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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미즈의
서브시스턴스의 관점
O. Ressler의 비디오에서 발췌한 번역문
2005년 독일의 Cologne에서 녹화
저는 마리아 미즈라고 하고, 은퇴한 사회학 교수입니다. 파흐호흐 학교의 여기 사회교육대에서 1972년에부터 연구를 시작했었죠. 저는 또 여러 가지 사회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여성운동에서부터 시작해서 생태운동, 평화운동, 1997년 이후에는 반세계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죠.
먼저 우리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서브시스턴스 경제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란 저와 저의 두 친구인 클라우디아 폰 베르호프와 베로니카 벤홀트 톰슨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과 함께 1970년대에 이 이론을 함께 발전시켜 왔죠.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서브시스턴스 경제”가 아니라 “서브시스턴스 관점(perspective)”입니다. 즉, 구체적인 경제 모델이 아니라 새로운 지향성, 경제를 보는 새로운 접근법이죠.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서브시스턴스 관점은 단지 경제에 적용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 역사,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에도 다 적용이 되는 것이지요.
이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질문이 있는데, 도대체 ‘서브시스턴스’가 무슨 의미냐는 거예요. 저는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서브시스턴스란 바로 상품생산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이라고요. 상품생산은 자본주의 생산의 목표입니다. 모든 생산되는 물건들은 상품화를 거쳐야 하죠. 이는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브시스턴스 생산은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목표를 향해 있습니다. 즉, 인간의 욕구를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죠. 이것은 돈과 상품의 생산을 통해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직접 삶을 생산,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품의 생산”이 아닌 “삶의 생산”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서브시스턴스의 관점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여성의 가사노동문제를 다루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그때 전 세계적인 토론이 하나 진행되고 있었는데 각지의 페미니스트들이 참가했었죠. 주제는 “자본주의에서의 가사노동의 의미”였습니다. 즉, 가사노동은 왜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가, 왜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가, 왜 부불노동인가? 라는 문제였죠. 우리는 자본주의 하에서 가사노동은 지불될 수 없다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가사노동의 대가가 지불 된다면 자본주의의 축적모델은 붕괴하고 말테니까요. 더 이상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비용 상승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거죠. 모든 가사 노동에 임금을 지불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출산, 육아, 남성을 위한 재생산 노동, 각종 보살핌 노동 등. 만약 이런 것들이 정규직만큼 임금을 보장받는다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모델이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서브시스턴스의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개념인데, “삶의 생산” 이라고 불리는 이 서브시스턴스 노동은 모든 지불노동의 선결조건으로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장했어요. “서브시스턴스 노동이 없으면 모든 지불노동은 존재불가능하다. 하지만 지불노동이 없어도 서브시스턴스 노동은 여전히 존재한다.” 라고요. 음식, 집 등 살림에 관련된 노동들은 온갖 형태의 “삶”뿐만 아니라 노동 전체를 뒷받침하는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이 일들은 매우 가치 있지만 결코 금전적으로 보상받지 못하죠.
꼭 가사노동만이 비용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자급농들도 이와 비슷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도 시장에 물건을 내다팔지만 임금노동자는 아닙니다. 눈여겨 봐야할 것은 그들의 노동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국민 총생산(GNP)이나 국내 총생산(GDP)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뉴질랜드 여성인 마릴린 워링이 “만약 여성이 계산된다면(If Women Counted)”이란 책에서 쓴 표현처럼 그들은 계산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만약 여성이 계산된다면 어떨까요? 매우 흥미로운 책입니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자급농 또한 가사노동과 관련이 있고, 나아가 둘 다 식민지의 노동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셋이 모두 제3세계에 체류하면서 가지게 되었죠. 저는 수 년 동안 인도에 있었고, 제 두 친구는 남미에 있었어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오랜 기간 동안 식민지로 착취 받지 못했다면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만약 오늘날 “식민지”(저는 아직도 이들을 식민지라고 부릅니다)가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면 축적될 자본이 없어질 겁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식민지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남녀 관계도 식민지적이고, 자급농과 기업의 관계 또한 식민지적입니다. 거대도시와 시골의 관계 역시 식민지적 관계지요. 무엇보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서브시스턴스 관점과 서브시스턴스 사회와 경제는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의도적인 정책들을 통해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서브시스턴스 사회는 2차 세계대전 전에 시골과 도시를 가릴 것 없이 세계 전역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독일에서는 소농들이 전체 농산물의 대부분을 생산해서 사람들에게 공급했었죠. 또 놀랍게도 도시에도,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광범위한 서브시스턴스 생산물이 존재했었습니다. 어느 미국 페미니스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 주요 산업도시의 동네마다 상당량의 서브시스턴스 활동이 지속되고 있었다고 해요. 우선 이웃 간의 상호부조가 존재했습니다. 상호부조의 원리, 호혜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었어요. 이웃끼리 서로 도와가며 작은 텃밭에서 채소나 과일을 가꾸거나, 시장에서 싸게 사다 집집마다 저장해두었죠. 바느질이나 작은 규모의 수선 등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가난한 노동 계급에게 이런 상호부조가 없었다면 도시에서 살아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위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경제 모델을 이식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바로 포디즘입니다. 첫째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아졌고, 그 임금으로 살 수 있는 것들과 직접 만들어내는 것을 비교해 봤을 때 그 차이가 어마어마해졌죠.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 만드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또 농가들은 빚더미에 허덕이게 되고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농사짓고는 더 이상 못살겠다. 떠나야겠어.” 하며 농촌을 등졌어요. 오늘날까지 똑같은 정책이 이어지고 있죠. 뿐만 아니라 산업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농업 전체를 단일경작, 대량생산, 화학 비료와 농약, 거대 농기계 체제로 바꾸려는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석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이제 우유, 버터, 고기, 계란 등을 대량생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제는 여기저기에 거대한 기업농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들은 정부 보조금을 받아 잉여 농산물을 생산하고, 이 생산물들은 잘 알려진 대로 제3세계에 덤핑 판매됩니다.
반면 제3세계의 농민들에겐 이러한 기회는 전혀 주어져 있지 않죠. 더구나 똑같은 농업 정책이 “녹색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제3세계에도 이식되어 있습니다. 소농들은 기업농과 경쟁 상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빚더미를 짊어진 채 땅을 잃거나 팔아버릴 수 밖에 없었어요. 그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의 슬럼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슬럼가에서도 그들은 서브시스턴스 생산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죠. 우리가 서브시스턴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여기 이 Bielefeld 회의의 초점도 바로 제3세계에서의 서브시스턴스 생산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들의 슬럼가 사람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관찰하였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지만 붙여먹을 땅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해요. 일용직, 절도 등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거나 하인, 식모 일들도 서슴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들을 보호해줄 어떠한 사회 안전망도 존재하지 않죠. 서브시스턴스 생산이 농촌에서는 산업개발 정책에 대항하는 저항으로서 요구되었지만, 도시에서는 그 자체가 생존의 정치학이 된 것입니다.
지금 아주 적절하게 제게 질문을 해 주셨는데요, 그렇게 박탈당한 삶이 어떻게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공해줄 수 있냐는 것이죠? 좀 터무니없는 말로 들렸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생존방식과 생활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우리는 방금 전에 얘기했던 그 오래된 원칙들이 그들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상호부조하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합니다. 비록 아주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생산하는 주체성과 권리를 회복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보다 새롭고 긍정적인 관점임에 분명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발견이죠.
물론 현금이 필요합니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오직 돈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겁니다. 돈을 버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일 뿐이지요. 서브시스턴스 생산 또는 서브시스턴스 지향은 돈으로 사는 상품보다 훨씬 더 포괄적으로 우리의 욕구를 해결해줍니다. 사실 상품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오직 물질화된 죽은 노동뿐이지요. 그들은 사용되면 버려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면서도 영원히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이것은 가전제품의 기술혁신과 함께 갑니다. 흑백 TV만으로는 부족해서 컬러TV를 장만합니다. 그리고 나면 컴퓨터와 휴대폰이 필요해지지요. 이제는 아이들도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어요. 말하자면 끝이 없죠, 그렇다면 지금 행복하고 만족스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미국에서 좋은 삶(good life)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것은 오래된 경제 개념인데,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제활동의 목표로 설정한 바 있었죠. 경제활동의 목표는 좋은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일하고 또 일해도 좋은 삶은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해요. 그렇다면 좋은 삶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바로 그것이 서브시스턴스의 목표입니다. 서브시스턴스는 우리가 계속해서 세뇌되었듯이 빈곤이나 비참한 삶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서브시스턴스가 아니라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제대로 된 서브시스턴스라면 생존뿐만 아니라 보다 좋은 삶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좋은 삶이 실현가능해지죠.
우리 스스로가 권리의 주체이고, 남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자주적인 존재라는 것을 다들 인정하시겠죠? 이건 8시간 노동을 하고 돈을 받는 것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만족감을 줍니다. 마치 65살이 되면 좋은 삶이 올 것 같이 생각들을 하는데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지요. 많은 이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도 소외된 노동을 보상할 수 없어요. 반면 서브시스턴스 관점에서 보면 좋은 삶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몇몇 사례들을 여러분들께 말씀드리지요. 방글라데시에 있는 제 친구들에 대한 얘깁니다. 그들은 농촌에 침투해 들어온 다국적 기업에 대항하는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토양은 황폐화되고 물은 비소로 오염되었으며 수확량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거죠. 단일경작을 하게 되면 생산량이 엄청나게 증가한다는 것이 녹색 혁명의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죠. 먼저 여자들이 “나야크리쉬 안달론”이라는 새로운 농민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여자들은 녹색혁명과 함께 남자들이 자신들을 때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죠. 예전에 여자들이 종자 관리를 맡아 할 때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폭력이었어요. 그 전에는 종자가 여자들 손에서 관리되었고 농부들은 이들로부터 언제 씨를 뿌려야 좋을지 조언을 듣곤 했었어요. 상황을 인식하게 된 여자들은 단결해서 세상을 바꾸기로 했죠. 운동은 전적으로 여자들의 주도로 전개되어 나갔어요. 운동의 제 1 목표는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되찾는 것이었죠. “우리는 행복한 삶을 원한다!”는 거죠. 실제로 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농민들은 하나같이 오직 행복한 삶을 원한다고 얘기해요.
여성들이 내놓은 첫 번째 주장은 절대 다국적 기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을을 무독성 마을로 선언하고 어떤 다국적 기업도 독성물질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고 못을 박았죠. 아, 깜빡 잊을 뻔했는데, 많은 여성들이 삶을 비관해서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가 많이 있었죠. 오늘날 똑같은 원리들이 다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다시 새롭게 부활된 이 원리들로 인해, 산업국가의 자본 투입에 의존하지 않는 풍요롭고 생산적인 농업이 가능해진 것이죠.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재발견해냈습니다. 가령 다양성을 들 수 있죠. 그들은 단일경작을 지양하고 직접 만든 퇴비를 썼습니다. 또 서로 도우며, 더 이상 종자회사에서 종자를 구입하지 않았어요. 거의 대부분의 마을에 씨앗 창고가 있는데 이것도 여성들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되고, 여성들이 씨앗을 저장하고 보관하는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 다시 주권을 되찾게 되었어요. 이들은 전 세계 소농 연대 기구인 비아캄파시나가 주장하는 ‘영양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서브시스턴스는 이 영양주권과 함께 시작된다고 봅니다. 이런 운동이 방글라데시에서 아주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얘기한 것은 일례에 불과하지요.
여기 독일에서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서브시스턴스 관점의 예가 많이 있죠. 좀 잘 알려진 예를 들자면 “니더카우훙겐”이나 “롱고 마이”와 같은 공동체를 들 수 있는데, 이들 공동체는 벌써 오래전부터 서브시스턴스 라이프스타일을 견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또 가장 제 흥미를 끄는 것 중의 하나가 국제 공동 텃밭운동입니다. 이 텃밭들은 괴팅겐의 난민 여성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여성들로부터 괴팅겐에 텃밭을 만들게 된 계기를 들어보았는데요. 난민의 생활이 너무 불행하고 늘 자선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에 신물이 나 있던 중, 한 사회사업가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대요. 그들은 텃밭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어요. 곧 이들은 한 복음교회로부터 조그만 땅을 얻어서 함께 경작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땅을 분할해서 각자에게 배당하는 대신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 여성과 남성들이(남성들은 나중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해요) 함께 경작하는 공동 텃밭으로 운영을 하게 된 거죠. 그러는 동안 독일 여러 도시에서 벌써 7개의 국제 공동 텃밭이 생기게 되었어요. 퀠른에도 몇 개가 생겼죠.
오늘날 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을이나 도시 어딘가에 작은 서브시스턴스 섬을 세우고 거기에 만족할 수는 없어요. 세계화된 경제체제에서라면 우리도 전지국적인 시각을 견지해야만 하죠. 그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모든 경제활동의 중심에 개인의 이익과 효용을 두는 것)를 극복하고 그 대신 새로운 원리들, 가령, 상호부조, 호혜, 공동체의 연대감, 협동, 공유 등의 원리가 들어선다면 문제는 달라질 겁니다. 또 오늘날처럼 소비와 생산을 분리시키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질 거예요.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의 삶이 비록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더라도 당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비 모델을 벗어던지는 것은 정말 힘들지요.
또 한가지, 만약 우리가 서브시스턴스를 지향한다면 다른 종류의 기술이 필요해질 겁니다. 현재의 기술은 늘 소모적이고 쉽게 낡아버립니다. 기술 개발에 드는 스트레스 비용 또한 만만치 않죠. 또 현대기술은 결코 체제 중립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본주의에 편향되어 있어요. 물론 가부장적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우리는 기술에 대한 다른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상품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손쉽게 일을 하려면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공업사회와 획일화된 산업문화가 가장 생산적인 시스템이라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농업뿐 아니라 다른 모든 형태의 획일적인 문화에 두루 팽배해 있어요. 즉, 이런 종류의 일이 가장 생산적다, 저런 방식의 일이 가장 생산적이다, 서브시스턴스 생산은 완전 비생산적이다 등등의 신화 말입니다. 그래서 서브시스턴스 생산은 국민 총 생산 속에도 포함되지 않죠. 오직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것만이 생산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생각은 이미 잘 알려진 생산성 개념에도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너무 편협하기 때문에 노동과 서브시스턴스의 생산력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합니다.
동물, 식물, 인간 등 다양한 생물 간의 공생, 한 장소에서 서로 도우며 좋은 삶을 일구어가는 것. 이러한 삶은 아무리 많은 상품문화를 한 자리에 모아놓는다고 한다고 해도 결코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겁니다.
영문번역 - 리사 로젠블랫
한글번역 - 매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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