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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는 사회적 여성
- 명동성당 농성에 ‘중독’된 이유
김숙현 기자
2004-03-22 04:37:32
요즘 나의 생활은 직장과 명동성당, 이 두 곳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하고, 저녁 때(혹은 야근 후 밤에) 거의 매일 명동성당에 간다. 명동성당에는, 21일로 128일째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와 ‘연행동지 석방’을 외치며 농성을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왜 이주노동자 운동에 연대하는가?
처음에 나는 ‘투쟁과 밥’이라는, 일주일에 한번씩 이주노동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으로 연대를 표하는 모임에 친구들과 참여했다. 하나의 ‘조직’이라기보다는 정해진 요일에 원하는 사람 아무나 갈 수 있는 날 가는 약간 느슨한 모임이다. 어차피 음식을 준비하여 조리하는 것은 숙련된 몇몇 분들이 할 수밖에 없기에, 나와 친구들은 배식을 돕고 설거지를 하거나, 뒷정리에 함께 하거나, 혹은 밥만 얻어먹고 매일 저녁 명동성당 계단에서 갖는 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우리는 농성단의 이주노동자들과 얼굴을 익히기 시작했고, 수줍게 말을 걸고 인사를 나누었다.
지금 나는, ‘투쟁과 밥’에서 만난 사람들 몇몇과 함께 꾸린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모임은, ‘투쟁과 밥’보다 조금 더 강한 결합을 원하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이다. ‘활동’이라고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들은 소소하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화성보호소에 있는 굽타와 깨비, 헉을 면회 가는 사람도 있고, 회사에서 인터넷에 이주노동자들에 관한 글과 사진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농성단 홈페이지에 오른 글을 여기저기 퍼 나르기도 하고, 낮 시간에 농성장에 와서 농성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외부로 외출하는 사람들과 동행하며 보디가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와 밥을 함께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세탁물을 한 짐 지고 가서 빨래를 해다 주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에는, 한글 읽기/쓰기가 약한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낮 시간 활용이 가능한 몇몇 사람들이 한글교실을 열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와 차트까지 준비해 진행된 이 수업에, 농성단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도가 매우 높다고 한다. 진정한 연대란 주고받는 것인 법. 조만간 방글라데시/네팔의 문화, 언어 등을 배우는 교실 역시 생길 것 같다. 우리는 이것을 ‘프리스쿨’이라 부르기로 했다.
우리 모임에 속해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 중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현상이 꽤나 낯설었던, 우리 모임의 ‘적극분자’ 중 유일한 남자인 K씨가 며칠 전, 술자리에서 ‘왜일까?’라고 물음을 던졌다. 나는 예전에 친구들과 <불한당>이란 책을 만들 때, 인권운동사랑방 상근활동가인 배경내씨를 인터뷰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 인터뷰에서 소위 ‘부문운동’이라 불리는 분야 활동가 중에 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그리고 자문하기 시작했다. 왜 나는, 이토록 이주노동자 운동에 깊이 감정이입을 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것일까.
여성으로서 느끼는 ‘동병상련’
회사 때문에 주로 인터넷을 통해 활동하고 밤에 잠깐 명동성당에 들르는 내 경우, 주위에서 ‘수고한다, 힘들겠다’ 등의 반응을 받게 되면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나는 힘든 것을 참고 있는 게 아니라, 농성단에 가는 게 너무 즐거워서 가기 때문이다. 나뿐 아닐 것이다. 우리 모임 사람들이 항상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이야기가 “명동성당 농성단은 중독성이 너무 강하다”이니까.
그러나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해 나는 여전히 이론적이고 명확한 논리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가지곤 있지만 계급론이나 좌파 이론에 밝지 못하며, 뭔가 싸우고 직접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등의 운동 이론엔 문외한인 나로서는, ‘왜 나는 연대하는가?’라는 자문에도 그럴듯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이주노동자들이 불쌍해서? 연민을 느껴서?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처음에 머리에 떠올린 것은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 아닌, ‘동병상련’이라는 감성적 영역의 언어였다.
‘여성은 이 시대 마지막 흑인’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인종주의를 재빨리 몸으로 익힌(그것도 백인중심주의적, 사대주의적으로) 한국인들 중 한 명이긴 해도, 저 말에 사용된 ‘흑인’이라는 단어가 갖는 그 절절한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는 건 사실이다. 오히려 나에게는 ‘흑인은 이 시대 마지막 여성’이라고 표현해야 의미가 다가온다. 그건 아마도 내가 ‘여성’, 특히 ‘노동자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저 문장에서 사용된 ‘여성’이라는 단어가 생물학적 여성을 지칭한다기보다 ‘억압 받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을 가리키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다양한 다른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픈, 혹은 연대해야 한다는 나의 바람을 투영시킨다면 저 문장의 주어 ‘여성’의 자리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로 대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는 이 시대 마지막 여성, 장애인은 이 시대 마지막 여성, 혹은 이주노동자는 이 시대 마지막 여성.
이러한 ‘사회적 여성’들이 받는 고통과 억압은, 그 본질은 다를지라도 형태와 외양은 비슷하다. 혹은 형태와 외양이 다를지라도 그 본질은 비슷하다. 이들의 운동을 매도하고 왜곡하며, (합당한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는 언어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운동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의 논리에서, 혹은 ‘노동귀족’을 비판하는 논리에서, 장애인 운동에 무심한 사람들이 뱉는 무심한 말 한 마디에서, 동성애자를 희화화하는 표현들에서, 페미니스트들을 폄하하고 조롱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논리와 표현과 반응과 왜곡된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 중 특히 남성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는 성별의 측면에서, 국적의 측면에서, 우리의 기득권을 묘하게 교차하며 갈등지점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와 내가 똑같이 노동비자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주노동자가 원하는 것이 ‘물리적인’ 노동비자라면, 한국인 ‘여성’으로서 내가 원하는 것은 ‘상징적인’ 노동비자다. ‘상징적인’ 노동비자를 원하는 이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남성, 비자발적 실업자 남성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여기에 또다시 연대의 새로운 범위가 추가된다.
연대의 그물을 잇는 한 희망은 있다
지난 3.8 여성대회 집회 때, 이주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참여했던 건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이유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연행과 강제출국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집회에 참여하는 이주노동자들이 특히 열심히 참여하는 집회는 비정규직 노동자 집회다. 지난 14일 건설일용노조집회에서는 1시간 먼저 같은 장소에서 사전집회를 가진 후, 본 집회에 함께 하기도 했다. 책상 앞에서 생각만 하기론 가장 적대적인 관계일 것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일용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들이 그렇게 거리에서, 집회장에서 연대의 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주노동자 운동에 연대하는 한국인들 역시 비슷하다. 이주노동자들의 농성단 천막을, 그리고 연대주점을 찾아오며 가장 강하게 연대를 보이는 사람들 중 한 무리가 장애인이동권연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천막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여성이라는 사실, 이주노동자들의 천막에 함께 결합해 있는 단위엔 민주노총도, 또 각종 사회운동단체도 있지만 ‘불완전고용철폐연대’ 역시 있다는 사실.
이렇게,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여성들’은 비(非)여성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이에 씨줄과 날줄을 엮어 연대의 그물을 짜고 있다. 그렇다. 농성장을 방문하고 이주노동자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는 하나의 줄로 된 연대의 끈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끈이 길이가 길어질수록, 내가 알게 된 사실은 그것이 ‘한 줄의 끈’이 아니라 가로 세로가 복잡하게 얽힌 ‘그물’ 형태라는 것이다. 내가 감동과 기쁨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농성단 방문에 강하게 ‘중독’되어 버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마도 나와 비슷한 감동과 기쁨을 찾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희망’이란, 그렇게 우리를 찾아왔다. 아니,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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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철이(kikibar) http://cafe.naver.com/solidarity/152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에서의 탄핵을 접하면서 맨 처음 보일 수 있는 가장 즉자적 반응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대통령 탄핵을 결의한 국회와 정치인들에게 냉소 혹은 분노를 표시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반응이 보일 수 있는 정치적 입장은 '탄핵반대', '국회해산'이나 혹은 '민주수호'와 같은 슬로건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했다고 해서 국회를 해산하자'는 것과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는 그 동안의 국회에 대해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은 다르다. 만약 국회해산의 의지가 후자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대통령 노무현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탄핵도 옳고, 국회해산도 옳다고 외쳐야 하리라. 그러나 국회해산의 의지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사코 '노무현을 지지하기 위해서 탄핵반대를 외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고 그것이 현실화되어야 한다면 그들은 국회해산과 민생해결을 위한 일을 해야한다. 그러나 탄핵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은 의원직을 사퇴하자고 요란을 떨었다가 다시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선 이 땅 에 국회해산의 의지를 가진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탄핵사건이 점점 각 당의 정략적 이해에 따라 누가 총선에서 이득을 남길 것인가 하는 경주가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민주수호'는 정치인들의 정쟁에 적당한 명분을 얻기 위한 꼬리표에 불과하다. 만약 지금 내 말이 오해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국회를 해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길 바란다. '단지 노무현이 옳아서 탄핵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는 그 말이 진정이라면, 그렇다면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이 옳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탄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길 바란다. 탄핵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파탄 난 민생, 노무현 정권 하에서 저질러진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뿐만 아니라 각종 차별정책들을 폭로함으로써, 지금의 '탄핵반대'가 가리고 있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것이다. '탄핵반대'를 외치는 영화배우 문성근씨의 입에서 민주화 항쟁의 과정에서 숨졌던 열사의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그 이름은 거의 무의식중에 1987년 정도에서 멈춘다. 그는 노무현 정권 탄생이래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부안 주민들을 탄압했던 것은 노무현 정권이며, 장애인 이동권 요구를 묵살하는 것도 노무현 정권이며,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했던 농민들의 욕구에 맞선 것도 노무현 정권이며, 비정규직이라는 차별제도를 강행하는 정권도, 이라크 파병을 강행했던 것도 노무현 정권이다. 그런데도 '민주수호'를 위해 노무현 탄핵을 저지하자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민주수호'의 의미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결국 현재를 유지하자는 발상이고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는 할 게 별로 없다는 말로 들린다. 지금 그 '민주수호'라는 그 발상은 고통에 찬 사람들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구호에 불과하다. 나는 탄핵 사건이 있기 전 이주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접하고 그들의 투쟁에 조금이라도 함께 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농성장을 찾아가 일주일에 한번씩 밥을 지으며 이주노동자들과 만나고 있는 '투쟁과 밥' (http://bab.gg.gg)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투쟁과 밥'에 섞여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강제추방하고 보호소에 가두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자살하는 비극도 벌어졌다. 나는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를 생산하던 일부였던 이주노동자들이 자기 노동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이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는 마치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인의 일자리를 뺏는 것처럼 말하고 우리들에게 민족적, 인종적 편견까지 강요해왔다. 그러나 한편에서 노무현 정부는 올해 이주노동자 8만명을 더 받아 들여서 인력난에 허덕이는 기업주들에게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이런 사실은 최근 3월 27일자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정부가 기업주들을 위해 마음껏 부리다가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저임금 노동력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인력난이라고? 정부와 기업주들은 단순히 일반적인 노동력을 원하지 않는다. 마음껏 부리다가 마음대로 버려도 제대로 항변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 노동력을 원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는 시민들은 이런 이야기에 실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부는 해외로부터 값싼 노동력을 들여오기 위해 그동안 산업연수원 제도라는 편법을 이용해왔다. 해외로부터 들어온 이들 노동자들은 알다시피 노동자도 아니고 학생 신분으로써 자기 노동과 그 결과에 대한 어떤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이들 노동자들이 저항하자 정부는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여 강제추방을 단행하고, 산업연수생제도와 병행한 고용허가제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고용허가제는 노동자로서의 신분은 인정하되 여전히 체류기간을 3년으로 한정하고 있으며 더구나 사업장 이동의 자유조차 인정하고 있지 않다.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사업주의 어떤 부당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류기간 3년이라는 것은 이주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하고 단결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기 위한 시간제한이다. 노동자로 인정은 하지만 근로기준법이나 노동3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고용허가제라는 이상한 법안이다. 정부는 근로기준법도 지키지 않는 사업주의 자유만을 확대하고, 노동3권을 철저히 부정하며 불법 행위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관심은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저임금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유입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라면 이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처럼 노예노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노예노동에 대해 정부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너무나 쉽게 합리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타민족에게 국한되어지는 폭력이 아니다(타민족에 행해지는 폭력 그 자체도 문제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오늘날 비정규직과 같은 다양한 고용형태의 편법이 동원되면서 이런 노예노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명동의 이주노동자 농성단 투쟁이 100일이 훨씬 넘었을 때 바로 탄핵 사건이 일어났다.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된 나로서는 이 탄핵 사건에 대해 별 할 말이 없다. 분노도 냉소도 없다. '탄핵반대'와 '민주수호'라는 구호는 내게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하고 공허할 뿐이다. 지난 3월 21일부터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단 근처에는 서총련 소속인지 뭔지 하는 단체가 따로 농성을 시작했다. 탄핵반대, 국회해산, 민주수호 등과 같은 구호를 내걸고 말이다. 물론 이들은 바로 옆에서 130일이 지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수호하고자 탄핵 반대에 나서는 것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최근에 이주노동자들의 강제추방에 반대하고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동감하는 사람들과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http://cafe.naver.com/solidarity)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거창한 단체들의 사람도 아니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헌신했던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에는 문제가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노예노동이 일반화시키는 체제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작은 힘이나마 모아서 뭔가를 해야 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공교롭게도 이런 고민은 탄핵정국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 모임을 만들고자 고민했던 사람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탄핵정국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적어도 이주노동자들에게 있어 탄핵정국은 현실적 문제들을 회피하고 저항을 잠재우기 위한 가상의 스크린이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와 절규, 농민들의 저항, 파병반대와 반전의 요구, 부안 주민들의 투쟁에 직면했던 이 체제는 위기를 돌파할 수단으로 탄핵을 이용하고 있다. 탄핵 사태는 기존의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며 사회적 의제를 조작할 기회를 주었다. 정치인들은 재빨리 미디어를 동원하여 정권에 대한 지지나 체제에 대한 승인으로 다중들의 자율을 향한 열망들을 포섭하고 있는 셈이다. 탄핵을 둘러싼 그 모든 잡음은 이주노동자들과 같은 현실의 문제를 가리는 가상의 스크린이다. 이것을 깰 수 있는 것은 탄핵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과 사회적 '연대'다. 장담하건대 당신이 탄핵 사태 이전에 현실의 어떤 문제와 소통하고 있었다면 당신은 탄핵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제안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주노동자 문제가 아니어도 좋다. 탄핵이라는 스크린을 외면하고 현실의 분노와 고통과 손을 잡으라고 말이다. 탄핵을 둘러싼 그 모든 말들에 과연 진지한 '소통'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거기에 쏟아지는 말들은 그저 소통이라고 착각하며 내뱉는 가상적 의제에 대한 가상 회의에 불과하다. 어쩌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태에 개입하는 방식은 권력을 누가 잡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우리들의 열망과 욕구들 사이에 어떻게 집단적 협력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반미 촛불시위, 파병 반대 반전집회, 부안주민들의 투쟁, 농민들의 투쟁, 그리고 이주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들은 모두 우리의 열망과 욕구들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열망들은 아직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스크린 속에 있는 은밀한 권력욕망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한 열망들 사이에서 소통해야 하며 협력을 구축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야 한다.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은 어떤 단체나 소속이 아닌 개인의 자발적 결정에 의해 참여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 연대 모임이다. 나는 연대를 위해서는 이런 분자(分子)적인 움직임들의 활성화와 노동, 생태, 여성 등을 가로지르는 횡적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탄핵이라고 하는 가상의 스크린에서 벗어나는 길, 그것은 소통을 위해 분자적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모임이라도 좋다. 이주노동자들의 문제와 소통하는 모임이 아니어도 좋다. 문제가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자! 이것이 정치판의 정치학에 저항하는 우리의 정치학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다른세상을 여는 사람들의 총선이야기 'another0415'에 게재되었음. http://www.another0415.net http://www.another0415.net/bbs/view.php?code=poverty&id=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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