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이 아직도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선거가 사회변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거나 자본주의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인 경제 정책이 있다는 믿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번 선거들을 둘러싸고 이야기되는 것과 같은 유럽에서의 ‘반란’은 없었다. 이러한 선거들에서 매운 큰 분노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다양한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으로 잘못 조준되었고 무기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선거들을 둘러싼 현상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자본가 계급과 이 계급의 정치적 기구인 국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일상적인 시소가 아닌

 

2008년 가을의 금융위기 이후, 많은 수의 정치지도자들과 정당들이 교체되었다. 이는 공공지출 삭감과 실업, 임금과 연금 삭감, 경제적 ‘가혹함’과 긴축과 관련된 측면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다. 부르주아지의 전반적인 전략은 없었다. 기존 정권이 좌파든 우파든 연정이든 간에 개별 리더들과 정당을 내쫒고 다른 사람과 정당으로 교체했을 뿐이다. 미래에는 정치세력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생각 없이 지배계급은 단지 현안들에 대응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리더는 전임자들과 연속선 상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빠르게 신뢰를 잃기 시작할 것이다.

 

2008년 11월 존 메케인은 버락 오바마와의 대선에서 패배했다. 메케인이 부시 대통령의 정책과 연계되어있다는 사실과 1930년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 흐름 속에서 미국 경제가 2007년 말부터 불경기였다는 것이 패배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2010년 5월 총선 결과 노동당이 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연합정부로 교체되었다. 이 연정은 2차 대전 이후 최초다. 보통 그들의 정치적 술수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던 영국 부르주아지는 예년과 같이 노동당과 토리당 간의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또한 선거 이후로 노동당을 가능성 있는 ‘대안’으로 포장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벨기에에서는 2010년 6월 선거 이후 정부가 완전히 구성되는 데 18개월이나 걸렸다.

 

2011년 2월의 아일랜드 총선에서 1920년대부터 최대의 정당이었던 공화당(피나 페일)은 득표율이 42%에서 17%로 떨어지는 것을 목도했다. 아일랜드 정부는 현재 노동당과 통일당(피네 게일)의 좌/우파 연립정부다. 아일랜드는 2008년과 2009년에 불경기를 겪었는데 2011년 3분기에 다시 불경기로 들어섰다. 새로운 정부는 자신이 이전의 공화당, 녹색당 연정과 다르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켈틱 타이거’(‘켈트족 호랑이’라는 뜻으로 아일랜드가 경제적으로 잘나가던 당시 스스로를 지칭하던 별명)의 신화는 예전에 사라져버렸다.

 

포르투갈에서 있었던 2011년 6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집권여당인 사회당의 지지율이 37%에서 28%로 떨어졌다. 투표율은 역대 투표율 중 낮은 수준인 58%로 떨어졌다. 2002년 6% 미만이었던 실업률은 13% 이상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 포르투갈은 1970년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 2011년 EU와 IMF의 구제금융 조건은 일련의 극심한 정부 지출 삭감이었다.

 

2011년 스페인 총선에서 집권 사회당 득표율은 44%에서 29%로 급락했다. 그리고 소수 정당에 대한 지지가 증가했다. 보수적인 인민당의 집권 하에서 스페인은 다시 경기침체에 빠졌다. 지난 5년 동안 계속해서 증가했던 실업률은 24.4%(25세 이하의 청년실업률은 50% 이상이다)라는 기록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이 수치는 EU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2011년 11월,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정권이 경제학자인 마리오 몬티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마리오 몬티 내각은 선출되지 않은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상하원 대다수의 지지 하에 일련의 긴축조치들을 도입했다.

 

2011년 12월, 슬로베니아에서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010년 10월 말에 창당된 ‘긍정적 슬로베니아’라는 당이 가장 높은 득표를 했다. 책략과 협상의 시간이 지나고 기존의 4정당 연정은 5개 정당 간 연정으로 바뀌었다. 이 두 번의 연정에 계속해서 참여하고 있는 정당은 연금생활자 당밖에 없었다. 하지만 ‘긍적적 슬로베니아’ 당은 연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슬로베니아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서면서 5월 11에는 의회에서 새로운 긴축조치 프로그램이 채택되었다. 긴축조치 프로그램에 대해서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던 주요 노동조합들은 국민투표를 통한 긴축정책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작년에는 국민투표로 4개의 법안통과가 거부된 바 있다.

 

올해 1월과 2월에 있었던 핀란드 대선에서 오랜 기간 하향세였던 사회민주주의당 득표율은 새로운 최저치를 찍었다. 30년 만에 처음 들어선 사회민주주의당원 소속이 아닌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투표율은 1950년대 이래 최저치였다.

 

2012년 4월 네덜란드 연립정부는 558일의 집권 끝에 사임했다. 연정 내부에서 각 당 간에 예산 삭감을 둘러싸고 분쟁이 있었다.

 

최근의 프랑스 대선에서 올랑드의 승리는 여러 측면에서 단지 사르코지가 아니라는 점에 기인한다. 그가 투자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겠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생활조건과 노동 조건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 올랑드는 앙겔라 메르켈을 처음 방문한 자리에서 “성장, 일자리, 경제 활동의 선물”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는 물질적 현실에는 전혀 맞지 않는 정치인들의 허풍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프랑스의 상황은 그리스만큼 절박하지는 않다.

 

난장판인 그리스 정치

 

최근의 그리스 선거를 살펴볼 때 PASOK(그리스 사회당), 신민당, LAOS(대중정교회 연대) 연정이 대다수의 지지를 잃어버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연정이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정부를 교체하고 IMF, EU,유럽중앙은행이 요구하는 조치들을 취하기 위해서 작년 11월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선거에서 32개의 당 중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은 현저하게 감소하여 65%를 기록했다. 이는 지금까지 가장 낮은 투표율이었던 2009년의 71%의 투표율과도, 70대 후반, 80%를 넘고는 했던 기존의 수치와도 대비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선거결과가 사르코지에 대한 반대가 주요하게 표현된 것이라면 그리스 선거결과는 연립정부와 그들이 집행했던 정책에 대한 반대를 보여주었다. PASOK과 신민당에 의해 지배되었던 그리스 의회에 4개의 좌파 정당과 3개의 우파 정당이 있다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세력이 쪼개진 정도를 보여준다. 새롭게 선거를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연정의 가능성은 한정적이다.

 

SYRIZA의 대표 알렉시스 치프라스

 

 

 

 

 

 

 

 

 

 

 

 

언론에서는 좌익 연합인 SYRIZA(급진좌파연합)를 그들의 협력과 용인 없이는 정부가 기능할 수 없는 신진 세력으로 보도하며 SYRIZA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였다. SYRIZA는 긴축조치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했고 한 동안 지지도를 계속 상승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업하는 노동자와 정부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하거나 실제로 연립정부에 참여하게 된다면 SYRIZA는 어떠한 새로운 것도 대표하지 못할 것이다. SYRIZA는 긴축조치에 반대하는 발언들을 하면서도 그리스가 EU와 유로에 남아있어야 하며 부채는 그냥 탕감될 수는 없고 최근의 구제금융에 대해서 조금 더 완화된 조건을 선호한다고 명확히 밝혔다.

 

SYRIZA의 등장이 부르주아지에게 남아있는 유연성을 보여준다면 그리스 자본주의 정치 기구의 해체는 LAOS(대중정교회 연대)의 득표감소를 대가로 한 황금새벽당의 득표율에서 잘 드러난다. 예전에도 그리스에는 우익정당이 있었다. (대중정교회연대라는 정당은 가장 최근의 예이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 살라자르와 동시대에 메타사스라는 진짜 독재자도 있었다. 그러나 황금새벽당은 좌파에 의해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진, 그저 그런 또 하나의 인종주의적, 우익 정당이 아니다. 그들의 반 이민자 정책은 외국인에 대한 물리적 공격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공격하고 언론인들을 위축시키려고 한다. 또한 나치 단체들과 연계되어 있다.

황금새벽당은 “더러운 땅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후보들은 정치인보다 많은 군인이 필요하다고 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들은 네오 나치보다는 메타사스의 뒤를 이은 그리스 국가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다. 그들의 당기에서 붉은 배경에 그려진 검은 심볼은 나치의 깃발과 혼동하기 쉬울 정도다. 그들의 당기는 실제로는 ‘미앤더’ 혹은 ‘그리스 번개무늬’지만 스와스티카(나치의 깃발)와 매우 유사하다. 어떠한 이름표를 붙이든 황금새벽당은 부르주아 정치의 심화된 쇠퇴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왕정복고를 외치는 그리스의 정당들의 출마로부터 배제되어있지만 황금새벽당은 새로운 의회에 21명의 의원들을 배출했다.

 

그리스 선거는 유럽전역의 부르주아지들이 이번 경제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은 긴축조치에 대한 진정한 경제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 정당들은 돌아가면서 경제적 위기의 영향을 문제 삼지 않는 정책들을 실행하면서 정치적 대안을 소진하고 있다. 어떠한 특별한 정치적 전략도 없고 사안에 대한 나날의 대응만이 있을 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기능하고 있으나 지배계급의 정치기구 활용방법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투표에 참가하는 사람들 수는 점점 감소하고 있는데 새로운 정당들과 연합들은 변화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계속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정권을 다른 정권으로 바꾸거나 민주주의 게임에 참가해서 노동계급에게 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정당들은 국가 자본가 계급의 분파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지에게 민주주의가 그렇게나 중요한 이유다. 바로 민주주의가 다른 여러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에게 그들 스스로의 방식으로 하는 투쟁이야말로 계급 간의 교착상태를 깰 수 있는 세력을 만들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선거에서도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노동계급은 그들의 투쟁에 무엇이 걸려있는지에 대한 자각과 자기조직화에만 의존할 수 있다.

 

 

2012년 5월 20일 I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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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기획인터뷰]어떻게 지내세요? #3 쌍용차지부 이창근 - 투쟁이 곧 삶이고 치유의 과정이다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쌍용차지부 이창근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된 쌍용자동차 범국민 행동주간은 희망과 연대의 날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되었다. 여의도에서 시작된 희망걷기는 인도까지 봉쇄한 경찰의 제지로 중간에 흩어졌다 다시 모여야 했고 대한문까지 행진하는 동안 4명이 연행되었다.
그러나 각계각층에서 모인 다양한 참가자들은 다음 날 마지막 일정까지 대한문을 사수하며 다양한 행사를 펼쳐냈다. 동원된 노동자보다는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이번 행동주간은 이름 그대로 쌍용차를 중심으로 희망과 연대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행동주간 세 번째 날인 6월12일 대한문에서 쌍용차지부 이창근 동지를 만나 이번 행동주간의 의미와 투쟁 속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새로운 전환기를 위한 범국민 행동주간

이번 쌍용차 범국민 행동 주간이 가지는 의미는 어떠한 것인가요?  

 

66월16일 열린 희망걷기

여전히 잘 모이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집중하는 의미, 16일 함께 걷는 행사에 집중하는 의미도 있고요. 실제 내용은, 지금 쌍용차 문제가 여러 단체 시민들 많은 힘이 모아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새로운 전환기를 못 맞고 있는 게 아닌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을 필요가 있겠다, 그러한 면에서 행동주간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판단 속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16일 여의도에서 대한문까지의 행진이 불허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원래는 그런 행사는 언론사 특히 경향신문, 참세상과 공동주관 하기 때문에 허가가 나느냐 나지 않느냐 이런 문제는 아니에요. 경찰이 지금 허가 안내고 있는 건데. 그럴 바에 집회신고 내라,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실무적으로 집회신고 내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문제 아닌 것 같아요. 쌍용차 이 문제를 경찰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투쟁 주간사업 끝나면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일단 대한문 분향소를 설치했다는 의미는 이 문제의 끝을 보겠다고 하는 의미이죠. 끝을 보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지금 길거리 강연이라든지 여러 가지 배치들을 하고 있고요. 쌍용차 문제가 더 이상 미룰 이유도 없고 미뤄서도 안 되고 이 참에 해결하겠다, 하는 의지이기 때문에 계속합니다. 

 

지난해부터 이어져온 희망텐트와 희망광장 투쟁은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방식이 아닌데 이러한 운동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냉정하게 얘기하면 노동운동 주체의 힘없음의 표현이라고 봐요. 만약에 주체의 힘이 있다고 하면 그게 고전적이든, 과거 방식이든 현실적 힘을 가질 텐데. 그것이 고전적이다, 과거 방식이다, 사람들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런 방식으로 현실적 힘을 동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조직 동원력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 혹은 공감의 다른 표현이 조직화일 텐데요, 조직이 안 되고 있는 거 아니냐는 거에요.
그런 차원에서 새롭게 고민되고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옳다, 그르다 라기보다는 부단히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계속 연구하고 있고 기획해가는 것 아니겠는가 라는 거죠. 기존 방식으로는 안 되니까. 그것이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안 되니까. 찾고 있는 과정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세상과 만나는 노동자, 변화하는노동자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는 현재 쌍용차 투쟁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나요?

하고 있죠. 없다고는 할 수 없고요. 근데 그런 건 있죠.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고 이게 단사 문제, 쌍용차 문제만 볼 수 없는 조건이 있는 거잖아요. 지금 임단협 문제도 있는 것이고 노동조합 일정이 있고 그렇다 보니까 외부에서 볼 때에는 결합도가 좀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하는데 노조가 쌍용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 부분에서 이해해야 될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쌍용차 문제가 노동운동과 노동진영에 던지는 메시지, 그리고 여기에서 확산되고 있는 연대의 힘들이 어떤 방식으로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들, 이것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도 잘 살필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결론적으로 사실상 패배의 경험, 혹은 좋지 않은 기억과 이런 것이 전진과 상상력을 가로막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작은 것이라도 승리의 경험, 이기는 성취감을 맛보는 계기, 그래서 좀 더 전진할 수 있고 상상력을 좀 더 확장시킬 수 있는, 그렇게 됐음 좋겠다, 그게 쌍용차 분향소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 이전의 쌍용차노조 집행부는 관료적이고 투쟁을 잘 안했던 것 같아요. 77파업 투쟁을 거치면서 이전과 지금 조합원들 의식이 어떻게 변화하였나요? 

쌍용차노조가 관료라기보다는 어용스럽다라는 측면이 강할 것 같고. 그건 지역색과 무관치 않다, 라는 것도 있고요. 그런 평가(어용스럽다)도 있지만 2000년대 초반 민주노조 들어서서 완성사 파업을 함께 했다거나 주도했다거나 여러 가지 그런 경험도 있는 거죠. 그 뒤에 계속 노조가 어용화 되면서 사실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혹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바에 대해서 복무하지 못한 게 많았죠. 그 결과가 이런 사태를 불러왔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충분한 상관관계는 있겠다라는 생각은 하고 있고요.
지금은 엄밀히 말하면 공장 안에 있는 노조가 어용노조가 있고 분향소에 이른바 ‘망명지부’가 있는 건데. 그 차이는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안주하려고 하는 측면은 있죠, 공장 안에. 자기 꺼라도 지키기 위해서.
지금 밖에서 싸우는 노동자들 입장으로 보면 세상과 만나는 거니까 많이 다르죠. 기존의 인식, 저를 포함해서 기존의 인식에서 넓어지는 느낌도 들고. 노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살 건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건지,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건지 이런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봅니다. 

 

1사1조직 속에 비정규직지회의 활동이 지부와 함께 또 따로 진행되어 왔는데 투쟁하는 쌍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상황에 어떠한 차이점이 있나요? 

상황 차이보다는 인식이 상황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사실 연대를 많이 못했고 쌍용차 투쟁이 원하청 공동투쟁,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던 투쟁임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 그것은 집행간부들이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서 사실상 고민이 많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반성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유철(의원 사무실 앞) 겨울나기 투쟁이라든지 여러 가지 문제의식, 또 선도투, 이런 것을 많이 했고. 그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를 지키려고 했던 그 싸움들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쌍용자동차 투쟁이 비정규직 투쟁으로는 잘 인식되지 않는 것에 대한 소외감, 혹은 이런 것이 좀 많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고요. 그것에 대해서는 저 개인적으로는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든든한 심리적 파이프 라인, 와락

투쟁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났고 피로도가 상당할 것 같은데 육체적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어떻게 감당하고 있나요?

특별히 어떻게 푼다, 잘 모르겠고. 이것도 하나의 일상이니까요.

생활 자체가 투쟁을 하는 것이라는 건가요? 

그렇죠, 생활 자체인 것이죠. 예를 들어서 노점상 하는 분들보고 어떻게 매일 피곤해서 이렇게 합니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일이에요. 해고자들이 투쟁하고, 싸우고, 지키고, 일상이니까요. 그 안에서 나름의 일이 있는 거고. 

 

지난해부터 와락 센터에서 이루어지는 심리치료가 쌍용차 노동자들과 가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획기적 변화 이렇게는 아니지만 아주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마련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있고요. 든든하죠, 그런 면에서 보면. 그것이 부모가 됐든 아이가 됐든 그 안에서 느끼는 안정감은 매우 크다, 그것이 확산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투쟁의 어떤, 이명수 마인드프리즘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든든한 심리적 ‘파이프 라인(Pipe Line)’이 선 것이다(라는 것이죠). 그런 심리적 측면에서 보면 허파, 허파의 공간입니다. 

 

대한문에서 대중적인 집회나 문화제 말고 조합원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이나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나요?

내부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좀 하고 있는데요. 문제는 일정이 너무 많아요, 저희가. 수가 적은 것에 비해서 요구되는 일정이 사실상 너무 많습니다. 일정소화하기 바쁜 게 좀 있죠. 심적 혹은 시간적 여유를 좀 가져야 하는데. 그렇게 잘 못 되는 경우가 좀 있어요.

 

돌아가면서 약간의 휴가 같은 것은 가지나요?

네, 쉬게 해주죠. 그런데 그게 쉽지 않죠.

 

 

투쟁도 하나의 치유의 과정

지금 생계투쟁을 하거나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조합원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노력하고 있고요. 와락을 통해서 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지부를 통해서 하는 경우도 있고. 최대한 연결하려고 만나려고 하고 있고요.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토론회 같은 것을 가지는 건가요?

쉽지 않죠. 예를 들어서 공장을 떠난 사람들, 혹은 무급자하고 토론회 하기가 쉽지 않죠.  

 

범국민추모위, 범국민대책위, 시민상주단 등 쌍용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체와 정치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쌍용차 문제가 다시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떠올랐는데, 이러한 움직임들이 생계투쟁을 하거나 활동을 쉬고 있는 동지들에게도 전해지고 있나요.

두 가지 측면인 것 같은데요. 느껴지긴 느껴지지만 한 축으로는 해결의 기운으로 가고 있 느낌도 있을 거고 또 하나는 그거와 무관하게, 나는 무관하구나라는 자기 자괴감으로 다가가지 않겠는가, 두 가지로 반응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왜냐하면 예를 들어 희망퇴직자 같은 경우는 고용관계가 완전히 없기 때문에 지금 정리해고자도 마찬가지지만 쌍차 문제가 잘 풀려도 자기와 무관한 문제로 인식하거든요. 다만 우리가 싸웠던 혹은 노동자들이 주장했던 바가 잘못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해명은 되지만 그것이 직접 고용과 연계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따른 소외감.
예컨대 그런 거죠. 명진 스님이 천만 원을 쌍용차 쓰시오, 하지만 그 천만 원을 내가 받는 게 아니잖아요. 개인이 받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자기 지갑에 들어가는 천만 원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림 속의 떡이죠. 그것에 대한 소외감이 있는 거죠.
마찬가지 투쟁이 잘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좀 더 서운해 할 수 있는 이런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유추하고 있습니다.  

 

운명을 달리한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활동가나 노조간부보다는 일반 평조합원들이 더 많지 않나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왜 그러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연관된 것인지요?

그럴 수도 있다고 보는데요. 투쟁하는 노동자는 죽지 않는다, 이런 얘기가 전 틀리지 않다고 보고요. 왜냐하면 투쟁도 하나의 치유의 과정입니다. 제가 볼 때는 투쟁하는 것 자체도 치유의 과정이고 풀어내는 과정이고 하는 거죠.
그래서 투쟁하는 동지들이 매우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가 그 자체로서의 존중도 있지만 그 과정이 나를 치유하는 과정, 물론 거기에서 비율이 나를 깎아먹는 비율보다 나를 치유하는 비율이 더 높아져야겠지만. 그런 과정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실제 쉽게 데미지(demage)를 입지 않죠. 그런데 투쟁하지 않거나 혼자 있거나, 혼자 이걸 삭히는 것은 굉장히 괴롭다 이렇게 봅니다. 

 

마지막으로 알리고 싶은 말씀 있다면 해주세요.

다시 집결해야 된다고 봅니다.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이 있을 때, 소위 모든 세력들이 노자 대결이다, 라고 했던 규정, 저는 그 규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고요. 우리가 지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우리가 싸움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혹은 우리가 싸움을 그만둔다 하더라도 2009년 함께 했던 동지들이 함께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 노자대립 한 가운데서 여름을 보냈던 그 많은 동지들, 함께 했던 동지들, 많은 조직들, 지금 함께 해야 된다, 이런 뜻이고요. 반드시 이 문제를 함께 풀어야 된다, 풀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된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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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기획인터뷰]어떻게 지내세요? #2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쌍용차에 비정규직도 있어요! ②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49제 이후 새롭게 5대요구안을 정비하고 평택역과 서울 대한문 두 개의 거점에서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다. 평택역에 새롭게 천막을 친 5월24일 비정규직지회장 서맹섭 동지를 만나 그 간의 투쟁 경과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들어보았다. 분량 관계상 인터뷰를 2개의 기사로 나누었다. 첫번째 기사에서는 49제 이후의 투쟁계획과 이전 투쟁의 경과에 대해서, 두번째 기사는 쌍용차 해고차 내에 비정규직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712

 

쌍용차에 비정규직도 있어요!


현재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어느 정도 되나요?

2009년도에 (공장점거)파업할 때 19명이 싸웠어요. 지금도 19명이 있는데 다만 3년이란 시간이 지나니까 다들 힘들어해요. 제일 큰 문제가 생계문제죠. 나머지 조합원들은 생계를, 처음에 한 1년 반 정도는 파업이 끝나고도 같이 싸웠어요. 도저히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생계투쟁으로 나가시라(해서), 현재는 임원간부 4명 중심으로 해서 싸우고 있어요. 저희가 투쟁을 만들어나가면서 조합원들과 소통을 하고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게 되면 우선적으로 같이 조합원들과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4명 중에 서울에 2명이 올라가 있어요. 한윤수 사무장, 유제선 조직부장. 우리 조직부장이 얘기 잘 해요. 아주 선수에요 마이크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씩 지 혼자 밤새 떠들어요. 회사 정문에 가면 가처분이 떨어져 있어요. 마이크 잡고 얘기하지 말라고. 하도 회사 관리자들 깠거든.(웃음) 까는 얘기하고 열 받으면 욕도 하고 해서 명예훼손으로 (가처분이 떨어졌어요). *1편에서 이어집니다.

 

비정규직은 2009년 이전부터 잘려왔는데 쌍용차 문제 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잘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요.

 

평택역 농성장 앞 선전전. 많은 시민들이 모금과 서명을 하고 간다.
정규직이 인원이 많잖아요. 비정규직은 소수가 남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투쟁을 해왔던 거고. 어쨌든 공장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싸움을 이어왔던 거에요. 우리는 작년 10월24일부터 텐트농성을 시작했지만 그 전에 8월 달부터 1인시위를 시작했었어요. 지역시민단체와 하루 10시간, 릴레이 10시간 하면서 그 때부터 선전포고를 했던 거고. 10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농성) 들어가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싸움을 계속 알려냈어요.
그렇게 가다가 12월 달에 지부가 희망텐트촌을 들어가면서 큰 싸움을 걸면서 가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죠. 저희는 우려를 했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싸워가는 과정을 한 번이라도 우리 농성장에 왔던 동지들은 다 알아요.
전체적으로 큰 이슈화는 못시켰지만 묻혀가면서도 우리 목소리를 계속 냈다. 다만 아쉬운 건 좀 많죠. 내가 우리 조합원 50명만 남아있어도 엄청난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소수가 두 농성장을 가지고 갈려고 하다보니까 어렵더라고요. 그 전에 우리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왔을 때는 연대도 가고 그랬어요. 투쟁하는 사업장에 계속 가고 그랬는데. 농성장이 두 군데를 나눠서 하니까 어딜 가지도 못하고 뭐.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그렇더라도 지금도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고 쌍용차에는 정규직도 있지만 소수의 비정규직들이 아직까지 질기게 싸우고 있다(는 거에요). 정말 6개월이라는 농성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지역에서도 한 단위가 없어요. 지부도 마찬가지에요. 저희는 했어요, 인원에 굴하지 않고.

 

지부와 투쟁계획이나 의견 조율은 어떻게 하시나요?

지부가 토론회나 회의를 하면 저희가 들어가요. 선도투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전체회의면 저희가 들어가요. 전체회의가 아니더라도 지부 임실장 회의에는 제가 들어가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정비지회장도 들어오고 그래서 같이 소통하고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같이 해야하니까.
또 전술적으로 이건 비정규직 단위에서 해야 된다, 비정규직지회가 투쟁을 진행하면서 지부는 엄호해주고 지원해주고 역할을 하겠다, 그런 부분이 또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지부도 지부 나름대로 투쟁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싸움에 다 붙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 면은 조직적으로 열어갔던 거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현재는 원유철 부분이 있지만 5대 요구안을 가지고 같이 힘을 모아보자, 대선 국면이 다가오기 때문에 6월 (국회)개원(이 있고), 9월 이후로 넘어가면 (대선 때문에) 우리 목소리가 묻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어쨌든 우리 싸움 만들어내 보자, 그래서 지금은 함께 가야된다(고 결정했어요).

 

앞서 말씀하셨던 것(첫번째 인터뷰 기사 참조)처럼 해고 사유가 달랐기 때문에 전술도 다르게 갔다는 건가요?

그렇죠. 지부가 열어준 거죠. 옆에서 지원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부분 해주겠다, 다만 이 부분은 전술적으로 비정규직지회애서 끌고 가라. 지부는 다 포괄해서 큰 걸로 싸워나가겠다(고 한 거죠).
이게(역량이) 한정되어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86 중재했던 사람들, 지역 국회의원 상대로 싸워나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도 가능한 투쟁이었거든요. 그런데 지부가 이걸 껴안고 지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싸우면 너무 고립되잖아요. 쌍용차 문제를 전국적으로 싸워나가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좀 있어서 그런 부분은 약간 전술적으로 열어준 거고.

 

조직편제상 비정규직지회는 지부에 속해있는 건가요?

저희는 지부에 속해 있어요.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에요. 이걸(1사1조직) 언제 했냐면 원래는 우리도 현대차와 같이 독립적으로 (노조활동)했는데 2009년 파업이 끝나고 나서 2010년 (지부) 3기 지도부 선출하면서 제가 총회에 부쳐버렸어요. 원래는 대대안건인데 대대가 아니라 정규직 동지들한테 이 안건을 던지고 싶다, 그래서 2010년 3기 지도부 뽑을 때 1사1조직 안을 던졌어요. 그 때 성사가 된 거에요. 거의 96%로 찬성을 찍어서. 그 때 통합이 된 거에요. 그게 안됐으면 독립성은 있는데, 지금은 같이 움직이죠.

 

정리해고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의 쌍용차지부는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를 잘 안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도 억울해서 조직해서 (제가) 노동조합 띄웠던 당사자인데요. 2008년도 10월에 노동조합 띄웠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때부터 싸움을 했던 거였고 일부 비정규직을 알고 있는 활동가 외에는 (정규직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 때 당시에 정규직이 내 자리에 들어오는 전환배치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왜냐면 내가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들어와서 일하고 내가 안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못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공장 안에서 집회하거나 출투할 때도 ‘너 나가면 내가 사는데 너희들 나가면 우리 사는데 왜 시끄럽게 하냐’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
상황이 낙관적은 아니었어요. 그 해 12월 달에 2기 지도부, 한상균 전 지부장이 출마해서 당선이 됐는데 그 때부터 (정규직) 집행부에 우리 비정규직을 도와줬던 활동가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때부터 상황이 약간씩 바뀌어 나간 거에요. 조직적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진 않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가면서 2009년 파업에 들어가고, 제가 굴뚝 농성에 들어가면서 많이 바뀌었죠.
공장(점거파업)에 19명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들어가서 함께 싸우면서 몸 부딪히고 똑같이 앞에 나가서 싸우고 그러면서 좀 바뀌어 나갔죠. 한상균 전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변화하면서 그 다음에 파업으로 인해, 그리고 1사1조직 편제를 하면서까지 이제 지금은 많이, 완전히 바뀌었죠. 지금은 동료이고,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라고 외치잖아요.
이제 쌍용차 안에는 두 가지가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현대차나 기아차나 한국GM을 봐도 한 쪽은 싸우더라도 한 쪽은 안 싸우고 있고, (정규직이) 해고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저희는 두 가지를 충족을 하고 있는 거라, 정리해고 문제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그래서 알려내기가 더 쉽지 않겠나 (싶어요).

 

공장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시기마다 1사1조직이 논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때로 함께 해야 될 부분은 동의가 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독립성이 많이 필요한 부분도 있는 거고. 저희는 어쨌든 밀려나와 있잖아요. 공장 안이 아니고 밖이기 때문에 현대나 기아차와 약간은,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1사1조직이 과연 됐을까, 난 안됐을 거라고 보는 거에요. 불가능하다 이거. 인식은 똑같지 않겠냐, 현대차나. 다만 우리는 같이 쫓겨나서 싸워가는 목소리는 똑같잖아요. 다시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싸우는 거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1사1조직을 했던 거에요.
만약 1사1조직이 안됐고 우리가 지부 소속이 아니고 독립성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면 소수지만 더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만에 국한되어선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1사1조직 했어요). 다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없을 것 같아요. 애매한 게 있어요. 기아보다는 낫죠. 다만 똑같은 형태라고 하면 힘들지 않았을까.
비정규직도 마찬가지이지만 정규직도 자기들 욕심을 버리고 하나의 조직으로 묶으려면 서로를 먼저 알고 가야돼지 않겠냐. 나는 정규직이니까 정규직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비정규직이라면 어땠을까. 반대로 입장을 바꿔보면 인식이 조금 더 바뀌어 나가지 않을까. 실질적으로 라인 운영도 비정규직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왜 쫓겨나야 돼, 이거 우리가 같이 라인에서 일하면 소통해서 풀어갈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내 개인의 생존권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동료를 생각하고 동료도 나를 생각한다고 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아직까지 그게 인식이 안 바뀌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 욕심 가져가기 위해서 서로 이해를 못하고. 얘기를 해보면 이해를 한다고 해요. 이해를 한다, 말뿐이잖아요. 실제로. 저희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에요. 같이 투쟁을 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요. 같은 해고자이면서도 그런 모습은 있어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는 거죠. 때로 함께 가기 위해서는 조직을 묶어야 되겠지만 그런 욕심과 그런 생각이 안 바뀐다면 저는 1사1조직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에요. 저도 후회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고 그럴 때 후회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의견 충돌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이라는 고정관념을 못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은 지부와 함께 일정을 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이죠?

지금 상황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갈 수밖에 없는 거라. 다만 하나로 가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저희는 공장에 들어가야 될 근거가 8,6합의 약속이잖아요. 8,6합의가 아니더라도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비정규직이 빨리 들어가야 될 입장이고.
또한 불법파견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1심에서 승소한다면 요구안은 달라지죠. 비정규직으로는 안 들어가죠, 이제. 더 큰 투쟁을 하면서 더 크게 만들어가고. 안에 있는 지금 조합비를 내려고 하는 사람들,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다 조직해야죠. 조합원들도 많아질 거고, 조직 대상들이 공장 안에 있고 이후 투쟁도 여러 가지로 고민될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이런 것도 있잖아요. (불법파견 문제가) 이길 수도 있지만 지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것도 우려가 있는 거잖아요. 지면 지는대로 또 계속 끝까지 재판을 가야될 것 같고 또 가면서 싸워봐야 되고. 한쪽으로는 그게 있고 한쪽으로는 하루빨리 공장으로 들어가야 된다(라는 게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8.6합의 이행이든 신규채용이든 형태는 상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지금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들 몇 년씩 근무했던 사람들이에요. 짧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 근무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경력을 갖고 있고. 저는 면접까지도 필요없다고 보는 거에요.
우리 업체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사내하청 업체는 거의 똑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업체가 3개든 4개든 인원을 나눠서 넣든, 한 군데로 다 넣든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들어가서 일을 하면 되는 거고. 또한 노동조합 문제는 기본적으로 갖고 가야할 문제이고.
어떠한 형태를 떠나서라도 무조건 공장 안으로 넣어주라,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금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임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공장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 그걸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약속 지키면 되요.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약속 지키겠다, 그러면 우리 들어가서 일하면 되는 거거든.

 

투쟁 속의 상처와 원동력


돌아가신 분들 중에 비정규직 동지도 계신가요.

 

 
첫 번째로 있어요. 첫 번째로 비정규직. 조합원이었어요, 우리. 조합원이었는데 희망퇴직을 썼었어요. 640명 있었어요, 저희(비정규직)가. 2008년도에 그 중 350명을 쫓아내려고 했던 거였어요. 350명 전환배치 정규직이 오니까. 처음에는 350명 다 안 나가겠다고 버텼어요. 버텼는데 회사에서 업체별로 압력을 가한 거죠. ‘야, 돈 몇 푼이라도 받고 나가라, 나중에 돈도 없다, 그냥 나갈래 지금 줄 때 받고 나갈래.’
그렇게 해서 300명이 희망퇴직을 써버린 거에요. 50명은 끝까지 버틴 거죠. 50명이 끝까지 가다가 (2009년) 5월 달에 파업들어가기 전에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때 남은 게 19명이었어요. 그 전에는 50명이 2008년 11월부터 2009년 4월까지 끈끈히 본관 앞에서 농성하고 본관 들어가서 항의 투쟁하고. 우리 투쟁한 것은 까페(http://cafe.daum.net/ssybj)에 다 나와 있어요. 그 때 희망퇴직 썼던 동지가 집이 강원도 쪽인 것 같아요. 거기 가서 (돌아가셨어요). 아프더라고요 많이. 안타깝죠. 저기 현수막 첫 번째에 있어요. 그 이후 쭉 정규직, 가족.

 

와락센터에서 비정규직 동지들도 모두 심리치료 받으시죠?

네 저희도 다 해요. 지금 싸우고 있는 동지들 4명 중에 저 빼고 3명은 심리치료를 다 받았고요.

 

동지는 왜 안 받으세요?

아직까지 멀쩡하니까.(웃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상처가 있으실 것 같아요.

제 집사람이 심리치료를 받았고 아이가 또 심리치료를 받고 있어요. 어른들 문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상처를 받았어요. 저는 굴뚝에 86일 있으면서 아이들 둘 전부 공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보고 있는데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밑에 있는 동지들은 한동안 가족들을 만났잖아요, 공장 안에 있을 때에는. 나는 못 만났고. 그게 제일 큰 상처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잘 이겨내고는 있는데 나는 그런 부분이 보여요. 지금도 노동가요 나오면 애들이 그래요. ‘아빠 또 집회 하냐.’ 경찰차 지나가면 ‘아빠 잡으러 온 거 아니냐’. 최근엔 막 그랬어요. 경찰들이 막 잡아가는 꿈 꿨다고. 이런 게 아이들한테는 상처로 있더라. 시간이 가면 잊히겠지만 그 상처를 해결하려면 이 싸움이 끝나야죠. 하루속히.
정상적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가족에도 평화가 올 거고, 아이들도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공장으로 들어가야 되요. 비정규직 동지들 너무 오래 싸웠어요, 1300일이 넘어가고 있어요. 거의 3년 반이 넘어가고 4년을 바라보는데. 정상적인 생활이 된 적이 없어요.
저희보다 더 오래 투쟁하는 동지들도 있지만 내가 이런 얘기하면 그 동지들한테 미안할 수 있죠. 하지만 똑같다고 보는 거에요. 누가 길게 싸우고 싶겠어요.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여기(현수막)에 보면 문구에도 해고된 노동자들은 1년 휴직 이후 복직시킨다고 약속했잖아요. 우리는 1년이 아니에요. 2009년 8월6일 이후에 딱 한 달 있다가 복귀였어요. 저런 거 보면 좀 아프잖아요. 우리는 한 달이었는데 왜 1년이냐. 차이는 좀 있어요. 근데 저런 걸 내가 또 따로 정규직 동지들한테 말을 하기가 그렇잖아요. 이런 문구 보면 아쉬움이 있어요. 근데 이걸 지부에서 만든 게 아니라 주변 동지들이 만든 건데 그만큼 우리 문제를 알려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 제가 그래도 인터뷰도 하고 많이 했는데 안 보나봐.(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쌍용차 안에 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비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무급자도 있고 징계해고자도 있고 여러 분류가 있어요. 있지만 다 같이 동시에 해결돼서 똑같이 손잡고 공장에 들어갔으면 제일 큰 희망이고요.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가 입장을 내야 한다, 신규채용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해서, 사무직도 신규채용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도 계속 수시로 신규채용하고 있는 이 문제는 자기들이 약속했던 노사가 도장을 찍었던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내놓고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복직시켜야된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소수 인원이 싸워나가고 있지만 앞으로 이 투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어떠한 연대를 마다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동지들한데 쌍용차 안에는 비정규직 동지들도 분명히 있다는 존재감을 더욱 더 알려나가야 될 것 같아요. 또 하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소송 관련해서도 명확하게 현대기아차가 중심이지만 쌍용차에도 조직해서 함께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공장에 들어가는 복귀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비중을 더 크게 잡고 있지만 재판의 상황에 따라서 요구안은 바뀐다. 그 이전까지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부 상대로 많은 동지들이 서울에 올라간 상태이지만 지역에도 나름대로 지역시민들과 중재했던 사람들 다 끄집어 내야할 것 같고요. 또한 이 공장이 평택에 있기 때문에 공장 상대로 이 싸움을 계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서울과 이 지역과 연동해서 계속 알려내고. 반드시
공장으로 들어가야죠. 하루속히 공장에 들어가야 될 것 같고. 들어가는 모습을 동지들한테 보여주는 게 제일 큰 희망이지 않나. 저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는 거고. 현재 상황은 다 어려운 국면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조금만 더.......

 

그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천막과 주변 동지들을 가리키며) 이게 힘이지 않을까요. 이 주변의 동지들이 찾아오고 지역 시민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모금도 해주시고 서명도 해주시고 쌍용차 관련해서 물어봐주시고 이게 난 힘이라고 봐요.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그리고 또한 나와 함께 가는 내 가족이 있잖아요. 내 가정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버텨나가야 되지 않겠나.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49제 이후 새롭게 5대요구안을 정비하고 평택역과 서울 대한문 두 개의 거점에서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다. 평택역에 새롭게 천막을 친 5월24일 비정규직지회장 서맹섭 동지를 만나 그 간의 투쟁 경과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들어보았다. 분량 관계상 인터뷰를 2개의 기사로 나누었다. 첫번째 기사에서는 49제 이후의 투쟁계획과 이전 투쟁의 경과에 대해서, 두번째 기사는 쌍용차 해고차 내에 비정규직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712

 

쌍용차에 비정규직도 있어요!


현재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어느 정도 되나요?

2009년도에 (공장점거)파업할 때 19명이 싸웠어요. 지금도 19명이 있는데 다만 3년이란 시간이 지나니까 다들 힘들어해요. 제일 큰 문제가 생계문제죠. 나머지 조합원들은 생계를, 처음에 한 1년 반 정도는 파업이 끝나고도 같이 싸웠어요. 도저히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생계투쟁으로 나가시라(해서), 현재는 임원간부 4명 중심으로 해서 싸우고 있어요. 저희가 투쟁을 만들어나가면서 조합원들과 소통을 하고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게 되면 우선적으로 같이 조합원들과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4명 중에 서울에 2명이 올라가 있어요. 한윤수 사무장, 유제선 조직부장. 우리 조직부장이 얘기 잘 해요. 아주 선수에요 마이크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씩 지 혼자 밤새 떠들어요. 회사 정문에 가면 가처분이 떨어져 있어요. 마이크 잡고 얘기하지 말라고. 하도 회사 관리자들 깠거든.(웃음) 까는 얘기하고 열 받으면 욕도 하고 해서 명예훼손으로 (가처분이 떨어졌어요). *1편에서 이어집니다.

비정규직은 2009년 이전부터 잘려왔는데 쌍용차 문제 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잘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요.

 

평택역 농성장 앞 선전전. 많은 시민들이 모금과 서명을 하고 간다.
정규직이 인원이 많잖아요. 비정규직은 소수가 남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투쟁을 해왔던 거고. 어쨌든 공장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싸움을 이어왔던 거에요. 우리는 작년 10월24일부터 텐트농성을 시작했지만 그 전에 8월 달부터 1인시위를 시작했었어요. 지역시민단체와 하루 10시간, 릴레이 10시간 하면서 그 때부터 선전포고를 했던 거고. 10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농성) 들어가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싸움을 계속 알려냈어요.
그렇게 가다가 12월 달에 지부가 희망텐트촌을 들어가면서 큰 싸움을 걸면서 가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죠. 저희는 우려를 했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싸워가는 과정을 한 번이라도 우리 농성장에 왔던 동지들은 다 알아요.
전체적으로 큰 이슈화는 못시켰지만 묻혀가면서도 우리 목소리를 계속 냈다. 다만 아쉬운 건 좀 많죠. 내가 우리 조합원 50명만 남아있어도 엄청난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소수가 두 농성장을 가지고 갈려고 하다보니까 어렵더라고요. 그 전에 우리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왔을 때는 연대도 가고 그랬어요. 투쟁하는 사업장에 계속 가고 그랬는데. 농성장이 두 군데를 나눠서 하니까 어딜 가지도 못하고 뭐.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그렇더라도 지금도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고 쌍용차에는 정규직도 있지만 소수의 비정규직들이 아직까지 질기게 싸우고 있다(는 거에요). 정말 6개월이라는 농성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지역에서도 한 단위가 없어요. 지부도 마찬가지에요. 저희는 했어요, 인원에 굴하지 않고.

 

지부와 투쟁계획이나 의견 조율은 어떻게 하시나요?

지부가 토론회나 회의를 하면 저희가 들어가요. 선도투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전체회의면 저희가 들어가요. 전체회의가 아니더라도 지부 임실장 회의에는 제가 들어가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정비지회장도 들어오고 그래서 같이 소통하고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같이 해야하니까.
또 전술적으로 이건 비정규직 단위에서 해야 된다, 비정규직지회가 투쟁을 진행하면서 지부는 엄호해주고 지원해주고 역할을 하겠다, 그런 부분이 또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지부도 지부 나름대로 투쟁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싸움에 다 붙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 면은 조직적으로 열어갔던 거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현재는 원유철 부분이 있지만 5대 요구안을 가지고 같이 힘을 모아보자, 대선 국면이 다가오기 때문에 6월 (국회)개원(이 있고), 9월 이후로 넘어가면 (대선 때문에) 우리 목소리가 묻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어쨌든 우리 싸움 만들어내 보자, 그래서 지금은 함께 가야된다(고 결정했어요).

앞서 말씀하셨던 것(첫번째 인터뷰 기사 참조)처럼 해고 사유가 달랐기 때문에 전술도 다르게 갔다는 건가요?

그렇죠. 지부가 열어준 거죠. 옆에서 지원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부분 해주겠다, 다만 이 부분은 전술적으로 비정규직지회애서 끌고 가라. 지부는 다 포괄해서 큰 걸로 싸워나가겠다(고 한 거죠).
이게(역량이) 한정되어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86 중재했던 사람들, 지역 국회의원 상대로 싸워나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도 가능한 투쟁이었거든요. 그런데 지부가 이걸 껴안고 지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싸우면 너무 고립되잖아요. 쌍용차 문제를 전국적으로 싸워나가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좀 있어서 그런 부분은 약간 전술적으로 열어준 거고.

조직편제상 비정규직지회는 지부에 속해있는 건가요?

저희는 지부에 속해 있어요.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에요. 이걸(1사1조직) 언제 했냐면 원래는 우리도 현대차와 같이 독립적으로 (노조활동)했는데 2009년 파업이 끝나고 나서 2010년 (지부) 3기 지도부 선출하면서 제가 총회에 부쳐버렸어요. 원래는 대대안건인데 대대가 아니라 정규직 동지들한테 이 안건을 던지고 싶다, 그래서 2010년 3기 지도부 뽑을 때 1사1조직 안을 던졌어요. 그 때 성사가 된 거에요. 거의 96%로 찬성을 찍어서. 그 때 통합이 된 거에요. 그게 안됐으면 독립성은 있는데, 지금은 같이 움직이죠.

정리해고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의 쌍용차지부는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를 잘 안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도 억울해서 조직해서 (제가) 노동조합 띄웠던 당사자인데요. 2008년도 10월에 노동조합 띄웠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때부터 싸움을 했던 거였고 일부 비정규직을 알고 있는 활동가 외에는 (정규직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 때 당시에 정규직이 내 자리에 들어오는 전환배치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왜냐면 내가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들어와서 일하고 내가 안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못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공장 안에서 집회하거나 출투할 때도 ‘너 나가면 내가 사는데 너희들 나가면 우리 사는데 왜 시끄럽게 하냐’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
상황이 낙관적은 아니었어요. 그 해 12월 달에 2기 지도부, 한상균 전 지부장이 출마해서 당선이 됐는데 그 때부터 (정규직) 집행부에 우리 비정규직을 도와줬던 활동가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때부터 상황이 약간씩 바뀌어 나간 거에요. 조직적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진 않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가면서 2009년 파업에 들어가고, 제가 굴뚝 농성에 들어가면서 많이 바뀌었죠.
공장(점거파업)에 19명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들어가서 함께 싸우면서 몸 부딪히고 똑같이 앞에 나가서 싸우고 그러면서 좀 바뀌어 나갔죠. 한상균 전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변화하면서 그 다음에 파업으로 인해, 그리고 1사1조직 편제를 하면서까지 이제 지금은 많이, 완전히 바뀌었죠. 지금은 동료이고,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라고 외치잖아요.
이제 쌍용차 안에는 두 가지가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현대차나 기아차나 한국GM을 봐도 한 쪽은 싸우더라도 한 쪽은 안 싸우고 있고, (정규직이) 해고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저희는 두 가지를 충족을 하고 있는 거라, 정리해고 문제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그래서 알려내기가 더 쉽지 않겠나 (싶어요).

공장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시기마다 1사1조직이 논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때로 함께 해야 될 부분은 동의가 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독립성이 많이 필요한 부분도 있는 거고. 저희는 어쨌든 밀려나와 있잖아요. 공장 안이 아니고 밖이기 때문에 현대나 기아차와 약간은,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1사1조직이 과연 됐을까, 난 안됐을 거라고 보는 거에요. 불가능하다 이거. 인식은 똑같지 않겠냐, 현대차나. 다만 우리는 같이 쫓겨나서 싸워가는 목소리는 똑같잖아요. 다시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싸우는 거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1사1조직을 했던 거에요.
만약 1사1조직이 안됐고 우리가 지부 소속이 아니고 독립성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면 소수지만 더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만에 국한되어선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1사1조직 했어요). 다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없을 것 같아요. 애매한 게 있어요. 기아보다는 낫죠. 다만 똑같은 형태라고 하면 힘들지 않았을까.
비정규직도 마찬가지이지만 정규직도 자기들 욕심을 버리고 하나의 조직으로 묶으려면 서로를 먼저 알고 가야돼지 않겠냐. 나는 정규직이니까 정규직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비정규직이라면 어땠을까. 반대로 입장을 바꿔보면 인식이 조금 더 바뀌어 나가지 않을까. 실질적으로 라인 운영도 비정규직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왜 쫓겨나야 돼, 이거 우리가 같이 라인에서 일하면 소통해서 풀어갈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내 개인의 생존권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동료를 생각하고 동료도 나를 생각한다고 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아직까지 그게 인식이 안 바뀌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 욕심 가져가기 위해서 서로 이해를 못하고. 얘기를 해보면 이해를 한다고 해요. 이해를 한다, 말뿐이잖아요. 실제로. 저희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에요. 같이 투쟁을 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요. 같은 해고자이면서도 그런 모습은 있어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는 거죠. 때로 함께 가기 위해서는 조직을 묶어야 되겠지만 그런 욕심과 그런 생각이 안 바뀐다면 저는 1사1조직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에요. 저도 후회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고 그럴 때 후회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의견 충돌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이라는 고정관념을 못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은 지부와 함께 일정을 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이죠?

지금 상황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갈 수밖에 없는 거라. 다만 하나로 가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저희는 공장에 들어가야 될 근거가 8,6합의 약속이잖아요. 8,6합의가 아니더라도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비정규직이 빨리 들어가야 될 입장이고.
또한 불법파견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1심에서 승소한다면 요구안은 달라지죠. 비정규직으로는 안 들어가죠, 이제. 더 큰 투쟁을 하면서 더 크게 만들어가고. 안에 있는 지금 조합비를 내려고 하는 사람들,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다 조직해야죠. 조합원들도 많아질 거고, 조직 대상들이 공장 안에 있고 이후 투쟁도 여러 가지로 고민될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이런 것도 있잖아요. (불법파견 문제가) 이길 수도 있지만 지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것도 우려가 있는 거잖아요. 지면 지는대로 또 계속 끝까지 재판을 가야될 것 같고 또 가면서 싸워봐야 되고. 한쪽으로는 그게 있고 한쪽으로는 하루빨리 공장으로 들어가야 된다(라는 게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8.6합의 이행이든 신규채용이든 형태는 상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지금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들 몇 년씩 근무했던 사람들이에요. 짧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 근무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경력을 갖고 있고. 저는 면접까지도 필요없다고 보는 거에요.
우리 업체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사내하청 업체는 거의 똑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업체가 3개든 4개든 인원을 나눠서 넣든, 한 군데로 다 넣든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들어가서 일을 하면 되는 거고. 또한 노동조합 문제는 기본적으로 갖고 가야할 문제이고.
어떠한 형태를 떠나서라도 무조건 공장 안으로 넣어주라,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금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임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공장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 그걸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약속 지키면 되요.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약속 지키겠다, 그러면 우리 들어가서 일하면 되는 거거든.

 

투쟁 속의 상처와 원동력


돌아가신 분들 중에 비정규직 동지도 계신가요.

 

 
첫 번째로 있어요. 첫 번째로 비정규직. 조합원이었어요, 우리. 조합원이었는데 희망퇴직을 썼었어요. 640명 있었어요, 저희(비정규직)가. 2008년도에 그 중 350명을 쫓아내려고 했던 거였어요. 350명 전환배치 정규직이 오니까. 처음에는 350명 다 안 나가겠다고 버텼어요. 버텼는데 회사에서 업체별로 압력을 가한 거죠. ‘야, 돈 몇 푼이라도 받고 나가라, 나중에 돈도 없다, 그냥 나갈래 지금 줄 때 받고 나갈래.’
그렇게 해서 300명이 희망퇴직을 써버린 거에요. 50명은 끝까지 버틴 거죠. 50명이 끝까지 가다가 (2009년) 5월 달에 파업들어가기 전에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때 남은 게 19명이었어요. 그 전에는 50명이 2008년 11월부터 2009년 4월까지 끈끈히 본관 앞에서 농성하고 본관 들어가서 항의 투쟁하고. 우리 투쟁한 것은 까페(http://cafe.daum.net/ssybj)에 다 나와 있어요. 그 때 희망퇴직 썼던 동지가 집이 강원도 쪽인 것 같아요. 거기 가서 (돌아가셨어요). 아프더라고요 많이. 안타깝죠. 저기 현수막 첫 번째에 있어요. 그 이후 쭉 정규직, 가족.

 

와락센터에서 비정규직 동지들도 모두 심리치료 받으시죠?

네 저희도 다 해요. 지금 싸우고 있는 동지들 4명 중에 저 빼고 3명은 심리치료를 다 받았고요.

동지는 왜 안 받으세요?

아직까지 멀쩡하니까.(웃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상처가 있으실 것 같아요.

제 집사람이 심리치료를 받았고 아이가 또 심리치료를 받고 있어요. 어른들 문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상처를 받았어요. 저는 굴뚝에 86일 있으면서 아이들 둘 전부 공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보고 있는데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밑에 있는 동지들은 한동안 가족들을 만났잖아요, 공장 안에 있을 때에는. 나는 못 만났고. 그게 제일 큰 상처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잘 이겨내고는 있는데 나는 그런 부분이 보여요. 지금도 노동가요 나오면 애들이 그래요. ‘아빠 또 집회 하냐.’ 경찰차 지나가면 ‘아빠 잡으러 온 거 아니냐’. 최근엔 막 그랬어요. 경찰들이 막 잡아가는 꿈 꿨다고. 이런 게 아이들한테는 상처로 있더라. 시간이 가면 잊히겠지만 그 상처를 해결하려면 이 싸움이 끝나야죠. 하루속히.
정상적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가족에도 평화가 올 거고, 아이들도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공장으로 들어가야 되요. 비정규직 동지들 너무 오래 싸웠어요, 1300일이 넘어가고 있어요. 거의 3년 반이 넘어가고 4년을 바라보는데. 정상적인 생활이 된 적이 없어요.
저희보다 더 오래 투쟁하는 동지들도 있지만 내가 이런 얘기하면 그 동지들한테 미안할 수 있죠. 하지만 똑같다고 보는 거에요. 누가 길게 싸우고 싶겠어요.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여기(현수막)에 보면 문구에도 해고된 노동자들은 1년 휴직 이후 복직시킨다고 약속했잖아요. 우리는 1년이 아니에요. 2009년 8월6일 이후에 딱 한 달 있다가 복귀였어요. 저런 거 보면 좀 아프잖아요. 우리는 한 달이었는데 왜 1년이냐. 차이는 좀 있어요. 근데 저런 걸 내가 또 따로 정규직 동지들한테 말을 하기가 그렇잖아요. 이런 문구 보면 아쉬움이 있어요. 근데 이걸 지부에서 만든 게 아니라 주변 동지들이 만든 건데 그만큼 우리 문제를 알려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 제가 그래도 인터뷰도 하고 많이 했는데 안 보나봐.(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쌍용차 안에 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비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무급자도 있고 징계해고자도 있고 여러 분류가 있어요. 있지만 다 같이 동시에 해결돼서 똑같이 손잡고 공장에 들어갔으면 제일 큰 희망이고요.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가 입장을 내야 한다, 신규채용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해서, 사무직도 신규채용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도 계속 수시로 신규채용하고 있는 이 문제는 자기들이 약속했던 노사가 도장을 찍었던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내놓고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복직시켜야된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소수 인원이 싸워나가고 있지만 앞으로 이 투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어떠한 연대를 마다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동지들한데 쌍용차 안에는 비정규직 동지들도 분명히 있다는 존재감을 더욱 더 알려나가야 될 것 같아요. 또 하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소송 관련해서도 명확하게 현대기아차가 중심이지만 쌍용차에도 조직해서 함께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공장에 들어가는 복귀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비중을 더 크게 잡고 있지만 재판의 상황에 따라서 요구안은 바뀐다. 그 이전까지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부 상대로 많은 동지들이 서울에 올라간 상태이지만 지역에도 나름대로 지역시민들과 중재했던 사람들 다 끄집어 내야할 것 같고요. 또한 이 공장이 평택에 있기 때문에 공장 상대로 이 싸움을 계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서울과 이 지역과 연동해서 계속 알려내고. 반드시
공장으로 들어가야죠. 하루속히 공장에 들어가야 될 것 같고. 들어가는 모습을 동지들한테 보여주는 게 제일 큰 희망이지 않나. 저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는 거고. 현재 상황은 다 어려운 국면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조금만 더.......

그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천막과 주변 동지들을 가리키며) 이게 힘이지 않을까요. 이 주변의 동지들이 찾아오고 지역 시민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모금도 해주시고 서명도 해주시고 쌍용차 관련해서 물어봐주시고 이게 난 힘이라고 봐요.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그리고 또한 나와 함께 가는 내 가족이 있잖아요. 내 가정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버텨나가야 되지 않겠나.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49제 이후 새롭게 5대요구안을 정비하고 평택역과 서울 대한문 두 개의 거점에서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다. 평택역에 새롭게 천막을 친 5월24일 비정규직지회장 서맹섭 동지를 만나 그 간의 투쟁 경과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들어보았다. 분량 관계상 인터뷰를 2개의 기사로 나누었다. 첫번째 기사에서는 49제 이후의 투쟁계획과 이전 투쟁의 경과에 대해서, 두번째 기사는 쌍용차 해고차 내에 비정규직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712

 

쌍용차에 비정규직도 있어요!


현재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어느 정도 되나요?

2009년도에 (공장점거)파업할 때 19명이 싸웠어요. 지금도 19명이 있는데 다만 3년이란 시간이 지나니까 다들 힘들어해요. 제일 큰 문제가 생계문제죠. 나머지 조합원들은 생계를, 처음에 한 1년 반 정도는 파업이 끝나고도 같이 싸웠어요. 도저히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생계투쟁으로 나가시라(해서), 현재는 임원간부 4명 중심으로 해서 싸우고 있어요. 저희가 투쟁을 만들어나가면서 조합원들과 소통을 하고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게 되면 우선적으로 같이 조합원들과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4명 중에 서울에 2명이 올라가 있어요. 한윤수 사무장, 유제선 조직부장. 우리 조직부장이 얘기 잘 해요. 아주 선수에요 마이크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씩 지 혼자 밤새 떠들어요. 회사 정문에 가면 가처분이 떨어져 있어요. 마이크 잡고 얘기하지 말라고. 하도 회사 관리자들 깠거든.(웃음) 까는 얘기하고 열 받으면 욕도 하고 해서 명예훼손으로 (가처분이 떨어졌어요). *1편에서 이어집니다.

비정규직은 2009년 이전부터 잘려왔는데 쌍용차 문제 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잘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요.

 

평택역 농성장 앞 선전전. 많은 시민들이 모금과 서명을 하고 간다.
정규직이 인원이 많잖아요. 비정규직은 소수가 남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투쟁을 해왔던 거고. 어쨌든 공장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싸움을 이어왔던 거에요. 우리는 작년 10월24일부터 텐트농성을 시작했지만 그 전에 8월 달부터 1인시위를 시작했었어요. 지역시민단체와 하루 10시간, 릴레이 10시간 하면서 그 때부터 선전포고를 했던 거고. 10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농성) 들어가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싸움을 계속 알려냈어요.
그렇게 가다가 12월 달에 지부가 희망텐트촌을 들어가면서 큰 싸움을 걸면서 가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죠. 저희는 우려를 했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싸워가는 과정을 한 번이라도 우리 농성장에 왔던 동지들은 다 알아요.
전체적으로 큰 이슈화는 못시켰지만 묻혀가면서도 우리 목소리를 계속 냈다. 다만 아쉬운 건 좀 많죠. 내가 우리 조합원 50명만 남아있어도 엄청난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소수가 두 농성장을 가지고 갈려고 하다보니까 어렵더라고요. 그 전에 우리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왔을 때는 연대도 가고 그랬어요. 투쟁하는 사업장에 계속 가고 그랬는데. 농성장이 두 군데를 나눠서 하니까 어딜 가지도 못하고 뭐.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그렇더라도 지금도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고 쌍용차에는 정규직도 있지만 소수의 비정규직들이 아직까지 질기게 싸우고 있다(는 거에요). 정말 6개월이라는 농성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지역에서도 한 단위가 없어요. 지부도 마찬가지에요. 저희는 했어요, 인원에 굴하지 않고.

 

지부와 투쟁계획이나 의견 조율은 어떻게 하시나요?

지부가 토론회나 회의를 하면 저희가 들어가요. 선도투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전체회의면 저희가 들어가요. 전체회의가 아니더라도 지부 임실장 회의에는 제가 들어가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정비지회장도 들어오고 그래서 같이 소통하고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같이 해야하니까.
또 전술적으로 이건 비정규직 단위에서 해야 된다, 비정규직지회가 투쟁을 진행하면서 지부는 엄호해주고 지원해주고 역할을 하겠다, 그런 부분이 또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지부도 지부 나름대로 투쟁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싸움에 다 붙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 면은 조직적으로 열어갔던 거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현재는 원유철 부분이 있지만 5대 요구안을 가지고 같이 힘을 모아보자, 대선 국면이 다가오기 때문에 6월 (국회)개원(이 있고), 9월 이후로 넘어가면 (대선 때문에) 우리 목소리가 묻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어쨌든 우리 싸움 만들어내 보자, 그래서 지금은 함께 가야된다(고 결정했어요).

앞서 말씀하셨던 것(첫번째 인터뷰 기사 참조)처럼 해고 사유가 달랐기 때문에 전술도 다르게 갔다는 건가요?

그렇죠. 지부가 열어준 거죠. 옆에서 지원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부분 해주겠다, 다만 이 부분은 전술적으로 비정규직지회애서 끌고 가라. 지부는 다 포괄해서 큰 걸로 싸워나가겠다(고 한 거죠).
이게(역량이) 한정되어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86 중재했던 사람들, 지역 국회의원 상대로 싸워나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도 가능한 투쟁이었거든요. 그런데 지부가 이걸 껴안고 지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싸우면 너무 고립되잖아요. 쌍용차 문제를 전국적으로 싸워나가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좀 있어서 그런 부분은 약간 전술적으로 열어준 거고.

조직편제상 비정규직지회는 지부에 속해있는 건가요?

저희는 지부에 속해 있어요.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에요. 이걸(1사1조직) 언제 했냐면 원래는 우리도 현대차와 같이 독립적으로 (노조활동)했는데 2009년 파업이 끝나고 나서 2010년 (지부) 3기 지도부 선출하면서 제가 총회에 부쳐버렸어요. 원래는 대대안건인데 대대가 아니라 정규직 동지들한테 이 안건을 던지고 싶다, 그래서 2010년 3기 지도부 뽑을 때 1사1조직 안을 던졌어요. 그 때 성사가 된 거에요. 거의 96%로 찬성을 찍어서. 그 때 통합이 된 거에요. 그게 안됐으면 독립성은 있는데, 지금은 같이 움직이죠.

정리해고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의 쌍용차지부는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를 잘 안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도 억울해서 조직해서 (제가) 노동조합 띄웠던 당사자인데요. 2008년도 10월에 노동조합 띄웠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때부터 싸움을 했던 거였고 일부 비정규직을 알고 있는 활동가 외에는 (정규직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 때 당시에 정규직이 내 자리에 들어오는 전환배치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왜냐면 내가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들어와서 일하고 내가 안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못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공장 안에서 집회하거나 출투할 때도 ‘너 나가면 내가 사는데 너희들 나가면 우리 사는데 왜 시끄럽게 하냐’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
상황이 낙관적은 아니었어요. 그 해 12월 달에 2기 지도부, 한상균 전 지부장이 출마해서 당선이 됐는데 그 때부터 (정규직) 집행부에 우리 비정규직을 도와줬던 활동가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때부터 상황이 약간씩 바뀌어 나간 거에요. 조직적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진 않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가면서 2009년 파업에 들어가고, 제가 굴뚝 농성에 들어가면서 많이 바뀌었죠.
공장(점거파업)에 19명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들어가서 함께 싸우면서 몸 부딪히고 똑같이 앞에 나가서 싸우고 그러면서 좀 바뀌어 나갔죠. 한상균 전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변화하면서 그 다음에 파업으로 인해, 그리고 1사1조직 편제를 하면서까지 이제 지금은 많이, 완전히 바뀌었죠. 지금은 동료이고,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라고 외치잖아요.
이제 쌍용차 안에는 두 가지가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현대차나 기아차나 한국GM을 봐도 한 쪽은 싸우더라도 한 쪽은 안 싸우고 있고, (정규직이) 해고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저희는 두 가지를 충족을 하고 있는 거라, 정리해고 문제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그래서 알려내기가 더 쉽지 않겠나 (싶어요).

공장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시기마다 1사1조직이 논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때로 함께 해야 될 부분은 동의가 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독립성이 많이 필요한 부분도 있는 거고. 저희는 어쨌든 밀려나와 있잖아요. 공장 안이 아니고 밖이기 때문에 현대나 기아차와 약간은,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1사1조직이 과연 됐을까, 난 안됐을 거라고 보는 거에요. 불가능하다 이거. 인식은 똑같지 않겠냐, 현대차나. 다만 우리는 같이 쫓겨나서 싸워가는 목소리는 똑같잖아요. 다시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싸우는 거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1사1조직을 했던 거에요.
만약 1사1조직이 안됐고 우리가 지부 소속이 아니고 독립성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면 소수지만 더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만에 국한되어선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1사1조직 했어요). 다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없을 것 같아요. 애매한 게 있어요. 기아보다는 낫죠. 다만 똑같은 형태라고 하면 힘들지 않았을까.
비정규직도 마찬가지이지만 정규직도 자기들 욕심을 버리고 하나의 조직으로 묶으려면 서로를 먼저 알고 가야돼지 않겠냐. 나는 정규직이니까 정규직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비정규직이라면 어땠을까. 반대로 입장을 바꿔보면 인식이 조금 더 바뀌어 나가지 않을까. 실질적으로 라인 운영도 비정규직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왜 쫓겨나야 돼, 이거 우리가 같이 라인에서 일하면 소통해서 풀어갈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내 개인의 생존권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동료를 생각하고 동료도 나를 생각한다고 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아직까지 그게 인식이 안 바뀌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 욕심 가져가기 위해서 서로 이해를 못하고. 얘기를 해보면 이해를 한다고 해요. 이해를 한다, 말뿐이잖아요. 실제로. 저희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에요. 같이 투쟁을 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요. 같은 해고자이면서도 그런 모습은 있어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는 거죠. 때로 함께 가기 위해서는 조직을 묶어야 되겠지만 그런 욕심과 그런 생각이 안 바뀐다면 저는 1사1조직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에요. 저도 후회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고 그럴 때 후회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의견 충돌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이라는 고정관념을 못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은 지부와 함께 일정을 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이죠?

지금 상황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갈 수밖에 없는 거라. 다만 하나로 가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저희는 공장에 들어가야 될 근거가 8,6합의 약속이잖아요. 8,6합의가 아니더라도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비정규직이 빨리 들어가야 될 입장이고.
또한 불법파견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1심에서 승소한다면 요구안은 달라지죠. 비정규직으로는 안 들어가죠, 이제. 더 큰 투쟁을 하면서 더 크게 만들어가고. 안에 있는 지금 조합비를 내려고 하는 사람들,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다 조직해야죠. 조합원들도 많아질 거고, 조직 대상들이 공장 안에 있고 이후 투쟁도 여러 가지로 고민될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이런 것도 있잖아요. (불법파견 문제가) 이길 수도 있지만 지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것도 우려가 있는 거잖아요. 지면 지는대로 또 계속 끝까지 재판을 가야될 것 같고 또 가면서 싸워봐야 되고. 한쪽으로는 그게 있고 한쪽으로는 하루빨리 공장으로 들어가야 된다(라는 게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8.6합의 이행이든 신규채용이든 형태는 상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지금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들 몇 년씩 근무했던 사람들이에요. 짧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 근무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경력을 갖고 있고. 저는 면접까지도 필요없다고 보는 거에요.
우리 업체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사내하청 업체는 거의 똑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업체가 3개든 4개든 인원을 나눠서 넣든, 한 군데로 다 넣든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들어가서 일을 하면 되는 거고. 또한 노동조합 문제는 기본적으로 갖고 가야할 문제이고.
어떠한 형태를 떠나서라도 무조건 공장 안으로 넣어주라,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금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임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공장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 그걸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약속 지키면 되요.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약속 지키겠다, 그러면 우리 들어가서 일하면 되는 거거든.

 

투쟁 속의 상처와 원동력


돌아가신 분들 중에 비정규직 동지도 계신가요.

 

 
첫 번째로 있어요. 첫 번째로 비정규직. 조합원이었어요, 우리. 조합원이었는데 희망퇴직을 썼었어요. 640명 있었어요, 저희(비정규직)가. 2008년도에 그 중 350명을 쫓아내려고 했던 거였어요. 350명 전환배치 정규직이 오니까. 처음에는 350명 다 안 나가겠다고 버텼어요. 버텼는데 회사에서 업체별로 압력을 가한 거죠. ‘야, 돈 몇 푼이라도 받고 나가라, 나중에 돈도 없다, 그냥 나갈래 지금 줄 때 받고 나갈래.’
그렇게 해서 300명이 희망퇴직을 써버린 거에요. 50명은 끝까지 버틴 거죠. 50명이 끝까지 가다가 (2009년) 5월 달에 파업들어가기 전에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때 남은 게 19명이었어요. 그 전에는 50명이 2008년 11월부터 2009년 4월까지 끈끈히 본관 앞에서 농성하고 본관 들어가서 항의 투쟁하고. 우리 투쟁한 것은 까페(http://cafe.daum.net/ssybj)에 다 나와 있어요. 그 때 희망퇴직 썼던 동지가 집이 강원도 쪽인 것 같아요. 거기 가서 (돌아가셨어요). 아프더라고요 많이. 안타깝죠. 저기 현수막 첫 번째에 있어요. 그 이후 쭉 정규직, 가족.

 

와락센터에서 비정규직 동지들도 모두 심리치료 받으시죠?

네 저희도 다 해요. 지금 싸우고 있는 동지들 4명 중에 저 빼고 3명은 심리치료를 다 받았고요.

동지는 왜 안 받으세요?

아직까지 멀쩡하니까.(웃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상처가 있으실 것 같아요.

제 집사람이 심리치료를 받았고 아이가 또 심리치료를 받고 있어요. 어른들 문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상처를 받았어요. 저는 굴뚝에 86일 있으면서 아이들 둘 전부 공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보고 있는데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밑에 있는 동지들은 한동안 가족들을 만났잖아요, 공장 안에 있을 때에는. 나는 못 만났고. 그게 제일 큰 상처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잘 이겨내고는 있는데 나는 그런 부분이 보여요. 지금도 노동가요 나오면 애들이 그래요. ‘아빠 또 집회 하냐.’ 경찰차 지나가면 ‘아빠 잡으러 온 거 아니냐’. 최근엔 막 그랬어요. 경찰들이 막 잡아가는 꿈 꿨다고. 이런 게 아이들한테는 상처로 있더라. 시간이 가면 잊히겠지만 그 상처를 해결하려면 이 싸움이 끝나야죠. 하루속히.
정상적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가족에도 평화가 올 거고, 아이들도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공장으로 들어가야 되요. 비정규직 동지들 너무 오래 싸웠어요, 1300일이 넘어가고 있어요. 거의 3년 반이 넘어가고 4년을 바라보는데. 정상적인 생활이 된 적이 없어요.
저희보다 더 오래 투쟁하는 동지들도 있지만 내가 이런 얘기하면 그 동지들한테 미안할 수 있죠. 하지만 똑같다고 보는 거에요. 누가 길게 싸우고 싶겠어요.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여기(현수막)에 보면 문구에도 해고된 노동자들은 1년 휴직 이후 복직시킨다고 약속했잖아요. 우리는 1년이 아니에요. 2009년 8월6일 이후에 딱 한 달 있다가 복귀였어요. 저런 거 보면 좀 아프잖아요. 우리는 한 달이었는데 왜 1년이냐. 차이는 좀 있어요. 근데 저런 걸 내가 또 따로 정규직 동지들한테 말을 하기가 그렇잖아요. 이런 문구 보면 아쉬움이 있어요. 근데 이걸 지부에서 만든 게 아니라 주변 동지들이 만든 건데 그만큼 우리 문제를 알려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 제가 그래도 인터뷰도 하고 많이 했는데 안 보나봐.(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쌍용차 안에 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비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무급자도 있고 징계해고자도 있고 여러 분류가 있어요. 있지만 다 같이 동시에 해결돼서 똑같이 손잡고 공장에 들어갔으면 제일 큰 희망이고요.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가 입장을 내야 한다, 신규채용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해서, 사무직도 신규채용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도 계속 수시로 신규채용하고 있는 이 문제는 자기들이 약속했던 노사가 도장을 찍었던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내놓고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복직시켜야된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소수 인원이 싸워나가고 있지만 앞으로 이 투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어떠한 연대를 마다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동지들한데 쌍용차 안에는 비정규직 동지들도 분명히 있다는 존재감을 더욱 더 알려나가야 될 것 같아요. 또 하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소송 관련해서도 명확하게 현대기아차가 중심이지만 쌍용차에도 조직해서 함께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공장에 들어가는 복귀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비중을 더 크게 잡고 있지만 재판의 상황에 따라서 요구안은 바뀐다. 그 이전까지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부 상대로 많은 동지들이 서울에 올라간 상태이지만 지역에도 나름대로 지역시민들과 중재했던 사람들 다 끄집어 내야할 것 같고요. 또한 이 공장이 평택에 있기 때문에 공장 상대로 이 싸움을 계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서울과 이 지역과 연동해서 계속 알려내고. 반드시
공장으로 들어가야죠. 하루속히 공장에 들어가야 될 것 같고. 들어가는 모습을 동지들한테 보여주는 게 제일 큰 희망이지 않나. 저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는 거고. 현재 상황은 다 어려운 국면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조금만 더.......

그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천막과 주변 동지들을 가리키며) 이게 힘이지 않을까요. 이 주변의 동지들이 찾아오고 지역 시민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모금도 해주시고 서명도 해주시고 쌍용차 관련해서 물어봐주시고 이게 난 힘이라고 봐요.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그리고 또한 나와 함께 가는 내 가족이 있잖아요. 내 가정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버텨나가야 되지 않겠나.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49제 이후 새롭게 5대요구안을 정비하고 평택역과 서울 대한문 두 개의 거점에서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다. 평택역에 새롭게 천막을 친 5월24일 비정규직지회장 서맹섭 동지를 만나 그 간의 투쟁 경과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들어보았다. 분량 관계상 인터뷰를 2개의 기사로 나누었다. 첫번째 기사에서는 49제 이후의 투쟁계획과 이전 투쟁의 경과에 대해서, 두번째 기사는 쌍용차 해고차 내에 비정규직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712

 

쌍용차에 비정규직도 있어요!


현재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어느 정도 되나요?

2009년도에 (공장점거)파업할 때 19명이 싸웠어요. 지금도 19명이 있는데 다만 3년이란 시간이 지나니까 다들 힘들어해요. 제일 큰 문제가 생계문제죠. 나머지 조합원들은 생계를, 처음에 한 1년 반 정도는 파업이 끝나고도 같이 싸웠어요. 도저히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생계투쟁으로 나가시라(해서), 현재는 임원간부 4명 중심으로 해서 싸우고 있어요. 저희가 투쟁을 만들어나가면서 조합원들과 소통을 하고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게 되면 우선적으로 같이 조합원들과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4명 중에 서울에 2명이 올라가 있어요. 한윤수 사무장, 유제선 조직부장. 우리 조직부장이 얘기 잘 해요. 아주 선수에요 마이크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씩 지 혼자 밤새 떠들어요. 회사 정문에 가면 가처분이 떨어져 있어요. 마이크 잡고 얘기하지 말라고. 하도 회사 관리자들 깠거든.(웃음) 까는 얘기하고 열 받으면 욕도 하고 해서 명예훼손으로 (가처분이 떨어졌어요). *1편에서 이어집니다.

비정규직은 2009년 이전부터 잘려왔는데 쌍용차 문제 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잘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요.

 

평택역 농성장 앞 선전전. 많은 시민들이 모금과 서명을 하고 간다.
정규직이 인원이 많잖아요. 비정규직은 소수가 남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투쟁을 해왔던 거고. 어쨌든 공장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싸움을 이어왔던 거에요. 우리는 작년 10월24일부터 텐트농성을 시작했지만 그 전에 8월 달부터 1인시위를 시작했었어요. 지역시민단체와 하루 10시간, 릴레이 10시간 하면서 그 때부터 선전포고를 했던 거고. 10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농성) 들어가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싸움을 계속 알려냈어요.
그렇게 가다가 12월 달에 지부가 희망텐트촌을 들어가면서 큰 싸움을 걸면서 가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죠. 저희는 우려를 했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싸워가는 과정을 한 번이라도 우리 농성장에 왔던 동지들은 다 알아요.
전체적으로 큰 이슈화는 못시켰지만 묻혀가면서도 우리 목소리를 계속 냈다. 다만 아쉬운 건 좀 많죠. 내가 우리 조합원 50명만 남아있어도 엄청난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소수가 두 농성장을 가지고 갈려고 하다보니까 어렵더라고요. 그 전에 우리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왔을 때는 연대도 가고 그랬어요. 투쟁하는 사업장에 계속 가고 그랬는데. 농성장이 두 군데를 나눠서 하니까 어딜 가지도 못하고 뭐.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그렇더라도 지금도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고 쌍용차에는 정규직도 있지만 소수의 비정규직들이 아직까지 질기게 싸우고 있다(는 거에요). 정말 6개월이라는 농성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지역에서도 한 단위가 없어요. 지부도 마찬가지에요. 저희는 했어요, 인원에 굴하지 않고.

 

지부와 투쟁계획이나 의견 조율은 어떻게 하시나요?

지부가 토론회나 회의를 하면 저희가 들어가요. 선도투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전체회의면 저희가 들어가요. 전체회의가 아니더라도 지부 임실장 회의에는 제가 들어가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정비지회장도 들어오고 그래서 같이 소통하고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같이 해야하니까.
또 전술적으로 이건 비정규직 단위에서 해야 된다, 비정규직지회가 투쟁을 진행하면서 지부는 엄호해주고 지원해주고 역할을 하겠다, 그런 부분이 또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지부도 지부 나름대로 투쟁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싸움에 다 붙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 면은 조직적으로 열어갔던 거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현재는 원유철 부분이 있지만 5대 요구안을 가지고 같이 힘을 모아보자, 대선 국면이 다가오기 때문에 6월 (국회)개원(이 있고), 9월 이후로 넘어가면 (대선 때문에) 우리 목소리가 묻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어쨌든 우리 싸움 만들어내 보자, 그래서 지금은 함께 가야된다(고 결정했어요).

앞서 말씀하셨던 것(첫번째 인터뷰 기사 참조)처럼 해고 사유가 달랐기 때문에 전술도 다르게 갔다는 건가요?

그렇죠. 지부가 열어준 거죠. 옆에서 지원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부분 해주겠다, 다만 이 부분은 전술적으로 비정규직지회애서 끌고 가라. 지부는 다 포괄해서 큰 걸로 싸워나가겠다(고 한 거죠).
이게(역량이) 한정되어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86 중재했던 사람들, 지역 국회의원 상대로 싸워나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도 가능한 투쟁이었거든요. 그런데 지부가 이걸 껴안고 지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싸우면 너무 고립되잖아요. 쌍용차 문제를 전국적으로 싸워나가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좀 있어서 그런 부분은 약간 전술적으로 열어준 거고.

조직편제상 비정규직지회는 지부에 속해있는 건가요?

저희는 지부에 속해 있어요.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에요. 이걸(1사1조직) 언제 했냐면 원래는 우리도 현대차와 같이 독립적으로 (노조활동)했는데 2009년 파업이 끝나고 나서 2010년 (지부) 3기 지도부 선출하면서 제가 총회에 부쳐버렸어요. 원래는 대대안건인데 대대가 아니라 정규직 동지들한테 이 안건을 던지고 싶다, 그래서 2010년 3기 지도부 뽑을 때 1사1조직 안을 던졌어요. 그 때 성사가 된 거에요. 거의 96%로 찬성을 찍어서. 그 때 통합이 된 거에요. 그게 안됐으면 독립성은 있는데, 지금은 같이 움직이죠.

정리해고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의 쌍용차지부는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를 잘 안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도 억울해서 조직해서 (제가) 노동조합 띄웠던 당사자인데요. 2008년도 10월에 노동조합 띄웠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때부터 싸움을 했던 거였고 일부 비정규직을 알고 있는 활동가 외에는 (정규직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 때 당시에 정규직이 내 자리에 들어오는 전환배치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왜냐면 내가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들어와서 일하고 내가 안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못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공장 안에서 집회하거나 출투할 때도 ‘너 나가면 내가 사는데 너희들 나가면 우리 사는데 왜 시끄럽게 하냐’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
상황이 낙관적은 아니었어요. 그 해 12월 달에 2기 지도부, 한상균 전 지부장이 출마해서 당선이 됐는데 그 때부터 (정규직) 집행부에 우리 비정규직을 도와줬던 활동가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때부터 상황이 약간씩 바뀌어 나간 거에요. 조직적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진 않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가면서 2009년 파업에 들어가고, 제가 굴뚝 농성에 들어가면서 많이 바뀌었죠.
공장(점거파업)에 19명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들어가서 함께 싸우면서 몸 부딪히고 똑같이 앞에 나가서 싸우고 그러면서 좀 바뀌어 나갔죠. 한상균 전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변화하면서 그 다음에 파업으로 인해, 그리고 1사1조직 편제를 하면서까지 이제 지금은 많이, 완전히 바뀌었죠. 지금은 동료이고,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라고 외치잖아요.
이제 쌍용차 안에는 두 가지가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현대차나 기아차나 한국GM을 봐도 한 쪽은 싸우더라도 한 쪽은 안 싸우고 있고, (정규직이) 해고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저희는 두 가지를 충족을 하고 있는 거라, 정리해고 문제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그래서 알려내기가 더 쉽지 않겠나 (싶어요).

공장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시기마다 1사1조직이 논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때로 함께 해야 될 부분은 동의가 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독립성이 많이 필요한 부분도 있는 거고. 저희는 어쨌든 밀려나와 있잖아요. 공장 안이 아니고 밖이기 때문에 현대나 기아차와 약간은,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1사1조직이 과연 됐을까, 난 안됐을 거라고 보는 거에요. 불가능하다 이거. 인식은 똑같지 않겠냐, 현대차나. 다만 우리는 같이 쫓겨나서 싸워가는 목소리는 똑같잖아요. 다시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싸우는 거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1사1조직을 했던 거에요.
만약 1사1조직이 안됐고 우리가 지부 소속이 아니고 독립성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면 소수지만 더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만에 국한되어선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1사1조직 했어요). 다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없을 것 같아요. 애매한 게 있어요. 기아보다는 낫죠. 다만 똑같은 형태라고 하면 힘들지 않았을까.
비정규직도 마찬가지이지만 정규직도 자기들 욕심을 버리고 하나의 조직으로 묶으려면 서로를 먼저 알고 가야돼지 않겠냐. 나는 정규직이니까 정규직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비정규직이라면 어땠을까. 반대로 입장을 바꿔보면 인식이 조금 더 바뀌어 나가지 않을까. 실질적으로 라인 운영도 비정규직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왜 쫓겨나야 돼, 이거 우리가 같이 라인에서 일하면 소통해서 풀어갈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내 개인의 생존권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동료를 생각하고 동료도 나를 생각한다고 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아직까지 그게 인식이 안 바뀌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 욕심 가져가기 위해서 서로 이해를 못하고. 얘기를 해보면 이해를 한다고 해요. 이해를 한다, 말뿐이잖아요. 실제로. 저희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에요. 같이 투쟁을 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요. 같은 해고자이면서도 그런 모습은 있어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는 거죠. 때로 함께 가기 위해서는 조직을 묶어야 되겠지만 그런 욕심과 그런 생각이 안 바뀐다면 저는 1사1조직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에요. 저도 후회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고 그럴 때 후회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의견 충돌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이라는 고정관념을 못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은 지부와 함께 일정을 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이죠?

지금 상황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갈 수밖에 없는 거라. 다만 하나로 가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저희는 공장에 들어가야 될 근거가 8,6합의 약속이잖아요. 8,6합의가 아니더라도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비정규직이 빨리 들어가야 될 입장이고.
또한 불법파견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1심에서 승소한다면 요구안은 달라지죠. 비정규직으로는 안 들어가죠, 이제. 더 큰 투쟁을 하면서 더 크게 만들어가고. 안에 있는 지금 조합비를 내려고 하는 사람들,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다 조직해야죠. 조합원들도 많아질 거고, 조직 대상들이 공장 안에 있고 이후 투쟁도 여러 가지로 고민될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이런 것도 있잖아요. (불법파견 문제가) 이길 수도 있지만 지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것도 우려가 있는 거잖아요. 지면 지는대로 또 계속 끝까지 재판을 가야될 것 같고 또 가면서 싸워봐야 되고. 한쪽으로는 그게 있고 한쪽으로는 하루빨리 공장으로 들어가야 된다(라는 게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8.6합의 이행이든 신규채용이든 형태는 상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지금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들 몇 년씩 근무했던 사람들이에요. 짧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 근무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경력을 갖고 있고. 저는 면접까지도 필요없다고 보는 거에요.
우리 업체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사내하청 업체는 거의 똑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업체가 3개든 4개든 인원을 나눠서 넣든, 한 군데로 다 넣든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들어가서 일을 하면 되는 거고. 또한 노동조합 문제는 기본적으로 갖고 가야할 문제이고.
어떠한 형태를 떠나서라도 무조건 공장 안으로 넣어주라,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금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임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공장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 그걸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약속 지키면 되요.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약속 지키겠다, 그러면 우리 들어가서 일하면 되는 거거든.

 

투쟁 속의 상처와 원동력


돌아가신 분들 중에 비정규직 동지도 계신가요.

 

 
첫 번째로 있어요. 첫 번째로 비정규직. 조합원이었어요, 우리. 조합원이었는데 희망퇴직을 썼었어요. 640명 있었어요, 저희(비정규직)가. 2008년도에 그 중 350명을 쫓아내려고 했던 거였어요. 350명 전환배치 정규직이 오니까. 처음에는 350명 다 안 나가겠다고 버텼어요. 버텼는데 회사에서 업체별로 압력을 가한 거죠. ‘야, 돈 몇 푼이라도 받고 나가라, 나중에 돈도 없다, 그냥 나갈래 지금 줄 때 받고 나갈래.’
그렇게 해서 300명이 희망퇴직을 써버린 거에요. 50명은 끝까지 버틴 거죠. 50명이 끝까지 가다가 (2009년) 5월 달에 파업들어가기 전에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때 남은 게 19명이었어요. 그 전에는 50명이 2008년 11월부터 2009년 4월까지 끈끈히 본관 앞에서 농성하고 본관 들어가서 항의 투쟁하고. 우리 투쟁한 것은 까페(http://cafe.daum.net/ssybj)에 다 나와 있어요. 그 때 희망퇴직 썼던 동지가 집이 강원도 쪽인 것 같아요. 거기 가서 (돌아가셨어요). 아프더라고요 많이. 안타깝죠. 저기 현수막 첫 번째에 있어요. 그 이후 쭉 정규직, 가족.

 

와락센터에서 비정규직 동지들도 모두 심리치료 받으시죠?

네 저희도 다 해요. 지금 싸우고 있는 동지들 4명 중에 저 빼고 3명은 심리치료를 다 받았고요.

동지는 왜 안 받으세요?

아직까지 멀쩡하니까.(웃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상처가 있으실 것 같아요.

제 집사람이 심리치료를 받았고 아이가 또 심리치료를 받고 있어요. 어른들 문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상처를 받았어요. 저는 굴뚝에 86일 있으면서 아이들 둘 전부 공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보고 있는데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밑에 있는 동지들은 한동안 가족들을 만났잖아요, 공장 안에 있을 때에는. 나는 못 만났고. 그게 제일 큰 상처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잘 이겨내고는 있는데 나는 그런 부분이 보여요. 지금도 노동가요 나오면 애들이 그래요. ‘아빠 또 집회 하냐.’ 경찰차 지나가면 ‘아빠 잡으러 온 거 아니냐’. 최근엔 막 그랬어요. 경찰들이 막 잡아가는 꿈 꿨다고. 이런 게 아이들한테는 상처로 있더라. 시간이 가면 잊히겠지만 그 상처를 해결하려면 이 싸움이 끝나야죠. 하루속히.
정상적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가족에도 평화가 올 거고, 아이들도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공장으로 들어가야 되요. 비정규직 동지들 너무 오래 싸웠어요, 1300일이 넘어가고 있어요. 거의 3년 반이 넘어가고 4년을 바라보는데. 정상적인 생활이 된 적이 없어요.
저희보다 더 오래 투쟁하는 동지들도 있지만 내가 이런 얘기하면 그 동지들한테 미안할 수 있죠. 하지만 똑같다고 보는 거에요. 누가 길게 싸우고 싶겠어요.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여기(현수막)에 보면 문구에도 해고된 노동자들은 1년 휴직 이후 복직시킨다고 약속했잖아요. 우리는 1년이 아니에요. 2009년 8월6일 이후에 딱 한 달 있다가 복귀였어요. 저런 거 보면 좀 아프잖아요. 우리는 한 달이었는데 왜 1년이냐. 차이는 좀 있어요. 근데 저런 걸 내가 또 따로 정규직 동지들한테 말을 하기가 그렇잖아요. 이런 문구 보면 아쉬움이 있어요. 근데 이걸 지부에서 만든 게 아니라 주변 동지들이 만든 건데 그만큼 우리 문제를 알려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 제가 그래도 인터뷰도 하고 많이 했는데 안 보나봐.(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쌍용차 안에 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비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무급자도 있고 징계해고자도 있고 여러 분류가 있어요. 있지만 다 같이 동시에 해결돼서 똑같이 손잡고 공장에 들어갔으면 제일 큰 희망이고요.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가 입장을 내야 한다, 신규채용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해서, 사무직도 신규채용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도 계속 수시로 신규채용하고 있는 이 문제는 자기들이 약속했던 노사가 도장을 찍었던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내놓고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복직시켜야된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소수 인원이 싸워나가고 있지만 앞으로 이 투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어떠한 연대를 마다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동지들한데 쌍용차 안에는 비정규직 동지들도 분명히 있다는 존재감을 더욱 더 알려나가야 될 것 같아요. 또 하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소송 관련해서도 명확하게 현대기아차가 중심이지만 쌍용차에도 조직해서 함께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공장에 들어가는 복귀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비중을 더 크게 잡고 있지만 재판의 상황에 따라서 요구안은 바뀐다. 그 이전까지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부 상대로 많은 동지들이 서울에 올라간 상태이지만 지역에도 나름대로 지역시민들과 중재했던 사람들 다 끄집어 내야할 것 같고요. 또한 이 공장이 평택에 있기 때문에 공장 상대로 이 싸움을 계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서울과 이 지역과 연동해서 계속 알려내고. 반드시
공장으로 들어가야죠. 하루속히 공장에 들어가야 될 것 같고. 들어가는 모습을 동지들한테 보여주는 게 제일 큰 희망이지 않나. 저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는 거고. 현재 상황은 다 어려운 국면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조금만 더.......

그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천막과 주변 동지들을 가리키며) 이게 힘이지 않을까요. 이 주변의 동지들이 찾아오고 지역 시민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모금도 해주시고 서명도 해주시고 쌍용차 관련해서 물어봐주시고 이게 난 힘이라고 봐요.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그리고 또한 나와 함께 가는 내 가족이 있잖아요. 내 가정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버텨나가야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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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기획인터뷰]어떻게 지내세요? #2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쌍용차에는 비정규직도 있어요! ①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2/06/15 12:55
  • 수정일
    2012/06/15 13:24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49제 이후 새롭게 5대요구안을 정비하고 평택역과 서울 대한문 두 개의 거점에서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다. 평택역에 새롭게 천막을 친 5월24일 비정규직지회장 서맹섭 동지를 만나 그 간의 투쟁 경과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들어보았다. 분량 관계상 인터뷰를 2개의 기사로 나누었다. 첫번째 기사에서는 49제 이후의 투쟁계획과 이전 투쟁의 경과에 대해서, 두번째 기사는 쌍용차 해고차 내에 비정규직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추모를 넘어 다시 투쟁으로


평택역에 천막을 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는 22명에 대한 추모분위기로 갔는데 더 이상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서 시민들에게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알려내야 되겠다고 해서, 49제 이후에는 전면적으로 싸움을 만들어 가는 거죠. 대한문과 평택지역에서 오늘부터 시작을 했어요. 대한문에는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 대다수가 다함께 올라가 있는 거고요. 여기도 사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서울에 가기 어렵거나 개인 사정이 있는 소수 인원만 남고 나머지는 다 대한문에 가서 대정부투쟁으로 들어간다(는 계획이에요). 6월에 국회가 개원이 되고 이명박 정권이 올해가 임기 말이니까 정부를 상대로 싸워나가면서 그 하수인인 국회의원들까지 싸잡아서 우리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서울에 올라간 거에요.

 

거점 2개를 잡고 대정부투쟁과 대시민선전을 하는 거군요.

그리고 5대요구안을 알려내는 거에요. 100만 명 서명운동을 서울에서도 여기에서도 하고. 다만 평택공장이 있기 때문에 공장 앞에서도 출투도 해야 되고 퇴근선전전, 문화제도 하고 거기만 할 수는 없으니 시민들한테도 알려내야 하니까 그래서 평택역을 선택했던 거고. 공장도 가져가는데 중심은 여기를 두고 있죠. 그리고 서울은 지금은 대한문이지만 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데로 옮겨갈 수도 있는 거죠. 여기도 문화제도 할 거고요. 여러 가지 프로그램 할 거에요. 오늘부터 시작이니까. 지역에 최저임금 문제도 있어요. 같이 연동해서 가야죠. 이것도 알려내고 저것도 알려내요

 

오늘 대한문 침탈되었는데 여기는 철거의 위협이 없나요?

여기도 장담할 수는 없어요. 마찬가지인데 다만 지역에 있는 대공장 아니었냐, 또 평택시청이 중재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법적 근거로는 칠 수 있겠다고 보지만 함부로 접근하기는 어렵죠.
(시청에서) 오늘 아침에도 왔어요. (그래서 내가) 걷어 가려면 걷어가라, 걷어가는 순간 우리는 시청에 때려박겠다(고 했어요). 우리도 똑같이 협박해야지. 대한문은 워낙 서울 중심이라 여기보다는 서울에 있는 동지들이 고생이죠, 인원은 많아도.

 

대정부투쟁은 어떤 내용인가요?

 

 

저희 요구안이 여기(플래카드를 가리키며) 5가지가 있는데 이 요구안을 걸고 끄집어낸다, 특히나 22명의 조합원들과 가족이 운명을 달리했지만 이 책임은 분명히 이명박 정부한테 있는 거고. 원래는 회사가 정리해고 상황이 아니었잖아요, 회사 자체의 회계조작과 기술유출 등으로 죄 없는 노동자만 거의 3000명 가까이 내쫓긴 상황인데. 그리고 22명이라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말 한마디 사과도 없고 무책임으로 버티고 있고.
오히려 (공장) 안에는 임단협이 진행되고 있어요. 회사 측의 노동조합이라 일명 어용노동조합이라 하는데 지금 임금을 올려 달라, 성과금을 달라, 명절비를 올려달라, 공장 안에는 잘 돌아가고 돈을 요구하는 상황이죠. 지금 우리는 반대로 투쟁을 하고 있는 거고.
너무 다르잖아요. 그래서 진상규명을 해서 책임자 처벌해야 된다, 그걸 요구안으로 걸고 있고. 나머지는 22분에 관련해서 이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거잖아요. 이거 명예회복 해야 되고.
우리뿐만 아니라 정리해고 문제나 비정규직 철폐 문제가 쌍용차 문제가 아닌 전국적인 노동자의 문제기 때문에 우리 것만 하면 안 되고 같이 힘을 모아서 정리해고 없는 그리고 비정규직 철폐해야 된다, 큰 단위로 요청하는 거죠.

 

그러면 공장 주변의 활동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정문 앞에 지금까지 분향소를 유지했고 (앞으로도 공장 앞에) 상징성으로 가져가야 한다 해서 안전하게 장소를 변경해서 유지되고 있어요. 공장에는 어쨌든 조합원들이 있는 상황이니까 투쟁을 안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매일 출투를 했는데 (서울로) 인원이 올라가고 나서 홀수 날만 출투를 하고, 매일 저녁에 인원에 구애받지 않고 있는 사람들끼리 촛불문화제를 진행해요. 출투와 퇴근선전전, 촛불문화제는 이어가요. 주변 투쟁사업장에 연대할 부분은 같이 하고.
그리고 여기(평택역)가 있는데. 여기는 지역시민단체, 정당, 노동(단체) 14개 단체가 함께 힘을 모아가지고. 제일 큰 문제는 지역문제잖아요. 공장이 여기 있는 거고, 3년 넘도록 지역에서도 알려지지 못했고 이것을 계기로 해서 지역에서도 투쟁을 해야 된다, 지금까지 못했던 부분을 지역단체와 함께 힘을 모아서 가보자, 대한문은 더 큰 투쟁으로 가겠지만 지역 시민 상대로 알려내야 한다,그래서 여기에서도 투쟁을 시작을 한 거에요.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가 함께 서울도 공동으로 올라갔고, 여기도 공동으로 하고.

 

대시민, 대정부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희망운동이 지난해부터 이어져오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래서 저희가 싸워나가는 게 많이 힘들지 않나 해요. 파업권을 갖고 공장 안에서 노동3권을 갖고 있다면 이렇게 안 싸워도 되잖아요. 싸우더라도 공장 안에 노동조합이 있으면 다르잖아요. 싸움을 같이 만들 수 있는 거잖아요. 근데 진짜 다 쫓겨났기 때문에 현장 안에 전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국면이죠. 공장 안에서 파업을 잡고 라인을 잡고 싸우는 것과 달리 길거리 나와서 시민들한테 알리고 정부를 상대로 싸워나가는 게 어려워요.
그렇지만 어렵다 하더라도 3년 가까이 우리가 잘 버티고 잘 알려내고 싸워나가고 있다, 이거 대단한 거다, 진짜. 앞으로도 이게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앞장서서 싸워나간다면 해결이 멀지 않았다고 봅니다. 당연히 정리해고 철회돼야죠. 정리해고 자체가 문제가 있었잖아요.

 

 

 

복직자는 없는데 버젓이 신규채용하는 회사


8.6합의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내용은 무엇인가요?

2009년 쫓겨나면서 그 해 10월1일자로 고용보장한다고 노사대표가 구두사항으로 약속을 한 거에요. 근데 원청사용자성에 안 걸리기 위해서 문구상으로만 ‘공장 안에 취업알선을 시키겠다’는 문구가 있는 거에요. 회사는 그걸로 들이대고 있는 거고. 우리는 ‘아니다, 이미 합의했던 당사자 한상균 전 지부장이 지금 옥중에 있지만 확인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 해(2009년) 9월 달에 우리가 지부 통해서 공문을 보냈어요. 10월1일자로 19명 전원 고용보장 현장복귀인데 어떻게 복귀시킬 거냐, 그걸 우리가 두 차례 공문을 보냈는데 (사측이) 명단을 달라고 해서 명단까지 줬기 때문에 회사가 어떠한 핑계를 댈 수 없는 근거죠.

 

정리해고 이후에 공장 안에 비정규직 상황은 어떠한가요?

그 이후에 비정규직은 상당히 늘어났죠. 또정규직들이 희망퇴직을 쓰고 비정규직으로 다시 분사업체로 들어오는 수도 상당히 많고. 그 때 당시 200명이었던 비정규직 사람들이 현재는 사내하청과 분사업체까지 포함하면 780여명이 나와요. 지금 현재 정문 앞에 경비 쓰는 애들도 다 계약직으로 되어있어요. 용역이 아니라 비정규직 계약직으로 되어 있어요. 그 인원도 한 75명 되는 거고. 그 인원수까지 다 해서 780....
공식적으로 채용한 것은 수십 명이죠. 제가 파악하고 있는 숫자는 54명 정도 파악을 해놨어요. 공장 안에 비정규직이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 사람들하고 소통을 하잖아요. 어디 업체 누가 몇 명 그만뒀다, 이 업체가 또 신규채용을 했다, 그 데이터를 입수를 했어요. 만나고 통화를 하니까. 그것만 봐도 54명이 신규입사를 했어요.
그리고 그 것 말고도 계속적으로 채용을 하고 있어요. 지금 공장 안에는 일이 힘들어요. 힘들어서 버티기가 힘들어요. 들락날락 하는 거에요. 비정규직이다 보니까 금방 그만두고, 다시 다른 사람 채용하고. 특히나 관리자들 인맥 통해서 사람 많이 뽑더라고요. 예전에 2006년도에 그만뒀던 사람들, 2008년도에 그만뒀던 사람들, 지금 거의 다 들어가 있어요.
우리가 2008년 노동조합 띄울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거의 다 우리 조합원이었어요. 현재도 조합원인데 조합비만 내면 조합원 자격이 되는 거죠, 사고 조합원으로 돼있는 거에요. 지금 그 사람들이 공장 안에 많이 들어가 있어요. 여기저기 흩어져서, 그 때 당시 희망퇴직 썼던 사람들.

 

공장 내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를 항상 염두에 두고 계시는 거군요.

그렇죠. 제가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 하고는 주기적으로 소통하고 있어요. 소통뿐만 아니라 제가 만나요. 알게 모르게. 약간은 조심스러워하는 게 뭐냐면 내가 이 사람들을 시내가 아니라 다른 변두리에서 만나면 어떻게 업체 관리자한테 귀에 들어가더라고요. 아직까지는 나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았는데 부담은 되더라고요. 나는 괜찮은데 혹시나 징계를 먹을까, 또 잘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있지만.
지금 우리가 불법파견 소송을 진행하고 있어요. 우리가 선전작업을 하면서 알려내고 있기 때문에 공장 안에도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 돼야 할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숫자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자기들도 하고 싶다고 문의전화도 오고 또 별도로 만나고.
조합에 다시 가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단 제가 다 보류를 해놨어요. 받는 건 문제가 아닌데, 괜히 저 때문에 피해가 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저희가 공장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할 역할들이 있죠.

 

불법파견 소송을 하고 있다 하셨는데 어느 정도 진행된 상황인가요?

 

출처:미디어충청

작년 2011년 4월 달에 소송을 넣고 1년이 넘었어요. 지금 9차 재판을 진행하고 있어요. 다음 달에 10차인데 다음 달에는 우리가 증인을 세울 거에요. 정규직에 직장이나 공장 했던 사람, 우리를 관리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세울 거고, 비정규직 사내하청 관리자를 또 한 명 세울 거고 노동조합에 있는 간부를 세울 거에요. 이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우릴 통제했고 하청이 우리를 통제한 것이 아니라 원청에서 다 통제를 했던 거다, 근태관리를 했던 거다, 그 사실을 확인을 위해서.
자료는 있어요. 문서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를 통제)했던 사람들의 입증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걸 진행할 거고. 그게 끝나면 현장 안에 공장 검증을 들어갈 거에요. 공장 안에는 예전에 정규직, 비정규직이 같이 일했던 공정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현재는 좀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 라인이전체적으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또 사실확인을 시키기 위해서에요. 그러면 빠르면 8월에서 9월 정도에 1심이 나올 것 같아요.

 

불법파견 소송 규모는 얼마나 되나요?

대표소송으로 4명만 넣었어요, 투쟁하고 있는 동지 4명만. 이 4명의 파워가 엄청나게 큰 거 잖아요. 지금 똑같은 형태로 (불법파견이) 벌어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이기면 이걸 통해서 조직화 문제는 될 것 같고요.

 

최근에 사측이 신규채용 공고를 하고 신규채용을 했는데 조합원들 반응은 어떤가요?

회사가 신규채용을 했던 것은 사무직인데 그전부터 비정규직 신규채용을 많이 했어요. 정문 앞에서 출투나 집회를 하게 되면 예전에 그만둔 사람들 다 들어가는데 그걸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잖아요. 왜 해고자는 단 한 명도 안 집어 넣냐. 3년 이내에 회사가 정상화가 되면 해고자를 우선적으로 채용할 수 있도록 노동법에도 나와 있는 거잖아요. 다만 제재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걸 봤을 때 정말 화가 나죠.
사회적으로 국민한테 보여주면서까지 노사합의를 했던 거고 그 약속도 안 지키면서 따로 사무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신규채용을 한다? 그만큼 회사가 정상화 됐다는 증거거든요 그게. 이걸 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거에요.

 

이번에는 사무직이었지만 생산직에서는 이전부터 비정규직 채용이 있어왔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죠. 정규직 (채용)은 지금까지도 올스톱 됐어요. 우리가 쫓겨나고 나서 정규직으로 단 한 명도 안 들어왔어요. 채용한 적도 없고. 다만 최근 5월 달에 징계를 먹었던 사람들 중에 정직 1개월이나 3개월이 아니라 제일 약하게 그냥 감봉이나 경징계를 먹었던 사람 22명 정도가 들어갔어요. 그 사람들도 현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일단 대기발령으로 교육받고 있어요.

 

정신교육 받고 있는 건가요?

네, 정신교육 지금 받고 있는 거에요. 그것 말고 비정규직 수십 명을 채용하면서 단 한 명도 안 집어넣었어요. 우리가 최근에 원유철(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언) 상대로 싸움을 하면서 회사와 두 차례 협상을 했어요. 협상 과정에서 제가 이 질문을 던졌어요. ‘신규 채용을 이렇게 하고 있으면서 비정규직 19명 중에 11명이 복귀의사가 있다고 내가 분명히 얘기를 했는데 왜 11명, 몇 명 되지도 않는 거 한 명도 안 집어 넣냐. 일괄복귀 다 시켜달라’.
자기들은 처음에 신규채용 안했다고 발뺌을 하더라고요. 근데 여기 지역에 시의회가 열려요. 시의회에서 시의원분이 시장한테 질문을 던졌어요. ‘(쌍용차가) 비정규직 수십 명 채용하고 있다는데 그거 어떻게 되가는 거냐. 이 내용을 알고 있냐’. 그 답변이 알아보니까 54명을 채용했다고 공식적으로 나왔던 얘기거든요. 그 얘기를 내가 시의원들 왔을 때 확인 했어요. ‘확인 해 달라. 이건 도의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 시청에서 도대체 뭐하는 거냐. 어쨌든 지역 국회의원과 시장이, 지금 그 때 당시 시장은 아니지만 중재를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역할을 해 달라’. 시의회 공식 속기록에 나와 있어요.

 

비정규직 19명 중에 11명만 복귀의사가 있는 거에요?

19명 다 확인했는데 현재는 다른 일 하고 계시니까 그리고 이 싸움이 길어지다 보니까 ‘정말 들어갈 수 있겠냐’,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들 몇 명 있어요. ‘그래도 나는 들어가겠다, 하는 분들이 11명이고 들어갈까 말까 고민 된다 이제’, 하는 분들이 몇 명 있는 거고.
그래도 19명 얘기를 하고 다 끌고 가야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근데 단 한 명도 약속을 안 지키고 있으니까.

 

 

 

원유철 국회의원 사무실 앞 농성을 정리하며


원유철 국회원원 사무실 앞에서 농성을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6개월 동안 진행된 원유철 국회의원 사무실 앞 농성 (출처:쌍용차비정규직지회)

이 싸움(원유철 사무실 농성)을 시작한 이유가 그 때 당시에 (투쟁을 시작한지) 거의 3년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이 지역 국회의원이나 시장이 분명하게 중재 역할을 했는데 (8.6합의) 당시에 한나라당, 민주당이 자기들이 풀었다고 대서특필 언론에 다 냈어요. 자기들이 이 문제 풀었다, 더 큰 상황이 안 발생하고 노사가 만나서 합의했다고 주장했거든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다 입을 닫아버린 거에요. 나서지도 않았어요.
그게 지금까지 흘러와버린 거에요.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이대로 냅둬서는 안 된다, 마침 또 총선이 다가왔고 이 문제를 끄집어내자, 지역에서 끄집어내야 한다, 정말로 이 문제 못 풀면 최소한 국회의원 낙선까지 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걸 작정하고 싸움을 준비했어요.
자기들(국회의원)이 그 때 당시까지는 비정규직이 없는 줄 알았대요. 쌍용차 안에는 다 정규직만 있었던 거야. 비정규직은 한 명도 없었던 걸로 머리에 인식을 하고 있었던 거에요. 계속 붙었죠. ‘우린 비정규직이다. 그 때 당시 합의한 게 있다.’ 제가 줄 수 있는 자료 다 줬어요. 그 양반(원유철)한테.
바로 사무실 밑에 농성을 했기 때문에 매일 봤어요 매일. 매일 만났어요. 선거 다가오니까 우리한테 하소연도 했고. 자기도 선거 때문에 이러면 안 되는데 빠져라, 그런 얘기도 했지만 우린 계속 했고. 이 문제 풀면 우린 가겠다 했고.
계속적으로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게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문제이기 때문에 따로따로 가서는 안 될 것 같다, 같이 힘을 모아보자고 지부는 계속적으로 정리해고 철회를 주장했고 그 안에 8.6합의가 있었던 건데 저희는 8.6합의에 중점을 뒀었어요.
주변에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이 이해를 못해요. 실질적으로 정리해고가 철회되면. 우리는 정리해고가 아니에요. 강제적으로 쫓겨났어요. 2008년도에 정규직 전환배치로 인해서 강제적으로 폐업조치가 되면서 쫓겨났단 말이에요. 그렇게 가면서 어쨌든 해고가 됐지만.
여기(정규직)는 정리해고지만 우리는 정리해고가 처음에는 아니었죠. 그 상황을 나는 좀 알려내고 싶었어요. 제일 큰 문제는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그게 너무 화가 났어요. 2009년 11월부터 현재까지 신규채용을 쭉 있었어요. 지금까지 아무도 안 풀어주잖아요. 아무도 이걸 해결 안 해주잖아요. 누가 해결해야 되요, 당사자가 해결할 수밖에 없는 건데.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더 큰 걸 요구해버리면 안 맞는 거잖아요. 지금 당장 요구안이 있는데 이 요구안이 아니라 더 큰 걸 우리가 요구 해버리면 난 안 맞다고 본거였어요.

 

그러면 원유철 의원 사무실 앞 농성에서 성과가 있었나요?

저희 자체적으로 평가를 했어요. 183일 동안 농성을 했고 상당히 긴 1년 중에 반을 우리가 길거리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어쨌든 3년 만에 두 차례 본관에 들어가서 회사측과, 회사측 노무담당 상무와 담당자들과 협상을 했어요. 성과는 안 나왔지만 그런 자리가 있었다는 것이에요.
제일 큰 것은 지역 시민들이 몰라요. ‘쌍용차 그 때 당시에 다 해결돼서 공장이 잘 돌아가는데 왜 자꾸 해고자들은 죽었다는 얘기만 하고 왜 이 사람들은 안 들어가고 길거리에서 이걸 하고 있냐’는 반응이 거의 대다수였어요. 근데 그 사람들한테 알려내고 선전물 주면서 한 분, 한 분씩 알려낸 것이 소득이지 않았나. 아직까지 쌍용차 문제가 끝나지 않았고 이 죽음의 책임이 쌍용차 전 경영진에 있다는 것, 회사가 어려운데 경영진은 아직까지 사장을 하고 있다는 것, 노동자만 쫓아냈다는 것, 그런 것에 분노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농성하는 과정에서 물품이나 많이 지원을 해주셨어요.
또 한편으로는 원유철 이 양반이 4선으로 당선이 됐어요. 자기 정치적 입장은 해결하겠다는 거에요 계속. ‘공장의 이유일 사장을 만나서 다른 문제는 못 풀어도 비정규직 문제는 풀어야 되겠다’, 그 입장을 우리한테 냈었고. 저희 또한 줄기차게 ‘말로만 하지마라, 말로만 해서 풀 문제가 아니다. 직접 만나서 풀어야 될 상황 아니냐’고 했어요. 다만 우리가 그 정도(183일 농성) 했기 때문에 정리했고, 아까도 끝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에요. 4선 됐지만 더 (우리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야 된다고.

 

이번에 당선되고 나서도 만나신 거에요?

네, 두 차례. 처음엔 우리(비정규직지회)가 만났고 그 다음에는 마지막 (농성) 정리하기 전에 금속노조 비정규직 담당 부위원장과 쌍차지부와 비정규직지회 함께, 세 단위가 들어갔어요. 지부 임원, 저, 금속 부위원장 내려와서 원유철 만났어요. ‘지금까지 비정규직지회가 끌고 왔지만 앞으로는 노조 차원, 지부 차원에서 이 문제를 안고 풀어 나가겠다, 어떻게 할 거냐. 정확하게 입장을 내달라, 풀 수 있냐 없냐. 정치적인 얘기 말고 정말로 이 문제 풀 수 있겠냐’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원유철은 반드시 풀겠다는 입장을 냈어요. ‘조만간 이유일 사장을 만나서 비정규직 문제 얘기하겠다, 그리고 별도의 실무진 꾸려서 노무담당을 만나서 이 문제 하겠다’, 그 입장을 듣고 우리가 정리를 했어요.
우리가 정리를 한 지 한 달이 딱 흘렀는데 그 와중에 원유철 이 양반이 당대표 출마를 한 거에요, 최근에. 그것 때문에 정신이 없더라고요. 저번 주에는 문자로만 연락이 왔어요.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겠다는 입장이 왔는데. 그건 아직 구체적인 안이 안 나왔기 때문에 저한테 전화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이건 분명히 얘기 했어요. ‘우리가 농성을 철수했지만 이건 끝나지 않았다. 이후 싸움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한다. 그리고 이후 싸움 관련해서는 이런 식으로 투쟁 안한다, 그건 알아서 판단해달라’, 그것까지 던져놨어요. 그게 뭐냐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너 이 문제 못 풀면 너 죽고 나 죽자 그냥 그 방식밖에 없다’. 이건 아직 남아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어요, 저쪽(원유철)하고도.

 

김문수 도지사를 중심으로 쌍용차 무급자,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경기도 노사민정 테이블이 꾸려졌다던데요.

저도 몰랐는데 언론 통해서 알아봤어요. 경기도 평택 지역에 민주통합당 도의원이 한 분 계셔요. 그 분하고 한참 얘기했어요. ‘노사민정 관련해서 이거 뭐냐, 봐라, 이거 맨날 무급자 얘기만 나오는데 비정규직 문제는 하나도 안 나온다. 쌍용차 무급자만 8,6합의 있는 게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가 있다. 쌍용차의 얘기가 들어가면 쌍용차의 비정규직 문제도 있다. 신규채용 하고 있는데 왜 경기도에서 우리 문제는 안 다뤄 주냐. 무급자는 460명이고 우리는 19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리가 있다. 무급자는 지금 자리가 없다. 어떤 게 우선적으로 풀 수 있겠냐. 풀 수 있는 것부터 풀어 달라.’ 제가 이 얘기를 했어요.
똑같다고 생각해요. (노사민정 주제가) 쌍용차 무급자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인데 (여기서)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문제가 아니에요. 전체적인 경기도의 비정규직을 얘기하는 거고 쌍용차의 비정규직 문제가 아니에요, 보니까.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뭔가 대선 다가오니까. 김문수 이 양반이 또 대선 도전하니까 립서비스로 주절대고 있죠, 지금. 실질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못 풀면서.

 

* 2편으로 이어집니다.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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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실천연대 기소를 규탄한다! 국가보안법철폐하고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하자!

 

노동해방실천연대 기소를 규탄한다!

국가보안법 철폐하고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하자!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6월 7일, 이적단체 구성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노동해방실천연대’ 활동가 4인을 기소했다. 이는 5월 22일,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가 노동해방실천연대(이하 해방연대)의 진보넷 이메일 계정을 압수수색, 활동가 4명을 연행한지 보름만의 일이다.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촛불투쟁 참가자들을 사찰하고 범민련 등 통일운동 세력을 탄압해왔다. 또한 사노련, 사노신 등 사회주의 운동단체에 대한 탄압 역시 강화되었다. 용산 철거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희망버스 참가자 등 자본의 이익에 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법’을 빙자한 탄압은 그칠 줄을 몰랐다. 각종 언론통제는 물론이고 트위터 상에서 북한관련 글을 게시한 개인들에게까지 국가보안법을 적용시켜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이번 해방연대에 대한 기소는 최근 색깔논쟁을 통해 강화된 공안탄압 정세와 떨어뜨려볼 수 없다. 최근 보수언론은 통합진보당 사태를 중심으로 색깔 논쟁을 강화하고 있고, 검찰과 경찰 역시 이에 발맞춰 여러 운동 단체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당원명부 압수로 본격화된 공안탄압은 정권말기 이명박 정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비리사건을 무마하고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위축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저항세력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공안탄압에 맞서 국가보안법 철폐와 정치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온전히 쟁취하기 위한 행동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노동해방실천연대에 대한 기소를 규탄한다!

노동해방실천연대에 대한 공안탄압 중단하라!

정치사상의 자유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2012년 6월 8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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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 #1 정비지회 원상연 - 싸우는 우리 내부를 들여다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정비지회 원상연

대한문 분향소에서 지내는 원상연 동지는 쌍용자동차 정비노동자였다. 49제를 앞둔 5월17일 대한문에서 원상연 동지를 만나 정리해고 이후의 상황과 희망운동에 대한 생각, 투쟁 속에서 생기는 고민을 들어보았다.

 

정비지회 원상연 동지가 분향소를 지키고 있다

대한문 분향소에서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일정친 않은데요. 6시 정도 일어나는 분도 계시고 전날 한 잔 하면 7~8시 정도 일어나는데 보통 7시 정도에는 일어나서 주변 정리하고 청소할 거 하고 분향소 정리한 다음에 아침 분향드리고 시작하죠.

 

하루에 분향하는 분들은 얼마나 오세요?

처음보단 많이 줄었어요. 지나가는 일반 시민 분들은 분향이라기보다는 관심을 가지고 서명을 한다든지 모금해주시는 분들이 많고. 단체에서 오신 분들은 분향도 하시는데 하루에 20~30명 좀 넘게, 어떤 행사가 있거나 그러면 좀 많고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날에는 별로 없고.

요즘엔 시민상주단이라고 해서 단체에서 돌아가면서 많이 오세요. 문화제도 특정 단체가 주관해서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단체에 속하신 분들이 많이 오시고. 낮에는 그렇고 밤에는 좀 더 많다고 볼 수 있어요.

 

쌍용차지부 정비지회 부지회장을 맡고 계신다 들었어요.

형식적인 역할입니다. 별 의미를 안 두고 있어요. 남아 있는 동지들이 한 7~8명 되는데 집안 사정이나 다른 사정에 의해서 잠시 나가있는 동지들까지 합치면 10명 가까이 되긴 하지만. 현재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은 7명, 6명 그 정도밖에 안돼요. 지금 한성카센터에는 두 분 계시고 대한문에 한 네 분정도 계시고, 김정우 지부장은 어차피 지부장이니까. 한 사람 지회장, 한 사람 부지회장, 사무장, 대의원까지 합치면. (웃음) 그렇게 큰 의미를 안 둡니다 저희는.

 

정비지회 동지들이 10명이라고 하셨는데 모두 해고자 분들인가요?

싸우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렇고, 전체 조합원 따지면 50명이 넘어요. 해고잔데도 지방에 계신 분들, 주도적으로는 못하고 생계 때문에 나가신 분들은 저희들한테 월 얼마씩 도와주고 있어요. 무급자 동지들 중에서도 조합원이 있는데 조합비 납부의 의무 정도이고, 자발적으로 도와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한성카센터 운영은 잘 되고 있나요?

돈을 벌려고 시작한 거지만 지금 내놨어요, 장사가 안 되서. 초창기에는 좀 되다가 시스템이 잘못되었는지 여러 요인이 있지만. 저희들이 그 쪽을 인수할 때 (카센터가) 굉장히 오래 됐었어요. 20년 이상 됐던 자리이기 때문에 고정 고객들이 많을 것이다, 했는데 사장이 몇 번 바뀌고 거기서 일하던 사람이 불성실하게 하면서 고객들 관리가 안 된 거에요. 그래서 고객이 많이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저희들이 인수하는 바람에, 지금 와서 얘기하는 거지만 사기 당했다, 그런 식으로까지 얘기하고 있고.
초창기에는 연대 동지들이 많이 오셨는데 서로가 불편한 것이 있어요, 이게 돈을 받고 하다보니까. 자동차라는 게 좀 그렇잖아요. 인식이 어디가면 바가지를 쓴다, 그런 게 있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견적 내고 할 때.
그리고 저희들의 자동차에 대한 인식하고 일반 소비자들은 차이가 있어요. 어느 부위가 고장 나면 해당하는 부위를 한꺼번에 같이 교환해야 되고, 물론 필요성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사고)예방 이런 것에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정도를 굳이 뭐’ 이럴 수도 있고. 그러다보니까 오해 아닌 오해가 생길 소지도 많고. 이게 좀 어렵더라고요.
아는 분들이 오시면 잘해드리고 싶긴 한데 그런 것 때문에 서로가 어려워하는 긴장 관계가 생기니 요즘은 많이 줄고. 또 (이미 와서 정비)하셨고. (연대동지들 입장에선) 도와줘야 하니 오긴 와야 하는데. 우리도 (연대동지들에게) 뭔가 해드리긴 해야 되는데, 라는 부담감이 조금씩 있어요.

 

 

정리해고 그 이후

 

정리해고 당시 정비노동자는 몇 명 정도였나요?

77싸움 전에는 한 400명 정도 됐죠. 거슬러 올라가면 1,600명 이상 된 적도 있었고. 97년 IMF 때부터 대우자동차로 팔렸다가, 다시 나왔다가 상하이로 갔다가 그렇게 절반, 절반, 절반 떨어져 나가서 400명 정도 남았다가 (09년) 정리해고로 절반. 지금 200명 정도 일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 상황은 어떤가요.

노동의 유연화라는 것, 고용의 유연화 말고 일할 때의 유연화를 말씀드리는 건데. 커피를 한 잔 마실 수도 있고 담배를 한 대 피울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통제(가 심해졌어요). 정비는 라인하고 달라서 휴식시간 그런 게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요. 일할 때는 서너 시간 미친 듯이 일하다가 일 없으면 서너 시간 놀기도 하고. 고객들하고 얘기를 하다보면 그게 한 20분 될 수도 있고, 같이 시내를 나가서 한 시간 이상 돌아다니면서 설득시키고 그런 작업이 많이 있어요. 때문에 작업이 딱 정해지면 야간까지 작업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그게 타이트해졌다고 보면 되죠. 옛날에는 잔업까지 해서 8시, 9시까지 해야 하는 작업이라면, 현장관리자들이 경력 좀 있고 그런 애들이 하다보니까 ‘야 너는 왜 밤까지 안 해도 되는 걸 붙들고 있냐’라는 식으로 해서 압박을 주는 거죠.
맨아워라는 게 있어요, 작업마다. 그 시간 안에 안 되면 뭐라고 하기도 하고. 간섭이 많아지고. 현재 노동조합 자체가 흔히 말하는 어용노동조합이라고 표현하는데 노조 자체가 아무런 견제세력이 못되다 보니까, 현장에서 운신의 폭이 굉장히 좁아진 거죠, 조합원들이.

 

그러면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모두 어용노조원인가요?

쌍용자동차는 유니온샵이잖아요, 조합비는 자동이체가 되는 거고. 회사도 그렇고 노동조합도 그렇고 현재 저희들의 실체를 인정안하는 거죠. 그러니까 당연히 그 사람들은 그쪽 노동조합으로 가게 되어있고. 이중으로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쉬쉬하고 있는 거죠. 계속 기업(어용)노조에서 ‘이중가입하면 불이익 주겠다, 제재가하겠다’는 얘길 계속하기 때문에 대놓고 저희한테 조합비를 내고 있다는 얘기는 못하지만 이중으로 하는 분들도 계세요.

 

동지들 중에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연락을 계속 취하고 있는 분들이 있나요?

연락을 맘먹으면 할 수는 있겠지만 어차피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굳이 연락할 이유가 별로 없죠. 친목단체나 이런 게 아직 유지되고 있다면 연락해서 만나겠지만. 현재 우리가 싸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만날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정비사업이 외주화 되었다면 사업소가 없는 건가요?

쌍용자동차라는 공장이 있고 생산부분, 정비, 영업, 해외 이렇게 있는데, 영업정비라고 하는 직영사업소가 있어요. 옛날에는 (직영사업소가) 지방마다 하나씩 있었어요. 부산, 광주, 양산 이렇게.
보통 직영사업소는 모든 정비를 다 할 수 있는 규모가 큰 곳이고, 서비스 프라자는 흔히 말하는 카센터인데 이것은 어느 정도 조건이 갖춰져서 쌍용자동차에서 인정을 해주는 데가 있는데 그건 굉장히 많죠.
직영서비스 공장은 구로에 하나 있고 구로의 규모였던 것들이 다 분사화 되어 버렸어요. 광주, 대전, 부산, 양산 이런 데가 법인으로 바뀌어서 남아있는 거에요, 외주화돼서.

 

그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쌍용차 노동자가 아니겠네요.

당연하죠. 법인이 다른데.

 

구로 정비소는 어떻게 운영이 되고 있나요.

내부사정은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그렇게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아요. 쌍용자동차가 차를 고치는 회사가 아니라 차를 판매해서 수익을 내는 회사이기 때문에 서비스에서 이윤을 남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도 서비스는 적자를 보더라도 계속 늘려나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자본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도 그게 맞는 것 같은데, 쌍용자동차는 계속 분사화 시키고 외주화 시켜서 서비스의 질만 떨어뜨리는 형태가 되고 있어요.
자동차에 대해서 잘 모르는 고객들은 계속 피해만 보는 거죠. 외주화 되고 분사화 돼버리면 어차피 그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윤을 취해야 되니까 골탕 먹는 건 소비자들이고.
지방사업소가 구로에 하나밖에 없는데 거기에서까지 이윤을 생각한다고 하면 서비스는 쌍용차에서는 끝났다(고 할 수 있죠). 사실 쌍용차를 선택한 사람들이 돈 주고 차를 사서 당연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직영 같은 경우는 돈 안 되는 것들은 직영(구로 사업소)에 전부 다 미뤄버리는 형식이 되요. 불만 많은 고객들은 다 구로 쪽으로 돌려버리고. 돈이 좀 된다, 보증기간이 지난 차들 같은 경우 덤태기 씌워 버리고. 그러니 구로정비 사업소가 보루가 된 거죠, 서비스의.

 

 대한문 분향소에 와서 서명하는 시민들

쌍용차지부 안의 여러 노동자들

 

생산직 노동자들과 정비 노동자들은 일도 다르고 상황도 좀 다른 것 같은데 어떤 다른 점이 있나요?

다르죠, 일이 다르고. 보통은 타사를 봐도 큰 집이라고 표현하는 지부가 대 부분 공장이죠. 쌍용자동차 같은 경우는 비정규직지회가 있고 정비지회가 있고 창원지회가 있어요. 창원은 엔진을 만드는 데에요. 거기가 정비보다는 조합원수가 좀 더 많은데.
보통 싸움, 투쟁계획이 지부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지회는 회의는 참석하지만 투쟁계획에 따라가는 입장에 많이 있어요. 다만 성향이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흔히 말하는 투쟁력이나 그런 걸로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의식관계가 그런(다른) 게 있어요.
쌍용자동차노동조합의 예전의 행태들이 앞서가는 민주노조는 아니었지만 저희 정비(지회) 같은 경우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전투적인 성향인데), 탄압을 많이 받으면 그만큼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지역적으로도) 저희 주변에 기륭전자도 있고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소장님부터 시작해서 추모연대 선배들까지 거대한 (연대 흐름) 그런 것들이 있어요. 같이 투쟁하고 얘기하고 하다보면 가야해야 할 길이 명확하게 나와 있거든요.
그런 차이가 있는 거죠. 77 때도 그렇고 이후에도 그렇고 그런 차이들이 좀 보이긴 했었어요. 지금도 지부하고 회의를 하면 못마땅한 것도 좀 있고. 대한문 같은 경우에도 지부에 허락을 맡아서 한 게 아니고 우리 이거 하겠다 해서 한 거거든요, 독자적으로.
77싸움 거치면서 지부도 그렇고 싸우는 동지들의 의식도 많이 변한 건 사실이에요. 대한문도 상황이 이렇게 되면 당연히 이쪽으로 결합하는 게 맞고 집중하는 게 맞기 때문에 지부도 같이 하기로 결정한 거고. 같이 모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정비지회도 그렇지만 비정규직지회가 따로 가기도 하고 같이 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희망텐트를 하던 시기에 원유철 한나라당 의원 사무실 앞에서 천막농성을 따로 했잖아요.

같은 지부 내에 지회가 있지만 투쟁을 바라보는 자기 입장이나 지회 입장, 절실함의 차이도 조금씩 있어요. 정비지회 같은 경우는 그 전부터 계속 지부하고 (함께)했고 비정규직지회 같은 경우에는 77 때 같이 지회로 (지부에 편제)됐기 때문에 그 전부터의 관계(입장 차이)가 있었어요.
지부의 투쟁 상황에 따라서 소소하게는 정비지회 나름대로의 지역투쟁 이런 걸 했었지만 극단적으로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비정규직지회 같은 경우는 자기들만의 투쟁계획이 있었으니 지부하고 마찰 아닌 마찰이 좀 있었고. 자기들의 계획이 계속 딜레이 되는 것에 대한 (불만), 그런데 지부의 계획이 또 있었거든요, 그 당시에. 희망텐트라든지 그런 걸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같이 해야 된다는 그런 게 있었는데. 인식의 차이도 있고 (사안을) 바라보는 차이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요.
비정규직지회 동지들 같은 경우에는 지역 국회의원에 대한 압박이 없이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게 있었고 지부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정리해고에 대한 문제를 큰 틀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같이 해결해야 된다는 입장이었어요.
비정규직지회는 절실했고 급했던 거죠. 왜냐면 우리보다 더 투쟁을 일찍 시작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많이 지쳐했었어요. 그래서 단시간에 승부를 봐야 된다는 시간에 대한 (압박감) 그런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준비했었고. 제가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이 텐트를 걷을 때 평가를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지부) 전체적인 평가는 없었던 것 같아요, 천막농성에 대한. 어차피 (지금은) 지부와 같이 하기로 마음을 모았어요.
(원유철 사무실 앞 농성이) 어느 정도 소정의 성과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소정의 성과라면 공장 한 번 들어가서 노무담당 한 번 만나서 얘기해본 게 단데, 입장차이만 확인한 거고. 그런 것만 따져도 사실 이건 일개 국회의원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게 명확해진 거거든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가 너무 미약했던 건 사실이죠. 제 생각에는 지부가 좀 서운한 게 있고 그렇더라도 설득하고 같이 나가 할 수 있는 걸 모색해야 하지 않나하고 생각합니다.

 

 

 

투쟁방향에 대해서

 

희망버스로 시작된 희망운동과 같이 과거 노동운동과는 다른 운동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생각하는 이 투쟁의 끝은 어차피 정부, 이명박을 움직이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될 거라고 봐요. 지금까지의 행태를 봐서 그건 어차피 (정부 차원으로) 내맡겨지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데.
희망버스 자체가 그거(대정부투쟁)였잖아요. 사실 한진 동지들이 싸움을 했다? 싸우는 걸 난 못 봤어요, 사실. 난 냉정하게 말하면 김진숙 씨 때문에 싸움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럼 지금 쌍용차는 어떠냐. 77 이후로 한 게 없어요. 끽해야 (희망)뚜벅이부터 시작된 공동투쟁 같이 결합하고 산업은행(에 농성) 잠깐 있다가 뭐 그런 것들. 공장을 벗어나서는 투쟁의 한계가 있는 거고, 사람이 자꾸 죽어나가는데 목숨을 건 투쟁을 해야 되냐. 물론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하다하다 안되면 곡기 끊고 그 때 또 높은 데 올라가고 그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나라 국민을 움직여서 정부를 움직이는 거에요.
희망버스의 예를 들었지만 그런 게 어떻게 보면 가장 정확할 수도 있고.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주변에 문제를 계속 알려내고 조직하고 광고하고 호소하고, 해도 해도 안 되면 다른 걸 선택할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국민들의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이 돼서 중요한 문제를 같이 해결할 수 있는 그것이 가장 절실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들고요.
광장 사업이라든지 (희망)뚜벅이는 그 테두리 안에 갇히지 않았나 (생각해요). 어차피 시청광장이라는 상징성이 있어서 계속 알려내기 위해 있어야 했지만 광고나 투쟁에 있어서 평가는 굉장히 분분하긴 한데 계속 막혔잖아요. 물론 그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선전의 효과는 있지만 효과적인 선전이었느냐에 대해선 비판이 많이 있잖습니까. 다음에 무슨 사업을 할 때 참고사항은 되겠지만 비타협적인 사업을 하면서 하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여건들이 있었거든요.
경찰은 계속 막고 고립되긴 했었지만 어느 정도 의의는 있었어요. 뚜벅이 때부터 장투사업장들이 같이 모여서 서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있어서 굉장히 좋더라고요, 저는. 광장보다는 개인적으로는 뚜벅이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때 만난 동지들이 지금도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있고. 서로가 진짜 가슴아파할 수 있는 동지들이 생기지 않았나. 뚜벅이가 있었기 때문에 광장까지 계속 이어질 수 있었고요. 코오롱이나 콜트 콜텍, 쌍차, 사안마다 같이 모일 수 있는 원동력을 그런 데서 찾을 필요도 있을 것 같고.
저희들이 대한문에서 싸우는 것은 사업장을 모아낸다기보다도 민주노총이나 제도권에 있는 조직된 사람들하고 진보정당이라고 요즘 많이 시끄러운 그런 데에도 같이 한 번 모아내 보자라는 (의미가 있어요). 수세적이었던 것에서 공세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더 좋고.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이 막 생기더라고요, 초기에는 그런 고민이 없었는데. 아 그렇게 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가능성도 좀 열리는 것 같고. 해보자, 그런 식이 되는 것 같아요.

 

공장 중심의 전술을 계속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나요?

쌍용자동차 개별 기업과 해고노동자들의 싸움은 이제 지나버린 거에요. 그렇다면, 쌍용자동차가 그렇게 버틸만한 힘이 있었겠냐, 내가 보기에는 없다는 거에요. 걔들(사측)도 믿는 구석이 있는 거에요, 제가 봤을 때는. 정부나 이명박이 같이 한 거죠. 때문에 걔들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거라고 판단해요. 개별 쌍용자동차를 압박하기는 것은 물론 전술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겠죠. 마힌드라도 있고. 그렇지만 일단은 대정부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닌가 (해요).

 

민주당도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을 위해서 특위 꾸렸는데 기대가 있나요?

(웃음) 77 때 추미애 의원이나 그런 사람들이 왔었어요. 사실 투쟁하는 노동자들 어려운 상황에서 높으신 양반들 오면 얼마나 고맙겠어요. 그런 고마움이 있고 혹시 해결하려고 왔나 그런 기대는 있죠. 그 당시만 하더라도 노무현 정권이 상하이차의 시초를 저질러놓고 그 의원들이 왔다는 것 자체를 그 당시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걸 떠나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나보다 라는 (기대를 했죠).
사실 해결은 안됐잖아요. 그리고 이제 와서 뭔가를 하는데 우리의 요구가 100% 받아들여지겠냐 (싶어요). 다만 이런 정치적인 움직임이 일반 시민들한테까지 전파가 되어서 ‘아 이런 일들이 있고 정치인들까지 신경을 쓰고 있구나’ 하는 어느 정도 광고효과만이라도 알려내고 심각한 문제의식이 시민들한테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그것만이라도 어느 정도 성과가 있지 않겠나하고 받아들이고 (있어요).
까딱 잘못하면 정리해고가 철회되어야 하는데 무급자들만, 86 노사합의에 관한 것만 제한되어버리면 그건 역효과죠. 그것을 저희가 경계를 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어쨌든 범대위가 됐든 정치권이 됐든 우리하고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에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죠.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차지부, 민주당 간사 이렇게 해서 어제도 모임이 있었나 본데, 우리의 요구를 정확히 전달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에요.

 

그렇다면 현재 걸고 있는 요구안은 무엇인가요.

정리해고 철회, 책임자 처벌, 진상규명 뭐 그런 것들이죠. 그런데 민주당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는 86노사합의를 자꾸 얘기하는 것 같아서 이것(우리의 요구)를 좀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같이 만나서 만들어 가려고 하는데, 어디까지 가능할지는 두고 봐야 하고.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비관적이죠. 당신들이 저지른 일을 진상규명을 한다? 스스로가?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끽해야 무급자들 언제까지 복직시킬지 약속받아내면 진짜 잘한 거다라고 생각하지만 쌍용차 투쟁 자체가 그걸로 한정돼버리면 그거는 아니한만 못한 게 돼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걱정하고 계속적으로 요구하고 한 거죠.

 

 

앞으로의 계획과 고민들

 

위령제 이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범국민추모위원회에서 범국민대책위원회로 바뀔거에요, (5월)19일 이후로. 그러면 분향소는 분향소대로 그냥 놔두고 일차적인 거점 마련을 한다, 이쪽에서. 그리고 2차 거점을 어디다 만들 수도 있다, 이건 한나라당으로 갈 수도 있고 청와대 앞으로 갈 수도 있고 다양한 것들을 고민하고 있는 상태고.
그런데 19일 이후로는 서울경찰청에서도 정리를 한다고 계속 연락을 해오고 있는 상태라서 일단 이것을 유지하는 게 1차적인 목표니까, 그게 안정화되면 계속해서 다른 투쟁계획을 고민하는 거죠.
평택에 거점이 있는데 평택지역에 대한 선전활동이라든지 분향소도 지금 평택역 앞에 있거든요. 그것도 유지해야 되고 100% 여기 다 올라오긴 무리여서 최소인원 남겨놓고 이쪽으로 올라온다, 그런 결의에 대한 것들을 얘기했죠. 조편성이나 그런 구체적인 사항을 같이 얘기했죠.

 

 

5월19일 열린 쌍용차 희생자 범국민추모대회

이러한 계획이 다른 동지들과 함께 이야기 되어 결정되었나요?

전체회의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범추위에서 범대위로 바뀌었는데 지금 상황이 만약 수그러든다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찾아올 수 없다, 최대한 활용하고 투쟁열기가 가라앉기 전에 계속 뭔가를 만들어내고 해야하는 것을 얘기하고 계속 투쟁계획도 생기고 집중하게 되는 그런 과정이 좀 있었죠. 어느 정도는 다 공감하고 있다고 봐요.

 

지금 쌍용차 해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장투사업장이 다 그렇듯이 가끔 고민이 너무 많아지는 경우가 있죠. 승리에 대한 확신이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정당성이, 이게 맞는 거냐는 회의가 간혹 들어요. 그럴 때마다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게 맞냐, 아니면 회의들 때 정리해야 하는 게 맞냐.
사실 정답은 같이 투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극복해서 다시 하는 게 맞겠죠. 나는 그런 생각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이 들면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왜 그런 생각이 들고 왜 그랬는지에 대한 생각도 하고. 또 고민이 필요할 때는 진짜 고민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흔히 말하는 운동에 대한 중요성이나 모든 걸 가정이나 인간관계를 다 파괴시키면서 이 길을 반드시 가야 된다? 아무 고민 없이 그러면 안 된다고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이 들 때 좀 더 고민하고 다른 사람하고 얘기도 많이 하고. 그런 생각이 들죠, 왜 안 들겠어요.

 

중요한 말씀인 것 같아요. 모든 장투사업장,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겪는 고민인 것 같아요.

결의를 외치잖아요. 발언하고 그럴 때 끝까지 어쩌고 뭐, 죽을 똥 살 똥... 하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쟤가 맘에도 없는 얘길 왜 하지... (웃음) 꼭 위원장이나 그럴 때는 끝까지 해서 총파업하고 어쩌고.... 그런 점에서 해서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면 잘 발언도 안하지만 발언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죠, 사실. 내 마음이 이런 데 결의에 대한 발언을 어떻게 하냐. 정리가 되고 그러면 하는 거고.
물론 진짜 열심히 하고 그런 친구들도 많이 있지만 무조건 이런 마음까지 다 접으면서까지 막 결의하고 어떻게 해야 된다, 그건 역효과다 (라고 생각해요). 고민할 땐 고민하고 다시 시작할 땐 시작해야 되는 거죠.

 

내부 의견이 어떤 게 있는지 알아보고 어떻게 정리되어서 나아가는 지 궁금했어요. 전조합원 토론이 자주 있으면 좋지만 그럴 기회가 적고, 개인이 문제제기할 힘이 없거나 귀찮으면 안 해버리거나 자기 목소리가 반영이 안 되면 실망하거나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어요, 문제제기하고 얘기를 좀 많이 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나가는 방향이 맞다는 걸 다 알고 있지만 솔직히 그것에 대해서 반박을 제시할 순 없죠. 이게 맞는 건데. 그렇게 되면 투쟁하지 말자는 얘기냐 그런 식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사실 말이 없어요. 왜? 그건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그게 맞기 때문에 그냥 따라가는 거고 하나는 체념을 해버리는 거고, 조직의 뜻이. 의식 자체를 안 하려고 하는 그런 것도 있겠죠. 체념을 해버리는 수도 있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리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장투사업장들이 다 겪는 문제지만 쌍용차가 특별하다는 건 아닌데, 현재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내부 이야기를 조금 더 해줬으면 생각이 들어요. 연대단위나 그런데서 요구하고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뭐냐면 ‘쟤들은 22명이 죽었는데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 투쟁할 생각도 없고 의욕도 없어’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물론 저도 그런 적도 있었고. (그런데) 내부를 들여야 보면 의욕이 생길 수가 없죠. 가정이 다 파괴됐고, 물론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근본적인 문제는 거의 인생을 파괴하는 거니까. 대부분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아무 생각 없이 투쟁만 집중하고 결의를 다지고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럴 수도 있겠죠. 다 포기하고 그냥 포기하는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올지는 모르지만. 죽음을 막겠다고 싸우는 사람들이 나는 솔직히 지금까지는 목숨을 걸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의 안을 심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시각이 필요하지 않나 (해요). 좀 지나면 정리가 되겠죠. 싸움을 지속해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동지들도 많이 있고,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는 해야 되겠고. 고민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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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탄압, 산자와 죽은 자를 가르다!

  • 분류
    교육
  • 등록일
    2012/06/04 14:32
  • 수정일
    2012/06/04 14:3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동국대 퇴학생 김정도 동지 인터뷰>

 

2011년 7월부터 동국대학교에서는 학과구조조정이 추진되었다. 윤리문화 학과와 북한학과, 반도체 학과 등의 통․폐합 계획이 제기되었다. 자신들이 다니는 학과가 일방적으로 없어질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당연히 학교 측에 수차례 논의테이블을 요청했다.

 

그러나 학교는 학생들을 무시하고 학과구조조정을 계속 추진했다. 결국 학생들은 2011년 12월 5일, 총장실-경영관리실 점거농성을 시작했지만 9일째 되는 날 새벽, 학술부총장과 교직원에 의해 강제침탈 당하였다. 침탈 직후 세워진 천막농성장도 오래 지나지 않아 폭력적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12월 29일 동국대는 퇴학 3명, 무기정학 2명, 유기정학-사회봉사 25명이라는 학생자치 역사상 초유의 무더기 징계를 내렸다. 2012년 2월 9일에는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은 무기정학, 당시 연대사업국장이었던 김정도 동지에게 퇴학이라는 재심 결과를 확정지었다. 동국대는 학칙 상 징계를 받아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은 재입학이 불가능하다는 규정이 있어 이번 퇴학은 사실상 고려대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출교조치로 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동국대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 학생분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도 라고 한다.

 

동국대에서 이전에도 전반적인 학과구조조정이 진행된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다. 특히 2011년에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듣고 싶다.

 

전체적인 구조조정의 흐름 속에서 동국대는 2007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매년 학과 구조조정을 진행해왔다. 거의 1,2년을 제외하고는 학생들이 매년 총장실 점거를 했었다. 작년에 퇴학 사태를 정점으로 크게 언론에 부각되었다.

작년에 구조조정 대상 학과가 9개에서 10개 학과정도 되었고 특히 윤리문화학과랑 문예창작학과가 핵심이었다. 윤리문화학과는 내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폐과가 된다. 문예창작학과는 커리큘럼이 완전히 망가지고 국문과로 흡수가 되는, 그런 형태의 구조조정 안이 있었다.

 

이렇게 학교의 일방적 구조조정 추진에 대해 학생들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작년에는 문예창작과가 가장 먼저 부각되었다. 여름방학 때부터 문예창작과 학우들은 학교 본부 앞에서의 1인 시위를 하거나 단체로 피켓시위를 시작했다. 그 당시에 학내에서 진보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구조조정 투쟁이 벌어지면 항상 앞장서 왔던 분들이었고 이 투쟁에 같이 해야겠다 싶어서 ‘우리의 학문을 지키기 위한 동행(이하 ‘동행’)’이라는 대책위를 준비했다. 9월경에 대책위를 꾸렸고 총장실 점거 이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했었다. 기자회견도 수차례 열고, 삼보일배도 하고 108배도 하고 대화요청 공문도 많이 보내는 등 당시 총학생회와 함께 여러 가지 활동들을 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생색내기 식의 설명회를 두어 차례 열었을 뿐이었다. 학교에서 계속해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동행 차원에서 좀 움직일 수 있는 학과들을 모아서 연합 학생총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총장실 점거가 의결되었고 작년 12월5일에, 총학생회 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선되고 나서 며칠 되지 않은 시점에서 총장실 점거를 했었다.

 

점거한 사람들은 주로 폐과가 예정된 문예창작과나 윤리문화학과랑 학내 활동가들 중심이었을 것 같다.

 

맞다. 점거준비와 총학생회 선거 준비가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12월5일에 점거를 시작했고 8박 9일째 되는 날 새벽, 12월 13일에 운동복을 입은 학술부총장이 직접 150여명 되는 직원들과 학교 경비업체 직원들을 이끌고 와서 점거 중인 총장실을 침탈했다. 학생들은 그 과정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으로 끌려 나왔다.

끌려나온 직후 본관 앞에서 천막농성을 바로 시작했다. 천막농성이 5일째 되던 날, 원래 켜놓는 천막농성장 주변 전등을 다 끄고, 그 당시에도 경영관리실장이었고 지금도 경영관리실장인 사람이 술을 먹은 채 직원들을 100여명 대동해서 천막을 강제 철거하는 일이 또 다시 벌어졌다. 농성장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동문 선배님들도 계셨는데 그분들도 집단 구타당했다.

그 뒤로 우리 투쟁도 사그라들었다가 2월17일, 입시설명회가 있던 날, 기자회견을 크게 하고 학교측과 몸싸움을 했다. 12월 29일에는 당선자 신분이었던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지금은 그만두었지만은 그 당시 연대사업국장인 저, 이렇게 3명이 퇴학을 당했고, 2명 무기정학, 5명 유기정학, 사회봉사 20명으로 사상 초유의 대량징계가 발생했다.

이후로 징계 수위별로 입장도 깨알같이 다 다르고 여러 입장 차이들과 크고 작은 다툼, 감정싸움, 상처를 주고받는 과정들이 있어서 조금 정체 되었다.

산발적으로 소규모의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는 했었고. 개강 이후에 좀 대중적으로 다시 한 번 투쟁을 만들어보자 해서 4월4일에 전체학생 총회를 시도를 했는데, 동국대가 총회 정족수 기준이 5분의 1로 조금 높은 편이라 총회가 무산되고 말았다.

그 전후로 저도 또 개인적인 사정도 안 좋고, 총회가 무산된 탓도 있고 해서 공황상태였다. 그래서 좀 잠잠해 있다가 최근에 조금씩 집회에 나오고 있다. 이제 안 되겠다 싶어서 5월 중순부터 다시 투쟁을 만들어보려고 학내에서 학생들도 만나고 있고 외부 집회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도 만나고 있다.

 

‘동행’의 목표가 학과발전협의체 구성이던데 학과구조조정반대가 아니라 학과발전협의체로 목표를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학과발전협의체가 노동자투쟁으로 빗대면 노사정위원회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한다. 학과발전협의체라는 것이 사실 말도 안 되는 건데 그러한 요구 이상으로 학생들을 설득하기 어려웠다. 이는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한계이기도 하다. 학과 구조조정의 문제가 동국대만의 문제도 아니고 특정학과만의 문제도 아닌데 학교 안에서 조금이라도 문제를 풀어내려면 대학생들의 전국적인 투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학교 안에서 얻어낼 수 있는 최대치가 학과발전협의체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이 학교 발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학교가 잘 살아야 학생이 잘 산다’, ‘회사가 잘 되어야 노동자가 잘 된다’라는 것을 깨야하지만 투쟁하는 주체들도 그 논리를 넘어서기가 상당히 힘들다.

사실 대학기업화나 구조조정 자체가 문제라는 입장은 좀 소수였고, 민주적인 구조조정, 민주적인 등록금 심의위원회 뭐 이런 거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내가 항상 “그럼 민주적으로 구조조정하면은 받아들일 수 있냐, 민주적 구조조정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그렇게 항상 얘기를 하지만 다수의 동의를 얻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투쟁의 요구나 슬로건이 조금 애매한 측면이 있었다.

 

투쟁 과정에서 학생들의 여론은 어땠는가? 분기점마다 약간 변화가 있었을 것 같긴 하다.

 

투쟁을 1,2년 한 게 아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학교가 너무 일방적이지 않느냐, 학생들이랑 적어도 논의는 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런 대중적인 분위기는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탄압이 거세지거나 투쟁 수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조금씩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간다. 뭐 말씀하셨듯이 분기점마다 동참하는 학생들의 수도 점점 더 줄어들고. 총장실 점거할 때 한 200여명 정도 점거에 동참했었는데. 지금 제가 천천히 사람들 다시 만나고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3명이 남은 거나 마찬가지다. 총학생회장님, 부총학생회장님, 저, 이렇게. 지금 두 분은 무기정학 상태다.

 

나머지 징계대상자들은 유기정학이라 징계기간이 다 끝난 건가

 

그렇다.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면 ‘해고는 살인이다. 현장으로 돌아가자.’ 이런 구호를 외치는데 이게 퇴학을 당하고 나니까 그 구호를 외칠 때 느낌이 정말 다르더라. 이게 정말 내 문제니까. 내 현장은 학교니까.

이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요즘 열심히 투쟁하려고 노력하는데 하루하루 느끼는 것도 많고 배우는 게 많은 그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고려대도 그렇고 중앙대 출교도 그렇고 처음에는 이슈도 많이 되고, 나름 학내에서 투쟁동력이 있다가 점점 장기화가 되면 될수록 징계당한 사람들로 소수화되는 것 같다. 그리고 학내에서 기반이 없어지면서 투쟁이 사회단체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거나, 아니면 법정투쟁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다.

 

맞다. 말했듯이 학내에서 대중적인 동력을 확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물론 소수의 학생들과 총학생회에서 같이 연대해주긴 하지만. 밖에 연대하면서도 보면, 그전에는 잘 몰랐는데, 뭐 지금도 이해할 것 같다고 하면 자만일 수도 있지만 해고자 복직투쟁 하시는 분들이 10%는 이해가 되더라. 현장에서 왜 고립될 수밖에 없는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여러 가지 요인들이 많은데. 물론 혼자 퇴학을 당하게 되면서 감정적으로 좀 움츠러든 면도 있고, 혼자 끙끙 앓다가 서로 싸우고 이러면서 사이가 더 벌어지는 경우도 있고. 서로가 서로를 보는 시선들도 되게 고깝게 보는 것도 있고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거리를 좀 좁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징계 반대 투쟁에 함께 대응하는 단위가 있는가?

 

초기에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라고 불교계 단체랑 <동국대 민주동문회 준비모임>이 총학생회랑 같이 총장 면담요청도 하고 불교계를 통해서 크고 작은 압박도 넣고 성명서도 냈다. 동문회에서는 신문 일간지에 1면 광고도 냈었다.

그분들 역시 이 투쟁에 함께 하고 있고 민변을 통해서 변호사분도 구했지만. 실질적인 투쟁을 만들어나가는 대책위는 되지 못하고 있다. 그분들이 잘 못하신다는 게 아니라 좀 이슈파이팅에만 집중되는 측면이 있어서.

사실상 제가 투쟁을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상을 그려봤는데 학내에서는 그동안 좀 틀어진 사람들과도 관계를 회복하고 계속 총학생회도 만나고 의견조율하고 하면서 작지만 꾸준히 1인 시위도 하고 선전전도 하고 할 생각이다.

나머지는 사실 상 법률투쟁인 것 같다. 6월 초․중순에 소송도 하고 기자회견도 준비하고 있다. 이제 대학 기업화 문제로 사회적인 이슈파이팅을 할 예정이다. 6월7일 11시 30분에 저희 동국대 본관 앞에서 ‘대학기업화 반대’, ‘표적 징계 철회’, ‘본부 규탄’을 위한 청년학생 기자회견이 있다. 동국대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운동 단체나 중앙대나 고려대에서 퇴학을 당하셨던 분들을 모시고 기자회견도 하고 항의방문도 할 생각이다.

이건 조금 아쉬운 소린데 어느 투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시작할 때는 가장 절박한 분들부터 시작을 하면 사람들이 붙는다. 그런데 또 움츠러드는 국면에서는 가장 절박하지 않은 사람들부터 총장실에서 나가고 징계투쟁에서 손을 떼더라. 근데 어느 순간 쌍용차 투쟁에서 보이는 것처럼 산자와 죽은 자, 그런 게 있더라.

산자와 죽은 자라는 그 여섯 글자가 나에게 정말 와 닿았다. 나는 사실 투쟁을 처음 시작할 때는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불교학과인데 불교학과는 구조조정하면 수혜를 보는 입장이었고, 산 자였다. 이제 투쟁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퇴학을 당한 전후로 보니까 지금은 내가 또 가장 절박한 상황이고 어느 순간엔가 죽은 자가 되어있더라, 어느 순간에. 지금까지는 내가 이런저런 활동하면서는 항상 산자였고 항상 연대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게 당사자가 되어있고 가장 절박한 사람이 되어있으니 매우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든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투쟁 계획과 하고 싶은 말 있으시면 해달라.

 

투쟁 계획은 아직 크게 잡힌 게 없다. 앞으로도 계속 학내외에서 크고 작은 집회 다니면서, 학생들 만나면서 계속 알려낼 예정이다. 이게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니까 집회에서도 계속 선전전 할 거고.

복학을 하면 좋지만, 그것보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대학 기업화라는 의제를 가지고 이슈파이팅을 계속 해보자는 생각이 있다. 여느 해고자 동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현장에서 당했던 그 신체적인, 물리적인, 정신적인 그런 폭력들을 생각하면 마음 같아선 안 다니면 그만이다. 근데 항상 탄압하는 사람들은 투쟁하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떠나는 것을 가장 바라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올 때는 나오더라도 일단 복학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몇 년이 되었든 복학은 꼭 할 생각이다. 앞으로도 언론에 계속 알리고 관심이 시들어갈 때쯤 또 뭔가를 계속 하면서 묻히지 않게끔 잘 해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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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번역]5월1일 점령운동(Occupy) 시위에서 드러난 지배층의 정치

 

2012년 메이데이, 남한에서는 기존 민주노총의 집회와 별개로 프레카리아트 총파업이라는 집회가 벌어졌다. 이러한 ‘총파업’이 벌어진 것은 남한에서만이 아니었다. 점령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던 미국에서는 메이데이를 맞이하여 작년 점령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총파업’이라는 이름 하에 집회를 진행했다.

이 기사를 쓴 WSWS(World Socialist Web Site)는 미국의 ‘총파업’ 운동은 사실상 민주당을 위시한 정치권과 오바마 재선을 지지하는 노동조합과 독립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사실 상 오바마 재선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야권연대에 빠져있는 민주노총 상층부와는 밀접하지 않은 남한의 프레카리아트 총파업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작년의 점령운동이 현재 어떠한 상황인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기사를 옮겨보았다.

 

이 기사의 입장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5월1일 점령운동(Occupy) 시위에서 드러난 지배층의 정치

 

2012년 5월3일

 

5월1일 ‘월가 점령 운동’은 미국 전역의 도시들에서 일련의 시위를 조직했다. 그날의 시위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상당히 작은 규모로 진행되었다. 또한 그들은 거대 기업의 정당들에게 위협적이지 않는 선에서만 자신들의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들은 아나키스트 그룹들의 진지하지 않은 연기와 노동조합들이 능숙하게 행하는 반동적인 가식을 결합시켰다.

 

여러 시위들이 “총파업”이라는 이름 아래 소집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총파업과는 상관이 없었다. 예를 들어 아큐파이 DC 웹 사이트에 따르면 워싱턴 DC에서 ‘아나키스트 연합 DC 네트워크’와 ‘아큐파이 DC 노동자 위원회’는 AFL-CIO와 통합운수노조와 힘을 합쳐서 “오후에 카니발, 라이브 음악, 연극공연, 워크샵, 피크닉, 이후에는 자전거 투어와 집회, 행진”을 진행했다.

 

점령운동 시위와 그 운동 자체의 언어들은 6개월 남짓한 시간이 지나면서 부르주아 정치의 일반적인 프레임에 흡수되었다. 이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오바마 재선 캠페인의 협력자보다 조금 더 급진적인 어떤 것으로 조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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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amny.com>

 

‘99%의 봄’이라는 그룹은 이러한 과정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이 그룹은 친 민주당 성향의 ‘Moveon.org’가 주도하고 주요 노동조합과 자유주의적인 집단들의 참여로 설립된 것이다. 이들의 상위 기구는 지난 가을의 점거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성원을 모집했다.

 

‘99%의 봄’의 지지자 리스트에는 리처드 트룸카(Richard Trumka) AFL-CIO 위원장, 전미자동차노동조합의 밥 킹(Bob King), 미국교사연맹의 랜디 윈거튼(Randi Weingarten) 등 많은 사람들 이름이 올라있다. 이 그룹은 “시민불복종” 워크샵을 조직해왔다. 이는 11월 선거 준비기간 동안 기업 회의실에서의 시위와 다른 주목받을만한 활동들을 준비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5월1일 총파업은 <the Nation megazine>과 같은 자유주의 출판 쪽에서 많이 홍보되었다. 이 잡지사는 오바마의 재선을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곳이다. 언론들은 전반적으로 이 시위에 대해 호의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점령운동 시위는 작년 9월에 처음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들의 슬로건인 1%에 대항하는 “99%”는 미국 정치 경제에 대한 월가의 지배와 불평등에 대한 거대한 대중적인 분노와 전반적으로 공명하는 것이었다. 때때로 그 시위는 중요 부문의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참여시키기도 했다. 지난 11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최루 스프레이를 쓴 이후 나타난 대응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노동조합, 자유주의적 출판사, 국제사회주의조직(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과 같은 사이비 좌파 조직을 포함하는 다양한 정치보족기관들과 정치권은 상당히 의식적으로 이 시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움직였다. 주도권을 잡는 것을 통해 이들은 시위대의 언어를 순치시키고 저항적인 내용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 시위를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과 양립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점령운동을 조직하는 활동가들의 태도는 이 운동이 정치권의 이러한 목적을 위해 쉽게 순치될 수 있게 하였다. 점령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그룹들에서 영향력이 강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치색에 대한 거부”와 “지도부에 대한 거부”라는 슬로건을 반복하였는데 이 슬로건은 사실 민주당의 부르주아 정치와 노동조합 기구와 완전히 양립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이 실제로 의미했던 것은 독립적인 정치색 거부와 자주적인 지도부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위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 정치적 태도는 빠르게 명백히 드러났다. 어떠한 급진적 수사를 사용하든 간에 궁극적으로 시위를 추동한 것은 사회 최상층의 부의 분배에 대한 실망이었다. 경제생활 전반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99%”라는 슬로건은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 슬로건은 인구 대다수 내부에 존재하는 5-10%의 특권층인 중상위 계층과 노동계급 간의 심원한 차이를 흐리고 있다.

 

점령 운동 조직자들의 정치에는 그들 스스로가 겪고 있는 억압으로 인해 비난받고 있는 노동계급에 대한 깊은 적대감이 만연해 있다. 그들이 확신하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이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정치 운동을 목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중요한 교훈을 준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점령 운동에 이끌린 이유는 불평등과 기업, 금융 엘리트들의 지배에 맞서 투쟁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투쟁방향을 찾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진정한 저항 운동은 완전히 다른 기반 위에서, 즉 자본주의 시스템에 맞서 노동계급을 독립적 정치로 동원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점령 운동의 퇴행은 깊어가는 광범위한 노동계급 대중이 직면한 사회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이뤄지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실질적인 이득도 낳지 않는, 극도로 미약한 “(경기)회복”은 또 다른 쇠락을 위한 길을 터주고 있다.

 

지배 계급은 노동계급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극단적인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11월에 있을 선거에서 오바마와 롬니 둘 중 누가 이기든 간에 건강보험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배가된 공격을 시행할 것이다. 동시에 기업과 금융엘리트들의 정치적 대표들은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공격하는 전쟁을 계획할 것이다.

 

이러한 공격을 되받아치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독자적인 지도부와 강령이 필요하다. 점령 운동 시위대의 자기만족적이고 체제순응적인 정치가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의 강령이 필요하다. 노동계급은 미국과 국제적인 차원에서 정치권력을 전취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사적인 이윤이 아닌 사회적 필요의 원칙에 기반하여 사회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재조직화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그들의 이해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강령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강령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유일한 조직은 사회주의평등당(SEP) 뿐이다. 그 이유로 우리는 2012년 선거에 출마한다. 우리는 모든 노동자와 청년들이 우리의 캠페인을 지지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참가하는 방법을 찾기를 촉구한다.

 

조셉 키쇼어(Joseph Kish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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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노동해방실천연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

노동해방실천연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
국가보안법 철폐하고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하자!
 
 
522일 오전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가 노동해방실천연대(이하 해방연대)의 진보넷 이메일 계정을 압수수색하고 활동가 4명을 연행했다.
경찰은 국가보안법 상 이적단체 구성 혐의로 해방연대에 대한 이 같은 압수수색과 활동가를 연행했음이 확인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촛불투쟁 참가자들을 사찰하고 범민련 등 통일운동 세력과 사노련, 사노신 등 사회주의 운동단체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또한 용산 철거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희망버스 참가자 등 자본의 탐욕에 대항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라는 이름으로 인신을 구속하고 벌금을 매겨 저항의 흐름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탄압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언론통제와 더불어 트위터 상에서 북한관련 글을 게시한 개인들에게까지 국가보안법을 적용시켜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이번 해방연대에 대한 탄압은 최근 벌어진 통합진보당 당원명부 압수 등 정치탄압의 연장선상에 있다. 정권말기 이명박 정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비리사건을 무마하고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또다시 공안탄압으로 위축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저항세력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공안탄압에 맞서 국가보안법 철폐와 정치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온전히 쟁취하기 위한 행동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연행된 해방연대 활동가들을 즉각 석방하라!
정치사상의 자유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523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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