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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국가의 탄압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4/08 19:59
  • 수정일
    2011/04/08 19:5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5~6년 동안 사회주의 운동이 공개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과거 공유되었던 수사에 대한 원칙이나 경찰탄압에 대한 방어원칙이 많은 부분 망각되었다. 하지만 <사노련>을 “국가변란 선전·선동 단체”로 규정한 이번 유죄 판결은 실제로 단순한 문필과 선전활동에 대한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적용의 선례가 될 소지가 농후해 이후 유사 사건들이 발생할 우려를 낳고 있다.
<사노련> 유죄판결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국가권력의 탄압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방식을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관용의 자유

군사독재 시절 남한의 반정부세력은 공권력의 가혹한 탄압 때문에 대개 비밀스럽게 활동해야 했다.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에 기원을 둔 국보법은 이러한 탄압의 가장 유력한 무기로 기능했다.
이런 상황은 87년 민주화 투쟁 이후에도 별반 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90년부터 92년 사이 세 차례나 공권력의 침탈을 받은 끝에 백태웅, 박노해, 남진현 등 체포된 지도부가 국보법에 의해 최고 형량인 무기징역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 받았다.
이런 엄혹한 탄압과 더불어, 동구권의 붕괴로 인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환멸, 김영삼 정권의 등장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확대 등은 많은 급진적 정치단체들을 합법정당 운동이나 공개단체와 같은 제도권으로 들어서게 했다.
하지만 국보법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반체제적 성격을 띤 운동에 대해서는 정파를 막론하고 국보법에 의한 탄압이 가해졌다. 혁명적 사회주의를 걸고 비공개·비합법 활동을 하던 단체들에 대한 국보법 탄압 역시 9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93년과 94년 <혁명적국제사회주의노동자동맹(‘혁사노’)>와 <노동자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노해투사’)> 등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단체들이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받았다. 95년과 96년에는 <학생사회주의자 기간대오>, <사회주의학생연맹> 사건 등이 벌어졌고, 97년과 98년에도 <전국학생연대>, <북부노동자회>, <관악노동청년회> 등 많은 단체들이 국보법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통일운동세력과는 무관한 단체들이었다. 심지어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국제사회주의자(IS)> 역시 90년대 내내 주기적인 탄압에 시달렸다.
때문에 제도적 틀 안에서, 공개적인 운동에서 사회주의는 공공연하게 선동될 수 없었다. 사실상 2000년대 초까지 운동진영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은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들의 불법 출판물 외에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2003년 노무현 정권의 등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1년 내부문건과 교육자료가 문제가 되어 기소된 좌파 성향의 의료운동 단체 <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연합(진보의련)> 사건같은 예외가 있긴 했지만 친북단체가 아니면 탄압 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점차 공유되기 시작했다. (<진보의련> 사건도 결국 2007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와 함께 비합법 사회주의 그룹들이 합법주의 세력이라고 비판하던 정치단체들 역시 점차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혁명적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비공개활동을 하던 활동가 단체들도 공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대중의 지지로부터 생겨나는 자유가 아닌 자유주의자들의 관용에 의한 불안정한 자유였다. 정치적 자유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은 갈수록 왜소해졌다. 과거 십여 년 간 지배계급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암묵적인 관용을 베풀어온 것은 사실 사회주의 운동이 현실에 영향을 줄 만한 세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용에 의한 자유조차도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함께 박탈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동시에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계속 축소되고 있던 일선 공안기관들이 일제히 활발한 활동에 나섰다. 운동단체들이 자주 이용하는 인쇄소와 대학교 주변 사회과학 서점에 대한 사찰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어진 촛불투쟁 국면에서 공권력의 전방위적인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결국 촛불투쟁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지난 2008년 8월 <사노련> 사건이 벌어졌다.


탄압에 대한 대응원칙의 재확인 필요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간 비교적 자유로웠던 활동은 활동가들로 하여금 공개 활동의 자유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도록 만든 듯하다. 필자가 만난 모 활동가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과거 비공개 활동 시절의 원칙들이 이제는 아무 소용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공개성이라는 미명아래 기본적인 자기방어를 포기하는 것이다.
정보기술이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때문에 생기는 빈틈도 있다. 과거 사건들의 경우 공안기관들은 미행과 도감청 등 물리적인 감시행위를 주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최근 몇몇 사건에서 드러나는 현상은 공안기관의 감시 방식이 미행, 도감청 등 직접 발품을 파는 방식에서 휴대폰, 인터넷 감시 등으로 무게중심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공안기관이 그것만으로 충분히 필요한 신상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정보를 주의해서 관리한다면 공안기관에 의해 불시에 체포·연행되는 일은 어느 정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미행과 도·감청은 충분히 주의할 경우 사전에 감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권력의 추적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다면 침탈로 인한 타격을 축소하고 사건에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된다. 물론 국가권력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공권력의 수사를 보다 힘들게 만드는 것은 운동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운동진영은 공권력의 탄압에 대한 자기 방어와 수사에 대한 대응을 위헤 많은 원칙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이 지나치게 경직되고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다. 오히려 일부 단체의 지도부는 조직원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공개활동 영역의 폭이 크게 늘어나면서 보안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 예를 들어 가명 사용, 미행에 대한 체크 등을 쓸모없는 일이라고 노골적으로 비웃고, 공권력의 수사를 먼 나라 이야기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만연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공권력의 탄압에 대한 올바른 대응으로 보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벌어졌지만 이런 문제가 공개적으로 평가가 되는 자리는 없었다.
또한 경찰이나 검찰 등 수사기관과 사상·이론 논쟁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오래 전에 합의된 지점이다. 그러나 근래들어 사건의 쟁점을 가지고 경찰이나 검사와 논쟁이나 토론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활동가들도 간혹 눈에 띤다. 이것이 그저 풍문일 뿐이라면 다행이지만 사실이라면 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사에 대한 대응문제를 두고 2009년 <사노련>과 <다함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이러한 이유로 반드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정치적 문제를 경찰 수사에 대한 대처와 함께 묶어서 제기한 <다함께>의 제기 방식은 오히려 논점을 흐린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당시 <다함께>가 수사 대응에 대해서 문제제기한 원칙은 그 맥락과 상관없이 모두 옳은 말이었고 여전히 다시 확인되어야할 지점들이다.
당시 <다함께>가 주요하게 제기한 문제는 수사에 대한 협조 거부와 묵비 문제였다. 수사에 대한 협조 거부란 경찰의 출두요구와 수사과정에 협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노련> 사건에서 갑작스러운 체포·연행으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 경찰의 압수물품 봉인해제 요구에 응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고 당사자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경찰의 압수물품 봉인해제 요구에 거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태도이다. 하지만 경찰의 출두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 같다. 노동현장의 활동가들은 경찰의 소환요구에 대해 최대한 거부하다가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치·시민단체에 활동가들이 오히려 별 생각없이 그냥 출두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물론 무조건 경찰의 소환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운동적인 판단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사회주의 운동을 한다는 활동가들이 별 고민 없이 자의적인 판단으로 경찰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출두 문제에 대한 대응은 운동단체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직업적인 운동가들,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구속·수배·체포·연행을 일상적으로 각오하고 활동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최근 들어 경찰은 ‘피내사자’라는 법에도 없는 이상한 말을 만들어서 출두요구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형사법상 ‘피의자’가 아닌 이상 경찰의 출두요구에 응할 법적 의무가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운동진영에서 원칙을 세우고 단호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시민으로서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또 하나 주요하게 제기된 논점 중 하나는 ‘묵비’에 대한 문제였다. 수사기관의 소환요구에 불가피하게 응할 경우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바로 묵비의 원칙이다.
<다함께>는 묵비를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사노련>은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묵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운동사회에서 묵비란 <다함께>의 주장처럼 적당히 둘러대거나 핵심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진술을 거부하는 것, 묵비권의 사용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즉, 묵비란 현재 남한과 같이 진술거부권이 법제도적으로 보장된 국가에서는 수사기관의 모든 질문에 대해 진술거부권을 사용하는 것이다.
현재 남한보타 훨씬 엄혹한 상황이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묵비를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1903년 2차 당대회에서 경찰의 심문에 대해 어떤 증언도 거부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다함께>의 지적대로 이런 원칙은 러시아 반정부 운동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둘러대는 행위, 수사관과의 대화는 오히려 더 큰 해악을 낳았다는 점을 반정부 투쟁과정에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남한의 운동경험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비합법 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은 조직을 지키려는 의지가 과도한 나머지, 오히려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를 행사하는데 소홀했다. 하지만 진술거부권을 사용하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더 사건이 커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대충 둘러대는 것은 오히려 항상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대공분실 등 수사기관에 끌려가 수사를 받는 사람은 외부와 소통이 끊어진 고립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 속에서 여러 가지 편의적인 판단을 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장 수사관의 추궁을 모면해보려고 이것저것 둘러대다 보면 말꼬리를 잡혀 더욱 집요한 추궁을 당하게 될 뿐이다.
더욱이 여러 명이 함께 체포되어 조사를 받을 경우 누가 잡혔는지도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격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진술한 말이 꼬투리가 되어 결국 더 많은 것을 진술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므로 한번 말문을 떼기 시작하면 더 큰 곤란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가 제정 러시아나 군사독재 시절에나 유효한 낡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한 공권력 종사자가 했던 충고를 되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직검사로 재직하며 “수사 받는 법”이란 칼럼을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다 옷을 벗게 된 금태섭 씨는 “유리한 주장 하려 하다보면 자칫 함정에 빠진다”며 “피의자에게 아무 것도 하지마라”고 권고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억울함을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설사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유리한 점을 찾아내서 수사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파멸로 이끄는 길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 공개가 원칙인 재판과는 달리 수사를 받는 피의자는 충분한 정보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야 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하면 상처를 입는다. 가만히 있으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다. 더구나 수사기관에는 피의자에게 유리한 사실까지 찾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는 것만은 피하라. 상황을 파악한 이후에도 수사에 대응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다. … 수사란 다른 사람이 과거에 저지른 행동을 밝혀내는 것이다. 신이 아닌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협조 없이 범죄를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검사나 경찰관은 피의자로부터 어떤 반응이라도 끌어내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한다. 여기에 반응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어떤 문명국에서도 피의자에게 수사에 협조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수사기관의 행동에 섣불리 대응하지 않고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피의자의 권리이며 이러한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현명하게 수사를 받는 제1의 원칙이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수사관과는 어떤 토론도, 어떤 대화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사상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수사과정이 아니라 법정에서 투쟁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수사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법적으로 보장된 진술거부권에 기초하여 오로지 묵비로 대응하는 것뿐이다.


활동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사회주의 운동의 본질은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다. 그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아무리 확장된다고 할지라도 사회주의 운동은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남한의 국보법은 그러한 점에서 가장 기형적이고 악랄한 형태의 제도일 뿐이다.
국보법과 같은 형태만 아닐 뿐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 역시 법제도적으로 반체제적 사상과 운동을 탄압을 할 수 있게끔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그래서 소위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조직에서도 가명을 사용하는 활동가들이 많다. 미국에서도 9·11 사태 이후 국토안보법이 통과되면서 반정부 활동의 여지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이번 <사노련> 유죄판결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국가기관의 무죄판결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 물론 무죄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구성이 폭로될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법정투쟁에서 무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운동이 실제로 체제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때, 국가기구는 이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그람시는 현직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즘 집권 이후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수감되었다.
지금 비록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 없음으로 인해 어느 정도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지만 과연 혁명적 시기, 사회적 불안과 혼란의 시기에도 그럴 것인가? 혁명적인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쉽게 연행되거나 체포된다면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그러한 시기에도 경찰의 소환요구에 응할 것인가?
촛불투쟁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적극적으로 결합하던 시민 중에도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국가기구의 탄압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방어수단이다.
하지만 오히려 소위 운동진영에서 수사에 대비하는 활동방식을 비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운동진영 내부의 이런 경향은 위험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과신으로 보인다. 이런 태도는 실제로 공권력의 탄압이 본격화되었을 때 지레 놀라 되려 활동이 크게 위축되는 역편향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자본의 세계화로 국민국가 내에서 정치적 합의 정도가 날로 떨어지고 있고, 점차 전쟁과 혁명의 시기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오늘날 민주주의적 자유는 갈수록 제약될 가능성이 높다. 활동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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