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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히드를 돕는가?
2003년 겨울부터 2004년 겨울의 끝 무렵까지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농성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1년이 넘는 투쟁을 해왔던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을 접었을 때 그들이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지쳐버린 몸을 뉘일 방 한 칸도 없었고, 당장 생활을 이어나갈 돈도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정부로부터 어떤 호의적인 조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빈털터리인 채 한국 사회 속으로 다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농성을 정리하려고 어수선하던 그때 자히드가 붙잡혀 강제출국 조치를 당했습니다. 자히드는 2003년 겨울 농성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명동성당 들머리를 지키고 있었던 노동자입니다. 자기 의지로 투쟁을 시작했고 자기 의지로 농성투쟁을 정리하고자 했지만, 그는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것으로 우리-이주노동자 투쟁에 관심을 가졌던 한국 사람들-와 자히드의 관계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자히드는 곧 기억 속에서만 만나는 인물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였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사회 속에서 숨어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말합니다. 귀향은 서글프게도 우리 한국 사람이 전통적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오만하게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도 없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자히드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한국에서 불의에 맞서 투쟁했던 대가를 고향에서 치르는 중입니다. 한국에 돈벌러간 아들을 믿고 빚더미에 앉은 가족-당연하게도 자히드는 농성투쟁을 하는 동안 자기가 모았던 돈을 다 썼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임금상황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난 부채, 빚쟁이들의 협박, 곱지 않는 이웃의 시선들이 그를 옥죄고 있는 것입니다. ‘말해요, 찬드라’가 생각납니다. 찬드라는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오늘 자히드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아니면 저기 어디에선가 삶이 계속되듯이 고통, 불안, 회한, 가난, 질병도 계속 됩니다. 자히드는 여전히 투쟁 중입니다. 고통, 불안, 회한, 가난, 질병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당면한 현실입니다. 특히 자히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현실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가 한국에서의 투쟁을 반성하고, 후회하고, 자아비판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가 자기기만, 자기부정의 혼란 속에서 살아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들이 우리를 다시 자히드와 연결시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자히드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생각입니다.
왜 ‘자히드’인가? 농성투쟁을 하다가 강제출국 당한 노동자가 자히드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심으로는 그런 이주노동자 모두를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자히드를 지원하는 것이 귀향한 노동자와 연대하는 아주 작은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원하는 움직임이 한국사회에서 아주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히드와 같은 당면 문제를 ‘개인의 문제’나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공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히드가 당면한 문제가 정말 사
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삶의 사적 영역에서 고통 받고, 그것과 분리된 공적인 다른 영역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운동을 하거나 투쟁을 해야 하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외부에 있는 어떤 누군가의 초월적 지상 명령 때문에 우리가 투쟁을 한다고 상상하고 있는 겁니까? 고통은 사적이지 않을 뿐더러, 사적인 것과 무관한 공적 목적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회피하는 공적 목적이란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동안 ‘사적인 것’이라 치부하고 밀쳐두었던 그 말을 끌어내고, 그 말을 듣는 능력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보내며, 연대를 하는 모임이나 활동들이 더욱 다양해지고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귀향한 이주노동자와 연대하는 것도 그런 활동 중의 하나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말을 잃은 귀향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합시다. 그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모아 줍시다.
http://www.stopcrackdown.net
*** 자히드 돕기 모금은 '이주노동자 합법화 모임' 통장으로 해주세요
국민은행 843101-04-026848 임윤희
1. 멸치는 중간정도의 크기로 준비해 잡티를 제거한다.
2. 풋고추는 작은 것으로 준비하고 크면 가로로 반자른다.
3. 후라이팬에 멸치를 넣고 먼저 볶아 놓는다.
4. 물, 마늘, 생강, 간장, 설탕, 물엿을 약간을 넣어 조림장을 만든다.
5. 조림장을 끓이다가 볶아놓은 멸치를 넣어 함께 볶는다.
6. 마지막으로 풋고추를 넣고 볶은 후 통깨와 참기름으로 마무리 한다.
모피반대 누드시위에 대한 단상
어제 명동거리에서 두 미국 여인의 누드시위가 있었는데
몇분만에 경찰에 잡혀갔다고 한다. 엄청난 기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역시나 초점은 '둘이 벗었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번 시위로 내가 가진 옷들중에 동물의 가죽이나 털이 들어간 것들이 없는지
곰곰히 살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약 15년 전에는 오리털잠바, 일명 덕다운이 한반도를 쓸고 갔었다.
그때 난 중학생이었는데, 대학생인 언니만 오리털잠바를 사준다고
심하게 삐졌던 일이 기억난다. 오리털의 인기는 무스탕의 등극으로 사그라들었고,
무스탕 역시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경제 거품이 빠지면서,
무겁고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지금도 장롱에는 그떄 싯가로 20만원 했던 무스탕이 애물단지처럼 쳐박혀 있다.
이제는 무겁고 부담스러워서라기보다는 소가죽을 두른다는 심리적 부담이
나를 더 압박한다.
비록 오리털과 무스탕을 안 입어도,
따져보니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나에게 아직도 많다.
우선 세무재질로 된 지갑이 그렇고, 저번에 산 구두도 합성피혁이 아닌
진짜 가죽이다. 매일 입다시피 하는 오버코트모자에 프릴장식으로 달린 털도
만져보니 느낌이 아무래도 진짜 동물털이다. 집 난방이 부실하다보니
영하 5도 밑으로 떨어지면 늘 입게되는 따뜻한 앙고라 스웨터도 토끼털 아닌가!
앗 또 생각해보니, 내가 그렇게 아끼는 5년이 훌쩍 넘은 손때 묻은 가방도 가죽가방이다.
"가죽은 오래가고 오래 쓸수록 정이 든다"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일부러 손때 묻히고 정을 들여왔던 건데,
생각해보니 동물을 죽여 그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치면, 일반 모피코트와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동물의 고기를 먹고 가죽을 이용하는 것을 그만두어야할까?
이런 질문을 하면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가 있다.
어떻게 고기를 먹고 어떻게 가죽을 이용하는가에 대한 맥락과 상황에 대한 고찰이 빠지기 된다는 것.
대대로 그 자기가 사는 고장의 자연과 공존하며 그 균형을 지키며 살아온 농민이
집안에 경사가 생겨서 기르던 씨암탉 한 마리를 잡아 손님에게 대접하는 풍습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다. 고원의 칼바람을 막기 위해 기르던 소나 말의 가죽으로
천막을 짓고 옷을 해 입는 유목민의 문화를 비판할 생각도 없다.
문제는 가죽과 고기가 상품으로 난무하는 이 소비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과의 균형을 파괴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체계적인 도살과 살육인 것일 터.
싯가 200-300백만원을 훌쩍 넘는 모피코트를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밍크 백 마리를 죽이는 짓은
정말이지 "돈지랄"에 의한 대대적 살육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게다가 가죽을 깨끗하게 벗겨내기 위해서 동물들을 살해하는 방법이 매우 잔혹할 뿐만 아니라,
가죽이나 모피를 위해 키워지는 동물은 학대하면 학대할수록 그 모피가 부드럽고 고가라고 하니
이렇게 체계적인 살육과 고문시스템도 없을 것 같다.
할머니의 씨암탉은 그래도 살아있을 동안은 온 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자유를 누린 행복한 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잔치 때 돼지를 잡는 장면을 목격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살육의 공포에 대한 최초의 원형으로 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원형을 가슴속에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 소비주의 시대에 경이롭다고 해야 할 것은,
막상 소 잡고 닭 잡는 생생한 장면에 대해서는 경악하면서,
모두가 엄청난 양의 고기를 "오바"해서 먹고, 엄청난 양의 가죽을 "오바"해서 쓰고 있다.
살생과 비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사람을 넘어 동물에게까지 전이되는 이 상당히 의식화된 "인도주의"시대에
고기, 가죽, 모피에 대한 수요는 더욱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때로는 "동물보호"라는 말이 동물이 학대받고 무차별 학살되고 있는 현실을
교묘히 가리는 "휴머니즘"의 대명사처럼 들리기도 한다.
언론들에서 떠들어대는 "동물보호"는 서구인들과 중산층의 3세계에 대한 이중 잣대를 떠올리게 해서
느끼하고 낯간지러울 때가 많다.
늘 하는 생각이고 주장이지만,
동물보호는 "서브시스턴스"라고 하는 자급과 재생의 삶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부르주아 휴머니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필요"가 아닌 "잉여"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바라보자는 얘기다.
자본주의 생산, 소비 시스템이야 말로
본디 비폭력인 자연의 체제를 폭력의 체제로 치완하며, 동시에
그 폭력을 휴머니즘으로 위장하는 "의사비폭력"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폭력인 자연, 그 스스로의 균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것도 근본적으로 "보호"될 수 없다.
그나저나 나부터 진작 했어야 할 "채식주의"를 몸으로 한번 채득해보는
한해가 되어야 할텐데...ㅜㅜ
2004 12월 1일 새벽에
이주노동자 해단식이 끝나고 며칠 안되
자히드가 잡혀갔다.
술먹고 시비가 붙어 싸우다 경찰에게 잡혔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출입국으로 넘겨졌다.
빌우는 그의 블로그에 이주노동자 투쟁을 하며 조직을 더욱 환멸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가끔 이런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 문제들이 또 너무나 비인간적으로 해결될때마다
조직을 환멸하게 된다.
그도 사람이고 그래서 술을 마시고 성과없이 끝난 농성을 분노하고 슬퍼하며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나, 밥은 어떻게 먹고 지낼 것이며, 잠은 또 어떻게...하며
불안해 하는 연약한 인간일뿐이다.
(가끔 이주노동자 운동은 그들도 인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자명하지않을 수도 있는 것인양 "주장"해야 하는 모순을 숨기고 있다.)
연단에 올라가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큰 소리로 정부를 비판하고 언론을 질타하고 나서
밤이되면 동지들이 바람이 숭숭들어오는 천막에서 새우잠을 잘 시각에
혼자 깨어 술 마시고 돌아다니며 온갖 객기를 다 부리는
그저 보통의 술주정꾼이며 가끔 아주 사소한 말싸움에도 감정이 먼저 욱 해버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약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 사람을 경찰이 한번 잡아가고 출입국이 두번 잡아갔다.
대개 취객이라면 경찰서에서 하룻밤정도만 자고 나오면 될 것을
그는 10년의 청춘을 바친 코리아라는 고향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코리아의 경찰, 출입국, 정부가 한번 추방하고,
또 조직의 이미지를 위해 모두 함께 다 같이 소리높여 쉬쉬하는
그 놈의 조직이 한번 더 추방했다.
지금 코리아는 출산파업중... 캬 맞는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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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은 '여성노동권'이요, 얻은 것은 '법'이다?
신자유주의 저항 10년, 잃은 것과 얻은 것(2): 여성
이황현아(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미디어참세상
지난 10년 동안 이 땅의 여성들이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가? 먼저 얻은 것부터 열거해보자. 여성 관련법이 정비되어서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방지를 위한 3대 여성인권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이게 10년 동안 여성들이 얻어낸 가장 큰 성과물 아닐까? "정말 잘 됐어. 이제 감금되고, 불에 타 죽는 여성은 없어지게 됐다!" 3대 여성인권 관련법 가운데서도 특히 성매매 방지법이 제정되고 나서 내 주변 여성들이 한결같이 보였던 반응이다. 남자들의 반응은 글쎄, 별로 없었다.
남자들이라고 해서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방지법이 생기는데 좋지 않은 건 아닐 텐데 말이다. 하지만 여성인권 관련법이 만들어졌다고 좋아라 하는 남자는 보기 어려웠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여성인권을 남성들이 옹호하고 앞장서는 데 가부장적 시선에 주눅 들어있기 때문이다.
2001년 행정부에 여성부가 신설되었다. 그 이름도 거창한 "Ministry of Gender Equality". 그 뜻을 그대로 옮겨보면 "성평등 부"다. 무척 놀랍지 않은가? "Ministry of Women"이 아닌 것이. 정부는 1988년부터 정무장관 제2실에 여성분야 업무를 맡긴이래 급속도로 빨리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이끌어내고 여성정책을 만들어냈다. 여성들이 이제 더 이상 집에 갇혀 지낼 이유가 없다.
정부가 앞장 서 '여성발전기본법'(96년),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99년)도 만들고, '남녀고용평등법', '모성보호법'(2001년)도 개정했으니, 사회에서 여성이 불평등을 당할 일이 구조적으로 소멸된 것이다. 6개 부처(교육부, 농림부, 법무부, 보건복지부, 행정자치부, 노동부)에 여성정책 책임관제 설치는 김대중정부 여성정책의 하이라이트다. 이 즈음에서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남녀공동의 참여사회'를 일구기 위한 김대중정부에게 박수라도 쳐야하는 건 아닌가 싶다.
양성평등, 참여사회에서 공적영역에 여성진출 또한 빼놓을 수 화두다.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는 총선에 39명의 여성 국회의원이 당선되면서 섣부른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갑론을박하고 있다. 여성이면 다 되냐, 같은 여성이라도 자질을 물어야한다는 의견과 지금은 구분보다 연대가 더 중요하다는 의견으로 갈려 여성 내부의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국민의 정부를 뒤이은 참여정부의 여성정책은 어떨까? '건강가족법' 만들고, '출산안정법' 만들어 셋째 아이를 낳아 양육비를 국가에서 지급 받으라는 정부이니 오죽할까. 노무현정부가 내세운 '여성인력활용방안'이나 '가사와 직장의 양립을 위한 인프라 구축'은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을 적극 유도하는 것이지만,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이들 진출할 수 있는 여성 일자리는 서비스직 비정규직밖에는 없다. 하루 종일 웃고 있어야 하는 마네킹처럼 감정노동에 시달리며 가사노동의 연장선에서 식당 일이나 가사도우미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요즘은 온 종일 보살핌 노동을 주로 하는 간병인이 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 10년, 얻은 것은 '여성의 빈곤화'이자 '빈곤의 여성화'이다.
'여성비정규직의 증가'는 여성의 빈곤화와 빈곤의 여성화의 주된 내용이다.
신자유주의, 아이엠에프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효율성이 낮다는 이유로 여성노동자를 노동시장에서 퇴출시키고 비정규직으로 재고용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48%에 달하나 시간제, 임시직, 파견제 등 비정규노동이 여성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경제위기 이후 고용조정 과정에서 새로운 남녀차별이 나타났는데 이른바 '여성우선해고'였다.
기혼여성(맞벌이 여성, 사내커플, 출산휴가 중 여성), 장기근속여성, 비정규직 여성을 1차 해고 대상으로 삼았고, 정리해고 후 비정규직(시간제, 계약직, 아르바이트)으로 유도하고 강제로 무급휴가를 유도하여 퇴직하게 만드는 등 성차별적인 여성해고가 다반사로 일어났다. 그래서 오늘날 여성의 상태는 "여성가구주 가구 중 빈곤 가구는 IMF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이(40.3%-43.8%)를 보여 남성 가구주 가구(19.8%)의 두 배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한국의 여성정책 10년: 돌아보며, 내다보며, 한국여성단체연합 심포지움. 2004.6.1)
전문가들은 "고령화와 출산율 감소 등으로 노동가능인구가 크게 줄어드는 추세인데다 남성경제활동 참가율은 이미 90%를 웃돌아 향후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여성노동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이 말은 결국 여성인력 활용이 남녀평등 구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 제고 때문에 필요하다는 얘기다.
'가사노동과 직장생활의 양립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 여성들의 요구라기보다는 노동력 부족 위기에 직면한 자본의 목숨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노동시장에서의 남녀고용 차별 근절',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더 이상 여성들만의 요구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요구하는 유연안정화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인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만 한다. 동시에 양육 출산 보살핌 노동의 온전한 제공자로서 여성인력을 활용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정부의 여성정책이 갖는 근본적 한계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신자유주의 10년, 얻은 것은 여성노동자들의 정말로 끈질긴 투쟁이다.
신자유주의 아래서 여성은 가사노동과 양육의 부담과 노동시장에서 불안정한 위치로 항상적인 이중의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여성 임금은 남성의 65%, 비정규직노동자의 70%가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 임금의 53%, 여성 임시일용직이 70%인 상황으로 여성고용의 불안정과 여성의 빈곤화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시장에는 더욱 값싼 노동력을 선호하는 자본의 입장이 철저하게 관철되면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된 것이다.
실직 남성 대신 노동시장으로 유입된 여성가장은 가족임금, 즉 잘못된 '남성생계부양자모델'로 인해 왜곡된 임금구조 아래서 질식당했다. 은행에서 부부 취업노동자들 가운데 여성은 예외 없이 해고된 것처럼, 남성들은 가족을 책임지는 가족생계부양자이기 때문에 여성이 우선 해고 대상이 된다. 이것은 아이엠에프 이후 한국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통용되는 여성해고 사유다. 그러나 실제 기혼 여성은 다양한 생계부양적 임금노동을 해야만 생활을 유지해 갈 수 있다.
근로기준법이나 단체협약 상에서 모성보호조항(성희롱과 남녀차별을 금지하는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이 제정되고, 모성보호법이 개정되고 있는 한편으로, 2001년부터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여성근로기준법 개악 야간근로 및 휴일근로, 시간외근로, 위험유해업무로부터의 보호 조항 전면 삭제 시도들을 보라.)은 파기되었고 노동현장은 자본의 무법천지로 변했다. 산전 후 휴가도 ILO가 권고하는 12주-14주에 못 미치는 60일에 불과한데, 산전 후 건강진단 보험 적용이나 출산수당과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난망 할 뿐이다.
그 동안 여성노동자에 대한 노동시장에서의 차별적 제도와 관행에 대해 여성단체들의 비판과 운동을 통해 많은 법적, 제도적 개선을 이끌어 냈지만 여전히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 속에 고통 당하고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여성노동자를 우선 정리해고시키고, 이들을 임시직, 하청노동자 등의 주변부 인력으로 대체하였다.
현대자동차 식당아줌마 정리해고반대투쟁, 지하철, 철도 청소용역아줌마투쟁, 학습지교사, 골프장경기보조원, 보험모집인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의 투쟁, 서울대병원 간병인노조투쟁 등은 여성이 남성 고용을 위한 안전핀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여성고용이 여성의 모성을 비용으로만 인식하는 자본에 의해 기피되는 현실을 폭로하였다. 그리하여 여성해고 1순위에 맞선 여성노동자들의 신자유주의 반대 고용안정 투쟁을 개척해냈다.
또 하나 얻은 것은 여성들의 독자조직이다.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성노동자들이 당당한 주체가 되어 99년부터 엄청난 변화를 주도해냈다. 민주노총 전국여성노동조합연맹이 만들어지고, 전국여성노동조합과 서울여성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이다. 드디어 여성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이들 독자여성노조의 5년 여 활동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수년에 걸친 이들 노조의 활동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들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의 연대와 투쟁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잃은 것은 무엇인가?
한국사회는 여성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직장에서는 항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열악한 노동조건을 참아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가정에서는 양육 출산 보살핌 노동과 가사노동을 도맡아 해야하는 재생산노동의 전담자로,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인다. 가정 일도 직장생활도 다 잘해내는 슈퍼우먼이 되라.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 어느 것도 빵구를 내서는 안 된다고 한다. TV에서, 매스컴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에서도. 이쯤 되면 한국은 정말 여성들이 살기 싫은 나라가 될 것이다.
'출산파업'을 하는 나라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출산율의 원인을 폭로하면서 정부정책의 허구성을 알려나가야 한다. 지금 당장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출산율의 원인을 신자유주의 세계화 노동의 불안정화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여성노동권 쟁취와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를 요구하자.
신자유주의가 조장하는 '성차별,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맞서 '여성노동권 쟁취'와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를 위해 운동사회에서 '성폭력 반대 운동' 여성이 '조직의 주체'로, '정치의 주체'로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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