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재산을 국가가 거둬들이는 작업이 16년 만에 다시 시작된다. 그 첫 사정권에 휘문고와 풍문고의 뿌리인 친일파 민영휘의 무덤이 들어왔다. 강원도 춘천시 동면 장학리, 6만평 산자락에 왕릉처럼 자리 잡은 묘소다. 뉴탐사 취재진은 배기성 역사강사와 함께 이 묘를 직접 찾았다.
왕릉처럼 단장된 무덤
현장에 들어서자 거대한 신도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신도비는 고관대작의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이다. 비석에는 민영휘의 호를 딴 '하정부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정작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친일 행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선조의 벼슬 내력만 빼곡했고, 한일합방을 안타까워했다는 식의 문구만 남아 있었다.
봉분은 잘 손질돼 있었고 석물도 번듯했다. 묘로 오르는 길목에는 가축 사육 제한 구역 표지가 서 있었고, 큰 개 두 마리가 사납게 짖었다. 이 땅의 면적은 약 6만평이다. 개별 공시지가로 계산하면 시가가 34억원에 이른다. 등기부에는 권리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체납된 세금 탓에 여러 차례 압류된 흔적도 보였다.
휘문과 풍문, 그리고 8000억
민영휘는 1906년 휘문고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세웠다. 다섯 번째 첩 안유풍의 이름을 딴 학교가 지금의 풍문고다. 두 학교 이름에는 민영휘 부부의 흔적이 그대로 박혀 있다. 그는 1910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친일로 권력을 등에 업고 재산을 불렸다. 말년 재산은 오늘날 가치로 4800억~7800억원, 흔히 8000억원대로 불린다.
명성황후의 먼 친척으로 여흥 민씨 권력의 한복판에 있었다. 배기성 역사강사는 그를 가렴주구의 대명사로 짚었다. 평안도 관찰사 시절의 수탈이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의 한 불씨가 됐다는 것이다. 배 강사는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일화도 들려줬다. 옥에 갇힌 아들에게 곽 여사가 "평안 감사가 된 것보다 낫다"고 했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평안 감사, 곧 민영휘의 악명이 백성들 사이에 자자했다는 뜻이다. 배 강사는 "오로지 자기 영리 영달만을 위해 일평생을 살았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 정치인'으로 둔갑한 묘막
묘소 아래에는 무덤을 지키는 가옥이 따로 있다. 이름은 춘천 민성기 가옥, 민영휘의 증손자대 인물 이름을 땄다. 이 집은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돼 있다. 관리비도 예산으로 집행된다. 문제는 안내판이다. 안내판은 민영휘를 "조선 후기 관료이자 정치인"이라고만 적어놨다. 친일파라는 사실은 한 글자도 없다.
배 강사는 안내판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 사람은 친일파"라고 했다. 그는 "이런다고 친일 매국노 민영휘의 악행이 덮이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영문 안내문에도 친일 행적은 빠져 있었다. 두 학교를 두고는 "알고 보면 민영휘의 고등학생, 안유풍의 고등학생"이라고 표현했다.
환수 사정권에 든 6만평
친일재산 환수의 법적 절차가 다시 움직인다. 친일재산국가귀속법은 5월 7일 국회를 통과했다. 6월 2일 공포됐고, 6개월 뒤인 12월 2일 시행된다. 2010년 활동을 멈췄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16년 만에 부활한다. 환수 대상에는 친일재산은 물론, 이를 처분해 챙긴 대가까지 포함된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친일재산 환수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 다시 마련됐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12월 출범한다.
뉴탐사 취재진이 민영휘 묘를 찾은 날, 공교롭게도 법무부에서는 조사위 설립준비단 발족식이 열렸다. 취재진은 환수 법안을 대표발의한 김용만 의원실에도 이 묘소를 알렸다.
환수의 길은 등기를 들여다보면 보인다. 이 땅은 민영휘 한 사람이 아니라 법적 장자 민형식과 안유풍 소생인 민대식·민규식·민천식의 이름으로 사정됐다. 민형식은 민영휘의 자작을 물려받았고, 정부가 공식 인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그의 지분은 환수 대상이 된다. 민규식도 친일 행적이 있어 환수 가능성이 높다. 지분이 국가로 넘어가면 무덤 역시 파묘를 피하기 어렵다.
청주 상당산성에서는 이미 같은 일이 벌어졌다. 국가로 귀속된 땅에 묘를 쓸 수 없어 안유풍과 민대식, 민천식의 묘가 모두 파묘됐다. 충북인뉴스 김남균 기자가 이끄는 '친일청산 마적단'이 그 토지를 추적한 결과였다. 정작 민영휘 본인의 무덤만 춘천에 그대로 남아 있다.
민영휘 일가는 해방 뒤에도 힘을 잃지 않았다. 휘문과 풍문 학원 이사장직을 대물림했고, 증손자 민헌기는 서울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친일재산 환수에는 후손들이 줄곧 소송으로 맞서 왔다. 묘막의 문화재 지정과 안내판 표기를 손질할 권한은 강원도와 춘천시에 있다. 우상호 강원도지사와 육동한 춘천시장이 이를 어떻게 다룰지가 남은 변수다.
역사까지 손봤다는 가문
배 강사의 이야기는 무덤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흥 민씨 삼방파가 막대한 재력으로 역사 자체를 손봤다고 봤다. 인현왕후를 선, 장희빈을 악으로 새긴 대중의 기억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배 강사는 1980년대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을 그 통로로 지목하며 "완벽한 역사적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인현왕후가 바로 민영휘 가문의 선대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검증이 더 필요한 해석이다. 다만 그는 "민영휘만 보면 조선 후기를 통째로 말아먹은 집안"이라고 했다.
조사위는 12월 출범한다. 민영휘의 무덤은 아직 춘천 장학리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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